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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실현이 되면 될수록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갖출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원만하고 선하다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속하고 있는 사회의 윤리관(cf. 도덕)에 비추어 그는 때로는 이기적이라는 평을 받고, 때로는 냉정하다는 평을 받고, 때로는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을 받을지 모른다. 때로는 무한한 정열로 이웃을 돕고, 때로는 권력의 도가니에서 싸우고, 금욕과 정욕에 사로잡히며 고민하고, 때로는 질투와 증오의 감정으로 허덕일 것이다. (자기실현을 가진사람이 평범한 사람)다만 그의 머리에는 집단적 투사에 의하여 생기는 명성이라는 후광(後光)이 없고, 구태여 스스로 그 후광을 만들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만일에 누가 그것을 만들어 씌워 주면 그는 또 구태여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인생에서 대수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평범하나 분수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그가 하여야 할 바를 마음속에 물으며, 그것이 그가 가야 할 길이면 그렇게 간다. 그것 때문에 그가 대인관계에서나 세속적인 이권에 반해서 손해를 보게 된다 하더라도 - 그는 이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고독한 사람일 수도 있다 - 또한 그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진정으로 무력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self)와의 일치라는 점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강하다 약하다 하는 의식을 그는 가지지 않는다. 그는 반성할 줄 알며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인 인간이다. 무엇이 나의 갈 길인가를 항상 마음속에 물으나 그 해답이 늘 분명하지 않음을 알며, 때때로 인간은 그 불분명한 혼돈 속에서 찾아 헤매는 고통을 겪어야 하며, 그러나 그 물음과 찾음에 응답이 있을 것임을 믿는다. |
“연금술사의 돌(lapis)" 여기 그 돌이 있네. 하잘 것 없는 것. 그건 아주 값싼 것이긴 해도..... 바보들로부터 경멸당할수록 어진 이로부터 더욱 사랑받는다. -연금술사 아르날두스 드 빌라노바의 시- |
나는 고아, 혼자서 있소 그런데 어디서나 발견되오. 나는 하나. (유비쿼터스는 종교적인의미이다 요즘은 기계를 말하지만)그러나 내 자신에 대립된 존재이오. 나는 젊은이인 동시에 늙은 사람.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르오. 물고기처럼 깊은 곳에서 꺼내 와야 하므로 - 아니면 마치 하얀 돌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므로 - 숲과 산에서 나는 헤매고 있소. 그러나 나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숨어 있소.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죽지만 시간의 순환과 변화가 나를 손대지 못하오. |
3교시
4. 자기실현의 과정
무의식의 내용을 깨달아 나가는 단계에 누구에게나 일정한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구조에서 말한 여러 가지 내용들, 즉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의 의식화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그 개체는 전체의 실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콤플렉스자체는 나쁜것이 아니다. 그 자체에 병리적인 억압되어질 때 문제이다.
- 그림자의 의식화
그림자의 의식화는 비교적 쉬운 편이므로 성숙한 단계의 사람이라 할 때는 대개 여기까지는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림자가 나의 친구가 되느냐 적이 되느냐하는 것은 순전히 나(자아)에게 달렸다.” 그림자는 우리에게 윤리적 갈등을 일으킨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이냐 하는 의문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융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에는 집단규범에 의한 도덕적 규준(윤리)이 있고, 이와는 다른 그 개체의 원초적인 양심(도덕)이 그 무의식 속에 있다. 이것은 바로 자기원형의 도덕적 측면이다. 이 두 가지를 판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꿈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그 방향을 제시하지만 언제나 뚜렷이 가리켜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주 우리는 사회적 선악관과 내적인 충동의 양극 사이의 방황을 감수하고 진정한 내적인 양심의 향방을 찾아가야 하는 때가 있다. 그림자는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서 소화시킬 때 우리의 친구가 된다.
-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의식화
그림자 다음에는 남성에 있어서는 사랑과 감정의 분화(아니마), 여성에서는 이성과 정신적인 지혜의 발달(아니무스)이라는 과제 앞에 서게 된다. 맹목적인 본능적인 사랑, 불모의 논리성에서, 보다 성숙한 통합된 사랑과 지혜로의 분화를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이나 여성으로서의 열둥감, 합리적 사고에 대한 과도한 집착, 또는 감정에만 치우칠 때 아니마, 아니무스의 의식화를 통한 분화작업은 어려움에 부딪친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자기실현은 일반적인 원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 따라 그 과정과 그 때 그 때의 과업이 다르게 마련이다.
- 자기와의 만남
이렇게 무의식의 의식화가 진행되면 결국 무의식성이란 없어지고 완전히 깨달은 상태가 되어 전인(全人)이 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무의식은 끝없는 세계이다. 아무리 의식화해도 미지의 세계는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기는 언제나 ‘나’(자아)를 넘어선다. ‘나’는 오직 그 커다란 원 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자아가 자기를 알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융은 자기실현은 반드시 완전해지는 것이기보다 비교적 온전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실현의 의의
자기실현은 한 인간의 과제일 뿐 아니라 전 인류의 과업이다. 그런 뜻에서 그것은 역사와 시대의 사명이기도 하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긴 인류의 역사에서 거의 완성에 가까운 자기실현을 성취하였다. 사회에 따라서는 자기실현을 억압하고 유일한 절대의 원칙 밑에 개성을 누르는 집단도 있다. 자기실현을 막는 규범적 교조적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자각된 인간들이 사회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며 때로는 박해의 대상이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나 몰이해가 자기실현의 귀중한 조건이 되는 수도 있다. 그것은 보다 성숙되기 위해서 먹어야 할 쓴 약이다. 상업주의 문화, 매스컴의 집단암시, 그 밖의 집단적 행동은 모두 개성화를 저지한다. 집단은 그 성원에게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행동을 하기를 강요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와 비슷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사이좋게’ 어린 시절의 단 꿈 속에서 잠들고자 한다. 개성화는 이 긴 잠을깨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서 개체나 집단이 다 같이 고통을 겪고 때로 사회적 물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모든 개인이 자기실현을 하면 하나의 이상적인 성숙한 사회가 실현될 것이다.
가족이 없어진다. 제사도 여행가서, 돌지나면 영어학원 3살정도 학원가서 내면의 정신세계 다른 사람이 자기와 같이 아니하면 불안해한다. 사회적 물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첫댓글 사회적 평가와 사회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모습에 맞추어 살기만 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자기소외, 자기부정에 빠지게 되지요. 열등기능에도 관심을 갖고 자신을 잘 분화해 가는 노력이 필요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