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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왜 복면을 써야하는가?
- 이름을 지워낸 비평의 염결성과 그 이데올로기에 관하여
조 재 룡
꼽추 광대는 몸을 떨며 사다리를 기어오른다. 어두운 불빛 기둥이 광대의 허옇게 분칠한 얼굴 위로 쏟아진다. 「밧줄이 보이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구나.」 광대는 난간을 붙잡은 채 잠시 허공 속에 몸을 옹크린다. 광대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뿜어져나온다.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발밑 어둠 속으로 박쥐처럼 떠돈다. 「이상한 일이구나. 한참을 올라도 사다리는 끝나지 않고, 보이는 건 불붙은 쇠테 곁에 도사린 사자뿐이구나. 오늘 밤은 고되구나. 오늘 밤은 무섭구나. 가련한 꼽추 광대의 줄타기를 위해 사다리가 이렇게 높으니, 관객들의 야유 소리만 더욱 요란하구나.」 「떨어져라, 꼽추 새끼, 떨어져버려라.」 단장이 내리치는 채찍 소리가 잿빛 연기 사이로 어둡게 번뜩인다.
서대경, 「서커스의 밤」 부분
1. 프루스트도 조이스도 아닙니다
어느 날 카프카나 프루스트, 조이스나 멜빌처럼 명성이 자~자~한 작가들이 이름을 지우고 가명으로 제 원고를 유명 출판사에 투고했다. 편집장으로부터 그들은 어떤 답변을 듣게 되었을까? 필경 몇 달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해를 넘겨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답변이 있었다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에 속할 것이다. 제 이름을 지우고 문단에 낯선 가명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투고한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느 날 출판사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는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작품입니다. 너무 길지만 포켓판으로 만든다면 팔릴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대로 출판해서는 안 됩니다. 충실한 편집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구두점을 모두 다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문장이 너무 지루한데다가 한 페이지 전체가 한 문장일 때도 있습니다. 편집 과정 중에 그 문장을 좀 더 잘라 각각 두세 줄 정도로 줄이고 좀 더 자주 새 문장이 등장하게 한다면 분명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작가가 그런 편집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이 원고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 말하자면 ― 호흡 곤란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책입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끝까지 읽은 그는 통탄할 노릇이라며 실망감을 참지 못해 끝내 분노를 터뜨린다. 냉수 몇 잔을 거푸 마신 후, 화를 달랜 프루스트는, 투고했을 때, 자신이 예상했던 출판사의 반응을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Note n° 1. 당신의 작품은 몽환적 상상력을 맘껏 발휘하여 그야말로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이 하염없이 백지위로 쏟아지는 무의식의 진풍경을 연출했습니다.
Note n° 2. 현재와 과거의 기억들이 플래시백처럼 순간과 순간의 짧은 경험으로 쉴 새 없이 불려 나와, 일시에 반짝이고 또 일시에 사라집니다. 한편으로는, 일관된 서술로 기억의 고유성을 담기 어렵다는, 얼마 전에 등장하여 각광을 받기 시작한 정신분석학의 함의를 정확히 반영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베르그손 철학의 취지 전반을 훌륭히 계승하고 있습니다.
Note n° 3. 매번 호흡을 분절하고 낱말과 낱말 사이 이 호흡으로 빈 공간을 새로 창출하는, 실로 보기 드문 창의성을 발휘하였습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기억의 실타래를 그대로 기술하려는 과감한 모험과 단호한 결단이 없었으면 이 작품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금세기의 걸작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Note n° 4. 글이 글을 물고 저절로 나아가게 배려했다는 점에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현대소설의 정점을 보여준 것으로 사료됩니다. 선생님의 이 길고 긴 작품은 말의 뭉치가 자율적인 단위를 이루어낸다는 점에서 서양 연작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으며, 난해한 주제를 자연스럽게 도출해내는 미덕과 매력으로 가득합니다. 당신의 작품은 오늘날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 소설이 어디로 향해야할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와도 같습니다. 저희는 만장일치로 선생님의 작품을 출간하기로 결정했으며, 쉼표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선생님의 초고 그대로 존중하여 곧 세상에 내놓기를 희망합니다. 이 멋진 작품이 어서 빨리 출간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부디 저희 출판사에서 작품을 출간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선생님께서 부디 허락해 주시면, 저희에게는 더없이 커다란 영광이자 프랑스 문단의 커다란 축복이겠습니다.
후대의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오로지 프루스트의 작품이기에 힘겨운 독서가 예정됨에도 읽기를 감행한다. 그렇게 그의 작품은, 그의 이름과 함께, 혁명적인 기억서술법 창안자의 실험으로 우리를 찾아오고,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가 모르던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20세기 문학의 출발이랄 수 있는 ‘자동사적 글쓰기’의 전범은 이렇게 프루스트라는 이름과 함께 탄생한다. 《독자의 흥미를 감소시키는 글쓰기에 관한 언어학적ㆍ문체론적ㆍ사회학적 연구 ― 몽환적 문체와 구두점 남용 사이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같은 주제로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다면 모를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프루스트의 작품이 아니라고 가정할 때, 그의 문장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으며, 작품의 가치를 오롯이 조명하려 시도할 비평가가 또 얼마나 있겠는가? 이 가명의 프루스트는 그래도 “두말할 필요 없이 중요한 작품”이라는 대답을 들었으니 나은 편이라고 하겠다. 투고자가 제임스 조이스였으며, 작품이 『피네건의 경야』였다면?
