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 T - R " man 이 아닌가?
David Cagle
여러 해 동안 알렉산드리아의 이단들은 성경을 믿는 신자들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있다.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객관적 연구와 실제적 논증을 통하여 가한 맹공으로 인해서, 완전한 성경의 존재를 믿지 않는 "알렉산드리아 이단들"은 근래에 들어 자신들의 입장을 다소 조정해야만 했다. 과거에는 킹 제임스 성경을 흠집내기 위해서 웨스트코트(Westcott)와 홀트(Hort)의 알렉산드리아 원문이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요즘에 헬라어 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은 자신을 "텍스투스 리셉투스(Textus Receptus) 맨" (간단히, T-R 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예롭게 하신 원문의 노선을 통하여 나온 킹 제임스 성경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킹 제임스 성경을 흠집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자신들의 "도구"를 교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도날드 웨이트(Donald Waite), 제인 핫지스(Zane Hodges)가 이 부류의 인물들이다.
킹 제임스 성경을 신자들은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T.R.맨이라고 불릴 수 없다.
첫 번째, T-R맨이 되는 것은 니콜라이탄 사상의 냄새가 난다.
"니콜라이탄(Nicolaitanes)"이란 용어는 계시록 2:6에서 나온다. 그 의미는 "보통 사람들을 정복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니콜라이탄의 행위과(계 2:6) 니콜라이탄의 교리를(계 2:15) 싫어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유감스럽게도, 니콜라이탄들은 1세기에 죽은 것이 아니다. 학자들은 헬라어를 알기 때문에 보통 수준의 크리스쳔 보다는 성경에 대해서 더 잘 파악할 수 있다라고 "진정으로" 믿고 있는 목사들과 성경 교사들을 통해서 그들은 아직도 근본주의 교회들과 크리스쳔 학교 내부에서 자리 잡고서 살아가고 있다. 케네쓰 웨스트(Kenneth Wuest)가 헬라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언제나 더 많은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바로 그러한 의미로 말한 것이다. 목사들이나 성경 교사들이 "알렉산드리아 원문"을 "수용 원문"으로 대치시키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텍스투스 리셉투스"로부터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최초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잊어 버렸다.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은 말했다: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살려주신다면, 멀지 않아 나는 밭에서 쟁기질 하는 소년이 당신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 수 있도록 하겠다." 그는 당대의 성경 학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어 성경은 평신도를 지배하는 현학적인 자들의 성직 체계를 파괴하고, 주일 학교 아이들로부터 학자 티를 내는 어른에 이르기까지 어떤 크리스쳔이든 동등하게 진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성경 진리로의 접근을 방해하는 유일한 것은 "성경을 탐색하려는" 노력과 시간의 부족이다.
두 번째, T.R.맨이 되는 것은 교리적인 타협이다.
내가 성경 대학 4학년일 때, 나는 한 남자를 만났는데, 전에 그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졸업 후 그는 테네시 템플 대학교로 가서는 헬라어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와 대화하는 중에, 나는 그에게 그 학교에 있는 어떤 교수가 "킹 제임스 맨"인지 물었다. 그는 말했다. "아니요, 그는 T.R.맨 입니다. 나도 마찬가지지요." 이 젊은 남자는 "킹 제임스 맨"과 "T.R.맨"을 분명하게 구분짓고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논증하는 학자들은 그의 사고 뒤편에 킹 제임스 성경의 절대 무오성에 반대하는 일종의 심리 은폐를 가지고 있다. 수용 원문에 대한 분명한 사실로 인해서 그는 알렉산드리아 이단에는 달라붙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킹 제임스 성경이 완벽하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 타협을 한 것이다. 그는 네슬(Nestle)의 헬라어가 아닌, T.R. 안에서 피난처를 찾은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9:29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얼마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은 알지만 이 자는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 구절은 T.R.맨 친구들이 읽도록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수용 원문 안에서 헬라어 원문을 보존하신 것은 알지만, 이 킹 제임스 성경에 관해서는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그자들은 그들 자신들의 선도자 중의 한 사람인 에드워드 힐스(Edward Hills) 박사를 뒤따르지도 않고 있다: "만약 우리가 특별하고 섭리적인 성경의 보존을 믿는다면, 우리는 히브리어 마소라 원문까지, 신약 텍스투스 리셉투스까지, 그리고 킹 제임스 성경에까지 논리적 믿음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다." (The King James Version Defended, 224페이지)
세 번째, 킹 제임스 성경이 T.R. 보다 휠씬 더 실용적이다.
헬라어 수용 원문을 읽고서 예수님을 영접했던 윌리암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같은 사람이 한 명 있다면, 사실상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킹 제임스 성경을 읽고, 가르치고, 설교한 결과로 예수 그리스께 올 수 있었다. "텍스투스 리셉투스"가 기독교에 준 영향은 그것의 내용에 대한 연구가 아니고, 그 자체의 번역이다. 성경이 교회 앞에 놓여 있는 "언어학적 궤짝" 안에 가두어 놓였다가 특별한 순간에만 "원어 학자들"에 의해서 풀려나서 과시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적이 없다. 17세기에 활동한 헬라어 학자들 중 한 명이라도 이름을 아는 크리스쳔은 거의 없다. 그러나 거의 모든 신자들이 존 번연(John Bunyan)은 알고 있다. 그는 킹 제임스 성경을 믿었고, 기독교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작품을 집필했다("천로역정"). "킹 제임스 맨" 한 사람의 영향이 그 시대 살았던 모든 "T.R.맨"의 영향보다도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킹 제임스 성경의 출현과 함께, 성경을 아는 식자(識者)층이 급상승하게 되었다. 20세기에 크리스쳔들이 킹 제임스 성경을 포기하면서, 성경을 아는 식자층은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분명하게도, 킹 제임스 성경은 수용 원문이 갖지 못했던 실용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당신은 내가 "텍스투스 리셉투스"를 가치없게 여기며 악평을 하고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결코 그렇지는 않다. 성경을 믿는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성경을 보존하시는 하나의 단계로써 "텍스투스 리셉투스"를 사용하셨다고 올바르게 평가한다. 그러나, 오늘날 TR의 위치에 대한 평가가 서로 약간씩은 다르다 할지라도(예를 들어, 풀러 박사와 럭크만 박사의 접근 방식은 다르다) 우리는 킹 제임스 성경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게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TR에 있는 어떤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다를지라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심이나 혼란이 없다. 왜냐하면, 킹 제임스 성경에서 주님은 바로 그 단어를 정의하셨으며, 문맥을 통하여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 TR의 여러 판본들 간의 차이점은 킹 제임스 성경 안에서 성령님에 의해서 고르게 다림질되었다. 우리는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단 하나의 권위로서 킹 제임스 성경만을 신뢰할 수 있다. 우리가 읽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