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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봄학기
KMI 동역자 세미나 / 발제자 : 김영복 목사
삼위일체론 연구(A Study of the Trinity)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신학논쟁 중 하나인 삼위일체론은 신학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일선 강단의 목회자들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구약은 한 하나님을 계시하는 듯 보여진다(신 6:4). 그러나 이미 창세기 1장 26-27절과 3장 22절에서 “우리의 형상과 모양”이란 구절은 복수 하나님의 내적인 자기 협의를 보여준다. 이렇게 단일하시며 동시에 삼위이심이 구약에서는 암시적으로 나타나나 신약에서는 명시적으로 계시되었다(마 3:16-17, 28:19; 고후 14:13; 갈 4:4-6; 엡 4:4-6 등).
초대 교회는 유대적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교회에게 유대교 신앙 못지않게 영향을 끼친 것은 점증하던 헬라적 사고였다. 철학과 논리적 사고를 강조하는 헬라 문화는, 교회가 그리스도 이후 처음 몇 세기 동안 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갈 무렵, 초대교인들이 그 안에서 살고, 일하고, 생각했던 큰 환경이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이 중요한 신학적 질문에 대해 바른 이해와 표현을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세기 교회가 점차 자신의 믿음을 헬라적 사고방식으로 표현해야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성경이 역사 속에서 ‘일하시며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반면, 헬라 철학의 주된 관심은 ‘형이상학적 존재’-실재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즉,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의 차이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과 표현의 근본적 변화는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있어 보다 명확한 대답을 요구하게 되었다.1)
글의 순서는 먼저 교회 역사상에 나타난 주요 이대 이단을 밝히고 구약과 신약에서의 증거를 찾은 뒤 교리적인 이해를 밝히고 이 교리가 우리의 신앙과 삶에 미치는 영향 등을 작성해보고자 한다.
I. 삼위일체에 대한 양대 이단
먼저 바른 것을 알아내기 위해 그릇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피해서 바른 것을 이해한다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본다. 따라서 이단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밝혀 걸림돌이 되는 것을 걷어내는 작업이 중요하다.2) 한국교회의 삼위일체 이해 가운데서 많은 오해는 삼위일체 교리를 樣態論的(양태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보통 삼위일체를 비유적으로 설명할 때 많이 드는 물이 얼음이 되었다가 또 수증기도 되는 것, 또한 한 아버지가 직장에서는 사장이 되고 집에서는 남편이 되고 또 아들이 되고 하는 것들은 모두 양태론의 이단이다. 그리고 태양이 본체가 있고 빛이 있고 열이 나오는 비유, 사과에 껍질이 있고 씨가 있는 것 등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도 모두 이단적인 생각들이다. 사실 영원의 세계에 거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창조된 이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 설명하려는 시도가 옳지 않은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의 兩性(양성)과 삼위일체론에서 가장 많은 논쟁과 이단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따라서 많은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도 많은 이론들이 나왔으나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것은 樣態論(양태론)과 養子論(양자론)이다. 양태론은 일체를 위하여 삼위를 희생시켰고 양자론은 삼위를 위하여 일체를 희생시켰다. 3)
1. 樣態論(양태론-Modalism)
양태론은 Sabellius에 의해 대표적으로 주창되어 Sabellianism으로 또한 一位三樣說(일위삼양설)이라 불린다. 이 이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구약시대에는 성부로, 신약시대에는 성자로, 교회시대에는 성령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즉, 배우 한 사람이 세 가지 배역을 맡아서 한 역할이 끝나면 다른 인물로 분장을 하여 무대에 나오고, 그 역할이 끝나면 또 다른 제 삼의 인물로 나타난다는 그런 그릇된 이론이다. 이 양태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삼위 하나님의 구별을 전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양태론 가운데도 성부속성설, 범신론적 계승설, 이원론적 가족설, 신자학적 양태설, 범신론적 과정설, 계시 양태설등 다양한 이론들이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성부 고난설(Patripassianism)이다. 이것은 “아들은 성부에게서 나온 다른 格位(격위)가 아니라 바로 성부 자신이며 단지 이름만이 다르다는 것이다. 대표자는 로마의 감독(현재의 교황) Praxeas로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부 자신이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시고 자신이 고난을 받으셨는데 참으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4) 이 성부 고난설은 그 영향이 막강하여 로마의 감독 네 사람이 30여 년간이나 이 이론을 주장할 정도였다.
