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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승처(八勝處)란 무엇인가?
팔해탈(八解脫)을 수행한 후 관상(觀想)에 숙달하여 자유자재로
정(淨)과 부정(不淨)의 경지를 관(觀)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승한 경지의 수승한 지견(知見)을 일으켜 의지할 곳이기 때문에
수승한 처소라고 한 것이다.
1.내유색상관외색소승처(內 有色 想, 觀 外 色少, 勝處)
내면에 색(色)을 가진 것을 생각하면서
밖에 색(色)이 적다는 수승한 부정관(不淨觀)의 지견(知見)을 닦는 경지이다.
2. 내유색상관외색다승처(內 有色 想, 觀 外 色多, 勝處)
내면에 색(色)을 가진 것을 생각하면서 밖에 색(色)이 많다는
수승한 부정관(不淨觀)의 지견(知見)을 닦는 경지이다.
3. 내무색상관외색소승처(內 無色 想, 觀 外 色少, 勝處)
내면에 색(色)을 갖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밖에 색(色)이 적다고 여기는
수승한 부정관(不淨觀)의 지견의 경지이다.
4. 내무색상관외색다승처(內 無色 想, 觀 外 色多, 勝處)
내면에 색(色)을 갖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밖에 색(色)이 많다고 여기는
수승한 부정관(不淨觀)의 지견(知見)을 닦는 경지이다.
5. 내무색상관외색청승처(內 無色 想, 觀 外 色靑, 勝處)
내면에 색(色)을 갖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밖의 색(色)이 모두
청색(靑色)이라고 여기는 수승한 지견(知見)을 닦는 경지이다.
6. 내무색상관외색황승처(內 無色 想, 觀 外 色黃, 勝處)
내면에 색(色)을 갖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밖의 색(色)이 모두
황색(黃色)이라고 여기는 수승한 지견(知見)을 닦는 경지이다.
7. 내무색상관외색적승처(內 無色 想, 觀 外 色赤, 勝處)
내면에 색(色)을 갖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밖의 색(色)이 모두
적색(赤色)이라고 여기는 수승한 지견(知見)을 닦는 경지이다.
8. 내무색상관외색백승처(內 無色 想, 觀 外 色白, 勝處)
내면에 색(色)을 갖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밖의 색(色)이 모두
백색(白色)이라고 여기는 수승한 지견(知見)을 닦는 경지이다.
여기서 색(色)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등으로 이루어진 색신(色身)을 말한다.
이를 구상(九想)으로 관하여 모든 탐욕(貪欲)과 애착(愛着)과 집착(執着)을
여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십변처(十遍處)인 일체처(一切處)를 닦아 나아간다.
일체처(一切處)란 청(靑), 황(黃), 적(赤), 백(白) 등과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 등을 말하며, 이것이 바로 나를 포함한 시방(十方)의 모든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로 두루두루 존재함을 관하는 것이다.
* 육신통(六神通), 삼명(三明), 팔해탈(八解脫)
육신통(六神通)과 삼명(三明)은 신통에 관한 것으로 흔히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합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이란 세 가지 지혜와 여섯 가지 신통력을 말합니다.
먼저 6신통(六神通)이란,
① 자유로이 원하는 곳에 나타날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
② 자기와 타인의 미래의 운명과 상태를 아는 천안통(天眼通),
③ 보통 사람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
④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
⑤ 자기와 타인의 과거세의 운명·상태를 아는 숙명통(宿命通),
⑥ 현세의 번뇌를 모두 끊고 깨달음에 이르는 누진통(漏盡通)을 말합니다.
위의 6신통 중에서 특히 중요시되는 것은 천안통, 숙명통, 누진통입니다.
이 세가지를 지혜에 비유하여 각각 천안명, 숙명명, 누진명으로 이를 3명(三明)이라고 합니다.
팔해탈(八解脫)이란 문헌에 따라 두가지로 설명합니다.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는 여덟 가지 길로
① 일념으로 생각하여 색욕(色欲)을 제거하고,
②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여 정신을 통일하고,
③ 탐심이 일어나지 못하게 다스려 냉철함을 유지하고,
④ 심신이 청정한 경지에 이르고,
⑤ 무한한 공간을 생각해 외계의 차별상을 없애고,
⑥ 마음의 작용이나 몸이 함께 무한한 경계에 이르며,
⑦ 공간이나 마음의 경계를 초월한 근원에 이르고,
⑧ 그 근원이 항시 현실에 나타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
또는 삼계의 번뇌를 여의고 그 속박을 해탈하는 여덟가지 선정으로
① 안에 색상(色想)의 탐심이 있는 것을 밖의 색을 관하여 해탈하는 것
② 안에 색상의 탐심이 없으나 밖의 색을 관하여 해탈하는 것
③ 깨끗한 해탈을 몸에 증득하여 구족히 머무는 것
④ 공무변처에서 해탈하는 것
⑤ 식무변처에서 해탈하는 것
⑥ 무소유처에서 해탈하는 것
⑦ 비상비비상처에서 해탈하는 것
⑧ 멸수상정을 몸에 증득하여 해탈하는 것을 말합니다.
