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화신학연구소 겨울 웍샵(2004.2), 제천에서 박종천 교수가 발표하신 내용입니다.
탁사 최병헌은 우리 신학의 미래다! / 박종천 교수
저는 탁사의 신학을 평가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그의 저작을 모두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많이 논의했던 [성산명경](1912)뿐만 아니라 [만종일련](1922)을 연구하면서 느끼는 것은 탁사의 유교에 대한 이해가 우리가 쉽게 평가할 수 없을 만큼 박식하고 깊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심성론 부분만 해도 공자 이후의 맹자, 순자, 그리고 한나라 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의 견해들과 송나라 시대의 장횡거라든가 정호, 정이 형제 또 장재라든지 주희, 왕양명을 거쳐서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청나라 시대 학자들의 유학적 심성론까지 갈파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조선 유학의 퇴계, 율곡이 어떻게 심성론을 말하고 그 이후 퇴율학파에서 심성론을 어떻게 논의했는가를 다 언급합니다. 저는 탁사의 그 스케일에 깜짝 놀랐습니다. 불교와 도교에 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유교 하나에 국한해서 봐도 그렇습니다.
[성산명경]에서 진도가 대변한 유교에 대한 입장은 매우 기본적이고 제한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교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머무른 것 같은 인상도 받습니다. 이에 비해서 [만종일련]에서 다루는 유교는 학문적으로 매우 깊이가 있습니다. [성산명경]에서 다룬 심성론의 구조는 아주 단순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 하는 문제와 인간의 본성이 참으로 하늘이 명한 것이라면 평등한 것이냐 그렇지 않으냐를 질문합니다. 여기서는 아주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넘을 수 없는 상지하우불이의 간극이 있다는 정통 유교의 노선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하느님의 성품으로 지어진 인간은 평등하다는 기독교적 이마고 데이(imago Dei)의 관점을 언급하는 것으로 논의가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만종일련]에서는 인간의 성품이 평등하다고 보는 정호, 정이 형제(신유학, 송학에서 유명한 두 정씨)의 주장, 즉 본성적으로 같은데 이것이 욕심으로 흘러서 수련을 게을리 함으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처럼 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공자가 논어 17편(양화)에서 성상근야 습상원야(본성은 가까운데 습성, 학습을 통해 멀어진다)라고 말한 것의 맥을 잇는 그 주장을 탁사가 지적하면서 이것이 살아나야 된다고 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관점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긍정하는 주장입니다. 1912년 [성산명경] 이후 10년만에 1922년 [만종일련]에서는 유교에 대한 더욱 심화된 이해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탁사가 유교의 텍스트에 대한 베이식한 지적 소양에 있어서 적어도 우리를 압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분을 평가하기에는 우리가 아주 제한된 이해밖에는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은 탁사가 이야기한 심성론이 그저 단순히 소개한 정도가 아니라 공자에서부터 시작된 심성론을 [만종일련]에서 가장 길게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 175쪽 중에서 거의 30쪽이 넘습니다. 그런데 탁사는 이것을 그저 베끼고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스타일이 쭉 나가다가 '안험하건데...' 라고 씁니다. 이 말은 '자신이 그것을 리플렉트 하건데, 크리티칼하게 리뷰하건데...' 라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이 구절 구절에 나옵니다. 이것이 유학자들이 쓰는 방법이더라구요. 예를 들어 율곡의 [성학집요]에도 보면 그 분이 모두 자신의 말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공맹, 성현들의 말을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편집하고 나열한 후에 항상 '신안...' 즉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글이니까 '신이 고찰하건데... 제가 리플랙트하건데...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라는 자기 의견이 장마다 꼭 등장합니다. 이것이 유학자들이 쓰는 방법입니다.
