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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하나님의 역사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안다면 우리는 겉사람이 매우 큰 장애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사람의 제한을 받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교회의 목적이 무엇이고 또 교회와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역사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표현과 그분의 제한받으심
한때 하나님은 한 사람의 육신 속에 그분 자신을 두셨다. 이 사람은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시다. 이 육신은 하나님의 제한이 될 수도 있었고 하나님의 풍성이 될 수도 있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풍성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 된 이후 하나님의 역사와 그분의 능력은 육신 안에 있게 되었다. 즉 하나님은 이 육신을 떠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 육신의 제한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는 주님의 육신이 하나님께 제한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본다. 그분도 하나님께 제한을 줄 가능성이 있었지만 실지로는 하나님께 제한을 주지 않으셨다. 반면에 이 육신은 하나님의 풍성을 충만이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풍성이 이 육신의 풍성이 되었다.
과거에 하나님은 이 육신 안에 그분 자신을 두셨지만, 오늘 그분은 교회 안에 그분 자신을 두신다. 오늘날 하나님의 능력은 교회 안에 있다. 오늘날 하나님의 역사 또한 교회 안에 있다. 복음서에서 하나님은 이 육신 밖에서 아무런 역사를 하지 않으셨고 그분의 모든 역사는 아들에게 주어졌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역사를 교회에게 맡기셨다. 교회 밖에서 그분은 아무 것도 역사를 않으신다. 하나님은 단독으로 역사하지 않으시고 다른 것을 통하여 역사하지도 않으시며 오직 교회로 말미암아서만 역사하신다. 오순절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교회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완전하고도 아무 제한과 보류함이 없이 한 분 그리스도 안에 두셨던 것과 같이 오늘날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완전하고 무한하며 아무 보류하심이 없이 교회 안에 두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책임은 상당히 막중하다. 교회는 하나님에게 제한을 줄 수 있고 하나님의 표현에 제한을 줄 수도 있다.
나사렛 사람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은 표현되셨고 그분은 하나님에게 아무런 제한을 주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안팎으로 완전히 하나님을 위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감정은 하나님의 감정이었고 그분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었다. 그분이 이 땅에 살아 계셨을 때, 그분은 나는 내 뜻대로 행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들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시지 않고 아들의 행한 모든 것은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다. 아들은 스스로 말하지 않았고, 그분이 말한 것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들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두시고 그 안에서 말씀하실 수 있는 한 분을 볼 수 있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 되신 분이시며 하나님이 사람 되신 분이시며 완전하신 분이시다. 어느 날 하나님이 그분 안의 생명을 사람에게 나누어주셔야 할 때 그분은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많은 밀알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은 이 생명을 제재하거나 제한하지 않고 오히려 이 생명을 해방하셨다. 이와같이 오늘날 하나님은 교회를 그분의 그릇으로 택하사 교회 안에 그분 자신을 두셨고 그분의 능력과 역사를 또한 교회 안에 두셨다. 하나님은 교회로 말미암아 그분의 길을 얻고자 하신다. 교회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릇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하는 그릇이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릇이다. 오늘 만일 교회가 하나님께 출구를 드린다면 그분은 그분의 능력과 역사를 행사하실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이렇게 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 제한을 드리게 된다.
복음서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하나님이 한 사람 안에 계심이고, 서신서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하나님이 교회 안에 계심이다. 복음서는 하나님이 다른 어떤 사람 안에 계시지 않고 오직 한 사람 안에 계셨으며, 다른 어느 사람 안에 계시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서신서들은 하나님이 어떤 단체 안에도 계시지 않고 오직 교회 안에 계시며, 어떤 다른 모임에 계시지 않고 오직 그분의 교회 안에 계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이 영광스런 사실을 보기 바란다.
이 영광스런 사실을 볼 때 우리는 자연히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너무 많은 제한을 드렸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실 때 전능하신 하나님은 조금도 제한을 받지 않으셨고 조금도 감소되지 않으셨었다. 오늘 하나님의 갈망과 목적은 교회 안에서 여전히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아무 제한도 받지 않기를 원하신다. 오늘 하나님은 그분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을 때와 같이 교회 안에서 아무 방해 없이 그분 자신을 표현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에게 제한이 있다면 하나님도 제한을 받으시게 된다. 교회의 무능함은 하나님의 무능함으로 변한다. 이것은 매우 엄숙한 문제이다. 우리는 이것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모든 사람에게 있는 장애가 하나님의 장애로 변하고 우리 각 사람에게 있는 제한이 하나님의 제한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교회로부터 나타나실 수 없다면 하나님께는 출구가 없게 된다. 오늘 하나님의 길은 교회 안에 있다.
