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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도 하반기 신인상
장윤옥
│당선 작품│
목도리 외 4편
조용한 저녁시간이다. 밖에는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가을비가 내린다. 빗줄기에 놀라 떨어진 메마른 나뭇잎 위로 빛 바랜 기억들이 스물 스물 내려앉는다. 환하던 풍경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빗소리의 여운이 더욱 가슴을 울린다.
얻는 것이 있으면 부지불식간에 잃거나 잊어버리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안타까운 일은 사랑했던 사람이나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가슴에 쌓여진 애틋한 추억을 지우는 것이 힘들고 밀려오는 아쉬움은 때와 경우를 가리지 않고 토기의 빗금으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목도리가 사라져 버렸다. 어디 있겠거니 태무심하다가 날을 잡아 찾아보아도 아예 보이지 않는다. 올해 봄에는 유난스럽게 함박눈이 내리고 질척거리는 비마저 자주 내렸다. 게다가 환절기에는 불청객처럼 감기가 찾아오곤 해서 봄가을에는 찬바람을 막아 볼 양으로 차 안에 목도리와 코트를 넣어 다니곤 했다. 그런데 옷가지를 한꺼번에 들고 내리다가 어느 틈에 흘려 버렸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목도리를 사 보려고 시장이나 백화점을 돌아보았지만 그처럼 조그마하면서도 따뜻한 목도리를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오래 사시는 게 소원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 푸념을 자주 들어서 무슨 까닭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바로 위의 언니와 열 살이나 터울이 진 딸을 마흔이 넘어 두신 형편에서는 품을 수밖에 없는 바램이었다. 어릴 적의 나는 삐쩍 마르고 목이 길쑴하여 겨울이면 추위를 많이 탔다. 어머니는 바람이 들지 말라고 내가 집 밖으로 나갈 때마다 목수건을 꼭 둘러 주셨다. 추울 땐 목이 따뜻해야 한다는 유년 시절의 가르침이 그대로 남아 지금도 겨울철이면 목까지 올라오는 옷을 즐겨 입곤 한다. 그러면서 때로는 다른 이유가 있을까 생각해 볼 때도 있다.
이십여 년 전에 결혼을 앞두고 시가에서 옷값이 왔다. 양장차림은 새댁이 알아서 장만하라며 보낸 돈이었다. 같은 액수로 더 많은 옷을 해 주고 싶었던 어머니는 의상실에서 맞추면 비싸거니와 색상을 마음대로 고르지 못한다고 옷감을 끊으셨다. 양장지를 산 어머니는 의상실에 옷감을 맡기면서 천이 남으면 목도리를 하나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목도리를 얻지 못했다. 옷을 찾으러 갔을 때 주인은 옷감이 모자랄 뻔했다는 투정과 함께 자투리 천 하나를 주었다.
어머니는 그 자투리로 목도리를 만들기 시작하셨다. 가장자리는 손바느질로 홀쳐서 안으로 두어 번 접어 재봉틀로 박고 양쪽 끝 부분은 씨줄 날줄의 수술을 이삼 센티 정도 빼내어 끝이 하늘거리게 만드셨다. 제법 목도리 티가 났지만 사지 않고 굳이 만들어 주시는 극성이 달갑지 않아 옷장 속에 넣어 두었다.
햇수가 꽤 오래 지났다. 중년이 되면서 세월의 녹이 묻었는지 똑같은 일도 매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곤 한다. 전근할 때마다 만나는 새로운 동료들보다 옆집이나 옆 동네 살았던 초등학교 동창이 더 정겹게 느껴지고 토속음식 잘한다는 소문에 솔깃해져 먼 길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목을 휘감다 못해 허리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두꺼운 목도리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즈음, 우연히 자투리 목도리가 여전히 내 곁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인이 찾지 않으니 있어도 없는 듯 장롱 속에서 숨죽이고 있었나 보다. 찬찬히 살펴보니 보통 다른 것의 반 정도 되는 넓이에 길이는 짧고 폭은 자그마했다. 여러 번 돌리지 않고도 단번에 맬 수 있어서 무척 간편하게 보였다. 나이가 들수록 긴 목도리보다 짧은 것이 편안하기도 했다. 갈색과 베이지색이 무채색 겨울옷에 잘 어울려 늦가을부터 그 목도리에 손이 자주 가게 되었다. 그런데 십여 년이나 정이 들었던 목도리를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물건이나 사람이나 떠나고 나면 원래의 가치를 절절하게 알게 되는가 보다.