제발, 검토서를 보낼 때에는 좀 더 주의를 기울이라고 편집부에 말해 주십시오. 저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인데 당신들은 다른 언어로 정말 거지같이 쓴 책을 제게 보냈단 말입니다. 책을 소포로 따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조이스는 조이스가 아니다. 그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나 『더블린 사람들』, 아니 『율리시스』와 같은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했던, 바로 그 조이스이기 때문이다. 에코는 농담을 건넨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작품이라도 우리는 요약할 수 있다. 가령 『율리시스』가 어떤 작품인지 묻는 어리석은 물음에 누군가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를 단 하루 동안의 사건으로 바꿔 두 주인공 블룸과 디덜러스의 시점에서 더블린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과 나아가 인간의 복잡한 내면까지 극명하게 그려낸 명작’이라고 우쭐해하며 대답을 내놓았다면, 이는 작품에 대한 정확한 평이나 객관적인 분석이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 전반의 가치와 자리를 따진 후에 내려놓은 발언일 뿐이다. 그러나 조이스라는 표식이 없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 누가, 운문으로 전개된, 펼쳐들기 조차 벅찬 | 1300쪽 | 261*193mm | 2758g |의 저 초대형 판형의, 괴물과도 같은 종이뭉치를 읽을 것이며, 또 평가하려 시도할까? 그 누가, 장르 사이의 경계를 붕괴하여, 운문이지만 시인지 산문인지 모호한, 더구나 “생각 자체가 매우 드문 길을 재현하려 하고, 인생에는 곧고 확실한 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당시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사고나 우연, 그리고 마음의 샛길”로 마음대로 접어들어, 해석의 복수성과 암시성 자체를 작품의 본질로 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장치해놓은 작품의 진의를 파악하려 할 것이며, 또 누가 손쉽게 제 구매 목록에 이 작품을 추가하겠는가. 불면증 환자, 그것도 근력이 좋아 노트북 두 권 정도의 무게쯤은 침대에 누워서도 힘들이지 않고 펼쳐볼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율리시스』를 붙잡고서 재미에 푹 빠져 밤을 홀라당 새울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조이스나 멜빌, 카프카나 프루스트의 작품이 값진 것은 어느 정도는 이들의 이름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신인이 아니라면, 제 이름을 함부로 떼어 놓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문학 작품이나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텍스트 읽기는 항상 ‘전(前)-텍스트’ 읽기이자 ‘곁para-텍스트’ 읽기이며,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의 연관성을 전제한 상호 텍스트 읽기이기 때문이다.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의 작품을 우리는 이러한 전제 하에, 읽고, 분석하며, 이러한 조건 속에서 그 가치를 가름해본다. 엄밀하게 말해, 아무런 지식 없이 펼쳐드노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작품은, 신인의 경우를 제외하면, 없다. 어떤 작품은 이전 작품과 더불어 제 고유한 자리를 확보하고 고유성을 부여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난장(亂場)의 지도대국 : 잃어버린 비평의 염결성을 찾아서
모든 기획에는 기획하는 자의 이데올로기가 자리한다. 모종의 조건을 내걸고서 무언가를 함께 해보자고 들뜬 어조로 종용할 때, 그러나 그럴듯해 보이는 이 조건이 중립적이거나 객관성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기획의 아이러니는 ‘공정’이나 ‘공평’을 강조하며 결기를 드러내며 억울함과 비장한 심정을 감추지 않을 때, ‘공정’과 ‘공평’이 자주 ‘공정’과 ‘공평’을 벗어난다는 사실에도 있다. 『POSITION』의 《블라인드 시 읽기》는 시에서 이름을 지워야 한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름을 지우고 시를 읽으면 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문이 활짝 열릴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는 이 기획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우리는 오래전부터 특정 문학단체나 패권을 가진 일부에 편승하지 않으면 시인으로서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을 묵시(默視)해오고 있습니다. 이는 순수했던 시와 시인이 변질하는 것을 방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독창성과 다양성을 유대 삼아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던 시문학 정신에서 상당히 멀어져 왔습니다. 이런 결과 과대평가된 작품과 과소평가된 작품을 가려낼 수 있는 장치조차 없어졌습니다. 우리 《포지션》은 이 점을 반성하고 실천하는 마음으로 시인의 이름이 배제된 상태에서 염결하게 작품을 읽고 평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해당 시인에게는 당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고 평자에게는 왜곡된 비평정신을 곧추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POSITION』, 2015, 여름, 179쪽)
무명에 가까운 이름에 묻혀 좋은 시인의 시가 그간 외면 받아왔으며, 뛰어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그러니까 바로 이름에 발목을 잡혀 평가자들이 공정한 작품 읽기에 소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별 볼 일 없는 작품이 이름과 명성에 힘입어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으며, 일상다반사처럼 문단에 팽배한 이러한 풍토가 문단의 건전성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박탈하여, 시의 저 순수했던 본령이 훼손된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그래서/왜냐하면) 비평이 왜곡되었다(되었기 때문이다)는 논지가 여기에 따라붙는다. 그런데 이 논리는 어딘가 좀 이상하고 엉성하다.
