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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品. 佛國品
(③ 선해법상~ 십팔불공)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다시 쭉 경문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如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이 在毘耶離庵羅樹園 하사
(여시아문하사오니 일시에 불이 재비야리암나수원하사
與大比丘衆八千人으로 俱하시니
여대비구중팔천인으로 구하시니)
거기까지 한 문장이죠.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 비야리 암라수원에 계시사, 대비구중 8천 사람과 더불어 함께 계셨다.
그리고
菩薩은 三萬二千이며
(보살은 삼만이천이며)
보살은 삼만이천인이며, 그랬습니다.
삼만 이천 명의 보살들에 대한 덕을 찬탄하는 거죠. 여기에 삼만 이천이나 되는 많은 보살님들은 이러이러한 덕을 가졌고, 이러이러한 복을 지녔고, 이러이러한 능력이 있다, 라고 하는 내용들을 쭉 소개 합니다.
衆所知識이라
(중소지식이라)
여러 대중들이 다 잘 알고 있는 바라.
大智本行을 皆悉成就하니
(대지본행을 개실성취하니)
큰지혜와 근본행을 실게 성취하니, 개실성취(皆悉成就)하니 다 성취했으니,
諸佛威神之所建立이라
(제불위신지소건립이라 )
모든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건립한 바더라.
爲護法城하야 受持正法하며
(위호법성하야 수지정법하며)
법의 성곽을 잘 수호해서 정법을 받아가지며,
能師子吼하야 名聞十方하며
(능사자후하야 명문시방하며)
능히 사자후를 잘 해서, 그 이름이 시방에 두루 들린다, 하는 것입니다. 또
衆人不請이로대 友而安之하며
(중인불청이로대 우이안지하며)
아주 참 좋은 말이죠, 여러 사람들이 청하지 않지만은 우정 벗이 되어 사람들을 편안히 하며,
紹隆三寶하야 能使不絶하며
(소융삼보하야 능사부절하며)
삼보의 종성을 계속 이어서 능사부절(能使不絶)하며 능히 하여금 끊어지지 않게 한다, 불법승 삼보의 종송이 계속 이어가도록, 천년만년을 이어가도록 그렇게 하는 그런 역할도 이 보살님들이 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降伏魔怨하고 制諸外道하며
(항복마원하고 제제외도하며)
마구니와 원수들을 모두 잘 항복하고, 그리고 또 모든 외도들을 전부 잘 제어한다, 제압한다, 이런 말이죠
悉已淸淨하야 永離蓋纏하며
(실이청정하야 영이개전하며)
그리고 일체 업에 있어서는 실이청정(悉已淸淨)해서, 다 깨끗하게 돼서, 오개십전(五蓋十纏) 그러니까 온갖 번뇌들이죠. 여러가지 번뇌들을 영원히 떠났으며,
心常安住無碍解脫하야
(심상안주무야해탈하야)
마음은 항상 걸림 없는 해탈에 머물러서,
念,定,總持와 辯才不斷하며
(념,정,총지와 변재불단하며)
념, 정, 총지와 변재가 끊어지지 아니하며,
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와 及方便力이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와 급방편력이
無不具足하야 逮無所得하며
무불구족하야 체무소득하며)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와 그리고 방편력이 구족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체무소득(逮無所得)하며 얻을 바 없는 데 이르며,
不起法忍하고 已能隨順하야 轉不退輪하며
(불기법인하고 이능수순하야 전불퇴륜하며)
법인에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이능수순(已能隨順)하여, 이미 능히 잘 수순해서, 불퇴륜(不退輪) 물러서지 아니하는 법의 바퀴를 잘 굴리더라.
하는 거기까지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1-③
善解法相하야 知衆生根하며/ 盖諸大衆하야 得無所畏하며/ 功德智慧로 以修其心하며/ 相好로 嚴身하야 色像이 第一이라/ 捨諸世間所有飾好하며/ 名稱이 高遠하야 踰於須彌하며/ 深信堅固하야 猶若金剛하며/ 法寶로 普照하야 而雨甘露하며/ 於衆言音에 微妙第一이며/ 深入緣起하야 斷諸邪見일새/ 有無二邊에 無復餘習하며/演法無畏가 猶師子吼하며/ 其所講說이 乃如雷震하며/ 無有量이라 已過量이며/ 集衆法寶하야 如海導師하며/ 了達諸法의 深妙之義하야 善知衆生往來所趣와 / 及心所行하야/ 近無等等의 佛自在慧와 十力無畏와 十八不共이며/
법 모습을 잘 해득함으로 중생의 근기를 알며 모든 대중을 덮어서 두려운 바가 없음을 얻으셨다. 공덕과 지혜로 그 마음을 닦음으로써 좋은 모습으로 몸매를 장엄함일새 신수가 첫째인지라 모든 세간의 꾸밈새를 버리시니 명칭이 높고 멀어서 수미를 지나며 깊은 믿음이 굳세고 단단하되 오히려 금강과 같음일새 법의 보배스러움은 널리 비춤에 단이슬로 비를 주며 여러 가지 음성에도 미묘함이 첫째라서 깊이 인연 일으키는 데 들어 모든 삿된 소견을 끊음으로 있다 없다는 두 치우침에 다시는 남은 습성이 없으시다.
