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이탈리아의 산악지대. 영국의 수도사 윌리엄은 요새처럼 견고하고 폐쇄적인 어느 수도원에 들어간다. 그 수도원에서 날마다 '묵시록'의 예언에 맞춰 발생하는 연쇄 살인 사건. 현대 이탈리아의 철학자이며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 원작의 <장미의 이름>을 장 자크 아노가 감독을 맡은 미스터리 영화다. 윌리엄으로 분장한 숀 코네리의 중후한 연기가 돋보였고, 아드소 역의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앳된 모습을 보인다. 이 수도원에서는 절대로 웃음이 허용되지 않는다.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며 이는 악마에 대한 두려움까지 없애는데, 두려움이 없이는 신에 대한 믿음조차 없어진다."는 이유로 수도원에 깊숙이 간직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코의 상상이 만들어 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권. 그 1권이 '비극론'이다.)은 금서(禁書)가 되고 문제의 책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그리고 해괴하기 짝이 없는 살인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원작의 소설은 무척 난해하지만, 그것을 나름대로의 영화로 해석한 프랑스 출신 감독 장 자크 아노는 역시 거장답다. 벌써 십오년 전 영화다.
웃음이란 인간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에코의 이론에 따르면 웃음은 선을 지향하는 힘이며, 인간에게 각성을 주는 장치다.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에 있었으나 희극은 훨씬 뒤에 나타난다. 희극은 넓은 의미로는 웃음을 유발하는 모든 연극을 일컫는다. 하지만 문학적으로는 수준 높은 해학극을 가리킨다. 희극은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의 축제 때 풍자적인 노래를 부르면서 평소에 불쾌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을 비꼬기 위한 수단으로 흉내를 내거나 주위의 구경꾼과 간단한 응답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듯하다.
희극의 특징을 알기 위해서는 그 범위를 세분해 보아야 한다.
상황희극(comedy of situation)은 인물들을 우스꽝스러운 상황 속에 놓이게 할 때 일어나는 희극이다. 이러한 희극에서는 인물의 성격이나 사상은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는다. 성격희극(comedy of character)은 인물의 괴팍한 성격에 의해 진행되는 희극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우울증, 위선자, 인간 혐오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풍자가 가득 찬 몰리에르의 희극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사상희극(comedy of ideas)은 버나드 쇼의 작품처럼 개념의 충돌에서 생기는 희극이고, 그밖에 절망희극(black comedy)은 부조리한 현실 또는 비합리적인 구성에서 비극적인 웃음을 끌어내는 희극이다. 이 밖에 풍속희극, 사회희극, 낭만희극을 더 찾아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세밀한 분류는 어떠한 연극에서도 불가능한 것으로 실제로는 모든 특징들이 상호보완적으로 교차된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나 인물의 성격 또는 사상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지고, 그것이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관객들은 웃게 된다.
이런 경우에 관객들이 무대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반응하는 웃음은 무대와 너무 밀착되면 그 웃음은 불가능해진다. 요컨대 웃음이란 무대, 즉 자신의 현실이라는 무대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할 때 일어나는 감정 반응이다. 칸트는 '무엇인가 중대한 것을 기대하고 긴장해 있을 때에 예상 밖의 결과가 나타나서 갑자기 긴장이 풀려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의 표현'을 웃음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 웃음을 유발하는 방법에는 문학에서 풍자(satire), 역설(paradox), 반어(irony), 위트(wit), 패러디(parody) 등이 많이 쓰인다.
풍자란 정치적 현실과 세상 풍조, 기타 일반적으로는 인간생활의 결함, 불합리성, 허위 등에 대하여 가해지는 기지 넘치는 비판이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1930년대 이기영의 <인간 수업>, 채만식의 <레디 메이드 인생>, 1960년대 김지하의 <오적>, 1970년대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완장> 등을 예로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대체로 풍자적인 작품은 억압적 현실 상황에서 걸작이 나오는 경향이 많다.