유교에서는 리니지가 중요합니다. 사상을 전개할 때 그 사상의 계통, 스승들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나서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율곡 선생도 이런 방식으로 나름대로의 독특한 성리학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탁사도 이런 의미에서 유교적 학문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고 봅니다. 쭉 정리하면서 부분 부분 '그런데 나는 기독교 신학(복음)의 관점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고 모든 인물과 사상에 대해 하나 하나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지지하고 또 어떤 부분은 비판하면서 일률적인 지지나 비판을 지양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탁사의 탁월한 점입니다. 학문적으로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또 자신의 입장에서 비판할 것은 분명하게 논리적인 비판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 악하냐를 논할 때 [성산명경]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부터 선하다면 어떻게 악한 자가 나타나는가, 고로 날 때부터 선하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 라는 데서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만종일련]에서는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맹자)고 했는데 이것은 본성은 선하지만 실존에서 실제적으로 인간의 의지와 정서가 악하게 흐르고 욕심에 빠진다고 본 맹자는, 인간을 형이상적인 개념 즉 신학적으로 인간의 본질적 측면을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 순자는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인간을 디씨플린하고 교육해서 禮를 통해 성인으로 만드는, 즉 본성보다는 학습을 강조합니다. 탁사는 성상근야(맹자)보다 습상원야(순자)를 강조하는 순자가 인간의 형이하적 측면을 주목하여 악으로 흐르는 경향성을 본 반면에 인간의 형이상적인 측면을 보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고 말하면서 (성선설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다는 그 의견을 지지합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이 얼마나 변증법적입니까! 탁사는 이런 식으로 논의를 전개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 하는 단순논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만종일련]은 휠씬 심화된 인간본성과 심성에 대한 탁사의 이해와 신학적 정리와 평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탁월한 점은, 탁사가 유교의 심성론을 수용하고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관점에서 성서를 번역했다는 것입니다.(그는 구약의 첫 권 창세기와 신약의 첫 권 마태복음을 번역했습니다) 때문에 盡心盡性盡意(신명기 6장)와 마음이 청결(마5)을 연결시키고, 진심진성하여 상주를 愛하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이해합니다. 진심자(마음을 다하는 자)는 지성야(자기의 성품을 알게되고)하고 지성자는 지천야(하늘을 안다-맹자) 이렇게 인용하면서 진심진성하는 자는 상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본다고 번역했습니다.
유교에서는 존심양성, 불교는 명심견성을 말했는데, 이런 심성론에 입각해서 한 단계 더 나간 것입니다. 즉 기독교는 그러한 단순한 수양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주를 애하는 단계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저는 탁사가 유교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배척한 것이 아니라 유교의 심성론에 바탕해서 신학적 인간론, 또는 신학적 심성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성취론도 아니고 배타주의도 아니고 무책임한 상대주의적 다원주의도 아닙니다. 탁사는 기독교의 진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탁사가 그 표현에 있어서 아주 독특한 유교적이고 동양적인 정서를 담을 수 있는 말로 성서를 번역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탁사의 성서 번역이 탁월하다는 것은 구약번역의 전문가인 이환진 박사도 동의한 바 있습니다) 복음의 진수를 소개하면서 탁사는 회개한 다음에 맨 마지막에 팔복을 언급하는데 이것이 마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허심자는 유복하니,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허심자(마음이 비어있는 자), 이것은 매우 도교적인 표현인데 심성론과 관계되어 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탁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모든 종교, 즉 심성론의 절정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교를 비롯한 제 종교의 심성론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그 심성론과 예수 그리스도가 역설하신 마음을 연결해서 결국은 웨슬리적인 성화 내지 완전신학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보면 모든 만종의 완성을 산상수훈(팔복)적으로 풀어가면서 그 절정을 '완전히 성스럽고 깨끗한 자'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을 웨슬리식으로 말하면 Ordo Salutis(구원의 질서)가 있다는 말인데, 성화와 완전으로 끝납니다. 이것을 통해 탁사에게서 복음적 지평과 웨슬리적 지평이 유교 심성론적인 영성의 지평과 만나서 독특한 유교적 신학의 전개로 나아가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저는 우리가 탁사를 아직 덜 읽었고 충분히 못 읽었고 피상적으로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언급하고 싶은 것은, 최근의 유교 연구 경향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유교나 동양사상을 연구하던 사람들은 대체로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사서삼경을 번역한 제임스 레게(성공회 선교사)를 대표로 해서 탁월하기는 하나 여전히 서구 중심적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중국에서도 해외의 사이놀러지스트들의 연구를 받아들이고 배우려고 하는 입장입니다. 