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웩웩!!! 전날 부터 좋지 않았던 위가 이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한다는 듯, 태평양 상공 비행기 화장실에서 토악질을 해댄다.
더 이상 나올게 없어 신물과 눈물로 적시고 자리를 찾아 앉아 담요를 덮고 눈을 감는다.
인천공항까지는 아직 6시간이 남아있다.
열수 형님, 경한 형, 나는 지난 가을부터 엘캡에 같이 가기로 의견을 모아 그동안 삼성산이나 유양리에서 연습하며
등반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었다.
중간에 열수 형님의 다리 부상과 경한 형과 나의 개인사정으로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서로 이해와 양보로 이겨 낼수가 있었다.
우리의 등반코스는 텐져린트립으로 정했다. 형들의 경험과 실력으로는 더 길고 어려운 코스를 생각할 수 있었으나, 처음 가는
나를 위해 배려하여 재밌게 등반할 수 있는 코스로 정한 것이었다.
(지난 겨울과 봄의 삼성산)
마지막 훈련은 설악 적벽에서의 훈련으로 마무리를 접었는데, 적벽 마지막 피치에서 비를 맞으며 정상까지 등반 후, 쫄딱 젖은
모양으로 하산하였는데 그것은 엘캡 마지막 날의 복선이었던 것이었다.
(설악산 적벽.. )
도착 이틀째
캠프4에 자리를 풀고 장비를 정비한다.
그동안 경한 형은 계속 무게에 대해 중요성을 말하며 장비의 간소화를 주장하며 하산할 때를 생각하라고 했는데
이 말은 정확하였다. 난 이번 엘캡 등반 중 젤 힘들었던 게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숨도 안 쉬고 말할 것이다.
하산이라고...!!
벽상식량으로 5일치 준비하였다.
아침은 알파미에 즉석국
행동식은 GU에너지젤과 젤리, 소세지, 마늘엑기스, 분말 이온음료, 사탕 등이다.
저녁은 형님들의 호응이 뜨거웠던 라면과 젓갈 1통 알파미 두개에 즉석밥1개, 육포 1봉 그리고, 지친 육체와 여린 감정을
풀어주는 럼주 - 바까~~~르뒤아.
도착 삼일째
물과 장비들을 데포 하기 위해 엘캡으로 향한다.
이미 조디악 등반을 성공하고 내려온 삼일만세 옥렬이 형이 피곤할 만도 한데 홀백을 메고 먼저 앞서 간다.
난 이번 등반 중에 아주 요긴하게 사용한 게 있는데 허벅지에 차는 작은 보조가방이다. 그것은 행동식과 루트맵을 넣으면
딱 맞는 사이즈로 옥렬이 형이 본인 등반 때 써보니 참 편했다며 챙겨주어 사용했는데 정말~ 편하고 좋았다. 감사함이다.
무게감도 없고 언제든 꺼내 먹고 펼쳐보고, 다음 등반을 준비 중인 분이 있으면 사용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르는 도중에 벽 아래로 그 누군가의 손때가 묻어있는 장비들이 '난 엘캡에서 왔어' 하며 간간이 떨어져 있다.
우리 동문팀들도 여러 개 떨어뜨리고 또 우리도 떨어뜨릴 수 있으니 결코 불로소득은 아니다. ^^
장비를 주우며 "이건 영혼이 맑은 사람만이 주울 수 있다"는 옥열이 형의 말에 옥열이 형과 나는 맑은 영혼,
열수 형님과 경한 형은 타락영혼으로 순식간에 나누어져 힘든지 모르게 웃으며 텐져린트립출발점 아래에 도착한다.
참고로 이 지점은 겨울내 얼었던 얼음들이 녹아 휘날리고 나무들도 그늘져 습하기 때문에 모기가 많다.
도착 사일째
오늘은 2P 까지 식량과 장비를 데포 하기로 하고 오른다.
오늘의 동행은 어제같이 수고해준 옥열이 형과 어제 조디악 등반을 마치고 내려온 29기 유정민 언니다.