역설은 일반적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되거나 불합리하지만 실제 의미상으로는 참다움을 안에 담고 있는 표현 방식이다. 역설은 주로 독자에게 충격과 즐거움을 주는 의도로 사용된다. 모순 어법, 역리(逆理) 또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이라고 할 수도 있다. 유치환의 시 <깃발>에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든지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서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같은 표현 방법이 그것이다.
반어(아이러니)는 은폐를 뜻하는 말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반어는 '의미하고자 하는 것과 반대의 표현을 하는 것' 그리고 '비난하기 위해서 칭찬하고, 칭찬하기 위해서 비난하는 것', 때로는 시치미를 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아침 늦게 지각하여 어슬렁거리며 교실에 들어온 학생에게 선생님이 "너는 참 일찍 오는구나."라고 말하는 것이 반어적 표현이다.
위트에 대하여 영국 시인 드라이든은 '발상의 예리함'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기지(機智), 재치라고 할 수 있는 위트의 방법은 어떤 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비범하고 신기하고 기발한 발상으로 적절하게 표현하는 재빠른 지적 활동이다. 위트란 말이나 글을 즐겁고 재치 있게 그리고 능란하게 구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오래 전 서부 활극 영화로 <와로크>가 생각난다. 악당들에게 붙잡혀서 오른손을 다친 주인공 리처드 위드마크는 어쩔 수 없이 왼손으로 권총을 뽑는 연습을 한다. 웬만큼 숙달되고 나서 그는 싱긋 웃으며 친구에게 말한다. "어때, 나쁘지 않지?" 그러자 곧바로 그의 동료가 이렇게 대꾸한다. "좋지도 않아." 그 대답이 바로 위트가 넘치는 말이다.
패러디는 먼저 텍스트가 전제되고 그것에 대한 모방을 뜻한다. 본디 패러디는 '곁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그리스어 패로디아에 어원을 두고 있다. 패러디는 저명한 시인의 시구나 문장을 모방하여 내용을 변형시켜서 웃음을 자아내는 방법이다. 요즘은 영화나 텔레비전광고에도 이 방법이 많이 사용되어 대중들에게 친숙해진 상태가 되어 있다. 패러디는 문학에서 독자에게 일정한 교양과 지식을 요구하면서, 독자에게는 화자의 교묘한 말재주를 알고 있다는 식의 지적 만족감을 주기도 한다.
이제 우리 시문학에서 위에 말한 웃음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누가 말했는지 확실치 않지만, 만일 조선 시대의 방랑 시인 김삿갓(김병연)이 서구에 태어났더라면 셰익스피어나 괴테를 능가하리만큼 온 세계를 놀라게 했으리라고 한다. 김삿갓의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난고라 한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로 있던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폐족(廢族)이 되었다. 당시 김병연의 나이 여섯 살이었다. 홀어머니가 병연 형제를 데리고 여기저기 떠돌며 살다가 영월에 살 무렵이다. 김병연이 스무 살이 되던 해(순조 32년) 영월읍내의 동헌 뜰에서 백일장이 있었다.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이라는 시제를 받고 그는 정의감에 불타 김익순의 불충한 죄에 대하여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추상같은 탄핵의 시를 써서 장원을 하였다. 집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듣고 그의 어머니는 그 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내력을 들려주었다. 너무나 기막힌 사실에 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반란군의 괴수 홍경래에게 비겁하게 항복한 김익순이 나의 할아버지라니…. 그는 자신이 그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 스스로 단죄하고 차마 하늘을 보기가 부끄럽다고 삿갓을 쓰고서 방랑을 시작하였다. 김삿갓이라는 별명도 이로 인한 것인데, 그는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도처에 많은 즉흥시를 남겼다. 그의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으며 그런 시들 가운데 걸작이 많아 민중시인으로 기림을 받았다. 그의 시에서 우리는 기가 막힌 웃음을 볼 수가 있다.