반복한다. 어떤 작품은 오로지 전체에 속한 하나의 개별 작품이다. 이 자명한 사실을 배제하려는 데는 나름의 이유와 의도가 자리할 것이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가? “특정 문학단체나 패권을 가진 일부”에 있다고 한다. 이 ‘일부’에 시인들이 편승하지 못해 시인으로서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부’는 모든 악의 근원인 셈이다. ‘일부’라는 이 호명은 지극히 모호하다. 기획자 자신이 “특정 문학단체나 패권을 가진 일부”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가능한 이 주장에는 지나친 과장과 일반화를 통해 독자를 부추기려는 의도가 없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순수했던 시와 시인이 변질하는 것을 방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부연도 따라서 모호하다. 책임은 원인을 제공한 “특정 문학단체나 패권을 가진 일부”인데, 그걸 방관했기에, 그렇게 “묵시해오고 있”었기에, 그 결과 “독창성과 다양성을 유대 삼아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던 시문학 정신”에서 우리 모두 “상당히 멀어”졌다는 것이다. 기획자는 ‘우리’ 모두를 직무유기와 방관의 당사자라고 말하며, 나아가 그렇지 않느냐고 동의를 구하고 내친김에, 이 공동의 책임을 지고자,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며 격양된 자신의 변을 마무리한다. 그간 부재하였던, “과대평가된 작품과 과소평가된 작품을 가려낼 수 있는 장치”의 마련이 그 하나요, “시인의 이름이 배제된 상태에서 염결하게 작품을 읽고 평하는 자리”의 확보가 나머지다. 바람과 목적을 남기는 일도 잊지 않는다. 목적은 “해당 시인에게는 당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해주는 데 있다. 또한 “평자에게는 왜곡된 비평 정신을 곧추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타인의 부도덕성을 고발하며 자신의 선함을 은근히 강조하는 논리가 이렇게 완성된다. 제기되는 일련의 물음은 따라서 필연적이다. “시인의 이름이 배제된 상태”에서만 “염결하게 작품을 읽고 평하는 자리”가 마련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간의 결과물은 “과대평가된 작품과 과소평가된 작품”을 가려내는 일에 상응하는 성과를 산출하였는가? (기획에 참여한) “해당 시인에게는 당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의 장”이 제공되었는가? (기획에 참여한) “평자에게는 왜곡된 비평 정신을 곧추는 계기”가 마련되었는가?
2-1. 블라인드 시 읽기 : “시인의 이름을 가리고 작품을 평하는 자리입니다”
『POSITION』의 기획처럼 우리도 “시인의 이름이 배제된 상태”에서 시 몇 편을 읽고 평가해보기로 하자. 아래의 결과물은 기획에 참여해 평문으로 발표했던 이홍섭과 장이지의 글을 인용하여 작성되었고, 거기에 설명을 덧붙여 부기하는 방식을 따랐다.