「책꽂이」란 글을 본 적이 있다. 아내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오래된 책꽂이를 버리지 못한 채 늘 한 쪽에 두고 있다고 한다. 가난했던 학생 시절에 부모님이 깨 몇 말을 내다 팔아서 어렵게 장만해 준 책꽂이 이야기다. 남에게는 낡고 쓸모 없는 물건이어도 그에게는 부모의 희생과 사랑을 일깨워 주는 영물이라고 한 말에 마음이 찡해진 기억이 난다.
존재란 부여되는 의미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지만 한때 무심히 대했던 목도리가 나도 모르게 가슴 깊이 깔려진 줄을 미처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무슨 마음으로 시집을 가는 딸에게 목도리를 만들어 주셨는지 곱새겨 볼 때가 있다. 그냥 옷감이 남아서 그러셨지는 않을 것이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추위를 타는 아이로 보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딸에게 주고 싶은 마지막 선물이라는 안쓰러운 마음의 표현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이 떠난 후에도 막내딸이 낯선 가정에서 따뜻한 삶을 살아 주었으면 하는 염원을 박아 내신 것일지도 모른다.
목도리를 잃어버린 후에 버릇이 하나 생겼다. 그 즈음 자주 다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 보는 일이다. 혹시라도 목도리가 바람결에 날려 구석진 어느 자리에 밀려나 있기를 바라서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니 아무도 주워 가지 않았으리라는 실낱 같은 기대감으로 허전해진 상실감을 다독여 보는 것이다.
달력의 무게가 가벼워지면서 날이 점점 추워진다. 나무도 옷을 벗었고 집에서 바라본 산도 휑하다. 목도리로 가려 주지 못한 목덜미가 시려 오면 덩달아 가슴까지 저릿해 온다. 긴 세월 동안 따스했던 온기가 새삼스러워지면서 어머니의 거친 손마디가 떠오른다. 목도리가 사라졌듯이 몇 해 전 어머니는 다시 못 올 먼 길을 가셨다. 얌전하라며 매무새를 만져 주시던 손길과 추위를 어찌 견딜까 염려하시던 표정마저 내려놓은 빈 몸으로 늦가을 귀뚜라미 소리 따라 홀연히 떠나셨다.
요즘엔 어머니와 비슷한 할머니들을 보면 뻔히 아닌 줄 알면서도 눈길을 멈춘다. 아쉬운 마음으로 뒤돌아서면서 어릴 적의 겨울 버릇처럼 몇 번이나 옷깃을 추켜세우지만 목덜미는 여전히 찬바람을 탄다.
“목에 바람 들라.”
차가운 기운이 서리로 묻어나는 늦가을 아침, 집을 나설 때면 나직이 들려 오는 어머니의 음성이다.
오라버니의 송금(送金)
묏등을 쓰다듬어 본다. 손등을 간질이는 봄 햇살이 화사하다. 지난 겨울에 처음 입힌 잔디가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얼룩얼룩하다. 제법 따뜻한 봄 날씨인데도 새순이 돋아나기에는 아직 이른가 보다. 공원묘지의 봉분들이 따스한 볕 바라기를 하는 사이로 이름 모를 산새만 호르르 호르르 날고 있다. 아스라이 보이는 들녘 너머로는 기차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기차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생전의 어머니가 부산의 딸네 집을 오가던 생각이 난다.
십여 년 전이었다. 여든이 다되신 어머니가 하루는 우리 집에 오시더니 느닷없이 허리춤에서 불룩한 돈 주머니를 내려놓으셨다. 웬 돈이냐며 의아해 하는 내게 남이 들을세라 나직이 말씀을 깔았다.