왜 성령의 통제가 이렇게 중요하고 영과 혼의 구분이 이렇게 중요한가? 왜 겉사람은 반드시 파쇄되어야 하고, 또 왜 성령의 통제로 말미암아 파쇄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으로 우리 몸에서 출구를 얻으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말한 것을 개인의 영적 체험에 불과한 문제로 오해하지 말라. 우리가 말한 것은 개인의 영적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길과 관련되고 하나님의 역사와 관련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한을 드리지는 않는가, 또 하나님이 우리 몸에서 자유하시는가는 아주 큰 문제이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처리를 받고 파쇄되어야만 우리 몸에서 아무 제한을 받지 않으실 수 있다.
교회가 하나님으로 길을 얻으시게 하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고 하나님으로 우리 겉사람을 파쇄하시게 해야 한다. 이 겉사람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이다. 겉사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결코 교회가 하나님의 통로가 되는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우리 겉사람을 깨뜨리신다면, 그분은 사역에서 우리를 그분의 통로로 사용하실 것이다.
파쇄됨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길
이제 우리는 겉사람이 파쇄된 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고 말씀의 사역자가 될 수 있으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지를 보기로 하자.
성경 읽기
성경 읽기에 관하여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 어떤 종류의 성경을 읽어낸다는 것이다. 많은 때 사람들은 자신의 불순종하는 생각, 분란한 생각, 그리고 스스로 똑똑하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성경을 읽는다. 이렇게 할 때 그들이 읽어낸 성경은 그들의 생각일 뿐 성경의 영을 만지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서 주님 자신을 만나고자 한다면 우리의 불순종하는 생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생각들이하나님에 의해 파쇄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생각이 여전히 불순종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총명하다 하더라도 이 총명은 아무 쓸데 없다. 우리는 자신의 총명을 놀라운 것으로 보겠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하나의 큰 장애로 보신다. 우리가 아무리 총명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총명함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생각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가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우리의 생각이 성경의 사상 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두번째는 우리의 영이 성경의 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당신은 바울이든 요한이든 성경을 쓴 사람들이 성경의 어느 단락을 쓸 때에 생각한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 당신의 생각은 그들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들의 생각이 시작된 데에 당신의 생각을 두어야 한다. 그들의 생각이 발전한대로 당신의 생각도 그렇게 발전되어야 한다. 당신은 저자가 생각해낸 이유를 당신도 생각해내야 한다. 저자가 생각한 가르침을 당신도 생각해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당신의 생각과 저자의 생각이 톱니바퀴 같아야 하고 저자의 톱니바퀴가 당신의 톱니바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생각이 바울의 생각 안에 들어가고, 당신의 생각이 요한의 생각 안에 들어가며, 성경의 사상 안으로, 하나님에 의해 계시된 사상 안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당신은 성경 말씀이 무엇을 말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을 때 자기의 생각을 주제로 하고 성경의 사상은 다만 자료로써 취하려고 한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자신의 교리가 돌아가고 있고 그의 교리 속에 담을 자료를 성경에서 얻기를 바란다. 설교에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들의 설교를 오 분이나 십 분만 들어도 그들이 자기의 생각으로 성경을 인용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생각을 성경의 사상 안으로 넣는 것인지를 즉시 알게 된다.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두 한계 안에서의 설교이다. 어떤 사람이 성경대로 사람이 듣기 좋게 설교한다 할지라도 그의 생각이 성경의 사상과 완전히 위배되고 일치되지 않는, 상반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반대로 어떤 사람은 성경을 설명할 때 그의 사상이 성경의 사상에 들어가 있고 그의 생각이 성경의 사상과 일치되며 성경의 사상과 융화되어 있다. 이런 상태가 정상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기의 생각이 성경의 사상 안에 들어가게 하려면 겉사람이 파쇄되어야 한다.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은 사람은 성경을 읽어도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성경을 잘 읽어내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우리의 어떠함이 좋지 못하고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제재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당신이 하나님에 의해 파쇄되면 당신 개인의 활동은 없어지고 주관적인 생각도 사라지게 된다. 또한 당신은 점차적으로 다소 부드러워지게 되고, 조금씩이라도 주님이 무엇을 생각하시는지를 만지게 되며, 성경을 쓴 사람의 사상을 만질 수 있으며, 그것을 좇아 생각하기에 이르게 된다. 겉사람이 파쇄되어야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럴 때 겉사람은 더이상 당신에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
