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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간(朴幹 약 력 ; 시호(諡號)는 양효(良孝). 고려조(高麗朝)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부참정(兵部參政)을 지냈다.
■ 박강생(朴剛生) 약 력 ; 자는 유지(柔之), 호는 나산경수(羅山耕 ), 판사(判事) 침의 아들. 고려 공양왕(恭讓王)때 문과(文科)에 급제,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에 이르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408년(태종 8)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1417년(태종17) 수원부사(水原府事)로 재직 중, 서울로 교체되어 가는 과천 현감(果川縣監) 윤돈(尹惇)의 전별연(餞別宴)에서 금천현감(衿川縣監) 김문(金汶)이 과음(過飮)으로 죽음으로써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 뒤에 등용되어 세종 때 안변부사(安邊府使)를 지냈다. 죽은 후인 1424년(세종 6) 딸이 후궁(後宮: 장의궁주)이 되어 1품(品)직에 추증(追贈)되었다. 문장(文章)이 아름다워 문명(文名)을 떨쳤다.
■ 박거겸(朴居謙) ; 1413(태종 13) ∼ 1481(성종 12) 약 력 ; 자는 중공(仲恭), 시호(諡號)는 평간(平簡), 증판서(贈判書) 경빈(景斌)의 아들. 1432년(세종 14) 별시위(別侍衛)에 음보(蔭補), 1442년 호군(護軍)으로 무과(武科)에 장원, 대호군(大護軍)에 올라 우익위(右翊衛)를 겸직, 지훈련관사(知訓鍊觀事), 북청부사(北靑府使) 등을 지냈다. 1451년(문종 1) 경흥부사(慶興府使)가 되어 재직 중 야인(野人)의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453년(단종 1) 경상좌도처치사(慶尙左道處置使)를 거쳐 1455년(세조 1)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다. 1457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지낸 뒤 1460년 황해평안도도체찰사(黃海平安道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가 2년 후에 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를 거쳐서 1469년(예종 1) 강릉부사(江陵府使)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를 지내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도총관(都摠管)·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1481년 충정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었다. 활을 잘 쏘았다.
■ 박건(朴楗) ; 1434(세종 16) ∼ 1509(중종 4) 약 력 ; 자는 자계(子啓), 시호(諡號)는 공간(恭簡), 응천군(凝川君) 중손(仲孫)의 아들. 1453년(단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이 되고, 교리(校理)를 거쳐 사정(司正)을 지냈다. 14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었고, 사인(舍人)·우부승지(右副承旨) 등을 거쳐 1468년(예종 즉위) 수전라도관찰사(守全羅道觀察使),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오르고 1472년(성종 3) 진하부사(進賀副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147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1479년 황주선위사(黃州宣尉使), 이듬해 반송사(伴送使), 1483년(성종 14)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다음해 평안도 관찰사, 대사헌, 2년 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1492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 1495년(연산군 1) 우참찬(右參贊)으로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형조 판서 우찬성(右贊成)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으로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다. 1504년(연산군 10) 폐비(廢妃) 윤씨의 추시(追諡)를 반대하다가 함경도 관찰사로 좌천, 1506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가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과 반정(反正)에 참여, 중종을 추대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이 되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뒤에 좌찬성·영경연사(領經筵事)를 지냈다.
■ 박경지(朴敬祉) ; 1610(광해군 2) ∼ 1669(현종 10) 약 력 ; 자는 형보(亨甫), 대사헌 영(英)의 손자. 1635년(인조 13) 무과(武科)에 급제, 이듬해 무과중시(武科重試)에 장원, 여러 무관직을 거쳐 1643년(인조 21)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오르고 1648년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54년(효종 5)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1658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1660년(현종 1)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고, 166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듬해 수원부사(水原府事), 1669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 박계은(朴繼恩) ; 1436년(세종 18) ~ ? 호는 화은(華隱)이고, 두촌(杜村) 양무(楊茂)의 증손(曾孫)이다.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1462년(세종 44) 생원(生員)에 장원하고 평생 성리학(性理學)을 전공하여 사림(士林)의 숭앙을 받았으며 제자가 많았다. 청도(淸道) 신안(新安) 숭절사(崇節祠), 훈령서원(薰嶺書院)에 향사되었다.
■ 박계현(朴啓賢) ; 1524(중종 19) ∼ 1580(선조 13) 약 력 ; 자는 군옥(君沃), 호는 관원(灌園). 시호는 문장(文莊), 좌찬성(左贊成) 충원(忠元)의 아들. 1543년(중종 38) 진사(進士)가 되고, 1552년(명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검열(檢閱)·정자(正字) 등을 역임, 1555년(명종 10)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조 정랑(吏曹正郞)·부교리(副校理)·검상(檢詳) 등을 지냈고, 1560년 권신 윤원형(尹元衡) 집안의 청혼(請婚)을 거절했으며, 만포진병마첨절제사(滿浦鎭兵馬僉節制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대사헌으로 재직중 동인(東人)·서인(西人) 사이의 당쟁을 억제하고자 힘썼으나 실패했다. 1580년(선조 13) 병조 판서(兵曹判書)·지중추부사를 지냈다.
■ 박공필(朴公弼) 약 력 ;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평장사(平章事) 효신(孝臣)의 아들. 고려 때 대장군(大將軍) ,도검사(都檢事)를 지내고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올랐으며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윤 관(尹瓘) 등과 함께 여진국(女眞國)을 평정한 공(功)으로 진국공신(鎭國功臣)에 책록되었다.
■ 박광례(朴光禮) 약 력 ; 병부상서(兵部尙書) 육화(育和)의 손자(孫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벌이 나타남으로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 박광영(朴光榮) ; 1463년(세조 9) ∼ 1537(중종 32) 약 력 ; 자는 군당(君棠), 참의(參議) 미(楣)의 아들. 1486년(성종 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95년(연산군 1) 생원(生員)으로서 숭불(崇佛)했다는 죄로 장류(杖流)되었다가 돌아와 149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정언(正言)으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추숭(追崇)을 반대하여 목천(木川)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방환, 정언(正言)에 복직되었고 지평(持平), 교리(校理), 집의(執義)를 거쳐 1514년 평안도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 1516년 대사간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냈다. 1518년 관압사(管押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22년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도적을 토벌하지 못한 죄로 파직, 1526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등용, 1528년(중종 23)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고 이듬해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자손이 없는 맏형의 훈작(勳爵)을 습봉하여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지고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 박권(朴權) ; 1658(효종 9) ∼ 1715(숙종 41) 약 력 ; 자는 형성(衡聖), 호는 귀암(歸菴). 1684년(숙종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8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병과(丙科)로 급제, 전적(典籍) 때 윤의제(尹義濟) 등의 처벌이 가벼움을 논핵(論劾)하여 이산(離散)에 유배, 1692년에 석방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고, 정언(正言)·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부교리(副校理)·승지(承旨)·동래부사(東萊府使) 등을 역임했다. 1703년 경상도 관찰사, 이어 이조 참의(吏曹參議)·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711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의 접반사(接伴使)로서 백두산(白頭山)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돌아와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그 후 청나라 사신의 원접사(遠接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죽었다.
■ 박근원(朴謹元) ; 1525(중종 20) ∼ ? 약 력 ; 자는 일초(一初), 호는 망일재(望日齋), 빈의 아들. 1552년(명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예조 좌랑(禮曹佐郞) 부수찬(副修撰) 이조 참판(吏曹參判)·도승지(都承旨)를 거쳐 대사헌이 되고 1569년(선조 2)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논쟁이 심할 때 동인의 중진(重鎭)으로 1583년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 이(李 珥)를 송응개(宋應漑)·허 봉 등과 함께 탄핵하다가 강계(江界)로 유배(流配), 1585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풀려 나왔다.
■ 박기세(朴基世) 약 력 ; 고려 때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냈다.