“저승 가서 니 오래비 볼 낯이 없어서…….”
오빠를 위해서 특별한 재를 한 번 올리고 싶으니 절에 따라가자는 은근한 부탁이셨다. 당신의 잡비와 연금을 모은 거라 간섭할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큰돈을 쓰는 일이니 며느리보다는 딸이 만만했던 모양이다.
옛날 어머니의 주머니는 언제나 훌쭉했다. 소달구지로 곡식을 내는 날이나 과일 몇 궤짝을 실어내는 날이 아니면 주머니는 늘 가벼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돈이 될 것도 별로 없는 집에서 자식들 공부는 힘에 부치도록 시키셨으니 여윳돈이 남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고쟁이 옆에 매달린 주머니에서는 때만 되면 공납금과 책값이 나오고 옷값도 나왔다. 그 때마다 “니 오래비 때문에 숨을 쉰다” 하시며 주머니를 열던 어머니의 말씀이 어릴 때는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옛날엔 걸인이 참 많았다. 그 중에서도 동네 아이들이 제일 무서워한 사람은 팔뚝에 은빛이 번쩍이는 손가락 모양의 쇠갈고리를 달고 망태까지 멘 아저씨였다. 여남은 살 때였던가, 혼자 집을 보다가 말로만 들었던 그 아저씨와 맞닥뜨렸다.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얼른 뒤주로 달려가 쌀을 한 바가지 철철 넘게 퍼 담았다. 이거 받고 잡아가지 말고 제발 빨리 떠나 주었으면 하고 나오는데 그 아저씨는 동냥은 받을 생각은 않고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기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곳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패가 하나 달려 있었다. 하얀 사기로 된 문패 같은 것에 ‘충절의 집’이라는 까만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 아저씨는 충절의 집이라, 충절의 집이라… 두어 번 그러더니 “아가, 고마 됐다” 하며 휘적휘적 나가 버렸다. 그 무서운 아저씨를 도망가게 할 만큼 대단한 게 우리 집에 있다는 데 우쭐하면서 저 문패가 도대체 뭘까 하고 궁금해 한 적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뒤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어머니껜 6·25때 전사한 아들이 있었다. 우리 집의 맏이였으니 전후 세대인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이기도 하다. 오빠 덕분에 60년대 그 어려운 시절에도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일 년에 몇 번씩 돌아오는 공납금을 낼 철이 되면 그때마다 연금이 때맞춰 나와서 어머니의 시름을 덜어 주곤 했다.
얼굴은 모르지만 오빠를 떠올리면 언제나 마음이 찌르르하다. 그러면서 어릴 때 보았던 그 갈고리 아저씨의 눈빛이 어렴풋이 겹쳐진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아저씨는 나를 아버지를 잃은 불쌍한 딸래미쯤으로 여긴 것도 같다.
세월이 흐르고 남은 자식들이 모두 장성했을 때 어머니의 몸과 마음은 삭정이처럼 약해지셨다. 내세를 믿는 어머니는 저승도 이승처럼 가족이 다시 만나서 산다고 생각하셨는지 한 번씩 지나가는 말처럼 우물거렸다.
“내 죽어 니 오래비 만나면 뭐라고 할꼬. ‘내 돈 다 우쨌어요’ 하면 뭐라고 할꼬.”
그건 입에서 나오는 넋두리가 아니라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속말이었다. 평생 받은 연금을 동생들의 앞가림에 다 쓰고 정작 죽은 큰아들이 좋은 데 가라고 염불 한번 해 주지 못한 한을 묵혀 온 말씀이었다. 젊을 때는 별로 내색을 안 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이 가슴을 열게 한 모양이다.
연세가 여든이 넘어서자 어머니는 오빠를 만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얼마 안 되는 용돈마저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 들어가면 예전과 달리 나오지 않았고 늦은 자식이 없으니 연금도 그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 돈은 일 년에 한 번씩 재를 올리는 데 쓰여지곤 했는데 해가 거듭되어 가는데도 오빠를 위한 극락왕생의 염원은 그칠 줄 몰랐다.