법을 넓힘에 두려움 없음은 사자의 외침 같으며 그 강설하는 바는 우레와 같아서 한량이 없고 한량할 수도 없으니 여러가지 법보를 모으게 하기를 마치 바다에 보배 캐는 길을 지도하는 이와 같이 하며 모든 법의 깊고 묘한 이치를 다 통달하고 또 중생들의 가고 오는 곳과 중생의 마음 가는 곳을 잘 알며 무엇으로 비교할 데가 없는 부처님의 자재한 지혜와 열가지 힘과 네가 지 두려울 것 없는 것과 18뛰어난 법(不共法)에 가까웠으며
善解法相하야 知衆生根하며
(선해법상하야 지중생근하며)
법상을 잘알고 중생의 근기를 잘 알아서
대중들을 덮어서
선해법상(善解法相)하야, 역시 삼만 이천 유마경을 설하는 그 법회에 모인 보살들의 덕을 찬탄하는 내용이 계속되어지요. 앞에 열거한 여러가지 덕만 해도 상당하죠, 이분들은 이러한 훌륭한 법과, 덕과, 그리고 능력과 부처님을 때론 대신해서 설법교화 하는 일을 하고 계시는 그런 분들입니다.
또 선해법상(善解法相)하야 지중생근(知衆生根)하며 그랬어요, 이건 지법지귀라 또는 뭐 달법지귀다 그런 말을 쓰는데, 교학에서, 법상을 잘 안다, 그리고 중생들의 근기를 또 잘 안다 그랬습니다.
법을 설하려면은 첫째는 법을 잘 알아야 돼요, 그 다음에는 법을 들을 중생들의 속성과, 성격과, 좋아하는 것, 근성, 근기, 그 됨됨이, 이런 것을 또 잘 알아야 됩니다.
그 두 가지 조건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되는 거죠.
법을 설하는데, 불교를 이야기 하려고 하는데 불교를 몰라가지고는 안되죠.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이치를 잘 아는 것이 지법이라 그래요. 또는 달법, 법을 잘 안다, 법을 통달한다 그러고, 그다음에 듣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 직업이 뭐고, 또 이 사람은 평소에 어떤 것을 익혔고, 또 어떤 문제에 말하자면은 어떤 애로사항이 있는지, 고민이 뭔지, 지금 이 사람당면과제가 뭔지, 이런 것들을 또 잘 아는 것, 그것 참 어려운 일인데, 부처님은 그런 것을 잘 알아 가지고 이제 그 사람의 근기에 맞춰서 법을 잘 설한다 그랬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선해 법상(善解法相), 법상(法相)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제반 교리죠, 또 법에 대한 제반 이치고, 또 인생과 우주 삼라만상의 실상이고, 이것이 모두가 법상이 되겠습니다.
말하자면은 모든 존재의 진리죠, 모든 존재의 실상, 그것을 잘 알고, 결국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잘 알아서 그것을 이제 중생들에게 깨우치는 것이니까, 그리고 중생의 근기를 알며, 그 다음에 이 보살들은 또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거죠, 그다음에
盖諸大衆하야 得無所畏하며
(개제대중하야 득무소외하며)
누구에게도 두려운바가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다
개제대중(盖諸大衆)하야 득무소외(得無所畏)하며 그랬습니다.
개(盖)자는 여기서 으뜸이 된다, 모든 대중들에게 으뜸을 되어 가지고서 무소외를 얻는다 그랬어요.
덮는다 하는 그런 의미인데 모든 대중들을 덮는다, 덮는다 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으뜸이 된다, 이 말이예요.
예를 들어서 구름이 땅을 뒤덮는다 하면은 말하자면 으뜸이 된다, 대중들을 덮는다 라고 하는 말은 다른 대중들에게 있어서 아주 우뚝한 그런 으뜸가는 분이 되고, 또 그러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두려운 바가 없는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功德智慧로 以修其心하며
(공덕지혜로 이수기심하며)
공덕과 지혜로써 그 마음을 잘 닦았다
공덕(功德)과 지혜(智慧)로써 이수기심(以修其心)하며, 이 보살들의 마음은, 마음은 공덕과 지혜로써 잘 무장이 됐다, 이말입니다.
공덕과 지혜로써 그 마음을 잘 닦았다, 공덕이라는 것을 잘 지어야죠. 그리고 이 공덕이라고 하는 것은 복덕과 관계가 됩니다. 지혜는 말하자면 우리가 말하는 지혜죠.
그래서 부처님을 뭐라고 합니까, 복덕과 지혜를 잘 갖춘, 두가지가 만족한 양족존(兩足尊)이다 그러죠, 복과 지혜를 잘 갖춘 양족존이다,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우리가 그러잖습니까. 그게 이상적인 인격자거든요. 덕만 있어도 부족하고 지혜만 또 그렇게 있어도 부족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공덕과 지혜를 잘 닦아가지고서 그 마음을, 그것으로써 마음을 잘 닦았고, 그거는 이제 내심의 문제입니다. 그건 보이는 것은 아니예요, 그리고 또 내심만 그런가 하면은 외모도 역시 뛰어나다 하는 것입니다.
相好로 嚴身하야 色像이 第一이라
(상호로 엄신하야 색상이 제일이라)
외모는 상호로 몸을 잠엄하여,
제일 가는 모습을 하여
상호(相好)로 엄신(嚴身)하야 색상(色像)이 제일(第一)이라
그랬어요. 마음속으로 뭐 복덕이 많고 진여가 설사 출중하다 하더라도 꾀죄죄하면 그거 참 곤란하죠.
그래서 상호로, 32상과 80종호로써 몸을 장엄했다, 잘 꾸몄다 이 말입니다.
사바세계에는 상견중생이 살아요. 상견중생(相見衆生), 모양을 보아야 마음이 나는, 우리 보통 말에도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불교에는 상견중생이라 그래요. 모양 상(相)자 볼 견(見)자 상견중생, 어떤 형상을 봐야 뭔가 이해를 하고 판단이 서고 어떤 평가를 내려지고 이게 사바중생으로서 상식이예요. 그게 뭐 잘못된 것도 아니고. 그게 공통성이란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삼만 이천 보살, 유마경 법회에 모인 삼만 이천 보살들의 마음은 공덕과 지혜로 잘 무장이 됐고, 또 외모는 32상 80종호. 상과 호로써 몸을 아주 잘 장엄해서 색상이 제일이다 이거예요.
