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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無人) 외3편
김 명 희
아침마다 들리던 수런대는 이야기 소리도, 마당 쓰는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빛 바랜 적막만이 새벽의 찬 공기를 점령하고 있다. 사람의 인기척이 이토록 소중한 것인 줄 예전에는 몰랐다.
‘폐지 버리는 날짜는 화요일 낮 12시입니다’
안내 문구가 경비원 대신 눈을 부릅뜨고 출입구 벽에 붙어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인건비 절감이라는 차원에서 주민들에게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 아파트 무인경비 시스템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십여 명의 경비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야속한 세상 속으로 밀려났다. 그날은 하늘도 우울해 했고 내 마음도 하루종일 울적했다. 오고 가다 눈에 비치는 텅 빈 경비실은 거미줄이 촘촘히 쳐진 오래된 흉가같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하루씩 교대 근무를 하는 아파트 각 라인의 경비원들. 남들이 잠든 시간에 근무를 하여 늘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피로가 누적되어 밤낮으로 졸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잠이 깰까 봐 발소리를 죽여 가며 살금살금 드나들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근무하는 태도가 저래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루에 몇 번씩 오갈 때는 매번 인사를 하기도 그렇고 안 할 수도 없고 불편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 찬반 의사 표시 용지가 내 앞에 날아왔을 때 나는 두말없이 찬성란에 체크를 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후회스런 기분에 휩싸일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한 채. 주민들 대다수가 찬성이었다. 매달 내는 관리비에 한몫하고 있는 인건비가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경비원의 존재가 그 부담의 몫만큼 절실하다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관문을 잘 잠그지 않던 내가 문을 꼭꼭 잠그고 다니라고 아이들한테도 당부했다. 출입구를 지키던 경비원의 부재는 관리비 절감이라는 플러스와 피해의식에 시달려야 하는 마이너스를 안겨 주었다. 어느쪽을 선택하는 것이 살아가는 데 더 가치 있고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간사는 반드시 양면성이 있게 마련이다. 두 가지 모두 좋을 수는 없다. 자신의 선택에 따른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 그러기에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심사숙고하여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명한 선택을 함으로써 안정되고 편안한 생활이 주어진다. 어느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가치관에 달린 것이다. 불행한 사람은 모든 사물을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눈으로 보지만, 행복한 사람은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쪽으로 바라본다.
경제적인 배려를 조금만 해 주었어도 이십여 명의 실직자를 만들지 않아도 되었고, 출입구에 들어서면서 느껴지는 훈훈한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늘 그 자리에 있어야 될 사람의 빈자리를 본다는 것은 싸늘한 슬픔이었다. 며칠 후에 경비원이 앉아 있던 의자가 치워졌다. 한 달쯤 후에는 경비초소가 허물어질 것이고 몇 달 후에는 번호만 누르면 열리고 닫히는 무인경비 장치가 설치될 것이다. 호롱불 대신에 전기가 켜지고, 연탄 대신에 가스보일러가 집 안을 데우고, 편지지에 정성스레 쓰던 사연이 메일로 전달되는 세상이 되었다. 말초신경은 편하게 되었지만 오고 가는 애틋한 정과 따뜻한 인간미는 밀려나고 있다.
남겨진 다섯 명의 경비원이 관리실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하게 되었다. 쓰레기 분리수거의 재확인작업, 오물 쓰레기통 주변 관리, 우편물 분리작업 등 산재된 많은 업무를 적은 인원이 모두 처리해야 한다. 새로 맞춘 경비복과 모자를 쓴 그들은 어정쩡한 얼굴로 새로운 환경에로의 적응을 시도하고 있다. 그들의 모습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치러야 하는 삶의 애환이 슬픔으로 부각된다.