성경을 읽을 때 당신의 생각이 성경 저자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성경의 사상 안에 들어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보적인 것이다. 이것이 없을 때 당신은 결코 성경을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 있다고 해서 다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만 어떤 사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든 요한이든 마태이든 마가이든 성경을 쓴 사람이면 누구나 성령의 계시로 받아서 성경을 쓸 때, 그들은 한 면으로 자기의 생각을 따라 썼지만 다른 한 면으로 그들의 영이 성령을 따라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 안에 영이 있다는 사실과 선지자의 예언과 함께 영이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만일 오늘 당신이 선지자의 말씀 전파를 들었다면, 당신은 그에게 말씀이 있고 어떤 사상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당신 속에 만져지는 분명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영이라고 부른다. 성경 안에는 사상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해방된 영도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한 가지 조건은 당신의 영이 해방되어 성경의 영을 만지는 것이다. 당신의 영이 성경의 영을 만질 때 비로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가령 개구장이 아이가 남의 집 유리창을 고의로 깨뜨려서 그 집주인이 그 아이를 심하게 책망하였다 하자. 아이의 모친이 이것을 알고서 역시 자기 자녀에게 한바탕 야단을 친다. 여기서 우리는 그 집주인이 아이를 책망한 것과 모친이 아이를 책망한 것 사이의 차이점을 한번 생각해 보자. 겉보기에는 두 가지가 별로 다른 것이 없지만 사실 그 안의 책망하는 <영>은 다른 것이다. 그 집 주인의 책망은 화를 낸 것으로서 분노의 영이고, 그 모친의 책망에는 사랑과 훈계와 소망으로 가득하다. 모친의 책망은 소망과 훈계가 가득하고 사랑이 가득한 책망이다. 두 영은 완전히 다른 영이다. 이것은 아주 얕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을 쓴 저자의 영은 이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성경을 쓰게 한 영은 영원한 영이다. 이 영은 오늘도 계시고 성경 안에 계속 충만되어 있다. 만일 우리의 겉사람이 파쇄되고 우리의 영이 해방되었다면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생각은 성경의 사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성경이 쓰여졌을 때의 영을 만질 수 있게 된다. 만일 당신의 영이 해방되지 않고 성경을 쓴 사람의 영을 만지지 못한다면, 당신이 어떤 방법을 써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때 성경은 당신에게 죽은 책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본론에 돌아가서 기본적인 문제는 겉사람이 파쇄되었느냐에 달린 것이다. 오직 우리 겉사람이 파쇄되고 우리의 생각이 유용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영이 해방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이 일에서 우리의 제한을 받지 않게 된다. 모든 문제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저지하는 데 있다. 심지어 성경을 읽는 일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저지하고 하나님께 자유로운 길을 드리지 못한다.
말씀의 사역
하나님의 역사에서, 한면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을 이해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것이 그분의 역사의 기점이다. 다른 한면으로 그분은 그분의 한 마디 혹은 몇 마디의 말씀을 우리의 영 안에 부담으로 두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것으로 교회를 섬기게 하신다. 사도행전 6장 4절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고 말한다.
헬라어에서 <말씀>이라는 단어에 <전하는 것>이라는 단어에 다 명사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말씀 전하는 것>을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말씀의 사역>이 된다. <사역>은 섬김을 뜻한다. 말씀의 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이는 속에 말씀이 있으나 그것이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영 안에 확실한 말씀과 속에 상당히 무거운 부담도 있고 또 그 말씀을 형제 자매들에게 알릴 느낌도 있는데 일단 강단에 서면 한두 마디를 해도 속에 부담이 여전하고 일분, 한 시간을 말해도 부담은 변함없이 무겁고 말씀을 해방할 수 없으며 그의 겉사람이 속사람의 부담을 전달할 수 없다. 그 사람이야 속의 부담을 밖으로 전하고 속의 말씀을 밖으로 전파하고 싶지만 그의 겉사람이 그에게 적합한 말씀을 주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말을 해도 그 무거운 짐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가 사람들 앞에 나올 때에 부담이 무거웠는데 이제 그가 돌아갈 때에도 부담이 여전하다. 이것은 다름이 아닌 그의 겉사람이 아직 파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겉사람이 속사람을 돕기는 커녕 오히려 속사람을 저지하고 있다.