정민 언니는 이알 들어오기 전부터 같이 산행했던 내가 아주 좋아하는 선배로서 워킹에 대해선 웬만한 사람은 따를 수 없을
정도이다. 언젠가 삼성산에서 등반 후 모여앉아 한 잔 하며 식사를 하다가 정민 언니 워킹실력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나는 "정민 언니는 내가 본 사람 중 지금까지 동기 명길 형님을 제외한 모든 남, 여 통틀어 가장 워킹을 잘하는 분이다.
여기 있는 형들 다들 언니한테는 안될거다". 형들의 격한 동감 속에 현섭 형이 한잔 들어간 목소리로 "에이.. 그래도 여잔데.... 나도 꽤 해..!"
호기 있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럼 언니랑 현섭 형이랑 설악 워킹 한번 시합을 해보라고 부추겼다. 그러면서 각자 본인이 생각하는
승산 있는 사람에게 돈을 걸자고. 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시합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니 여지가 아직 남은 거다.
참고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정민 언니에게 걸었다. ㅋ
언니는 우리가 본 등반 시작하는 날까지 잘 먹어야 등반 잘 할수 있다며 아침 저녁으로 챙겨주었다.
아마... 우리가 등반 시작 후에는 캠프4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그리 챙겨 먹였을 것이다.
첫 시작은 경한 형의 자유등반으로 시작한다. 사선으로 난 크랙을 지나, 턱을 넘어 경한 형의 모습이 사라진다.
(1P 준비중인 형들..) (1P 등반중인 경한 형..)
이제부터 부지런히 움직인다. 난 주마로 올라 홀링 하기로 하고 열수 형님은 회수하며 오르기로 한다.
경한 형의 완료 소리에 주마를 올리며 땅에서 발을 띄운다. 드디어 엘켑에 오르는 것이다.
1P를 올라 3:1로 홀링을 한다. 힘들긴 하지만 옆에서 경한 형이 도와줘 무리없이 할수 있었다.
이번 우리 등반중 홀링은 이번이 3:1로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무조건 1:1로... 속도는 1:1이고... 힘의 작용은
3:1인 아주 효율적이고 획기적인 방법을 사용해 등반내내 홀링은 우리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 등반은 처음부터 돌아가며 등반하기로 서로 이야기를 하였기에 1P는 경한 형, 2P는 나, 3P는 열수 형님....... 이렇게 진행하기로 했다.
2P등반을 위하여 장비를 착용했다. 2P도 자유등반으로 시작하는데 나는 평소에 자유등반에 대해 두려움을 가져서인지 쉬운구간인데도..
캠을 박고 레다를 걸고 오르니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자유등반을 안했던 자신에 회의와 자유등반을 좀더 잘 한다면 등반이 훨씬 더 즐겁고 빠를것이라 생각해 보며....
약간의 오버진 우향크랙을 지나가 완료점에 도착한다.
열수 형님이 회수해 오르고 홀링은 1P에서 2P까지 하기보다는 1P에서 2P 중간으로 하기로 해 모든걸 정리하고 내려왔다.
도착 오일째, 본등반 1일째
우리팀의 든든한 응원군으로 옥열 형, 대환 형, 명종 형이 출발점까지 같이하여 주었다.
이미 등반을 성공하고 내려온 형들의 밝고 힘찬 에너지들은 우리의 등반을 더욱 즐겁게 해주며 투지를 불러일으켜 주었다.
(위 사진은 명종 형 제공.. ^^)
경한 형은 1P에 홀백과 같이있고 열수 형님과 나는 2P까지 주마로 올라 등반과 빌레이를 준비한다.
3P는 열수 형님의 등반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3P 종료점에 누군가가 며칠부터 매달아논 홀백이 두개가 있다. 장소도 협소하고
홀백도 부담스러워 등반을 마친 후 내려와 2P 중간 테라스 쌍볼트에서 1P에 있던 홀백들을 홀링 한 뒤 포타렛지를 설치해...
첫 밤을 맞이한다.
* (이곳은 2P에서 3P까지 가지말고, 중간 2/3지점의 테라스 쌍볼트에서 고정하고 여기서 바로 5P로 홀링한다.
4P에는 등반자와 회수자만 가고, 저깅자는 홀백과 함께 여기에 남는다. )
형들은 2인용 2층 나는 1인용 1층이다. 홀백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찾아 올린 후 식사를 위해 위층으로 올라간다.
