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두 번째 휴일 초여름이지만 한여름 삼복더위 못잖은 뙤약볕을 맞으며 조선왕조 왕릉의 종택(宗宅)이라 할 수 있는 동구릉(東九陵)을 찾았다. 동구릉을 조선왕릉의 종택이라 할 수 있음은 태조 이성계의 능이 있고, 게다가 조선왕조 왕릉 조성지중에서 가장 많은 아홉 개의 왕릉을 거느리고 있어서이다.
조선은 왕조시대였다. 왕조시대에 나라에서 제일 좋은 양택명당은 왕궁이 차지했고, 제일 좋은 음택명당은 왕릉이 차지했었다. 그러므로 조선왕릉의 종택이라 할 수 있는 동구릉이야말로 조선 제일의 음택명당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왕릉을 답사함에 있어서는 일반 무덤과는 좀 다른 시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는데 사대부 문중 선산의 모범사례가 되었던 왕릉풍수에 대하여 동구릉에 있는 태조(太祖)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建元陵)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동구릉이란 명칭은 한양 동쪽에 자리한 아홉 개의 왕릉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왕릉은 죽은 왕의 집이다. 그러므로 왕릉을 조성함에는 궁궐의 모양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동구릉은 가장 많은 조선 왕릉을 모아 놓은 왕릉 전시장이다. 신라와 고려처럼 조선시대에서도 조선왕조의 궁궐이나 왕릉풍수가 조선의 풍수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게 되는데 이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궁궐의 조성이 양택풍수의 기준이 되었다면 왕릉은 특히 음택풍수의 잣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 먼저 왕릉 선정의 절차부터 알아보자. 왕릉선정은 임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임금의 죽음을 승하(昇遐)라고 한다. 승하는 반드시 왕권의 이동을 행하게 한다. 왕조시대 왕권의 공백은 나라 전체의 안위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승하 직전부터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되는데 이를 계령(戒令)이라 하였다. 계령이 선포되면 병조(兵曹)는 군사들을 총동원하여 궁궐을 겹겹이 에워싸고 이어 왕궁 안에서는 왕의 장례절차가 진행되었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왕이 등극하고 신하들은 승하한 임금의 종묘(宗廟)에 올릴 묘호(廟號)부터 제일 먼저 정하여 올렸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이성계는 승하후 태조(太祖)로 명명되어 종묘(宗廟)에 올려졌고 능호(陵號)는 건원릉(建元陵)으로 지어졌다.
국장(國葬)의 기간은 통상 3개월에서 5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여름이면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동빙고에서 가져온 얼음과 습기를 흡수해 들이는 미역으로 냉동 보관장치를 만들었다. 국장기간이 이처럼 길어진 이유는 왕릉 발복을 믿었던 왕조에서 최고의 명당터에 왕릉을 택지하기 위한 풍수논쟁 때문이었다.
현직 좌의정을 총책으로 하여 육조판서들이 각각 역할을 맡아 수행하는 국장절차의 임시기구를 조성하게 되는데, 유난히도 당파가 많았던 조선왕조에서는 현직 관리들의 당적이 제각기 달랐던 탓에 갓 등극한 새 왕(王)의 첫 국사(國事)인 왕릉선정 작업에서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는 풍수논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토록 중차대한 첫 국사 논쟁에서 한번 패하면 오랫동안 역적으로 몰려야 하고, 이기면 좌의정은 영의정이 되고 이하 모두 한 계급씩 승차하여 조정의 실세로 부각하게 되는 것이다.
