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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신앙고백서와 귀도 드 브레
손재익 강도사 (강서교회)
1.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명칭과 소개
1) 명칭
먼저 우리가 교리를 배울 도구로 삼는 ‘벨기에 신앙고백서’ 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먼저 명칭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 왜 이런 이름입니까? 여러분이 갖고 계신 신앙고백서 제일 처음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만,1) 이 신앙고백서의 이름을 벨기에 신앙고백서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 고백서가 작성된 장소가 바로 현재의 벨기에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신앙고백서의 이름을 붙일 때에 장소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이것은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Abey)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역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라는 이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라는 표현 대신 ‘벨직 신앙고백서’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갖고 계신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소개에 나와 있듯이 ‘벨직’이란 말은 ‘벨기에’의 형용사입니다. ‘Korea’의 형용사가 ‘Korean’인 것처럼 그렇습니다. 그런데 보통 한국에서 원문 그대로 “벨직 신앙고백서”라고 번역하는데, 사실 그것은 바른 번역이 아닙니다. 영어권에서야 ‘명사+명사’가 일반적이지 않고 ‘형용사+명사’가 일반적이니까 ‘Belgic Confession’이라고 하지만, 우리말은 ‘명사+명사’가 가능하니까 ‘벨기에 신앙고백서’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Korean People 이라는 말을 번역할 때 “한국 사람”이라고 하지, “한국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라고 번역하지 않고, “벨직 신앙고백서”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Korean People 이라는 말을 “코리안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벨직 컨페션(Belgic Confession)’이라고 말하든가 ‘벨기에 신앙고백서’라고 해야지, ‘벨직 신앙고백서’ 라고 한다든지 ‘벨기에 컨페션’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벨기에 신앙고백서”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2) 별칭
그런데 이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네덜란드 신앙고백서”입니다. 특히 오늘날의 네덜란드 사람들은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네덜란드 신앙고백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1830년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이후2) 지금은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분리되어 서로 다른 독립국이지만, 북유럽의 역사와 지리를 보면 현재의 벨기에는 원래는 없던 나라입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그렇듯이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점진적으로 형성된 나라들입니다.3) 네덜란드 역시 마찬가지인데, 당시의 네덜란드는 저지대(低地帶) 17개 지방(Seventeen Provinces)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 중의 하나의 국가였습니다. 네덜란드 라는 말 자체가 ‘낮은’이라는 뜻의 Neder와 ‘땅’이라는 뜻의 land가 합쳐져 Nederlands 라고 하는 것인데,4) 오늘날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프랑스 북부 지역등 17개주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고백은 현재는 ‘벨기에’에 속해 있지만 1561년 당시 네덜란드 남부에 있는 도르니크(Doornik) 라는 곳에서 작성되어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라고 부릅니다만, 원래 작성되던 때의 지명은 ‘네덜란드’인 것입니다.5) 그래서 현재 네덜란드의 사람들은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신앙고백서를 잘 이해하려면 네덜란드의 역사와 종교개혁의 역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면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귀도 드 브레와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
1) 드 브레의 탄생과 그의 시대
