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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강 칼빈의 이신칭의
제 11장 믿음에 의한 칭의: 그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칭의와 중생: 용어를 정의함, 1-4)
1. 칭의의 교리, 그 위치와 의미
2. 칭의의 개념
3. 성경에 있는 용법
4. 칭의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용납이며 죄의 용서이다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을 논박함, 5-12)
5.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사상
6. 오시안더는 죄의 용서와 중생을 혼동한다
7. 칭의를 위한 믿음의 의의
8.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오신안더의 주장
9. 칭의는 중보자가 하시는 일
10.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성경을 가졌는가
11.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은 구원의 확실성을 소멸시킨다
12. 오시안더를 논박함
(선행이 의롭다함을 위하여 유효하다고 하는 스콜라 사상을 논박함, 13-20)
13.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
14. 중생한 사람의 행위도 칭의를 얻지 못한다
15. 은혜와 선행에 대한 로마 교회의 교리
16.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데 대한 성경의 판단
17.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에 대한 바울의 견해
18. 칭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19. “믿음만으로”
20. “율법의 행위”
(다만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21-23)
21. 칭의와 화해와 죄의 용서
22. 칭의와 죄의 용서 사이에 있는 긴밀한 관계를 성경에 의하여 증명함
23. 우리 자신이 의로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것이다.
제 12장 우리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칭의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엄성과 완전성에 비추어 칭의를 논함, 1-3)
1.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도 의롭다 않다
2. 사람 앞의 의와 하나님 앞의 의
3. 진정한 의의 증인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인 자기 비판은 선행이 있노라는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4-8)
4.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생각하면 모든 자기 기만이 없어진다
5. 모든 자기 찬양을 버리라
6.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 겸손인가
7.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
8.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과 자기 만족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
제 13장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1. 칭의는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고, 계시는 그의 공의에 도움이 된다
2.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다
3. 자기의 의를 보아서는 양심에 평안을 얻지 못한다
4. 자기의 의에 유의하는 것도 약속을 무용하게 만든다
5.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어야만 양심이 평안하며 기도에 기쁨이 있다.
제 14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자연상태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구속될 필요가 있다, 1-6)
1. 칭의와 관련하여 인간은 네 종류로 나뉜다
2. 불신자들의 덕행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3.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덕도 없다
4. 그리tm도가 없으면 진정한 거룩도 없다
5.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행위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6. 사람은 자기의 의를 위해서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다
(위선자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정죄를 받는다, 7-8)
7. 의는 심령의 문제이다
8. 사람과 행위
(중생한 사람들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 9-11)
9. 또 진정한 신자들도 자기 힘으로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
10.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의 엄격성을 오해하였다.
11. 신자들의 의는 언제든지 믿음에 의한 의다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한 스콜라 학파의 항의와 성자들의 剩餘 功勞說을 거검토/반박함, 12-21)
12. 반대자들의 핑계
13. 잉여공로를 말하는 사람은 하나니님의 요구와 가혹함과 죄의 중대성을 오해하였다
14.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더라도 우리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며 또 완수할 수도 없다
15. 우리와 우리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므로 잉여업적은 있을 수 없다
16. 행위를 믿거나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
17. 행위는 결코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18. 그러나 선행을 보면 믿음이 강화될 수 있다
19. 행위는 소명과 결과이다
20.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신자들의 확신의 기초가 될 수 있다
21. 간혹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의 이유라고 말하는 의미
제 15장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도 반대한다, 1-4)
1. 잘못된 물음과 참된 물음
2. ‘공로’란 말은 성경에 없으며, 위험한 말이다.
4. 반증에 대답함
(사람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치하는 데 반대함, 5-8)
5.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기초이며,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시다
6. 로마 교회 신학은 그리스도의 힘과 영광을 소멸한다
7. 로마 교회의 신학은 어거스틴이나 성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8. 바른 교리를 기초로 한 충고와 위로
제 16장 이 교리를 겨냥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된 중상데 대한 반박
1. 칭의의 교리는 선행을 배제하는가
2. 칭의의 교리는 선행에 대한 열성을 억누르는가?
