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을 아세요.
김산, 장지락을 혹시 아십니까?
나는 그동안 이름만 알고 약간의 요약말 알고 있었던 아리랑, 김산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너무 감동이어서 그 느낌을 이렇게 적어도 되는지 불량스럽다는 느낌까지 갖게 된다. 사람이 똑같은 사실 앞에서도 상당한 느낌과 인식의 차이가 있기에 감히 뭐라 말하기가 어렵지만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여보시오. 세상 사람들! 김산, 아리랑을 한 번 꼭 보시오." 크게 소리치고 싶다.
그건 아마도 나름 나도 그냥저냥 진보운동이랍네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건 아닐까 싶어진다. 그 처연한 느낌과 투쟁의 깊이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한 인간이 가지는 실존의 고민과 인식은 그래도 대충 비숫하지 않을까 하는 건방진 공감으로부터 발로하는 것이리라......
대학1학년에 운동권학생이 되었고, 그 운동권이 되면서 읽었던 사회과학은 전두환군사독재시대와 맞물려서 인생의 전부가 되었다. 지난 초등, 중등, 고등 12년의 교육이 그야말로 허위와 거짓, 사기였다는 사실 앞에 나는 힘들고 괴로웠으며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은 철저히 시대를 거역하며, 반항아, 저항하는 인간으로 살아 갈 것을 결심했다.
1984년 내가 경험하고 시대의 사상의식으로 가졌던 열정과 결심은 그 오래 전에 김산에게서도 똑같이 있었다. 한 인간이 가지는 존재감과 혁명성은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나는 인정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도자가 필요하고 지도자는 그 만한 몫을 해낸다. 김산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11살 나이에 친구와 싸움으로 아버지에게 혼난 뒤에 김산은 집을 나갔다. 당시 구두가게를 하는 둘째형의 도움으로 김산은 기독교계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1919년 3월 1일 선생님의 만세운동 참여가 필요하다는 강론에 김산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3.1평화운동의 한계로부터 김산은 새로운 운동에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3.1운동이 끝나고 김산은 일본에 건너가 대학에 다닐 필요성을 가지고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금 소련에서 공부할 필요서을 가지고 작은형에게 받은 당시 200원을 가지고 만주로 향하게 되었고, 김산은 700리를 걸어서 조선독립군학교을 찾아 간다.
도대체가 나로서는 상상이 쉽지가 않다. 우리 나이로 15살 어린 소년이 일본유학을 가고, 일본에서 모진 고생끝에 소련행과 만주로 700리 도보여행은 식민지 조선의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지 않았겠는가!
그 길에 만난 목사의 호의와 목사딸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 그리고 결혼에 대한 고민과 갈등, 개념정의 그리고 이어진 왜놈들의 목사식구를 비롯한 조선인민에게 학살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가 너무도 어렵지 않았을까?(목사는 두 아들이 산 채로 세동강나서 죽는 걸 봐야 했고, 목사는 자기가 죽을 무덤을 파서 산 채로 매장당해 죽었으며, 아내는 강물에 뛰어 들었고, 김산의 첫 연인이랄 수 있는 14살의 소녀는 모른다.)
나는 1984년 운동권 학생이라는 자부심이 가득찼다. 자국의 인민을 총칼로 살해하고 집권한 전두환군사독재에 맞서서 싸울 수 있다는 사실에 세상은 달랐다. 세상은 그냥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지배계급의 착취와 수탈로부터 만들어지는 역사의 질곡이라는 사실 앞에 나는 투쟁해야 함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난쏘공', '어둠의 자식들', '광장', '해방신학', '해방전후사의 인식', '김구, 이승만, 박정희'에 이르는 근현대사의 새로운 이해와 인식은 나를 평범한 시골 촌놈 출신으로부터 깨어 있는 운동권 학생으로 만들어 가는데 부족하지 않았다. 학교와 교회에서 이루어진 동료, 선배들과 함께한 토론과 술자리, MT는 모든 것을 새롭게 정의하는 시간으로 되었다.
고등학교까지 고창이라는 시골학교에서 평범한 모범생이 완전히 색다른 인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어쩌면 시골교회 신학대 선배가 이야기했던 '인간사상연구회'가 이렇게 한 사람을 빠르게 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을 역사의 우연이 아닐까 싶다.
신학대학에서 인간사상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런 느낌으로 그 써클을 이야기했던 선배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써클에서 만난 80학번의 김재엽선배는 이미 원풍모방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고 '연구회' 후배들을 목적의식적으로 운동권이 되도록 노력했던 것이었다. 물론 그 써클의 다른 선배들도 세상을 보는 눈이 당연 비판적이었다.
압구정동 '현대교회' 대학부는 기독학생운동을 하는 운동권 대학부였다. 대한민국의 대표부자동네 압구정동이었지만 그 현대아파트 현대상가에 있던 '현대교회'는 최소한 군사독재에 대해 비판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교회였다. 예배 중간에 드리는 대표기도도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상당한 여유를 가진 동네의 교회였지만 군사독재의 문제점만큼은 정확하게 인식하고 모인 교회, 교인이랄 수 있었다.(나는 현대교회에 있으면서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진보적인 목사, 신학교수들의 설교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문익환목사님이나 한완상교수도 이 교회를 통해서 만났다.)
현대교회의 이러한 정황으로부터 '대학부'의 활동은 당연 전두환군사독재를 타도하는 공부와 활동, 토론과 논쟁으로 가득찬 공간이었다. 그러한 공간이 현대교회대학부만이 아니라 청담교회, 한빛교회, 새롬교회 등 지역적 결집을 하고 있었으며, 크게는 '장청'이라는 기독공간으로 연대하고 투쟁했다.
<계속...>
나는 아리랑을 통해서 김산의 위대함과 함께 내 자신의 지난 날을 개략적이나마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아리랑'을 최우선적으로 추천하면서...
첫댓글 참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억을 새롭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글이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