참고로 신통이란 부처님의 지혜와 수행의 경지를 비유로 표현한 것이지 어떤 신비적인 초능력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입니다.
* 다른 자료를 검색하니 아래와 같은 자료가 나오네요. ^^
* 팔승처(八勝處)
다음은 팔승처(八勝處)이다.
① 안에 색의 상이 있고 바깥으로 조금의 색을 관찰하되 그것이 좋거나 보기 싫거나 간에 뛰어나게 알고 보는 것을 첫 번째 승처라고 한다.
② 안에 색의 상이 있고 바깥으로 많은 색을 관찰하되 그것이 좋거나 싫거나 간에 뛰어나게 보고 아는 것을 두 번째 승처라고 한다.
③ 안에 색의 상이 없고 바깥으로 약간의 색을 관찰하여 좋거나 보기 싫거나 간에 뛰어나게 보고 아는 것을 세 번째 승처라고 한다.
④ 안으로 색의 상이 없고 바깥으로 많은 색을 관찰하는데 좋거나 싫거나간에 뛰어나게 알고 보는 것을 네 번째 승처라고 한다.
⑤ 청승처(靑勝處),
⑥ 황승처(黃勝處),
⑦ 적승처(赤勝處),
⑧ 백승처(白勝處)이다.
관찰하는 마음을 잘 조절하여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않거나 뜻대로 타파할 수 있기 때문에 '뛰어난 곳(勝處)'이라고 한다. 만약 팔승처로 인하여 번뇌가 끊어지면 곧 허망한 오온, 십이처 등은 모두 멸하는 법임을 알게 된다. 이때 팔승처는 바뀌어 팔제입(八除入)이라고 부르게 된다.
첫 번째 승처는 다음과 같다. 수행자가 스스로 자기 몸을 관찰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만을 관찰하여 부정관인 구상(九想)관을 닦는 것은 반연하는 대상이 적기 때문에 '바깥으로 조금의 색을 관찰한다'고 한다. 바깥의 여러 색을 관찰할 때, 좋은 모습이 나타날 때는 '좋다'고 하고, 나쁜 모습이 나타날 때는 '싫다'고 한다. 싫증나고 싫어지는 깨끗하지 않은 색을 볼 때는 '싫음'이 되고, 기쁨이 일어날 정도의 빛나고 밝은 색을 볼 때는 '좋음'이 된다.
수행자가 싫은 것을 볼 때 그것이 헛되고 잠깐 빌린 모습임을 알아 성내지 않으며, 좋은 것을 볼 때는 그것이 여러 조건으로부터 생겨났음을 알아서 애착하거나 물들지 않는다. 이렇게 뜻대로 색을 관찰하여 바뀌고 달라짐이 자재로우면 이것을 '뛰어나게 알고 보는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 승처는 다음과 같다. 수행자가 관찰하는 마음이 이미 들어서 안으로 뼈만 있는 사람의 모습을 없애지 않은 채, 다시 선정 가운데서 널리 바깥 색을 관찰한다. 한 구의 시신으로부터 열, 백, 천, 만 구의 시신을 관찰하고, 나아가 한 마을, 한 나라, 한 세계에 온통 가득 찬 시신이 불룩하게 부풀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본다. 이렇게 구상관에 의지하여 마음으로 매우 싫어하게 된다.
다음에 백골관(白骨觀)을 닦는데, 뼈만 있는 사람 한 명으로부터 열 명, 백 명 나아가 한 세계에 가득 찬 사람에 이른다. 바깥의 뼈를 관찰함이 다 이루어지고 나면 다시 선정의 마음으로 안몸의 백골을 자세히 관찰하여 마치 흰 마노나 조가비같이 밝고 깨끗해지도록 단련한다. 이때 밖의 뼈만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마주하여 줄지어 오는 것을 본다. 수행자가 삼매 가운데서, 이 뼈만 있는 사람들은 다 생각을 따라서 오는 것이니 참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뼈만 남은 사람이 다시 모두 땅에 앉는 것을 보게 된다.