어디에 내놔도 아주 제일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 보십시오, 관세음보살 같은 이들, 문수보살 같은 이들, 보현보살 같은 이들 얼마나 근사하게 꾸몄습니까, 제일 화려하게 잘 꾸민 사람이 역시 관세음보살님이라.
본래 얼굴도 잘났지만은 그 잘난 얼굴에다 입고 있는 옷하며, 또 걸치고 있는 여의주니 영락, 구슬, 이런 것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값진 보배로써 그렇게 장엄을 했거든요. 그것이 물론 뭐 사치하자고 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방편으로 장엄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왜 그리 잘났어요? 굳이 그렇게 잘날 필요가 없거든, 잘난 것은 딴사람 중생 주고 자기는 좀 못나도 될텐데도 불구하고 그게 아니라구요. 법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그것이 큰 효과를 발휘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살들도 상호(相好)로 엄신(嚴身)하야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는 거죠, 모양새를.
내가 중국 사찰의 그, 대만 사찰에서 법회하는 것을 비디오로 몇 개 봤는데 보니까 어떻게나 거창하게 법상이라든지, 법회 장소를 꾸미고 또 법사가 올라가고 내려가고 등단하는 그런 것들을 어떻게나 거창하게 꾸며놨는지 하옇든, 법문 내용은 별게 아니라도 그 모습이 아주 근사하더라구요, 거기에 벌써 사람들의 마음이 벌써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는 거예요. 이거 중요하다구요, 분위기가, 그래서 그것은 하나의 방편으로 아주 효과를 내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이분들은 그런 모습뿐만 아니고
捨諸世間所有飾好하며
(사제세간소유식호하며)
세간에 있는바 장식꺼리를 다 버렸다
사제세간소유식호(捨諸世間所有飾好)하며, 그렇다고 세속에 있는 어떤 그런 그, 아까는 뭐 관세음보살의 영락이라든지 진주 그런 걸 얘기 했지마는, 여기선 그런 걸 다 버렸다 그랬어요. 본래 잘생겼으니까, 상호로 엄신했기 때문에 세속적인 화장이라든지, 무슨 가발이라든지, 일체 몸을 장식하는 그런 것들은 전부 버렸다 그랬습니다.
모든 세간에 있는 바, 식호(飾好) 이건 이제 장식거리에요 꾸미는 거, 그런 것을 다 버렸다, 버렸으며
名稱이 高遠하야 踰於須彌하며
(명칭이 고원하야 유어수미하며)
명성이 그 높고 멀기가 수미산을 뛰어넘는다
또 명칭(名稱)이 고원(高遠)하야 유어수미(踰於須彌)라, 이분들의 소문이 얼마나 자자하고, 또 훌륭하다고 그렇게 소문이 났던지, 그 높고 멀기가 수미산을 뛰어 넘는다 그랬습니다.
불교에 수미산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 수미산은 흔히 경전상에 보면은 아주 거대한 산이고, 일월이 그 중간을 돌고 있고 이렇게들 이야기가 돼있습니다마는, 혹은 또 히말라야 산을 수미산이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어쨌든 참 이 지구상에서 가장 우뚝하고 빛나는 산이죠. 또
深信堅固하야 猶若金剛하며
(심신견고하야 유약금강하며)
깊은 믿음이 견고하여 금강처럼 견고하다
심신견고(深信堅固)하야 ,깊은 믿음이 견고해서, 유약금강(猶若金剛)하며 금강처럼 그렇게 견고하다 이거야, 믿음이 그만치 견고하면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 무너지거나 깨어질 리가 없죠.
우리 불자들은 이렇게 보면은, 좀 이렇게 뭐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든지 그래서 불교에 영험이 있느니 없느니 그래가지고 신심이 흔들리고, 급기야는 믿음이 아예 뭐 없어져 버리는 그런 경우까지도 혹,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혹 보게 되는데 여기 있는 이 삼만 이천 보살들은 도저히 그런 것은 상상도 못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 깊은 믿음이 견고해서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다 금강과 같다. 또
法寶로 普照하야 而雨甘露하며
(법보로 보조하야 이우감로하며)
법의 보배로써 세상을 널리 비추어
법의 단이슬로 세상을 적시며
법보(法寶)로써 보조(普照)하야 이우감로(而雨甘露)하며
법의 보배로써 널리 비춘다, 이건 이제 널리 비춘다고 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법의 광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법, 보배는 으레 빛이 나게 되어 있으니까. 법은 빛이 나게 돼 있으니까 그래서 널리 비춘다 그랬습니다.
불법은 또 깨달음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보배임과 동시에 우리가 삼보라고 그러죠, 보배임과 동시에 아울러 아주 그 세상의 빛이 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태양과 같은 것이고, 중생의 무명을 밝히는, 아주 훌륭한 빛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널리 비춘다.
그렇게 널리 비추는 역할도 하는가 하면은 또 우리가 목마른 사람에게 감로의 어떤 법비를 뿌리듯이 그런 역할도 한다. 이 감로라고 하는 것은 불사(不死)죠, 불사.
아무리타라고 본래 불사약이다, 하는 그런 뜻을 중국말로 감로라고 그렇게, 단이슬이라고 번역을 합니다마는 생사를 초월하는 그런 약을 비내리듯이 뿌린다, 하는 것입니다.