3.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자비가 행동의 동기가 된다: 행위는 종속적인 것이다
4. 칭의의 교리는 죄인을 선동한다
Albrecht Peters, Rechtfertigung in HST Bd.12
1. 기독교 강요에서 칭의론의 위치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에는 ‘칭의론’이라는 항목이 없다. 칼빈은 그 때는 루터의 소요리 문답서의 순서에 따라 열거했다. 그러나다 1539년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추기경 Sadolet에 회답 서신에서 의식적으로 칭의론을 주된 관심으로 삼았다.1) 칼빈에게 칭의론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다음과 같은 발언 속에서도 알 수 있다: 만일 이 칭의론이 제거되면, 그리스도의 영광은 사라질 것이고, 종교는 없어질 것이며, 교회는 파괴되고 구원에 대한 소망은 완전히 박살날 것이다.2)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론은 종교를 보존하는 결정적인 선회점이었다.3)
따라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 2판(1539)에서는 별도로 “이신칭의와 행위의 공로”라는 항목을 만들었다.4) 칼빈은 여기서 1) 원시상태와 첫범죄, 2) 믿음, 3) 회개, 4) 새롭게 함과 중생, 5) 구약과 신약의 관계, 6) 예정과 예지 등을 차례로 다루었다. 이런 내용 구조는 약간의 수정은 있으나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1559)까지 유지되었다.5)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3권에서 2장에서 믿음을, 3-5장에서 회개를, 6-10장에서 소명을 받고 마침내 종말론적인 완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다룬 후에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는 문제를 정리했다.6) 이는 칭의와 성화를 조직적으로 열거하기 위함이다. 칼빈의 경우 칭의는 기독교인의 자유(19장)와 기도(20장)를 포함하는 동시에 예정에 뿌리를 박고 있다(21-24장).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칼빈은 종말론적인 목적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25장)까지 언급한다. 말하자면 칼빈의 경우 칭의는 성경의 가르침 전체와 관계한다.
2. 칭의의 개념
칼빈은 멜란히톤처럼 1536년에 이미 칭의를 法庭的 개념으로 이해했다. 칼빈은 멜란히톤보다 더 강력하게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法庭을 강조했다. 칼빈은 1539년에 “만일 누가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칭의 된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의롭게 여겨지고 그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짐을 의미한다”7) 우리는 타락 이후에는 우리에게 요구된 의를 우리의 죄인의 행위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낯선 의를 얻기 위해 그에게 피해야 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 누구든지 그리스도 낯선 의로로 옷입고 하나님 앞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눈에는 죄인으로 보이지 않고 소위 의롭게 보인다”8)
칼빈은 1543년에는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했다: “우리는 칭의를 단순히 ‘받아들임’ 곧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 안으로 받아들임을 통해 우리를 의인으로 여기는 그런 받아들임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이런 칭의가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義를 轉嫁하는 것에 근거한다고 말한다”9) 칼빈은 멜란히톤처럼 고후 5:18-20을 참고하여 이 전체 과정을 화해(katallage)로 파악했다.10)
3. 하나의 구조로서 칭의
칼빈은 ‘칭의의 질서’(ordo iustificatio) 기독교 강요 III,11,16에서 열거했다. 즉 칭의가 일어나는 순서와 구조를 설명했다. 아래 내용을 참조할 것.
그리고 Inst III,14,17에서는 철학적인 용어를 이용해서 이 문제를 설명했다. 그는 여기서 ① 동력인, ② 질료인, ③ 형상인, ④ 목적인 등의 용어로 설명을 시도했다.
1) 동력인은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2) 질료인은 그리스도시다. 그는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서 의를 얻으셨다. “구속으로 말미암아”(롬 3:24)
3) 형상인은 믿음이다. 칼빈은 요한이 이 세가지를 한 문장 안에 요약함을 주목한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4) 목적인은 1)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며, 2)하나님의 인애를 찬양하는 것이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롬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칼빈은 바울이 엡 1:3-14에서 이 내용을 잘 요약했다고 본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엡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 1: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런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런 요인들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구원을 잘못 해석한다고 비판한다.
Inst III,11,16 의롭다함을 받는 데 대한 성경의 판단
1) 하나님께서 그의 순결하고 값없이 베푸시는 인애하심으로써 죄인을 포용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아무 것도 찾으시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자비를 불러일으키는 비참한 상태만을 찾으신다.
2) 사람이 하나님의 인애를 느끼게 하셔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에서 구원 전체의 근거를 얻도록 하신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체험인데 죄인이 복음의 교훈에서 자기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을 인정할 때에, 그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소유하게 된다.
3)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와 죄의 용서를 받아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체험한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하였으나 그가 받을 영원한 의는 그가 원하는 선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의 안에 장만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제 12장은 칭의의 중요한 요소인 하나님의 심판대에 대해 말한다.