그만큼 해외의 선교사나 화교들에 의한 유교연구가 활발하고 심화되어 있습니다. 보스턴 유학도 그 일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서 드러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함께 참석한 로저 에임스(하와이대학 교수, 과정적이고 실용적으로 유교를 해석하는 입장)의 강의를 들으면서 또 최근의 유교 연구학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유교를 지금까지는 선교사들이나 서구의 학자들이 너무 기독교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는 유교를 너무 토대주의적(foundationalism)이고 초월주의적인 시각에서 봤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교의 天이나 상제를 볼 때도 자꾸 기독교의 하느님과 아날로기아를 찾으려고 하고 둘 사이를 억지로라도 연결하려는 시도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중용 1장에 나오는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즉 '하늘이 명한 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 할 때 십중팔구 많은 유학자들이나 탁사나 해천을 포함해서 심지어 우리들까지도 하늘이 명한 본성은 바로 'imago Dei' 라고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해의 틀이 그렇게 굳어져버렸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번역도 해석도 의미도 용어도 흘러가다 보니까 유교를 자꾸 서구 형이상학화하고 기독교 신학과 비슷한 그 무엇으로 만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교에 대한 적절한 접근이 아니라는 반성입니다. 이런 접근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유교를 유교로 보자는 것입니다. 유교에 대한 내재적 비판, 유교를 유교 안에 들어가서 유교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 즉 반토대주의적인 관점들이 어디까지 나갈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저도 의문이 있습니다. 과연 에임스가 말하듯이 유교인들이 하늘에 대해 언급할 때 정말로 초월적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저 인간의 공동체 윤리가 투사된 그런 의미였겠느냐, 또는 조상 제사에서 상제, 즉 가장 높은 인간의 통치자인 帝가 天으로 받들어졌다는 의미에서 아래로부터의 신학, 아래로부터의 영성, 그런 해체주의적 해석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토착화, 유교 연구를 함에 있어서 이런 최근의 연구 방법들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유교의 텍스트를 읽는 독법에 있어서 이제는 초월주의적, 토대주의적인 독법이 아니라 보다 전향적이고 실용주의적이고 유교를 유교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신학함에 있어서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에임스 교수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유교를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유교를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한다면 나는 기독교 신학자인데 기독교와 유교가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대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와 유교가 만나서 서로 없는 점을 배우고 줄 수 있다는 논지로 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creativity'라고 할 때(이것은 에임스 교수 강연의 중요한 주제였고 저의 관심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윤성범의 誠의 신학과도 연관되는데(해천은 誠을 너무 많은 것에 대입시켜서 결국 더 모호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고민하게 됩니다) 뚜웨이밍은 誠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해서 천도, 즉 하늘의 도이기 때문에 진영첩의 표현처럼 'heavenly principle'(초월적 원리)라고 이해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이해합니다. 통서와 태극도설을 쓴 주돈이도 誠을 이렇게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에임스와 같은 사람들은 誠을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초월적 원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우주의 과정 속에 있는 creativity로 본다는 것입니다. Creator나 Ultimate Reality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creativity로 봅니다. 창조성, 이것이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에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인상 깊었던 것은 성을 단순히 creativity로 이해하면 그것은 범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모종삼이나 뚜웨이밍이 부닥친 한계처럼) 이것을 더 심화시켜서 우주적인 도교적 creativity가 아닌 유교적 creativity, 다시 말해서 윤상(천륜, 인륜, 물륜)의 질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creativity이기 때문에 결국 co-creativity(상호적 창조성)라는 말을 씁니다. 에임스는 아주 구체적인 예로 남녀간의 사랑의 관계에서 誠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연인에 대해서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그녀가 비록 객관적으로는 별 볼일 없고 매력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끌리고 남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알고 그런 관계 속에서 창조적인 사랑이 나오게 되는데 바로 이런 과정에서 나오는 co-creativity가 바로 誠이라는 비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용 22장에 '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 자신의 본성을 다할 수 있고... 곧 타인의 본성을 다할 수 있고... 곧 만물의 본성을 다할 수 있고... 곧 하늘과 땅의 화육(천지의 창조성에 동참)을 도울 수 있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盡性, 본성을 다한다는 것이 뭘까. 