2. 養子論(양자론)
양자론을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이라고도 부른다. 이유는 ‘단순한 인간’이 신적 능력(δύναμις)에 의하여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승격(혹은 入養) 되거나, 혹은 로고스(말씀)나 영이 인간 예수에게 임하여 그를 養子(양자)로 채용하였다(adopted)라는 생각 속에 삼위의 다이나믹한 움직임이 엿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 보인다.5) 양자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예수는 피조물이었으나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받은 후 그리스도 혹은 아들로 승격이 되었고, 그 후 점진적인 성장을 하여 영광의 세계에 들어감과 동시에 혹은 부활 후에 불변의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자론은 신적 피조물 또는 인간이었다가 하나님의 아들로 승격되는 力動性(역동성)을 띠고 있는데 그 주장은 각기 서로 다르다.6)
위의 두 이론이 대표적인 삼위일체론의 이단설이다.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설은 이런 것이 아니다. 혹, 우리에게 이런 생각이 있었다면 속히 버리고 바른 가르침을 세워야할 것이다.
II.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증거
성경에는 삼위일체(trinity)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교리는 아니다. 성경 66권 안에 풍부하게 계시되어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증명하려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에 기초한 생각이 되어야하지 논리나 합리적인 생각을 따라서 주장된다면 이단의 주장으로 빗나가기가 쉽다.
1. 구약에서의 증거
구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내용들은 초보적이고 숨기어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장 이르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곳이 창조의 기사에서이다. 창세기 1장 3절을 보면 하나님(Elohim)께서 말씀과 성령을 수단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여기서 처음으로 말씀이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인격적인 분으로 나타난다. 또한 성령님도 창조 사역에 있어서 생명과 질서를 세우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으실 우주를 계획하셨고, 당신의 생각을 말씀(Word) 속에서 나타내셨고, 당신의 영(His Spirit)을 살려내는 원리(animating principle)로 만드셨다. 이 사실은 지어진 우주가 하나님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위치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계는 그 지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창세기 1장 26절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일하셨으며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나 후에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잃을 때 이런 특권들이 상실되고 말았음을 보여준다. 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다스림은 잠언과 욥기에서는 의인화된 말씀(Word), 곧 지혜(Wisdom)와 연결되며(잠 8:22 ff.; 욥 28:23-27), 모든 축복과 힘과 용기와 문화와 정부의 근원이 되시는 성령님과도 연결된다(출 31:3; 민 11:25; 삿 3:10).7)
창조에서 계시된 3위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구속 사역에서는 더욱 명확해진다. 구속의 계시는 mal'ak Yaweh, 때때로 언약의 천사로 나타난 여호와의 使者에게 맡겨졌다.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 시대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로 볼 수 있다. 이 언약의 사자를 신적인 존재로 구약의 모든 성경 구절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삼하 24장 16절; 왕상 19장 5절; 왕하 19장 35절에서는 확실히 이 사자가 신적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는 분으로 말하고 있다. 창 16:7; 24:7; 48:16절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사자는 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신의 위엄과 능력까지 갖추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나누시며 하나님께 적절한 존경과 예배까지 받으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에게도 계시와 구속 사역과 연결하여 탁월한 모습이 주어졌다. 특히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메시아 예언에 있어 직임이 부여되었고(사 11:2, 42:1, 61:1)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과 순종에 응답하시는 일에 직임이 부여되었다(욜 2:28, 사 32:15, 겔 36:26, 27). 이처럼 천사-메센저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께서 주관적 모습으로는 성령님 안에서 또 성령님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며 구원의 일들을 위하여 모든 축복과 은사를 나눠주시는 분이시다. 민수기 6장 24절에 있는 제사장 아론의 3중의 축복도 신약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축도(고후 13;13)의 원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8)
2. 중간기의 발전
중간기 시대에는 막연하고 어렴풋하기는 하지만 신약에 나타나는 성숙된 삼위일체 교리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초월적이고 멀리 떠나계신 분으로 믿어왔는데 이런 유대인의 사고는 자연히 중보자(mediator)를 요구하게 되었다. 필로가 바로 이 하나님과 인간 간의 중보 하는 존재를 생각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중보하는 직책은 바로 메시아의 직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신적인 메시아에게도 여전히 초월적이고 멀리 계신 분이라는 생각들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실 때, 말라기 선지자 이후 떠나셨던 성령님도 함께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비록 삼위의 인격에 대한 희미한 생각이 나타났으나 보다 구체적이고 명료한 삼위일체의 교훈은 신약시대를 기다려야만 하였다.9)
3. 신약에서의 증거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앞서 말라기 선지자 이후 침묵하셨던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 속에 찾아오셨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세례 요한이 성령의 임재와 부름을 알게 되었다. 결과로 세례 요한은 삼위 하나님께 대한 언급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오실 메시야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성령의 세례를 선포하며 상징으로 물세례를 주었다. 성육신에서 성령으로 잉태함이 마리아에게 임하였고 그녀에게서 나신 아들은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the Son of the Highest)이라 불렸다. 이와 같이 성부와 성령이 아들의 성육신 가운데서 드러나게 되었다.
