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법관 김홍섭 바오로>
"너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느님에게 받은 것이니 하느님에게 돌아가리라"
이는 가장 양심적이며 가난한 영혼의 편에서 한평생을 살았던 김홍섭 법관의 묘비에 적혀있는 글귀이다
김홍섭은 전라북도 김제 1915년 8월 28일에 제국주의 일본 밑에서 가난한 한 농민의 외아들로 태어났던 그는 소년시절부터 가난이라는 문제에 부딪쳤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더 공부할 수가 없어서 집안 상점일을 거들면서 틈틈이 책을 읽음으로써 향학심만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이브라함 링컨의 전기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법률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뒤에 맨몸으로 전주로 가서 한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틈틈히 사무실에 꽃혀잇는 법률서적을 들여다보며, 판례문등도 탐독하였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1939년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8월에 조선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일본대학을 중퇴하고 와세다대학 문과대학의 청강생이 되었다. 1941년 2월에 귀국하여 안국동에서 김병로가 중심이 된 합동변호사 사무실에서 변호사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병로와 김홍섭은 남달리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청년 변호사인 김홍섭이 김준연의 셋째딸인 자선과 혼인을 한 것도 김병로가 송진우와 의논하여 주선한 것이었다. 김준연은 사위인 김홍섭을 두고 "스님 같은 사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그해 10월에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로 임명되고 1946년 5월에 이른바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담당하면서 명검사로 이름을 날린다. 이때에 '꼬챙이'검사 조재천과 함께 이 사건을 맡아서 국가공안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하였다. 유언비어와 폭력이 판을 치던 세상이어서 밤이면 그의 집으로 돌맹이가 날아들곤 했다. 그는 이른바 유명 검사의 생활에 점차로 회의를 느끼고 그 해 9월에 사표를 내던졌다.그 길로 김홍섭은 뚝섬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돼지를 키웠다. 농군으로써 평생을 보내려고 햇던 것이다 그의 내심에 흐르는 평등사상때문이다.
"내자신이 법률이란 이름으로 과연 남을 단죄할 수 있겟는가. 남을 단죄하기위해서 보다 높은 안목과 지식과 인간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한다."
그러나 뚝섬의 농부가 된 김홍섭을 다시 법의 세계로 불러들인 사람은 바로 김병로였다. 그 때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는 그도 은거했던 경험이 있는 터라 몸소 고무신 차림으로 뚝섬의 배추밭으로 김홍섭을 찾아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자신의 고민에만 집착하고 있겠느냐고 호통을 친 뒤에 1946년 12월에 서울지법 소년지원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김홍섭에게는 판사생활이 만족을 주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는 차라리 고아원을 경영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1948년 2월부터 그는 판사로서 대학에서 법철학 강의도 하였다. 이렇게 어중간히 지내는 동안에 6·25전쟁을 맞아야 했다. 다시 뚝섬으로 들어가 틀어박혀 있다가 그 해 11월에 부산 피난지에서 서울고법판사로 임명되고 전쟁이끝난 후 서울지법부장판사로 승진되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민족의 수난속에서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숨져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인생무상 같은 커다란 물음들에 엉켜 고뇌에 빠졌다. 고뇌에 빠진 그가 생각한 것은 종교였다.
그는 본디 소년 시절에 개신교 예배당에 다녔지만 판사생활을 하면서 등산을 좋아하고 불교의 경전과 깊이에 매력을 느껴서 절과 스님들을 많이 찾아다녔다.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할 때도 셋방살이의 어려움 속에서 그는 불경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그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선사로 이름높은 방한암스님이나 김일엽과 같은 스님들과 깊이 사귀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의 해탈과 가톨릭에서의 부활을 비교검토하다가 " 인간은 왜 사는가? 죽움이후의 구원은 있는가? 그 동안 인류는 수없이 많은 생존경쟁을 통해 태어났고 죽어갔다. 그럼 내가 갈길은......?" 수많은 화두를 짚어 조용히 고민에 고민을 겁듭하다가 궁극적으로 의지 할곳은 가톨릭이란 것을 깨닫는다.
이 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육당 최남선과의 만남이었다. 육당 최남선은 국문학자요, 역사학자요, 불교적인 지성인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는데 그도 이 때에 종교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남선과 김홍섭은 만나면 몇 시간씩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김홍섭은 1953년 9월 26일에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명동성당에서 온 가족과 함께 영세를 받았고, 이를 뒤따라 육당도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1955년 12월 17일자 한국일보에서 육당은 "인생과 종교; 나는 왜 카톨릭으로 개종했나?"라는 글을 실었는데, 이 글에 충격을 받은 김일엽의 반론이 발표되기도 했다.