안의 뼈를 깊이 관찰하면 광명이 널리 비추어 모든 뼈만 있는 사람이 그 빛에 비춰지고, 또한 모두 밝고 맑게 된다. 이 백골관이 이루어질 때 온갖 원수진 사람이나 친한 사람, 모든 아름답거나 못난 것에 대하여 그 마음이 평등해져서 좋아하거나 성냄이 없으니, 이것을 '좋거나 보기 싫거나간에 뛰어나게 알고 본다'고 한다.
또 이 관에 머물러 뼈만 있는 사람이 사천하에 두루함을 보니 이것을 '많음'이라고 한다. 다시 생각을 거두어 뼈만 남은 한 사람을 관찰하기 때문에 '뛰어나게 알고 본다'고 이름한다. 다시 관찰하는 마음이 익숙해져서 비록 능히 관찰하는 마음에 성품이 없음을 알면서도 대상 가운데서 자재롭게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뛰어난 곳(勝處)'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다만 모든 사람을 관찰하여 깨끗하지 않은 흰 뼈를 보면 '적음'이라고 한다. 만일 대부정관(大不淨觀)을 행하면 이것을 '많음'이라고 한다. 대부정관은 모든 곳의 탐욕과 애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즉 날거나 달리는 모든 짐승의 무리를 관찰하여 구상관을 행하는 것이다.
다시 음식을 관찰하여 그것은 벌레나 똥과 같고, 옷이나 비단 천은 썩은 가죽과 살덩이와 같으며, 돈과 재물 금 은 보화는 독사나 살무사 같다고 본다. 이것은 모름지기 죽어서 변한 것을 사용하는 것이니 냄새나고 썩어서 깨끗하지 않은 것이다. 곡식은 죽은 벌레와 같고, 밭• 집• 마을은 모두 다 썩고 무너진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며, 나아가 백골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본다. 온갖 세간이 모두 다 깨끗하지 않으니 매우 싫어지고 근심스럽다.
수행자는 삼매 가운데서 이렇게 관찰하는 대로 보고 자재롭게 바꿀 수 있으니 능히 세간의 아름답고 추한 것,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탐욕과 근심 등의 번뇌를 깨뜨린다. 그러므로 '뛰어나게 알고 본다'고 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승처는 앞의 두 가지와 대체로 같으나, 안으로 색의 상이 없어진 것은 제2배사와 비슷하다.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 파란색, 노란색, 붉은 색, 흰색의 네 가지 승처는 다음과 같다.
수행자가 제3선에서 몸으로 증득하는 즐거움을 받아들이지 않고, 제4선에 들어갈 때에는 기억(念)과 지혜(慧)가 깨끗하여 네 가지 색이 더욱 밝게 빛난다. 마치 묘한 보배의 광명과 같아서 앞의 색보다 휠씬 뛰어나다.
또 동요하지 않는 지혜로 이 네 가지 색을 단련하여 적은 것을 많게 하고, 많은 것을 적게 하는 등 바꾸기를 자재롭게 한다. 보고 싶으면 볼 수 있고, 없애고자 하면 없어지므로 '뛰어난 곳'이라고 이름한다.
또 수행자가 이 뛰어난 색을 보고 번뇌를 아직 끊지 못하면 법을 아끼는 마음이 생겨난다. 지금 법을 아끼는 마음을 끊으면 곧 이 색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남을 알아서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이때 '배사'를 바꾸어 '승처'라고 부르게 된다.
* 구상(九想)
구상(九想)이란 ① 창상(脹想), ② 괴상(壞想), ④ 농란상(膿爛想), ⑤ 청어상(靑瘀想), ⑥ 담상( 想), ⑦ 산상(散想), ⑧ 골상(骨想), ⑨ 소상(燒想)을 말한다.
이 구상을 닦으면 능히 음욕을 부술 수 있다. 구상을 닦기 전에 먼저 죽음에 임박한 사람을 관찰한다. 그 사람은 애처롭고 간절하게 말하다가 한번 내쉰 숨이 돌아오지 않으면 사대(四大)가 흩어지고 육식(六識)이 끊어진다. 집안 사람들이 놀라고 서러워하며 쫓아가 돌아오게 하려 하지만 방도가 없다. "조금 전에 말하던 사람은 갑자기 어디로 갔는가• 생명이 있는 것은 죽음을 면치 못하니, 어찌 나만 홀로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죽는 모습을 상상한다. 일심의 삼매로 죽은 시체를 관찰하면 마음에 심히 놀라움과 두려움이 생겨 애착심을 부술 수가 있다. 근기가 예리한 사람은 마음을 집중하여 이런 생각만 하여도 구상 등의 법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근기가 둔한 사람이 이렇게 집중하여 상상하는 것만으로 성취하지 못하면 반드시 직접 죽은 시체를 보아야만 비로소 성취할 수 있다.