승하한 임금의 무덤자리 하나가 산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정권 교체기에서 조정양반들은 풍수논쟁에서 승리하여 살아남기 위해 목숨 걸고 풍수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풍수 논쟁은 500년 조선왕조 역사 동안 왕비와 대군들의 사후(死後) 택지 논쟁을 비롯하여 모두 백여 건에 이른다. 결국 평균 잡아 5년에 한 번은 풍수논쟁이 조정에서 벌어지게 되니 현직 양반들의 풍수실력은 생존을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그랬던 조정대신들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다 살 집을 짓거나 또는 조상들의 무덤을 조성할 때에 왕릉논쟁으로 갈고 닦았던 풍수실력을 그대로 구사하였으니 사대부 가문의 풍수는 곧 왕조의 풍수라 할 수 있다. 더불어 풍수를 모르는 평민들은 사대부의 풍수를 그대로 모방하여 따르게 되니, 소위 왕조시대의 양택풍수는 왕궁풍수에서 양반집 종가풍수로, 다시 평민들의 여염집 풍수로 이어지고, 음택풍수는 왕릉에서 사대부 선산묘로, 이어 평민들의 무덤풍수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구릉을 답사해 보면 조선왕조 풍수의 모범답안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인하여 동구릉이 풍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동구릉 매표소를 지나면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 가운데로 호젓한 숲길이 나오고 그 길의 끝자락에 맨 먼저 홍살문이 놓여 있다.
홍살문의 색깔이 붉은 이유는 붉은 색은 잡귀를 물리치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홍살문 위로 삐쭉삐쭉하게 솟아오른 나무꼬챙이 모양은 화살을 뜻하며 그 가운데 삼태극위에 꽂혀있는 세 갈래 살대는 삼지창을 뜻한다. 붉은 색에 무시무시한 무기로 무장하여 잡귀는 얼씬도 못하게 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곧 이어 양쪽으로 솟을 대문이 있는 기와집 한 채가 있는데 지금은 동구릉 관리사무소로 쓰이고 있으나 원래는 문조왕릉 재실(齋室)이었다. 재실은 왕릉관리와 능제준비를 하는 곳이다.
동구릉에 가장 먼저 입주한 건원릉 조성당시 왕릉 관리에 배정된 재산은 노비 150명에 밭 90만평이라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를 모두 관리하는 벼슬아치는 종9품 능참봉(陵參奉)이었다. 과거에 급제하면 받게 되는 참봉(參奉) 품계는 종9품으로 미관말직에 불과하지만 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은 대단한 배경이 없으면 얻을 수 없는 요직중의 요직이었다. 재실 안에 근무하며 모든 일은 노비들이 다 처리해 주니 할 일 없어 하루 종일 공부만 하게 되고, 더구나 능제 때에는 임금을 독대하여 안내하는 역할을 맡게 되니 때로는 벼락출세의 길도 열리게 되어 뜻있는 조선선비들에게 능참봉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자리였다.
관리사무소를 지나 동구릉의 안쪽 높은 곳에 태조 이성계가 잠들어 있는 조선제일의 명당 건원릉이 있다. 건원릉의 입구에도 역시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곳 홍살문 열 오른쪽 아래에는 돌을 깔아놓은 사각형 모양의 판이 하나 있다. 판위(板位) 또는 배위(拜位)라고도 하는 이 돌판은 왕릉 제사때 왕이 능역(陵域)에 들어서기 전에 올라서서 절을 하는 곳이다.
이어서 홍살문아래서부터 돌을 깔아 조성한 길이 있는데 이를 참도(參道)라 한다. 이 참도는 홍살문에서 정자각(丁字閣)까지 이어져 있는데 돌을 깔은 까닭은 임금이 가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는 길이기에 맨흙을 밟을 수가 없어 소위 포장을 한 것이다.
참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쪽은 높고 한쪽은 낮게 하여 두 개의 길로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음양(陰陽)의 이치에 따라 조성한 것으로 높은 곳은 죽은 혼령이 다니는 신도(神道)이고 낮은 곳은 임금이 걸어가는 어도(御道)이다.
음양의 이치는 좌양우음(左陽右陰)이라 하여 좌(左)는 높고 우(右)는 낮다고 본다. 즉 좌상우하(左上右下)가 되는 것이다.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은 품계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죽은 사람의 경우는 반대가 된다. 즉 우(右)가 높고 좌(左)가 낮은 우상좌하(右上左下)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묘소에서 부부쌍분을 조성할 때는 남자의 무덤이 부인의 무덤 오른쪽에 위치시키는 것이 맞는 법도가 된다. 좌우의 기준은 산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앞쪽을 바라보는 것이 기준이 된다. 즉 무덤을 바라보는 방향이 아니라 무덤의 주인공을 기준하여 좌우를 정하는 것이다.
