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역사 교육과정 시행을 중지하라!
2011년 12월 30일, 교육과학기술부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또 한 번의 소통 없는 일방적 고등학교 역사 집필기준을 발표하였다. 이번 집필기준은 2011년 8월 9일 고시된 역사교육과정과 11월 8일 발표된 중학교 역사 집필기준에 대해 제기되었던 절차상, 내용상 문제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전례 없이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강조하면서, 역사학계의 검증과 동의를 얻지 못한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동안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에서는 ‘2007 개정 역사교육과정’에 대한 진지한 검토 없이 2009년 12월 졸속으로 ‘총론’만 발표된 ‘2009 개정 역사교육과정’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누차 지적해 왔으며, 2011년 발표된 ‘각론’에 대해서도 진지한 학문적 검토를 토대로 수정을 요구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부는 2011년 역사교육과정의 연구 주체인 ‘역사교육과정개발 정책연구위원회’(위원장 오수창)의 초안을 일방적으로 수정 발표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정 학회와 교과부장관의 자문기구인 ‘역사교육과정개발 추진위원회’(위원장 이배용)의 의견을 교과부장관이 일방적으로 수용한 것이 드러나 역사학계는 물론 시민사회의 광범한 반발을 야기하였다.
‘역사교육과정개발 정책연구위원회’ 소속 위원 21명과 ‘역사교육과정개발 추진위원회’ 위원 9명, 그리고 집필기준 공동연구진의 위원장이 사퇴하는 역사교육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지난 11월 28일에는 24개의 역사관련 학회와 단체들 그리고 774명의 역사학자들이 연명으로 대통령에게 2011 역사교육과정과 중학역사 집필기준의 재고시와 이주호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 다음 날에는 학교 현장의 역사교사 865명도 역사교육과정의 재검토와 중학교 역사집필기준의 철회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역사연구자들과 역사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역사 속에서 현실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과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역사인식을 가지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장의 역사교사와 역사연구의 전문성을 가진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반영한 역사교육의 지침들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의 역사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이 마련되는 과정은, 학교에서 인류의 역사가 찾아낸 가장 가치 있는 이상의 하나로 가르쳐야 할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교과부는 교사와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하였고, 대통령은 수많은 단체와 연구자, 교사들의 의견서를 무시하고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1년 만에 교재를 다시 개발해야 하는 집필자와 출판사들의 자괴감과 인적 물적 손실, 학교 현장의 혼란 등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이번의 사태가 보여준 또 하나의 교훈은 교육, 특히 역사교육이 정치에 휘말리는 순간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를 극명히 보여준다는 점이다. 2008년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시작된 교과서 트집잡기에 교과부 장관을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이 개입하면서 역사 교육은 황폐화되고, 역사교육현장은 전례없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교과서 내용에 대한 심층적 이해에 기초하기 보다는 대부분 편협한 이념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 점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정권이 바뀜에 따라 역사교과서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 정부의 역사교육과정 수립과 실행과정에 역사학자들은 물론 양식있는 수많은 시민사회단체에서도 깊은 우려를 표명해 왔던 것이다.
2011년 교육과정 논란이 진행되는 동안 역사학계와 교육계는 진지한 성찰과 고민을 계속하였다. 진정한 역사교육 강화의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고, 학교 현장에서 재미있게 사용될 교과서를 어떻게 개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집중이수제’가 교육현장을 왜 혼란에 빠트렸는지, 학생들의 학습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수많은 문제제기와 토론이 전개되었다.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에서 집중적으로 부각된 ‘자유민주주의’논란과 ‘유일합법정부론’의 문제점을 진지하게 분석하고, 사료에 기반 한 학술적 토론도 전개했다. 더불어 학교 현장에서 필요한 역사교육의 범위와 방법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도 이어졌다.
2011년 역사교육 논란의 마지막 결과물이라고 할 고등학교 집필기준의 발표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참담한 좌절감을 숨길 수가 없다. 수많은 문제제기와 학문적 교육적 검토 결과는 뒤로 한 채, 일부 조항만을 수정해 시늉에 그친 교과부의 처사에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역사교육이 정치에 휘둘려서도 안 되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들에 대한 역사교육지침이 졸속으로 정해져도 안 된다는 생각에서 다시 한 번 합리적 대안모색의 장을 마련할 것을 교과부에 진심으로 요구하는 바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한 것은 논의가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설익은 행정조치들이 학교 현장과 학생들의 혼란만 가중시킨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견이 없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2011년 역사교육과정과 집필기준의 시행을 중지시키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한다면 이후의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향한 역사교육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장기적인 대안을 마련한 다음에 새로운 교육과정을 시행해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현행 교과서들은 2009 개정역사교육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고, 현 정부 하에서 검정을 통과한 것들이다. 이제 1년, 또는 아직 사용하지도 않은 교과서를 1~2년 더 사용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될 것인가? 교과부는 지금 당장 역사교육과정의 시행을 중지해, 역사교육 후퇴라는 불명예의 멍에에서 벗어나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1. 교과부는 2011 역사교육과정의 시행을 즉각 중단하라!
1. 교과부는 역사학계와 역사교사들의 의견을 수렴하라!
1. 교과부는 졸속 편향 교과서 만들기 강요를 즉각 중단하라!
1. 교과부 장관은 현 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하라!
2011년 12월 30일
한국역사연구회, 역사교육연구회, 한국근현대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