알파미2개, 즉석밥 1개에 끓는 물을 넣고 기다리고 물만 부어 바로 끓어먹을 수 있는 바로쿡에 라면을 넣어 끓인다.
낙지 젓갈 1통, 육포 1봉 그리고 희석된 럼주...... 화려한 만찬이다.
우리는 보름이 가까와 지는 달을 보며, 반짝이는 해드랜턴이 보이는 노즈를 보며 그렇게 첫 밤을 맘껏즐긴다.
(어둠이 내려앉은 노즈..)
등반 이틀째
역시, 나이가 드시면 잠이 없어 지시나 보다.ㅋ 위층 열수 형님의 움직임에 눈이 떠진다.
시계를 보니 5시 40분..... 눈앞에 펼쳐진 머세드강이 뱀이 수풀 속을 기어가듯 굽이져 보인다.
눈은 일찍 떴어도 포근한 침낭의 따뜻한 느낌이 좋아 가만히 누워있다 일어나 앉아 커피를 마시며 풍광을 바라본다.
우리는 급할게 없었다. 천천히 아침을 먹고 차를 마시고 각자 볼일들도 다 보고 나서.. 그제야 등반을 하기 위해 정리한다.
경한 형은 어제 픽스시켜논 3P를 다음 등반을 하기위해 주마질을 하며 올라갔고 나는 빌레이를 보기 위해 올라갔다.
4P는 위로 10여미터 오른 후 우측 사선크랙으로 이동하며 아래로 내려가는 피치이다. 이곳은 언제나 습기가 있어 등반과 회수가 어려울수 있다.
이곳의 회수는 우리가 도봉산 부엉이바위에서 긴머리 샘께 배운 트레버스 회수를 권한다. ^^
난 이곳을 회수하면서 전팀에서 회수못한 캐멀롯 4호를 회수하였는데, 이것을 놓고 갈수 밖에 없었던 주인의 심정을 7P에
두고온 나의 에얼리언 4호의 안타까움으로 충분히 느낄수 있었다.
(머세드강.....) (4P등반중인 경한 형..)
5P는 나의 등반이다.
루트맵을 보니 160'(48.7M)이다.. 긴 코스 중의 하나다. 것도 사선으로 쫙~ 뻗은.
경한 형의 말을 빌리면... 아주 아름다운 등반선이라 한다. 동감이다.
이길엔 중간중간 하켄과 헤드가 설치되어 있는데 망치로 두들겨 확인을 하며 사용해야 하고 상단으로 갈수록 크랙이 일정하기 때문에
작은 캠들이 많이 사용된다. 만약에 충분치 않다면 돌려 막기를 해야 한다.
종료와 함께 시스템을 설치하니 경한 형이 회수하며 올라오고 그동안 아침부터 계속 홀백과 같이한 열수 형님이 2P중간 볼트에서
홀백을 띄우고 올라오신다. 반나절 만에 보는 형님이 무지 반갑다. 오늘은 이곳이 우리의 보금자리다.
(5P 등반중인 은아..)
등반 3일째
6P는 열수 형님이 선등이시다. 경한 형이 빌레이를 보고 난 모처럼 열수 형님이 어느 정도 오르실 때까지 포타렛지에
누워있는 호사를 누렸다. 좋다.
울 열수 형님 차분히 잘 올라가신다. 지난 4월 삼성산에서 등반 중 인대를 다치어 아직은 불편한 상태이신데도
그 열정이 대단하시다.
포타렛지를 접고 확보 지점을 정리하자 열수 형님의 완료 소리가 들린다.
7P는 경한 형의 선등으로 오른다. 위로 갈수록 등반이 까다롭다 하던데 경한 형은 성큼성큼 부드럽게 오른다.
열수 형님이 자주 쓰시는 말.. 내공의 힘이다.
오늘은 일찍 등반을 마치고 포타렛지에서 여유롭게 식사와 술한잔을 하며 주위 경관을 맘껏 즐긴다.
그리고 준비해 간 스피커를 통해 경한 형이 엄선한 음악들을 듣는다.
바위만 1000m 넘는 엘캡에서 듣는 라벨의 bolero 와 에릭크랩톤의 wonderful tonight... 심수봉언니의 백만송이 장미...
그리고 많은 음악들...