스무나무 아래
스무나무 아래 서른 나그네가 ( 二十樹下三十客 )
마흔 집안에서 쉰 밥을 먹네. ( 四十家中五十食 )
인간 세상에 어찌 일흔 일이 있으랴. ( 人間豈有七十事 )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서른 밥을 먹으리. ( 不如歸家三十食 )
스무나무란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의 이름이다. 삼십객(三十客)에서 삼십은 '서른'이니 '서러운'의 뜻으로 서러운 나그네. 사십가(四十家)에서 사십은 '마흔'이므로 '망할'의 뜻이다. 망할 놈의 집이라는 의미다. 오십식(五十食)은 '쉰(상한) 밥'이고, 칠십사(七十事)란 '이런 일'을 말한다. 삼십식(三十食)은 '서른 밥' 즉 '선(설익은) 밥'이다. 이 시는 김삿갓이 함경도 지방의 어느 부잣집에서 냉대를 받고 나그네의 설움을 한문 숫자의 뜻을 이용하여 익살스럽게 표현한 시이다. 다시 제대로의 의미로만 새기자면 "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가/ 망할 놈의 집안에서 쉰 밥을 먹네./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선 밥을 먹으리."
김삿갓은 희화적인 시만 능한 건 아니었다. 눈[雪]을 시제로 주고 누가 봄철의 '나비'와 초여름의 '개구리'를 넣어서 시를 지어보라는 청을 받고 지었다는 다음의 시를 보면 얼마나 위트가 출중한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겨울 속에서 봄, 여름의 이미지를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펄펄 날리는 눈송이를 흰나비로 보고, 눈을 밟는 소리에서 그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유추해내고 있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의 그 절묘한 배치를 한 번 음미해 볼 일이다.
대체로 우리 나라 현대시는 주요한의 <불놀이> 이후 소월을 거치고 청록파를 지나오면서 동양적 관조나 엄숙주의로 일관해오고 있다. 심지어 어떤 시인은 가장 슬픈 시가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까지 말하기도 하였다. 눈물과 한, 설움의 정조가 들어가지 않으면 그건 마치 한국적인 시가 아닌 양 이른바 순수 전통시의 흐름이 그것을 말해준다.
6·25 전쟁이 우리에게 가져온 변화는 시에도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삼월은 가고 사월은 돌아와 있어도
모두다 남들은 소위 대학교수가 되어 꼬까옷에
과자 부스레기를 사들고 모두 다
자랑 많은 나라에 태어나서
산으로 바다로 금의환향을 하는데
걸레 쪼각 같은 얼굴이나마 갖추고 돌아가야 하는
고향도 집도 방향도 없이
오늘도 남대문 막바지에서
또다시 바지저고리가 되어보는 것은
배가 아픈 까닭이 아니라 또다시
봄은 돌아와 꽃은 피어도
뒤 받쳐주는 힘 없고
딱지 없고 주변머리가 없기 때문에
소위 대학교수도 꼬까옷도
과자 부스레기 하나 몸에 지니지 못하고
쓸개빠진 사나이들 틈에 끼어
간간이 마른 손이나마 설레설레 흔들며
떠나보내야 하는
남대문 막바지에서
우리 모두 다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 모두 다 밑천을 털고 보면 다 똑같은
책상물림이올시다
삼월은 가고 사월은 돌아와 있어도
봄을 싣고 산으로 바다로
아스라히 멀어만 가는 기적소리
못다 울 설움에 목이 메인 기적소리를
뒤로 힘없이
맥없이 내딛힌 발끝에 채이는 것은
어머니 돈도 명예도
지위도 권세도 자유도 아무것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돌멩이뿐이올시다
―전영경 「봄 소동(騷動)」
신구문화사의 『한국 전후 문제 시집』에서 작자는 말한다. "이 작품은 1956년의 것이오. (…) 형하고 서대문 주변에서 청춘을 연소시키던 계절의 것이오. 번민과 방황, 그리고 어쩌자는 것인지도 모를 좌충우돌 시대의 유산이오. 일언이폐지하면 고독이라는 박래품(舶來品)에 병들었던 때의 것으로 내 딴에는 퍽 아끼고 소중한 작품이오." <요강 뚜껑으로 물을 떠먹던 시절>이라든가 <사본 김산월 여사>, <소녀는 배가 불룩했습니다> 등 세태를 풍자하는 그의 시는 그 당시 젊은 문학도들에게는 즐거운 충격이었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다다이즘 혹은 조향의 쉬르 리얼리즘에는 한 번 눈길을 주고 지나칠 뿐이었을 그 때 전영경이 요설체로 풀어내는 시들에는 모두들 환호하였다.