며칠 전 외출하는 길에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 작업하고 있는 경비원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그래도 나이가 많은 사람을 재채용한 것 같았다. 나이가 많아서 다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것을 생각한 아파트 측의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닥 인정이 햇살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외면할 수는 없다. 기계문명의 발달로 경제적인 면은 과거에 비하여 풍요로워졌지만, 우리들의 정신적인 삶은 오히려 황폐해져 가고 있다. 호롱불 밑에서 나누던 순박한 이야기들, 구공탄을 갈며 느꼈던 시린 추억, 백지에 깨알같이 써 내려가던 절절했던 마음이 남겨 놓은 따뜻한 인정과 훈훈한 사랑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향수 같은 추억은 기억 속을 헤엄치고 다니다가 가끔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신선한 공기를 재충전시켜 주는 마음의 고향 같은 것이다.
이제 나는 인정 어린 사람의 눈길이 아닌 기계에게 신변보호를 맡긴 채, 불안하게 계단을 오르내리고, 긴장된 모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게 될 것이다. 기계문명에 정복당하고 적응되어지는 나약하고 안일한 내 자신을 재조명해 보면서, 이 세상에는 경제적 풍요보다, 첨단과학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쓰러지지 않는 희망
집안으로 들어서니 햇빛이 베란다 깊숙이 들어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아름다운 그녀를 처음 만났다. 거리를 뒹구는 바람소리가 쌩쌩거리는데 그녀는 추운 날씨 속에서 봄처녀 같은 모습으로 생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아무리 추운 겨울도 꽃 피는 봄이 오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계절의 순환이 있기에 우리는 움츠렸던 어깨를 쫙 펴 볼 수도 있고, 빛 바랜 상념 속에서 곰삭힌 삶의 의미를 끌어낼 수도 있다. 봄이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다. 꽃들은 웅크렸던 몸을 조금씩 비틀며 조심스럽게 봄날 속으로 외출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나는 두꺼운 겨울옷을 벗어 던지고 가벼운 마음이 되어 봄이 오는 길목으로 나가 보았다.
나의 머리 속에는 온갖 감성이 수런대기 시작했다. 벚나무는 분홍빛 꽃을 피워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졸졸 흐르는 개울물소리와 까치의 지저귐에 잠자고 있던 들판도 깨어나고 있었다. 공사 중인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가서 만난 환한 봄은 희망이었다. 봄은 그렇게 온 대지를 들썩이며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산과 들 여기저기에 봉긋 솟아오른 꽃봉오리를 보며, 나는 작년 겨울에 보았던 꽃을 떠올렸다. 친구에게 이름을 다시 물어서 꽃집으로 향했다.
연약한 꽃들은 미처 물러가지 못한 심술궂은 겨울이 무서워 비닐하우스 속에 숨어서 은밀하게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속에 살고 있는 꽃들은 제각기 몸을 가꾸며 자신을 데리고 갈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꽃집의 아가씨는 예쁘다’는 노래가사를 무색하게 하는 비닐하우스 꽃집 아줌마. 그러나 덤으로 안겨 주는 한두 개의 꽃 때문에 그런지 꽃보다 더 고와 보였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미보다 생명력이 길고 훨씬 돋보일 수도 있다. 제라늄을 사 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새의 날갯짓처럼 풍성했던 꿈과 거침없었던 희망은 빡빡한 현실에 찢기고, 끝없이 인내하며 살아온 세월. 이제는 평온하지만 들뜸이 없는 수평의 생활이 나는 싫었는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 속에서 꿈을 꾸는 듯한 모습의 그녀를 눈앞에 모셔 놓고 대리만족이라도 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는 한 편의 시로 나에게 다가왔다.
잎보다 꽃망울을 더 많이 단 그녀를 / 처음 데리고 오던 날 / 붉은 색의 그녀를 요구하자 / 꽃집 주인은 입 꼭 다문 봉오리 하나 따서 / 까뒤집어 보이며 색깔을 확인시켰다 / 늘어가는 식구를 위해 / 엽록소 뱉어 내고 죽어 가는 잎도 있고 / 바람과 맞서다 떨어지는 꽃 / 온몸으로 받아 / 가슴에 눕혀 고이 풍장하는 / 내 어미같이 눈물겨운 이파리도 있었다.