음악은 벽을 통해... 아마 그 벽에 등반중인 다른 팀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그벽... 그시간... 그자리에서 듣는 음악은
말할수 없는 행복과 해방감을 주었다.
(6P 등반 시작중인 열수 형님..) (7P 등반중인 경한형..)
등반 4일째
오늘 시작은 8P로 내가 선등이다.
정보에 의하면 이 루트 중에 젤 재미있는 피치 중의 하나라 한다.
처음부터 훅으로 시작한다. 훅,훅, 캠, 볼트길.. 그 다음은 아래로 팬드럼해 내려와 자유등반하여 크랙에 진입해 오르고,
꺽인 크랙을 지나면 연속된 훅동작이 필요하다. 이 8P는 꺾임이 많기 때문에 선등자는 줄 처리를 잘 해야 한다.
나도 피치 종료지점에 다와가 줄이 꺾여 올라 오지 않아 애를 먹다가 볼트에서 하강해 줄 처리를 다시 하고 올라왔다.
9P는 열수 형님 등반.. 왼쪽 사선으로 난 크랙은 크랙의 폭이 넓어 2"~4.5" 캠들을 많이 필요로 하였고,
큰 캠들이 그리 많지 않은 열수 형님은 돌려막기의 신공으로 등반을 완료하셨다.
이 8P와 9P는 구간 사이가 멀다. 길이가 먼 것이 아니라 거리가 멀기에 홀백을 띄울 때는 특히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마지막 주자가 홀백을 띄우고 확보점에 남아있는 장비를 다 회수하기 위해선 보조자일이 꼭 필요하다 할 수 있다.
이번에 우리는 5mm를 20M 사용하였는데 자일이 얇아 손을 파고들었고 트레버스 구간도 길어 장비를 다 회수한 후 날을 때
2~30m를 날라 벽에 부딛쳐 그 충격으로 난 몇 초 동안 의식을 잃었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다음 등반을 텐져린트립으로 계획하는 팀이 있다면, 7mm 자에 30M를 권하는 바이다.
"은아야~~ 괜찮냐~~~?" 위에서 형님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괜찮지 않다. 이렇게 많이 날을 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네. 괜찮아요. 천천히 올라갈게요. "
정신을 차리고 주마질을 천천히 하며 오른다. 위를 바라보니 경한 형이 10P를 등반 중이다.
10P는 좌향 크랙으로 이루어져 작은캠부터 큰캠까지 골고루 사용한다.
경한 형은 등반하고, 열수 형님과 나는 이곳 9P에서 오늘의 보금자리를 구축한다.
(8P 등반중인 은아..) (9P 등반중인 열수형님..)
그리고, 이날 아침부터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벽상식량을 5일 치를 준비해 왔는데, 지금처럼 등반하다가는 하루가 더 걸릴게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의 신경은 날카로와졌고 결국엔 경한 형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난 "지금처럼 보다... 시작도 좀 더 빠르게 하고 속도도 더 높이자"고 했지만,
경한 형는 "뭘... 그리 걱정하냐고.. 하루 늦는다고, 하루 굶는다고 큰일 나느냐
네가 처음이기 때문에 조바심이 날수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벽상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고
그건 이미 나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벽상에서 용변 처리가 가장 힘들고 괴롭게 한다는 여성 등반가의 글이나
언니들의 이야기에 슬며시 걱정을 하였으나 난 너무나 잘 적응해 용변은 문제가 아니었고 입맛도 넘 좋아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생활하였다. 그것은 형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경한 형의 감정 상한 목소리에 "난 내가 처음이라 조바심이 나서 그랬다고..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형 말대로 하루 더 늦는다고 세상이 변하고 굶어 죽기야 하겠느냐.. 지금 순간을 즐기자.....'
이때부터 식사때마다 식량을 조금씩 챙겨두자 하루치의 식량은 만들어지고 날씨도 덥지가 않아 물의 섭취가 적어
물도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등반 5일째
어제 경한 형이 10P를 등반하고 줄을 픽스시키고 내려왔기에 열수 형님은 등반하기 위해 주마로 오르고, 난 빌레이를 위해
회수하며 올라갔다.
열수 형님이 오르는 피치는 11P로 볼트 길이다. 이 루트는 세 개의 긴 볼트 길이 있기에 각자 하나씩 하기로 했다.