두 번째로, 이 신앙고백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가? 이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다는 논란이 있으나 그것은 설득력이 없고, 첫 페이지에 나와 있듯이 ‘귀도 드 브레’(Guido de Brès, 1522-1567)라고 하는 네덜란드의 목사 한 사람이 작성한 것입니다.6) 영어권에서는 때로는 Guy de Bray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귀도 드 브레’(Guido de Brès, 1522-1567)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설명에도 나와 있듯이 그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였습니다. 그는 1522년 현재는 벨기에이고 당시에는 네덜란드 남부 헤네호우웬(Henegouwen) 지방의 베르헌(Bergen)이라는 곳 (영어로는 몽스-Mons라고 함)에서 태어났습니다.7) 그는 장 드 브레(John de Brès) 집안의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8) 그의 부모는 당시의 많은 사람이 그러했듯이 로마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 가톨릭에 충실한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려서는 스테인글라스 화가가 되기 위해 준비했습니다.9)
그가 살던 때는 스페인이 유럽 정치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시대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1580년대입니다.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로서 당시의 나라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1522년은 동시에 종교개혁의 이제 막 시작되는 때였습니다. 마틴 루터(1483. 11. 10-1546. 2. 18)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교회의 문에 붙인 것이 1517년 10월 31일. 존 칼빈(1509-1564)이 기독교 강요(최종판)를 완성한 것이 1559년이니까 루터로부터 본격화된 종교개혁은 24세가 된 젊은 ‘귀도 드 브레’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10)
2) 망명생활과 훈련
그래서 1547년 그는 개신교(개혁신앙)로 돌아섰습니다.11) 그 이후 로마 가톨릭의 핍박을 피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남부는 로마가톨릭을 믿는 스페인 왕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12) 그 당시는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로마 가톨릭의 영향 아래 있었고, 귀도 드 브레가 있던 곳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스페인의 카를 5세(1500-1558)는 가톨릭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었고 1521년부터 자신의 식민지에 가톨릭을 강화하고 개신교를 억압하려고 했었습니다.13) 그래서 그는 많은 도시와 국가를 떠돌며 공부를 했습니다. 일종의 망명생활을 한 것이죠. 그런데 이 기간은 또한 그의 훈련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런던에서 1548년부터 1552년까지, 그리고 1552년에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와서 목회를 하다가 다시 1555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크로 도피하였다가, 스위스의 제네바와 로잔 등에서 공부했습니다.14) 특히 런던은 당시에 많은 개신교도 피신자들이 있던 곳입니다. 그의 망명 당시 유명한 요하네스 아 라스코(Johannes a Lasco)도 런던 피난민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런던에 있는 동안 그는 마르텐 미크론(Maarten Micron), 요하네스 아 라스코(Johannes a Lasco), 그리고 요하네스 우텐호브(Johannes Utenhove)와 같은 당시의 다른 몇몇 주도적인 개혁자들과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드 브레는 복음 설교자가 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탄이 교회를 해산하고 박해하여 성취하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한 것으로 바꾸어 일하신 것입니다.15) 또 다른 망명지인 프랑크푸르크는 당시 존 낙스가 영국 피난민 교회를 목회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로잔에서는 데오도르 베자의 지도 아래 헬라어를 공부했습니다.16)
3) 네덜란드로의 귀환