첫 번째 창상(脹想)은 다음과 같다. 수행자는 죽은 시신이 마치 바람을 가득 불어넣은 가죽주머니처럼 팽팽하게 불어나서 본래의 모습과 달라진 것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몸이 살아 있을 때는 자태와 용모가 곱고 아름다우며 보고 듣는 것이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사람들이 한번 보면 마음에 사랑스러움과 기쁨을 생기게 하였다. 지금은 다만 부풀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아 볼 수 없으니, 그 좋던 것들이 다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생각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옮겨 놓고 살펴보면 애착할 곳이 어디 있는가. 또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도 이러한 사실들을 면할 수 없다. 지금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사대는 자성이 없고 오음(五陰)은 모두 헛된 법으로서, 허망한 식에 이끌려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며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업을 따라왔다가 연이 다하면 흩어진다. 지금 이 한 덩어리 찬 고깃덩어리는 나무나 돌과 다를 게 없고, 이 가죽주머니는 참으로 지겹고 싫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탐하고 애착하여 온갖 악업을 짓겠는가• 일심의 삼매로 이와 같이 관찰하면 세간의 탐욕과 애착을 능히 제거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괴상(壞想)이란 다음과 같다. 수행자가 다시 죽은 시신이 바람에 불리고 햇볕에 쬐여 갈가리 찢긴 채 땅바닥에 놓여 있고, 썩은 물이 넘쳐 흘러 악취가 진동함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이 똥주머니요 냄새나는 자루인데 얇은 가죽으로 겉을 싼 것일 뿐이다. 오늘의 이런 모습은 본디 스스로 이런 법이니 내가 애착하는 것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또 나 자신을 살펴보아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이다. 일심의 삼매로 이와 같이 관찰하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된다.
세 번째로 혈도만상(血塗漫想)이란 다음과 같다. 시신은 이미 허물어져 곳곳에 고름과 피가 넘쳐 흐르며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군데도 깨끗한 곳이 없다. 냄새나고 더럽고 추하게 불어나서 가까이 할 수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친근하게 애착하던 사람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또 나 자신을 살펴보아도 이러한 법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일심의 삼매로 이와 같이 관찰하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네 번째로 농란상(膿爛想)이란 다음과 같다. 시일이 점차 지남에 따라 사신의 아홉 구명에서는 고름이 흘러나오고 구더기와 벌레들이 몸을 뒤덮는다. 곳곳이 문드러져 썩은 물이 뚝뚝 땅에 떨어지며 더러운 냄새가 더욱 진동한다. "아름답던 용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몸이나 그대의 몸은 모두 이런 것이구나." 일심의 삼매로 이와 같이 관찰하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다섯 번째로 청어상(靑瘀想)이란 다음과 같다. 시일이 더 지나면 시신에 누렇거나 붉은 어혈이 지고, 혹은 검거나 검푸르게 변하여 그 모습을 보면 놀라고 두려워진다. 냄새를 맡으면 가까이하거나 친해지기가 어려워 이렇게 생각한다. "두 뺨에 빛나던 아름다움과 얼굴의 광택은 잠깐 동안 피었다가 지는 봄꽃과 같은 것으로 본래 너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어찌하여 어리석게도 그 색에 속아 미혹했던가• 너의 몸과 내 몸은 모두 이러한 법이다." 일심의 삼매로 이와 같이 관찰하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여섯 번째로 담상(啖想)이란 다음과 같다. 죽은 시신이 새나 짐승에게 파헤쳐지거나 구더기가 갉아먹어 문드러지니 피부와 살이 벗겨 떨어지고 뼈마디가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난날에는 화려한 화장과 산뜻한 장식으로 위의가 단아했는데, 지금 보니 겉꾸밈을 빌려 자태를 헛되이 과장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곳에 본디 애착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이와 같은 생각으로 그 사랑하던 사람과 자기 자신을 관찰하여 일심의 삼매에 들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일곱 번째로 산상(散想)이란 다음과 같다. 