기독교강요 Westminster press 번역판에서는 이 12장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붙여놓았다: “값없는 칭의의 교리를 확실히 납득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우러러 하나님의 심판대를 바라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칭의를 법정의 재판의 시각으로 설명을 시도한 셈이다.
칼빈은 1-3절에서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완전하신 위엄을 언급함으로써 죄용서함을 받을 대상이 되는 죄인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암시한다.
칼빈은 III,12,1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열거함을 통해 재판하시는 재판관의 위엄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교만한 것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확연히 드러나는 무거운 질병에 결려 흉학한 몰골을 하고 있거나 피부 속까지 곪아서 흐느적거리는 사람들만큼 행위롤 말미암는 의를 자신 있게 - 또는 사람들의 말대로 요란스럽게 - 떠들어대는 자들도 없는 것을 보게 된다”(Inst III,12,1). 칼빈에 의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모르게 때문인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공의를 눈곱만큼이라도 느낀다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우롱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를 하나님의 공의로, 너무나 완전하여 모든 부분에서 온전하며 그 어떠한 흠도 부패도 없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아무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그것의 가치를 완전히 평가 절하하게 되는 것이다.”(III,12,1).
칼빈은 성경 구절을 통해 심판주로서 하나님을 열거한다.
-그의 광채로 별들을 어둡게 하는 분(욥 3:9)
-그의 힘으로 산들을 녹이시며 그의 진노로 땅들을 진동시키는 분(욥 9:5-6).
-그의 지혜로 지혜로운 자들의 간계를 무너뜨리는 분(욥(5:13)
-그의 천사들이라도 견딜 수 없는 분(욥 4:18).
-죄지은 자들을 무죄한 자로 만들지 않으시는 분(욥 9:20).
-그의 분노의 불이 일어나면 지옥까지도 불사르는 분(신 3:22; 욥 26:6).
-심판의 보좌에 앉으셔서 사람의 행위를 살피시는 분(사 33:14-15; 시 130:3).
-악한 인간을 전혀 인정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욥 15:15-16)
-율법의 내용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은 저주하시는 분(신 27:26; 갈 3:10).
칼빈은 심판주 내지 재판관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속성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함을 고백했다. “하늘 심판주 앞에서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죄의 책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용서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서 기꺼이 몸을 숙여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 칭의에 대한 논의 전체가 어리석은 것이 되고 무력한 것이 되고 만다”(III,12,1).
칼빈은 심판주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논한 다음 죄인의 보잘 것 없음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헛되이 우리 자신을 높이기를 그만두고 눈을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두려워 떨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III,12,2). 아무리 인간이 자신을 과신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육안으로 태양을 보는 일에 비유하며 설명한다. “가까이 있는 물체를 눈으로 똑똑히 보면 똑똑히 보여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식별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눈으로 태양을 바라보면 그 찬란한 광채를 견디지 못하고 시력이 마비되어버리며, 땅의 물체를 볼 때에 강력하게 힘을 발휘했던 시력이 완전히 무기력해지고 만다.”즉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오만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시 142:2)
-(욥 9:2-3)(Inst III,12,2)
이신칭의를 설명함에 있어서, 재판과, 피고인인 죄인 외에 죄인을 속전할 분이 필요하다. 칼빈은 위의 두 가지를 논하고 난 다음 중보자에 대해 논한다. 칼빈은 이런 죄인에게 오직 중보자만이 도울 수 있음을 어거스틴과 베르나르의 증언을 들어 설명한다. “이처럼 썩어질 육체의 짐을 지고 인생의 연약함 속에서 탄식하는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는 유일한 한 가지 소망이 있으니, 곧 우리에게 중보자요 의로우신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대속물이 되신다는 사실이다”(딤전 2:5-6)11) “연약한 자가 안전하고 확실한 평안과 안식을 위하여 기댈 곳이 주님의 상처가 아니면 어디란 말입니까? 구원하시는 그 분이 강하실수록 나는 더욱 더 안전하게 거기에 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위협하고, 육체가 내리누르고, 마귀가 올무를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서 있으니 넘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큰 죄를 지어서 내 양심이 어지러우나, 주의 상처를 기옥할 것이므로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비하심이 나의 공로가 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자비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나의 공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요, 주님의 자비가 풍성하면 그와 똑같이 나의 공로도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나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찬양하겠습니까? 오 주님, 오직 주의 의만을 기억하리이다. 그 의가 또한 저의 것이기도 하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를 의로 삼으신 것입니다”12)
“全人을 안전하게 만드시는 그 분에게 온전히 소망을 두는 것이 바로 사람의 온전한 공로입니다”13)(III,12,3). 말하자면 칼빈은 인간에게는 하나님 앞에 내 세울 아무런 공로가 없음을 철저하게 지적한 것이다.