가톨릭에서 새로운 환희의 세계를 발견한 김홍섭은 종교적인 마음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전체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변화를「무명」,「창세기초」,「무상을 넘어서」같은 시집이나 수필집에서 털어 놓았다. 그는 자연과 생활 속에서 느낀 감상을 독특하게 유려하고 진지한 문장으로 서술했다. 어떤 이는 그를 "법조시인"이라고도 불렀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그림도 잘 그렸다. 괴테(Goethe)의 식물형태(Morphologie)를 떠올릴 만큼 섬세하면서도 정겨운스러운 스케치와 수채화를 그렸다. 또 그는 자연 연구가이기도 했다. "내 취미는 내 세계관에 직결되고 있다"고 말한 그는 천체도와 망원경을 가지고 하늘의 별자리를 연구하기도 했다.
"별의 음성을 듣는 것― 그것은 부질없는 낭만이 아니요, 유한과 낙천의 경지도 아니다. 나의 생활 가운데서 이미 그것은 십분 바탕과 가치의 인정을 받은 내 마음의 들창이요, 활력의 비방인 것이다. 그 창문이 막힐 때 나는 조급하여 지고 질식을 느낀다. 그의 음성을 듣는 때 나는 다시 소생하는 것이다. 청신한 공기를 호흡하면서 발랄하게 살 자신을 갖는다. 그러므로 나는 늘 하늘을 보고 마음을 살핀다. 앞으로 혹연 내 생활에 어떠한 변혁이 있을지라도 나는 복음서와 함께 성좌도 한 장을 휴참할 것을 명념할 것이다. 창세기와 천체도를 조화시키는 것― 그것은 나의 천문학인 동시에 내 전인생의 주제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법률가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다.
" 이제야 너를 싫어하지 않으련다."
이제까지의 법에대한 회의적인 태도에서 긍정적인 자세로 옮기고 자연법에서 법의 궁극적 의지를 찾기 시작한다. 법률가로서의 자세에 대하여도 나름대로 독특한 성찰을 한다.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가?' '재판은 어떤근거에 의하여 하는가?'
그는 자신이 재판하고도 그 재판의 결과에 대해 많은 회의를 느낀다.그래서 재판하기 전날에는 종로구 사직동 조그만 한옥의 한뼘도 안되는 뜨락에서 묵주기도를 하며 공정한 재판이 되길 하느님께 기원한다. 이것은 정약용의 법사상의 영향으로 항상 <목민심서>를 두고 참고했다. 그는 판결한 후에 피고인들에게 말한다.
"부덕한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판결을 내린 것을 무척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제가 여러분들에게 판결을 내린는 것이 합당한지 모르겟읍니다. 판결에 불만아 있으시다면 무척 죄송하게 생각하고 용서를 빌겠읍니다."
김홍섭의 재판과 인간의 문제, 특히 범죄인의 형량과 수감자의 처우문제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고민의 독특한 법인간학과 법신학의 경지를 이루었다. 그는 재판정 분위기를 마치 성당의 미사처럼 성호를 긋고 진행하니, 참석한 피고인과 그 가족들은 그가 얼마나 양심적으로 재판에 임하는가를 피부로 느기며 감동받곤 하였다.
1956년 11월에 김홍섭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되었다. 법관으로서의 그의 이름을 드높인 것은 이 무렵이었다. 바로 그 해 이른바 김창용 중장 살해 사건의 주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허태영대령에게 김판사는 감방으로 그를 찾아가 가톨릭에 귀의할 것을 권하고 많은 신앙서적을 차입해 준다.
"자네의 순수한 마음은 이해가 되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천주님께 용서를 빌면 모든 걱을 용서해 주실 것이네."
"용서받을 수 있을가요?"
"십자가에 함께 처형당한 도둑도 마지막에 용서를 받았네. 그분을 믿고 의지하게." "정말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자네가 잘못을 인정한 순간부터 그분이 자네를 용서한 것이나 다름없네."
김판사는 신앙에 목말라 하는 그에게 신앙공부를 시킨 다음, 신부를 모셔다가 영세를 받게하여 '토마스'로 새로 나게하였고 스스로 그의 대부가 되었다. 마침내 이들은 가까운 정신적인 벗이 되었다. 허대령은 영적인 아버지로 생각하고 사형집행 때까지 수많은 편지를 보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아버님, 저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분에게 가려고 준비중입니다. 성경을 읽고 감동되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읍니다. 진작에 영세를 받았더라면 이런 감정적인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고, 세속의 생명을 더 연장시킬 수도 있었으련만....... 그러나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천주님이 곁에 있으니까요. 제 일생 가운데 아버님을 만난 것처럼 보람되는 일은 없었읍니다.'
