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정)
4/19 05:00 강서구청 출발
08:30 작은 싸리재 산행 시작
08:50 금만봉 분기점 (15분 산제)
09:30 왕사봉 2.4km
11:00 칠백이고지 3.2km
12:40 써레봉 갈림길 (30분 식사 휴식) 3.1km
14:30 용계재 4.1km
16:50 장선리재 3.1km
17:10 장선리 2.0km
8시간 40분 17.9km
(산행 일정)
4/20 07:40 장선리재 산행 출발
08:50 능암봉
09:20 말골재 (25분 휴식) 2.3km
10:30 장재봉 갈림봉
10:50 수재 1.2km
12:10 남당산 2.9km
12:30 450봉( 50분 식사 ,휴식) 0.8km
14:25 작봉산 2.3km
16:40 까치봉 3.2km
17:30 말목재 2.1km
9시간 50분 14.8km
(작은 싸리재)
크든 작든 많은 사고는 교훈을 남기고, 우리는 그것을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범죄라 할 수 있다.
내 조국의 국민성을 믿어 왔고, 역사의 흐름에 따라 진보를 향한 느린 걸음을 내딛는데 만족해 왔다.
오늘 금강 남녘을 둘러 싼 맥길에 또 한 걸음 올려 놓으면서, 금만봉 오름길이 왜 이리 무거운지..
내 신념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착한 백성들의 믿음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참사가 계속 되는데..
홀로 산마루를 지키는 내 애마는 건강한지.. 10년간 참 많은 산길을 누벼왔으니..점검도 해야겠다.
(금만봉/금남기맥 분기점에서 바라 본 운장산-연석산 )
사회의 발전은 기술적 발전과 그 보조를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일제의 잔재로 "엽전 타령" 이나 하는 것은 현상유지를 바라는 보수주의자들이 더 좋아한다.
백성이 사회의 진보를 확신하는 것은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활기 있는 발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합리성을 지켜야 할 公僕들의 집단이 돈에 탐닉되어 비합리적인 것에 빠진 탓에,
끊임 없는 실수와 事故의 연속중에도 배움이 없고, 그것마저도 발전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왕사봉에서)
기술적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며, 아무런 규제 없이 비합리적인 충동으로 지나 온 우리의 현실..
짧은 기간의 엄청난 경제 발전을 칭송하며, 돈 돈 돈에 미쳐 내달려 온 현실이 과연 옳은 것이었던가.
경제적 발전에 대한 무한한 영광이 가져다 준 끔찍한 현실을 직시하며, 인간적 균형 발전이 새삼 아쉽다.
조화롭지 못한 발전이 가져온 분열과 사회 질서의 붕괴가, 앞으로도 얼마나 더 큰 재앙으로 다가올 것인가..
기술적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도덕적인 힘과 합리적인 발전을 모색하지 않으면 진정한 진보란 없다.
(진안 알프스)
오늘날 대중이란 그리 무지하지도 않고, 스스로 정치력에 참여하여 자신의 이익을 대표하고자 한다.
선거철에 사고는 대형으로 터졌으니.. 정치 엘리트들이 획책하던 대중의 비접근이 방해 받게 되었다.
독재자들 처럼 정권을 잡은 후에는 대중들의 활동의욕을 없애려 노력하겠지만, 참사는 정치참여를 일깨운다.
위기의 시기에 대중심리는 엄청난 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 사회 집단의 이익을 넘어서는 감정의 폭발이다.
이러한 사태는 비합리적인 불균형의 사회가 매우 불안정하듯, 민주화를 위한 걸음에 결코 도움이 되질 않는다.
조기에 수습하고, 부패하고 비합리적인 공무원 사회를 혁명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분노를 잠재우기 힘들 것이다.
(칠백이고지 암릉)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사회적 위기가 소수 집단의 지배를 불러 와 대중을 통제하려 들고, 민주화를 후퇴시킨다.
사회적 권력이 집중되는 전문가 엘리트 집단, 관료집단, 군인집단 , 이들은 항상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세분화 되고 복잡한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대중 여론의 향방에 역행하는 비민주화는 사실 힘들다.
우리는그 동안 이 땅의 민주화 과정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진척 되었는가 되묻고, 위기의 극복에 조심스러워야 한다
예전 처럼 드러나는 큰 폭력에 의해 대중 집단을 억누르기엔 힘들겠지만, 여론의 조작이라는 술수는 상존한다.
부디 얕은 머리 굴리지 말고 , 서민 대중의 분노를 깨달아 민주적 질서에 기초한 올바른 질서를 세워야 한다.
(신흥골 계곡)
과연 우리 인간의 마음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진보를 향해 있는가 되묻고 싶은 오늘날이다.
아무리 시스템을 강조하며 잘 이루어진 현대 사회의 조직일지라도, 인간정신을 잃으면 더 큰 비극이 기다린다.
뗏목 위에서 예견되는 사고를 헤쳐 나가는 옛적의 결과 보다도, 현대적 수송 조직의 사고는 그 충격이 매우 크다.
우리의 진보에 대한 믿음과,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의지가 붕괴 되는 위기에, 바로 차라리 퇴보를 떠올릴 수도 있다.
불과 며칠전 규제 개혁이니, 발전을 위한 고통이니 떠들던 정치권이, 꼭 필요한 규제를 다시 들먹인다.
앞서 규제와 시스템을 설득하며 수 많은 입법규제를 외칠 때 누가 그 붕괴를 예상하였든가..균형 발전이 필요하다.
