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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빵
요한 6장 빵의 표징 계속(6,35-71)
(장 들로르므 신부님 강의 4번째 만남, 1997년 1월 14일)
A. “나는 생명의 빵이다”(35-51절)
빵을 먹은 이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기 위해 붙들려 하지 않으며, 그들은 이제 요청자가 된다. 그들의 갈망이 이 “빵”에 실려 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깜짝 놀랄 단언을 하신다. 바로 이 단언의 지점에서, 예수님은 당신 말씀으로 빵-표징(무진장한 빵에서 알아보아야 함)에서 참된 빵(표징이 가리키는 현실)으로 까지 넘어가게 했다. 예수님은 표징의 의미들을, 영원한 생명 속에 머무는 빵의 방향 쪽으로 펼쳐왔다. 예수님은 이 빵을 주는 자의 역할을 훨씬 초월하여, 지금 당신의 존재를 단언하신다. 예수님! 바로 당신이 그 빵이다.
이것은 단순한 비교 혹은 비유적 의미의 “빵”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아니다. 문장 형식은 놀랍다. 예수님은 “나는 빵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분이 빵이 아님은 명확하다. 빵에 대해서라면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두 개의 시니피앙(기표)을 중첩시켜 놓으신다. 곧 당신 존재와 죽지 않으려면 생명에 꼭 필요한 요소인 생명의 빵을 포개놓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게도 보게도 해주지 않고서, ‘당신 존재’가 ‘생명의 빵’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말의 생경함과 문장의 힘을 동시에 존중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프랑소아 제뉘의 말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 교차한 다른 두 지점에서 쏜 레이저 광선처럼”, 두 개의 시니피앙(기표)을 교차시킨다. 사랑은 기어코 언어를 찾아내어,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 내기에 이른다.
그분이 말한 것은 보여질 수는 없다. 곧 우리는 말의 질서 안에, 그리고 말의 호출해내는 힘 안에 있다. 이 말은 듣는 이, 곧 “진리”가 건드릴 수 있는 그곳에 도달하려는 듣는 이를 뒤흔들어 놓는다. 왜냐하면 이 말은 빵에 대해 말하면서 그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은 자신을 밝히는 ‘나’의 말이다. 이 말은 말하는 평소의 방식에서 그분을 끌어낸다. 이 ‘나’와 이 ‘생명의 빵’ 사이에는 끝끝내 좁혀지지 않는 격차가 있으며, 그분의 말만이 이 격차를 채우러 온다. 이 말은 지식을 주지도, 추론하지도, 이기려고 뻣대지도 않는다. 이 말은 듣는 이의 내면에서, 그의 살고픈 원의에, 빵에 대한 그의 배고픔에, 신뢰할 수 있는 타자에게서 오는 말에 대한 그의 배고픔에 말을 건넨다.
a/ 세 행위자들 사이의 이야기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단언은(35절과 48절, 51절) 하나의 전개하는 틀이 되며, 이 전개는 반박(유다인들의 수군거림, 41-42절) 때문에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단언들이 반복되며 보완된다. 이 주장들은 중심이 되는 세 행위자들이 개입하는 행보를 그려낸다. 곧
- “나”,
- “~는 사람” 혹은 “그들” 혹은 “너희”로 지칭된 인간 행위자
- “나를 보내신 분 혹은 아버지.”
이 행보에서 쟁점은 “나-빵”이 양식인 “영원한 생명”이다.
이 생명은 죽음을 배제한다.(47절, 49-51절)
이 생명이 죽음을 면제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생명은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다시 살릴 것이다)로써 초월하기 때문이다.(39-40절)
프로그램은 “나에게 오는” 인간 행위자와 “하늘에서 내려온” “나”와의 만남으로 실현된다. 그러나 이 두 행위자는 모두 아버지의 움직임 아래 있다. 곧 ‘나’는 파견된 이며, 아버지의 뜻을 행할 책임이 있다.(37절, 39절, 44-46절) 이 세 행위자의 공조작용을 다음과 같이 도표화할 수 있다.
아버지
주심, 이끌어주심 보내심
가르침을 받을 것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사람 ---- 오는 사람 -- 물리치지 않을 것 ------ “나”(예수님)
믿는 사람 --------- (하나도) 잃지 않고
다시 살릴 것
b/ 보고 믿기, “나에게 오라” 그리고 “나를 믿어라”
“너희”의 역할을 명확히 하는 것이 남았다. 청자들은 그분께 오면서 제안된 행보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장애물들에 대해 경고 받는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36절)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43절. 수군거림은 부정적 비판 태도다.) 자신을 정당화 하지 않고서,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해 말하며, 영원한 생명의 행보에서 일어나는 것에서 자신에 대해 밝혀지는 것을 그들이 인정하도록 초대한다. 제기된 문제는 다음과 같다. “나 - 생명의 빵”을 먹으면서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적합한 주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쌍의 동사를 명확히 하자.
