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동산리(東山里)
대덕산(大德山) 줄기가 남으로 길게 퍼져 내려온 곳에 다시 야산으로 솟은 크고 작은 봉우리를 등에 지고 동쪽으로 넓은 들을 거느린 큰 마을이다.
이 곳은 중세 이래 운막향(雲幕鄕) 또는 운포향(雲布鄕)의 옛 터전으로서 그 중심은 백족리(白足里)라는 옛 마을인데,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에 이웃한 세천리(洗川里)와 동산(東山) 마을을 합쳐서 이룬 법정리이다. 이름을 동산리라 한 것은 백족리 앞에 있었던 마산, 모산, 동산이란 세 개의 독뫼(獨山)에서 연유(緣由)하였다. 현재 동산리의 중심 부락은 인산(仁山)이라고도 불리우는 배죽 마을이며, 당곡(堂谷), 소배죽, 그리고 세 땀으로 나누어진 세천(洗川)과 동산리 등으로 자연 부락이 나누어져 있다. 동으로 삼랑진읍, 서로는 마산리, 하남 파서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1) 배죽(배죽, 백족(白足), 백죽(白竹), 인산(仁山))
중세천(中洗川) 동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는 운막향(雲幕鄕)의 옛터라 하여 속칭 백족(白足)이라고 표기하였다. 배죽은 백족에서 변화된 음으로, 옛날 마산(馬山) 앞에 있는 돌더미에서 백마가 나타나 강물을 마시고 사라져버린 뒤에 그 발자국을 남겼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그 백마 발자국은 마산리 누리미산에 지금도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을 인산(仁山)이라고도 하는데, 종남산(終南山) 줄기가 밋밋하고 산뜻하게 어진 모양으로 뻗어 내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전기에 군수(郡守) 박곤(朴坤)과 만호(萬戶) 박옥형(朴玉衡)이 이 마을에 살았다. 박곤은 용력(勇力)이 크게 뛰어나 무과(武科)로 입신하였는데 중국 사신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화녀(華女)에게서 얻은 자손이 임진왜란 때에 명장(明將)을 따라 종군하여 이곳으로 와서 친족을 찾았다는 전설이 있고, 봉보부인(奉保夫人)(임금의 유모)이 이 마을에서 출생했다는 설화도 있다.
(2) 땅골(당곡(堂谷))
웃세천 서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던 당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당나무는 마을 뒷산에 있으며 지금도 정월 대보름날에 마을에서 당제(堂祭)를 지내고 있다.
○ 마굿들
임진왜란 후에 이연리(伊淵里)에 있었던 이동음역(伊冬音驛)을 백족(白足)으로 옮겨 금동역(金洞驛)이라 했다. 당시 역마(驛馬)의 먹이를 위한 사료용 짚을 생산하는 들판이었다. 하여 마굿들이라 했다.
(3) 소배죽(小培竹, 소배족(小培足))
배죽(인산(仁山)) 서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배죽보다 작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 웃마(상촌(上村), 상세천(上洗川))
소배죽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세천(洗川)의 세 땀 가운데 맨 위쪽에 있다 하여 상촌(上村) 또는 상세천(上洗川)이라 했으나 사실은 세천(洗川)의 본동이다.
세천이란 이름은 조선 숙종 때 이 마을에 복거(卜居)하여 세거지(世居地)로 삼은 광산(光山) 김씨에 연유하는 것이라 한다. 이 곳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쌍괴정(雙槐亭), 김시성(金時省)은 벼슬을 버리고 은퇴(隱退)하자 성자(姓字)인 김(金)을 깨끗이 씻어 밝고 맑은 마음으로 여생을 보낸다는 뜻으로 흐르는 내의 이름을 세천(洗川)이라 하고 광명재(光明齋)를 지어 학문을 닦았다. 그 후 자손들은 없어진 재실(齋室)터에 다시 첨모재(瞻慕齋)를 짓고 선조를 추모하고 있다. 또 재령(載寧) 이씨(李氏)의 영사재(永思齋)도 이곳에 있는데, 이는 고려 때 사정(司正) 이술(李戌)과 감사(監司) 이영중(李榮中) 부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지은 재실(齋室)이다.
(5) 중마(중촌(中村), 중세천(中洗川))
웃마 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세천(洗川) 세 땀 중 가운데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조선 영조년간에 창원에서 이 곳으로 옮겨온 회산(檜山) 감씨(甘氏)의 세거지(世居地)로 근년(近年)에 자손들이 그 선조인 묵재(默齋) 감창기(甘昌基)를 추모하기 위하여 경묵재(敬默齋)를 지어 보존하고 있다. 또 세천 마을에는 창녕(昌寧) 조씨(曺氏)의 삼세정(三洗亭)도 있는데, 이는 조선 숙종. 영조 때 인물인 처사(處士) 조기창(曺起昌), 양옹(養翁) 조면주(曺冕周), 소암(笑菴) 조하위(曺夏瑋), 가암(可菴) 조하종(曺夏琮) 등 삼대의 묘를 수호하고 추모하기 위한 재실이다.
