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소녀의 꿈*^* 1,섬소녀의어린시절 내 고향은 지도 끝자락에 위치한 완도군에 속하는 생일도 섬이다 하늘과 산과 바다만 보고 섬 밖으로 한 번도 나와 보지도 못한 채 16년을 살았다. 소아마비라는 질긴 장애의 끈을 붙잡고 교육, 정보, 의료적인 혜택마저도 뒷전인 채 동물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손에는 슬리퍼 발에는 운동화를 싣고 네발로 기어 다녔던 어린 시절 한참을 기어 다니다 길모퉁이에 앉아 올려다 쳐다보았던 하늘은 늘 푸르렀다. 마을에 초등학교가 있었기에 엄마 등에 업혀서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입학식에서 다른 애들과 다르다는 어렴풋한 의식은 잠시뿐 부모님 오빠들 친구들 등에 업혀 학교를 다니면서 틈만 나면 네발로 기어서 또래들과 어울려 온갖 놀이를 하는 바람에 겨울이면 손바닥이 갈라져 피가 나기도 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소풍날이면 일부러 부모님은 산으로 바다로 나가시고 난 돌담 대문에 앉아 모래사장을 향하여 걸어가는 아이들의 행렬을 지켜보고 앞바다에 펼쳐졌던 쪽빛바다를 보며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다. 4학년 여름 큰엄마 등에 업혀서 교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하나님을 만난 기쁨 속에 첫 번째 기도는 ■하나님 막대기라도 짚고 걷게 해 주세요■ 였다 아버지께서 깎아주신 그 막대기를 짚고 일어서서 너무도 힘겹게 오른손은 막대기를 잡고 왼손은 무릎을 짚고 걷기 시작했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읍내에 있는 중학교를 다닐 수가 없어 부모님께서는 열네 살 어린 내게 구멍가게를 차려주셨다 아버지는 통통배를 타고 물건을 해오시고 엄마는 밥을 해서 나르시고 그 수고가 무색하게 동네 한가운데 가게를 했던 난 파는 것 보다 외상주고 불쌍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그냥 집어주기가 일쑤였다. 1년 가까이 하다 빚만 지고 결국은 가게를 정리 했다 교회 가는 일이 집밖으로 나오는 유일한 외출이었다. 라디오를 벗 삼아 세상을 향해 눈을 뜨기 시작했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밤을 새우고 방송국에 보낸 글이 채택이 되어 하루에도 수십 통 씩 편지를 주고받는 즐거움 속에 일 년을 살았다 그리고 라디오를 통해 장애인 취업이라는 이름으로 엄마 등에 업혀 막대기를 들고 처음으로 섬 밖으로 나왔다. 버스를 타고 열차를 타고 하루 걸린 서울 길 엄청난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서울에 살겠다고 다짐을 했다. 목발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았던 무지함 막대기를 버리고 목발을 샀다 ■주님 이제 막대기를 버리고 목발 짚고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는 두 번째 응답의 기도가 있었다. 절대 서울에서 살수 없다는 엄마는 다시 날 업고 섬으로 내려가셨다. 내려온 이후 서울에 대한 꿈을 꾸며 목발 짚는 연습을 하고 그 목발을 짚고 그동안 못 다녔던 섬 구석구석을 다녔다. 풍부한 감성 속으로 율동하던 자연에 풍경들 그때에 감동들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섬마을에 풍경 하나 하나들이 유년의 페이지들에 새겨져 있다. 열일곱 햇볕 좋은 이른 봄날, 아버지가 미역을 팔아내게 맡겨놓은 38,000원 난 그 돈을 가지고 친구와 함께 완도 읍내 장에를 갔다. 닭을 사서 장사를 해 그 돈으로 서울을 가겠다고 엉뚱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닭을 사서 돌아오는 배안에서 닭들이 나와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서울로 도망간 줄 알았는데 닭을 사오는 절 보며 어이없어 하시던 부모님 표정 결국은 성화에 못 이겨 서울로 올라가라는 허락을 하셨다. 선착장에 서서 배가 멀어지도록 손을 흔들며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치시던 엄마 모습과 완도읍에 나오셔서 버스를 태워주시며 ■잘가래이■ 하시면서 그 굵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시던 아버지! 그 눈물은 지금까지 날 지켜준 힘이었다.