요단강에서 주님이 세례 받으실 때 삼위 하나님이 비로소 구별될 수 있었다: 성자는 세례를 받으시고, 성부는 하늘로서 말씀하시고, 성령님은 누구나 볼 수 있는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셨다. 성부와 성령의 증거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권세를 받으셨다. 세례 요한은 아주 일찍부터 성령은 주님과 함께 할 뿐 아니라 메시야로부터 나오시는 분으로 깨달았다. 이리하여 제 삼위는 하나님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예수님은 사사로이 열두제자를 가르칠 때뿐 아니라 공생애에서도 늘 아버지께 시선을 돌리게 하였다. 아버지는 그를 보내신 분이요 아버지로부터 권세를 받았음을 증명하신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요 5:19-20).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주님은 자신의 성자되심이 단지 다윗이 증거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으로부터임을 주장하시므로 (마 22:43), 그의 신성과 先在하심을 증거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보다 명확히 성령님의 인격성과 직임에 대해 말씀하신 곳은 그의 공생애 사역이 끝나갈 즈음 요한복음 14장과 16장이다. 그리고 주님은 성령님을 성부에게서와 성자 자신으로부터 함께 나오시는 영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이 말씀이 성령의 '이중 발출'(double procession)의 증명하는 말씀이다.10)
성부와 성령의 교제는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되어진 구원 사역 가운데서 나타난다. 성부는 성자를 보내어 구속사역을 이루게 하시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보내셔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사역을 적용하게 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왜 언약의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나타나셨는지 명확히 알게 된다. 그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세 위격에 다같이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삼위일체의 가르침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 곳이 바로 세례공식에서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Baptizing into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마 28:19). 여기서 성부의 이름 하나만 쓰지 않고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사용함으로 기독교가 유대교와 명백히 갈라진 것을 보여준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성령의 성격을 한층 더 뛰어나게 하며 동시에 성자 위에 성령의 새 빛을 비치었다. 사도들이 성령님과 성부, 성자와의 관계를 명확히 깨닫게 된 것은 사도행전으로부터이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설명하면서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으로 말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 2:32,33). 사도적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신앙 위에 세워졌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바울과 베드로, 요한, 야고보, 유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에 이르기까지 구원은 공히 삼위 하나님으로부터이며 삼위 개인마다 예배와 경배를 받으심을 나타낸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이 사도적 축도야말로 사도들의 가르침의 총 정리일 뿐 아니라 성도들의 체험가운데서 삼위일체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해석해주는 것이다. 성자의 구원의 은혜가 성부의 사랑으로 그리고 성령과의 교통하심으로 바로 나가게 한다는 것이다.
III. 삼위일체론의 교리적 이해
한국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 가운데 성도들을 가장 당혹케하는 교리 중 하나가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세 분 하나님이 한분이 되고, 한 분 하나님이 세 분이 되는 이 이상한 교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많은 사람들은 포기하고, 또 일부 사람들은 세 분 하나님을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양태로 곧 양태론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필자는 교리적 이해를 위해다음의 순서로 작성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은 삼위이심, 2.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 3. 삼위 하나님의 구별성과 독특성, 4.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한 분’이란 용어의 의미,
1. 삼위가 계신다
삼위일체론은 삼위로부터 출발해야 깨닫기가 쉽다. 칼빈도 먼저 철저하게 각 위격을 알고 난 후에 하나되심을 제대로 이해하여야만 그 하나님이 한분이심을 온전히 알게된다고 하였다.11) 앞에서 살핀 양대 이단인 양태론과 양자론 모두 한분 하나님, ‘一體’를 강조하며 삼위 하나님을 한 분으로 맞추려 노력하다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생각들로 빠짐으로 이단설로 떨어지고 말았다. 더욱이 한국 성도들에게 삼위일체설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이 ‘여호와’ 神에 대한 우리의 표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호와 신을 ‘하나님’으로 부르는데 이는 선교초기 우리의 가장 큰 신인 ‘하늘님’, 또는 ‘하느님’의 이름을 따서 ‘하나님’이라 하였던 것이다. 이 ‘하나님’이란 말은 쉽게 ‘하나이신 신’을 능히 연상시킬 수 있는 용어이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하면 한 분이신 하나님부터 생각하기 쉬우나 중요한 것은 삼위, 세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한국의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은 하나님의 삼위 되심의 삼위를 세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셋이긴 하지만 세 분이 아닌 다른 어떤 형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빨리 버려야할 사고이다.12) 많은 경우 삼위는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어떤 형태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초대교회가 이미 이단으로 규정한 Sabellius 이단, 곧 양태론 이단으로 흐르는 사고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 되심을 세 분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는 첫 단추를 잘못 꿴 셈이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일 때는 정확한 말이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삼위를 지칭하는 말로서는 지극히 부적절하다. 구약에 기술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세 분되심이 희미하게 나타나있지만 신약에는 아주 뚜렷하게 등장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장면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성경에 계시된 대표적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선교의 至上命令을 말씀하신 마태복음 28:19절에도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는 이 마태의 가르침을 따라 세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고 바로 이 세례를 베푼 자리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이 형성된 삶의 자리였다.