먼저 열수 형님이 하신단다. 전 피치 중에 젤 긴 165'(50.2M) 피치여서 부담도 있으실 텐데 성큼성큼 잘도 오르신다.
다음 12P도 볼트 길로 이번엔 내가 가기로 한다.
레다 1단에 서서 까치발을 들으니 다행히 볼트들이 손에 다 잡힌다.
경한 형이 회수하고 열수 형님이 홀백을 띄워주시고 주마로 올라오신다. 피치 종료점에 약간의 레지가 있어
포타렛치를 치니 작지만 올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확보점 볼트도 5개나 있어 홀백을 포타렛지 옆으로 올려놓아
손만 뻗으면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보름 달빛에 머세드강이 등불 잔치를 하듯 춤을 춘다. 음악을 들으며 눈앞의 펼쳐지는 광경을 보는건
행복과 경이로움 그자체였다.
(11P 등반중인 열수형님..) (13P 시작점에서 경한형등반..)
등반 6일째
아마.... 오늘이 이 벽상에서 자는 마지막일 것이다.
아침 일찍 전열을 정비하고 등반을 일찍 시작한다.
13P와 14P를 경한 형이 한 번에 오르기로 했고 15P는 열수 형님이 오르시기로 하였다.
경한 형이 빠른 속도로 오른다. 아래층 포타를 접고 정리를 마치고 올라와 나는 경한 형 빌레이를 보고...
열수 형님은 위층 정리에 들어가신다.
경한 형이 14P까지 등반을 완료하자 열수 형님은 본인 등반을 시작하기 전 14P~15P는 옆으로 많이 떨어져 있으니,
홀백 띄우고 오르는 것을 경한 형에게 이야기한다. 아마 내가 9P에서 홀백 띄우고 날랐을 때 약간의 충격이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 하신 것 같다.
15P에 오르는 열수 형님이 예상보다 시간이 걸리신다. 130'(39.6m)이라 하여 그나마 좀 짧은 구간이라 생각했는데
회수하며 오르다 보니 길이도 생각보다 길뿐 아니라 우향 크랙이 젖어있어 이끼도 있고, 장비 설치도 용이치
않았을 것 같다. 이런 길을 아직 다 완치되지 않은 발로 등반한 형님이 새삼 존경스럽다.
회수하며 오르자니 홀백을 띄우고 날라야 하는 경한 형이 걱정돼 중간에 멈춰 서 경한 형의 움직임을 본다.
역시 형은 노련하게 장비를 회수하고 홀백위에 매달려 과감히 날은다.
와우~~~~~ 장난이 아니다. 적어도 30m는 될 것 같았다. 홀백과 함께 시계추마냥 흔들리는 형을 보니
내가 다 짜릿했다.
오늘도 여기까지다. 오늘 15P 확보점 이 자리가 이번 엘캡의 마지막 밤인 것이다.
식량을 꺼내 먹으며 다 마신 술병에 물 한번 헹군듯한 마지막 술 한 잔씩 마시며 다들 아쉬운듯 보름달의 정령이
내려 앉았을 머세드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등반 7일째
날이 흐리다. 멀리서 먹구름도 보이고, 오늘은 2시 전에 정상에 올라 하산을 하기로 했다.
마지막 남은 알파미로 식사를 하고 행동식을 챙기고 하니 비가 내린다. 이런....
16P는 내가 하기로 했다.
어제 경한 형이 물어보길 "16P는 165'(50.2M)로 자유등반이 필요한 긴 피치고,
17P는 정상을 먼저 밟을 수 있는 마지막 피치인데 어느 것을 하고 싶냐?" 고
난 16P를 선택했다. 정상보다는 아직 등반이 더하고 싶었다.
등반을 시작하자 빗줄기가 좀 더 굵어진다. 몇 개의 볼트 따기를 지나고 좌측으로 트레버스하니 덧장 바위가 나와
마이크로 너트와 캠을 조심스럽게 설치해 넘어간다. 이제부터는 자유등반 구간이다. 가뜩이나 자유등반에 대해 부담이
있는데 비까지 내리니 맘이 더 불안하다. 그러나 어찌하랴 가야지.... 그리 생각하고 움직이니, 생각 외로 쉽게
앞으로 나간다. 하지만 이 16P도 좌우 지그재그로 되어있어 자일 유통이 잘 되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비에 젖은
자일은 더 힘이 들었다.