세월이 점차 오래 지남에 따라 시신의 형체가 부숴져 흩어지고, 힘줄은 끊어지고 뼈는 분리되어 머리와 발이 엇갈려 가로지르고 있는 것을 보고는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애착하던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 내 몸을 생각해 보니 어찌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관찰하여 일심의 삼매에 들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여덟 번째로 골상(骨想)이란 다음과 같다. 피부와 살은 이미 다 없어지고 다만 백골만이 남아서 혹은 기름과 피로 더러워져 있거나 혹은 흰 마노나 조가비처럼 흰 것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은 부드럽고 따뜻하여 서로 닿으면 즐거웠는데, 지금 이 해골을 보니 기와나 돌과 다를 것이 없다. 보면 두렵고 닿으면 싫어지니 너의 뼈의 형상은 본디 이런 것이었구나. 나는 어찌 이다지도 우매하여 탐닉하고 또 탐닉하여 버리지 못하였던가." 스스로 내 몸을 생각해 보니 또한 이러한 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이 관찰하여 일심의 삼매에 들면 탐욕과 애착이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아홉 번째로 소상(燒想)이란 다음과 같다. 시신은 불에 태워지거나 매장된다. 불에 태워질 때에는 나무가 다 타서 불이 꺼지면 형체가 재나 흙과 같아지고, 매장하면 살이 썩고 뼈가 녹아서 마침내 마멸되어 버린다. "너는 평소에 목욕하고 향수를 뿌리며 꽃가루로 곱게 단장하여 보드랍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좌우를 돌아보며 아첨하여 사람들을 미혹케 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으니 마침내 어느 곳에 있는 것인가• 나와 너는 모두 이런 법이니 본디 이 몸은 없는 것이요 필경에도 이 몸은 없는 것이다. 그 동안의 헛된 속임수는 모두 망령된 마음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찰하여 일심의 삼매에 들면 탐욕과 애착은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
무릇 사람이 막 죽으려 할 때를 관찰해 보면, 동작과 언어가 잠깐 사이에 사라져서 문드러지고 무너지며 분산되어 각각 변해버리니 이것이 곧 무상(無常)이다. 만일 이 몸에 집착한다면 무상하게 무너질 때 어찌 괴롭지(苦) 않겠는가• 만일 무상함을 알아도 자재로울 수 없다면 이것은 곧 내가 아니다(無我). 몸의 부정함과 무상함을 알고, 몸은 괴로운 것이며 몸에는 내가 없다는 것을 알면 곧 세간의 모든 법은 즐겨 집착할 만한 것이 없게 된다.
음식이 입 안에 있으면 뇌에 있는 점액(腦涎)이 아래로 흘러 침과 화합하여 맛을 내며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만, 배에 들어가면 곧 똥이 되니 이 음식은 부정한 것이다. 몸이 이미 무상하여 순간마다 변하니, 이 때문에 세간의 즐거움을 염오하고 번뇌를 끊어야 할 것을 알아 마음에 안온한 적정을 얻으면 마음을 오로지 하여 도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된다.
* 팔배사(八背捨)
팔배사 이하부터 여섯 가지 법문은 모두 무너지지 않는 법(不壞法)에 속한다.
불괴법에는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관찰하는 선(觀禪)이고, 둘째는 단련하는 선(鍊禪)이며, 셋째는 훈숙하는 선(熏禪)이고, 넷째는 정교하게 가다듬는 선(修禪)이다.
팔배사•팔승처•십일체처의 세 가지 문은 모두 관선에 속하고, 구차제정은 언선이며, 사자분신삼매는 훈선이고, 초월삼매는 수선이다.
팔배사란 ① 내유색상외관색(內有色相外觀色), ② 내무색상외관색(內無色相外觀色), ③ 정배사신작증(淨背捨身作證), ④ 허공처(虛空處)배사, ⑤ 식처(識處)배사, ⑥ 불용처(不用處)배사, ⑦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배사, ⑧ 멸수상(滅受想)배사이다.
배사에서 '배(背)'란 정결한 오욕(五欲)을 등지는 것이고, '사(捨)'란 집착하는 마음을 떨쳐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사를 이루면 해탈을 얻는다.
욕계의 색• 성• 향• 미• 촉은 거칠고 피곤하게 하는 법인데 이 법에 탐착하여 삼악도에 빠지는 것을 깨끗하지 않은 오욕(不淨五欲)이라 하고, 욕계정•사선•사공정에 맛들여 집착을 내는 것을 깨끗한 오욕(淨潔五欲)이라고 한다. 이 배사법은 능히 정결한 오욕을 등지고 집착심을 떨쳐내는 것이다.
첫 번째 배사를 설명하겠다. 안팎의 색을 무너뜨리지 않고 안팎의 색의 모습이 소멸되지도 않은 채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마음(不淨心)으로 색을 관찰하는 것을 초배사(初背捨)라고 한다. 왜 그런가. 중생에게는 애행(愛行)과 견행(見行)의 두 가지 결박하고 부리는 번뇌가 있다. 애착이 많은 사람은 즐거움에 집착하여 대부분 밖의 번뇌에 속박되므로 바깥 몸이 부정하다고 관함을 닦아야 한다. 소견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자아가 있다는 견해(身見)에 집착하여 안의 번뇌에 묶이기 때문에 안몸이 부정하다고 관함을 닦아야 한다. 그러므로 배사관을 닦는 것이다.
