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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舊約)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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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약 성경의 배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주욱 한번 눈여겨 읽어 봅시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역사서>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시가서>이며, <선지서>는 어떤 것들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역사서> 동네는 창세기부터 에스더까지이고, <시가서> 동네는 욥기부터 아가서까지, <선지서> 동네는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입니다. 각각 17권, 5권, 17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성경책 목록표에 세 가지 색연필로 구분해서 같은 부류를 표시해 봅시다(교통신호등의 색: 초록, 노랑, 빨강). 예를 들면 <역사서>는 초록색, <시가서>는 노란색, <선지서>는 빨간색 등으로 나누어 색을 칠해 봅시다. 세 가지로 눈에 확 띄게 구분해 놓는 것이 이번 일독학교 공부에서는 아주 매우 중요합니다. 이 구분이 일독학교의 성경읽기표를 만드는 데 기본이 된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이제 세 부류별로 직접 그 이름들을 적어 봅시다.
역사서 (17권) - 창세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에스더
시가서 ( 5권) - 욥 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아 가
예언서 (17권) - 이사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말라기
2. 구약 39권의 내용
1) 역사서 부류 17권
눈치가 있으신 분은 <역사서>! 할 때 벌써 감 잡으셨을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시간을 타고 흘러간다는 사실을 … 그렇습니다. 이 역사서 17권의 책들은 앞에 있을 책인지 뒤에 놓일 책인지 아주 분명한 순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17권을 비슷한 시기끼리 모아서 보통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a. 창조시대 : 창세기 1∼11장: 인류 일반역사
b. 족장시대 : 창세기 12∼50장: 이스라엘 국사의 시작
c. 모세시대 : 출애굽기 / 레위기 / 민수기 / 신명기
d. 사사시대 : 여호수아 / 사사기 / 룻기 / 사무엘상 / 사무엘하
e. 왕정시대 : 열왕기상 / 역대상 / 역대하
f. 포로시대 : 에스라 / 느헤미야 / 에스더
( 앞 글자만 따서 읽으면 창·족·모·사·왕·포가 됩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 하는 학생은 어느 한 부분만 달달 잘 외우지 않습니다. 전체를 이해한 후 그 속의 부분 부분이 어디에 끼워 맞춰지고 있는지 그 자리를 아는 학생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하나하나가 각각 어떤 특징과 내용이 있으며 그 나머지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까지를 아는 학생이 공부를 잘 하는 학생입니다. 우리 일독 학생들도 구약의 39권 중 <역사서> 부류에 속한 17권을 위의 여섯 시대로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각 시대마다 무슨 특징이 있어서 그렇게 구분되어야 하는지도 배웁시다. 또 그 각각의 시대 속에 어떤 성경들이 들어가는지도 배웁시다. 성경목록을 순서대로 외우는 것도 훌륭하지만 이런 틀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착착 제자리에 끼워 넣을 줄 알면 더 훌륭한 학생입니다.
① 창조, 족장, 모세시대? 창세기 / 출애굽기 / 레위기 / 민수기 / 신명기? -
모세오경
'모세오경'이라는 말을 모르시는 분은 거의 없으실 줄 압니다.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의 책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역사들인데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어떻게 이 창세기를 쓸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신 것입니다. 인류가 창조된 이후 어떻게 그 역사가 흘러내려 갔는지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감추셨던 비밀을 모세를 통해 폭로(?) 하신 셈입니다. 창세기 앞부분은 농축된 인류의 비밀이 집약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한두 번 읽는 것만으로는 알맹이가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깊은 사색과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② 사사시대? 여호수아 / 사사기 / 룻기 / 사무엘상·하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해서 차지하는 역사입니다. 또한 사사기도 그 뒤를 이어 땅 전쟁의 기록으로 시작됩니다. 사사기의 여러 부분이 여호수아와 겹쳐서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만큼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는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룻기는 사사 기드온 시대를 배경으로 한 기록입니다. 또한 마지막 사사라고 볼 수 있는 사무엘의 이야기를 비롯해서 사울, 다윗의 역사가 기록된 사무엘상하도 역시 사사시대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사사기 한 권만 사사시대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폭 넓게 여호수아부터 다윗 시대까지 범주를 만들어 놓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③ 왕정시대? 열왕기상·하 / 역대상·하
왕정시대(열왕기, 역대기)와 포로시대(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의 성경들은 자세한 설명들이 좀 필요한 대목입니다. 열왕기부터 포로시대가 어려운 부분이라서 그렇습니다. 사무엘상하는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 일어난 일이니까 그냥 그렇게 계속 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이야기(열왕기상)부터 포로시대로 이어지는 부분은 복잡합니다. 그래서 지금 각 권 설명을 하면서도 말을 좀 많이 하려고 합니다. 제4과 읽기 실제에서 더 자세히 다루지만 지금 이곳 각 권 공부에서 이해하고 지나가야 할 것들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될 수 있으면 또 설명하고, 또 설명하려고 합니다. 자꾸만 성경의 흐름을 들어야 마지막에는 전체를 얼기설기 꿸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④ 포로시대? 에스라 / 느헤미야 / 에스더
지금 무얼하고 있는지 놓치지 맙시다. 역사서 17권을 한 권 한 권 간단하게 보고 있는 중입니다. 창족모사왕포(어? 이게 뭐더라? 하면 안 되지요?) 중에서 포, 포로시대의 성경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를 공부하려는 것입니다. 이 세 권의 책은 한꺼번에 설명을 합니다. 주의해서 한번 읽어보세요.