참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무덤 쪽에서 바깥쪽으로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하였을 때 우상좌하(右上左下) 하여 오른쪽 높은 길이 혼령이 다니는 길이 된다. 여기서 혼령은 임금의 조상을 뜻하므로 당연히 임금보다 높아야 하는 것이다.
참도는 정자각(丁字閣)까지 이어져 있다. 정자각은 능제의 제사상이다. 여염집 묘소로 본다면 상석(床石)에 해당한다. 따라서 정자각의 뒷문을 열면 왕릉의 봉분이 사진과 같이 정면으로 보여야 한다.
만일 뒷문을 열어 봉분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 정자각이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조선왕릉에는 잘못 배치된 정자각이 더러 있다. 여기에는 왕권의 쟁탈과 같은 역사의 왜곡현상이 반드시 숨겨져 있다. 이 부분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고 건원릉의 정자각은 똑바로 능(陵)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지극히 정상적인 왕릉조성임을 알 수 있다.
참도를 지나 정자각을 오르는 곳에 계단이 두 개가 배치되어 있다. 난간석이 장식되어 있는 것은 혼령이 오르는 신도계단이고 또 하나는 임금이나 제관이 오르는 계단으로 동계(東階)라 한다.
동계란 무덤을 기준하여 좌측이 동쪽이므로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임금이 오르는 계단을 동계라 한다면 신도계단인 신계(神階)를 서계(西階)라 한다 하여도 상대적으로 본다면 틀린 명칭은 아니라 할 것이다.
정자각(丁字閣)은 건물의 모양이 ‘정(丁)’ 자(字) 모양으로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황제의 능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일(日)’ 자(字) 형의 건물을 짓는데 왕의 능에는 정자모양의 건물을 짓는다. 그러나 정자각 명칭에 대한 또 하나의 설은 왕릉의 좌향(坐向)에 있다. 조선왕릉의 좌향은 모두 하나같이 계좌정향(癸坐丁向)을 놓았는데 이는 종묘(宗廟)의 좌향이 계좌정향이기 때문에 이에 맞추기 위함이다. 방위상 정남향은 자좌오향(子坐午向)이 된다. 그런데 계좌정향의 각도는 정남향에서 오른쪽으로 15도 돌아간 좌향이다. 제상을 차리는 정자각은 정확히 왕릉의 상석(床石)을 향해야 하므로 자연히 배치는 정향(丁向)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정자각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동쪽에 배치된 것은 태양의 운동선을 따른 것이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정자각을 내려오는 계단이 서쪽에 배치된 것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이를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부른다.
정자각에 오르면 임금은 능제를 지내게 되고 혼령은 곧바로 능으로 올라가서 상석에 앉게 된다. 왕릉 앞의 상석은 민가에서 제물을 차리는 제사상이 아니고 혼령이 앉는 자리, 즉 혼유석(魂遊石)이 된다. 이점이 왕릉과 민묘의 차이이다. 승하한 임금의 혼령은 이곳에 앉아 정자각에 차려진 제사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능제를 마친 임금은 축문(祝文)을 태우기 위해 정자각을 내려오게 되는데 이곳에는 계단이 하나 밖에 없다. 혼령은 이미 능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임금 혼자서만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어 망료위(望燎位)가 놓여 있는데 이것은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소전대(燒錢臺)라고도 한다. 축문은 태워서 예감(瘞坎)이라 이름 지어진 곳의 땅에 묻었는데 이 점도 민가에서 축문을 태워 하늘로 날리는 것과 다른 차이점이다.