그 후 1558년 네덜란드로 돌아온17) 그는 네덜란드의 도르니크(Doornik), 세단(Sedan), 안트베르펜(Antwerpen)18) 등에서 사역을 했습니다.19) 이 때는 박해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지하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에서 주일에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듯이 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이 기간 동안에 그는 회중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당국이 개신교적인 모든 것들을 억압했기 때문에 공적인 예배를 위해 회중이 모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신에 어둠을 틈타서 드 브레는 이 집 저 집으로 다니면서 6명 내지는 12명 정도의 작은 무리들을 만났습니다. 드 브레는 성경을 펼쳐서 해석을 하며 듣는 이들을 북돋우어 주고는 다시금 자기의 갈 곳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사역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회중들은 심지어 그의 진짜 이름도 몰랐습니다. 그는 종종 ‘몽스의 어거스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20) 혹은 그를 ‘제롬’이라고만 불렀습니다.21) 그리고 1566년에 마지막으로 청빙받아서 목회했던 발렌치네(Valenciennes)에서 1567년 5월 31일 교수대에 매달려 처형당하였습니다. 가톨릭이 지배하던 시대에 개혁신앙을 믿는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자로 불리운 사람이었는데, 1567년 순교로 그 생을 마감하기까지 개혁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4) 신앙고백서의 작성
이런 치열한 삶을 살았던 드 브레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신앙고백서를 작성했을까? 그는 1561년 도르닉(Doornik)에 있을 때에 신앙고백을 저술하였습니다.22) 1558년 망명에서 돌아온 그는 도르닉에서 정착하여 3년간 사역을 했는데, 그의 사역의 결과로 도르닉 주민들의 상당한 수가 신앙을 받아들였고 거기에는 그 도시의 주도적인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의 일부 개신교인들은 그들의 숫자가 상당하다는 것을 적절하게 공개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했고, 길거리에서 공공연하게 시편찬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시 당국이 자극을 받아 군대를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직전인 1561년 드 브레는 지난 몇 달 동안 작업하고 있던 신앙고백서의 서문을 썼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로마 가톨릭을 대항한 개신교 신앙을 변호하는 내용으로서 도르니크에 있는 총독 대리의 집의 담너머로 던져졌고, 총독대리는 카를 5세(1500-1558)를 이어 1555년에 왕이 된 당시의 스페인 왕 필립 2세(1527-1598)에게 전달했고,23) 1년 후 1562년에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어 그 후에는 “벨기에 신앙고백서”라는 것으로 정착되게 되었습니다. 드 브레의 목적은, “개혁 신앙의 신봉자들은 기소된 것처럼 반역자들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따라 참된 그리스도 교리를 고백하는 법을 지키는 시민들”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24)
여기에서 알아야 할 핵심은 이 신앙고백서가 그저 편안한 삶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당시 종교개혁자들의 삶은 아주 어려웠습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때였습니다. 세계사를 읽어보십시오. 카를 5세와 필립 2세가 개신교에 대하여 어떤 통치를 벌였는지를 보십시오. 드 브레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신앙고백서를 남겼습니다. 죽음을 무릎 쓴 행동이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담대히 드러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5) 출판과 번역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귀도 드 브레(Guido de Brès, 1522-67)가 1561년에 당시에 스페인의 가톨릭 정부에 의해서 박해받던 프란덜스(Flanders)와 네덜란드(Netherlands) 교회들의 변호를 위해 작성한 것으로 그 당시 네덜란드 남부에서 사용하던 언어인 불어로 작성한 것을 1563년에 출판하였습니다.25)
그런데, 이후 같은 해에 화란어를 사용하는 네덜란드 북부 사람들을 위해서 화란어로 출판되었습니다.26) 이후 1565년 안트베르프 대회(Synod of Antwerp),27) 1566년의 아우구스버그 회의(The Diet of Augsburg)28) 등에서 받아들여졌고, 1566년에 열린 안트베르프 대회(Synod of Antwerp)에서는 개정 작업이 있었고,29) 1571년 독일의 엠덴 대회(Synod of Emden, Germany), 1574년 도르트 대회(Provincial Synod of Dort)30)와 1581년 미델부르그 대회(National Synod of Middelburg)31)에서 교회적으로 받아들여졌고, 화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인 1619년에 아르미니우스의 문제로 열린 도르트 총회(the Great Synod of Dort)에서 불어, 화란어, 라틴어 본들의 비교를 거쳐 개정하여 오늘날의 형태로 확정되었으며, 이후 지금까지 화란 개혁 교회와 개혁파 전통의 교회 안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과 도르트 신경과 함께 가장 중요한 신조로 받아들여지고 고백되고 있는 귀한 개혁파 신조입니다.
