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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창건 - 봉암사는 지금부터 약 1100여 년 전 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국사께서 창건한 고찰로서 선종산문인 구산선문의 일맥인 희양산문으로 그 사격이 매우 당당하다.
당시 이곳은 신라 문화의 정수인 선풍을 크게 일으켜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파의 주봉을 이루었던 곳이다. 특히 신라 제 49대 헌강왕은 화풍으로 소폐하고 혜해로 유고할 유신정치를 뜻하고 이었는데 이런 헌강왕의 개혁 의지에 이념을 제공한 것이 지증대사의 선(禪이)었다.
중창불사 - 그후 봉암사는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였는데 고려시대에도 많은 고승을 배출하여 불교중흥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던 대선찰이다. 그런데 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사찰 건물이 소실된 것을 불기 2499년(1955) 금색전을 비롯해 여러 건물을 다시 건립하였으며 최근의 도량으로 모습을 일신하게 되었다.
봉암사는 불기 2526년(1982)부터 종립선원으로 희양산 남쪽 너른 터에 자리하고 있다. 희양산은 백두대간의 단전에 해당하는 높이 998m의 거대한 바위산으로 서출동류하는 30리 계곡을 끼고 있어 천하 길지로 이름나 있다. 멀리서 보면 우뚝한 모습이 한눈에 영봉임을 알수 있는데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르고 있어 예로부터 봉암용곡이라 불렀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화되고 극락전만 남았을 때인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조선조 세종대왕 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 를 저술하였고, 1674년 다시 소실된 절을 신화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 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쇠퇴하였다.
구한말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다. 1915년 윤세욱 스님이 요사와 영각, 창고 3동을 신축하였고, 1927년에는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다. 근래에 들어 당시 조실을 지낸 전 조계종 종정 서암스님과 주지 동춘스님 후임 원행, 법연스님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적조탑비, 정진대사 원오탑, 정진대사 원오탑비, 봉암사 삼층석탑 등의 성보문화재가 옛 선사의 향기를 은은하게 전하고 있다.
봉암사는 주차장에서 내려 이 다리를 건너 참배하는 길이 있고 다리를 건너지 않고 바로 직진하여 참배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직진을 하여야 일주문을 만날 수 있다.
봉암사 일주문(一柱門)
봉암사 일주문 - 희양산봉암사(曦 陽山鳳巖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뒷편의 편액은 봉황문(鳳凰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일주문의 기둥은 울퉁불퉁한 나무의 원형을 그대로 살려놓아 자연미를 살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봉암사 일주문 뒤편에는 봉황문(鳳凰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봉암사 설법전(說法殿)과 해회당(海回堂) - 설법전의 측면 편액에는 선설당(禪說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봉암사 남훈루(南薰樓)
봉암사 남훈루(南薰樓) - 남훈루의 뜻을 설명한 곳이 없어 몹시 안타깝지만 추측을 하자면 '부처님의 법향이 풍기는 남쪽의 문' 으로 이해를 하면 좋을 듯 싶다. 중앙의 2층으로 누각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단층 건물이 늘어서 있는 형태이다.
남훈루를 누하진입하여 계단을 올라서면 대웅보전을 만나게 된다. 대웅보전 앞 좌우에 요사채가 있고 그 요사채 입구에 노주가 위치해 있다.
봉암사 보림당(寶林堂)
봉암사 보림당(寶林堂) - 대웅보전 앞 동편 요사채로 주지실이 이 건물에 있다.
보림당 앞과 그리고 건너편 요사채 앞에는 각각 노주가 조성되어 있다.
봉암사 노주(爐柱) - 석등 대신에 불을 밝힌 등이나 관솔불을 올려놓기 위하여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넓은 돌판(봉암사의 경우 사각형 돌판)을 얹어놓은 것을 노주라 한다. 이러한 노주는 양산 통도사(팔각형), 문경 대승사(사각형), 문경 김룡사(사각형)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대웅보전 앞 서편 요사채
봉암사 대웅보전
봉암사 대웅보전(大雄寶殿) - 봉암사의 중심법당이다. 내외 벽에는 화엄변상도 벽화가 잘 장엄되어 있고,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 대세지보살입상이 협시하고 있는 형태이다. 후불탱과 신중탱은 목각탱이다.