[작품-1]
「비둘기」
새 한 마리 날아와 달리는 차창에 부딪혔다
날아오르다 부러진 날개를
깃털이 뽑힌 매끈한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는 무엇을 찾아 황급히 이 어두운 새벽길을 나선 것일까
암흑의 기억을 물고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솟구쳤을까
감지 못한 눈에는 피가 고여 있다
어지럽게 살아 있는 바람도 손길을 내밀어
딱딱하게 굳어지는 새의 혀를 만져본다
육탈된 새의 머리는 가볍다
부리는 뾰쪽하게 굽은 자신의 발가락을 닮았다
날카로운 모서리에 찍힌 안개를 쪼아대며
코스모스의 흰 이빨들이 구구구구, 강변에서 수런거렸다
다리 난간에서 이제 막 눈 뜬 햇살을 물고
비둘기들이 날아올랐다
[평가-1]
이 시는 새의 죽음을 통해 시인의 일상을 돌아보는 성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읽다가 몇 몇 구절에는 “고개를 갸웃했다”(2015 여름호 196쪽) 죽은 새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늙어가는 몸의 일부를 되돌아본 것은 좋으나, 전반적으로 “이 시의 비유들이 어딘가 모르게 탐탁지 않다. 이것은 그저 취향의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시 제2연의 비유들이 다소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그 점이 나는 좀 궁색해 보였다.(2015 여름호 197쪽) 또한 “다리 난간에서 이제 막 눈 뜬 햇살을 물고/ 비둘기들이 날아올랐다”라는 “표현으로 마무리를 했는데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한 것 같다. 시 천체는 차치하더라도 바로 앞의 연을 받쳐주기에도 힘이 부족해 보인다. 마감이 좀 빨랐던 것 같다.”(2015 가을호 180쪽) 죽은 새를 노래하다가 마지막 연에서 “비둘기”가 등장하는 대목은, 조류이기 때문에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해도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냥 불안을 노래한 시라고 이해하기로 한다.”(2015 겨울호 151쪽)
[작품-2]
「읽는 밤」
읽는 밤은 쓰는 밤과 다르다
그러니 시작할 수 있다
생선의 명부 그리고 얇은 잠
질리도록 깊은 얼굴
아른거린다
눈에 비치는 세계는 쉽게 멈추지 않고
생선의 명부 그리고 얇은 잠
그래 바로 저 얼굴이다
따라가기로 한다
가라 가라 세상의 모든 두 번째여
카페 드 마리에서 나와
계속 걸어가면 마주치게 되고
멀리서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살롱 드 요시다로 들어가는 밤이 온다
생선의 명부 그리고 얇은 잠
시작할 수 있다
읽는 밤은 쓰는 밤과 다르다
그렇다
나는 드가 참 좋은 것이다
[평가-2]
이 시는 쉽게 읽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시의 무대가 한국인지 불분명하며, 이러한 애매모호한 상황 설정과 “세상의 모든 두 번째” 같은 표현 때문에 “일단 해석이 불가능하니 소통은 만무하다.”(2015 겨울호 148) “카페 드 마리”나 “살롱 드 요시다” 같은 지명도 문제지만, 뜬금없이 등장한 “나는 드가 참 좋은 것이다” 같은 마지막 행에서 우리는 이 시가 한때 유행했던 우리 시의 “한 흐름에 근접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스타일을 아무리 더 세련되게 가다듬는다고 해도 결국은 자신만의 이름을 얻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가도 가도 ‘아류’의 꼬리표가 붙는다는 것은 예술가로서는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2015 가을호 188쪽) 따라서 마지막 두 행 “그렇다”와 “나는 드가 참 좋은 것이다”는 “생략해도 별로 지장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 시구는 시의 다른 부분과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2015 여름호 197) 반복되어 나타난 “생선의 명부 그리고 얇은 잠”처럼 “이 작품은 내용상 좀 어색한 부분이 있다.” “마지막” 행을 첫 행으로 “삼고”, “첫 행을 마지막 행으로 삼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함께 해보았다.”(2015 겨울호 150) “눈에 비치는 세계는 쉽게 멈추지 않고”는 “책을 많이 읽고,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 자에 대한 비유적 이미지일까? 역시 반복해 읽어도 잘 잡히지 않는다. 이건 의미 맥락에서 소통 불능이다.” (2015 겨울호 149).
[작품-3]
「연역」
가정이 어려우면 결심은 어려운 것이다 선생님은 대답을 기다리지만 생활이 모자라면 아무리 잡아당겨도 문은 열리지 않는 것이다 백묵이 말하지 않는 것과 흑판이 말하지 않는 것 이리저리 흔들리는 학생들이 있어 펼쳐지고 접히는 산출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장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이냐고 선생님은 대답을 기다리다 죽었다 나는 종이 한 장 들고 집으로 간다 가정은 많이 어렵고 문은 활짝 열린다 여기로 들어오라고
[평가-3]