복음서는 삼위 중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술이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부터의 사도들과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성령의 활동이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사도들은 성부 하나님 외에 다른 두 하나님을 명백하게 경험하고 있었고, 다른 두 분 역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했고,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고 세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했다.
2. 삼위 하나님의 존재의 독특성
하나님이 세 분이라면 결국 삼신론이 옳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삼신론은 古代교회에서 이미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성경적으로도 정당치 않은 이론이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호간에 아무런 관계도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세 神이 아니라 상호 내주하시고 상호침투하시며 상통하시어 단일성(unity)을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단일성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 분 하나님이 하나이시라는 일체성의 내용은 무엇일까?
요한복음 10장 30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성자 예수와 성부 하나님이 하나라는 이 말씀은 이미 삼신론이 잘못임을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말씀이다. 그러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성경에 입각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역사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말씀을 떠나 인간의 思辨(사변)을 하면 안 된다. 문맥에서 성부와 성자가 하나라는 사실은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라는 말씀이 아니고,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말이다. 성부께서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께서 성부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그러므로 성자께서 행하시는 일은 성부께서 성자 안에서 자신의 일을 행하시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데 유념해야 할 것은 요한은 어느 곳에서도 성부가 성자이고 성자가 성부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가 한 분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한의 말의 핵심은 성부가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다는 것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자와 함께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성부와 함께 거하시는 이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만든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περιχῴρησις)13)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상호 침투와 함께하심의 의미는 예수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요 14:7-11 참고)고 언급한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성부와 성자의 하나 됨은 성부가 성자이시고 성자가 성부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는 성자와 함께 계시고 성자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성부는 성자와 함께 계시고 성자 안에 계신다’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고 아들이 행하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과 동일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의 신비는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페리코레시스적 양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는 양태는 성자와 성부가 성령 안에 거하시는 양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14)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위(僞) 알렉산드리아의 씨릴(Pseudo-Cyrill of Alexandria)이 최초로 사용하였다.15) 그리고 Damascus의 요한이 이를 표준원리로 확립한 뒤 동서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성부가 성자 안에 침투해서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침투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양태에 대한 성서적 표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16) 칼빈도 “단일체 안에서”(in solidum)라는 용어를 채용하여 삼위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이나 차별이나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한 하나님 안에서 삼위는 본래적으로, 태생적으로 상호인격적인 결합(cohension)이 되어있음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17)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자의 사역인 동시에 성부의 사역이다. 성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서부터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언제나 성자와 함께 계셨고 성자 안에 계셨다. 성자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성부는 어디 계셨을까? 성부께서는 십자가에서 성자와 함께 성자 안에서 함께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성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난을 받으셨다. 성자는 자신을 세상을 위해 내어주는 고난을 겪으셨고, 성부는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을 위해 내어주시는 고난을 겪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성자의 고난인 동시에 성부의 고난이었다. 이와 같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는 성자와 성령과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때부터 그를 잉태하신 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 출생하셨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 동안 그분 안에 계셨고 그분과 함께 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께서 온전히 거하셨던 역사는 오순절 이후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온전히 거하시는 역사로 변천된다. 이것은 성령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또 다른 형태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롬 8:9)이고,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롬 8:9)이고, 우리는 성령을 통해 아버지를 만난다. 따라서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는 성령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이 되고 성령이 성부가 되는 기괴한 사실을 설명하는 교리가 아니다. 그런 것은 기괴할 뿐만 아니라 있을 수도 없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은 한 분 하나님 안에 다른 두 하나님이 침투하여 거하시고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는 교리이다. 즉 한 하나님을 보면 그분과 더불어 다른 두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함께 보게 되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태에 대한 설명이다. 또한 삼위일체론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신 하나님 상호간에 일어나는 신비한 구원의 역사를 바르게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교리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세월이 흐르면서 삼위일체론은 점차 사변적 형태를 띠게 되는데, 이 사변적 형태로의 잘못된 발전의 핵심은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 되는 ‘3=1’의 괴상한 논리에로의 발전이다. 한 분이 세 분이 되고 세 분이 한 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있을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라는 괴상한 논리로 무장해 교회와 성도들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론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주로 서방교회에서 일어났다.18)
3. 삼위 하나님의 동등성과 구별성
1) 삼위 하나님은 동등하시다.