(16P 등반중인 은아..) (16P 빌레이및 장비정리하는 경한 형..)
16P종료점에 도착하니 옆으로 널따란 레지가 있었다. 날씨만 좋다면 모든것 벗어던지고 그늘진 나무 아래서 낮잠이라도 한숨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있고 저 먼 하늘엔 먹구름이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10시 반이 넘어가고 있다. 경한 형은 회수하며 올라오고 열수 형님은 홀백을 띄워주고 올라오셨다.
마지막 피치를 오르기 위해 레지에 있던 경한 형이 깡통캔을 발견하고는 챙기라 한다. 아침에 옆 조디악에서 등반 중이던
전남대 OB 팀에게서 무전이 왔었는데 본인들은 하루 더 등반해야 하는데 식량이 부족할 것 같으니, 우리팀 식량이 남는 게
있으면 정상에 남겨놔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도 하루 늘어난 등반으로 남은 식량이 없어 남겨줄게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이것이라도 챙겨 주려고 한 것이다.
나중에 하산한 전남대 OB 팀에게 들으니 캔을 열고 먹으니 콩통조림이었다고 했다.
마지막 피치를 이제 경한 형이 오른다. 5.6 걸어가는 길이라고 전에 이야기했는데 아마... 아닌가 보다.
나중에 경한 형 말을 들으니 비가 와 미끄러워 전혀 진행이 안되고 본인이 한 피치 중, 가장 쫄린 코스였었다고 하는 걸 보니...
경한 형의 완료 소리 뒤 열수 형님의 회수가 끝날 즈음... 난 마지막 홀백을 띄우고 정상을 향해 주마질을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정상에서 홀링 중인 형들이 보인다. 경한 형은 "다 왔으니.. 좀 더... 힘내라~" 고 소리쳐준다.
열수 형님도 "얼른 와~~~" 하시고....
이제 정상이다.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반 봉우리 정상이 아닌 넓은 숲이 펼쳐져 있다. 바위가 크긴 큰가 보다. 고개 돌려 주위 한번 둘러보고
몸에 걸친 것 부터 벗는다. 천천히 감상하기엔 몸에 걸친 세상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형들은 홀링을 완료하고 홀백들을 넓은 터로 옮긴다. 나도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다.
지금 내리는 비가 언제 폭우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니꺼 내꺼 할 것 없이 각자의 홀백에 자일과 장비를
집어넣는다. 비에 젖은 자일과 장비는 무게를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무거워져 있었다. 어깨에 메고 일어서려고 해도
뒤로 넘어지기 일쑤였다. 더우기 경한 형의 홀백은 보기에도 너무 무거워 보여 보는 사람이 오히려 더 불안하다.
(엘캡 정상..)
이제 무게와의 싸움이다. 아니... 업보인가... 그동안 나를 잡아주고 앞으로 나가게 해준 장비와 자일이, 편한 잠자리를 제공했던
포타렛지가 이제는 엄청난 무게가 되어 어깨를.. 허리를.. 짓누른다. 그래도 꿋꿋하게 짊어지고 가야 한다.
나중에 또 해야 하니까...
쉬지를 못하겠다. 쉬려고 홀백을 내려 놓으면 다시 짊어지기가 넘 힘드기에.. 열수 형님은 이제 피곤이 몰려오시는지
멈추면 졸린다고 쉼 없이 내려가신다. 대단한 체력이시다. 비는 다행히 좀 잦아들어 이젠 보슬비가 되었다.
내려가면서 서로 이야기한다. 등반이 젤 쉽다고.... 하산이 넘 힘들다고.... 등반하고 올라오면 누군가가 와 대신 메고
내려가줬으면 좋겠다고 그렇지만... 알고 있다. 내 몫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한다는 거.. 그게 산이든, 삶이든
그리고 언제나 마지막.. 끝은 있다는 거...
어렵게 내려가다 보니 하강 포인트 소나무에 도착했다. 형님들 말에 의하면 전엔 하강줄이 많이 낡아 불안했는데,
지금 보니 새로 교체해 놨다고.. 자일의 두께가 11mm는 되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굵어 안정돼 좋다고 했지만
나의 하강기엔 자일이 굵어 들어가지 않는다. 낭패다. 할 수 없이 나는 나 혼자만의 하강 줄을 내려 하강을 해야만 했다.
