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
(연보)
1921 (01세)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출생
1934 (14세)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졸업.
6년 내내 성적이 뛰어났으나 병약하였음
1941 (21세) 선린상업학교 졸업. 성적 우수(특히 영어, 주산, 미술에 뛰어남)
1945 (25세) 8·15 광복.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옴.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
1946~1948 연희전문 영문과 편입. 졸업은 못함
1950 (30세) 6·25 발발. 의용군 징집. 거제도 포로수용소 수용됨
1952 (32세) ~ 포로수용소에서 석방. 이후 통역, 교사, 기자일 등을 하며 문학활동을 함
1960 (40세) 4·19 의거. 이후 죽을때까지 적극적으로 현실참여 문학활동을 함
1968 (48세) 대표작 '풀' 씀. 6월 16일 귀가길에 교통사고로 사망
서정주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한국 시문학사에 가장 만만치 않은 영향을 남기고 있는 시인, 커다란
눈이 잘 생긴 김수영 시인의 모습입니다. 시인은 6·25 때 의용군으로 끌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잠깐 생활했다 합니다. 돌아가신 나의 아버님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잠깐 수용되셨는데,,, 시인과
아버님이 나이가 같아 각별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시인과 나의 아버님이 닮은 것 같네요.
세상을 바로 보려는
이 다듬어지지 않은 시인을 떠올릴 때는
늘 사슴 같은, 소 같은
아니 어둠을 꿰뚫는 고양이의 커다란
눈망울을 생각한다
삶과 현실을 응시하고 자유와 꿈과 설움과 사랑을
젊은 시인의 마음으로 온몸으로 밀고 간 시인
1층 전시실 입구 오른편에 시인의 대표시 '풀'이 걸려 있고,
옆에는 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동영상이 상영됩니다.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
시인의 대표시입니다. 2008년 조선일보에서 현존하는 문인 100명에게 애송시 100편을 뽑는 투표를 하게
하였는데, 그때 1등으로 뽑힌 시가 이 시입니다.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풀을 노래한 시로 읽어도 좋고,
민중시나 저항시로 읽어도 좋습니다. 읽는 우리들 마음이겠지만 저는 그냥 풀로 읽는게 더 좋네요.
시인의 육필원고입니다. 부인 김여사가 보관하여 오던 각종 자료와 유품, 여기저기서
기증 받은 자료와 서적 등 시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눈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눈에다가 기침을 하고 가래라도 뱉자'고 외치는 아주 단순한 시이지만,,,
눈을 닮기 위해 자신을 정화하려는 시인의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살아 있다'라고 외치는 시인의 순수하고 정정한 모습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2층 전시실입니다. 저 안쪽에 시인의 서재가 복원되어 있네요.
서재 왼편 작은 공간에는 시인의 일대기를 담은 동영상이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푸른 하늘을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혁명은 고독하다' - 자유를 향한 자의 고독한 의지가 우리의 가슴을 찡하고 울리네요.
김수영시인은 '시인은 사회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혁명가와 같은 존재로서
그런 인식으로 시인은 시를 써야한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수영은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통해 현대시 영역에서 시의 현대성을 가장 적극적
이고 날카롭게 탐구한 시인입니다. 그의 초기시는 난해한 성향을 띤 모더니즘시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4·19 를 겪으면서 자유와 그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 그리고 소시민의
비애를 성찰하는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시, 시론, 시평 등을 발표한 대표적인 참여시인입니다.
복원된 서재입니다. 시인이 쓰던 저 낡은 탁자는 미 군정청 직원이 쓰다 버린
것을 가져왔다 하네요. 저기 앉아 시를 쓰던 시인을 상상해 봅니다.
거 미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1954년>
지독히 비시적(非詩的)인 산문 문장을 그대로 시로 살려놓고 있는 이 시는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
처럼' 치 떨리게 서럽다. '몸이 까맣게 타버려서' 멀리 있는 사람의 가을까지 보인다. '여전히 바라는 것'
이 있고, 나의 바람이 '으스러진 설움'이 될 것을 알기에 나는 악착같이 시를 쓰고 사랑하는 것이리라.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가 '나'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거미' 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우리의 설움은
가뭇하게 타버리고 가을 찬바람처럼 맑아져 다시 오리라. 모든 사랑을 첫사랑이라 생각하면서, 첫사랑
처럼 마지막 사랑에 몸서리치리라. 까맣게 몸을 태우면서. (김선우, 시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연인의 집 근처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을 휘파람
불곤 했다는 김수영. 6·25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야전병원장 통역관으로 일할 때
변화 없는 삶이 지겨워 "시간을 견디기가 너무 힘이 들어 이를 하나씩 뺐다"는 김수영.
술에 취하면 틀니를 빼 손수건에 싼 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그 때문에 부인은 시인이
만취해 돌아온 날이면 주머니에서 틀니부터 찾아내 컵 속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평소처럼
주머니를 뒤졌는데 틀니가 없으면 그의 아내는 전날 그가 다닌 술집들을 시간 순서대로
다닌 끝에 어느 술집 들통에서 틀니를 찾아냈고, 김수영은 그것을 끼워주면 어린애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한국의 현역 시인치고 김수영을 거치지 않은 이가 없는, 김수영의 시를
읽는 사람에 의해 매번 다른 김수영이 되는 김수영. 어느 날 교통사고로 훌쩍 가버린 뜨거
운 심장의 김수영. (김선우, 시인)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 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 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메세지가 강한 시인데, 도덕적 순결성을 지향하는 소시민의 갈등과 고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는 자신의 생각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방만하여 시적 긴장감이 뚝 떨어졌네요. 순수시
와는 다르게 메세지 전달을 위주로 하는 참여시나 민중시에서 볼 수 있는 태생적인 한계입니다.
평론가 김현은 '1930년대 이후 서정주·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나 시의 난삽성을 깊이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 라고 김수영을 평하였습니다.
도봉산 등산로 입구에서 자운봉 방향으로 한 10분쯤 오르다 보면 오른편에 도봉서원 복원공사장
펜스가 보이고 그 앞에 시인의 시비가 외롭게 서 있습니다. 비양에는 그의 대표시 '풀' 일부가 새
겨져 있습니다. 지나가는 등산객들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고... 시인의 묘소를 찾아보았
으나 방학동 본가터 근처나 시비가 있는 여기에도 당최 보이지 않아, 내려오다 국립공원안내원에
게 물어봐도 모르고 도봉구청 문화관광과에 물어도 잘 모르네요. 이 시비도 방학동 묘소앞에 있던
것을 여기로 옮겼다 하는데, 그때 시인의 유골을 화장하여 이 시비 근처에 뿌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김수영의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에 나오는 유명한 글을 소개하며 오늘의 탐방을
마칩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