2,꿈꾸던 서울생활 눈물을 훔치며 도전과 용기를 가지고 16년 동안 살았던 섬을 떠나 드디어 꿈꾸던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80년대의 사회흐름은 수공업 제조분야에 수출이 활발한 시기였다. 탁 트인 바다만 바라보며 살다 지하실 인형공장에서 본드냄새와 먼지, 답답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눈만 뜨면 펼쳐졌던 바다와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해질녘 서울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수없이도 눈물을 훔치곤 했다. 장애인들의 활동이 많지 않았던 때였기에 숙소 문을 나설 때면 언제나 모아지던 시선들은 내 자신이 이겨내야 할 또 하나의 벽 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꿈꾸던 배움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했다. 하루 열두시간이 넘게 일을 하고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수유리에서 신설동 까지 새벽반으로 검정고시 전문학원을 다녔다. 때로는 목발은 목발데로 내 몸은 몸 데로 가방은 가방 데로 차안에서 나뒹굴기도 하면서 안내양들의 귀찮은 말투와 시선은 기본이었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면 그냥 지나가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비 내리던 새벽 어느 날 그날도 가늘게 내리는 빗줄기를 우산을 쓸 수 없어 비를 맞으며 버스를 탔다. 차에 오르자마자 안내양의 오~라이 라는 목청과 함께 차는 움직였고 난 넘어지지 않으려고 문을 잡는 바람에 안내양 목을 조이고 말았다 캑캑거리며 얼마나 욕을 해대는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내리는 빗줄기와 함께 가로등에 기대고 서서 눈물 콧물 빗물이 범벅이 되어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실컷 울다 숙소로 돌아오기도 했다. 견디기 힘들 만큼 작업시간이 많아지고 학원 4층 계단까지 오르내리는 힘든 날들 속에서도 교회를 찾아 기도할 수 있었기에 힘을 얻어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 열일곱 꿈 많은 섬소녀의 꿈꾸던 서울 생활은 고단한 일상 속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강해지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로봇이 아니니 일 좀 그만 시키라고 관리자에게 따지는 바람에 일 년 반 동안 몸담았던 첫 번째 일터를 그만두게 되었고 이곳저곳 일터를 찾아 기웃거리면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겪어야했던 아픔들은 지금에 내 삶의 큰 전환점이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영세 제조공장을 전전하고 4.19탑 연못 연꽃잎을 보며 훔쳤던 눈물들은 절망이고 희망이었다. 삶에 대한 두려움과 비관은 밑바닥을 헤매면서 갈등하게 했고 이른 새벽에 죽고 싶은 마음으로 찻길로 뛰어들었을 때 한마디씩 욕을 하며 피해 가던 차량들.......절망 속에서도 나는 늘 선착장에 서서 눈물을 훔치시던 부모님을 생각하며 힘을 냈다. 생각 끝에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희망을 담은 편지는 청와대 민원실에 접수되어 동장님이 찾아오시고 편지로 인해 삼육재활병원에 혼자서 입원을 하게 되었다. 나 혼자만의 장애가 제일 슬프다고 생각했었는데 삼육재활병원을 찾고 너무도 다양한 장애들을 보고 난 충격을 받았다. ■■■ "ㄱ"자로 굽은 왼쪽무릎을 펴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 보호자도 없이 혼자 들어오는 절 보고 황당해하시는 의사선생님들 표정을 보며 수술대에 누워 두려움에 떨며 손잡이를 움켜 쥔 채 왼쪽발목 부분마취와 함께 드릴로 발목뼈를 뚫고 쇠막대를 꼽는 너무도 원시적인 방법으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쇠막대에 20파운드가 넘는 쇠뭉치를 매달아 침대에 누운 채 19년 동안 굽어있던 무릎 근육을 펴는 고통을 보호자도 없이 이겨냈다. 다들 한 달 이상 걸리는데 3주 만에 내 무릎은 일자가 됐고 두 달에 걸쳐 깁스와 보조기를 맞추고 걷는 연습을 했다. 3,두 발 인생의 시작 두발로 설 수 있다는 것, 걸을 수 있다는 것,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큰 감동이 또 있을까? 