십 년 동안 한 집에서 같이 살던 키 크고 잘생긴 바퀴라나무가 관리 소홀로 죽었다. 거목의 뿌리를 뽑아 어깨에 메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차마 버릴 수 없어 집으로 다시 가져 왔다. 빈 화분에 눕혀 풍장한 이후로 나는 꽃나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베란다를 깨끗이 정리하고 작은 의자를 하나 갖다 놓았다. 가끔 그 의자에 기대고 앉아 창 밖을 내다보며 정신의 고요를 불러오는 연습을 하곤 했다. 정을 떼는 일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식물에서도 잊을 수 있는 시간과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제라늄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하나씩 사서 모은 꽃나무가 이제 베란다 한 쪽에 작은 화단이 형성될 정도로 식구가 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물 주는 날짜를 정했다. 물 주기를 한번씩 잊어버릴 때가 있다. ‘아차’ 하고 달려가 보면 잎이 시들해지고 색깔도 달라져 있다.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물을 주고 잎에 묻은 먼지를 닦아 준다. 이, 삼일 지나서 가 보면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물 주는 시기를 너무 늦추어 버리면 물을 주어도 살아나지 못한다. 잎이 누렇게 변해 얼마 가지 않아서 떨어져 버린다. 식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시기에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살 수 있나 보다.
어쩔 수 없이 가지치기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가위에 잘려 나가는 신체의 일부가 얼마나 아플까. 그러나 일시적인 인정에 쏠리다 보면 소중한 것까지 모두 잃을 수 있다. 온전한 삶을 위하여 불필요한 것은 과감하게 제거해야 하는 인생 전략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초록의 식구들 틈에서 가늘지만 힘찬 꽃대를 부지런히 밀어 올려 봉오리를 맺고 꽃을 피우는 그녀는 나에게 힘이 되었다. 사는 게 지칠 때, 눈앞에 캄캄한 어둠만 보일 때 나는 베란다로 달려가 그녀를 본다. 꽃이 지는가 싶으면 허무를 느낄 시간도 없이 그 옆에 또 다른 한 송이의 꽃을 피워내 희망을 제시한다.
하찮은 꽃 하나에서 희망을 건져 올려야 하는 나 자신이 나약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위대한 이룸은 거의 작은 것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피우는 것의 소임을 다하고 땅에 떨어져 말라 가는 꽃잎을 손으로 만져 본다. 부드럽고 평온하다. 후회도 아쉬움도 없이 조용히 받아들이며 생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사계절 내내 꽃을 피워내는 쓰러지지 않는 희망이었다.
병문안하던 날
병원 복도에 들어서자 소독약 냄새가 콧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양손에 든 녹두죽도 약냄새에 취한 듯 출렁거린다. 일층 안내소에서 환자 이름을 말하고 병실을 물었다. 안내원은 컴퓨터로 확인 후 가는 방향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과거에는 병원도 일종의 서비스업종이다. 친절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이다. 불친절하던 공공기관이나 병원이 경쟁사회에 놓여지면서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친절 교육, 친절 서비스 하면서 태도 변화를 시작해 이제는 친절이 생활화되어가고 있다.