칼빈은 III,12, 4-8절에서는 인간은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비판이 행위에 대한 자랑을 제거시켜주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게 함을 지적했다.
이때 죄인이 가져할 자세는 다음과 같다 i)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생각하면 모든 자기 기만이 없어진다(III,12,4), ii) 모든 자기 찬양을 버리라(III,12,5), iii)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 겸손인가(III,12,6), iv)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III,12,7), v)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과 자기 만족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III,12,8).
제 13장은 값없는 칭의의 교리에서 유념해야 할 두 가지 사실.
이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유효한 의에 대해 말하고 동시에 ‘자기 의’사상을 비판한다. 칼빈은 여기서 칭의에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탈취하지 않기 위해 자기 義를 자랑해서는 안 될 것을 경고하는 동시에(III,13,1-2), 자기 의를 바라보는 경우 양심의 평안을 얻을 수 없음을 지적하고(III,13,3). 참된 평안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는 데서 얻어짐을 지적한다(III,13,4).
동시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확신하는 방법을 열거했다(III,13,5).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음바 되어서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롬 5:5; 8:35,39; 시 23:1,4; 갈 4:6; 롬 8:15; 엡 3:12)
제 14장은 칭의가 시작한 이후 일어나는 성화 문제를 다룬다.
이와 연관하여 그는 인간을 4가지로 나눈다 ① 하나님을 전연 모르고 우상숭배에 파묻혀 있는 사람, ② 성례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나, 불결한 생활을 계속하여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름 뿐인 그리스도인, ③ 그 사악한 마음을 헛된 외식으로 감추는 위선자, ④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첫째 인간은 머리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선한 것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III,14,1). 아담의 모든 후손을 말한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1) 마음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해 있다(렘 17:19), 2)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온통 악하다(창 8:21), 3) 사람의 생각이 허무하다(시 94:11), 4)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시 36:1; 롬 3:18), 5) 하나님을 찾는 지각이 없다(시 14:2)
둘째와 셋째 사람은 위선자이다(III,14,7-8). 이 두 종류의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하지 못했으며 그 양심이 불결하다. 위선자들은 자기 마음속에 불결한 것이 가득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착한 듯한 행동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멸시하시지 않으리라는 어리석은 확신을 품고 있다.
칼빈은 이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먼저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심령을 순결하게 해야 된다고 말한다(8).
넷째 사람(III,14,9-11)은 중생한 사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며 죄를 거저 사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 은혜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날로 더욱 더 죽이시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성결케된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자기 되어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며, 우리의 마음은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의 영광만을 증진시키는 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원하게 된다”
스콜라 신학의 문제점
이들은 주장하기를 “죄인은 정죄받는 것에서부터 값없이 해방되어 의를 얻으며, 이 일은 죄의 용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다만 그들은 ‘칭의’라는 말에 새롭게 됨을 -즉,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가 율법에 복종하도록 개조된다는 것을- 포함시킨다. 참으로 그들은 중생한 사람의 의를 묘사하기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한번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선행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며 선행의 공로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Aquinas, Summa Theol. I IIae cxiii, 1; cxiv.3)
이에 대한 칼빈의 비판(III,14,12): “그들이 ‘받아들이는 은혜’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에 불과하다. 아버지께서는 값없이 베푸시는 선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포용하신다. 그리스도의 무죄를 우리에게 입히시고, 그것을 우리 것으로 인정하시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거룩하며 순결하며 결백하다고 인정하신다. 그리스도의 의만이 완전하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대 앞에 나타나며 우리를 보증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의를 받았기 때문에 믿으믕로 끊임없이 죄사함을 받는다. 이 순결로 삼씨여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우리의 추악과 불결이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지 않고 하나니므이 심판을 받지 않도록, 묻힌 듯이 숨겨져 있다. 그러다가 드디어 때가 오면 옛사람이 죽어 분명히 파괴된 우리를 선하신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셔서 새 아담과 함께 복된 평화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주의 날을 기다리도록 하자. 그날이 오면 썩지 않는 몸을 받아, 하늘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고전 15:45ff.)”
칼빈의 칭의와 거룩이 동전의 앞뒤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도셨기’ 때문이다(고전 1:30)”(III,16,1).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선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서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지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둘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13)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는 것은 의에 못지않게 거룩함을 포함한다”(III,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