이 작품은 가난한 학생이 선생의 고지식함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읽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져 “굳이 시를 이렇게까지 써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을 용서해주었으면 좋겠다.”(2015 여름호 191쪽) 더구나 “백묵이 말하지 않는 것”처럼 몇몇의 “좋은 표현이 힘을 받지 못해 아쉽다.”(2015 여름호 192쪽) 이 작품은 학생과 선생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 시인데 알레고리를 만드는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또한 마지막에 “문은 활짝 열린다”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내내 풀리지 않는다.”(2015 여름호 193쪽) “블라인드에 가려진 이 시는 중간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시의 힘이 약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강하지도 않다. 문학사적 흐름으로 볼 때도 늙지도 않고, 그렇다고 확연히 젊지도 않다. 이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다.”(2015 여름호 194쪽) “이 시는 퇴고를 더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내용의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시는 표현 면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또한 “문법적으로 주술 간의 호응이 어색하다.” “나는 이 시에 쓰인” 일상적 표현들이 “특히 못마땅하다.” “아무리” ‘가정의 어려움’을 “형상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이 시에는” 평범하고 범박한 일상어가 “남발되어 있다.” 또 그 일상어들이 시를 소박하게 “꾸미려고 하는 외화적(外華的)인 욕망의 소산 같아서 아쉽다.”(2015 여름호 199쪽) “그런데 시인은 왜” 「연역」이라는 “제목을 달았을까?” 가난한 학창시절의 경험의 기록이라는 “뜻일까.” ‘귀납과 연역’의 그 ‘연역’이라면 “내가 완전히 오독한 셈이 된다. 혹” ‘연혁(沿革)’의 “오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제목이 소통 불능이다.”(2015 겨울호 149쪽)
우리는 『POSITION』처럼 “시인의 이름을 다음호에 공개”할 수 없으니, 해당 시인들의 이름을 여기서 밝힐 수밖에 없다. 각각 임성용, 자크 드뉘망, 황인찬의 작품이며, 각각 시집 『풀타임』(실천문학사, 2015), 『자연사』(울리포프레스, 2015), 『희지의 세계』(민음사, 2015)에 실려 있다. 이름을 배제하지 않고서 위 작품을 읽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2-2. 블라인드, 없이, 시 읽기 : “시인의 작품을 평하는 자리입니다”
① 임성용은 노동자의 현실과 노동자의 삶을 노동자의 언어로 보여준 시인이다. 그는 노동시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모색하고 있는, 비교적 보기 드문 시인에 속한다. 임성용의 작품 전반에서 ‘새’는 척박한 노동환경과 노동자의 삶에 대한 알레고리의 한 방편으로 녹아있다. 임성용 시인이 그간 비극의 시대를 살아내는 노동자 개인의 체험과 사회적 파장을 담아내는 심혈을 기울여왔다는 맥락에서, 위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화자가 죽은 새를 보게 된 것은 공장에 출근하는 새벽길의 “달리는 차창”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필경 찰나의 일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순간의 크로키 같은 이 장면이 이내 “암흑의 기억을 물고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솟구”친다고 말한다. 그 사유의 끝자락은 어디로 향한 것일까? “날아오르다 부러진 날개”, “깃털이 뽑힌 매끈한 등”, “피가 고여 있는” “감지 못한 눈”, “딱딱하게 굳어지는 새의 혀”, “육탈된 새의 머리”을 목도한 그의 눈에 노동현장에서 숱하게 보아왔던 모습들이 고스란히 포개어진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이렇게, 언제 어디에 있어도, 아주 사소한 일상의 풍경 속에서도, 노동자의 자취와 피곤과 표정이 내려놓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삶의 풍경 사이사이에 노동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떠올리며, 그렇게 하는 일로, 자신의 삶, 오로지 노동자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 전반을, 복귀하고, 회귀하며, 기록한다. ‘새’의 이미지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도출된 것이다.
쇠가죽에 공장에 다닌다는 그이
늘 시커먼 장갑을 벗고 쉰다섯 피곤을 털고 돌아오네
가없는 허공에 외롭게 번져가는 무늬로
백학은 날아가고 날아오고
하늘 땅 어디에도 한 마리 백학처럼
가볍게 죽은 자는 없네
임성용, 「백학」 부분
임성용의 시에서 등장하는 ‘새’는 따라서 노동자의 삶과 별개로 이해될 수 없다. 누구나 아름답다고 말하는 “백학”은 가벼운 죽음의 상징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노동의 잔혹한 현장과 동료 노동자들의 모습이 “백학”과 포개어지면서 “백학”은 노동자의 강인함과 대척점에 놓여, 시 전반에서 비판적 알레고리로 전환된다. 임성용의 시에서, 노동자와 별개로 작동하는 상징이나 사물, 존재나 낱말은 목격하기가 힘들다. “하루하루 시뻘건 식도에 밥을 채우고자 발버둥 치면서/통닭이나 한 마리 시켜놓고 술잔을 건넬 뿐”(「목숨에 대하여」)처럼, 그는 평범한 ‘닭’을 통해서조차 늘 노동의 현장을 환기하고, “닳고 닳아 쇳조각 같은 혀”(「부리」)로 거듭난 새의 “부리”조차 노동자 고유의 강인함의 미학을 노래하는 데 헌정된다.