초대교회의 이단적인 가르침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아리우스가 끊임없이 제기한 것이 성자의 성부 종속설이다. 그가 이와 같이 증거한 이유는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낳았다’라는 말씀이 성경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 2편 7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 마태복음 3장 17절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우리가 이런 말씀 구절들로만 생각하면 분명히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에게 종속된 분이며 성부는 성자로부터 태어나신 분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어느 한 두 구절만 가지고 교리적 주장을 펼 수는 없다. 오히려 균형 잡힌 성경해석이 필요하다.
원래 삼위 하나님은 동등하신 분이시다. 칼빈은 동서방 교회 교부들의 글을 연구하여 각각의 공헌을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제시한 삼위일체 이해의 핵심은 삼위일체 안에서 각 위격들은 ‘스스로 하나님이심’(autotheos)을 증거하였다.19)성자 하나님은 빌립보서 2장 5절 말씀대로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시라 하셨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나 스스로 낮추시고 자신을 비우사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한다.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에도 ’태초에 계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고 증언한다. 요한복음 10장 30절 말씀에도 예수님께서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심지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하는 위기 상황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고 증언하셨다. 계속하여 38절 말씀에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피조됨을 배격한 칼빈은 이제 그의 영원성을 주장함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코자 한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조 시 그의 거룩한 입을 여실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신 분이 아니다. 신은 불변하시기 때문에 그 본질에 어떤 새로운 것이 덧붙여질 수 없을 뿐 아니라, 밖으로부터 무엇이 신에게로 다른 존재가 덧붙여질 수 없다. 창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말씀이 존재하시지 아니했다고 하는 것도 말도 되지 않는다. 말씀의 존재에는 시작이 없다. 왜냐하면 말씀 자신이 “아버지여 내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으로써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고 하실 때 “시간의 어떤 일정한 한계를 정하시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20)
그리스도는 그의 호칭이 하나님일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을 보면 그의 명백한 신성이 나타난다. 주는 “내 아버지와 함께 일한다”(요 5:17)고 하셨다. 그는 창조자일 뿐 아니라, 이적을 행하시므로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를 보이셨고 마음 속에 숨은 생각까지 아셨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 은사를 받아서 이적을 행한 것과는 달리, 자신의 능력으로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을 뿐 아니라, 사도들에게 병을 고치며 마귀를 쫓아내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권능을 주셨다(마 10:8; 막 3:15; 6:7). 그 안에 구원과 축복이 가득차 있음을 볼 때 그는 하나님이심이 충분히 드러난다. 그는 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는, 바로 “선과 의 자체”이다. 그는 생명이요 빛이시다. 또한 그리스도는 경배를 받아 마땅하다고 성경이 확언한다(빌2:10). 하나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섬기지 말고 절하지 말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경배를 받으시는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의 신성 또한 성경에서의 증거는 명확하다. 아름다운 세계가 유지되고 보존되는 것도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지만, 그 이전에 혼돈된 세계를 품안에 품으심으로 성령은 벌써 창조시부터 사역하고 계심을 성경은 밝히 보여주고 있다. 성령님은 도처에 편재하시고, 하늘과 땅의 만물을 붙드시며, 생기를 불어 넣으시며, 그의 능력을 만물 속에 주입시킴으로서 본질과 생명의 동력을 만물들에게 불어넣으시는 것 자체가 명백히 신의 사역이다. 더 중요한 증거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됨이다. 성령은 중생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중생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시다. 모든 은사를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원래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나누어 주신다(출 4:11).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도 그의 사역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사역에서만 아니라 그에게 신의 호칭이 쉬지 않고 돌려지고 있음을 볼 때 성령님은 확실히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殿이 됨을 말씀하였다. 이 진리를 설명할 때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불렀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 그런데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는 성도들의 몸을 가리켜 성령의 전이라 하였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바울은 성령의 전과 하나님의 전을 서로 맞바꾸면서 사용하여 성령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다. 또한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인 것을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을 속였다고 엄히 책망하였다. 마지막으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그가 확실히 신적 권위를 가졌음을 공표하신 것이다(마12:31; 막3:29; 눅 12:10).
2) 삼위 하나님은 서로 구별되신다.