네 발로 기어 다니고 막대기를 짚고 목발을 짚고 왼쪽 보조기를 착용하고 두발로 서서 걸을 수 있는 순간까지의 아픔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감사에 기도로 눈물을 흘리게 했다 . 무엇보다 우산을 쓸 수 있다는 것 두 손에 물건을 들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벅찬 감동이었다. 두 발의 젊은 내 삶이 시작되었고 내안에 꿈틀거리는 삶의 열정은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많은 활동을 하게했다. 서툰 몸짓이었지만 사회에 한 일원으로 그렇게 당당히 섰다. 그리고 어설프고 서투른 두 발 걸음으로 사회일선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의지로 자개농 일을 시작했다 1년 반 동안 자개 일을 했지만 영세한 작업환경들을 보며 그만두고 광주에 있는 의상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인언니가 없는 틈을 타서 몰래 재봉틀을 해보며 지내기를 6개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재봉틀사로 취직을 했다. 미싱사로써 16만원의 첫 월급을 받은 난 숙련공이 되어 큰 회사에 입사를 했다. 100명이 넘은 직원 중에 유일하게 나 혼자만이 장애를 갖고 있었고 일반인 못지않게 작업능률이 뛰어나 인정을 받아 샘플실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일을 하면서도 난 늘 디자이너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 했다.아버지에게 방을 얻겠노라고 말씀드렸더니 젊은 시절 남의 집 살이를 해 사두셨던 섬에 있는 큰 산을 팔아 100만원을 보내주셨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믿음이셨다. 보증금 100만원에 4만원하는 월셋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종로5가에 있는 무대의상 만드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일을 하면서도 한복과 복장학원을 다녔다. 의상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자취방에는 재봉틀을 사놓고 밤이면 이 것 저 것 옷도 만들어 입고 실습도 하면서 푸르던 젊음의 꿈들이 그렇게 무르익을 즈음 멋진 만남을 꿈꾸던 내게 장애인이라는 걸 이용해 다가오는 이성이 있었다. 그 이성의 만남을 통하여 몸과 마음에 너무도 큰 상처를 받았다. 분노와 갈등 아픔과 고통을 겪으면서 엉망이 되어버린 생활과 꿈들을 다시 긁어모으며 발에 밟힌 잡초처럼 포기할 수 없는 생명의 끈을 잡고 다시 일어섰다. 4,장애인부부의 결혼생활 아버지의 믿음과 엄마의 눈물은 나를 지키는 신앙과 함께 다시 일어서게 했다. 단체들을 찾아 봉사한답시고 다니던 중 시설장애인들과 함께 가방제조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소아마비와 척추 이중 장애를 갖고 있는 남편을 만나 장애인부부라는 이름아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중곡동에 5평 가게에 달린 방 하나에 비키니 옷장 하나와 유일하게 새것인 밥통하나로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재봉틀을 들여놓고 난 직원, 두 명을 데리고 하청으로 봉제일을 하고 남편은 재활시설로 가방일을 하기위해 출근을 했다. 그러기를 몇 개월이 지난 여름 재활시설에 불이 나는 바람에 가방 일을 하던 남편의 일터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재활시설 이전과 함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남양주로 이사를 왔다. 그동안 하던 의류 봉제일을 접고 남편과 함께 가방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고 장애를 갖고 장애인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장남장손에 아버님 형제가 열두 분 인 집안에 넉넉지 않은 생활은 가장 기본적인 생계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남편은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고 남편 따라 함께 일을 해야 되는 고된 일상 속에 아이가 생겼다. 