대령 허태영은 마지막 사형길에서 김홍섭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내세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스스럼없이 죽었다. 판사와 사형수의 이 런 사귐의 편지들은 동아일보에 발표되어 읽는 사람의 가슴을 감동케 하였다. 이로부터 판사 김홍섭은 "사형수의 아버지"로서 죄수들을 위한 종교서적을 사서 차입해 주는 데에 그의 월급을 거의 써 버렸다. 그러자니 점심 한끼 사먹지 못하고 날마다 단무지 반찬의 도시락을 들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김판사는 동료 판사들에게 늘 입버릇처럼 말햇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면 안된다." "맹자의 성선설을 믿고 있읍니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 하더라도 근본이 나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흰 고무신에 골덴 바지와 넥타이도 매지 않은 점퍼 차림으로 사직동에서 덕수궁 뒷길로 걸어서 법원에 출근하는 판사 김홍섭을 보면 차를 타고 가던 동료 판사들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에겐 돈이 없었다. 팔남매나 되는 자녀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내핍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여유없는 생활 가운데서도 그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등산을 다녔고, 어떤 때는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강원도 어느 시골로 전교를 할 겸해서 순교지 답사를 하러 홀연히 내려갔다가 경찰의 검문에 걸렸다. 되도록이면 신분을 안 나타내려고 머뭇거리는 그에게 심하게 다그치던 경찰은 그가 마지못해 내보이는 신분증을 보고는 혼비백산한 적도 있다.
김홍섭은 1959년 1월에 전주 지방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 그는 맨처음 전주시내 한복판에 있는 치명산으로 갔다 치명산에는 1801년에 순교한 우종선(요한)과 이순이(누갈다)의 묘지가 있었다. 유종선과 이순이는 부부였지만 동정부부로 부모의 허럭하에 개끗한 몸을 유지하면서 천주께 모든 것을 바쳣다. 김판사는 이들의 거룩한 뜻을 늘 감동적으로 새기며 고무신 차림으로 험준한 치명산을 여러 차례 답사하고 그곳에다 순교비까지 세워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 순교비에는 "동교후생(同敎後生) 나그네 세움"이라고만 적었을 따름이었고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1960년 1월 26일에 김홍섭은 대법원판사로 임명이 되어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그 때의 그의 일기장에는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은 국가주의입니다. 인류보다 자기 주권을 더 생각하는 국가주의는 모두가 인간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잊고 있는고로 악입니다"라는 취임 소감이 적혀 있다. 그 해 4월에 자유당 정부가 무너졌다. 그리고 사법부는 혁명재판과 이른바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해야만 했다. 김홍섭은 반민족 행위자의 재판에는 끝내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다.
"나는 일찍이 애국자로 자부한 일이 한번도 없다. 기본 인권은 법위에 있고, 인류의 공동운명은 민족의 그것보다 크다고 보는 것이 나의 법관으로서의 기본 신조이다."
그 즈음에 그는 크나큰 책임을 한 몸에 진 장면 국무총리에게 국민의 실망과 원망하는 소리가 높아질수록 친구로서 그것을 바로 알려 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정치 일선에 나서는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제2공화국의 불안정 속에서 사법부도 많은 법관들이 자리를 바꾸어야 했다. 그해 9월에 김홍섭은 광주고등법원장으로 임명되어 다 시 서울을 떠나야 했다. 몇십년 동안 판사생활을 했지만 입을 양복 한벌 반반한 것이 없어서 친구가 남대문 시장에서 사준 기성복 한벌을 걸쳐 입고 열차에 몸을 실은 김홍섭은 어찌 보면 패배자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가난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를 원하지도 않는다. 부란 잠깐 이세상의 인연이 되어 왔다가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관 으로서 할일을 다 하고 살다 가는 것이 내 임무이며, 이것이 곧 주님이 명하신 일이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힘없고 비천하게 사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또한 그는 육식을 거의 하려 하지 않았다. 육식을 꺼리는 이유는 그의 생명 존중의 사상 때문이었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만 섭취하면 됩니다. 우리가 먹는 고기는 고기이기 이전에 하나의 생명이었읍니다. 지나친 육식이 란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병들게 합니다. 고기를 먹기전 인간을 위해 희생된 동물의 아픔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무엇인데 ......."