망료위 바로 옆에는 수라청(水刺廳)이 있었다. 수라청은 음식을 만드는 곳이 아니고 궁궐에서 가져온 제수용 음식을 그저 보관만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건물은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정자각 옆의 좌청룡 방향에는 수직방(守直房)이 있다. 이곳은 능지기들이 교대로 근무를 했던 일종의 초소였다.
왕릉은 높은 강(岡) 위에 안치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왕릉의 공통된 택지법이다. 강(岡)은 높은 언덕을 말하는데 이는 임금의 용상이 높은 곳에 자리하므로 이를 상징하여 능은 반드시 높은 강(岡) 위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명당이라도 강(岡)이 없으면 왕릉으로써는 부적격이 된다. 높은 용상에 올라 천하를 호령하듯 죽어서도 높은 강(岡)위에서 천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강 위에는 능원(陵原)이 있다. 능원은 상단(上壇), 중단(中壇), 하단(下壇)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장대석(長臺石)으로 구분해 놓았다. 제일 높은 곳의 상단에는 임금의 유해가 영면하고 있는 왕릉침전으로 능침(陵寢)이라 한다. 능침은 제일 중요한 혈(穴) 자리에 위치한다.
능침의 바로 앞을 명당(明堂)이라 하며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그리고 장명등(長明燈), 정중석(正中石)을 배치하는데 문치주의를 숭상했던 조선왕조에서는 유교적 서열에 따라 중단에는 문인석과 장명등이 있고, 하단에는 무인석과 정중석이 있다. 결국 왕, 문인, 무인이라는 조선시대 신분질서가 왕릉양식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무인석은 왕릉에만 설치할 수 있다. 건원릉의 무인은 칼을 칼집에서 빼어 거꾸로 짚은 채 씩씩하고 늠름한 모습이다.
벼슬이 아무리 높은 양반이라 할지라도 묘소 앞에 문인석은 세울 수 있으나 무인석은 세울 수가 없다. 그것은 무인석이 왕릉의 고유양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왕릉이 아닌 무덤 앞에 무인석을 세웠다면 이는 곧 역모(逆謀)에 해당한다. 옛날 법도대로라면 삼족을 멸하는 중형에 처해야 한다. 요즈음 새로 단장하는 묘소들을 보면 가끔 무인석을 세워놓은 것을 본다. 영문도 모르고 세운 무식쟁이 반풍수 처사가 조상을 역적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왕릉의 능원 조성물 중에서 한 가지 눈여겨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능원에 조성된 장명등과 그 바로 앞에 설치한 편편한 사각형의 돌인 정중석이다.
이는 원래 불교양식으로 절집 가람배치에 있어서 대웅전 앞의 배치방식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절에 가서 대웅전 앞을 보면 대웅전 앞마당에 석등(石燈)이 놓여 있고 또 그 앞쪽에 부처님께 절을 하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다. 이 배례석에 해당하는 돌이 능원의 정중석이다. 그런데 숭유억불책으로 유교를 국교로 삼고 불교를 배척하였던 조선왕조에서 웬 불교 양식이 왕릉조성에 사용된 것일까. 거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조선왕조 개국초기에는 유교식 예제를 정해놓은 국조오례가 완성되기 전이었는지라 태조왕릉 조성시에 딱히 정해진 양식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태조가 승하하자 왕릉조성은 부득불 고려왕조의 양식을 그대로 따 왔던 것이다. 신라와 고려는 불교왕조였다. 그러므로 왕릉의 조성에 있어서도 불교의 절집 배치양식을 본받았는데 석등과 배례석 역시도 그래서 생긴 고려왕릉 방식이다. 이를 영문도 모른 채 조선왕조 왕릉에다 모방을 해 놓았으니 불교를 무시하던 조선왕조의 커다란 실수중의 실수이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알게 된 것은 국조오례가 완성된 문종 때였다. 따라서 최초로 국조오례에 의하여 조성하게 된 왕릉인 제5대 문종왕릉 부터 절집의 배례석에 해당하는 능원의 정중석은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절집의 석등을 모방한 장명등도 사라져야 하는데 이것은 아직도 장명등이라는 바뀐 명칭으로 버젓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는 풍수적 이유로 보아야 한다. 절집 법당 앞에 세워진 석등은 불을 켜서 마당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왕릉에서도 능침 앞의 명당은 곧 법당의 앞마당에 해당한다. 따라서 풍수적 해석으로 ‘밝을 명(明)’ 자를 써서 명당을 밝히게 했는데 여기서 ‘장(長)’은 풍수의 십이포태에서 말하는 장생(長生)에서 따 온 것으로 장생은 부귀와 장수, 그리고 만복을 상징하기에 풍수발복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장명등(長明燈)이라 이름을 달고 왕릉의 명당에 놓여있게 된 것이다.