2) 시가서 부류 5권 (성문서, 聖文書)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전했습니다. 즉 제사장들은 율법을 알리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을 전하며, 지혜자들은 모략을 베풀었습니다(참조: 렘 18:18, 겔 7:26). 제사장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선지자들은 선지자학교에서 후계자들을 양성했습니다(참조:왕하 2:5, 4:38∼44, 6:1, 2). 그리고 장로와 지혜자들은 지혜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전도서의 '전도자'는 지혜학교의 교사였을 것입니다. 잠언과 전도서에는 '내 아들아'라는 호칭이 자주 등장하는데, 한글 개역성경에서 '선지자의 생도들'이라고 번역된 말이 문자적으로 '선지자의 아들들'을 뜻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전도자나 지혜자가 '내 아들'이라고 부른 자들은 바로 지혜학교의 생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혜문학은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에서도 발견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은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토대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주변 세계의 지혜문학을 초월합니다.
3) 예언서 부류 17권 (선지서)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는 모두 다 선지자의 이름입니다. 말라기도 사람이름입니다. 마지막 '말, 末'자에 기록할 '기, 記'자가 아닙니다. 이 <예언서> 부류의 17권은 왕정시대(12권)와 포로시대(5권)의 산물입니다. 사사시대도 아닙니다. 모세시대도 아닙니다. 족장시대도 아닙니다. 당연한 얘기인 것 같지만 이 사실을 못 박아 놓고 예언서 부류를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왕정과 포로시대, 기억하십시오. 통상 선지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하나는 대선지서, 또 하나는 소선지서입니다.
'대' 자가 붙은 것은 그 선지자가 '위대한 선지자'여서가 아니라, '그 책의 분량이 많아서'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이 대선지서이고, 나머지 12권은 소선지서입니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분량보다 역사적인 시기에 의해 목록을 구분하는 것이 성경을 읽는 데는 더 중요합니다. 공교롭게도 시기에 의해서 포로, 왕정으로 구분하고 보니 이것 역시 5권, 12권입니다. 포로시대 선지서 5권(에스겔, 다니엘, 학개, 스가랴, 말라기), 왕정시대 선지서가 그 나머지 12권(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입니다. 대선지서, 소선지서로 나눈 것과 왕정시대, 포로시대로 나눈 것을 잠잠히 비교해 보십시오.
이제 아래에서 선지서 각 권 공부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성경목록은 대선지서, 소선지서로 구분이 되어 순서가 매겨있기 때문에 이사야부터 출발합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남방유다가 아직 망하기 전에 활동한 왕정시대 선지자들입니다. 각 선지서 옆에 어느 왕 때의 활동인지 표기해 놓았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하겠구나, 감 잡으셔야 합니다.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는 서로 통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난 과에서 공부한 것과 같이 구약을 17권, 5권, 17권으로 그 문학적 유형에 따라 정리만 해도 마음이 산뜻해집니다. 그리고 각 권에 대해 하나하나 정리하고 보니 구약을 다 배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바로 그 <문학적 유형>에 따라 나눈 성경 목록이 얼마나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무리 유형별로 산뜻하게 구분을 해 놓았어도 구약을 읽어 내려갈 때 여전히 엉켜 있는 실타래같이 느껴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목록을 공부할 때 특히 왕국, 포로시대 부분의 목록들이 복잡했었지요? 거기가 막혀 있는 체증 부위이기 때문입니다. 나란히 붙어 있기는 해도 <역사서 부류>인 에스더와 <시가서 부류>인 욥기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또 아가서를 읽다가 이사야를 읽으면 전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문학적으로 분류하다 보니 두 부류의 경계선에 접해 있으니까 우리는 그냥 그렇게 읽는 것일 뿐입니다. 선지서 부분들의 책도 왔다 갔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포로에 있다가 왕정으로 갔다가, 또 포로로 왔다가 왕정으로 가고 말입니다.
즉, 선지서 17권은 왕정시대와 그 이후 포로시대에 살던 선지자들의 예언이라고 했는데 왕정시대의 역사와 포로시대의 역사 자체를 잘 모르니 선지자들의 예언은 더 더욱 이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대선지서들과 소선지서들 속에는 왕정시대와 포로시대가 각각 들어 있어서 이것들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1과를 지나왔어도 여전히 어리벙벙한 겁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앞에서부터 무조건 읽을 것이 아니라 읽기 전에 먼저 정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학적 유형에 따라 분류된 이 세 부류를 어떻게 하면 통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우리 일독학교의 이슈입니다.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를 통하게 하려면? 생각해 보십시다.