■ 박기수(朴基守) 약 력 ; 자(字)는 주여(周汝), 호(號)는 송재(松齋). 조선 고종(高宗)때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 박기채(朴起采) 약 력 ; 조선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 박기호(朴基鎬) 약 력 ; 자(字)는 숙경(叔京), 호는 양우(養愚). 1832(순조 32)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며 그후 현륭원령(顯隆園令)에 이르렀다. 그는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났는데 관직에 국상(國喪)을 당했으나 가난해서 흰옷을 만들 수 없으므로, 도포(道袍)로 단령(團領)을 만들고 흰 종이로 신발을 발라서 엄동에 떠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털옷을 마련해 주었으나 물리쳤을 정도로 강직한 성품이었다.
■ 박길응(朴吉應) ; 1598(선조 31) ∼ ? 약 력 ; 자는 덕일(德一), 호는 진정재(眞靜齋), 현감(縣監) 신(信)의 아들. 이안눌(李安訥)의 문인. 음보(蔭補)로 찰방(察訪)이 되어 1634년(인조 1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38년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지평(持平)·사간(司諫) 등을 역임, 효종 때 집의(執義) 보덕(輔德)·승지(承旨)를 거쳐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학안록(學顔錄)을 편술(編述)했다.
■ 박난 약 력 ;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손자, 대장군(大將軍) 욱(郁)의 아들, 고려조(高麗朝)에서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를 지냈다.
■ 박내만(朴來萬) 약 력 ; 자(字)는 치영(穉永), 호(號)는 문봉(文峰). 1836(헌종 2)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지(承旨)·대사헌(大司憲) 등을 거쳐 외직으로 덕천·춘천부사(德川春川府使) 등을 지내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 박녕(朴寧) 약 력 ; 호(號)는 충헌당(忠軒堂). 조선때 호조 정랑(戶曹正郞)·예조 참의(禮曹參議)·판관(判官)을 역임했다.
■ 박노(朴魯) ; 1584(선조 17) ∼ 1643(인조 21) 약 력 ; 자는 노직(魯直), 호는 대호(大瓠),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서의 아들.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후 홍문관 수찬(修撰)·교리(校理)·지평(持平)·직강(直講) 등을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에서 사퇴했다. 1624년 이 괄(李 适)의 난때 산직(散職)으로서 왕을 호종(扈從), 장연부사(長淵府使)로 기용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순검사종사관(巡檢使從事官)으로 왕을 강화(江華)에 호종(扈從)하여 그 공으로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되었다. 후금(後金)이 변방을 공략하는 등으로 조선을 괴롭히자 1631년 회답사(回答使)·추신사(秋信使) 뒤에 다시 춘신사(春信使) 등으로 심양(瀋陽)에 가서 그들을 회유했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사신(使臣)으로 적진(敵陣)에 세번에 걸쳐 들어가 조약을 어기고 불법침입한 것을 공박, 40일 동안 잡혀 있다가 화의 성립 후 풀려 돌아왔다. 이듬해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심양에 갈 때 세자빈객(世子賓客)으로 따라 갔다가 신병으로 3년 만에 귀국한 후 좌승지(左承旨)·도승지를 거쳐 1642년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 박대덕(朴大德) ; 1563(명종 18) ∼ 1654(효종 5 ) 약 력 ; 자는 사화(士華), 호는 합강(合江), 조호익(曺好益)의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조호익이 소모관(召募官)이 되자 그 밑에서 의병 5백 여명을 모집, 여러번 전공을 세워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에 70세가 넘었으므로 출정치 못하고 피난 도중 양덕(陽德)에서 적병을 만나 일행을 독전하여 적을 물리쳤다. 1648년에 부사(府使) 이정남(李井男)이 그 공적을 조정에 보고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또 김육(金堉)의 천거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대사헌 등에 추증(追贈), 성천(成川)의 학령서원(學翎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 박대화(朴大和)
약 력 ; 고려 때 대호군(大護軍)과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 박도상(朴道翔) ; 1728(영조 4) ∼ ?
약 력 ; 자는 난사(鸞斯), 필선(弼善) 윤동(胤東)의 손자, 징(徵)의 아들. 1750년(영조 26) 진사(進士)가 되고, 177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을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변려문 제술(製述)에 능하여 영조(英祖)가 문신들에게 시문을 짓게 할 때 여러 번 1등에 뽑혔다.
■ 박맹문(朴孟文) ; 1462년(세조 8) ~ ?
호는 호재(湖齋)이고, 두촌(杜村) 양무(楊茂)의 현손이며 계은(繼恩)의 아들이다. 성종 때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제수되자, 호남사림(湖南士林)들이 존경하였다. 청도(淸道) 신안(新安) 숭절사(崇節祠), 훈령서원(薰嶺書院)에 배향되었다.
■ 박명진(朴明鎭) ; 1903 (광무 7) ∼ 1958.
약 력 ; 치과 의사. 1930년 경성 치과전문학교를 졸업, 동교 조교가 되고, 1937년 조교수, 1943년 의학박사가 되고,1945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학장에 취임했다. 유언으로 사유재산 전부를 치과의학 협회에 기증하여 치과의학계의 발전에 공헌했다.
■ 박문경(朴文卿)
약 력 ; 조선 때 도순찰사(都巡察使)를 지냈다.
■ 박문경(朴文卿)
약 력 ; 조선(朝鮮) 때 도순찰사 (都巡察使)를 지냈다.
■ 박문오(朴文五)
약 력 ; 자는 대화(大化), 호는 성암(誠菴), 도정(道精)의 아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경학(經學) 연구에 전심하는 한편 서당을 지어 제자를 가르쳤다. 고종 때 관찰사 남정철(南廷哲)이 기자묘수호소(箕子墓守護所)를 설치하여 도내에서 학문과 덕망이 높은 인사를 뽑을 때 입직수호생(入直守護生)과 주학교수(州學敎授)로 임명되자 사퇴했다가 주위의 권유로 반 달 동안 근무했다. 관서(關西)에서 으뜸가는 학자라고 찬양받았다. 65세로 죽었다.
■ 박문유(朴文有)
약 력 ;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 전리좌랑(典理佐郞)을 거쳐 경주판관(慶州判官)을 지냈다.
■ 박문일(朴文一) ; 1822(순조 22) ∼ 1894(고종 31)
약 력 ; 자는 대수(大殊), 호는 징암(懲菴)·운재(雲齋)·운암(雲菴),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도정(道精)의 아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다. 도사(都事)·집의(執義)·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안도 태천(太川)에 은거, 학문을 강구하며 후진들을 교육했다.
■ 박미(朴楣)
약 력 ; 자(字)는 자첨(子詹), 호(號)는 존성재(存誠齋). 1458(세조 4) 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이르렀으며 그의 시문(詩文)이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전학 여지승람(輿地勝籃)을 편찬하였다.
■ 박병하(朴炳夏) ; 1847(헌종 13) ∼ 1910(융희 4)
약 력 ; 자는 문혁(文赫), 전북 고창(高敞)출신. 1910(융희 4) 한일합방이 되자 외국인의 노예가 되느니보다는 깨끗이 죽는 길을 택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으로 자결했다.
■ 박봉령(朴鳳齡)
약 력 ; 조선(朝鮮) 때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 박사경(朴思敬)
약 력 ; 고려 때 전법판서(典法判書) 겸 상장군(上將軍)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推城翊威功臣)에 책록되었다.
■ 박사동(朴師東)
약 력 ;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 박서(朴瑞) ; 1707(숙종 33) ∼ 1765(영조 41)
약 력 ; 자는 성응(聖應), 호는 주천(朱川), 판결사(判決事) 적손(迪孫)의 후손. 1746년(영조 22) 참봉(參奉)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경학(經學)·예학(禮學)·선불(仙佛)·복서(卜筮)·의약(醫藥)·천문(天文)·지리(地理)·재정(財政)·군사(軍事)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달했다.