② 두 번째 작품의 저자, 자크 드뉘망은 외국 작가가 아니라 실은 가짜 이름이다. 따라서 자크 드뉘망이라는 실존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소설가이자 시인인 김태용의 의사번역(擬似飜譯, pseudo-translation)이며, 이러한 사실은 문단에 이미 알려진 바 있다. 김태용이 진짜 저자라고 해도 그러나 그는 자크 드뉘망의 자격으로만 글을 쓰고자 하며, 이러한 사실에서 이 작품의 특성이 도출된다. 의사번역은, 번역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롯이 창작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수도 없는 특수성과 고유성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이 시의 독해는 이러한 정보를 염두에 두고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드뉘망은 프랑스어로 ‘밤에 쓰는 손’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전 지식도 작품의 이해에 도움을 준다. 김태용은 자크 드뉘망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뿔바지』(울리포프레스, 2012)라는 시집을 출간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과의 연장선상에서 이 작품을 읽을 수밖에 없다. 첫 행 “읽는 밤은 쓰는 밤과 다르다”부터 김태용은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닌 화자를 시에서 설정하여, 글의 주체를 이중화한다. “가라 가라 세상의 모든 두 번째여”는 이 작품이 의사번역의 실험이라는 사실을 표방하는 동시에, 그러한 시도를 통해 탄생한 “두 번째” 저자를 독려하는 대목으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 역시, 자신의 시도에 대한 확신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외국 지명 “카페 드 마리”와 “살롱 드 요시다”는 김태용의 앞선 작품 『뿔바지』의 주요 무대였으며, 프랑스나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공간이다. 이 가상의 장소는 “므슈이마드무아절한므슈김등”(「검은 이마」, 『뿔바지』)의 친구들과 만나 문학과 관련된 놀이와 실험을 하고 대화를 나누었던 곳이기도 하다. 두 번째 시집에 와서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전 작품에서 가짜 저자의 역할에 충실했던 자크 드뉘망이 두 번재 시집에서는 차츰 진짜 저자의 목소리를 내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읽는 밤”과 “쓰는 밤”이 서로 “다른” “세상의 모든 두 번째”인 존재들은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③ 황인찬의 시는 우선 그 말투와 서술 방식이 특이하다. 이러한 특이성은 시집 『희지의 세계』 전반에서 목격되는 황인찬 시의 (새로운) 특징이자 고유성과도 고스란히 연관되어 있다. 이 작품은, 누군가의 말, 자신의 세대보다 앞선, 그것도 한참을 앞선 사람의 말투가 그대로 재현되었다. 가령, “펼쳐지고 접히는 산출이 있는 것이다”와 같은 표현은, 어휘뿐만 아니라 말을 맺는 저 방식도 복고풍이다. 이 시를 지배하는 어투의 특징은 이처럼 반복된 ‘~것이다’에서 발생한다. 추측이나 주관적 소신 등을 나타내는, 의존명사와 결합된 종결형의 빈번한 사용은 그간 황인찬에게서는 좀처럼 목격되지 않는 어법에 해당되기에, 황인찬 연배가 부리기에는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이는 이번 시집이 구어 특유의 감각을 그대로 살려내는 데 주력했다는 점을 알려주며, 시집의 이와 같은 특징은 우리가 읽은 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이 작품이 패러디의 산물인 것과도 연관성을 지닌다. 이번 시집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도드라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패러디의 실천이듯, 이 작품의 말투나 주제 역시 아래 전문을 인용한 이상의 작품 「家庭」을 패러디했기에 발생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 나는우리집내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減해간다. 食口야封한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 않나. 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鍼처럼月光이묻었다. 우리집이앓나보다. 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壽命을헐어서典當잡히나보다. 나는그냥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 門을열고안열리는門을열려고.
장이지가 해설에서 지적했듯 황인찬은 시집 『희지의 세계』에 “정지용의 「유리창」, 이상의 「가정」, 김수영의 「절망」, 「눈」, 어효선 작사의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 등을 시에 끌어들”인다. 이 작품의 어색한 고어투의 발화는 이상의 작품을 패러디하며 시인이 마치 습작을 하듯 작성한 것으로 보이고자 제 언어 전반의 운용을 조절했기 때문은 아닐까? 특이한 사항은 이상의 “가정”이 “門을열고안열리는門을열려고”처럼, 차마 문을 열기 힘든, 그러니까 항상 외부로부터 닫힌 가정이자 폐쇄된 공간이었다면, 황인찬은 ‘가정’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관절 무엇을 연다는 것이며, ‘문’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황인찬의 “가정”은 이상의 “가정”인가? 이 “문”은 문(門)인가? 문(文)인가? 아니면 문(問)인가? 