번뇌는 대부분 안에서 먼저 일어나므로 안을 관찰한 뒤에 부정하다는 마음으로 밖을 관찰한다. 어떻게 안을 관찰하는가• 수행자가 몸을 단정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엄지발가락을 잘 관찰해 보면, 마치 콩과 같이 검게 불어나고 또 누에와 같은 모양으로 생각된다. 이런 모양이 되는 것을 보고 나서는 다시 생각이 불어나 아기배(梨豆)만해지고 또 계란만해진다. 이어서 모든 발가락과 발바닥까지 보고, 그리고 나서는 오른쪽 발도 이와 같이 관찰한다. 이어서 차례로 온몸을 두루 보는데 사지와 배와 등과 모든 마디와 모든 구멍에 이르기까지 곳곳이 불어나는 것을 본다. 머리에서부터 발에 이르고 발에서부터 머리에 이르며 온몸을 두루 관찰하는데, 다만 부르터서 불어난 것만을 보니 마음에 싫어함이 생긴다. 다음에 무너지는 모습을 본다. 썩어 문드러지고 피로 더럽혀지며 벌레와 고름이 흘러나오고, 배가 터져 모든 내장이 드러난다. 이와 함께 서른여섯 가지 부정물의 냄새나고 썩는 더러움을 보게 되면 마음에 싫어함이 생긴다. 그리하여 자기 몸을 보면 길가에 죽어 쓰러진 개와 다름이 없다.
밖으로 사랑하는 남녀의 몸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러면 사랑할 수도 즐거워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이 구상(九想)의 방법과 같으나 다만 산상(散想)과 소상(燒想)의 두 가지가 없다는 것이 다른 뿐이다.
이 관을 닦을 때에 욕계의 번뇌가 아직 다 그치지 않았다면 이 관에 오래 머물러 싫어하는 마음이 완전히 익게 하여 탐애심을 여의어야 한다. 그런 뒤에 더 나아가 백골관을 닦아야 한다. 일심으로 고요하고 안정하여 미간을 잘 관찰하면서 피부와 살이 찢어져서 열리는 것을 상상한다. 그러면 백골이 드러나는데 손톱크기만한 것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차차 마음을 위로 향하면서 살가죽을 열면 이마뼈가 보이고 머리카락 밑의 뼈가 보인다. 마침내 정수리뼈의 피부와 살을 벗겨내는데 이르면 해골이 완전히 드러난다.
다시 생각을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피부와 살을 모두 마음을 따라 벗겨내면서 자츰 발에 이른다. 그러면 단지 뼈만 남은 사람이 마디와 마디가 서로 이어져서 단정하게 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수행자가 이때 마음을 안정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이 뼈도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발가락뼈로 인하여 발뼈(足骨)가 지탱하고, 발뼈로 인하여 복사뼈(•骨)가 지탱하며, 복사뼈로 인하여 정강이뼈(•骨)가 지탱하고, 차례로 서로 의지하여 무릎뼈(•骨), 넓적다리뼈(•骨), 볼기뼈(•骨), 허리뼈(腰骨), 등뼈(脊骨), 갈비뼈(肋骨)에 이른다. 또한 등뼈로 인하여 위로는 목뼈(項骨)가 지탱되고 목뼈로 인하여 턱뼈( 骨)가 지탱되며 턱뼈로 인하여 치아가 지탱되고 그 위에 해골이 있게 된다. 또한 목뼈로 인하여 어깨뼈가 지탱되고 어깨뼈로 인하여 위팔뼈(臂骨) 아래팔뼈(腕骨) 손바닥뼈(掌骨) 손가락뼈(指骨)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계속하여 서로 의지하면서 360개의 뼈마디가 있다. 이들을 하나하나 잘 살펴 큰 것과 작은 것,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을 안다. 이 뼈들은 똑같이 서로 임시의 현상(假)에 의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니 이 가운데에는 주재하는 이도 없고 나도 없는데 어떻게 이곳에 자아가 있다는 견해(身見)가 생기겠는가.