■ 박서봉(朴瑞鳳)
약 력 ; 조선 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 박석원(朴錫元)
약 력 ; 고려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 박선(朴璿) ; 1668(현종 9) ∼ 1707(숙종 33)
약 력 ; 자는 성재, 호는 도와(陶窩), 성동(星東)의 아들. 1696년(숙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현감(縣監)·병조 정랑(兵曹正郞)·장령(掌令) 등을 역임했다. 인동(仁同)의 도완서원(陶浣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박성(朴性) ; 1549(명종 4) ∼ 1606(선조 39)
약 력 ; 자는 덕응(德凝), 호는 대암(大菴), 생원(生員) 사눌(思訥)의 아들. 정 구(鄭 逑)의 문인. 일찍이 배신(裵紳)에게 수학, 아버지가 죽은 후 과거(科擧)에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심, 최영경(崔永慶). 김 면(金 沔)·장현광(張顯光) 등과 사귀었으며, 정인홍(鄭仁弘)과도 친했으나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어 권세를 남용하므로 절교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종사,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때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막료로 종군,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大將)으로 활약,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후에 사포(司圃)가 되고, 이어 공조 좌랑(工曹佐郞)·안양 현감(安陽縣監)을 지낸후 사직, 후에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 박성묵(朴性默)
약 력 ; 호(號)는 양암(陽巖). 1895(고종 32) 경희백(慶希伯)과 함께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14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에 힘썼다.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공로훈장(大韓民國功勞勳章)이 수여되었다.
■ 박성석(朴星錫) ; 1650(효종 1) ∼ 1709(숙종 35)
약 력 ; 자는 여정(汝晶), 현감(縣監) 동주(東胄)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76년(숙종 2) 무과(武科)에 급제, 1680년(숙종 6) 비변사(備邊司)의 낭관(郎官)에 보직되고, 1682년 창성방어사(昌城防禦使), 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한때 벼슬을 물러났다가 통진현감(通津縣監)을 거쳐 제주목사(濟州牧使)에 부임했다. 1691년 유배된 장희재(張希載)를 체포하러 온 의금부(義禁府) 관헌의 비행을 벌하다가 오히려 무고를 받아 파직, 1703년 그 무죄가 드러나 복직, 1709년 전라도 수군절도사로 기용되었다.
■ 박성원(朴聖源) ; 1697(숙종 23) ∼ 1757(영조 33)
약 력 ; 자는 사수(士洙), 호는 겸재(謙齋). 광암(廣巖), 시호는 문헌(文憲), 충원(忠元)의 6대손. 이재(李縡)의 문인. 1721년(경종 1) 생원(生員)이 되고, 1728년(영조 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간원(司諫院)·사헌부(司憲府)의 벼슬을 역임, 1744년 지평(持平)으로서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1746년 석방되었다. 세손강서원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世孫: 정조)을 보도(輔導)했으며, 참판(參判)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
■ 박성원(朴性源) ; 1697(숙종 23) ∼ 1767(영조43)
약 력 ; 자는 사준(士濬), 호는 포암(圃菴). 진사(進士)로서 예학(禮學)에 뛰어나고 음운학(音韻學)에 밝았다.
■ 박성진(朴成進)
약 력 ; 밀성군(密城君) 충헌공(忠憲公) 척(陟)의 아들로 정용장군(精勇將軍)이 되어 일본정벌에 나섰다.
■ 박세균(朴世均)
약 력 ; 호(號)는 행산(杏山), 시호(諡號)는 충정(忠靖), 양효공(良孝公) 간(幹)의 둘째아들. 고려조에서 평장사(平章事)로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전문형(典文衡)을 역임하였다.
■ 박세중(朴世重)
약 력 ; 자는 군극(君極), 호는 무은(霧隱). 궁마(弓馬)에 능하여 무과(武科)에 급제,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고, 1624년(인조 2)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막하에서 이 괄(李 适)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운 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승진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의병(義兵)을 일으켰으나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이를 해산, 사직하고 종신 출사하지 않았다.
■ 박세증(朴世拯) ; 1653(효종 4) ∼ 1727(영조 3)
약 력 ; 자는 제경(濟卿), 호는 호계(虎溪),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정린(鄭麟)의 아들. 송시열(宋時烈)과 친척간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11년(숙종 37) 순무사(巡撫使) 이만성(李晩成)의 천거로 이듬해 현릉참봉(顯陵參奉)이 되고, 뒤에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에 이르렀으나, 1721년(경종 1)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老論) 4대신이 귀양가고 정국이 바뀌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725년(영조 1) 아들 필정(弼正)의 시종(侍從)의 공으로 오위장(五衛將)이 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박세화(朴世和) ; 1834(순조 34) ∼ 1910(융희 4)
약 력 ; 자는 연길(年吉), 호는 의당(毅堂). 어릴 때 고향인 함남 고원(高原)에게 유학을 배웠으며 문명(文名)과 효도로 이름이 높았다. 벼슬은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냈으나 1884년(고종 21) 사직하고,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수도(修道),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되자 분기하여 도사(都事) 윤응선(尹膺善)과 함께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석방되어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 박소영(朴召榮)
약 력 ; 자(字)는 길보(吉甫). 1485년(성종 16) 문과에 급제한 후 황해도감사(黃海道監司)를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러 연산군(燕山君)때 유배되었다.
■ 박수길(朴秀吉)
약 력 ; 고려 때 검교대호군(檢校大護軍)에 이르렀다.
■ 박수일(朴遂一) ; 1552(명종 7) ∼ 1597(선조 30 )
약 력 ; 자는 순백(純伯), 호는 건재(健齋)·명경(明鏡), 운(雲)의 손자. 이 황(李 滉)과 경의(經義)를 토론하였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경임(盧景任)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전사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 박수춘(朴壽春) ; 1572(선조 5) ∼ 1652(효종 3 )
약 력 ; 자는 경로(景老), 호는 국담(菊潭). 제신(齊愼)의 아들. 대구(大邱) 출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의병(義兵)을 모집,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싸웠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도 의병을 일으켰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입산하여 숭정처사(崇禎處士)를 자처, 학문(學問)을 닦았다. 앞서 정 구(鄭 逑)·장현광(張顯光) 등과 태극설(太極說) 등을 토론,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했다. 호조 참의(戶曺參議)에 추증(追贈), 대구의 남강서원(南岡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박수홍(朴守弘) ; 1588(선조 21) ∼ 1644(인조 22)
약 력 ; 자는 언유(彦裕).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이어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직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때 강화(江華)로 왕을 호종(扈從)했고, 돌아와 금구현령(金溝縣令)으로 나가서 전쟁의 피해 복구에 힘썼으며, 후에 예조 참의(禮曹參議)·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지평(持平)·장령(掌令)·온성부사(穩城府使)를 역임하고 다시 병조 참지(兵曹參知)·좌부승지(左副承旨)·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낸 후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 임기를 마치고 상주(尙州)에서 객사(客死)했다.
■ 박순(朴純)
약 력 ; 조선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 박숭원(朴崇元) ; 1532(중종 27) ∼ 1592(선조 25)
약 력 ; 자는 상화(尙和), 시호(諡號)는 충정(忠靖), 군수(郡守) 난(蘭)의 아들. 1564년(명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등용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수찬(修撰)·교리(校理)·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이어 우부승지(右副承旨)·판결사(判決事)를 지내고 다시 외직에 나가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충청도 관찰사·도승지(都承旨)를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왕을 호종(扈從),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어 병사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밀천군(密川君)에 추봉(追封)되었다.
■ 박승건(朴承健) ; 1609(광해군 1) ∼ 1667(현종 8)
약 력 ; 자는 자이(子以), 봉례(奉禮) 안행(安行)의 아들. 1630(인조 8) 진사(進士)가 되고, 1650년(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 이어 전적(典籍)·예조 좌랑(禮曹佐郞)·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을 거쳐 1652년(효종 3) 정언(正言)·사서(司書)·직강(直講)·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형조 판서 허 적(許 積)을 논핵했으며, 1661년(현종 2) 지평(持平)·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다. 1663년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올라 정조겸사은사(正朝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들어가다가 병으로 되돌아왔으며,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1664년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재직중 정부미를 방출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하고 민역(民役)에 충당한 사실로 가자(加資)되었다.