법의 보배로써 세상을 밝게 비추고 또 목마르고 거칠은 중생들의 마음 땅에다가 단이슬로써 그것이 이제 법(法)이죠, 법을 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분들이 무슨 물을 뿌린다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법의 단이슬로써 세상을 적셔가지고서 세상을 모두 평안하게 한다, 하는 그런 뜻에서 이우감로(而雨甘露)라 감로로써 비를 내리게 한다. 또
於衆言音에 微妙第一이며
(어중언음에 미묘제일이며)
온갖 말에 있어서도 미묘제일이다
어중언음(於衆言音)에 미묘제일(微妙第一)이며, 온갖 말에 있어서 언음에 있어서도 미묘제일이다. 아주 아름답게, 또 듣기 좋게, 음성도 좋을 뿐더러, 말씀과 그 음성이 아주 아름답게, 법문을 하는 거, 사실은 내용이 물론 중요하겠죠, 그러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역시 말입니다.
요즘 뭐 우리가 티비를 보든지 아니면 라디오를 듣던지 할 때 소리가 깨끗하게 들리지 아니하면 아무리 내용이 재밌어도 그거 신경쓰여서 못 듣거든요.
그러니까 법문 내용도 중요하지만은, 그 음성과 그 말씨와 이런 것들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언음(言音)이라고 그랬어요. 말과 소리라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중(衆)자가 더욱 의미가 있는 거죠. 필요에 따라서 하는 여러가지 말과 음성에 미묘 제일이다.
(소리를 좀.. 우리도 오디오를 바꾸던지 어떻게 해야지, 미묘제일이 못되어 가지고 그래 좀 힘이 드네)
深入緣起하야 斷諸邪見일새
(심입연기하야 단제사견일새)
연기의 도리에 깊이 들어가 삿된 소견을 모두 끊었다.
그다음에 심입연기(深入緣起)하야 단제사견(斷諸邪見)일세
유무이변(有無二邊)에 무부여습(無復餘習)이다, 이건 참 다 구절구절이 중요하고, 그 한구절 한구절이 다 삼만 이천, 이 법회에 온 보살들의 덕을 낱낱이 다 소개하는 것이지만은 특히 여기에 이 구절이 우리가 유의해야 할 그런 대목입니다.
물론 음성도 좋았으면 좋겠고, 말씀도 잘했으면 좋겠고, 소문도 났으면 좋겠고, 공덕과 지혜도 마음의 무장을 했으면 좋겠고, 상호도 잘 생겼으면 좋겠고, 온갖 것이 다 필요한 것이죠, 우리에게도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선적으로 여기에 유의해야 할 것은 심입연기(深入緣起)하야 단제사견(斷諸邪見)일새 그랬어요.
깊이 연기의 도리에 들어가 가지고서 모든 삿된 소견을 끊었다, 그랬어요. 삿된 소견을 끊었다.
불교에서 ‘삿된 소견이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다, 라고 하는 것이 여기에 드러납니다.
연기의 이치를 우리가 도외시해버리고 생각하는 것은 그건 전부 삿된 소견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건 불교의 처음이자 끝이다 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연기의 이치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았다, 하는 것도 결국은 연기의 도리를 깨달았다. 그래서 마지막 7일간을 이 십이연기를요, 십이연기를 역관(逆觀)하고 순관(順觀)하고 역으로 관하고 순으로 관하고 이렇게 해서 온 우주 삼라만상의 연기의 이치를 깨달았다, 부처님 깨달음의 내용이 연기다,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불교에 있어서 연기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은요, 뭐 내면의 세계가 어쩌니, 마음이 어쩌니, 본체가 어쩌니, 실상이 어쩌니 하지만은,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이 세계가 더 중요하거든요, 우리 수준에는. 최소한도로 보통사람의 수준에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더 중요합니다.
그 눈에 보이는 세계를 현상세계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이 현상세계, 눈으로 보이는 세계는 어떻게 구성이 됐고 그 존재의 법칙은 도대체 뭐냐 이거예요.
그게 바로 연기다 하는 것입니다. 인연의 도리로 해서 존재한다, 이게 존재의 법칙입니다.
거기서 이제 말하자면 한 단계 이제 들어가서 또 새로운 진의 눈을 가졌더라면, 본체를 볼 수 있고, 실상을 볼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있겠죠. 물론 그 속에서 노니다면은 그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다. 이까짓거 연기니 현상계니 이거 다 초월해서 살 수 있겠지만은,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현상이예요.
당장에 옷입고, 밥먹고, 걸어가고, 숨쉬고 하는 이 현상, 이 현실, 이거보다 더 중요한 건 없거든요. 본체도 사실은 이 현상을 빼버리고 본체가 있을 수가 없고, 본체 또한 이 현상의 앞 뒷면과 같은 것입니다. 손바닥의 앞면과 뒷면과 같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수행이라고 하는 것을 잘못 오해하면, 그것을 오해를 하면은, 현상을 무시해버리는 그런 경향도 있는데 그건 정말 오해죠.
그래서 연기(緣起)의 이치를, 우리가 좀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은 수없이 듣게 되고, 수없이 강조 하게 되고,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만나도 역시 우리가 깊이 파악하고, 깨달아서 몸소 체득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연기의 이치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연기의 도리를 제대로 알면은 인생을 안다, 또 세상을 안다, 진리를 안다, 그러면은 삿된 소견에는 떨어지지 않는다,하는 것입니다. 삿된 소견에.