만삭에 몸으로 출산을 앞둔 전날까지 재봉틀을 하고 진통이 오는데 서울까지 버스를 타고 갔던 무지함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건강한 아들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이불을 들썩이기만 해도 찬바람이 콧등을 서늘하게 하는 단칸 방 월셋방에서 들락거리는 동생들과 아침저녁으로 연탄 통을 들고 뒤뚱거리며 버릴 곳 을 찾을 때면 힘이 들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재래식 화장실이 밖에 있어 몸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문을 열고나올 때면 찬바람이 뼛속까지 들어오는 걸 느끼기까지 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 또 다른 아픔에 시작이었다. 예방접종 등 외출을 할 때면 늘 주위에 도움을 받아야했다. 순간순간에 아픔들을 다 쓸 수는 없지만 장애인 부부로써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귀하고 소중한 아이를 데리고 작업장에 놀게 하고 일을 했던 걸 생각하니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커가면서 세 돌이 지나고 어린이집을 보내고 남편이 하는 일을 하다 재활시설에 취직을 했다. 출산이후 늘어난 체중과 무리하게 재봉틀을 해 무릎에 통증이 심해 병원을 찾았더니 퇴행성 관절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난 또 한 번 내 인생이 억울하고 슬퍼 울었다. 10년 동안 서툴렀지만 두발로 걸어 다니다 다시 목발을 짚어야만 했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일상을 보냈다. 장애인시설에 정문을 지키는 수위 일을 보면서도 틈만 나면 남편이 하는 일을 도왔고 시설 내에 수용되어있는 장애인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장애인직업재활에 꿈들을 꾸기 시작했다. 꼭 해보고 싶었던 장애인직업재활에 대한 꿈들은 남편을 설득해 힘든 결정을 하게 했다. 그런 생활가운데 면사무소 추천을 받아 독거노인 어른 여섯 분을 선정해 작은 금액이었지만 몇 년 동안 지원했던 일이 내 생애에 있어서 사회복지를 향한 첫걸음이 아니었을까!..5년 동안 몸담았던 시설을 떠나 창고건물을 얻어 작업장을 옮겼다. 5,사회복지의 꿈꾸며..... 2001년 5월 장애우 5명과 함께 ■두리원■ 이라는 이름아래 장애인재활작업공동체를 꾸렸다. 일을 찾아 기웃 거렸던 아픔들을 생각하면서 멋진 일터를 계획하며 큰 포부를 갖고 시작했지만 현실은 결코 쉽지 않았다. IMF때보다도 더 악화되는 사회경제 흐름이 현실로 다가왔고 수년간 거래해오던 도매상마저 문을 닫는 막연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남편은 내부에서 일을 하고 난 주로 활동을 했다. 일거리를 찾아 높은 계단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깨물기도 하면서 일거리를 받아오면 뒤떨어지는 작업능률에 남편과 둘이서 늦게 까지 일을 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장애인일자리 창출이라는 열정과 의지로 시작했지만 생각 외로 힘든 장애인고용 이라는 현실은 힘겹기만 했다. 여러 유형의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을 일을 시키고 지도한다는 것은 엄청난 인내였다 늘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을 비워야만 했다 .두리원을 운영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채를 감당하기조차도 힘들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이는 한참 올려다 볼만큼 커서 응원하고 힘을 주는 것이 아닌가! 일거리만 들어오면 밤낮없이 열심히 일을 했기에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중 kbs사랑의리퀘스트에 두리원이 방영되었다. 방송이 나간 이 후 지원금 일천만원을 받아 조립식판넬로 내부 수리를 했다. 생활공간과 작업장도 분리하고 턱을 낮추고 방을 들였다. 장애인고용촉진공단과 직업학교를 통해 일반 사회생활이 어려운 정신지체. 정신장애. 뇌병변, 지체장애를 갖고 있는 가족들이 한두 명씩 모여들었고 열 명이 넘는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조금은 더디지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일터가 있다는 것보다 큰 감사가 있을까? 어려운 운영으로 일 년에 한 번씩은 두리원 가족들이 온몸으로 만든 가방과 각 기업들의 제품을 협찬 받아 바자회를 열어 난방비로 사용하고 수익금에 일부는 면사무소 통해 어려운 가정을 선정해 난방비 및 장학금으로 지원하기를 7년 째 이기도 하다. 열 명이 넘는 남자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여장부로 1인다역에 하루하루의 삶의 무대에 쏟아낸 열정은 내일을 향한 섬소녀의 꿈 그 자체였다. 