■ 박승종(朴承宗) ; 1562(명종 17) ∼ 1633(인조 11)
약 력 ; 자는 효백(孝伯), 호는 퇴우당(退憂堂), 시호(諡號)는 숙민(肅愍), 판서 계현(啓賢)의 손자. 1585년(선조 18)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89년 봉교(奉敎), 이어 지제교(知製敎)·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내고, 1600년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갔다. 1604년 부제학(副提學), 1607년(선조 40) 병조 판서, 1610년(광해군 2) 형조 판서, 이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내고, 1618년 우의정(右議政) 겸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이어 좌의정,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앞서 1612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윤 인·이인경(李寅卿) 일당이 경운궁(慶運宮)에 난입,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이들의 난동을 저지했고,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극력 반대했다.
■ 박승휘(朴承輝) ; 1802(순조 2) ∼ ?
약 력 ; 자는 광오(光五), 호는 사고(社皐),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남회(南會)의 아들. 진사(進士)로 1829년(순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내외직을 역임하고, 1848년(헌종 14) 사성(司成)으로 교정낭청(校正郎廳)이 되어 삼조보감(三朝寶鑑)의 편찬에 참여, 1855년(철종 6) 대사간, 1864년(고종 1)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 박승휴(朴承休) ; 1606(선조 39) ∼ 1659(효종 10)
약 력 ; 자는 자미(子美), 봉례(奉禮) 안행(安行)의 아들. 성균관 유생(儒生)으로서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하였다. 후에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을 거쳐 1650년(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전적(典籍)·호조 좌랑(戶曹佐郞)·병조 좌랑·지평(持平)·병조 정랑(兵曹正郞)·황주판관(黃州判官)·장령(掌令) 등을 거쳐 1655년 경상좌우도추쇄어사(慶尙左右道推刷御史)·사간(司諫)을 역임 후 홍주목사(洪州牧使)에 이르렀다.
■ 박시생(朴始生)
약 력 ;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 박시주(朴施做)
약 력 ; 고려(高麗)에서 보문각시제(寶文閣侍制)를 지내고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중국(中國)에 다녀와서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 박신규(朴信圭) ; 1631(인조 9) ∼ 1687(숙종 13)
약 력 ; 자는 봉경(奉卿), 호는 죽촌(竹村), 시호(諡號)는 청숙(淸肅),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계영(啓榮)의 아들. 1652년(효종 3) 진사(進士), 1660년(현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전주판관(全州判官)을 지낼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임기가 끝난 뒤 백성들의 유임 상소로 재임(再任)했다. 후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가 역시 선정,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1680년(숙종 6) 형조 판서에 특진, 이듬해 아들 성의(性義)가 범한 죄로 안변부사(安邊府使)에 좌천되었다가 다시 승진하여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서예(書藝)로 이름이 높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 박심문(朴審問)
약 력 ;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재(淸齋), 시호는 충정(忠貞), 강생의 아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사온서직장(司 署直長)이 되고, 1436년(세종 18)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기주관(記注官)으로 있다가 함길도절도사(咸吉道節度使) 김종서(金宗瑞)가 6진(鎭)을 개척할 때 그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야인(野人)에 대한 안무책(安撫策)을 건의했다. 1447년 평안도판관(平安道判官), 1448년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종사관(從事官) 등을 역임,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가 살해되자 불만을 품고 집에 있으면서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과 왕래하며 단종의 복위를 모의했다. 1456년(세조 2)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義州)에 이르러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했다.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되고, 숙모전(肅慕殿)에 제향(祭享)되었다.
■ 박안제(朴安悌) ; 1590(선조 23) ∼ 1663(현종 4)
약 력 ; 자는 계순(季順), 형조 판서 정현(鼎賢)의 아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여 성균관(成均館)의 유생들을 이끌고 이에 항소(抗訴)했다. 162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이 되었으나 이이첨의 저지로 3년이나 부임하지 못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해미 현감(海美縣監), 1627년 지평(持平), 1631년 장령(掌令), 이듬해 인조의 사친추숭(私親追崇)을 반대하고 목천현감(木川縣監)에 좌천되었다. 수찬(修撰)에 이어 사헌부(司憲府)의벼슬을 지내고 1650년(효종 1) 다시 수찬, 이어 종성부사(鍾城府使), 1652년 승지(承旨)·판결사(判決事), 뒤에충주 목사(忠州牧使), 1660년(현종 1)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 박안현(朴顔賢)
약 력 ;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 박양신(朴良臣)
약 력 ; 고려 때 소부소감(少府少監)을 지냈다.
■ 박양언(朴良彦)
약 력 ; 고려 때 봉익대부밀직부사(奉翊大夫密直副使) 등을 역임.
■ 박언부(朴彦孚)
약 력 ; 고려(高麗) 문종(文宗)때 문과에 급제하여 최충(崔沖)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낸 후 문하시중(門下侍中) 도평의사(都評議事)를 역임하였고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다.
■ 박언상(朴彦祥)
약 력 ; 일명 언상(彦尙). 고려 때 도평의사(都評議事) 등을 지냈다.
■ 박언인(朴彦仁)
약 력 ; 고려 때 벽상삼중대광평장사(壁上三重大匡平章事)·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등을 역임하고 밀직군(密直君)에 봉해졌다.
■ 박연(朴堧)
약 력 ; 초명은 연(然),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삼사좌윤(三司左尹) 천석(天錫)의 아들. 영동(永同) 출신. 1405년(태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찬집(樂譜撰集)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1427년(세종 9) 편경(編磬) 12매를 제작, 자작(自作)한 12율관(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音律)로 연주케 했고, 3년 후 다시 미비한 율관을 수정했다. 또한 조정의 조회(朝會)때 사용하던 향악(鄕樂)을 폐하고 아악(雅樂)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 했다. 1431년 남급(南汲). 정양(鄭穰)과 회례(會禮)에도 아악을 채택케 하고, 조회와 회례에서 종전까지 기생이 추던 춤도 무동(舞童)으로 대치하여 문무이무(文武二舞)의 작변지절(作變之節)과 속부남악지기(俗部男樂之伎)를 추게 하여 궁정 음악을 전박적으로 개혁했다. 1433년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되어 아악에 종사, 공조참의(工曹參議)·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냈다. 144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仁壽府尹)·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랐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때 아들 계우(季愚)가 처형되었으나 그는 3조(三朝)에 걸친 원로로서 죽음을 면하고 파직, 고향에 내려갔다. 특히 적(笛)의 명연주가였으며 조선 초기 미비한 궁정음악을 정비하여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3대 악성으로 불리어진다. 영도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박열(朴說) ; 1464(세조 10) ∼ 1517(중종 12)
약 력 ; 자는 열지(說之), 시호(諡號)는 이정(夷靖), 사옹원첨정(司饔院僉正) 사동(思東)의 아들. 1483년(성종 14) 생원(生員)이 되고, 148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서 감찰(監察)·수찬(修撰) 등을 거쳐 1497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공조·예조·이조의 판서, 대사헌·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한 후 1516년(중종 11)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 박영(朴英) ; 1471(성종 2) ∼ 1540(중종 35)
약 력 ;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 시호(諡號)는 문목(文穆),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외손자. 무예에 뛰어났다. 1491년(성종 22)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하고, 이듬해 돌아와서 겸사복(兼司僕)이 되고 이어 무과(武科)의 급제후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1494년 성종이 별세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정붕(鄭鵬)의 문하에서 특히 대학(大學)을 공부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후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蒼遠)에 부임, 뒤에 강계부사(江界府使) 의주목사(義州牧使) 동부승지(同副承旨)·내의원부제조(內醫院副提調) 등을 역임했다. 151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옴으로써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모면, 이듬해 경상도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의술(醫術)에 능했다. 황간(黃澗)의 송계서원(松溪書院)과 선산(善山)의 금오서원(今烏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박영균(朴永均)
약 력 ; 시호(諡號)는 문헌(文憲). 이부상서(吏部尙書) 대화(大和)의 손자(孫子). 고려조(高麗朝)에서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와 3재상(三宰相)을 역임하였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 박영신(朴榮臣) ; 1578(선조 11) ∼ 1624(인조 2)
약 력 ; 자는 인보(仁輔),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병조 참판(兵曹參判) 종남(宗男)의 아들. 1605년(선조 38)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웅천 현감(熊川縣監)이 되고, 1614년(광해군 6)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는 것을 반대하여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오위장(五衛將)이 되고, 경원부사(慶源府使)를 거쳐 풍천부사(豊川府使)가 되었으나 이듬해 이 괄(李 适)의 난 때 포로가 되어 끝내 그들에게 협력을 하지 않아서 참살되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 금천(金川)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 박영정(朴永禎)
약 력 ; 독포사(督捕使) 난의 아들. 고려 때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 박영철(朴永哲)
약 력 ; 호(號)는 남계(藍溪).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 후 의병을 모아 항일운동에 힘쓰다 체포되어 일본까지 압송되었다. 그 후 일본군에 대항한 시(詩)를 지어 전국에 유포하다 구속되어 모진 고문 후 석방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 박용대(朴容大) ; 1849(헌종 15) ∼ ?