연기의 도리에서 벗어나면 그건 삿된 소견이예요. 무조건 삿된 소견이라고 치부해 버려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어떤 이치도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전부 어떤 인연의 업인(業因)과 조건(條件)이 있어 가지고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그것은 하나의 또 새로운 원인이 되어가지고 또 새로운 어떤 결과를 자아내고, 그 결과를 통해서 또 어떤 보조적인 조건들이 작용을 해가지고 새로운 어떤 결과를 또 가져오게 되고, 예를 들어서 뭐 벼만하더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시대를 거쳐오면서 벼가 자꾸 변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도 자꾸 변화를 주고 세상이 달라지고 하니까 그런 것이고, 여러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모든 게,
그러니까 연기의 도리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하는 그것이 정견(正見)이 되겠죠, 바른 견해가 되겠고, 그 외의 것은 전부 사견(邪見)이다. 그러니까 꼭 이것이다 또는 저것이다 라고 이렇게 단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有無二邊에 無復餘習하며
(유무이변에 무부여습하며)
유니 무니 하는 두가지 변견에
다시는 나머지 습이 없다
유무이변(有無二邊)에 무부여습(無復餘習)이라 그랬어요. 유무(有無)있다 없다 하는 이 두가지, 변견이라 그래요, 변견, 우리는 편견이라 그런 말을 또 쓰죠. 치우친 견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건 이제 소위 흑백 논리와 같은 것인데, 꼭 이것이다, 꼭 저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꼭 있다, 꼭 있다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또 꼭 없다 할 것도 또 아무것도 없습니다.
꼭 있다, 꼭 없다 하면 이건 치우친 견해고, 그것은 삿된 견해고 변견이 돼요. 그래서 거기에 다시 나머지 습이 없다. 왜 습이라 했느냐, 우리는 그동안 있는 것 아니면 없는 것, 없는 것 아니면 있는 것,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저것 아니면 이것이고 그렇게 익혀왔어요, 그러니까 습이야.
그런데 불교를 우리가 배우면서부터 어떻게 보면 애매모호한 사람이 되어가고, 흑도 백도 아닌 회색으로 변해가는 지는 모르지만은, 그것이 제대로 되는 거예요. 그것이 제대로 되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다라고 하고 저것이다 라고 하고, 집착해버리고, 고집 피워버리고, 어떤 한 소견에 떨어져버리면 이것은 우리의 습관이야, 그거는 편할른지 몰라, 그러나 그건 올바른 소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습(餘習)이 없다, 라고 하는 말이 바로 그말입니다.
어디에도, 우리는 그 습관적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이면 좋겠지만 그래서 그걸 익혀왔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서, 또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구요.
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 모든게 그래 됐어요.
왜냐, 여러가지 조건들이 복합적으로 포함되어 있어서 그래서 그래요.
없는가 싶으면 있고 말이죠, 있는가 싶으면 없고, 없는가 싶은데 있는 거는 또 그럴 이유가 있어, 있는가 싶으면 없는 거는 또 그럴 이유가 또 있어요.
그래서 잡다한 이유들이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단정적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할 수가 없다 하는 거예요.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것은 우리들 살아온 습관이라, 그래서 유무이변(有無二邊)에 유니 무니 하는 두가지 어떤 변견, 또는 편견에 다시는 나머지 습이, 나머지 습관이 없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삼만 이천 보살들은 그걸 다 떠났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뭐 옛날에 우리 황희, 황정승 이야기가 있듯이 양쪽에서 누가 와서 이야기를 하니까 다 옳다고, 다 옳다고 하더란 소리를 우리가 자주 하지 않습니까.
그럼 옆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이 사람이 옳다든지 저사람이 옳다든지 하지 왜 둘 다 옳다고 하냐니까 니말도 옳다. (웃음) 그렇게 이야기 했다 그러거든요, 그거 그게 중도(中道)라 하하
그 이유가 다 있거든요. 단정적으로 이것이다 할 수가 없게 되어있어요, 알고보면. 미세하게 분석으로 들어가면요, 어느 것 하나도 단정을 할 수는 없게 돼있어, 수많은 인연들이 거기에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가끔 말하지만 여러 책을 통해서 감동해 가지고 그전에 내가 칠연품 강의를 여기서 한 번 했는데 부처님이 오시는데는 수많은 인연으로 오시게 되었다.
그것은 비단 부처님 뿐만 아니고 이 한자루의 연필이 이자리에 오기까도 부처님이 이세상에 오는 인연과 똑같은 그런 수많은 인연과 수많은 사실로 해서 이 자리에 이 연필이 있게 된다 이거예요.
그말은 온 우주가 다 동원돼서 하나의 연필이 존재한다 이거요, 연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부 다 그래, 모든 것이 다 그래, 저 무심한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가 존재하기까지도 전부, 온 우주적인 인연과 사실들이 동원이 돼서 존재한다, 그렇게 복잡 미묘한 연기의 인법에 의해서 존재하는데, 어떻게 단정적으로 이것 때문이다, 너 때문이다, 뭐 누구 때문이다, 저사람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거죠.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그렇게 ‘때문이다’ 라고 하면은 일단은 편할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미련한 판단은 없는 거죠, 그 제일 미련한 판단인 것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여기 이제 내가 좀 중점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심입연기(深入緣起), 깊이 들어갔다 이거예요. 우리가 인연의 도리라는 것은 알기는 알지 대강 우리 불자들은 수없이 들었으니까 그게 ‘다 인연소치지, 인연소치지’ 말은 즉슨 그렇게 하지만 그게 얼마만치 가슴에 깊이 그것이 젖어있느냐 하는 것도 굉장한 차이가 있을 거란 말이예요.
그래서 여기에 삼만 이천 보살들은 심입연기(深入緣起), 깊을 심(深)자 딱 하나 붙여 놨어요. 연기의 도리에 깊이 들어가 가지고서 모든 삿된 소견을 끊었다, 연기의 도리를 모르면 그건 삿된 소견이다, 우리가 일단 그렇게 단정을 하고 자꾸 거기에 근접해 가도록 우리가 마음을 그래 써야 되는 거죠.