(6) 매나무골(매화곡(梅花谷), 하세천(下洗川))
세천(洗川)의 가장 아래 쪽 마을의 지명으로 이 곳에 매화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매화곡 또는 매목곡으로 표기해 왔으며, 매화나무골에서 생략, 전음된 매나골이 되었다. 하세천(下洗川)이란 다른 이름도 있다.
(7) 동산이(동산(東山))
배죽의 남쪽 들가운데말(야중촌(野中村))의 서쪽 야산 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동산이라는 독뫼(독산(獨山))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촌(古村)인데 어은동(魚隱洞)과 외산리(外山里)에 인접하였다.
조선후기에 창녕 조씨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으며, 창녕 성씨의 구거지(舊居地)이기도 하다. 또 여흥(驪興) 민씨(閔氏)의 세거지(世居地)로서 한말(韓末)에 민치홍(閔致洪)이 세운 영양재(迎暘齋)라는 재사(齋舍)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 들가운데말(야중촌(野中村))
동산(東山) 마을 동쪽 들판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의 밀성제(密城堤) 안쪽 넓은 들 가운데 있다 하여 들가운데말이 되었다.
○ 개고개(狗嶺)
세천(洗川) 중마에서 파서리(巴西里)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를 말하는데, 옛날에 개무덤이 있었다.
○ 덤바골(崖岩谷)
덤바위 곧 층덤바위가 있다 하여 덤바골이 되었다. 신산등과 묵밭등 사이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 땅고개(堂嶺)
배죽에서 땅골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 성지골(성지곡(聖智谷))
소배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옛날에 성지(聖智)라는 사람이 살았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솟골고개(소곡령(小谷嶺))
세천(洗川)에서 조음리(棗音里)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작은 골짜기의 고개라는 뜻이다.
○ 소배죽고개(소배죽치(小培竹峙))
일명 시친이(세천(洗川))고개라고도 하는 바 소배죽의 고개라는 의미이다.
○ 솔밭골(송전곡(松田谷))
배죽에서 땅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부터 이곳에는 솔밭이 우거져 있었다.
○ 심산등(심산등(沈山嶝))
동산(東山) 마을 서북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심씨(沈氏)의 묘가 있다 하여 심산등(沈山嶝) 혹은 신산등이라고 하였다.
○ 진등대(장등(長嶝))
배죽 서북쪽에 있는 길다란 등성이다.
○ 큰골(대곡(大谷))
인산(仁山) 서쪽에 있는 큰 골짜기인데 산꼭대기를 큰골 만댕이라고 한다.
○ 밀성제(密城堤)
마산리(馬山里)에서 동산리(東山里)까지 3590 m 길이의 응천강(凝川江) 하류에 면한 제방이다.
○ 도구늪들(도구소(渡口沼))
동산(東山) 마을 앞들을 말하는데 옛날에는 응천강(凝川江) 나룻터의 어구로서 넓은 늪지대를 들판으로 바꾼 것이다. 장구처럼 생겼다 하여 장구늪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 돌티미나루터(석제진(石蹄津))
동산(東山)과 삼랑진읍 미전리(美田里) 사이로 흐르는 응천강(凝川江)을 건너는 나루터인데 나루는 동산쪽에 있었다고 한다.
○ 민도사미(민도사묘(閔道士墓))
덤바골 안에 있는 도사(道士) 민씨(閔氏)의 묘가 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약새미(약천(藥泉))
옥천사 위쪽에 있는 샘인데 바위틈에서 솟아 나오는 이 샘물은 속병에 좋다고 전해지고 있다.
○ 여수말리(狐峴里)
옛날 금동역(金洞驛) 아래쪽에 있었으며 지금의 큰 배죽 앞 들판이다. 여우굴이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나 경지정리 사업 관계로 여우굴의 흔적과 고개는 없어졌다.
○ 자래방우(鱉岩)
큰골에 있는 바위로 자라 모양과 같이 생겼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 진다리깡(長橋江)
東山 마을 앞에 옛날 넓은 새밭이 있었는데, 그 새밭에 있었던 강 위로 긴 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긴 다리가 진다리로 강(江)이 깡으로 변한 것이다.
○ 새밭
봉금사 절터 남쪽에 있던 밭 이름인데 옛날에는 억새풀이 자욱하였다.
○ 카장골
도구늪 동편에 있던 들 이름이다.
첫댓글 제가 동산리에서 났는데 오랫만에 자세하게 지명을 보게 되니 너무도 반갑고 좋습니다.
어른들의 말씀중에 많이 들어 보았던 말들이라 다시 보게 되니 신기하기도 합니다.
잊지않도록 자세히 여러번 보겠습니다. 이런 자료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곡 마을엔 예전부터 박씨와 지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지요~
요즘엔 도회지에서 이사와서 전원주택을 지어 거주하는 분들이 제법 계신 듯 해요.
제가 어릴 땐 소 먹이러 애들은 들판에 나가고~, 봄엔 쑥 뜯으러 다니고~, 친구들끼리 모여 자치기도 했는데....다들 고향을 떠나 잘 살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