약 력 ; 자는 성기(聖器), 이조 판서 승휘(承輝)의 손자, 공조 참의(工曹參議) 세병의 아들. 한양 출신. 1865년(고종 2) 진사(進士)가 되고, 1868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내외 벼슬을 거쳐 1894년에 예조참판(禮曹參判)·대사헌, 이어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관세사장(管稅司長)·장례원경(掌禮院卿) 등을 지냈다. 1900년(광무 4) 충청남도 관찰사, 1903년 태의원경(太醫院卿)·사직서제조(社稷署提調), 1905년 법부대신(法部大臣), 1906년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을 역임,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정부에 의해 남작(男爵)이 되었다.
■ 박욱(朴郁)
약 력 ; 경명왕(景明王)의 손자(孫子)이며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의 아들. 고려(高麗) 태조(太祖)때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을 지냈다.
■ 박운(朴雲) ; 1493(성종 24) ∼ 1562(명종 17)
약 력 ; 자는 택지(澤之), 호는 용암(龍巖), 종원(宗元)의 아들. 선산(善山)출신. 1519년(중종 14) 진사(進士)가 되고, 이때 서울의 박영(朴英)을 찾아가 학문의 방법을 물었다. 만년에는 이 황(李 滉)을 찾아가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서신으로써 문의, 저서인 격몽편(擊蒙編)·자양심학지론(紫陽心學至論) 등을 보내어 정정(訂正)을 구했다. 벼슬은 명종때 부사용(副司勇)을 지냈다. 죽은 뒤 이 황은 갈문(碣文)을 지어 그 학행(學行)을 찬양했다. 선산(善山)의 월암서원(月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고, 효행으로써 선조(宣祖)때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 박원(朴原)
약 력 ; 정용장군(精勇將軍)이 되어 일본정벌에 나섰던 박성진(朴成進)의 아들로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 박원광(朴元光)
약 력 ;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재상(宰相), 중서령(中書令) 등을 지냈고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여 서경 (西京)을 함락하자, 안유(安裕),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격퇴시켰으며 난을 평정한 공으로 보리공신보숭록대부(輔理功臣輔崇祿大夫)에 추증되었고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다.
■ 박위
약 력 ; 우달적(于達赤)으로 등용되었다가 김해부사(金海府使)에 올라 왜적을 격퇴,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回軍), 최영(崔瑩)을 몰아낸 후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전함 1백여 척을 이끌고 쓰시마도(對馬島)를 거쳐 적선 3백여 척을 불태워 크게 이겼다. 후에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을 추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올라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 공신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김종연(金宗衍)의 옥사(獄事)에 연구, 풍주(豊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되어 회군(回軍)이 공신이 되고, 조선초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양광도절도사(楊廣道節度使)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때마침 밀성(密城)의 소경 이흥무(李興茂)의 옥사로 구금되어 대역죄로 논의되었으나 태조의 후의로 석방,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나갔다가 사헌부(司憲府)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 박육경(朴育慶)
약 력 ; 병부상서(兵部尙書) 공필(公弼)의 맏아들. 고려 인종(仁宗)때 대장군(大將軍)과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도적 조광(粗鑛) 등을 쳐서 평정하고 왕에게 상소하여 양현고(養賢庫)를 세워 많은 선비를 기르게 하였다.
■ 박육화(朴育和)
약 력 ; 고려 의종(毅宗)때 급사중(給事中)으로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와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내고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 역임하였다.
■ 박윤공(朴允恭)
약 력 ; 고려 때 내시중(內侍中)을 역임하였다.
■ 박윤묵(朴允默) ; 1771(영조 47) ∼ 1849(헌종 15)
약 력 ; 자는 사집(士執), 호는 존재(存齋), 홍자(弘梓)의 아들. 정이조(丁彛祚)의 문인. 정조와 영의정 김조순(金祖淳)의 신임을 받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1835년(헌종 1) 평신진첨절제사(平薪鎭僉節制使)로서 선치(善治)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서예(書藝)는 왕희지(王羲之) 조맹부의 필법을 이어 받았다.
■ 박윤문(朴允文)
약 력 ; 충헌공 척의 증손이며, 밀성군(密城君) 원(原)의 아들로 벼슬이 삼중대광 보문각 대제학(三重大匡寶文閣大提學)에 이름.
■ 박율(朴栗)
약 력 ; 조선(朝鮮)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 박융(朴融)
약 력 ; 자는 유명(惟明), 호는 우당(憂堂), 익(翊)의 아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급제, 1411년 정언(正言)을 거쳐 전한(典翰)이 되었다. 1423년(세종 5)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강원도경차관(江原道敬差官)을 지낸 후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 박은춘(朴殷春) ; ? ∼ 1598(선조 31)
약 력 ; 자는 명화(命和), 호는 동계(東溪), 참판(參判) 눌생(訥生)의 후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들어가 당포(唐浦)해전에 승리한 후 선봉장이 되어 적장을 사살하고 연락이 끊어진 진주성(晋州城)에 단신으로 가서 정세를 파악해 오는 등 맹장(猛將)으로서 이름을 떨치고, 인동부사(仁同府使)에 임명되었다. 1598년 노량(露梁)해전에서 화살이 떨어져 칼로 적을 무찌르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호조 참의(戶曺參議)에 추증(追贈), 흥양(興陽)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
■ 박을재(朴乙材)
약 력 ; 고려(高麗)때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냈다.
■ 박응수(朴應秀) ; ? ∼ 1598(선조 31)
약 력 ; 자는 한서(漢瑞), 호는 매헌(梅軒), 은춘(殷春)의 아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義州)에 호종(扈從), 중부장(中部將)이 되고, 환도 후 판관(判官)이 되었다. 1598년 아버지가 전사하자 출정을 자청, 선조(宣祖)로부터 말과 활을 하사받고 노량(露梁)에 가서 이순신(李舜臣)과 회견 후 정기수(鄭麒壽)·이 완(李 莞)과 함께 적진에 돌입하여 적을 무찌르다가 전사했다.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 흥양(興陽)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 박의(朴義) ; 1600(선조 33) ∼ 1653(효종 4)
약 력 ; 자는 충국(忠國). 1624년(인조 2) 무과(武科)에 급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룡(金俊龍)을 따라 용인(龍仁)의 광교산(光敎山)에 진을 치고 크게 적을 무찔렀다. 그 공으로 평안도 권관(權管)이 되었다.
■ 박의(朴義)
약 력 ; 고려 충렬왕의 총신(寵臣), 매와 개(犬)를 잘 다루어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장군(將軍)에 이르렀다. 꼬리의 깃이 14개나 달린 진귀한 새매를 원나라 황제에게 바치고 돌아와 황제의 명으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고 자칭, 뒤에 공주의 뜻에 거슬려 섬으로 유배, 가산이 몰수되었다. 곧 풀려나와 우부승지(右副承旨)좌복야(左僕射)·부지밀직(副知密直)을 역임하고 충선왕이 즉위하자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더해지고 밀양군(密陽君)에 봉해졌다.