지금까지는 초월주의적으로 해석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개념을 가지고 우리 안에 있는 potentiality가 fully realized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에임스를 비롯한 최근의 신유학자들은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creativity가 'get the most out of the ingredients...' 즉 reality가 아니라 realizing하는 과정적 실현의 다이내믹스로 이해합니다. 두 사람이 사랑하면 서로의 creativity가 만나서 그들이 상상도 못했던 창조적인 사랑으로, 열매로, 가치로,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본성을 다하는 것이고, 자기 본성을 다하면 다른 사람의 본성을 다하고 만물의 본성을 다하게 하는, get the most out of it, sincering의 과정, realizing의 과정으로 이해하더라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볼 때 탁사에게는 誠에 대한 초월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이런 과정적 해석의 단초가 있습니다. 진심진성한 자는 상주를 애하고... 이것은 진, 즉 다한다는 것과 마음의 의미를 명사적인 실체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매우 다이내믹한 리얼라이징의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에 동적인 그 과정을 통해 예수를 만나고 성신과 친해지고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과 연결되어 집니다. 이것을 우리가 학문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탁사에게는 초월주의적인 해석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습니다. 그를 단순하게 봐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는 해천의 신학에서 '성'(誠)을 너무 명사적으로 봤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을 자꾸 존재로 실체로 보았기 때문에 한계에 부닥치게 됩니다. 성을 동사로, 관계로, co-creativity로 이해할 때 사람과 사람, 사람과 만물사이뿐 아니라 하느님과도 창조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저는 에임스와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에임스에게 질문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과연 성은 초월적, 절대적, 수직적 지평과는 무관한 것인가. 우리말에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도 co-creativity가 있다. 율곡 선생도 당신의 외할머니의 지극 정성으로 드린 기도가 외할아버지의 죽을 병을 낫게 했다는 얘기를 남겼다." 그랬더니 에임스가 대답하기를 "주자도 말한 지성감천은 지성감천리로 읽어야 한다. 천리는 초월적 인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저는 "그게 아니다. 天理가 아니라 天意다. 하늘의 뜻, 하늘의 의지를 감동시킨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크리에이티비티와의 감응이다. 이것으로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을 감천리로 해석한 것은 주자적인 해석인데 율곡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에임스는 "아마도 그것은 내가 추측컨대 한국의 유학이 가진 샤마니즘적인 면과 관련이 있지 않겠는가." 제가 그럴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니까 "나는 한국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면서 논의가 끝났습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코크리에이티비티의 감응, 감천, 만남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the most sincering, 이것은 단순한 초월주의적 논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誠의 해석학을 다시 해야 합니다. 초월주의적 접근을 지양하고 그 논리를 해체시켜서 다시 정립하면 성의 신학은 우리 시대에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잘 정리가 안 됐습니다마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탁사의 유교 이해는 매우 깊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이해한 수준이 아니었고 오늘날 현대의 신유학자들이 이해하는 정도의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탁사가 기독교를 이해함에 있어서 정말 복음의 진수를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성신,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서 뜨거운 헌신을 강조함으로 단순한 비교종교학자가 아닌 진정한 복음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학자이기 이전에 정동교회 목사요 감리사요 교회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타주의가 아닙니다. 정말 성신의 체험, 성령의 도우심이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고 씻을 수 없다, '탁사'할 수 없다, 말 그대로 탁사의 신학, 즉 씻는 신학입니다. 세례의 신학입니다. 이것에 대한 헌신이 분명한 신학입니다. 그래서 탁사의 설교집이라든가 일지를 보면 그의 복음에 대한 헌신과 열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토착화 신학을 한다고 할 때 탁사식으로 접근한다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인들을 감동시킬 수 있고 목회자들은 물론이고 평신도들의 가슴에 핵심적인 예수의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그런 실천이 이루어질 때 토착화 신학은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되어질 수 있고 목회 되어질 수 있고 부흥회와 교육, 교회의 성장과 성숙에 기여할 수 있는 그런 신학의 가능성을 탁사의 신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탁사는 우리의 미래이고 감리교 토착화 신학의 미래입니다. 저는 이것을 과거로 보지 않습니다. 현재에도 미흡합니다. 탁사를 살려야 미래가 보입니다. 이것은 탁사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탁사를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보자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