그때는 그런 일들이 모두 미신 같아서 어머니가 조금은 못마땅하게 여겨졌다. 다 부질없는 일이니 이젠 그만 하고 그 돈으로 입성이라도 갖추시라고 말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들이 좋은 데 갔을 거라고 안도하는 어머니의 편안한 얼굴을 보고 나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도 어느덧 쉰을 바라본다. 옛날보다는 훨씬 좋은 시절인데도 하나뿐인 아들을 군에 보내고 노심초사하며 잠 못 이루던 날들이 있었다. 어머니도 먼저 간 자식과 남은 자식의 뒷바라지를 위해 얼마나 많은 밤낮을 뒤척였을까. 아이를 군에 보내 보니 돌아오지 않은 자식을 위해 재라도 올려 주려는 마음이 이해가 된다. 아들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에겐 그것은 미신이 아닌 숭고한 본능일 따름이다. 가파른 길을 마다 않고 산사로 올라가던 어머니의 걸음이 그래서 쉬지도 않았는가 보다.
현충일이 되면 이날만큼은 어머니는 고향에 있는 충혼탑을 아들 보듯이 찾으시곤 했다. 이젠 그 행차도 지난해에 막을 내렸다. 대신에 올해는 저 세상에서 오라버니를 만나 생시처럼 조근조근 그간의 안부를 물어 보실 게다. 헐벗고 살지는 않았는지, 밥은 굶지 않았는지, 한 많았던 세월은 어떻게 보냈는지 또 동생들이 살아가는 소식을 자분자분 전해 주는 틈새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송금한 돈 참 좋은 데 잘 쓰셨네요.” 하며 오라버니도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을 잡아 드릴 것만 같다.
다가오는 현충일에는 어머니 대신 내가 고향의 충혼탑을 찾아가야겠다.
박 서방
계절이 달려가고 있다. 때늦은 2월의 폭설이 마냥 겨울을 머무르게 할 것 같더니 어느새 여름이 오려나 보다. 창을 열면 노르스름한 송홧가루가 창가에 살포시 내려앉고 상큼한 아카시아 향내가 코끝에 살랑인다.
복도에 낯선 학생들이 들랑거리는 걸 보니 벌써 스승의 날이 다가오는가 보다. 지난해 6학년 담임을 했다는 선생님 반에는 아직 몸에 배이지 않은 중학교 교복을 입은 졸업생들이 몰려와 창문에 풍선을 붙인다고 법석이다. 참새처럼 재잘대는 아이들의 소리를 들으며 나도 그저께 받은 편지 한 통을 또 한 번 슬며시 꺼내 본다.
‘박 서방 올림’
푸훗! 하고 웃음이 난다.
몇 해 전, 한 아이가 시골에서 전학을 왔다. 네모진 얼굴에 약간 쉰 듯한 목소리하며 떡 벌어진 어깨가 영락없는 시골 장정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말도 잘하지 않고 묻는 말에 겨우 대답을 할까말까 할 정도로 과묵했다. 요즘엔 사근사근하게 이야기를 잘하고 신곡에 맞춰 몸도 어느 정도 흔들 줄 알아야 인기가 있는데 춤추고 노래하는 것까지도 젬병이니 아이들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다.
남자애들은 엔간히 깐죽거렸다. 조심히 다뤄야 할 맹수인지 아니면 덩치만 큰 이빨 빠진 호랑이인지 힘겨루기를 해보느라 트집을 잡기도 하고 발싸움을 걸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애는 어지간한 괴롭힘에는 별반응이 없다가 정도가 심하다 싶으면 팔을 휘저어 뿌리칠 따름이었다. 집적대던 아이들도 제풀에 지쳤는지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같이 놀자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아이가 신바람을 낼 때도 있었다.
힘든 일이나 궂은일을 할 때는 언제나 앞장을 섰다. 단체 준비물이나 교과서가 오는 날에는 교실까지 옮겨 와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느라 이마에 땀이 맺히도록 뛰어다녔다. 청소를 할 때도 게으름을 부리는 일이 없이 뒷정리까지 말끔히 끝냈다. 친구들을 말없이 도와 주는 그 아이가 내 눈에는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런데도 노는 시간만 되면 친구들에게 끼어들지를 못하고 창가에서만 빙빙 돌았다.