(칠백이고지 능선길)
합리적 발전이란 권위를 가진 정부 당국의 조직화와 예정된 계획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비록 조직 속에서 살아 가는 개인일지라도 스스로의 행위와 자기 삶에 대한 합리적인 思考가 필요하다.
자기 합리화란 그런 면에서 스스로의 감정적 충동을 억제할 줄 알고, 시스템의 예정된 목표를 잘 이해함에 기초한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이란 제도를 만들어 왔고, 역사의 발전을 위한 예정된 목표를 인간 중심의 도덕으로 설정해 왔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저 바다의 참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선장, 선원 외에 모든 관계자들 중에 과연 누가 합리적인가..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단계에서라도, 저 미친 충동이 날뛰고 춤추는 운항계획에 브레이크를 걸 수 없었을까..
(써래봉)
사회 전체가 합리적이라는 경제적인 사고는 쉽게 돈 벌고, 다소 위험을 무릅쓰는 가운데 이익이 있다고..
미친 충동을 잉태한 기능 위주의 전체 사고가 개개인의 통찰력과 책임감을 마비시킨 결과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독립적인 판단 능력인 실제적 합리적 사고는 무능해지고, 오직 병든 목표에 자기합리화를 꾀한다.
지금 우리는 어느 누가 우리 사회의 복합적 병폐가 적나라하게 집적되어 나타난 사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미안하다 아이들아..잘못했다 내 아들 딸들아..수십번 수백번 되뇌이지만..반성으로 새로운 질서에 순응할 뿐이다.
(대둔산/천등산)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 질서와 시스템을 연구하는 것은 소수 엘리트에 한정되고, 그들이 정보를 독식한다.
공직의 중추적인 지위는 확고해지고, 대중은 의사결정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맡기고 판단능력은 사라진다.
그리하여 나라의 운영을 세금으로 맡긴 공복들에게 간청을 해야 하는 무기력 상태에 빠졌다.
백성은 다가올 재난을 예측할 수도 없고, 공적 질서의 메카니즘을 이해하기 힘들어 공포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벌써 19세기 자본주의의 시작단계에서 그 폐해로서 논의되던 이야기다.
비록 늦게 출발한 이 땅의 자유 민주주의라 할지라도, 지금 21세기에 정보의 공유로 사회질서 확립에 동참해야 한다.
(장선리재)
인간이 모두가 항상 합리적인 사고로 합리적인 발전만을 기대할 수는 없고 , 그것만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통제 받지 않는 충동과 자기 모순적인 행동일지라도, 자유로운 표현이 예술과 창조와 발전를 가져오기도 한다.
단지 사회 구조와 조화되지 않은 비합리적 욕구들이 정치적 영역에 파고들면 위험한 것이다.
권력과 영합하고, 개인의 사욕과 결부되어 결국 폭력적인 범죄로 나타나 오늘의 비극적 事故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학적, 심리학적 논리는 보수적 독재자든, 진보적 사회주의자든 모두들 대중을 선동할 기회에 이용된다.
그것은 오늘날 전쟁 억지를 위한 군비냐,자국 이익의 보호를 위한 전쟁 수행을 위한 군비인가 하는 논거와도 같다.
(전날 지나온 금남기맥 마루금)
많은 교육을 통해 지적인 발전과 도덕을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사회가 그리 단순하지 않은 까닭이다.
고대 민족적 집단군으로 끼리끼리 모여 사는 사회에서 무슨 개인적인 도덕을 논하고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산업사회의 개인적 경쟁으로 시작된, 사적인 이해가 최고라는 도덕율이 개인의 인격적 책임 마저도 강요해 왔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개인적인 주관에 의한 도덕의 기준과 개인 경쟁의 혼돈된 상태로 많은 이론과 설전으로 괴로웠다.
오늘날 결국 우리는 노동자든 자본가든 대중들은 사적인 이해를 포기하고 집단에 통합되어 조직을 키우는 단계에 왔다.
문제는 그러한 집단 중에서 종교적 특수 집단이 사익적 경쟁을 위한 위험한 도덕률로 지배될때 그것은 바로 이단이 된다.
그리고 많은 생명을 잃게 되는 집단 사고로 이어지고, 타인의 생명까지도 해를 입히게 된 것이다.
(철쭉은 한창입니다)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발전 과정에서 건설적이고 희망을 가져 왔다.
그러나, 항상 이중적인 도덕이 생겨나고, 시민적인 사적생활의 도덕과 국가 간의 강탈 도덕이 상존한다.
이번 사고에 대처하는 공적 기관들의 도덕은 또 얼마나 그 근본이 무식한지는 똑똑히 드러났다.
언론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의 이중 잣대로, 소위 "알려야 산다"는 경쟁 도덕이 개인의 인격을 말살했다.
보여주기 싫은 아픔을 인터뷰하고, 남기기 싫은 기억들을 연거푸 방송으로 들추어 낸다.
정보를 독점하고 엘리트를 자부하는 언론, 공직자들.. 그들에게 누가 옳은 도덕을 가르칠 것인가?
우리 대중들이 채택하고 따라야 할 도덕은 과연 어느 집단의 논리가 맞는 것일까?..
(말목재)
말목재 언덕에 자리 잡은 석촌 교회를 바라보며 멈춰진 종소리가 다시 저 하늘에 울리기를,,
아이들아 부디 먼저 간 그곳에서 먼저 간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고..
골치 아픈 배움이 없어도 늘 봄 바람 살랑거리는 꽃길 천국에서 훌훌 날아 오르며
이 땅에 남아 슬픈 우리 어른들을 지켜 봐 주려무나..
4/22 道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