대웅보전에 모셔놓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입상
후발탱은 목각탱으로 8대보살 10대 제자 등이 도열하고 계신다. 제일 상단 좌우 끝에는 사천왕상이 조성되어 있다.
대웅보전 내 신중탱 - 역시 목각탱이다.
대웅보전 내외벽에는 화엄변상도가 잘 자세히 그려져 있다.
봉암사 극락전(極樂殿, 보물 제 1574호)
봉암사 극락전(極樂殿, 보물 제 1574호) -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 지증대사(智證大師)가 처음 창건하였다. 고려 태조 18년(935) 정진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극락전 및 일주문만 남기고 소실된 것을 복원했다.
극락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 중층 겹치마 지붕의 목탑식 건물이다.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이 곳에서 피난하여 원당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이 건물은 당초의 건물로 보기는 어려우나 기단 및 하층 처마는 특이한 구조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목탑의 요소를 잘 갖추고 있다. 내부에 어필각(御筆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 독존이 모셔져 있다.
봉암사 산신각 - 산신각 안에는 산신탱과 독성탱이 모셔져 있다.
봉암사 범종각(梵鐘閣) - 범종각에는 불전사물이 모셔져 있다.
봉암사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 169호)
봉암사 삼층석탑(鳳巖寺 三層石塔, 보물 제 169호) -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부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의 비례와 균형이 조화되어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한국 석탑 중에서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탑은 건물의 댓돌에 해당하는 기단부, 탑의 중심이 되는 탑신부,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은 기단이 2단이나, 현재 땅 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의 기단은 1단이다.
특이한 것은 지면과 맞닿아야 할 탑의 받침돌 밑면에 또 하나의 받침이 있어 혹시 이것이 아래층 기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넓어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머리장식 모두가 완전히 남아 있어서 한국 석탑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유례라는 점이다. 탑의 머리장식은 인도의 탑에서 유래했으며 인도탑의 소형화가 우리나라 탑의 머리에 적용되었다. 탑의 가장 윗부분에 놓이며 여러 개의 구성요소가 차례로 올려져 가장 장식적으로 마련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9세기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기단 구조가 특이하고, 탑신의 각 층 비례와 균형이 적절하여 아름답다.
탑의 높이는 6.31m이고 그중 상륜부의 높이는 2.38m이며 지대석의 너비는 3.24m이다. 이탑의 조성 시기는 9세기로 추정 된다. 정상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3층 석탑의 균형 잡힌 모습의 우아한 아름다움은 희양봉의 장중하고 힘찬 기상이 휘몰아쳐 내려오다가 삼층석탑에 이르면 마치 영웅의 기개도 단아한 우아함 앞에서는 그 수줍음을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용트림으로 뻗어오던 기개는 일순 탑 앞에서 주춤하며 부드럽게 순화되어 부드러움과 굳셈의 절묘한 조화로 참배객의 발길을 묶는다.
봉암사 삼층석탑(三層石塔)과 금색전(金色殿)
봉암사 금색전(金色殿)
봉암사 금색전(金色殿) - 금색전에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을 모셨고 뒤편에는 대웅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현재의 대웅보전이 짓기 전에는 금색전이 중심법당임이 증명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금색전 뒤편 편액이 대웅전이라는 편액이고, 또 하나는 금색전 앞에 삼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색전은 대웅보전의 서쪽에 위치하며 대웅보전이 있는 라인에서 약간 아래쪽에 내려와 있으며 금색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어 이 금색전이 초기에는 중심법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층 석탑 서편에는 같은 라인에 범종각이 있다.
금색전에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 독존이 모셔져 있다.
금색전 내 신중탱
금색전 뒷편에는 대웅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 뒤에는 바로 조사전이 위치하고 있다.
봉암사 조사전(祖師殿)
봉암사 조사전 - 조사전에는 서암당 홍근선사, 신암당 두경선사, 청허당 휴정대선사(서산대사), 나옹당 혜근왕사, 태고당 보우국사, 금양 정진국사, 도헌 지증국사, 해동불일 보조국사, 함허당대선사, 상봉당대선사 진영 등이 모셔져 있다.
이 조사전 바로 앞 서편에 나 있는 묘유문(妙有門)을 통해서도 태고선원으로 들어설 수가 있다.