어느 날인가 방과후에 여자애들이, 누구는 누구를 좋아한다느니 하면서 속닥거리고 있을 때 나도 그 즐거운 분위기 속에 슬쩍 들어가서 한 번 눙쳐 보았다.
“너무 세련되고 날리는 애들만 좋아하지 말고 듬직한 애들한테도 관심 좀 가져 봐라. 나는 형수처럼 부지런한 아이가 좋더라. 저런 성실한 애들이 나중에 좋은 신랑감이 될 거다.”
뭐 그런 말을 한 것 같다.
한 주일쯤 지난 후 만들기 시간이 되었다. 그날은 유난히 쓰레기가 많았는데 수업이 끝난 후의 휴지통이 말끔히 비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은 만지려 들지도 않아 누가 치웠는가 물어보았다.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박 서방이 했어요.”
“뭔 서방?”
“박 서방이오.”
여기저기서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좋은 신랑감이라 했더니 그날부터 박 서방이 되었단다.
순간 난감해졌다. 이상한 별명으로 상처 받는 건 아닐까 하고 그 아이의 눈치를 슬쩍 보니 의외로 싱글벙글한다. 벌써 몇몇 여자애들이 ‘박 서방, 박 서방’ 하고 따라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싫은 기색을 않는 걸 보면 친구들이 조금씩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가 보다.
가을 운동회가 얼마 남지 않은 화창한 오후였다. 운동장에선 즐거운 함성소리가 햇살 사이로 퍼져 나가는데 박 서방은 풀이 죽어 있었다. 불러서 제일 잘하는 게 뭐냐고 물어 보니 달리기라고 했다. 그러면 운동회 때 이어달리기 선수를 하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눈에서 반짝 빛이 났다. 며칠 뒤에 있은 선수 선발에서 실력 발휘를 하였는지 체육선생님이 보낸 명단에 그 애 이름도 당당히 올려져 있었다.
드디어 운동회날이었다. 400미터 이어달리기는 마지막을 장식하며 열기를 고조시킬 수 있는 시합이기도 하다. 그 아이가 속한 청군은 네댓 걸음 정도를 백군 선수에게 뒤지고 있었는데 그 때 6학년 마지막 주자였던 그 애가 바통을 잡았다. 치타가 먹잇감을 낚아채러 가듯 백군 선수를 바짝 따라잡으면서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야아! 형수, 박 서방, 빨리 빨리…….”
모두 일어서서 한마음이 되어 응원을 했다. 친구들과 구경꾼들의 응원을 받은 그 아이는 이어달리기에서 청군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기회는 그렇게 오는 것인가 보다. 그 후로는 대접이 달라졌다. 축구나 야구를 할 때면 발 빠른 박 서방을 서로 자기 편에 넣어야 한다고 우겼고 그럴 때마다 박 서방의 얼굴은 들뜬 기쁨으로 불그레해졌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을 나는 특히 좋아한다. 비록 이상한 별명이지만 자주 불러 주다 보면 마음을 열고 다가서면서 서로를 친구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감과 친밀감은 낯설었던 마음을 녹이면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명약이라고 할 것이다.
가만히 그때의 운동회를 떠올려 본다. 바람을 일으키며 결승선으로 달려오던 박 서방이 선연히 보인다. 지금의 나처럼 그 애도 그 가을날의 일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가 보다.
편지 겉봉을 후우 불고 속지를 꺼낸다.
“선생님, 지금도 제 별명은 박 서방이고 메일의 아이디도 박 서방으로 씁니다.”
풍금소리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 봐.