들이쉬고 내어 쉬는 숨은 바람기운이지 몸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느낌(受)과 마음 내지 법을 관찰하면 모두 거짓된 것으로서 주재하는 이도 없고 자아도 없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관찰하고 나면 아견(我見)을 타파하고 오욕이 없어지게 된다. 이때에 다시 머리에서 발로, 발에서 머리로 몸을 따라 자세히 관찰하면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백골관(白骨觀)을 깊이 연마하면 힘줄과 뼈가 모두 다해 버려 뼈 빛이 흰 마노나 조가비와 같아진다.
이렇게 깊이 관찰하기를 쉬지 않으면 뼈 위에 흰 광채가 번쩍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양을 보고 나서 미간을 자세히 살펴보면, 또 빛나는 흰 광채가 모두 마음으로 향하는 것을 본다. 이때에 이 빛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다만 마음을 미간에 고정시킨다. 그리하여 아주 편안하게 뜻대로 마음이 머물 수 있으면 선근이 개발되어 미간에서 여덟 가지 색깔이 빛이 빙글빙글 돌아 나와 시방을 두루 비추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빛은 모두가 밝고 깨끗하다. 여덟 가지 빛이란 지(地)•수(水)•화(火)•풍(風)•청(靑)•황(黃)•적(赤)•백(白)색인데 이러한 색깔의 빛은 세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때는 마음이 안온하게 안정되어 기쁨과 즐거움이 한량없다.
다시 마음을 거두어 이마를 자세히 관찰하면서 마음을 대상 가운데 머물게 하면 또 여덟 가지 색의 빛이 돌면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을 안정하여 머리카락 밑동과 정수리, 두 귓구멍, 눈썹 뼈, 눈뼈, 코와 입, 치아, 턱뼈, 목 앞 뼈와 목 뒤 뼈 등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차례로 관찰하면 삼백육십 개의 모든 골절에서 빛이 돌면서 나옴을 볼 수 있다. 온몸에서 빛을 발하여 일체를 비추는데 그 빛은 모두 밝고 깨끗하다. 이때 수행자는 선정의 마음 가운데 희지(喜支)와 낙지(樂支) 등 다섯 가지 특징(五支)이 모두 갖추어지니, 이것을 초배사를 증득한 모습이라고 한다.
안으로는 뼈만 남은 사람의 모습이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안에 색의 모습이 있다'고 한다. 밖으로 여덟 가지 빛과 욕계의 부정한 경계를 보므로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마음(不淨心)으로 바깥 색을 관찰한다'고 한다. 수행자가 안팎의 깨끗하지 않은 색을 보기 때문에 욕계를 등지고 버리지만 마음으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여덟 가지 깨끗한 색을 보므로 초선은 무명에 덮여 있어 경계가 추하고 열등함을 아니 능히 버리고 마음이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정결한 오욕을 등지고(背)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捨)이라고 한다.
두 번째 배사는 안의 색상을 무너뜨려 없애고 바깥의 색상은 없애지 않은 채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바깥 색을 관찰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첫째 배사 가운데서 뼈만 남은 사람이 빛을 내는 것이 완전히 온몸에 퍼지면 수행자는 2선의 내정지(內淨支)에 들어가고자 하여 안의 뼈만 남은 사람을 무너뜨려 없앤다. 그러나 여전히 바깥 백골의 깨끗하지 않은 모습을 관찰하기 때문에 부정심으로 바깥 색을 관찰한다고 한다.
수행자는 초배사가 깊어졌을 때(後心), 각(覺)과 관(觀)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안몸의 뼈만 남은 사람을 자세히 관찰한다. 그것은 알맹이가 없어 텅 빈 채 가설된 것이며 안과 밖이 비고 서로 통하니 오로지 무너져 흩어지고 닳아 없어지는 모습만을 취하여 관한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그 뼈대가 점점 썩어 문드러지고 부서져서 마치 먼지처럼 흩어져 허공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되니 안의 색은 보이지 않게 된다. 이때 다만 마음을 거두어 선정에 들어가 바깥의 광명과 부정한 대상에 반연하고 마음을 오로지 이 대상에만 두어 느낌과 관찰을 감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곧 안의 마음이 활연히 밝고 깨끗해지며 삼매에 바로 들어가 큰 기쁨이 함께 일어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여덟 가지 빛이 안의 깨끗함으로부터 나와서 시방을 밝게 비추는 것이 전보다 곱절로 뛰어나다.
이미 이 법을 증득했다면 곧 제2선이 헛되고 거짓되며 거칠고 열등함을 알아서 싫어하고 물리쳐서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배사라고 하며, 또한 무루(無漏)의 제2선이라고 한다.
