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원生員·진사進士
생원生員·진사進士는 조선시대 과거시험科擧試驗 중 하나인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자를 말한다.
생원시生員試는 유교儒敎경전에 관한 지식을 오경의五經義와 사서의四書疑의 제목으로 시험하고,
진사시進士試는 문예창작의 재능을 부賦와 시詩의 제목으로 시험 하여 합격자에게 생원生員 진사進士라고 하는 일종의 학위學位를 수여하였다.
한 사람이 같은 해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응시할 수 있으며,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한 사람을 양시兩試라고 하였다.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는 3년에 한차례씩 정기적으로 실시 하는 식년시式年試와 임금의 즉위卽位와 같은 큰 경사가 있을 때 이를 기념하여 실시하는 증광별시增廣別試가 있었는데, 이 시험에서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각각 100인씩 뽑고 이들에게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였다.
따라서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는 비록 그 합격자 중에서 일부 극소수가 생원生員 또는 진사進試의 자격으로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였지만 관리임용제와 직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와 문과文科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여 문과文科 응시자격은 조선초기부터 문과文科는 생원 生員 또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자로서 성균관에 입학하여 일정기간(경국대전經國大典에 300일)의 수학修學을 마친 자만이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어왔다.
즉,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는 문과文科에 응시하기 위한 예비 시험제도로 여겨왔으며, 문과 文科와는 별도의 독립된 시험제도로서 존재·운영되었다.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 설치의 본래 목적은 성균관에 입학 할 자격을 부여하는데 있었지만, 실제로는 생원生員 또는 진사 進士로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는데,
이유는 성균관成均館의 운영이 부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입학을 기피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과文科의 시험제도가 처음부터 본래의 원칙대로 운영되지 않아 생원生員이나 진사 進士로서 굳이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300일간의 수학修學을 마치지 않아도 얼마든지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가 아닌 유학幼學으로 호칭되는 사람들도 문과文科에 예외적으로 응시할 수 있는 길이 처음부터 열려 있었다.
또한 시대가 내려올수록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를 거치지 않고 문과文科에 진출하는 사람의 수가 점차 많아져 조선말기의 약 100년 간에는 문과文科 급제자수의 80%(조선초기 15%) 이상을 이들 유학幼學이 차지하였다.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모두 229회가 있었으며, 그 중 67회가 증광별시增廣別試였다. 문·무과文武科의 경우는 식년시式年試와 증광별시增廣別試 외에도 별시別試·정시 庭試 등 부정기적인 시험이 있어 그것이 모두 500여회나 되었는데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는 식년시式年試와 증광별시增廣別試 두 종류 뿐 이었다.
조선말기에 오면서 진사進士를 생원生員보다 많이 뽑았지만 조선초기 약 60년 동안에는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생원生員만을 뽑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진사進士의 수가 오히려 적게 나타나고 있다.(단종端宗 1년<1453년>부터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를 병설)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의 두 단계로 이루어졌는데, 초시初試는 한성漢城(서울)과 각 도道에서, 그리고 복시覆試(2차시험)는 한성漢城에서 실시하였다.
초시初試에는 한성漢城 및 각 도별道別로 뽑게될 인원수가 배정되어 있었다.
즉, 한성시漢城試에는 생원生員 200인·진사進士 200인이었으며, 각 도별道別로 실시하는 향시鄕試에는 생원生員·진사進士가 각각 500인으로,
경기도에 60인, 충청도에 90인, 전라도에 90인,
경상도에 100인, 강원도에 45인, 평안도에 45인,
황해도에 35인, 함경도에 35인씩 모두 1,400인이 배정되었는데, 최종시험에서 뽑을 인원의 7배의 수를 지역별로 안배하여 과거제 科擧制의 운영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지역 간의 불균형을 억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복시覆試 최종선발에서는 지역 간의 균형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생원시生員試 합격자 중에는 지방출신이, 진사시進士試 합격자 중에는 서울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조선 후기에 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면서도 자신을 진사進士로 기록하고 일반적으로 그들을 진사進士로 호칭하는 경향이 생겼으며, 생원生員이라는 호칭이 ‘김생원’이니‘박생원’이니 하는 식으로 속화되어 갔는데, 아마도 진사시進士試가 단순히 경서經書에 관한 지식만을 시험 하는 생원시生員試 보다는 훨씬 어려웠다는 점과 또한 생원生員의 대부분이 지방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작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의 응시자격은 기본적으로 문과文科와 같았다. 다만 문과文科는 통훈대부通勳大夫 이하만이 응시할 수 있다고 한 것을,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에는 통덕랑通德郞 이하로 규정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사회적 위신도 무과武科출신자 보다 훨씬 높았다.
♣ 통훈대부通勳大夫 : 조선시대 관직계급으로 문관 정3품 당하관
♣ 통덕랑通德郞 : 조선시대 관직계급으로 문관 정5품 당하관
조선시대 어느 가문家門이나 또는 지역에서 배출된 홍패紅牌· 백패白牌의 수數를 가장 중요한 기준의 하나로 간주하였는데, 그 홍패紅牌 속에 일반적으로 무과武科 홍패紅牌는 들어가지 않았다.
백패白牌는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 합격자에게 수여하는 합격증으로서 조선 전체를 통하여 년 평균 100인이 못되는 이들의 사회적 위신은 오늘날의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았으며,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는 많은 사람들이 관계官界 진출이나 문과文科에 응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원生員·진사 進士라고 하는 그 지위를 최종목표로 하여 응시하였다.
그러므로, 생원生員·진사進士가 되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문家門과 후손의 영예榮譽를 위하여 절실한 소원이었으며, 학자學者로서의 공인된 지위를 확보하는 동시에 선비로서의 위신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