비록 열악한 생활환경에 겨울이면 콧등이 시리는 작업환경 이었지만 나눌 수 있는 마음은 작은 행복이었다. 지역단체에 관심이 모아졌고 시 추천으로 공동모금회 지정기탁을 통해 두리원을 꾸릴 수 있는 500평의 부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기쁨은 잠시 장애인 시설이 혐오시설이라도 되는 듯 토목공사를 위해 서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시설로 전환하는 서류를 준비하던 중에 또 다른 기회가 주어졌다. 시청 사회과 추천으로 로또복권기금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너무도 감사하게 지금의 두리원을 꾸릴 수 있었다. 200평대지에 건평 3층 다락방을 포함해 108평의 집은 매입했으며 로타리클럽 지원으로 수리와 작업에 필요한 기계를 들였다. 로또기금 추가 지원으로 승강기 설치와 장애인 편의시설 기준에 맞춰 리모델링을 하고 5년동안 살면서 콧등 시리던 창고건물에서 하루 종일 햇볕이 고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시장님을 비롯하여 지역단체장 공공기관 등 모든 협조아래 스피릿 앙상블의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장애인생활시설로 전환을 하고 감동에 개원식을 했다. 아침 새소리에 잠을 깨고 눈부신 아침햇살을 맞이하는 일상 속에서 정신지체1급의 재홍씨가 수시로 스킨쉽을 해대는 것에도 무디어진 나를 본다. 보호와 수용만이 아닌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의 잔존 능력을 창출하고 생활 속에 자립이 이뤄지도록 개별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복지의 길을 가리라 마음을 다져본다. 운영하고 있는 장애인복지와 함께 아동복지 대한 관심아래, 살고 있는 지역에 편부, 편모, 저소득 조손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방과 후 교실, 두리꿈터 열어서 운영 중이다. 맑고 깨끗한 동심에 매일 젖어보며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몫에 삶을 감사하며 충실하리라 ......하늘과 바다만 바라보며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살던 섬소녀가 오늘이 있기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니 감사와 감동뿐이다. 장애를 갖고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인생길인가? 네 발로 기어 다니고 막대기를 짚고, 목발을 짚고 두발로 서서 걷고 다시 목발을 짚는 지금까지 먼 인생길을 돌아온 듯 한 몽롱함을 느낀다. 막연한 열정과 꿈으로 꾸려온 두리원! 때론 힘이 들어 주저앉고 싶었지만 기도하는 신앙과 강한 정신력으로 내 자신이 그랬듯이 일하고 싶어 하는 많은 장애인들이 일을 통해 자립을 고취하고 생활 속에 인권과 권익이 보호받는 진솔한 삶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눈뜨면 펼쳐졌던 유년에 뜨락에 눈부시던 쪽빛바다를 보며 소녀는 꿈을 꾸었다. 막연히 아름다운세상을... 나의 인생 나의 삶에 장애인복지와 아동복지의 꿈을 실어보며 김선숙
**2007년 7월 김문수 도지사님과 함께 시상식 무대에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내 영혼을 울린 체험수기를 나누고자 글을 올립니다.* 힘겨운 장애를 극복하고 장애인 생활시설 두리원과 방과후 어린이 공부방 두리꿈터를 일군 두리원 원장 김 선숙님의 감동글 입니다. 2007년에는 경기도 여성상을 수상하신 불굴의 여성이며 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요즘은 두리원에 저가로 밀려드는 중국제품으로 일거리가 줄어 운영면에서 많이 어렵다고 합니다. 진정한 복지와 재활이 함께 갈수 있도록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함께 사랑을 나누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작은 사랑도 함께 나누면 두리원의 장애인들과 두리꿈터의 아이들에게 웃음과 용기를 선물하리라 믿습니다.
*두리원* 주 소: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입석리 603-7
|
|
첫댓글 정말로 장하십니다 몸이성한 저히도 감히 엄두를 몾 내는 그힘든일 축하 드림니다.그리고 힘내세요, 화이팅
정말로 장하십니다 몸이성한 저히도 감히 엄두를 몾 내는 그힘든일 축하 드림니다.그리고 힘내세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