난해기로 유명한 이상의 작품을 열려한다는 것일까? 마지막 구절 “가정은 많이 어렵고 문은 활짝 열린다”에서 비로소 패러디의 의도와 의의가 고스란히 풀려나온다.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상의 작품 「家庭」은 난해하다. ① “가정이 어려우면 결심은 어려운 것이다” : 가정’(家庭)이라는 작품이 어려우니/가정(假定)하지 못하니, 마음을 정하기 어렵다. ② “생활이 모자라면 아무리 잡아당겨도 문은 열리지 않는 것이다” : 작품을 체현하고 살아내는 작업이 부족하면 문(文)은 열리지 않는다. ③ “백묵이 말하지 않는 것과 흑판이 말하지 않는 것” :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부족하며, 시는 항상 그 이상의 세계에서 펼쳐진다. ④ “이리저리 흔들리는 학생들이 있어” : 이상의 작품에 충격을 받고 동요를 하며 온몸으로 체현하다보면 ⑤ “산출이 있는 것이다” : 무언가 얻게 되는 것이 있다(따라서 여기서 “산출”은 ‘算出’이라기보다 ‘産出’이라하겠다). ⑥ “가정은 많이 어렵고” : 이상의 작품은 난해하며/시라는 것은 난해하지만 ⑦ “문은 활짝 열린다 여기로 들어오라고” : 시는 항상 여기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마지막의 “여기로 들어오라고”는 당부나 청유의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우리가 방금 읽은 것처럼, 이 작품은 거개의 낱말과 문장들이 중의성을 뿜어낸다. 이는 문, 가정, 이상, 산출 등의 낱말들이 제 쓰임새를 하나 이상으로 넓혀내었고, 패러디를 통해 해석의 암시성과 복수성을 조장하면서, 이중삼중으로 추론하게끔 구석구석에 장치를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시 제목이 「연역」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이렇게 이상의 작품 「가정(家庭)」을 ‘가정’(假定)의 대상으로 삼아 전개한, 추론을 통해 그 중심으로 진입해야하는 연역의 과정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이전 시집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 그러니까 이번 시집의 도드라진 발화와 어법, 주제와 대상의 변화는 이렇게 패러디를 중심으로 발생한다. 대상과 감정 사이에 균형을 잃지 않는 저 섬세한 조율을 통해, 이 세계와 사물,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잠시 정지시키고자 했던, 그렇게 세계를 순간으로 붙들리는 성스러움의 발화로 가득 채웠던 첫 시집의 황인찬은 이제 패러디를 통한 속화(俗化)의 세계로 접어들어, 다변과 구변의 시인으로 변모를 꾀한다. “원칙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고상한 주제가 속된 주제에 적용된 텍스트의 변환”을 의미하는 패러디는 황인찬에게는 말을 구사하는 속화(俗話)와 대상을 포착하는 관점의 속화(俗畫)를 실현하는 커다란 동력인 것이다. 자서에서 시인은 제목 『희지의 세계』에 대해, “아자혜의 만화 『미지의 세계』에서 제목을 빌려 시를 쓰려다 그만 착각을 하고 말았다”고 밝힌 바 있다. 중요한 것은 “착각”을 했다는 말에도 있다. ‘미지’라는 단어의 단순한 오타의 결과가 아니다. 황인찬의 이번 시집이 타자의 글, 문화, 언어, 문학, 사유에 입사하여 내 고유의 것을 궁리하는 저 상호텍스트를 실현하려는 의지로 가득하다면, 시집의 제목도 ‘희지’와 ‘수영’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네이버 웹툰 『빵점 동맹』(마사토끼 / joana)을 패러디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3. 자유로운 가면? 은폐한 복면?
모든 기획에는 기획하는 자의 이데올로기가 자리한다. 이 기획에서 비평에게 돌려진 화살은 무엇인가? 작가라는 표지를 지우고서 작품을 조망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명성에 겁을 먹고 하찮은 무명에 잔뜩 거만해져 제구실을 못하는 저 반편이 비평이 갑자기 ‘공정’하고 ‘공평’해질 길이 활짝 열리기라도 한다는 것일까? 비평의 왜곡을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왜곡된 비평을 자청하는 자는 누구인가? 이름을 지우고서, 그 이름의 아우라와 따로 떼어 놓고서 작품을 평가해야 한다거나, 그럴 때 객관적으로 작품을 조명할 수 있다는 허투른 믿음은 텍스트 읽기와 비평의 방법을 구조주의의 저 낡아 빠진 과학적 환상의 소유물로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 이 기획은 ‘객관’-‘공정’-‘과학’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텍스트의 경험성과 역사성, 시의 연속성과 상호성을 간과한 무지의 소산이다. 작품은 단일한 의미에 붙잡히는 대신, 항상 ‘의미의 복수성’을 전제한다. 하나의 작품은 다른 작품과의 관계 속에서, 제게 부여된, 제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바로 저 태생적인 의미의 복수성과 복잡성을 해소해나갈 방법을 궁리하며, 비평이 사활을 거는 곳은 바로 여기다.
비평적 환상들의 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론적 가설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작품이 하나의 의미에 닫힌 것이 아니라는 가설이다. 작품은 하나의 의미에 완성된 형태를 부여하면서 가려 버리지 않는다. 작품의 필연성은 의미의 다수성에 근거한다. 작품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러한 다원성의 원칙을 인정하고 구별하는 것이다. 이제 정도는 다르지만 어느 비평 작업에나 깔려 있던 가설, 즉 작품이 단일성을 지닌다는 가설을 버려야 한다. 작품은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하나의 의도에 의해 창조되지 않는다.