이미 조성되었던 왕릉의 정중석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그대로 두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고 빼내자니 무덤에 박힌 돌 잘못 뺐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이래서 생긴 말이 빼도박도 못한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왕릉을 감싸고 둘러쳐진 곡장(曲墻)을 돌아 능 뒤로 가보면 임신부의 배처럼 불룩하게 솟아오른 잉(孕)이 뚜렷하게 보인다.
능침을 받치고 있는 강(岡)을 생기의 저장고라 한다면 잉(孕)은 내룡(來龍)의 생기를 모아 혈장으로 불어넣어주는 펌프와 같은 곳이다. 이렇게 강(岡)과 잉(孕)이 있어 건원릉은 명당혈지가 되는 것이다.
잉에 올라앉아 생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안대(案對)를 살피니 겹겹이 둘러싸인 건원릉의 안대는 수많은 군중들이 도열한 채 왕릉을 향하여 예(禮)를 표하는 듯하다.
흔히들 건원릉을 장군대좌형 길지(吉地)라 한다. 능의 좌우로 둘러쳐진 청룡과 백호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의 모양이고 앞으로 펼쳐진 산자락들은 수많은 병사들이 도열하여 열병하는 형국이다. 위화도에서 대군을 몰아 고려왕조를 몰락시키고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웅장했던 기상이 이곳에서 그대로 펼쳐지는 듯하다. 죽어서도 장군대좌형에 묻히어 높은 강 위에 올라앉아 발아래 천군만마를 호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웅대한 기상을 발산하였던 천하의 영웅도 죽음 앞에서는 제 무덤자리 하나 뜻대로 하지 못하였나보다. 그것은 태조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하게 치장한 봉분 위의 억새풀이 말해준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열성적으로 왕조를 경영하였다. 그러나 강씨의 베갯머리 송사로 후사(後嗣)를 정하자 이에 격분한 방원이 계모 강씨의 자식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1차 왕자의 난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게 되고 몇 년 후 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종까지 몰아내고 조선왕조 제3대 태종으로 등극했다.
방원의 혈극에 몸서리쳐진 태조는 옥새를 가지고 고향땅인 함흥으로 숨어버린다. 함흥차사라는 말까지 남긴 후 무학의 설득으로 태조는 한양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자신이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잡아두었던 수릉(壽陵)이 방원에 의해 훼손된 것을 보고 다시는 한양 땅에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방원에게 자신이 죽으면 고향 땅에 묻어달라고 하였지만 방원이 도성에서 천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 왕릉을 조성할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선왕의 유언을 무시할 수도 없고 해서 생각해 낸 것이 함흥의 억새풀이었다. 이것이 건원릉의 봉분에 억새가 덮이게 된 사연이다.
1936년 태조5년 8월에 중전 강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왕릉택지를 서둘러 곳곳을 살피다 결국 현재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영국대사관 자리인 한양 도성 안에 잡게 되었다. 그리고 강씨릉 우측에 태조 자신의 신후지지인 수릉을 정해 두고 능호(陵號)까지 정릉(貞陵)이라 지어 두었다. 조선왕조 첫 능호였다. 오늘날 중구 정동의 지명유래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13년 후 정릉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무참히 파헤쳐졌고, 함흥에서 돌아 온 태조는 이 모습을 보고 한양 땅이 죽어서도 싫어졌던 것이다.