그러나 정치권력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법관으로서 남모르는 고민을 해야만 했던 그로서는 이제 좀더 높고 큰 지평을 생각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했던 김홍섭은 그가 지은 시「불혹」에서 스스로 이렇게 적고 있다.
-길이면 모든 길이 남이 간다 따를 것이 대도라고 방심말고 협로라고 가릴 탓을 사람이 제간다 하여 저만 옳다 하더라.
천만길 있다 하되 취할 길은 오직 하나 그 하나 찾자 하되 이렁저렁 금일이라 이제서 돌아다보니 그도 한낱 길이네.
본시 길이 없었거니 가고 보면 그게 길을 길물어 반 세월에 깨고나니 허송이라 이 후란 길아니 묻고 앞만 살펴 가리라.-
그의 광주에서의 두해 남짓의 생활은 실제로 그의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시기였다. 단일야당을 위하여 애쓰던 김병로의 계음을 들은 것도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김홍섭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무한대의 우주 앞에 서서 영원의 침묵을 생각할 때 내 심혼은 전율를 느낀다고 한 철인이 있다. 이 철인의 두뇌와 지혜에 감탄하기 전에 나를 무지와 어리석음에 머물러 두신 천주께 감사한다.'
자기와 그렇게 가깝던 선배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적고 있는 김홍섭은 이미 탈세속의 법관이었다. 친구 이병린의 표현을 빌면, "위 대한 종교가요, 인생의 선각자"였다.
1963년 1월 23일, 그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제3회에 가입한다. 자식 여덟 남매만 다 키우면 늦더라도 수도원에 들어가 종지기가 되고 싶어했던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운명을 미리 내다보았음인지 수도자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고, 흐르는 물처럼 깨끗한 사람이 되려고 했다. 이런 그에게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자연이 벗이 되었다.
"나는 판사가 되지않았으면 수사가되었을 겁니다. 판사의 한평생보다 어쩌면 수사로서 지내는 것이 그분 보시기에 더 좋으셨을테니까요."
이후 모든 직무를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그는 묵상하면서 혹시라도 자시의 재판에 오판이 있을까, 걱정하며 묵 주알을 꼭 지닌다. 자신이 판결한 피고인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는 그는 곧잘 시골로 보물을 줍기 위해 시골로 나들이 한다. 시골에는 그때까지 미신에 젖어 혼탁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주님께로 귀의 시키기 위함이었다. 김판사는 이들을 보물, 닦여지지 않은 보물로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가난한 자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가난해 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그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절대로 판사라는 직위를 사 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판사생활이 끝나면 나는 시골로 내려갈 것입니다. 시골 성당에 취직해 종지기 노릇을 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천주의 사도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하기를 바랫던 그는 성당의 연령회에 가입해서 퇴근후 교우들의 집을 방문하여 죽어가 거나 죽을 염려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곤 했다.
그의 동네에는 노천명 시인이 살고있었다 노천명 역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쓸쓸히 한 평이 약간 넘는 방에 서 임종하였다 . 맨먼저 창문 하나없는 조그만 방에서 노시인의 싸는한 시신을 대한 김판사는 그녀를 위해 기도하고 모든 장례절차를 밟는다. 이때의 일을 그는"노시인은 너무나 청빈했습니다. 그가 쓴 시처럼 청렴하게 살다가 가셨읍니다."라고 회고한다.
장면 박사는 김 판사를 누구보다 사랑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또 계율에 엄격했던 장면 박사는 김 판사를 빼면 친구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장면 박사에 의해 김 판사는 `사도 법관`이란 칭호를 듣게 된다, 법복을 입고, 한손엔 그리스도의 사랑을 뜻하는 십자가를 또 한손에는 율법서를 든 사도 법관 김홍섭.
1964년 그는 서을 고등법원장으로 승진되어 상경했으나 그의 오랜 내핍 생활로 인해선지 건강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 죽 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배어드는 것을 안 그는 더욱 더 신앙생활에 매달린다.
`인간이 인간을 구제할 수는 업다. 하느님만이 타락한 인간의 영혼을 구제한다. 인간은 흙에서 왔으니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느님께 왔으니 하느님께 돌아간다.`
그는 죽기 얼마 전<전도서>의 이 구절을 유심히 살피다가 밤늦은 시간까지 붓글씨로 이 구절을 몇 번씩 써 본다. 성서 구절 가운데 가장 마음에 와닿는 글귀였다.