'모두 다 자랑 많은 나라에서 태어나 산으로 바다로 금의환향을 하는' 상황적인 아이러니, 돈(딱지)도 없고 빽(뒤 받쳐주는 힘)도 없는 힘없는 지식인 청년의 발길에 채이는 건 지위도 권세도 명예도 아닌 돌멩이뿐이라는 자조적(自嘲的) 표현에 깃들인 것은 웃음 이상의 페이소스일시 분명하다. 막다른 골목에서 서로 마주치는, 똑같은 책상물림의 지식인들의 절망이 예리한 냉소 속에서 빛을 발한다.
내가 먹다 남기면 할머니는 그것을 당신이 먹었다. 지금 내가 먹다 남기면 아내는 그것을 개에게 준다. 내가 코를 흘리면 할머니는 입으로 빨아먹었다. 지금 내가 코를 흘리면 아내는 외면하거나 짜증을 낸다. 나는 할머니를 사랑한 적이 없다. 일편단심 다만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범대순 「일편단심」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출발한 범대순 시인은 우리 나라 최장수 동인지 '원탁시'의 창립회원이다. 흰 수염을 보기 좋게 기르고 늘 멋지게 운전도 잘하는 시인이다. '원탁시'의 장로이면서 항상 그는 젊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동인지가 나오고 그 날 전체 동인들이 모임을 가지는 자리에서 다른 시인이 이 시를 일어서서 낭독을 했는데 나는 들으면서 박장대소를 하였다. 시의 제목이 <일편단심>이라고 할 때 모두들 숙연한 자세로 고려말 정몽주나 안중근 의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옛날에 어린 손자인 내가 먹다 남긴 코 묻은 밥을 할머니가 먹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아무도 안 먹는다. 아내는 그것을 개밥으로 처리한다. 그 대목에서 나는 눈물이 나게 웃었다. 시인은 시치미를 떼고 "나는 할머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 당시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할머니의 나이가 되어서 시인은 그 옛날의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그렇게 완곡하게 말한다. '일편단심'으로 아내만을 사랑할 뿐이라는 마지막의 강조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위트와 역설의 조화 속에서 빚어지는 건강한 웃음이 이 시 속에 들어 있다. 심장병 예방에 웃음이 효과가 있다고 의사들은 말한다. 건강을 위해서도 되도록 많이 웃을 일이다. 시인은 본인이 장난기가 좀 있노라고 엄숙하게 변명하였다. 하지만 나는 범대순 시인이 이런 시를 더 많이 우리에게 보여주길 기대하고 싶다.
