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 않은 사람들이 본서의 편향성을 문제삼곤 한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모화 사상과 신라 정통주의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어서 현대 한국인의 민족주의에 거슬리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대함에 있어 사람들이 곧잘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고려 당대의 입장이 아닌 고대사 연구자 혹은 현대 민족주의의 관점으로 《삼국사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다른 사료들이 세월이 지나며 소실되었기에 고대사 연구의 기본이 된 것이지 본래 고대사 연구서로 편찬된 것이 아니다.
단순한 고구려 계승이 아닌 삼한 계승의식으로 통일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를 확고히 하고 백성들을 하나의 통치 질서 아래 통합한다는 정치적 목적 아래 나온 사서이다. '열전'에 궁예와 견훤이 포함된 것에 알 수 있듯이 삼국은 후삼국 시대까지 아우르고 있으며 진정한 통일은 신라가 아닌 고려의 통일이다. 다시 말해 《삼국사기》는 신라가 아니라 삼한을 계승한 고려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고려 중심 사서이다. 고려의 정통을 논하며 그 전에 삼한을 1차적으로 통합한 신라를 강조했던 것이지, 고구려를 배제한 신라 계승의식 때문에 신라를 띄워준 건 아니란 것이다.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사》는 제후국의 역사를 의미하는 '세가'라는 이름으로 고려 왕조사를 구성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삼국의 왕조사를 기술하는 부분이 황제의 역사를 의미하는 '본기'로 되어 있는 것이나, 또한 《고기》라는 한반도 계통의 기록과 중국 사서를 함께 자료로 쓰면서 내용에서 차이가 나는 대목에선 《고기》의 기술을 우선하는 태도를 보면 김부식이 사대주의적으로 《삼국사기》를 썼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한 의견이다.
고려는 광종 이후 외왕내제를 완전히 정착시켰기에 외교관계에선 제후국을 자처했으나 내부적으로는 황제국과 차이가 없었다. 그런 시대에 성립된 《삼국사기》이니 북방 영토 문제로 명과 한바탕 신경전을 벌이던 시절부터 쓰여진 《고려사》나 모화사상이 깊이 들어간 조선 후기 사서와는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신라의 비중이 높다는 것을 문제로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본기'의 분량으로는 거의 비슷하다곤 해도, '열전'의 대부분은 신라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는 등, 신라에 비해 고구려, 백제에 대한 서술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편향 운운하기 이전에 신라가 통일전쟁의 승리자로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주장이다. 게다가 패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사료가 수백년도 더 지난 김부식 시대까지 남아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삼국통일 이전의 분량만 따지고 보면 고구려가 가장 많다.
국가의 성립이 고구려에 비해 늦은 것으로 생각되는 신라의 시초를 제일 앞에 놓거나 고구려, 백제의 멸망에 대해서 신라에 비해 훨씬 박한 평(특히 백제에 대해서)을 한 것도 편향성의 예로서 제시되는데, 김부식과 편찬자들이 유학자라는걸 생각하고 내용을 보면 그냥 유학자들이 국가의 멸망을 평할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서에는 역사가의 주관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할 뿐더러 현대 역사학자 중에 그런 평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열전'의 불균등함은 좀 심하긴 한데, '열전'에 수록된 인물 69명 중에 고구려, 백제인은 합쳐서 11명에 불과하고 그것도 본서의 '본기'나 다른 문헌에서 전재하지 않은 독자적인 전기를 가진 사람은 단 둘, 온달과 도미뿐이다. 또 '열권' 10권 중에 김유신 열전이 3권을 차지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는 《삼국사기》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김유신 분량이 과도하다는 문제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열전'에 수록되는 영웅담이 야사로서의 성격이 강한 탓에 '본기'에 수록되는 각국의 연대기에 비해 소실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