참 이런 삼만 이천 보살들의 인격, 다시 말해서 불교로 무장된 보살들의 인격이다, 그러면은 여기에는 추호만한 그런 오류도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비록 뭐 이 사람은 불교적으로는 뭐 어떻지만은 이 사람의 인격은 이렇다’ 그런 이야긴 여기 없거든요, 완전히 100% 불교적인 인격으로 무장된 그런 보살들을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습니다.
연기의 도리에 깊이 들어가서 삿된 소견을 모두 끊었다, 그래서 유다 무다, 이거 유니 무니 하는 것은 있다 없다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선이다 악이다 하는 것이 역시 다 포함됩니다. 여기는 모든 상대적인 것을 대표로 유다 무다 이렇게 들었어요.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 다 마찬가지요.
우리가 뭐 동이니 서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지, 동쪽이다 서쪽이다. 나는 독도가 그 섬 하나인줄 알았는데 동도, 서도, 둘이라? 섬이 또? 거기에 가서 동쪽인 줄 알았는데 거기가서 또 서쪽이 또 있어요.
그보라구,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게 그게 일정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동쪽에 있잖아요, 우리나라는 동쪽에 있는데, 거기 가서도 또 동서가 있다고요. 그러니까 허망하기 이를 때 없는 거라 그거. 가설이야, 그래서 가설이라 하는 거예요. 임시, 임시방편으로 고 입장에서만 사용하는 거지, 그걸 계속 고집하면 그건 안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을 그런 것들을 이변(二邊)이다, 변견(邊見)이다, 편견(偏見)이다 그런거죠. 우리가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서 계속 변하니까, 유무이변(有無二邊)에 무부여습(無復餘習)이라 유무이변에 여습이 없다. 그다음에
演法無畏가 猶師子吼하며
(연법무외가 유사자후하며)
법을 연설하는데 당당하여(두려움이 없으며)
마치 사자후와 같으며
연법무외(演法無畏)가 유사자후(猶師子吼)하며, 법을 연설하는데 당당하다 이거요, 어떤 사람 앞에서도, 부처님앞에서도 법을 연설하는데 전혀 떨리거나 두려움이 없다, 그것이 마치 사자후와 같다, 여기 삼만이천 보살의 인격이 나오죠.
불교 공부를, 불교에 뭐 불공 할 때부터 드나들어가지고 몇 십년씩 그렇게 부처님하고도 인연 맺고도 “절에 다닌다면서 불교 이야기 좀 해봐라” 하면은 한마디도 못해 가지고 어떻게 할 바를 몰라가지고 쩔쩔매면은 속으로는 그래도 훤하다고 하지 또, ‘속으로는 훤한데 입이 안 떨어진다’ 거 참 빨리 좀 그 어떻게 다듬어 가지고 좀 훈련을 쌓든지 해야지 불교 포교가 너무 부진해가지고 참 큰 문제예요.
이번 26개 부처 장관중에 불자가 두 사람이야, 무종교가 세 사람이고 그 나머지 전부 기독교 천주교야, 그거 왜 그러냐 포교를 안해서 그래, 포교를, 불교는 너무 포교를 안했어, 전부 ‘우리집 오소’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그렇게 포교를 많이 해노니까, 그러니까 누굴 보고 자꾸 뭐 불평할 것도 없고, 한탄할 것도 없는거요, 전부 그것도 인연소치여, 우리가 인연을 그렇게 지어놨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거요,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 돼, 인을 지어놔야 되요, 포교를 열심히 해야 된다구요.
연법무외(演法無畏)가 유사자후(猶師子吼)라, 법을 이야기 한다, 불법을 이야기 하는데 당당하다 이거예요, 두려움이 없다, 마치 사자가 부르짖는, 사자가 뭐 크게 사자후 하는데 뭐 대지를 겁낼거야, 어디를 겁낼거야, 하등에 두려워 할 까닭이 없는거죠, 사자후와 같다.
其所講說이 乃如雷震하며
(기소강설이 내여뇌진하며)
그 강설하는 바가 우뢰소리와 같다
기소강설(其所講說)이 내여뇌진(乃如雷震)하며 그 강설하는 바, 여기 연법강설, 불교가 발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법을 연설했다라 하지 강설했다고는 말하지 않겠죠.
그러나 우리처럼 이렇게 앉아서 하는 건 이건 강설이라고 하는 게 옳아요. 어떤 부처님의 경전이나 하나의 내용을 두고 그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해석을 하고 우리 나름대로 그것을 설명을 하는 것을 강설이라고 그래요.
여기는 물론 분별할 수도 있지만은, 법문하는 것 하고 강의 하는 것 하고는 어느 정도 분별이 되죠, 분별이 되면서도 또 어떨 때는 혼동도 되고 그렇습니다.
여기 연법과 강설은 어떻게 보면 차이가 있다, 라고 그렇게 봐야 됩니다.
기소강설(其所講說)이, 경전을 또는 부처님 말씀을 강의 하는데, 강설하는데, 내여뇌진(乃如雷震)하며 우레와 같고 우레가 떨치는 것과 같다. 우레 소리가 쾅-하고 그냥 여름에 번개가 치고 말이죠, 천둥 번개 치는 거 같이 그렇게 한다 이거요. 그러니까 이 보살들의 인격을 이렇게 아주 높이 이야기 하는 것이고 이것은 모든 보살들이 다 갖추어야 할 일이고, 모든 불자가 다 갖추어야 할 인격으로 그렇게 우리가 받아들여야 됩니다.
