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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오지마을]시공 초월 굽이굽이 고갯길...문명을 거역한 최후의 오지 | ||||||||||||||||||||||||||||||||||||||||||
(4)동대산 우음골, 다음밭골 동대산 ‘우잉이 다음밭골’ 터널 뚫리고 변전소 서고 2013년께 영원히 사라질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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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 넘나든 시간여행우잉이 다음밭골
바지락 바지락, 개울 자갈을 밟고 가는 소리,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친구가 되어 준다. 참새를 쫓는 독수리 은박지와 뒤늦게까지 지키고 있는 허수아비의 호위를 받았다. 호계 땅과 바꾸지 않는다던 기름진 논이 개울가에 널렸다. 돌에 미끄러지고, 물에 빠져도 개울 길은 마냥 좋다. 때마침 뻐꾸기까지 울어 주었다. 마음공부란 이런 아름다운 길을 호젓이 다님으로 다듬어지는 것인가. 오지마을을 찾아 다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맑아졌다. 이것이 곧 오지마을의 가르침이다. 한참을 올라가자 전선이 끊긴 전봇대가 서있다. 끊어진 전봇대는 문명을 거역한 오지를 가리키는 것 같아 괜히 흐뭇하다. 멧돼지가 먹이를 찾아 불도저처럼 땅을 파헤친 흔적이 나타났다. 오지의 수문장인 멧돼지와 발맞추어 사는 골짜기임이 분명하다. 뒤에 보이는 산이 동대산 무재(447m)이다. 오래 전부터 다음밭골은 강동이 가까워 신명이나 정자 쪽이 생활권이고, 우음골은 호계·농소 쪽에 생활권을 두었다. 소달구지 몰던 어린 아이들은 짚신을 신고 돌다리를 건너 학교를 다녔고, 뱀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다음밭골 박상호(67)씨는 서른세 살까지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34년 전에 울산으로 이주한 사람이다. 마땅히 농사 외에는 배운 것이 없는 박씨는 외지로 나가면 죽는 줄 알았다. 박씨는 사람 한 질이 넘는 다음밭골 개울 담을 쌓은 장본인이다. 큰 비만 오면 쓸려가는 논과 개울에 산에서 돌을 굴려 석축을 쌓고, 그 이듬해 울산 가대로 이주하였다. 박씨가 떠나고 비어있는 다음밭골에 5년 전 외지인이 들어왔다. 좀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수취인 불명’의 외지인은 편리함을 추구하는 요즘 사람과는 사뭇 달랐다.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삼아 공부를 하고 있는 그 은둔자에게서 세상을 단절한 유유자적함의 즐거움이 묻어났다. ◇호리병 계곡 우음골
다음밭골이 밝은 골짜기라면 우음골은 산이 막혀 어두웠다. 대낮에도 헤드 랜턴을 쓰고 가야 하는 우음골짝은 호리병처럼 개울을 따라 안으로 들어 갈수록 넓어졌다 좁아졌다 했다. 산판 나무를 옮기던 개울을 따라 한 시간을 넘게 걸어가야 했다. 우음골이 오지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토록 험한 두메산골인지는 몰랐다. 산협에 산그늘이 져 흔히 붙여진 지명인 어둠골이 사라지고, 지금은 우음골 혹은 우골(愚谷)이라 한다. 산이 막혀 어둡다는 뜻이다. 개울 중간쯤에서 복곡(腹谷, 또는 복금자)폭포는 여자의 복부와 음부를 떠올리게 하는 형상이다. 60년 전의 원주민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렵사리 우음골 최후의 원주민 박기태(71)씨를 만날 수 있었다. 송정박씨(밀양박씨) 11대손으로, 당시 정변으로 종가 보존을 위해 1852년 경북 영천에서 이주하였다. 석유화학공단을 다닌 박씨는 안타깝게도 투병중이었다. 하지만 고향 이야기라면 방문 고리를 잡고서라도 인터뷰를 응하겠다던 박씨 집을 찾아갔다. 박씨는 1949년 8월 농소초등학교 3학년 때 소개령이 내려져 우음골을 떠났다. 6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골짜기 주름, 능선, 굽이굽이 아홉 사리 골과 협곡을 생생히 기억했다. 집 뒤의 범 새끼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괴아지골, 소달구지가 넘나들었던 큰재, 산태골, 뒷골, 서당골, 초당골, 진파박골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향수가 서린 울산 최후의 오지마을에 2013년이면 터널이 뚫리고, 변전소가 생긴다고 한다. 밀어붙이기식 공사가 시작된다면 멀면 멀수록, 찾아가기 힘들면 힘들수록 가까이 있던 오지마을이 사라질 것이다. 푸른 바다를 눈앞에 두고도 동대산은 움직이지 않듯이 오지마을은 본래의 그 모습을 지키고 싶어 한다.
배성동 시인 초췌한 박기태씨의 가슴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숙명처럼 간직하고 사는 박씨는 절절한 그리움을 참지 못하였다. “어매, 어매, 우리 어매.” 마음 한 가운데 중심이 된 어머니는 늘 마음의 고향이었다. 왜소하나 강직하여, 자식에게 지극 정성으로 베풀어 주시던 분이셨다. 어머니 등에 업혀 산 넘고 재 넘으며 얘기를 하던 기억을 못잊어 했다. 소나무에서 발견한 비둘기 알을 만지려 하자 “이놈아, 그냥 가자. 비둘기 어미에게는 귀중한 것이다.” 어머니는 산딸기를 머리에 이고, 아들은 작은 지게에 씨 없는 홍시를 지고 호계장을 넘나들었다. 비록 몸은 두메산골을 떠났지만 마음만은 본래의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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