지증대사탑(보물 제 137호)과 탑비(보물 제 135호)
봉암사 지증대사탑(鳳巖寺 智證大師塔, 보물 제 137호) - 이 탑에는 봉암사를 처음 건립한 지증대사(824~882)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팔각원당형의 이 탑은 신라 헌강왕 8년(882)에 세워졌으며,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부의 장식 조각이 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되어 신라 사리탑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탑의 높이는 3.41m, 지대석 넓이 2.2m의 당당한 탑이다.
지증대사는 경주 김씨로 17세에 부석사 경의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봉암사로 들어와 이듬해인 동왕 8년(882)에 입적하였다. 헌강왕은 대사의 시호를 지증, 탑호는 적조라 내렸다.
봉암사 지증대사탑비(鳳巖寺 智證大師塔碑, 보물 제 315호) - 이 비는 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암사를 처음 건립한 지증대사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산라 경애왕 원년(924)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신라 말의 학자 고운 최치원이 지었으며, 글씨는 분황사의 승려 석혜강(당시 83세)이 썼다. 용모양의 비 머리와 귀부를 완전히 갖춘 비석으로 귀두는 용두형화(龍頭形化) 되었으며 사산비문(四山碑文)으로 널리 알려진 비이다.
지증대사는 속성이 김씨이고 호는 도헌(道憲)이다. 신라 헌강왕 16년(824)에 봉암사에서 향년 59세로 입적하시자 나라에서 시호를 지증이라 하고 탑호를 적조(寂照)라 하는 동시에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묘유문(妙有門) - 태고선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두 군데가 있다. 조사전쪽으로 나 있는 문은 묘유문이고 선원 정면에 있는 문은 진공문이다.
태고선원 진공문(眞空門)
봉암사 태고선원
태고선원의 역사 - 봉암사 선원의 역사는 저 멀리 신라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증대사 도헌스님이 구산선문중 하나인 희양산문을 이곳에서 개창하였던 것이다.
이후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사찰의 소임을 볼 때는 이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이곳 봉암사를 찾았다" 고 한다.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금 부흥된 것은 1947년이다.
해방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 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 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 곳이 봉암사였다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 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 규약을 제정하여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사정진도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하게 된다. 그 후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불교신문 기록으로 보건대 봉암사 희양선원은 1972년 향곡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했다. 이후 1974년에 서옹스님이 조실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78년까지 향곡스님이 줄곧 조실역활을 하면서 납자를 제접했다. 1980년경 서암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지면서 선원은 청룡의 승천과 봉황의 날개짓처럼 웅대한 자태를 희양산 자락에 펼치게 되었다.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였다. 그래서 희양산 봉암사 지역은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이어 1984년 6월 제 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에서는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1994년 범룡스님이 조실로 추대되어 2년여 간 납자를 제접하여 오다, 2000년 하안거 해제에 진제스님을 조실로 모셨으며 그후 2001년 하안거 결제에 서암스님을 다시 조실로 추대하여 대중 스님들을 지도 하시다가 2003년 3월 29일 날 열반에 드셨습니다.
태고선원 요사채
태고선원 서편으로 난 길을 따라 계곡을 끼고 올라가면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봉암사마애불좌상(도 유형문화재 제 121호)
마애보살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 121호) - 불상의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마애불상으로 보인다.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서 북쪽으로 약 700m 떨어진 백운대의 화강석 바위 면에 동북향으로 양각되어 있다. 머리 주위로는 바위 면을 얕게 파서 감실처럼 만들었고, 원형으로 상면을 파냈기 때문에 광배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머리 부분에는 부조(浮彫)를 강하게 하였지만 하체는 거의 선각에 가깝다.
높이는 4.5m, 폭이 4.4m인데 불두 주위를 약간 깊게 파서 감실, 닷집 혹은 집 모양의 장엄물 처럼 만들었으며 광배, 후광을 겸하는 듯이 처리 하였다.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의 중앙에는 화문(꽃무늬)가 있고,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을 들고 결가부좌한 자세이며 무릎은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미간의 백호가 뚜렷하며 눈은 반개하였으며, 코는 후에 보수한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말기의 양식과 서로 통하는 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