한 줄의 詩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히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 남아
귀중한 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詩人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 김광규 「묘비명(墓碑銘)」
돈 많은 재벌의 총수들이 다투어 자서전을 내던 시기가 있었다. 아니 요즘에는 이른바 '떴다'고 하는 연예인들조차 자서전을 내기도 하는데 소문에 의하면 직업적인 대필 작가들이 그 일을 해준다고 한다. 이 시에서도 하나의 훌륭한 묘비가 등장한다. 아마도 당대의 유명한 문인이 그의 행장을 기리는 묘비명을 썼을 것이다. 붓글씨 잘 쓰는 사람들은 항상 붓글씨 못 쓰는 사람들 밑에서 글씨를 써주게 마련이라 하던가. 여기 한 사람의 세속적으로 출세한 졸부가 있다. 그는 생전에 책 한 권 읽은 바 없이, 정신적 가치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사람이다. 돈과 높은 지위를 얻어 행복하게 살다가 죽은 그를 위하여,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문인이 동원되어 훌륭한 비문을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속물적 근성에 입각한 자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물질의 권위를 앞세우고 거들먹거린다. 시인은 이 시의 이면에 숨어서 그들을 마음껏 조롱하고 있다. 아이러니가 독자들에게 역사의 허무함,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면서 조소와 고소를 터뜨리게 하는 시이다. 겉으로 표현된 진술과 시 속에 내재된 의미 사이의 깊은 골 사이에 매복된 풍자와 아이러니가 이 시를 높은 정신 세계로 고양시키고 있다.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 정호승「밥그릇」
앞서 범대순의 <일편단심>에서는 내가 남긴 밥을 아내가 개에게 주어버린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그 개가 밥을 먹는 모양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개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빈 밥그릇을 지치지 않고 씩씩하게 핥는다는 진술에 이르면 폭소가 터진다.
시적 화자는 한 순간 개와 자신의 위치를 전도시켜 본다. 뼈아픈 자기 반성이다. 나는 언제 저와 같이 끝까지 일을 추구한 적이 있었던가 시적 화자는 반문한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작업의 순수함, 그 도저함을 이르는 표현이지 실제 상황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세상에 개 밥그릇을 핥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열심히 해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밥그릇'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가치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시가 읽는 이에게 단순한 폭소만 유발하지 않고 웃음 끝에 슬며시 얹혀지는 각성의 눈물 한 방울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은 별빛처럼 아름답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 …… )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 황지우 「심인(尋人)」의 일부
황지우는 이와 같이 활달한 어법으로 시를 쓸 때라야 성공적인 시를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 화자가 근엄한 표정으로 표면에 나타나는 시들은 십중팔구 실패작에 가깝다. 평론가들이 그런 시들 앞에서도 설설 기는 것은 그의 이름에 기가 죽어서이지 압도적인 정신 세계에 짓눌려서가 아니다. 그의 실험적인 기법은 무척 매력적이다. 위트가 번뜩인다. 이 시는 신문기사를 패스티쉬라는 '짜깁기'의 방법으로 나열하고 나서 끝에 가서야 비로소 시적 화자를 등장시킨다. 시적 화자 '나'는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지금 용변을 보고 있다. 그의 유명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시에서의 결구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에서처럼 베이소스(안티 클라이맥스) 기법을 구사하여 웃음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단순히 그의 실험적 성공만을 담고 있는 시가 아니다. 1980년 5월이라는 시대 배경에 유의해야 한다. 그 기사들은 당시에 사라진 실종자들을 찾고 있는 광고 기사라는 점이다.
황지우와 가까우면서도 먼 거리에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유하가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시를 읽으면 웃음이 없다. 재기 발랄함과 패러디의 표현과 요설 말고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다.
압구정동에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까페가 생겼다
온통 나무 나무로 인테리어한 나무랄 데 없는
이라는 이 첫 도입 부분부터 황지우의 패러디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배꼽→배→배나무'와 같은 식의 어휘 연상을 이어나갈 뿐, 웃음도 없고 감동도 없고 미감도 없는 도시 풍경을 좌충우돌 묘사할 뿐이다.
