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 출신이다.
왕산(旺山) 허 위(許蔿)는 유생으로서 제1차 의병전쟁에 참여하였고, 제2차 의병전쟁에는 관료출신자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당시 의병장으로서는 드물게 해외 경륜도 있었으며, 따라서 서구문물의 우월성을 절감한 구본신참( 本新參)의 개화의지를 지닌 선구적 인물이었다.
1896년 3월 이은찬(李殷贊)·진사 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와 더불어 거의(擧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양제안(梁濟安)을 선봉장으로 삼아 김천(金泉) 장날을 이용하여 장정 수백 명을 모집하여 금산군(金山郡) 기고소(器庫所)의 병기(兵器)를 압수해서 금산과 성주(星州) 사이에 의병을 벌려 놓고, 원근에 격문을 발송해서 군사를 모집했다.
그러나 아직 세력을 굳히기도 전에 대구의 관병이 성주를 치고, 이어서 경성과 공주의 관병이 합세하여 이은찬과 조동호를 사로잡아 갔다.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서 진천(鎭川)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근신(近臣) 전경운(田慶雲)이 왕명을 받들고 와서 의병을 해산시키라 권고하므로 부득이 장졸들을 타일러 제고장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안타까웠던 마음이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호남 삼월 달에 오얏꽃 날리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서생 갑옷을 벗었네.
산새도 어떻게 시사 급함을 알고서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
그 이후 세상을 등질 뜻을 갖고 방산옹(舫山翁)을 따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초야(草野)에 묻혀 두지를 않았다. 대신 신기선(申箕善)이 왕에게
"허 위의 경륜하는 것과 포부는 세상에서 관중(管中)과 제갈량(諸葛亮)이라 일컫사오니
불러서 쓰시는 것이 바로 이 때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아뢰어 1899년 3월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을 제수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 왕의 부름을 받은 허 위는
"벼슬하는 것은 나의 근본 뜻이 아니지만,
외적을 쓸어 없애지 않을 수가 없고,
국가를 회복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내 장차 시험하리라"
고 하였다.
이렇게 관로에 들어선 그는 그 다음달에 성균관 박사가 되고 1904년에는 주차일본공사 수원(駐 箚日本公使 隨員),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정삼품 통정대부(正三品 通政大夫), 평리원 수반 판사(平理院首班判事)를 거쳐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이 되었다.
이어서 그해 8월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제수되자, 국가의 폐단을 없애고 벼슬길을 맑게 할 것을 주장하는 다음의 시무10조를 건의하였다.
첫째: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를 것.
둘째:군정(軍政)을 닦아서 불시의 변에 대비할 것.
셋째:철도를 증설하고, 전기를 시설하여 교통과 산업에 이바지할 것.
넷째:연탄을 사용하여 산림을 보호 양성할 것.
다섯째:건답(乾畓)에는 수차(水車)를 써서 물을 대도록 할 것.
여섯째: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못을 파서 물고기를 기르며, 또 육축(六畜)을 기르도록 힘 쓸 것.
일곱째:해항세와 시장세를 날로 더하고 달로 증가시켜 장사군에게도 공평한 이익을 얻도록 할 것.
여덟째:우리나라 지폐의 폐단이 심하니 은행을 설치하여 금·은·동전을 다시 통용시킬 것.
아홉째:노비를 해방하고 적서(嫡庶)를 구별하지 말 것.
열째:관직(官職)으로 공사를 행하고 실직(實職) 이외에는 차함(借啣)하는 일을 일체 없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