만일 그의 겉사람이 파쇄되었다면 그는 자연히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속사람에게 어떤 부담이나 말씀이 있을 때 그의 겉사람의 생각은 속 사람의 뜻을 표현할 적절한 한 마디를 가질 것이다. 그의 속의 말이 해방될 때 그의 속 부담은 가벼워진다. 그는 말할수록 가벼움을 느끼고 이것을 자기 일로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의 부담은 겉사람의 생각의 적절한 말씀을 필요로 한다. 만일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아서 겉사람이 속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겉사람이 속의 느낌에 순복하지 않으며 속의 영을 순복하지 않는다면, 겉사람이 속의 느낌을 만지려고 할 때 해내야 할 적절한 말씀을 해내지 못하게 된다.결국 하나님은 그의 속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제재를 받으시게 된다. 하나님이 길을 얻지 못하실 때 교회도 도움을 얻지 못한다. 우리의 겉사람이 말씀의 사역에서 가장 큰 장애임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사람은 총명한 사람만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당신이 아무리 총명할지라도 겉사람은 결코 속사람을 대치할 수 없다. 오직 겉사람이 헐어지고 파쇄될 때만이 속사람이 해방되고 말씀이 겉사람을 뚫고 해방된다. 이 겉사람의 껍질을 하나님은 파쇄하실 것이다. 이 껍질이 파쇄될수록 영의 생명이 더욱 해방된다. 껍질이 영 안의 부담을 만류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능력은 당신의 몸에서부터 교회 안으로 흘러갈 수 없고 당신은 말씀의 사역을 할 수도 없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은 말씀을 통해 공급될 때 가장 많다. 당신의 겉사람에게 매맞은 상처가 없다면 당신의 속사람은 나갈 길이 없게 된다. 이 때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은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을지라도 생명을 만지지 못한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주고자 하나 그들은 얻지 못한다. 당신 속에 말씀이 있으나 겉사람은 그것을 말해내지 못하고 당신을 저지한다.
주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다 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자마자 그분의 능력을 얻었다. 주 예수님의 옷자락은 그분의 가장 바깥 부분이다. 그분의 가장 겉부분에서도 그분의 능력을 만질 수 있었다. 우리의 문제점은 속에 생명이 있으나 겉사람이 그것을 말해내지 못하는 데 있다.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으나 밖에 저지함이 있고 나갈 길이 없는 데 있다. 이럴 때 우리 몸에서 하나님은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자유로이 우리 몸에서 나가지 못하시게 된다.
복음 전파
복음을 들을 때 대게 사람들은 옳은 교리를 들었거나 사람의 감정이 격동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믿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릇 감정이 격동되어 주님을 믿는다고 태도를 밝힌 사람들은 오래가지 못한다. 믿는 데 있어서 생각을 사용할 수 있고 감정을 사용할 수 있지만, 생각이나 감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감정이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엎드러질 수 있는 것은 겉사람을 뚫고 당신의 영이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방된 영을 가질 때 복음이 전파된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한 광부 형제가 있었다. 그가 쓴 <본것과 듣는 것>이라는 책은 그의 복음 전하는 체험을 말해준다. 이 책을 읽었을 때 우리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특별히 학식 있는 사람이나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이 아닌 아주 일반적인 형제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주님께 완전히 맡겼기 때문에 주님은 그를 귀히 사용하셨다. 그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의 특징은 그의 겉사람이 파쇄되고 그가 해방된 영을 가진 데 있다. 그가 처음으로 말씀을 전한 때는 그가 구원받은 때인 스물 세 살 때였다. 그는 어느 집회에서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하여 그 전도사에게 말씀을 전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강단에 서자 그는 한 마디도 말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영혼을 구원할 열성으로 가득 찼고 그의 눈물은 파도같이 밀려왔다. 결국 그는 두세 마디를 외쳤다. 그 때 하나님의 영이 집회 장소에 충만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죄와 잃어버린 상태를 깨닫게 되었다. 여기 비록 나이는 어리나 겉사람이 파쇄된 한 사람이 있다. 그가 몇 마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영은 해방되었고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다. 그는 일생 동안 많은 사람을 구원하였다. 그의 역사를 읽어보면 우리는 그가 영이 해방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전파의 길이다. 복음 전파의 길은 영의 해방에 있다. 겉사람의 강팍함이 사라지고 겉사람이 파쇄되었기 때문에 영이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볼 때마다 그를 구원해야겠다고 느낄 때 당신의 영은 해방된다. 