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원식 교수 정년기념논총(민족문학론에서 동아시아론까지)에 실었던 글 일부를 발췌했음. 각주 생략.
이 글에서는 ‘한류’ 현상을 참조체계로 삼아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교류’라는 큰 틀 속에서 홍콩 대중문화의 한국 수용을 고찰했다. 이는 문화의 속성이 쌍방향이라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중국인들이 열광하는 ‘한류’ 콘텐츠 가운데는 우리가 수용해 ‘토착화’시킨 중국적 요소가 있으며, 각 지역이 겪은 ‘근현대’ 토착화 경험의 비교․대조가 가능하다. 이에 대한 효과적 설명을 위해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횡단’이라는 시좌가 요구되고 나아가 ‘문화 간 번역’의 문제가 대두된다.
초국적 문화 횡단과 소통의 시대에 문화 간 번역은 필수적인 과제다. 홍콩문화 수용 사례에서 알 수 있다시피, 한국의 ‘영웅문 현상’은 진융 텍스트의 두터움을 충분히 번역하지 못하고 그 표층인 무협 층위만을 번역했다. 출판사가 주도했을 표층 번역은 당시 독서시장 요구에 부응했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우리는 중국에 대한 심층 학습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21세기의 새로운 완역은 독자에게 외면당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문화횡단적(transcultural) 교류라는 문제의식으로 중국영화를 대상으로 민족지 이론을 문화번역 이론으로 보완하려는 레이 초우(Rey Chow. 周蕾)의 문제의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민족지는 불평등한 문화 간 번역이다. 서유럽 관찰자가 비서유럽 관찰대상을 주관적으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시각성(visuality)을 매개로, 그녀가 제기하는 대안은 그동안 ‘보여지는’ 대상이었던 토착민이 보는 주체로 새로 탄생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식의 방어적 토착주의와는 다르다. 레이 초우의 ‘문화 간 번역’은 서양과 동양 사이의 불균형적이고 위계적인 권력관계와, ‘오리지널’과 ‘번역’ 사이의 불균형적이고 위계적인 권력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동아시아 권역 내 ‘문화 간 번역’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그녀가 ‘문화 간 번역’을 “전통에서 근대로, 문학에서 시각성으로, 엘리트학자문화에서 대중문화로, 토착적인 것에서 외국의 것으로, 외국의 것에서 토착적인 것으로 등등의 변화를 비롯해서 광범위한 행위 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설정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동아시아 권역 내 광범한 횡단과 소통을 포괄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 권역 내 대중문화의 횡단과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동아시아는 우선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원산지인 미국을 ‘하나의 지방’으로 설정하면서 각각 ‘자기 민족지(auto-ethnography)’를 기록할 필요가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미국 대중문화도 대부분 아프리카 흑인문화에 그 기원을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 아닌가? 이제 동아시아는 ‘오리지널’로서의 ‘빌보드 차트’에 연연해하지 말고 동아시아 자체를 그리고 자국을 문제화해야 한다. 그 후 동아시아 내부에서 각자의 특수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상대방 문화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갔다 나오는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 쑨거(孫歌)는 근현대 일본사상사를 고찰하면서 다케우치 요시미를 따라 일본의 근대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로부터 루쉰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 계발되어 다시 중국의 근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한국과 지적 연대를 장기간 지속한 소수의 타이완인을 자처하는 천광싱(陳光興)은 “경계 넘기와 교류는 자신이 처한 곳을 잘 보고 제대로 해석하기 위한 것이다”는 진리를 깨닫고 “서울을 이해하는 만큼 타이완을 더 잘 알게 된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워한다. 쑨거가 일본에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면서 루쉰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획득하고 천광싱이 서울을 이해하는 만큼 타이완을 더 잘 알게 되었듯이, 우리도 중국, 일본, 그리고 타이완에 들어가 심층 관찰한 안목으로 한국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학인의 출현이 절실하다.
대중문화에 각인된 문화를 번역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앞의 진융 사례에서 알 수 있다시피 상업적 번역은 표층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오역되면 바로잡기가 쉽지 않다. ‘영웅문 키드’들이 완역된 ‘사조삼부곡’에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그 증좌다. ‘문화 간 번역’은 심층 번역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대중문화 텍스트에 각인된 타국 문화를 자국 문화 맥락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가져오기 전 반드시 타국 문화 맥락에 들어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동아시아 권역에서의 문화 횡단과 소통은 쌍방향/다방향의 들고나는 행위가 반복되고 그 반복의 차이가 축적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첫댓글 다시 읽어도 재미있고, 그리고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쑨거와 천광싱, 그리고 한국의 학인....>부분은 의미심장하군요. 틈이 나시면 전체 논문 파일을 보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지금 하고있는 급한 일 끝나고, 찬찬히 읽어보고 싶네요. 날이 많이 덥습니다. 건강도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