- “보다” / “믿다”
- “나에게 오다” / “나를 믿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았고, 그분의 행동과 그분의 이동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는 말과 그들이 그분의 고향과 부모 친척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사이의 격차로 인해 걸려 넘어진다. 이것은 또한 “보다”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부모나 친척을 부인하지 않으며, 당신의 몸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이 몸에서 보이는 것에 따라, 예수님과 그분께 오는 이들이 서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거기 보이는 것은 이 앎을 초월하며, 그분의 말씀에서부터 밝혀진다.
“보다”와 “믿다”는 앎의 두 양태처럼 활용된다.(40절)
이 둘 사이에 필요한 긴장이 있다. 곧
- 첫째, “보다”는 인간의 기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곧 예수님의 역사적 장소와 시간이다.
- 둘째, “믿다”는 그분의 말씀이 드러내는 것이다.
첫째 지식은 “보기”(누구의 아들, 어떤 장소 출신)의 시간과 공간적 지표들이 있다.
두 번째 지식은 “보기”를 빠져나가며, 말하는 사람의 신비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그 지표들을 찾아야 한다.
부모는 그들이 물으면 어떤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다. 내 아이는 누구인가? 그가 말하는 것은 어디서 왔는가? 등. 부모는 그들의 자녀의 입에서 나온 말의 기원이 아님을 알고 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이 두 형태 곧 “요셉의 아들”과 아버지께 파견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를 연결해야만 한다. “믿다”는 “보다”(상상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으려면)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보다”는 한계가 있으며(아무도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다. 40절) “믿다”를 필요로 한다.(아버지의 활동)
“나에게 오다”와 “나를 믿다”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오다”는 예수님의 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 예수님을 향한 갈망을 보여준다.
-“나를 믿다”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의 존재를 인정함을 내포한다. 이 인정은 갈망의 움직임 아래 있다. 왜냐하면 이 인정은 그 대상을 소진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과의 만남은 이 두 움직임이 서로 겹쳐지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c/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다”에 대해 예수님은 명확히 하신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다.”(37절) 이어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44절)
어떤 이가 오지 않거나 그분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거나 이끌어 주지 않았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라고 할 때 말하려는 바는 보편적이며 불특정이다. 이에 비해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는 단수형이며 개인적이다.
구분은 마치 한 주체가 둘로 나뉜 것처럼 주체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 한편으로는 그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선택에 앞서 그의 심오한 존재를 드러내는 그 주체 안에 한 지침이다.
- 또 한편으로는 그가 결정해야 하며 개인인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경계는 그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이 지침을 수용하면서, 각자가 자신을 책임질 필요의 근거를 제공한다.
“아버지”에게서 온 도약은 “아들”과의 만남 속에서 완성된다. “주어진 것”에 대해 우리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으나, 이것은 존재하며 만남을 준비한다. 그래서 만남은 “보다”를 초월한다. “나-빵”의 심오함은 “나에게 오는 사람” 안에 깊이 뿌리내린 열망에 응답한다.
(나에게) 오지 않는 이에게는 이 도약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미 “주어진 것”은 그분께 오는 움직임을 가능하게 한다. 44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그 자신으로써는 예수님께 오는 것이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불가능한 것이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덕분에 실현가능하다. 아버지께서 파견한 이(파견의 움직임)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는 사람(이끌림의 움직임)에서 볼 수 있는 이 두 움직임이 합류한다. 만남의 자리는 “보다”의 차원에서는 “요셉의 아들”이며, “믿다”의 차원에서는 “아들”이다.
마지막 명시: 이끌림을 받은 사람을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만남은 46절에서 보듯이 “하느님에게서 온 이”이며 “아버지를 본 이”의 가르침을 통해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이루어진다.) 바로 거기서, 진리가 낳음의 말씀이자 생명에로 탄생시키는 말씀처럼 말하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렇게, “나에게 오는 사람”이 받는 것은 그가 갈망하고 요청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곧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7절) 그는 빵이나 만나와는 다른 것을 먹는다. 곧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49-51절)은 우리가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해 있는 “실재”를 가리킨다. 이 빵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탄생과 자녀적 삶의 규칙에 속한다. 이 빵은 배불리 먹은 후에도 다시 반복되는 배고픔을 사라지게 한다.