양태론 이단의 지도자였던 Sabellius는 하나님은 원래 한 분이신데 이 동일한 하나님이 구약 시대에는 성부로, 신약 시대에는 성자로, 주님 승천 후 교회시대에는 성령으로, 마치 모노드라마의 배우 한 사람이 다른 가면으로 분장하고 나타나는 것으로 말하여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삼위의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호칭은 “하나님”이지만, 그 이름들은 각각 다르다. 성부는 성자일 수 없고, 성령은 성자일 수 없고 성부일 수 없기 때문에 삼위의 이름들은 서로 교환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구별된다. 장로교 신학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Westminster신조21)에 의하면 성부는 그 누구에게도 속하거나 그 무엇으로도 구성되지 아니하신다(The Father is of none). 더욱이 성부는 그 누구에게서 나시지 아니하셨다(neither begotten). 이것은 곧 성자와 다르다는 뜻이다.22) 뿐만 아니라 성부는 나오시지 아니하신다(nor proceeding). 적극적인 특성으로 성부는 성자를 낳으셨고 성령을 보내신다. 이것은 성부에게만 있는 특유성인데 그 누구도 성부를 낳거나 보내실 수는 없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셨다(The Son is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성자의 나심은 ‘영원부터’이기 때문에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아니한다. 성자의 나심은 또한 성령의 나오심과도 다른 것은 성자의 나심은 완료된 상태이지만, 성령의 나오심은 영원히 계속되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점이 서로 다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The Holy Ghost is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이 성령의 나오심은 성자의 나심과는 다르다. 미완료와 완료의 시상이 다른 것 외에 ‘나심’은 오직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오시는 것이 서로 다르다. 오직 성령만이 이미 영원 전부터 나오시면서 계속 나오신다. 주목할 것은 성령이 현재 진행형으로(is proceeding) 계속 나오시는 일에 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영원히’(eternally)는 영원부터 지금까지 이후 영원히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 나오심은 단순히 하늘의 영광스러운 세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땅에 보내심을 입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신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신다. 오시고 또 오신다. 성자의 단회적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하기 시작하였고 이 후 계속 우리에게 오신다.
4. 성경 속의 ‘한 분’이란 무엇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나는 ‘한 하나님’, ‘한 분 하나님’ ‘한 분 하나님뿐’이란 용어들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지금도 엘로힘이라는 히브리 원어 그대로 호칭하고 있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다. 이들의 모임은 ‘사단의 회’라는 혹평을 받았다(계 2:9).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한 분뿐임을 강조하다가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23)
성경에 주 예수 그리스도와 나란히 쓰인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 예컨대, 요한복음 1장 1-2절, 14장 1-2절, 17장 2-3절 등의 ‘하나님’은 모두 성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이 말씀들에는 모두 성자 예수님이 나란히 쓰여 있어 어렵지 않게 이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임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8장 6절과 에베소서 4장 6절에 나오는 ‘한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우리 성도들의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 또 주의해야할 것은 고전 8장 4절의 말씀인데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이 구절만 보면 하나님은 한 분만 계시는 것으로 보기 쉬우나, 다음다음 구절을 보면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8:6).” 여기서 우리는 한 분뿐인 하나님은 곧 성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의 말씀은 요긴한 말씀이므로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말씀도 얼핏 보면 유일하신 하나님은 참 하나님은 성부뿐이시고 성자는 그의 보내신 자로 아리우스의 주장인 ‘양자론’을 지지하는 말씀인 것 같이 보인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 하신 말씀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성부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자님께서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다. 요한일서 5장 20절을 보면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주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고 영생이시다(요일 5:20)! 이 참 하나님의 아버지께서도 참 하나님이심은 물론이다. 따라서 그 아들은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다!24)
삼위가 하나이신 증거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각 삼위에게 다 적용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삼위의 본질은 하나이시다. 즉 동질이시다. 성자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본체로서 그 신성이 성부와 동등이므로 그 본질이 하나이다. 한 본질이란 능력, 불변성, 유복성, 영생, 영광 등의 속성이 같음을 의미한다. 삼위의 영광이 같으며 같은 본질임을 보인다.25)
IV. 삼위일체론과 신앙생활과의 관계
삼위일체론은 신학 전반의 초석이 되는 신학의 ‘본질적 원리’이기 때문에, 이것 없이는 어떠한 신학도 세울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초석이 잘못 놓였을 때, 신학 전체가 무너지고 만다. 이 지론은 신학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과 체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섬길 때 그 누리는 축복의 삶은 참으로 크게 놀랍다. 그러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다리가 세 개인 의자에 한 다리가 없는 것처럼 위험하기도하고 또 구실을 바로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그가 믿는 신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정체성이 달라진다. ‘Tell me who do you believe, then I will tell you who you are.’라는 말씀은 맞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알라를 섬기는 사람들은 고독하게 홀로 존재하며, 너무 높은 곳에 계셔 인간과는 아무런 교제도 없는 그런 신을 믿는다. 따라서 무슬림들의 삶은 운명론의 강한 영향으로 많은 경우 피동적이고 만사를 신의 뜻에 돌리므로(인쉬 알라) 수동적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또 홀로 존재하는 신이기에 매우 독단적이고 호전적이다. 기독교의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교제가 알라에게서는 나타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성삼위 하나님은 사뭇 판이하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삶 또한 무슬림들과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함이 있다. 몇 가지로 삼위일체론이 우리 신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삼위일체 하나님은 겸비의 신이시다.