이건 뭐 책에 있는 어떤 인물, 그런 인물만 이렇다, 라고 이렇게 봐 버리면, 그야말로 서자서아자아(書自書我自我) 책은 책이고 나는 나고, 이래 돼가지고 곤란하죠. 그래서
無有量이라 已過量이며
(무유량이라 이과량이며)
양이 없어서 이미 양을 지나갔다
무유량(無有量)이라 이과량 (已過量)이며, 무유량, 양이 없다 이말이예요, 이정도면 양이 없죠 뭐, 인격이 어느 정도다, 얼마만치다,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죠, 그래서 이미 과량이야 이미 양을 지나갔어, 양이 없으니까 양을 지나갔다, 양으로 헤아릴 정도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만치 뛰어났다는거죠.
그다음에
集衆法寶하야 如海導師하며
(집중법보하야 여해도사하며)
여러가지 법의 보배를 많이 모아
마치 바다의 도사와 같다.
집중법보(集衆法寶)하야 여해도사(如海導師)하며, 법의 보배를, 여러가지 법의 보배를 집(集) 많이 모아놨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겠죠.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도 법보라는 말이 여러 번 있었듯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보배다. 무슨 뭐 금,은,패물이, 다이아몬드가 보배가 아니라, 정말 부처님 법에 대해서, 또 세상 이치에 대해서 또 인생의 실상에 대해서 얼마만치 잘 깨닫고 있는가, 이게 정말 보배다, 하는 것입니다.
뭐 농속에 넣어 놓은 금,은 보물이 보배가 아니고, 이 보살들은 여기 삼만 이천 보살들은 그런 어떤 진리, 진리의 보배, 법의 보배, 그 보배를 여러가지로 많이 갖추고 있다, 마치 바다의 도사와 같다 그랬어요.
바다의 도사(導師)는 말하자면 배를 타고 보물섬에 가 가지고서, 바닷속에 있는, 또는 섬에 있는, 그런 보물을 캐내지 않습니까. 그걸 캐내는데 그것을 직접 캐는 사람들이니까 온갖 그런 보물들을 다 가지고 있죠.
그 사람이 말하자면 선장입니다. 여기 도사라는 말은, 바다의 도사라는 말은 배의 선장인데, 배의 선장이 온갖 보물을 다 캐가지고 가지고 있듯이, 여기에 보살들은 법에 대해서 온갖 보물을 다 가지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바다의 도사와 인도하는 사람과 같다, 선장과 같으며, 그랬어요.
了達諸法의 深妙之義하야 知衆生往來所趣와
(요달제법의 심묘지의하야 선지중생왕래소취와 )
모든 법의 깊고 미묘한 이치를 잘 깨달아서
중생들이 가고 오고 나아갈 바
또 요달제법(了達諸法)의 심묘지의(深妙之義)하야 선지중생왕래소취(善知衆生往來所趣)와
요달제법의 모든 법의 심묘지의, 깊고 미묘한 이치, 깊고 미묘한 뜻을 요달(了達) 잘 깨달아가지고서, 선지(善知) 잘 안다 이거예요.
저 앞에 서두에 선해법상(善解法相)하야 지중생근(知衆生根)했는데 법상을 잘 알아가지고 중생의 근기를 안다, 라고 한 것에 대해서 여기서 좀더 부연해서 설명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인격이 미려하니까 그것을 이제 설명하고 칭찬하다 보면은 중언부언, 했던 이야기 또 할 수 있고, 앞에서 생략하고 뒤에 가서 좀더 자세히 할 수도 있고, 여러가지 표현의 방법이 있을테니까 여기서도 중복된 내용으로 봐도 좋아요.
제법의 깊고 미묘한 이치를 잘 요달해서, 선지(善知) 잘안다, 무엇을 잘 아는고 하면, 중생들이 가고 오고 또 나아갈 바,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또 어디에서 왔는지, 또 뭐, 죽진 않았다손 치더라도 지금 그 사람의 어떤 심성이 어떤지,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는지, 심소행이야.
及心所行하며
(급심소행하며)
심성이 어떠한가를 잘알며
심소행(心所行) 이런 것을 선지(善知) 잘 알며, 알아서 하지말고 ‘하며’ 해야되요, 토를.
급심소행(及心所行) 중생들의 왕래하는 것, 또 그들의 나아갈바 취(趣)라고 하는 것은 어떤 속성이라고 할까, 그 사람들의 마음의 행하는 바,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떻게 생각이 흘러가고 있고 이런 것을 잘 알며 또 그다음에
近無等等의 佛自在慧와 十力無畏와 十八不共이며
(근무등등의 불자재혜와 십력무외와 십팔불공이며)
무등등의 부처님 지혜와 십력무외와 십팔불공에 근접 하여
근(近), 가까와졌다 이 말인데, 어디에 가까와졌는고 하니 무등등의, 무등등은 부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등등(無等等)의 불자재혜(佛自在慧)와, 부처님의 자비로운 지혜와, 십력(十力)과 무외(無畏)와 십팔불공(十八佛共), 이것이 전부 부처님의 모습이예요.
이러한 것을 갖춘 부처님에게 근(近), 근접했다, 가까와졌다 이말이예요. 이 삼만 이천 보살들이 거의 부처님과 비슷하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재가 뒤에 사전을 부착해 놨는데 사전을 이제, 활용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무등등도 나와 있어요.
114쪽 한 번 넘겨 보십시오. 114쪽 중간에서 약간 밑에 보면은 무등등 있죠.
무등등(無等等):
부처님 도는 뛰어나서 평등할 것이 없으나
부처님과 부처님네가 평등한 것.
부처님 도는 뛰어나서 평등할 것이 없으나 부처님과 부처님네가 평등한 것이다.