이제 하강까지 했다. 걸어내려만 가면 되는 것이다. 이 길 끝나는 곳 피크닉 에어리어에 인철 형님이 차를 주차하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까 낮에 정상에서 인철 형님과 무전으로 통화했는데, 우리가 정상에 올라선 게 보인다고 수고했고, 시간에 맞춰 나가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조심히 내려오라고 하셨다.
인철 형님은 엘캡에 가는 이알 동문이라면 누구나 고맙게 생각하는, 또 생각해야 하는 분이다.
그동안 말로만 형님이 원정 기간 동안 어떤 일, 어떻게 한다고 대략적으로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제적으로 가서 보니
너무 수고를 많이 하시고 계셨다. 정말 감사하다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들은 인철 형님 덕분에, ER이라는 울타리 덕분에 좀 더 인정받으며 편안하게 등반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강하고도 꽤 많이 내려왔는데.... 경사가 심한 비탈길은 끝날 줄 모르고
계속 발품을 요구했다. 도대체 얼만큼 더 가야 인철 형님이 기다리는 주차장에 다다를지.....
잠시 쉬었다 일어서려니 무게에 잡혀 일어서지를 못한다. 경한 형이 들어주어서야 그제야 서서 걸을 수가 있었다.
힘들어도 이젠 내려놓고 쉬지도 못하겠다. 홀백을 잠시 기대고 쉬고, 다시 걷기를 반복한다.
느낌에 다온 것 같다. 경사도 완만하고 며칠 전 옥열이 형과 이구아나 팀 마중 나왔을때 본 것 같은 낯익은 나무들이다.
다리에 힘이 생기고 허리도 절로 펴진다. 어깨에 눌려진 무게도 전같지 않다. ^^
좀 걸으니 저 앞쪽에 불빛이 보인다. 이 시간에 불빛은 그래.. 인철형님일 것이다.
맞다!! 인철 형님이시다. "인철 형님~~~~~~~~~~"
어머..!! 세상에 이리 반가울 수가..
인철 형님은 수고했다고.. 고생했고 축하한다 말하며... 홀백을 받아 차에 다 실어 주신다.
열수 형님과 경한 형 우린 다 같이 감싸 안으며.... 서로에게 수고했다고... 같이해 좋았다고... 위로와 축하를 해준다.
홀백을 다 싣고 차에 오른다.
"형님들... 우리 얼른 가... 션한~~~ 코브라 맥주 마시자요~~~~~~~~~~"
몇가지의 tip...
1) 텐져린트립은 코스 자체가 지그재그로 선등과 후등 모두 신경을 써야 한다.
선등은 자일유통을 위해 줄 처리를 잘해야 하고, 후등은 트래버스 회수를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2) 또한, 이곳은 홀링 시 2~30m 이상 날아야 하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본인의 담력을 시험하기 위해 걍.. 날은다면 어쩔 수 없지만, 좀 더 안전하고 마지막 장비 회수를 원활히 하기 위해선
7mm 30M 보조자일을 준비하면 좋을 것이다.
3) 코스 자체가 꺾이고 턱진 곳이 많음으로 등반자와 회수자는 덕테이프를 꼭 지참해, 회수 할 때나 홀링 할때
자일이 손상되지 않도록 마찰에 신경을 쓰기 바란다.
4) 여성분을 위해 - 본인은 이번에 벽상에서 사용하는 여성용 깔대기라는 소변 용품을 챙겨갔는데 첫날 사용하다가 포타렛지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에겐 맞지 않아 바로 처박아 두고.. 마시고 남은 삼다수병으로 위를 자르고 사용했는데,
마지막 날까지 얼마나 유용하게 잘 썼는지 모른다. 잘 사용하면 좌변기까지 가능하다. ^^ (물론 소변용이다.)
첫댓글 탠저린트립 존나 잼있어요~~~^^
등반기가 알차게 도움이 되는 글들이 많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옆에 있는 동료들과 공유를 하고싶습니다. "울산 한백산악회"입니다.
도움이 되는 글이 있다니.. 제가 감사하네요..
추구하시는 멋진 등반 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