6) 벨기에 신앙고백의 작성에 영향을 준 프랑스 신앙고백
모든 것이 그러하듯, 어떤 영향 없이 그냥 만들어진 것은 없습니다. 귀도 드 브레의 벨기에 신앙고백서 역시 귀도 드 브레의 개인적인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내려온 고백의 결과입니다. 둘째 페이지에 잘 나와 있듯이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칼빈이 기초하였고, 칼빈의 학생이었던 앙뜨안느 드 라 로셰 샨디우(Antione de la Roche Chandieu)가 작성하여 1559년 파리 대회(a synod at Paris)에서 개정되어 받아들여진 『프랑스 신앙고백서』(La confession de foi des eglises reformees de France=Confessio Fidei Gallicana) 라고 하는 = 갈리아 신앙고백 (Confessio Gallicana)」을 기초로32) 만들어졌습니다. 비교해 보면,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프랑스 신앙고백서의 많은 부분을 수용하고 있습니다.33) 1조만 놓고 봐도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벨기에 25조와 프랑스 23조가 같습니다.34)
정리하면,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칼빈의 종교개혁 이후에 그 역사적 흐름 속에서 영향을 받아 작성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프랑스 신앙고백서가 칼빈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35) 그렇다고 귀도 드 브레가 칼빈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2번 정도 칼빈을 만난 경험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36) 또한 칼빈과 1번 정도 편지를 주고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37) 하지만, 칼빈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이 나온게 1559년이니까 아마도 드 브레는 칼빈의 영향을 아주 최근에 받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의 망명시절 로잔에서 칼빈의 후계자로 알려진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의 지도 아래 헬라어를 공부했다38)는 사실을 통해 볼 때에 칼빈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신앙고백들이 있는데, 그 고백들은 모두가 당시의 역사를 반영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7) 벨기에 신앙고백서가 네덜란드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
이 신앙고백서는 단순히 한 개인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네덜란드 개혁교회 전체의 고백이었으며 이후 네덜란드의 종교개혁과 신앙의 독립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 당시의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는 찰스 5세가 공적으로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처형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대대적으로 개혁교회의 성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한 역사에서부터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미 1523년에 어거스틴파의 수도승이었던 헨리 보에스(Henry Voes)와 요한 에쉬(John Esch)는 브리쉘에서 말뚝에 묶여 화형을 당하는 순교의 역사가 네덜란드에 있었습니다. 이런 핍박의 역사는 스페인의 필립 2세에 와서는 더욱 심해져서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핍박이 극에 달하여 이에 맞선 개신교 지도자들이 1556년에 동맹을 맺고 로마 가톨릭에 대항을 하였습니다. 교회 역사학자인 필립 샤프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의 순교자는 16세기 개신교 전체의 순교자와 거의 같고 로마제국 하에서 초대교회 때 순교한 숫자의 전체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일찍부터 학문이 발달한 나라로, 네덜란드는 당시 재세례파가 용납되어서 널리 펴져 있었고, 루터파의 종교 개혁 운동이 상당한 영향을 미쳐 있었습니다. 나아가 칼빈주의적 생활양식, 사고 방식, 교회 갱신을 채택하여 칼빈주의가 국가 전체적으로 확산되어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로마 가톨릭과 스페인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표출되었습니다.39)
1555년 필립 2세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스페인과 저지대 국가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등극한 이후 개신교에 대한 극렬한 탄압 정책을 폄에 따라 1550년대와 1560년대에 칼빈주의 신앙인들이 급속히 증대되면서 필립 2세의 종교정책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입장을 대변한 신앙문서가 바로 『벨기에 신앙고백서』입니다.40)
앞서 보았듯이 이 고백서는 당시 개신교를 핍박하던 필립 2세에게 보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낸 것은 필립 2세의 핍박 정책에 항거하는 중요한 저항의 방식으로서, 그가 이것을 읽고 관용 정책을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는 것과 동시에 그가 이것을 읽고 오히려 거절할 때에는 참되고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를 순교를 통해서라도 보여주고자 하는 강한 저항 정신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니 귀도 드 브레의 이러한 저항정신은 당시 네덜란드에서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던 수많은 칼빈주의자들로 하여금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결국 스페인의 강압에서 네덜란드를 독립시키는 투쟁으로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41)
실제로 이 고백서의 발행 이후 네덜란드의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1566년에 당시 네덜란드를 통치하던 총독 마르가레타(1522-1586)에게 종교적 탄압을 중지해 달라는 탄원을 하였고, 그 결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이 중지되었습니다.42) 물론 이후에 계속적인 탄압은 있었으나 1598년 그 생애를 마감한 필립 2세의 영향력이 사라지게 되고 16세기 말 네덜란드는 거의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독립하게 되고 1648년 그 유명한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완전히 독립하게 됩니다.43)
8)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구조와 특징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구조와 특징을 봅시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총 37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항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해 다루고, 제37항에서는 최후 심판에 대해 다룹니다. 주제의 순서를 보면 하나님, 성경, 그리스도, 성령, 인간, 구원, 구속자 그리스도, 믿음, 교회, 성례, 세상 나라, 최후심판으로 되어 있습니다.44)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간단합니다. 하나의 항목에 대해서 하나의 글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벨기에 신앙고백서가 종교개혁 초기에 완성된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기록 목적이 자기들의 신앙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 시대가 흘러갈 수록 복잡해 집니다. 내용이 광범위해 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변증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드 브레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변증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45) 그리고 서문에 나와 있듯이 자신들이 로마 가톨릭에 의해 박해 받고 있는 상황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거절하다”(reject), “동의하지 않다”(do not agree), “깨닫고 구별하다”(recognize and distinguish) 등의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46) 그리고 신앙고백서의 초판 표지에는 벧전3:15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1) “이 신앙고백은 “벨기에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현재의 벨기에Belgium라고 알려진 남부 네덜란드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2) 박홍규, 『작은 나라에서 잘 사는 길: 자유-자치-자연 그리고 운하의 나라 네덜란드에서 배운다』(서울: 휴먼비전, 2009), 32.