그래 무등(無等)이라고 하는 말은, 누구하고도 같을 수 없다이거야, 보통 중생들하고는 도저히 같지안해, 그러나 또 같은 면이 있어, 그건 부처님들끼리는 같다, 그래서 무등등이라고 한다, 사전적인 해석은 그래요.
무등등 그래 부처님님 이말이요.
같은바 없으면서도 같은, 부처님의 자비로운 지혜와, 그리고 십력도 있어요. 십력(十力) 135쪽 보면은,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그런 열가지 힘을 말합니다. 135쪽 중간에 보면은 십력이 있죠?(네)
십력(十力) : 부처님의 열 가지 지혜의 힘이니,
①옳고 그른 것을 아는 지혜의 힘,
②중생들의 三세 업보(業報)를 아는 것,
③여러 선정과 八해탈, 三삼매를 아는 것,
④중생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아는 것,
⑤중생의 여러 가지 지해(知解)를 아는 것,
⑥중생들의 여러 가지 경계(境界)를 아는 것,
⑦여러 가지 업행(業行)으로 어디 가서 나게 되는 것을 아는 것,
⑧천안통으로 걸림 없이 보는 것,
⑨숙명통으로 중생의 숙명을 아는 것,
⑩온갖 번뇌의 습기를 영원히 끊는 지혜의 힘.
부처님의 열가지 지혜의 힘 했는데, 옳고 그른 것을 아는 지혜의 힘, 중생들의 삼세 업보를 아는 것, 여러 선정과 팔해탈, 삼삼매를 아는 것, 중생들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아는 것, 중생들의 여러가지 지해를 아는 것, 중생들의 여러 가지 경계를 아는 것, 여러가지 업행으로 어디 가서 나게 되는 것을 아는 것, 무엇이었다, 어디서 살았다 그걸 아는 거죠.
그다음에 온갖 번뇌의 습기를 영원히 끊는 지혜의 힘, 이런 것들이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열가지 힘이다 그래요.
무외(無畏)도, 이건 사무소외라 해서 125쪽을 보면, 이거 낱낱이 판서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래서 125쪽에는 사무외라고 하는 것이 중간에 있죠? 네가지 두려움이 없는 것이, 부처님에게 사무외가 있고 보살들에게도 또 사무외가 있어요. 부처님의 사무외는
사무외(四無畏):
①부처님의 四무외는,
나는 일체지를 가진 사람이라 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
나는 온갖 번뇌를 끊었노라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
불도를 장애하는 법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
고통을 없애는 도를 말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이요.
②보살의 四무외는,
경법과 뜻을 기억하고 법문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고.
중생의 성품을 알고 근기에 맞춰 법문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고.
문답을 잘하면서 법문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고.
중생의 의혹을 잘 끊어주면서 법문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일체지를 가진 사람이라 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 모든 지혜를 가졌다, 그러니 아무 것도 두려움이 없죠.
나는 온갖 번뇌를 끊었노라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
불도를 장애하는 법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 또
고통을 없애는 도를 말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 그게 이제 부처님의 사무외고
그다음에 보살의 사무외
경법과 뜻을 기억하고 법문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고,
중생의 성품을 알고 근기에 맞춰 법문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고, 문답을 잘하면서 법문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고,
중생의 의혹을 잘 끊어주면서 법문을 말하여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136쪽에, 일일이 내가 다 찾아 놨지 (웃음) 136쪽 중간에 보면 십팔불공(十八佛共) 있죠. 부처님께만 있는 열 여덟 가지 공덕들이다, 그랬어요.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불공: 같지 않다 즉 특수하다는 의미]
부처님께만 있는 十八가지 공덕법이니
二승이나 보살에게는 공통되지 아니하므로 불공법이라 함.
1)몸이 실수 없고,
2)입이 실수 없고,
3)생각이 실수 없고,
4)두 가지 생각이 없고,
5)선정을 여읜 마음이 없고,
6)알고서 버리지 않는 것이 없고,
7)하고자 하는 욕망이 감함이 없고,
8)정진이 감함이 없고,
9)억념[기억]함이 감함이 없고,
10)지혜가 감함이 없고,
11)해탈이 감함이 없고,
12)해탈지견이 감함이 없고,
13)온갖 몸으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14)온갖 말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15)온갖 뜻으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16)지혜로 지나간 세상 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고,
17)지혜로 이 다음 세상 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고,
18)지혜로 지금 세상 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는 것.
일승이나 보살에게는 공통되지 아니하므로 불공법이다, 불공(不共)이라는 말은 같지 않다,이 말이예요, 특수하다는 이 말이예요.
몸이 실수 없고, 입이 실수 없고, 생각이 실수 없고, 또 두 가지 마음이 없고, 선정을 여읜 마음이 없고, 알고서 버리지 않는 것이 없고, 하고자 하는 욕망이 감함이 없고, 또, 정진이 감함이 없고, 억념함이, 기억하는 거죠, 감함이 없고, 지혜가 감함이 없고, 우리는 뭐 했다보면 자꾸 줄어들고, 쪼그라 들죠, 그런데 부처님은 쪼그라드는 일이 없어, 감함이 없어.
해탈이 감함이 없고, 해탈지견이 감함이 없고, 온갖 몸으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뭐 기억이 전만 못하느니 뭐 어쩌느니 전부 그래쌌는데 부처님은 이제, 그런 게 없는거죠,
온갖 말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지혜에 근거해서 말한다 이말이죠, 참 어려운 말이죠, 어려운 말인데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생각도 안해보고, 옛날 유교에서도 삼사후에 말하라, 세번 생각한 후에 말하라 흔히 그렇게 합니다마는 여기는 세번 생각하고 자시고 하게 아니고 지혜에 근거해서 말하라, 이말이예요,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