이것이 기본적인 문제이다. 복음 전파는 전적으로 겉사람이 파쇄되고 속에 있는 영이 해방되어 사람들을 만지는데 있다.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당신의 영이 다른 사람의 영을 만지고 하나님의 영이 해방되어 사람의 흑암의 영을 살렸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의 겉사람이 영을 묶는다면, 당신에게서 하나님은 길을 얻지 못하시고 복음도 당신에게서 출구를 얻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겉사람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문제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처리받지 않을 때 많은 교리를 외워도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영이 사랑의 영을 만지는 데 있다. 만일 우리의 영으로 사람의 영을 만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엎드러질 것이다. 우리의 영이 해방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엎드러진다.
이 수년 동안 하나님은 회복의 길을 걸어오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구원받은지 수 년 뒤에야 죄를 처리하고 헌신하며 부르심받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치 않으신다. 오늘날 주님은 회복의 길을 가고 계신다. 복음이 회복되어야 할 뿐 아니라 복음의 열매도 회복되어야 한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주님이 사람들을 구원하실 때와 같이 사람들은 구원을 받자마자 죄악에서 나와야 하고, 믿자마자 완전히 주님께 헌신되어야 하며 믿자마자 재물의 힘을 깨뜨려야 한다. 복음으로 회복의 길에 들어서게 하려면 복음 전하는 사람이 주님에게 출구를 열어 드려야 한다.
우리는 주님이 회복의 길을 가시기 위해 천국복음과 은혜복음이 하나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복음에서는 천국복음이 은혜복음과 구분되지 않았다. 나중에 은혜의 복음을 들었던 사람이 천국복음을 못들었기 때문에 은혜복음과 천국복음이 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또 어느 때인가부터 은혜복음과 천국복음과 하나가 되었다. 즉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 곧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 되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 또한 주님께 완전히 헌신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빈곤하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강하게 구원을 받고 철저하게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복음이 회복되어야 할 뿐 아니라 복음 전하는 사람도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복음으로 하여금 사람들 가운데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 몸에서 해방되셔야 한다. 복음 전파에 큰 능력을 갈망한다면 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복음이 회복되기를 바라고 복음 전하는 사람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드리며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립니다. 당신이 내 몸에서 길을 얻으시기 원합니다. 교회도 내 몸에서 길을 얻기 원합니다. 당신을 저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고 또한 당신의 교회를 저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주 예수님은 한번도 하나님께 제한을 드린 적이 없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을 저지하신 적이 없었다. 근 이천 년 동안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님에게 제한이 되지 않도록 교회 안에서 계속 역사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완전히 표현하고 하나님의 장애가 되지 않으신 것처럼 교회도 하나님을 완전히 표현하고 하나님의 장애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단계적으로 그분의 자녀를 가르치시고 처리하시며 단계적으로 그들을 강탈하고 치신다. 하나님은 교회가 그분의 장애가 되지 않고 반대로 그분의 표현이 되는 날이 오기까지 계속 이렇게 역사하신다. 오늘 우리는 다만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저희는 참 부끄럽습니다. 주여, 우리가 당신의 역사를 지연시켰고 당신의 생명을 저지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복음을 저지하였고 당신의 능력을 저지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께, <하나님, 내 모든 것을 다 드리오니 내 몸에서 당신의 길을 얻으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복음이 철저하게 회복되기를 바란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철저히 헌신되어야 한다. 우리의 복음 전파의 능력이 당시 교회의 능력보다 못하다는 것만 느끼고 당시의 헌신이 우리의 헌신과 다르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복음이 회복되려면 먼저 헌신이 회복되어야 한다. 두 방면이 다 철저하게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몸에서 나갈 길을 얻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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