시편 113편 5절에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이 말씀에서 성부 하나님은 스스로 낮추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하나님은 食言치 않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게 명예가 소중하신데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 대변인인 요나를 통하여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하리라 예언하셨으나 그 백성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명예는 땅에 던져버리시고 그 백성을 건져 구원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요나의 모습은 자기 예언과 자기 명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자 예수님의 겸비함은 빌 2장 5절에서 7절에 잘 나타나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신이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웠다. NIV에는 ‘Jesus made himself nothing.'이라 번역했다. 예수님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셨다. 요한복음을 보면 15번이나 우리 주께서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듣지 않으면 말하지 못하고, 아버지로부터 보지 않고는 행하지 않는다‘고 하셨고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서 왔다‘고 하셨다. ’내가 내 뜻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육체로 계실 때에 말할 수 없는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셨다(히 5:7). 신이 무슨 기도를 하겠는가? 말씀 자신이 되셔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주님께서 완전히 자기를 비워버렸기 때문에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으며, 주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부으심 받아 온전히 성령에 이끌려 사셨던 것이다.
성령 하나님도 인격적인 신으로서 얼마든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요한복음 16장 13절 말씀을 보면,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이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성령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나타내지 않고, 예수님의 영광만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오셔서 자기 영광을 나타내지 않고, 아버지의 영광만 나타내신다. 아버지는 자기를 낮추셔서 자기 아들의 영광만 나타내신다. 성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본질상 겸비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겸비하신 분이시기에 그 분이 만든 삼라만상이 다 겸비하게 움직인다. 우주도 창조 시 빅뱅을 통해 고 물질에서 저 물질로 계속 팽창해나감으로 겸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도 높은 곳에 있으면 위치 에너지가 생겨 위험하기 때문에, 자기를 버려 낮아지고 낮아질 때 樹木과 동물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우주 가운데 오직 인간과 사탄만이 스스로 겸비하지 않고 교만의 영에 사로잡혀 움직여지고 있는 것이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은 생명의 신이요 관계 속에 계신 신이시다.
삼위 하나님은 영원한 관계 속에서 풍성한 생명과 영원히 쉬지 않는 친밀한 교제를 가지셨음을 알 수 있다. 창조 전, 영원의 때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을까? 삼위 하나님은 고독하게 홀로 무념무상 가운데 있지 않으셨고, 오히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앞으로의 사역들을 서로 계획하시며 깊은 교제를 이루셨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서로 간에 계시를 나누시며 교제하시는 가운데 풍성한 생명을 나누시는 삶은 우리 성도의 삶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의 성도의 삶도 교제와 관계성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산출해내야 한다. 또한 삼위 하나님께서 계시의 신이심을 것을 헤아릴 때 충분히 삼위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우리에게도 계시하시며 교통하시는(communication)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삶에 더욱 말씀 안에서의 계시와 기도를 통한 교제를 풍성케 할 수 있는 것이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은 다양성 안에 통일성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도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셔서 이 세상에 통일성과 다양성(unity and diversity)을 두셨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지으신 우주 만물 속에는 통일성과 다양성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셨다. 예를 한두 가지만 들어보면 이 땅 위에 수십억의 인구가 살고 있으나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모두 耳目口鼻의 통일성은 가지고 있으나 누구도 같은 얼굴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손가락에 있는 指紋도 마찬가지다. 이 땅 위에 억만 가지의 나무와 나뭇잎들이 있으나 그 푸르름의 빛깔은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으나 동일한 모양은 없는 것을 볼 때 통일성과 다양성이 잘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계를 연구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 하나님의 존재의 특징인 단일성과 다양성을 잘 살펴볼 때 바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교회 공동체에도 이런 하나님의 통일성과 다양성이 顯示(현시)되어져야 한다. 에베소서를 비롯한 신약의 여러 말씀에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한 것이 바로 교회 안에 성도의 다양한 은사와 협력이 조화롭게 엮여질 때 건강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주님께서 3년 동안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이루시던 일이 이제 우리 교회에 맡겨졌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 성도들의 모든 은사와 재능을 묶어 그리스도의 성숙하신 모습을 친히 나타내야 하겠다.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나 그 존재하심에 한 단일성을 유지하심을 볼 때 우리의 신앙생활도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공동체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개인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집단 이기주의, 내 새끼 우선주의 등이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수립하시고자 했던 것들 ‘하나님의 나라’나 ‘교회’등은 모두 집합적 공동체이지 개인이 우선이 된 그런 공동체가 아니다. 삼위 하나님은 겸비하신 신이시며 그 대표적 특성인 사랑도 그 성격이 다 밖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산상수훈 중 핵심이 되는 구절: “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들은 바로 이런 공동체적이고 이웃을 위한 삶이 자세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한국 개신교 신자들의 삶에서 기도의 모습을 생각해볼 때도 공동적으로 드리는 기도 또는 공동체를 위한 기도가 많이 회복되어야 한다. 개인적 골방 기도도 성경은 말씀하지만 성경의 많은 부분은 공동체의 합심기도를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심은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4.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4:23의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라는 말씀은 삼위일체 교리가 어렵고 딱딱한 것 같으나 우리를 온전히 황홀지경으로 이끄는 말씀이다. 지금 성도와 함께 계시는 분은 삼위 하나님 중 성령 하나님이시다(고전 3:16; 6:19). 그런데 그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심으로 3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함께 하고 계신 것이다. 영광 가운데 계신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성삼위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만 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요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26)