세 번째는 정배사(淨背捨)를 몸으로 증득하는 것이다. 깨끗함을 반연하기 때문에 '깨끗함'이라 하고, 온몸으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몸으로 증득한다'고 한다. 왜 그런가• 수행자가 두 번째 배사의 후심에서 바깥의 부정함을 관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무너뜨려 남김이 없고, 또한 큰 기쁨이 용솟음치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지 마음을 거두어 찬란히 빛나는 여덟 색의 빛을 자세히 관찰하여 깊은 삼매에 들어간다. 이 여덟 가지 색을 단련하여 지극히 밝고 깨끗하게 하여 마음을 대상 가운데 머물면 곧 다 없어진 듯이 선정에 들어가며 즐거움도 함께 생겨난다. 여덟 가지 색의 빛은 맑고 밝고 깨끗하여 묘한 보배의 광명처럼 온 세계에 가득 찬다. 비추는 마음이 밝고 깨끗하면 즐거움이 점점 늘어나 몸 가운데 두루 가득하여 온몸이 기쁘게 된다. 이 법을 증득하고 나면 근본선을 버려서 마음으로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므로 깨끗함을 등져 버린다(淨背捨)고 하며 또한 무루의 제3선이라고도 한다.
네 번째 허공배사(虛空背捨)는 다음과 같다. 수행자가 욕계정 뒤에 이미 자기 몸의 피부와 살의 깨끗하지 않은 색을 없앤다. 초배사 다음에는 안몸의 백골의 색을 없애버리고, 제2배사 다음에는 바깥의 온갖 깨끗하지 않은 색을 물리쳐 오직 여덟 가지 깨끗한 색만 있게 된다. 제4선에 이르면 이 색은 모두 마음을 의지하여 머무르니 비유하면 허깨비의 색이 허깨비 마음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것과 같다. 만일 마음으로 색을 버리면 색은 곧 물러나 사라지고, 일심으로 공을 연하여 공과 서로 응한다. 그러면 곧 가없는 허공처에 들어가니 이것은 색을 사라지게 하는 방편이다.
수행자가 허공배사에 들어가려면 마땅히 먼저 공처정에 들어가서 색을 등져서 버리고 무색을 연하여야 한다. 여기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관법을 닦으면 곧 무색법도 무상하다고 안다. 그러므로 비록 공처정에 머무르지만 허공정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을 허공배사라고 한다.
다섯째 식처, 여섯째 무소유처, 일곱째 비유상비무상처배사는 모두 위의 법과 같으니 앞의 예를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
여덟 번째 멸수상배사(滅受想背捨)는 느낌(受) 연상(想) 등의 온갖 심법과 심소법을 물리쳐 없애는 것이다. 왜 그런가? 비유상비무상처배사 가운데는 비록 거친 번뇌는 없으나 네 가지 음(四陰), 두 가지 입(二入), 세 가지 계(三界)의 열 가지 미세한 심소법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① 느낌(受), ② 연상(想), ③ 행(行), ④ 접촉(觸), ⑤ 사유(思), ⑥ 의욕(欲), ⑦ 이해(解), ⑧ 기억(念), ⑨ 선정(定), ⑩지혜(慧)이다.
느낌(受)이란 무엇인가? 식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연상(想)이란 무엇인가? 식으로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행(行)이란 무엇인가• 법경에 대한 행의 작용이다.
접촉(觸)이란 무엇인가? 의근에 접촉하는 것(意觸)이다.
어떤 것이 사유(思)인가? 법을 사유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의욕인가? 선정에 들어가고 나옴을 말한다.
어떤 것이 이해함인가? 법을 이해함이다.
어떤 것이 기억인가? 삼매를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을 선정이라고 하는가? 마음이 법 그대로 머무름을 말한다.
어떤 것을 지혜라고 하는가? 지혜의 뿌리(慧根)와 지혜의 몸(慧身)을 말한다.
수행자가 비상비비상배사 가운데 비록 비상비비상처정을 집착하지는 않으나 모든 심소법을 없애지 못했기 때문에 멸수상배사에 들어간다. 일심으로 진제에만 반연하여 오온, 십이입, 십팔계를 끊으면 온갖 행의 인연이 다 사라진다. 느낌으로부터 지혜에 이르기까지 온갖 심소법이 다 사라지고, 심소법이 아닌 것 또한 사라진다. 지금 여의어 버리고자 하면 다시 모름지기 진제를 관찰하는 느낌이나 연상 역시 궁극의 고요함이 아님을 깊이 알아서, 관찰하는 주체(能觀)로서 선정의 느낌과 지혜의 연상(慧想)을 버린다. 이렇게 진제에 반연하는 선정과 지혜의 두 가지 마음을 버리기 때문에 멸수상정의 온갖 심소법을 등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