텍스트는 자율적인 동시에 상호적이다. 비평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텍스트의 자율성은 한 작품의 내적구조와 동일한 작가의 다른 작품의 내적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불신하자고 고안한 개념이 아니다. 자율성이나 내재성 같은 개념은, 작가의 이름을 지울 때, 텍스트의 객관성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나할 것 없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작업에 혈안이 되어 있던, 작가의 삶 자체를 작품이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낭만주의적 전제에 눈이 먼 기계적 전기비평의 횡포에 시달리던 기존의 문단에 텍스트의 작동 방식의 고유성과 중요성을 환기하기 위해 발현된 개념이었다. 비평은 작가의 전기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작품들의 상호교류를 타진하고, 그렇게 도출된 가치를 헤아리는 일에 매진한다. 구조주의의 시대를 연 소쉬르는 “기호의 값은 기호의 밖에, 그리고 기호의 주변에 있는 것들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라고 말하여, 맥락이 제거된 상태에서는, 그 어떤 낱말도, 그 어떤 문장도, 그 이상의 단위의 텍스트도 제 가치를 오롯이 보장받지 못한다고 피력한 바 있다. 21세기에 아무 까닭도 없이 한국에서 펼쳐든, 19세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식의 저 낡고 맹신적인 과학주의와 그것의 무모한 실천을 우리는 참신한 기획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프랑스에서나 한국에서나, 그 어디에서나 텍스트의 역사성-자율성-상호성은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기획에는 기획하는 자의 이데올로기가 자리한다. 누가 불려 나왔는가? 유명하지만 “과대평가된 작품”과 무명이지만 “과소평가된 작품”을 호출하였는가? 이 양자에게 두루 공정한 자리가 마련되었던가? ‘과대-과소’ 평가된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 기획은 기존의 작품을 대상으로 삼을 것이라는 사실을 내세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김광규, 이성복, 김혜순, 최승자 등과 같이 한국 시사 전반에서 이미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바 있는 시인들의 작품들을 대상을 삼아, 그중에서도 “과대평가된 작품”들을 추려내어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추려낸 작품들을 전혀 읽지 않았거나 그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는 비평가들을 선별한 후, 기획을 진행해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아니, 그 반대로 무명에 가까운 시인의 작품들 중, “과소평가된 작품”들을 선별한 후, 평자들을 선별하여 기획을 도모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기획에서 평가에 참여한 장이지와 이홍섭은 ‘블라인드 시 읽기’의 위험을 경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시를 시인의 명성이나 평판에 의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읽는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곤란한 점이 있다. 다섯 편 정도의 작품을 놓고 한 시인의 성패를 논한다는 것도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시단에서 현재의 작업이 지닌 의의에 의해 평가받기보다는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태작을 내놓고도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하는 시인들이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시인의 이름을 가리고 온전히 현재의 작업들을 늘어놓고 그 수준을 가늠해보는 일도 전혀 무의미한 일만은 아니리라는 생각도 든다. (2015 여름호,195쪽)
사실 이런 기획은 꽤나 위험한 시도다. 얼굴을 보지 않고 얘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획의도가 명쾌하기 때문에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늘 좋은 얘기만 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2015 가을호, 178쪽)
이 “꽤나 위험한 시도”를 감행하는 이유를 “현재의 작업이 지닌 의의에 의해 평가받기보다는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태작을 내놓고도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하는 시인들이 많다”는 판단에서 찾는다. ‘공정성’ 부재를 염려하면서 “그 수준을 가늠해보는 일”에 동참하기로 한, 이와 같은 어려운 결심의 바로 옆에 “기획의도가 명쾌하기 때문에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고 주저하다가 내려놓은 단호한 고백, 일단 하고 보자는 식의 책임지기 어려운 공설의 근거를 인생의 지혜를 빗대 늘어놓은 궤변이 자리한다. 쓰는 게 그렇게 께름칙했으면 쓰지 말았어야 했다. 고교 백일장 심사평이 아니라 동료 시인의 시에 대한 비평이란 말이다. 이쯤 되면, 모든 평가가, 모든 가정이, 모든 논의가, 몹시 우스꽝스럽지만 차마 웃지 못 할 어처구니없는 농담이 되어버린다. 지금까지 대상이 되었던 두 시인과 이번 봄호에 그 이름이 공개될 또 다른 시인은 이렇게 까닭을 모른 채, 졸지에 신인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제 시의 가치를 조명받기(시인들이 이 기획에 참여하기로 수락한 거개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보다, 마이너스와 네거티브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진, 제 인상만을 성급하게 내려놓으며, 갈팡질팡하는, 짜증이 가섞인 말투로 점철된 저 못난 비평(시인들이 예상하지 못한 채 받아 든 결과일 것이다)의 피해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획자(만약 그가 시인이라면)가 기획의 대상이 되어보면 어떨까? 아마 그렇게 될 리 없을 것이며 그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기획은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기획의 덫에 걸려든 시인들은 고통스러워하고 평자는 허우적거린다. 비평은 단죄나 푸념, 감정의 토로가 아니다. 시인은 제 얼굴을 가려야하는 광대가 아니며, 독자는 야유를 보내거나 이 우스운 일에 키득거리는 관객이 아니다. 비평은 다수의 하수를 상대로 고수가 잠시 없는 짬을 내어, 베푸는 그 무슨 바둑의 지도대국과 같은 것이 아니다. 문예지의 기획이 오디션 예능프로그램과 같을 수는 없다. 시는 이런 복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조재룡
2003년 《비평》지에 문학평론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저서『앙리 메쇼닉과 현대비평:시학․번역․주체』 『번역의 유령들』 『시는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등. 현재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첫댓글 시인의 이름을 가리고 작품을 평하는 코너가 있으면, 환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