봄날은 풍금소리로 시작되었다. 여남은 살 때부터 봄꽃이 피기 시작하면 풍금소리가 넘어 들리는 담벼락 양지쪽에 소꿉살림을 차렸다. 소꿉놀이를 하는 내내 울려 오는 풍금소리에 짧은 낮시간을 놓치는 건 예사였고 가락이 멈추더라도 다시 들리겠지 하는 희망으로 그 집 앞에서 하루해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풍금소리는 자연스럽게 어린 가슴에 진달래 향기로 내려앉았다.
시집간 언니네 동네에는 하루 종일 기척이 드문 집이 있었다. 감나무 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이 적막처럼 깔린 그 집 마당은 싸리비가 지나간 흔적이 저녁까지 남아 있을 만큼 이웃 나들이도 드문드문했다. 담 안쪽에는 목단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여름이면 붉은 홍초꽃이 돌담 너머로 목을 내밀기도 했다. 적막과 고요가 깨어질 순간은 오직 풍금소리가 들릴 때뿐이었다.
덩그런 그 집에는 초등학교 여선생님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동네 아이들이 설렐 정도로 정갈하고 고왔다. 끝만 살짝 꼬부라진 퍼머머리는 햇살이 미끄러질 정도로 윤이 났고 까만 저고리로 받쳐진 얼굴은 창백하리 만치 희고 맑았다. 뒤에 들은 이야기로는 아버지는 병에 걸려 소록도로 떠나고 그녀는 자식을 두지 못하여 어머니만 남은 친정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서른이 다되도록 아이가 없는 이유는 아버지와 같은 병이 올까 걱정한 어머니가 독한 약을 너무 먹여서 그렇다고 동네 사람들이 수군대던 집이기도 했다.
어쩌다 그 집에 놀러 갈 때면 대청마루 한 쪽에 놓인 진한 고동색 풍금을 보기만 하여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십여 년 전, 어린 나는 그 풍금을 훔쳐보고 풍금소리를 귀에 담으며 어른이 되면 풍금 선생이 되어야겠다는 오진 생각을 했다.
그 시절의 음악시간에 볼 수 있는 악기는 풍금이 유일했다. 학교를 통틀어도 몇 대뿐이어서 음악시간마다 다른 교실에서 옮겨 와야 했다. 뒷줄의 덩치 큰 아이들이 풍금 당번으로 지명되고 나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지금 보면 크지도 않은데 그때는 왜 그토록 크고 무겁던지 여러 학생이 매달려 엉덩이를 뒤로 빼고 용을 써 보아도 서로 발을 밟거나 발등이 매번 풍금 모서리에 찍히기도 했다. 가까스로 교실로 옮겨다 놓고 당번이라며 발로 뿍뿍 밟으면서 풍금을 한 번 쳐 보는 맛이 예사가 아니었다. 음악시간은 기다림의 기쁨을 가르쳐 준 시간이기도 했다.
낙엽이 떨어질 때쯤이면 해마다 군내 초등학교 합창 경연대회가 열렸다. 합창 지도를 맡으신 선생님은 한 달이 넘도록 연습을 시켰다. 연습을 끝내고 나오면 해거름에 덮인 낙엽이 운동장 구석에서 을씨년스럽게 나뒹굴곤 했다. 동무들은 짜증을 부렸지만 풍금소리에 넋이 나간 나에겐 그런 하루가 짧기만 했다.
읍내 극장에서 경연이 벌어지던 날이었다. 특별히 마련한 날계란으로 목을 녹인 아이들의 소리가 극장 안에 울려 퍼졌다. 기억이 모두 나진 않지만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으로 시작하는 동요도 화음을 넣어 불렀던 것 같다. 결과는 일등이었다. 개교 이래 이런 경사는 처음이라며 교장 선생님은 친척이 운전하는 트럭 짐칸에 우리들을 태우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셨다. 약주를 한 것도 아닌데 불콰해진 음악 선생님과 삼십여 명의 올망졸망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서늘한 밤공기 사이로 퍼져 나갔다. 지금도 동무들의 노랫소리와 흙먼지가 피어 오르던 시골길이 아스름히 떠오르는 날이면 저절로 풍금에 손이 간다.