`육체는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육체 안에 스며있는 영혼은 결코 땅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생명을 주신 천주께 돌아간다. 그 생명을 준 분으로부터 생명을 소중히 쓰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생명의 한계를 느끼자, 그동안 사형당한 사형수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묘비조차 없는 그들의 묘지들을 생각한다. 사형 수들은 거의 모두 자신이 대부를 서주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야트막한 야산 아래 그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 영원히 잠자고 있다. 비록 생전에 순간의 잘못을 저질렀지만 모두 회개하고 세상을 떠난 사형수들이다. 죽은 후에라도 그들의 형제가 되고 싶었다.
"나를 그곳에 묻어 주시오. 그들도 기뻐할 것이요."
고등법원장으로 부임하던 그해 6월부터 간암으로 투병생활에 들어갔고, 그의 정신세계를 아끼고 존경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인 1965년 3월 16일에 천주의 품으로 돌아갔다. 세속의 나이로 쉰살,아까운 나이다. 겸손을 미덕으로 알고 평생을 가난 속에 살면서도 이웃을 사랑했던 김홍섭 판사. 김병로가 세상을 뜬 지 일년도 채 못 되어서 김홍섭도 이승을 떠난 것이다. 생활이 가난하고 초라했지만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문했다. 사람의 일생이란 관뚜껑을 덮어보아야 그 잘잘못을 안다는 말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김 판사는 보여준다. 김홍섭의 집앞에 있는 사직공원에서 거행된 영결식에는 대통령이 보낸 조화와 삼부요인들의 조사가 고인의 사람됨을 증언하였다. "한국의 사도 법관", "한국 법조인의 기둥,""법의 속에 성의를 입은 법관,""남을 위해 산 사람,""비범한 카톨릭적 행자" 같은 수많은 헌사들이 쌓였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여러 교도소에서 날아온 이름없는 죄수들의 수많은 조의의 편지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우리는 판사님을 아버님이라고 생각했읍니다. 판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더 사셔야 할 분인데 하느님께서 이 더럽고 추한 세상에서 살지 말라고 일직 데려가신 것만 같습니다.'
한 평도 안 되는 묘지 앞에 우뚝 써있는 글씨,그것은 생전에 김판사가 좌우명처럼 아끼던 성서 구절이었다.
' 너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니 하느님에게 가리라.'
그 주위에는 이름도 없는 다른 묘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것은 사형수들의 이름 없는 봉분들이었다. 어떤 봉분은 닳아서 없어져 버렸고, 어느 봉분 앞에는 누군가가 왔다갔는지 코스모스가 한줌 놓여 가을 하늘 아래 하늘거리고 있었다. 사형수들은 김 판사에게 모두 절하면서 환영했으리라.
"그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판사님을 위해 저희들이 좋은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1974년에는 율곡 법률 문화상에 추서되었고, 1995년에는 최종고 씨에의해<사도법관 김홍섭>이란 전기가 출판되었다.
그는 생전에 아들 하나를 하느님께 바치기로 약속했다. 훌륭한 성직자를 만드는 것이 소원이었다. 약속대로 넷째 아들 정훈이 가톨릭대학에 입학,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하였다. 그런데 부제때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산정을 등반하다 가 낙반하여 세상을 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장례식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많은 성직자들이 참석했다.
그의 문집 <산,바람,하느님,그리고 나>에서는 아버지의 정신세계에 대한 흠모가 절절히 담겨 있다.
아버지는 엄격하시면서도 소탈하였다. 나는 저런 분이 어떻게 남들을 재판할까, 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가난을 친구로 알던 분, 나는 그래서 아버지를 존경한다.
친구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술회한다.
"다시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김 판사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 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들 일가의 생활은 더욱 쪼들린다. 가장이 한참 나이인 오십에 세상을 떠났으니 가세가 기울어지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가 세상에 남겨 놓은 것이라곤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는 약간의 빚과 가난뿐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위대함을 남 겨 놓았던 것이다.
미망인 김자선 여사는 그 후 오랫동안 교도소 사목일을 계속 하고 있었다. 이는 곧 하늘 나라에 있는 김 판사의 뜻이기도 하리라.
각박한 현실 속에서나마 청렴한 법률가로서,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풍부하고 흔쾌한 예술가로서, 그리고 무상을 넘어서 무생을 동 경한 종교인으로서 한 점 티없이 살다 간 그의 삶 자체가 예술이고 종교다.
장 면 박사도 그의 죽음을 너무나도 안타까워했다.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었는데, 이 세상에서 살기는 너무도 아까운 사람이었는데....... 아마도 하느님께서도 일찍 데려간 것은 세속의 먼지를 씻어버리고 빨리 쉬게 하려는 뜻이었던 것 같소."
<'짧은인생 긴영혼'- 김양우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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