V. 글을 마치면서
위의 길게 설명한 것들을 좀 단순하게 주요 핵심사항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삼위일체의 주요 이단들
a. 삼신론과 가현설-영지주의자들
b. 양태론(일위삼양설)-사벨리우스
c. 양자론(역동적 단일신론)-아리우스
2. 삼위의 존재양식
a. 성부-비 발생
b. 성자-영원 발생
c. 성령-영원 발출
3. 삼위 존재양식의 구분
a.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아다나시우스
b. 유사본질(호모이우시오스)-유세비우스
c. 상이본질(헤테로우시오스)-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
4. 삼위격 사이의 구분
구별되어 3위로 계시나 ‘페리코레시스’ 방식의 상호내주 및 상호침투하심으로 한 단일성을 이루신다. 이는 숫자적 단일성이 아니라 類(유)적 단일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한 하나님, 또는 삼위가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다.
5. 갑바도기아 3교부의 공헌27)
a. 대 바실-“세 위격 내의 한 실체(μία οὐσία ἐν τρισίν ὑποστάσεσιν)”란 확정된 용어로 공식을 수립하여 바른 토대를 구축하였다.
b. 나지안주스 그레고리-위격 상호간의 관계설정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즉 성부의 비출생, 성자의 출생, 성령의 出來(출래)로 특성을 구분함.
c. 닛사의 그레고리-삼신론이란 공격을 변호하면서 “아버지가 아들의 공동 사역 없이 단독으로 행하시지 않고, 아들은 성령과 별도로 어떤 특별한 활동을 가지시지 않는다. 아버지로부터 피조물에게로 확장되는 모든 활동은 그 기원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진행하고, 성령 안에서 완성된다.” From the Father, through the Son, in Holy Spirit로 요약할 수 있다.
김명용교수의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려고 한다.
한국교회에서는 하나님은 ‘한분’이라 말하면 정통이고 하나님은 세분이라 말하면 이단이라고 보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그러나 이런 사고는 바른 사고도 아니고 정통신조에 입각한 사고도 아니다. 바른 삼위일체론은 한 쪽에는 일신론과 다른 한 쪽에는 삼신론을 두고 그 가운데를 선택하는 3=1의 교리가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 세분 하나님께서 페리코레시스적 삶인 상호내주와 침투를 통해 하나됨을 유지하는 독특한 삶과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은 상호내주와 상호 상통하시므로 하나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시다”(요 10:30)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삼위 하나님께는 순서상, 사역상 구별이 있다. 나지 아니하신 분과 나신 분, 보내신 분과 보냄을 입으신 분, 뜻하시는 분과 그 뜻에 순종하시는 분,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된다.
“성령이신 하나님은 다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일신론 이단으로 흐르는 표현이고 양태론의 검은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 거하시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이것이 옳은 표현이다.28)
부록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29)
The Nicene Creed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the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at is, seen and unseen.
We believe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Son of God,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r made,
of one Being with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For us and for our salvation
he came down from heaven,
was incarnate of the Holy Spirit and the Virgin Mary
and became true human.
For our sake he was crucified under Pontius Pilate:
he suffered death and was buried.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in accordance with the Scriptures: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in glory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his kingdom will have no end.
We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Lord, the giver of life,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and the Son〕,
who with the Father and the Son is worship[ed and glorified,
who has spoken through the prophets.
We believe in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
We acknowledge one baptism for the forgiveness of sins.
We look for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the life of the world to come. Amen
<번역 I>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아버지로부터 나신 독생자로서 빛으로 오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피조된 것이 아니라 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십니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육신 하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사, 고난을 받으시며 장사지낸바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저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 가운데 재림하시고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로 더불어 동일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성령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만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 임할 세상에서의 영생을 바라봅니다. 아멘.
- 김명용 교수 번역 -
<번역 II>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며 천지와 가시적이며 불가시적인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을 우리가 믿사오며,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빛에서 나오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요, 나셨으며 창조되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동질이시며, 그를 통하여 만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이 되시고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영광 중에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시오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사오니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으니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예배와 찬송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밀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위한 세례를 고백하며,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을 믿습니다. 아멘
- 김영재 교수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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