환장허겄네 환장허겄어
아, 농사는 우리가 쌔빠지게 짓고
쌀금은 저그덜이 편히 앉아 올리고 내리면서
며루 땜시 농사 망치는 줄 모르고
나락도 베기 전에 풍년이라고 입맛 다시며
장구 치고 북 치며
풍년 잔치는 저그덜이 먼저 지랄이니
우리는 글먼 뭐여
신작로 내어 놓응게 문둥이가 먼저 지나간다고
기가 차고 어안이 벙벙혀서 원
아, 저 지랄들 헌게 될 일도 안 된다고
올 농사도 진즉 떡 쪄먹고 시루 엎었어
― 김용택 「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의 일부
전라도 구어의 능란한 구사와 속담의 파격적 인용, 그리고 그런 속담의 패러디와 풍자가 뒤섞여 있는 김용택의 유장한 이 시를 나는 그의 <섬진강> 연작보다 우위에 두고 싶다. 이 작품은 농민의 분노가 단순한 분노를 넘어 기막힌 익살과 비극적 카타르시스로까지 승화된 시라 할 것이다. 그가 이 시 말고 또 다른 어떠한 시로 높이 평가받는다 해도 이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근 김용택이 보여주는 투명하고 서정성이 강한 시들도 충분히 그의 역량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그가 이 시에서 보여준 걸쭉하고 활달한 시의 세계로 다시 돌아와 주었으면 싶다.
삼년 전 월부로 사들인 냉장고
아래층에
달걀 한 줄과
김치 한 단지,
곯아버릴 수도 없고 시어버릴 수도 없이
억지로 억지로 싱싱한 체함.
이층에는 오십원 짜리
싸구려 아이스크림 세 개
학교에서 돌아올 우리 아이들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음.
내가 마실 맥주 몇 병과
아내가 마실 오렌지주스는
처음부터 부재중.
아내와 나는 이 대형 냉장고 곁에
쪼그리고 앉아 미소 지으며
사진 찍기를 좋아함.
문을 열면
짜고 매운 한국의 냄새뿐이지만
그러나 문을 닫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하염없이
냉장고를 사랑함.
열려라 냉장고, 열려라 냉장고,
아이들은 열렬히 마술의 문에 매달려
꿈꾸며 노래함.
― 졸시 「냉장고를 노래함」
이 시는 내가 1980년 6월에 발표한 작품이다. 제목은 <코스모스를 노래함>이란 가곡의 패러디이다. 5·18을 불러오기까지 박정희 군사 정부가 이룩해 놓은 우리 나라 경제 발전의 허상을 이 시에서 나는 풍자해 본 것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로서의 대형 냉장고는 월부로 산 것이니 외상이다. 우리의 외채가 당시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를 미국에 살고 있는 교민들로부터 들은 바 있었다. 거의 절망적인 실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었다. '억지로 억지로 싱싱한' 체하지만 냉장고 안에서도 썩을 것은 썩고야 만다.
그리고 냉장고 앞에서 보란 듯이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 당시 전시효과만을 내세우는 속 빈 강정의 우리 나라의 전시 행정을 은근히 풍자하고자 함이었다. '열려라, 참깨'라는 마술의 주문에 의해 열리는 알리바바의 동굴 앞에서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아니 우리 국민들은 얼마나 순진하기만 한 것이었던가. 그 허울 좋은 경제 발전의 미명 아래 자행된 인권의 유린이며 퇴행으로만 치닫던 민주주의의 아픔이 이 시에는 차마 '곯아버릴 수도 없고 시어버릴 수도 없이'라고 표현된 것이었다.
많은 독자들은 이 시를 다만 웃음으로 읽는다. 그러나 그 웃음 속의 진실은 눈물 이상이었다.
다시 움베르토 에코를 생각한다. 그가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쓴 것은 웃음의 진정한 효용성을 강조하고자 함이었으며, 그 연장선상에 얼마 전 그는 속물 근성이 만연한 이 세상을 비틀어 보기 위하여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라는 비평적 에세이집을 내놓고 있다. 우리의 현대시도 세상의 바보들을 웃게 하면서 넌지시 자기 반성의 깨우침으로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 그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첫댓글 이틀째 두 꼭지 읽고 갑니다.
비틀어지기 위해 더 꼭꼭 짜서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눈으로 읽고 손으로 읽고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귀한 가르침 받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