꼬부랑 할머니가 물 길러 갈 때
치마끈에 딸랑딸랑 채워 줬으면
쉬는 시간에 동요를 들려주면 학급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빙 둘러선다. 건반을 슬쩍 눌러 보기도 하고 발이 왔다갔다하는 모양이 신기하다고 아예 교실 바닥에 앉아서 페달만 지켜보기도 한다. 선생이 되려면 풍금을 잘 쳐야된다고 믿는 어느 아이는 수업이 끝난 후가 되면 풍금 앞에서 서성이는데 그 아이를 볼 때면 돌담 밖에서 기웃거렸던 어린 시절의 내가 겹쳐 떠오른다. 덮개를 하지 않고 교실 뒤쪽에 풍금을 놓아둔 후에는 그 아이뿐만 아니라 그냥 지나치던 아이들도 한 쪽 발로 겅중겅중 발판을 누르며 배운 노래를 쳐 볼 정도가 되었다.
‘시골 초등학교 풍금소리’가 백 가지 아름다운 소리에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달집 타는 소리와 낙엽 구르는 소리 등과 함께 찌걱거리는 발판과 뿍뿍 내쉬는 풍금의 숨소리도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는 옹달샘인 모양이다. 동심의 풍금소리가 나만의 향수가 아닌가 보다. 그것보다는 초록빛 바닷물과 반달 노래를 기억하는 이유도 풍금소리에 실렸기 때문이 아닐까.
고향에 남아 있는 언니가 옆집 여선생님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강원도 어디 먼 곳으로 가서 재혼을 하였다고 한다. 몇 년에 한 번씩 친정에 올 때면, 얼굴이 동글하던 막내 여동생은 지금 어디 사느냐고 꼭 물어 본단다. 일흔이 넘어서도 담벼락에서 풍금소리에 귀기울이던 이웃집의 작은 아이를 아직도 떠올린다니 나도 그 나이가 되면 지금 교실에서 풍금소리 듣는 저 아이들이 생각날까.
그 집의 양자로 들어온 동생은 양누님의 낡은 풍금을 지금도 서재 한구석에 두고 있다고 한다.
중물(中物) 단지
그림 한 장이 인터넷에 올랐다. 남자아이들이 가스레인지 불 위에 석쇠를 얹어 놓고 그 위에 CD 석 장을 불고기인 양 구우면서 젓가락으로 뒤적이고 있는 장면이다. 아래에는 친근미 나는 사투리로 제목이 붙어 있다.
“CD 굽기, 절대루 이렇게 하믄 안 되긋지여.”
웃음이 저절로 쏟아져 나와 그 광고를 친구들에게 보여 줬더니 컴맹인 친구 한 명이 신기하게 한참 바라보더니 “정말 저렇게 태워서 굽나 희한하네.” 라고 대꾸를 했다. 컴퓨터와 관련된 용어에 조금이나마 익숙한 친구들은 허리가 뒤로 굽혀질 정도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굽는다는 뜻이 생각보다 다양하게 사용된다. 빵이나 혹은 감자를 익히는 것을 굽는다고 한다. 나무를 태워 숯을 만드는 일을 숯을 굽는다고도 하며 학생이 유급하여 학교를 한 번 더 다니는 것도 한 해 굽는다고 말한다. 하지만시대가 바뀌니 불에 익히거나 세월을 묵히는 뜻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요즘 시디를 굽는다는 말을 예사로 쓴다. 데이터를 저장하는 굽기는 레이저로 디스크의 표면을 태워서 홈을 만들어 정보를 입히는 방식이다. 원판을 용도에 맞게 변형하여 쓸모 있게 바꾸는 점에서 생선을 굽는다와 같은 의미인 것 같다. 신세대의 용어와 기기를 따라갈 수 없는 답답한 심정이 내 경우만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도 신사고가 반짝이는 때가 있었다.
이십여 년 전, 자동응답 전화기가 처음 나올 무렵이었다. 그때 시골에 사시던 친정어머니는 막 시집간 딸을 챙기느라 수시로 전화를 하곤 했다. 어느 해 여름에 휴가를 계획하면서 미처 연락을 전하지 못하고 지리산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있은 것도 아니어서 어머니와 며칠 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다.