엑스레이 촬영실을 지나자 검사실이 나온다. 의사와 간호사, 각 부서 직원들이 바쁘게 오간다. 그들은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에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표정이다. 직업의식에 앞서 의료인은 사명감과 인간애, 그리고 봉사정신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 내가 간호사로 근무하던 시절 할머니 환자를 보면 내 어머니 대하듯, 소아 환자가 입원하면 내 아이 돌보듯 애틋한 마음과 진심이 깃든 손길로 간호에 임했다. 그런 마음가짐과 태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희로애락의 인간사를 겪으면서 그와 비례하여 얻어지는 성과였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에 한치의 실수와 태만도 허용될 수 없다는 생각이 간호사를 그만두고도 칠팔 년이 지난 지금에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가끔 병원에 올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간호사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자기 직업에 백 프로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불만족을 만족으로 전환시키며 살아갈 때 그 사람은 성공한 삶을 얻은 자이며, 긍지 속에서 행복을 찾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손에 매달려 있던 죽그릇은 지쳤는지 체온도 잃은 채 잠잠하다. 입원실을 찾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환자는 오른쪽 팔에 링거액을 꽂고 푸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등에 난 조그만 혹이 점점 커져 통증까지 동반되어 수술하려고 입원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수술복을 입고 병색이 되어 누워 있다. 병이 오기 전에 미리미리 예방하고, 어떤 병에 걸린 것을 알면 초기에 치료하여 더 큰 병으로 진전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도 중간지점에 간호사실이 보인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도 과거에 어느 병원의 간호사였다며 의학용어를 쓰면서 아는 체하고 나서서 어느 병실 어느 환자를 잘 봐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병원을 떠난 지 상당한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의료인이 아닌 일반 방문객일 뿐이다. 아는 척할 만한 지식도, 염치도, 능청도 세월의 뒤안길에서 늙어 가고 있었다.
바로 옆 침대에는 수술을 마친 할머니 한 분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집에서 기르던 개에게 온몸이 물어뜯겨서 응급수술을 했단다. 개는 예로부터 주인에게 충성하는 충직의 대명사였는데 주인을 물다니. 사람들의 인심이 각박해지니까 개의 충성심도 세상 인심을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사랑의 결핍이 동물에게까지 영향을 줄 만큼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녹두죽을 한 컵 따라서 할머니에게 권했다. 컵에 담겨진 녹두죽의 표정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녹두죽은 할머니의 건조한 입을 통해 목구멍을 지나 위장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위액과 잘 섞여서 할머니의 감긴 눈을 뜨게 할 것이고 기력 회복에 도움을 줄 것이다. 녹두죽은 해독과 해열작용이 있어 환자의 식사로 적합한 음식이라고 한다.
언제 병마가 우리를 공격할지 모른다. 병마는 강한 곳은 싫어하고, 나약하고 불결한 곳을 좋아한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는 말이 있다. 몸의 어느 한 곳에 고장이 나면 체력이 약해져서 또 다른 병이 침범해 올 가능성이 많다. 평소에 건강관리를 꾸준히 하여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다. 건강을 위하여 적당한 영양 섭취와 충분한 수면이 필요하며 신선한 공기와 일광 등 좋은 위생환경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심호흡법과 정좌법은 정신상태의 안정을 위하여 필요하다. 530 캠페인은 이제 범시민 건강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주일에 5일 이상, 한 번에 30분 이상 걷기 운동이다. 조금 빠른 걸음걸이가 땀을 나게 하여 노폐물 배출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병실마다 간호와 치유의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들로 가득하다. 건강을 잃고 병마와 싸우고 있는 환자들을 보며 그들이 하루빨리 회복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빌었다. 나에게 다시 한 번 백의의 천사가 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손길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간호하는 데 남은 내 삶을 바쳐 보리라.
밖으로 나오니 눈이 펄펄 날리고 있었다. 이 세상의 어둡고 불결한 모든 것을 희고 깨끗하게 바꾸어 질병이 없는 세상이 되기를 소원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분홍빛 꿈
막내아들 결혼식이 있다고 외사촌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토요일이어서 차가 밀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되어 집에서 서둘러 출발했다. 가는 길을 잘 몰라 이정표를 쳐다보며 한참 달리다가 주변을 살펴보니 방향이 틀린 것 같았다. 마침 정지 신호등이 켜져 창문을 내리고 옆에 서 있는 차에게 도움을 청했다. 자세히 안내를 받기는 했는데도 내가 원하는 길은 나오지 않았다. 또다시 차를 세워 놓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빵빵거리더니 차 한 대가 옆으로 다가 왔다. 창문을 내려 보니까 조금 전에 길을 가르쳐 준 그 차였다. 인상도 좋고 선량해 보이는 중년의 부부는 따라오라고 하며 앞장서서 달렸다. 목적지에 가까운 갈림길에서 손짓을 하고는 그들은 직진을 했다.