■ 박의신(朴義臣)
약 력 ;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언부(彦孚)의 차남. 문장(文章)에 뛰어났고, 고려 인종(仁宗)때 과거에 올라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 박의영(朴義榮) ; 1456(세조 2) ∼ 1519(중종 14)
약 력 ; 자는 거화(去華), 예조 참의(禮曹參議) 미(楣)의 아들. 1474년(성종 5) 진사(進士)가 되고, 1492년 친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 호조·공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헌납(獻納)·집의(執義) 등의 역임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세좌(李世佐)의 죄를 논(論)하지 않았다 하여 문의(文義)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으며, 뒤에 풀려 나와 호조·예조·병조·공조의 참의(參議)를 지냈다.
■ 박의중(朴宜中)
약 력 ; 초명(初名)은 실(實), 자는 자허(子虛), 호는 정재(貞齋), 판도총랑(版圖摠郞) 인기(仁杞)의 아들. 공민왕때 문과(文科)에 장원하고, 전의직장(典儀直長)을 거쳐 헌납(獻納)·사예(司藝)가 되었다가 우왕때 문하사인(門下舍人)·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대사성·밀직제학(密直提學)을지냈다. 1388년(우왕 14) 사신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철령위(鐵嶺衛)의 철폐를 교섭, 사명을 성취하고 돌아와 창왕때 공신이 되었다. 공양왕때 서운관(書雲觀)에서 한양천도(漢陽遷都)를 상소하자 음양설(陰陽說)의 허황함을 역설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뒤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겸 대사성이 되고, 1392년(태조 1) 조 준(趙 浚)·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 뒤에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문장이 우아했다.
■ 박이서
약 력 ; 초명은 문서, 자는 서오, 호는 비천(泌川)·동고(東皐),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장령(掌令) 율(栗)의 아들. 1588년(선조 2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이 되고, 주서(注書)로서 사관(史官)을 겸했고, 1592년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조(分朝)에 배종(陪從), 순찰사종사관(巡察使從事官)이 되어 황해도 지방의 병량을담당했다. 1595년 정언(正言), 이듬해 황해도 독운어사(督運御史), 돌아와 다시 정언, 이어 교리(校理)가 되고, 1599년 이이첨(李爾瞻)을 논핵하다 파직되어 여강(驪江)에 은거했다. 1607년 대사령(大赦令)으로 복직,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에 승진, 체부종사(體府從事)가 되어 황해도를 순찰하였고, 광해군 초기에 사간(司諫)으로 등용, 1611년(광해군 3) 대사간, 이어 병조참지(兵曹參知) 충청도관찰사·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담양부사(潭陽府使)·승지(承旨)·이조 참판(吏曹參判)·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고,1613년(광해군 5) 폐모론(廢母論)이 대두된 이후 여러 차례 대북파를 탄핵했다가 무고를 받아 삭직(削職)되었다. 뒤에 서반직(西班職)으로 복직,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나가서 전라도 관찰사 이창준(李昌俊)의 탐학 행위에 실망하고 사직했다. 다시 복직되어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해상에서 풍랑으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 박익(朴翊)
약 력 ; 자(字)는 태시(太始), 호(號)는 송은(松隱).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등과(登科)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중서령(中書令) 등을 지냈다.
■ 박인복(朴麟福)
약 력 ; 후령(厚齡)의 아들. 무예로 천거를 받아 사복시(司僕寺)에 복직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 아버지가 전사하자 의병을 모아 복수장(復讐將)으로 당항포(唐項浦) 싸움에 공을 세운 후,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가 되었다. 1595년 판관(判官)으로 이순신(李舜臣) 휘하로 종군, 명량(鳴梁)해전에서 전사했다.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추증(追贈), 진도(珍島)의 효충사(孝忠詞)에 제향(祭享).
■ 박일중(朴日重)
약 력 ;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책록(策錄) 되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 박자응(朴自凝)
약 력 ; 자(字)는 정길(正吉), 호(號)는 읍백당(相白堂). 1613년(광해군 5) 문과에 급제했으나 폐모사건(廢母事件)이 일어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다가 그 후에 영광군수(靈光郡守)·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다.
■ 박자흥(朴自興) ; 1518(선조 14) ∼ 1623(인조 1)
약 력 ; 초명은 흥립(興立), 자는 인길(仁吉), 영의정 승종(承宗)의 아들.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딸이 세자빈이 되자 설서(說書)에서 전적(典籍)으로 승진하고 참판(參判)에 이르러 이이첨(李爾瞻)의 딸과 재혼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경기도 관찰사로 있다가 아버지와 함께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 박절문(朴切問)
약 력 ; 조선(朝鮮)때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밀산군(密山君)에 봉(封)해졌다.
■ 박정길(朴鼎吉) ; ? ∼ 1623(인조 1 )
약 력 ; 자는 양이(養而), 부정(副正) 유경(裕慶)의 손자. 1601년(선조 3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06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다가 이어 사인(舍人)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616년(광해군 8)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1618년 우부승지(右副承旨)로서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622년 문안사(問安使)로서 명나라의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을 영접, 이어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 박정룡(朴廷龍)
약 력 ; 자(字)는 자운(子雲), 호(號)는 덕곡(德谷). 조선 때 감찰판관(監察判官)을 지냈다.
■ 박정현(朴鼎賢) ; ? ∼ 1637(인조 15)
약 력 ; 자는 중로(重老), 호는 의곡(義谷)·응천(應川), 호원(好元)의 아들. 이산해(李山海)의 문인. 1588년(선조 2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어 임진(壬辰)·정유(丁酉)의 난을 전후하여 사관(史官)을 지냈다. 이어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1601년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고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6년(광해군 8) 강원도 관찰사, 2년 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 이 해 사은겸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공조 참판(工曺參判)이 되었다. 1625년(인조 3)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1623년 형조 판서·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 박제가(朴齊家) ; 1750(영조 26) ∼ ?
약 력 ;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위항도인(葦杭道人), 승지 평의 서자.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實學)을 연구, 이덕무(李德懋)·류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 실학자들과 교유하며 1776년 합작(合作)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우리나라 시문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 2) 사은사(謝恩使)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 등 청나라 학자들에게 새 학문을 배우고 돌아와 북학의(北學議)내외편을 저숙,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내편(內篇)에서는 실생활에 있어서의 기구와 시설의 개선을 다루고, 외편(外篇)에서는 정치·사회제도의 전박적인 모순점을 지적하여 서정(庶政)의 개혁 방안을 서술했다. 이듬해 정조(正祖)의 특명으로 규장각검서관(奎章閣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했고, 1790년 진하사(進賀使) 황인점(黃仁點)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군기시정(軍器寺正)이 되고, 다시 동지사(冬至使)를 수행하여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4년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 오위장(五衛將)에 오르고, 이듬해 영평현감(永平縣監)으로 나갔다. 1798년 왕에게 바치기 위해 북학의(北學議)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했고, 1801년(순조 1) 사은사를 따라 네 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사건(兇書事件) 주모자로 지목된 사돈 윤가기(尹可基) 사건에 연좌, 종성(鍾城)에 유배, 1805년 풀려나왔다.
■ 박종남(朴宗男) ; ? ∼ 1601(선조 34)
약 력 ; 호(號)는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583년(선조 16) 니탕개(尼湯介)를 칠 때 공을 세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 이듬해 부령부사(富寧府使), 이어서 길주(吉州)·온성(穩城)의 부사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춘천부방어사(春川府防禦使)로서 적의 북진을 막았고, 분조(分朝)의 동부승지(同副承旨)·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이듬해 진주목사(晋州牧使)가 되었으나 관찰사와의 의견 충돌로 파면, 뒤에 이순신(李舜臣)에 의해 주사조방장(舟使助防將)이 되어 연해(沿海) 5읍(邑)의 군병(軍兵)을 장악, 한산(閑山)·장문(場門)·영등포(永登浦)·견내량(見乃梁) 등의 해전(海戰)에서 공을 세웠다. 후에 상주(尙州)·광주(廣州)의 목사(牧使)를 거쳐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전임했다.