3) 주경철, 『네덜란드: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서울: 산처럼, 2003), 177.
4) 주경철, 『네덜란드: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 18.
5) Nicolaas H.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Its History and Sources (Grand Rapids: Baker, 2007), 13.
6) 귀도 드 브레 이외에 다른 저자(Adrianus Saravia(1532-1613), Herman Moded(1520-1603), Franciscus Junius(1545-1602), Gottfried Van Wingen and two others)의 가능성에 대해서 Geeraert Brandt, Anthony Thysius(1565–1640), Johannes Uytenbogaert(1557-1644), Jacobus Trigland(1609- ), Martinus Schoock(1614-1669)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언급하였으나, 그것은 근거 없는 것임을 Gootjes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잘 밝히고 있다.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33-48.
7) Clarence Bouwman, Notes on the Belgic Confession (Armadale: The League of the Free Reformed Women's Bible Study Societies, 1997), 손정원 옮김, 『벨직신앙고백해설』(부산: 도서출판 신언, 2007), 28;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48.
8) Thea B. Van Halsema, Three Men Came to Heidelberg and Glorious Heretic: The Story of Guido de Brès,『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서울: 성약, 2006), 125.
9) Van Halsema,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 127.
10) Bouwman, 『벨직신앙고백해설』, 29.
11)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48.
12)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13.
13) 주경철, 『네덜란드: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 196; 박홍규, 『작은 나라에서 잘 사는 길』, 30.
14)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49.
15) Bouwman, 『벨직신앙고백해설』, 31.
16) Van Halsema,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 131.
17)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49.
18) 안트베르펜은 유럽에서 가장 큰 무역항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통해서 상품만 아니라 사상도 들어왔으니 종교개혁 사상이 들어왔고 루터와 칼빈의 가르침이 들어왔다. Van Halsema,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 118.
19) 1559년에는 Catharine Ramon과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낳았다.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49.
20) Van Halsema,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 129.
21)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17.
22)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13.
23) Bouwman, 『벨직신앙고백해설』, 32.
24) Bouwman, 『벨직신앙고백해설』, 33.
25)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13, 161.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작성이 1561년이냐 1562년이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13-14, 19-27를 참조하라.
26)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47, 161.
27)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34, 94-96.
28)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96-97.
29)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97, 117-131.
30)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102.
31)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104.
32)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33.
33)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63.
34)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64.
35)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63.
36)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60.
37)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62.
38) Van Halsema,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과 귀도 드 브레』, 131. 베자와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관계에 대해서는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71-91을 참조하라.
39) 김재성, 『개혁신학의 광맥』(서울: 이레서원, 2001), 341.
40) 김재성, 『개혁신학의 광맥』, 343.
41) 김재성, 『개혁신학의 광맥』, 338.
42) 주경철, 『네덜란드: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 198.
43) 주경철, 『네덜란드: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 214.
44) 주도홍, 『새로 쓴 세계교회사』(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2006), 323.
45) 주도홍, 『새로 쓴 세계교회사』, 323-324.
46) 주도홍, 『새로 쓴 세계교회사』,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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