휴가에서 돌아와 자동응답 기록을 돌려 보니 친정어머니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한 음성이 남아 있었다. 혹시나 딸이 받을까 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전화기를 들고 계셨는지 “삐-이” 소리가 매번 녹음되어 있고 이어 통사정하는 어머니의 말씀도 고스란히 굽혀져 있었다.
“보소 아지매. 우리 딸 어데 가던교. 아무 말도 안 하고 갔능교. 세상에, 말도 안 하고 어데 갔을꼬… 아이고 아지매요, 사람이 물으면 대답이나 좀 하소.”
어머니는 자동응답기 안에 들어 있다고 믿은 성우 아지매에게 딸을 찾아 달라고 날마다 애원하고 있었다. 신식문물의 편리한 생활을 누려 보지 못한 어머니가 딸을 걱정하는 안쓰러운 음성인데도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그냥 재미있어 하기만 했다.
요즘 TV 프로그램 중에 말뜻을 맞추는 게임이 인기를 얻고 있다. 십대들의 단어인 ‘므흣’ ‘무플’ 등을 어른들이 맞추고 어른들이 흔히 쓰는 ‘터울’ ‘주전부리’등을 십대들이 맞추는 것이다. 세대 간의 언어 사용이 완전히 달라져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 싶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해석이 나오곤 한다. 단어만이 그럴 것인가. 세대가 서로 공유하지 못할 정도로 먹을 거리, 입을 거리, 즐길 거리 등의 간극이 나날이 벌어지고 있다. 쉰 세대들은 시디를 굽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자녀들이 컴퓨터 앞에 밤새워 앉아 있어도 뭘 하는지도 모른다. 휴대폰의 기능이 다양해지면서 여러모로 이용할 수 있지만 그 기능을 모두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쩌다 어른들이 문자라도 보낼라치면 “문자도 보낼 줄 아세요” 하며 아이들이 고물 취급을 할 때도 있다.
고물이란 오래된 물건이나 사람을 홀대하여 부르는 말이다. 고물에 단지가 붙으면 구세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오래되었다고 모두 고물 신세로 추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골동품으로 귀하게 대접받는 경우도 적지않다.
한 켠에 놓아둔 떡시루에 눈이 간다. 시어머니는 아들네의 잦은 이사 때마다 집에서 찰떡을 만들어 오셔서 이웃집에 돌리셨다. 뿐만 아니라 집안의 대소사를 맞이할 때도 손수 떡을 만드는 정성을 빠뜨리지 않으셨다. 무쇠 솥에 떡시루를 앉히고 불을 때며 김 내리는 구경을 하면서도 나는 떡을 만드는 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세월이 바뀌면서 떡시루가 쓸모 없게 되었지만 어머님의 떡 만드는 솜씨를 배워 두지 못한 것이 새삼 아쉬워진다. 어머님은 이젠 집에서 떡을 할 일이 없으니 큰 화분으로나 사용하라고 떡시루를 주셨지만 반질하게 닦아 마루에 두었다. 어찌 거기다 흙을 담을 수 있을까. 거무스름하고 투박한 모양이 볼품은 없지만 이런 저런 사연을 안은 옹기 떡시루는 나에게는 귀하디귀한 골동품이다.
컴퓨터나 신식 기기를 제대로 익히려면 제법 시간이 걸린다고 하지만 옛 세대들의 지혜를 물려받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문명이 발전하여도 전통의 맥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까닭은 우리 삶의 탄탄한 초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혜의 손을 가진 세대들은 고물(古物)이 아닌 고물(高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난날 자동 전화기 앞의 어머니를 보며 웃었던 때처럼 우리는 인터넷 세대들로부터 걸핏하면 따돌림을 당한다. 설상가상으로 고물(高物) 어머니들처럼 다음 세대에게 전수해 줄 손맛 하나 제대로 내어 놓지 못한다. 그저 어중간하게 나이만 먹고 있으니 우리 세대는 무상한 세월의 이끼만 덮여 가는 중물 단지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