이기적인 개인주의로 흐르는 요즈음 보기 드문 친절이었다. 물론 가는 방향이 우연히 같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길을 안내 받은 사람이 잘못 가고 있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해 뒤 따라와 관심을 기울여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남을 위해 봉사하고 배려하는 마음에 인색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잠시 동안의 동행이었지만 그 부부의 따뜻한 인정은 매연에 찌든 거리를 맑게 정화시켜 주었다.
수성못이 보인다. 주변에는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곱게 물든 잎들이 훌훌 떨어진다. 단풍은 낙하하는 순간 무슨 생각을 할까? 슬프고 기뻤던 지난 세월을 모두 잊고 홀가분하게 떨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쓸데없는 욕심은 버리리라 생각했다. 낙엽이 눈처럼 수북이 쌓인 길을 걸었다.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가을의 정취를 느낀 후 일어섰다. 예식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결혼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이 만나 새로운 가정을 시작하기 위한 언약의 장소, 홀 안에는 오염되지 않은 싱싱한 꿈과 풋풋한 미래가 가득 차 있었다. 주례사가 시작되었다. ‘결혼을 하면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와이프 보이가 되어라. 남자는 여자 말을 잘 듣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라. 그게 바로 남자의 권위다. 시대가 흐르면 가치관도 바뀐다. 시대에 부응하여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파격적인 주례사였다. 남자들이 들으면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남자의 권위만 내세우고 자기 주장만 한다면 다소곳이 복종할 아내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다 보면 부부싸움이 잦아질 것은 뻔한 일이다.
내가 예식장에 화사한 신부로 섰을 때 보이던 웃어른들은 한 사람씩 자취를 감추었고 나는 이제 칠팔 세 소년이던 조카들의 결혼식에 웃어른이 되어 몸에 점잔을 휘장처럼 두르고 서 있다. 예식장은 세대교체의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시대의 흐름이 아니겠는가.
밖으로 나오니 호텔 정면에 폭포가 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앞을 다투어 뛰어내리는 물줄기를 보며 오늘 결혼식을 올린 신랑 신부를 떠올렸다. 어떤 길인지 미리 알아볼 수도 없는 낯선 길을 달리기도 하고 걷기도 해야 한다. 달리다가 넘어지면 상처를 안고 또 달려야 한다. 멈추면 낙오자가 될 것이다. 인생은 끝없이 투쟁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낙엽은 새싹을 틔울 꿈에 부풀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떨어지고, 청춘 남녀는 서로 어울리는 사람끼리 만나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고 있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그렇게 떠나가고 채워지는 흐름의 연속 안에 있다. 그 끓어지지 않는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단풍잎같이 자신을 곱게 물들이며, 낙엽처럼 욕심을 모두 버리고,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착한 저 부부처럼, 아내를 사랑하는 와이프 보이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향기와 색깔을 지니고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으면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면 되지 않을까.
왔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향했다. 한 번 달려 본 길이어서 순탄하게 갈 수가 있었다. 우리네 삶도 되돌아가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실수도 하지 않고 시행착오로 곤란을 겪을 일도 없지 않을까. 그러나 인생의 묘미는 줄어들 것 같다. 결혼식장 마당에 치장을 마친 차 한 대가 신랑 신부를 기다리고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날 그들이 부러웠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불행하지만은 않았지만 오늘 이토록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은 시대의 흐름을 무시하고 아직도 꾸고 싶은 분홍빛 꿈이 있다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