이 의미에서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50-51절) 이 빵은 갈망을 끄지 않는다. 이 빵이 양식이 되는 생명처럼 이 갈망은 끌 수 없다.
B.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51-59절)
48-51절에서는 만나를 “먹고” 죽은 사람들과 생명의 빵을 “먹고” 죽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면서 장면전환을 표시한다. 차이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에 기인한다.(이것은 바다 위에서 이루어진 수수께끼 같은 만남을 참조케 한다.) 47절(“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과 50-51절(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을 연결하면서, “믿다”는 이제 “먹다”로 말해짐을 보게 된다. 이 “믿다”는 죽음에 맞서 생명을 양육한다. “먹다”에는 뉘앙스가 덧붙여져 있다. 곧 이 “믿다”라는 것은 어떤 신심이나 어떤 이데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화시켜서 자기 몸 안에서 제 것으로 삼아 동화시키는 것이다. 이 실재론은, 만일 상상으로만 알아듣는다면, 참을 수 없을 정도까지 밀고 나갈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살을 빵처럼 준다고 말한다.(51절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53-57절)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ㄴ)는 결정적인 단언이다. 예수님은 빵을 주는 분이며, 그분은 빵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줄 것이다. 더 명확히 그분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그의 죽을 조건인 그 자신)을 줄 것이다. 이 의미에서 생명을 주기 위해 주는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고, 그의 피는 “참된 음료”다. 이 표현들은 그의 파스카 수난을 지칭한다.
(4절을 잊지 말자.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이 두 단언을 병렬해보자.
“나는 생명의 빵 이다”
“내 살과 내 피는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 이다”
첫 번째 문장에서 두 번째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은 성체성사에서부터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성체성사가 이 두 문장에서부터 명확해진다. 왜냐하면 그는 참 생명의 “참된” 빵이며, 그의 살과 피는 “참된” 양식이며 음료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 번째 문장에서 두 번째 문장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분이 자기 살을 주고(그분의 죽을 목숨) 그분이 죽고 부재해야 한다. 아무도 그 살로 밥을 짓기 위해 그분을 강탈하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그분을 집어삼킬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은 다른 현존을 위해 사라질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55-56절)
C. 제자들을 위한 진리의 시련 (60-71절)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52절)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60절) 예수님은 화를 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들음을 향한 방향을 정하도록 해주신다. 이 말씀들은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차원 바깥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다. 그분은 당신이 내려왔던 전에 있던 곳으로 다시 올라가실 것이다.(62절) 따라서 인육을 먹는 무시무시한 식사를 상상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상상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 자체에서 들리는 실재론(realism)이 귀에 거슬리지 않고서야 그들이 이 말들을 되새김질 하겠는가.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63-64절) “살/피”는 “생명/영”과 관련해서 배치된다. 그리고 살과 피는, 믿음이 그분을 맞아들이듯이, ‘영’인 한 말씀을 드러낸다. 살과 피는 영과 말씀이 참여(결합)하지 않고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음식으로 주어진 ‘살과 피’와 이에 대해 말하는 ‘말씀과 영’을 함께 받아들이고 “먹고” “믿어”야 한다.
말씀-영을 듣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사형)이 양식으로 주어진 선물로써 들려지기 위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선물은 단지 듣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먹어야 한다. 혹은 오히려 “먹고” “깨물어”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 예수님은 죽음과 부재에로 넘어가신다. 그러나 그분의 살과 피는 한번 양식으로 주어진 채로 영원히 머무른다. 그것은 먹거나 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맛보고 소화하기 위함이다.(54-58절) 이 양식은 말씀을 듣고 되새김질 하고 음미하면서만 흡수될 수 있다. 먹는 것은 영이다. 왜냐하면 먹음은 곧 듣는 것이고, 그것이 먹는 것이기 때문에 양식이 되는 들음이다. 듣는 것과 먹는 것은 떼어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이 준 살에서 솟아나는 생명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장 깔루와 프랑소아 제뉘의 통찰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 생명을 주는 한 몸의 말이요 청자의 믿음은 먹으면서 생명을 얻는 한 몸의 믿음”인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67-71절)이 얘기된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같은 의미로 결론짓는다. 예수님과 함께 머문 이들도 다른 이들보다 더 잘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영원한 생명의 (실재) 말씀이 있는 분이 아닌 어떤 이에게 갈 수 있겠으며, 어떤 다른 이를 그분만큼 신뢰할 수 있겠는가.
장 들로르므 신부님 강의록에서
수정 정리, 마리테스와 안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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