지금의 건원릉은 태조 승하 후 태종이 택지한 자리이다. 당시 조정 대신인 김인귀(金仁貴)가 내가 사는 검암에 명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국장의 책임자인 하륜이 가서 보니 과연 천하명당이었다. 하륜은 그 날로 당장 공병대장 박자청(朴子靑)을 검암산으로 보내 왕릉공사를 시작하게 하고, 각 도(道)에서 징발한 6,000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2달 하고도 10일간이나 대역사를 이루어 왕릉을 조성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왕릉은 왕궁으로부터 사방 80리 안에 택지시켰다. 이는 임금이 행차하여 능제를 지내고 하룻만에 왕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리이다.
제22대 왕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왕릉을 수원에 택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수원은 왕궁에서 88리였기에 조정의 대신들이 반대하자 정조는 지금부터 수원을 80리라고 하라 명하여 고집을 부렸는데 여기서 고집쟁이들을 두고 수원80리라 하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덕분에 수원의 명물 수원갈비도 생겨났다.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소는 대단히 귀중한 영농수단이자 재산이었다. 그래서 소를 잡기 위해서는 관청에 허가를 얻어야 했으므로 자연 쇠고기는 귀하게 되고 평민들은 쇠고기 먹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런데 왕릉이 조성되자 매년 능제를 지낼 때마다 소를 마음껏 잡을 수 있게 되니 능제음식으로 왕릉갈비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왕릉갈비가 오늘날의 수원갈비이다.
왕릉이 들어서게 됨으로써 인근지역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왕릉이 들어서면 주변에 있는 무덤들은 모두 강제 이장을 당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마을들도 모두 철거하여 이주시켰다. 궁궐을 중심으로 사방 80리 안에 왕릉을 조성하게 되니 그 안에는 어떤 무덤들도 들어설 수가 없었다. 수원이 80리 범위의 한계지역으로 정해지자 그 밖의 안전지대에 놓인 지역이 수원아래 용인지역이다. 따라서 용인이 양반네 집안사람들의 선산으로 인기가 높았다. 용인 땅이 명당이라는 말은 용인에 명당이 많다는 뜻이라기보다 왕릉으로부터 안전지대라는 풍수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용인 땅에 더 이상 무덤 쓸 자리가 없어지자 그 다음으로 떠오른 후보지가 용인 아래 진천이었다. 이번에는 진천사람들이 난감해졌다. 진천 땅으로 무덤들이 몰려오면 이는 모두가 한양 권문세도들의 선산이기에 진천 사또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진천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이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는 말이다. 즉 용인(龍仁)은 무덤지로서 명당이고 진천(鎭川)은 산사람 양택지의 명당이므로 무덤을 쓰면 발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늘 날 이 말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전해지고 있으나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되 여하튼 왕릉으로 인해 빚어진 연유도 한 몫 한다는데 설득력이 실리고 있다.
동구릉 입구에도 왕릉갈비집이 하나 있다. 정갈스레 꾸며진 목조주택에 휴일의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자리에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왕릉 간산길에 왕릉갈비 맛을 못 본다면 무언가 중요한 것 하나를 빠트린 것처럼 허전할 것 같다.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숯불에 갓 구워낸 왕릉갈비의 맛은 황제의 맛 그대로였다. 거기에 소주한잔 곁들이니 어느 듯 왕이라도 된것처럼 세상 부러운게 없어진다. 그 옛날 왕릉에 능제를 지낼 당시 그 날을 맞이하여 쇠고기를 마음껏 먹게 된 민초들의 심경이 아마도 이렇게 즐거웠으리라.
관리인들의 통제로 인하여 개방되지 않은 다른 능을 간산할 수 없어 아쉬운 마음 가득하였으나 왕릉갈비의 구수한 맛과 소주 한잔으로 인해 어느 새 아쉬움은 없어지고 즐거운 추억 하나만 남았다. 일찍 끝나버린 동구릉 간산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보람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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