■ 박좌(朴좌)
약 력 ; 조선 때 판서(判書)를 지냈다.
■ 박중미(朴中美)
약 력 ; 고려(高麗)충목왕(忠穆王)때 문과 급제 후 중서령(中書令) 등을 역임하였고 공민왕(恭愍王)때 안 유(安 裕)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홍건적(紅巾賊) 난을 평정한 공으로 보리공신(輔理功臣)에 오르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가자(加資),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다.
■ 박중빈(朴重彬) ; 1891(고종 28) ∼ 1943
약 력 ; 자는 소태산(少太山), 회경(晦傾)의 아들. 전남 영광(靈光)출신. 어려서 한학을 수학, 9세에 우주의 자연현상(自然現象)에 깊은 의심을 품고 수도(修道), 1926년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각자(覺者)가 되었다. 3·1운동 전후로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를 설치, 일원(一圓)을 최고종지(最高宗旨)로 하고 이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케하고 대체(大諦)를 밝혔다. 1943년 대법문(大法門)을 강설하고 죽었다.
■ 박중손(朴仲孫)
약 력 ; 자는 경윤(慶胤), 호는 묵재(默齋). 백당(栢堂), 시호(諡號)는 공효(恭孝), 찬성사(贊成事) 강생(剛生)의 손자.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가 되고, 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세종 말에 사인(舍人)·집의(執義)·지병조사(知兵曹事)·동부승지(同副承旨)·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을 도와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이 되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 대사헌·공조·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올랐고, 밀산군(密山君)에 개봉(開封)되었다.
■ 박증영(朴增榮) ; 1466(세조 12) ∼ 1494(성종 25)
약 력 ; 자는 희인(希仁), 호는 눌재(訥齋), 예조 참의(禮曹參議) 미(楣)의 아들. 1480년(성종 1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8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저작(著作)을 지내고, 148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청환직(淸宦職)을 두루 역임한 후 1490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이듬해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이 되었다. 이해 수헌납(守獻納)을 거쳐 뒤에 교리(校理)로 죽었다. 청주(淸州)의 국계사(菊溪祠)에 제향(祭享)되었다.
■ 박증휘(朴增輝)
약 력 ; 조선 때 사간(司諫)을 지냈다.
■ 박지병(朴之屛) ; 1601(선조 34) ∼ 1684(숙종 10)
약 력 ; 자는 여장(汝障), 풍천부사(豊川府使) 영신(榮臣)의 아들. 1624년(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 때 아버지가 풍천성(豊川城)을 사수(死守)하다가 적장 이수백(李守白)에게 살해되었다. 뒤에 이수백은 형세가 불리하자 이괄의 목을 베어 투항,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었으나 복수가 두려워 여주(驪州)에 수년간 숨어 있었다. 그는 동생 지원(之垣)과 함께 오랫동안 복수할 기회를 엿보다가 이수백을 타살, 그 목을 들고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대죄(待罪)했다. 이를 기특히 여겼으나 후폐(後弊)를 우려한 인조에 의해서 사형 명령이 내려졌으나 대신(大臣) 윤 방(尹 昉) 오윤겸(吳允謙) 김 유 등의 구명(救命)으로 의성(擬聲)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정릉참봉(靖陵參奉)에 이어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에 승진했으나 곧 사직하고 귀향했으며, 80세가 되어 노인직(老人職)으로 용양위부호군에 올랐다.
■ 박지생(朴祗生) ; 고려말 ∼ 조선초
전서공(典書公) 침의 첫째 아드님으로 杆城兵馬使(간성 병마사)
從典書公西渡共守罔僕之義
配(배) 興陽李氏(흥양이씨)
■ 박지수(朴知秀)
약 력 ;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호군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 박지화(朴枝華) ; 1513 (중종 8) ∼ 1592 (선조 25).
약 력 ; 조선의 학자. 자는 군실(君實), 호는 수암(守菴),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유교, 도교, 불교에 모두 조예가 깊었고 특히 기수학(氣數學)에 뛰어나 명종 때 으뜸가는 학자로 꼽혔다.일찍이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그 후 현감(縣監)을 지냈을 뿐이었다.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친구 정 굉(鄭 宏)과 함께 백운산(白雲山)에 피난했다가 왜병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는 두보(杜甫)의 오언율(五言律) 1수를 산골짝 나뭇가지에다 써 붙이고 냇물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시문과 글씨에 모두 능했다. 청안(淸安)의 귀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
■ 박직신(朴直臣)
약 력 ; 고려(高麗)때 문림랑(文林郞)에 올랐다.
■ 박진(朴晋)
약 력 ; 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의열(毅烈), 인수(麟壽)의 아들. 1589년(선조 22) 심수경(沈守慶)의 천거로 벼슬에 등용,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592년(선조 25) 밀양부사(密陽府使)가 되었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마절도사 이 각(李 珏)과 함께 소산(蘇山)을 지키다가 패하여 성으로 돌아왔다가 적이 밀양까지 쳐들어오자 성에 불을 지르고 후퇴했다. 이어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가 되어 수백명의 병사를 모아 영천(永川)의 적을 야습하여 수천명을 살해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어 안강(安康)에서 여러 장군과 회동, 16읍(邑)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해 8월 경주성(慶州城)에 육박, 적을 공격하려다가 배후에서 나타난 왜군의 기습으로 패배, 병사 5백여명을 잃고 한달 뒤 다시 병사를 모아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쏘아 경주성을 탈환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황해도 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黃州牧使)를 거쳐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 박진원(朴震元)
약 력 ; 조선(朝鮮)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 박찬행(朴讚行)
약 력 ; 참지정사(參知政事) 영정(永禎)의 증손(曾孫).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검교태부(檢校太傅)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하였다 .
■ 박척(朴陟)
약 력 ; 고려에서 상장군(上將軍)을 지내고 충선왕(忠宣王)때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 박천익(朴天翊)
약 력 ;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 박추(朴杻)
약 력 ; 조선(朝鮮) 때 부평 부사(富平府使)를 지냈다.
■ 박추(朴추)
약 력 ; 조선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 박춘(朴春)
약 력 ; 초명은 춘(椿), 정언(正言) 상례(尙禮)의 아들.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 직제학(直提學)과 판밀직사(判密直使)를 지냈다.
■ 박춘성
약 력 ;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추증되었고 밀양군(密陽君)에 봉해졌다.
■ 박춘재(朴春載)
약 력 ; 어려서부터 소리를 좋아하여 명창(名唱)이 되었다. 1900년(광무 4) 궁내부가무별감(宮內府歌舞別監)이 되었다.
■ 박충원(朴忠元) ; 1507(중종 2) ∼ 1581(선조 14)
약 력 ; 자는 중초(仲初), 호는 낙촌(駱村). 정관재(靜觀齋), 시호(諡號)는 문경(文景), 별좌(別坐) 조(藻)의 아들. 1528년(중종 23) 생원(生員)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정자(丁字)를 거쳐 1536년 교리(校理)로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영월군수(寧越郡守)와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을 거쳐 좌통례(左通禮)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성천부사(成川副使)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550년(명종 5) 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성을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 1553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66년 이 황(李 滉)의 뒤를 이어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569년(선조 2)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보직되자 김안로의 일파였다는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사직, 1571년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가 신진사류(新進士類)에 의해 훈구(勳舊)의 간당(奸黨)으로 규탄받고 해직당했다. 그 후 재등용되어 1576년 이조 판서·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내고 밀원군(密原君)에 봉해졌다.
■ 박치화(朴致和) ; 1680(숙종 6) ∼ 1764(영조 40)
약 력 ; 초명은 치원(致遠). 자는 사이(士邇), 호는 설계(雪溪)·읍건재(泣愆齋) 손재(巽齋), 감역(監役) 수기(守기)의 아들. 1708년(숙종 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장령(掌令) 등 청요직(淸要職)을 지내고, 1721년(경종 1) 노론(老論)으로서 왕세제(王世弟: 영조)의 대리청정(代理廳政)을 주장하다가 소론(少論)의 반대로 실패,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이 실각하자 이듬해 고성(固城)에 유배, 1754년(영조 30) 풀려나와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보직, 1756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 박침
약 력 ;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文科)에 급제 전의판사(典儀判事)를 지냈으며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이 기울자 71현(賢)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세상을 개탄하며 우국의 세월을 보냈다. 뒤에 호조 판서(戶曺判書)에 추증되었다.
■ 박태동(朴台東)
약 력 ; 조선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 박필정(朴弼正) ; 1685 (숙종 11) ∼ ?
약 력 ; 조선의 문신. 자는 계심(季心), 호는 일휴(逸休), 참봉(參奉) 세증(世拯)의 아들.1771년 (숙종 3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718년 정언(正言), 1720년 장령(掌令)이 되고, 1722년 (경종 2) 사과(司果)로 있을 때 김일경(金一鏡)의 척소(斥疏)를 받았다.1734년 (영조 10) 판결사(判決事), 1751년 사직(司直), 후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이르렀다.숙종, 경종, 영조 3대에 걸쳐 20여년 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많은 건의를 했다.
■ 박하담(朴河淡) ; 1479(성종 10) ∼ 1560(명종 15)
약 력 ; 자(字)는 응천(應千), 호(號)는 소요당(逍遙堂), 충순공(忠順公) 승원(承元)의 아들. 1516년(중종 1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그 뒤 여러번 대과(大科)에 실패하고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기슭에서 풍류로 여생을 마쳤다. 학행(學行)으로 여러번 기용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청도의 선암사(仙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약 력 ; 1459(세조5년)~1504(연산군10년).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천지(天支), 호는 우졸재(迂拙齋). 돈인(敦仁)의 아들이며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5년(성종16년)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내고, 부모 공양을 위하여 자진해서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나와서 백성들을 지성으로 다스려 왕이 비단과 교서로 포상하였다. 이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이 되어 연산군의 실정(失政)을 극간(極諫)하였으며,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벽동(碧潼)으로 유배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에 처형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원(伸寃)되었고, 이후 도승지겸 예문관 직제학(都承旨兼藝文館直提學)에 추증되었다. 예림서원(禮林書院), 대구의 남강서원(南岡書院), 함안의 덕암서원(德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우졸재집』이 있다.
■ 박해윤(朴海潤)
약 력 ; 조선(朝鮮)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 박현(朴鉉)
약 력 ; 밀성군(密城君) 흥(興)의 아들. 고려조(高麗朝)에서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과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도학(道學) 문장(文章) 절의로 당세에 이름이 높았다. 옥천(沃川)의 원덕사(遠德祠)에 제향(祭享). 규정공파(糾正公派)의 파조
약 력 ; 자는 경인(景仁) 호는 일청재(逸淸齋)로, 두촌(杜村) 양무(楊茂)의 5세손이며, 중문(仲文)의 아들. 1546년(명종1)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이조좌랑을 거쳐 평해군수(平海郡守)를 역임하였다.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고, 치적이 많아서 유비(鍮碑)가 남아 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후진 훈육에만 힘썼다. 청도(淸道) 신안(新安)의 지산서원(芝山書院)에 향사되었다.
■ 박호(朴虎) ; 1568년(선조 1) ∼ 1592(선조 25)
약 력 ; 자는 대건(大建), 장령(掌令) 율(栗)의 손자. 1584년(선조 17) 17세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수찬(修撰)으로 이일(李鎰)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상주(尙州)에서 싸우다가 윤 섬(尹 暹)·이경류(李慶流)와 함께 전사했다. 직제학(直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 박홍신(朴弘信)
약 력 ; 좌윤(左尹) 천경(天卿)의 아들. 무예(武藝)에 뛰어나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이 되고, 산원(散員)에 올라 서경도원수(西京都院帥) 휘하에 들어갔다가 1386년(우왕 12) 별장(別莊)이 되었다. 조선(朝鮮)이 건국되자 뽑혀서 금군(禁軍)에 속하고 사직(司直)·호군(護軍)을 거쳐 제물량(濟物梁)·병산포 등의 만호(萬戶)를 역임, 1418년(태종 18) 사재감정(司宰監正)에 이어 이듬해 좌사금(左司禁)이 되었다. 1419년(세종 1) 쓰시마도(對馬島) 정벌 때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경상도병마 절도사 박실(朴實)의 휘하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 박화(朴華) ; 1252 (고종 39) ∼ 1336 (충숙왕 복위 5)
약 력 ; 고려의 문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함( )의 둘째 아들.1278년 (충렬왕4) 전리사서원(典理司書員)을 거쳐 임피 현위(臨陂縣尉)가 되고, 사온서령(司 署令), 자운방파관(자운방판관(紫雲坊判官)을 역임, 1310년 (충선왕 2) 사헌 규정(司憲糾正)으로 있을 때 무고로 면직되었다가 1316년 (충숙왕 3) 다시 기용되어 선부 산랑(選部散郞)으로서 경원부(慶源府)를 다스린 뒤 1324년 (충숙왕 11)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고, 이듬해 밀직 부사, 상호군(密直副使上護軍)으로 치사(致仕)했다.
■ 박화(朴華)
약 력 ;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함의 아들. 1278년(충렬왕 4) 전리사서원(典理司書員)을 거쳐 임피현위(臨陂縣尉)가 되고, 뒤에 사온서령·자운방판관(紫雲坊判官)을 역임, 1310년(충선왕 2) 사헌규정(司憲糾正)으로 있을 때 무고로 면직되었다가 1316년(충숙왕 3) 다시 기용되어 선부산랑(選部散郞)으로서 경원부(慶源府)를 다스린 뒤 1324년(충숙왕 11)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고, 이듬해 밀직부사·상호군(密直副使上護軍)으로 치사(致仕)했다.
■ 박효남(朴孝男) ; 1553(명종 8) ∼ 1611(광해군 3)
약 력 ; 자는 자순(子順), 호는 일암(一菴), 좌찬성(左贊成) 열(說)의 증손, 장단부사(長湍府使) 옹의 아들. 1579년(선조 12)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591년(선조 24)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을 이끌고 대궐 앞에 엎드려 무고를 입은 재상(宰相)을 구하도록 상소했다. 1601년(선조 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에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었다가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에 전출되었다. 뒤에 전적(典籍)을 거쳐 결성 현감(結成縣監)이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1608년(선조 41)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고, 호조 형조 공조의 정랑(正郞)을 역임했다. 1610년(광해군 2) 태천현감(泰川縣監)으로 나가 수로(水路)공사의 부진으로 파직당했다.
■ 박효신(朴孝臣)
약 력 ;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문장(文章)과 충절(忠節)이 뛰어나서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 박훈(朴薰) ; 1484(성종 15) ∼ 1540(중종 35)
약 력 ; 자는 형지(馨之), 호는 강수, 교리(校理) 증영(增榮)의 아들. 1504년(연산군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후 천거를 받아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가 되고 감찰(監察) 공조 좌랑(工曹佐郞) 지평(持平)을 역임,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냈다. 이 해 기묘사화(己卯士禍)때 신진사류(新進士類)로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화를 입어 성주(星州)에 유배되었다가 의주(義州)에 이배(移配), 13년 후인 1532년 다시 안악(安岳)에 이배(移配), 1536년 풀려 나왔다. 청주(淸州)의 신항서원(莘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박흥남(朴興男) ; ? ∼ 1593(선조 26)
약 력 ; 자는 석윤(錫胤), 호는 귀암(龜巖), 밀성군(密城君) 춘성(春城)의 손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이 되어 황진(黃進)을 따라 금산(錦山)의 이치(梨峙)·웅치(熊峙) 등에서 용전, 이듬해 진주(晋州)에 가서 분투하다 전사했다.
■ 박희현(朴希賢) ; 1566(명종 21) ∼ ?
약 력 ; 자순(子醇), 호는 간암, 첨정(僉正) 효원(孝元)의 아들. 1601년(선조 34) 진사(進士)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