1. 구약 성경 39권을 시간 순서대로 다시 분류합시다.
문학적 유형에 의해서 분류되어 있던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 세 종류의 유형을 무너뜨립시다. 그리고 구약 39권 모두를 역사적인 순서에 의해서만 새로 배열해 보자는 것입니다. 시간 속에서 다시 순서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분류”라는 용어보다는 “통합”이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39권을 일단 시간 순서라는 한 가지 조건에 의해서 정리를 해 놓으면 복잡할 게 없습니다. 때로는 문학적 유형, 때로는 시간 순서, 때로는 책의 분량 등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분류되어 있던 것을 그저 시간 순서에 의해서만 정리하자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마음먹고 나면 앞으로 읽어야 할 구약이 왠지 단순하게 느껴집니다. 대충 이렇구나 하는 전체 윤곽을 일단 잡아 놓고 출발하면 전체 속에서 내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마치 여행하기 전에 지도를 충분히 연구하고 떠날 때처럼 그렇게 든든하고 흥미진진해집니다. 전체가 일직선상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될까요? 이 작업을 하려면 다음 몇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1) 베이스캠프 설치
(우선 베이스캠프(Base Camp)를 설치합시다. <역사서>를 베이스캠프로 쓰자는 겁니다.) 39권을 시간 순서대로 다시 배열하려면 우선 39권 하나하나가 다 어느 시대의 책들인지를 알아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1과에서 39권 하나하나를 역사순서에 초점을 맞춰 설명한 것입니다. 눈치 채신 분도 계시지요? 자,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 입장에서 볼 때 제일 쉽게 눈에 들어오는 시간 순서로 된 것은 어떤 부류의 책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역사서> 부류의 책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사서>는 그 자체가 시간을 타고 흘러 내려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서>는 시간을 타고 흘러 내려온 순서대로 이미 되어 있으니까 이 <역사서>를 베이스캠프로 쓰자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선 먼저 <역사서> 17권을 주욱 벌려 놓읍시다. 17권이 베이스캠프입니다. 그리고 나서 <시가서>의 5권, <예언서> 17권을, 벌려 놓은 베이스캠프 17권 사이사이 어딘가에 쏙쏙 끼워 넣자는 말입니다.
어디에 끼워 넣어야 할까요? 각각 자기 시대에 끼워 넣는 겁니다. <시가서> 5권, <예언서> 17권은 진공 상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설명을 하면서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 이렇게 셋으로 구분했던 개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막연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 일부러 <>에 넣어 표기하고 있습니다. 1과에서 여러분의 성경책 목록표에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으로 구분해 놓으라고 했었죠? 이 구분이 우리 일독학교에서는 매우 중요하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시죠? 이제 앞으로 <>표시에 들어있는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라는 말을 보시면 얼른 17권, 5권, 17권이라는 복수 개념이 떠올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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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꿰뚫는 안경=
성경은 1,600년 동안 약 40명의 인간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성경의 저자라면 이 성경은 반드시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통일성이 있어야 합니다. 한 주제를 가지고 분명한 목적을 향해 흘러가야 됩니다.
수천 년의 인간 역사 속에서 인간저자들이 그때그때 자기 상황에서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기록했습니다. 그 후 역사가 흘러가면서 그것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숨겨져 있기도 했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낱권이 어느 시점에 한 군데 모아지는 때도 있었습니다(70인 역). 복음서나 편지로 쓰여진 것들은 교회사 속에서 종교회의를 걸쳐 '이것만 정경이다' 하고 최종적으로 인정한 때도 있었습니다. (제1과에서 배웠죠?) 그래서 오늘날 구약전서, 신약전서라는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성경책이 마치 어떤 한 사람이 책상 앞에 앉아 써 내려간 소설처럼 그 사건과 내용이 퍼즐 맞듯 착착 앞뒤가 맞아떨어지고, 결국에 가서는 한 폭의 그림으로 한 눈에 확 들어온다면 우리는 이 책이야말로 하나님이 쓰신 책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어느 순간 이 사실이 뼈 속 깊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사도 요한처럼 죽은 자같이 되어 엎드러지는 경험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늘 이런 심정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는 책이라서 그렇습니다.
1. 관점 1 : 성경은 '누가 왕이냐?'를 다룬 왕 싸움 이야기이다.
'결국, 인류 역사에서 누가 왕이어야 하는가?'를 가장 기본적인 밑그림으로 보자는 말입니다. 누가 왕이냐?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왕이냐, 아니면 인간 그 누구가 왕이냐를 다룬 것이라고 성경을 크게 일단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왕"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 중 하나는 "다스림"의 개념입니다. "통치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다스림"이라는 말은 반드시 "다스림을 받는 대상"이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왕"이라는 말에는 "국가개념"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생각들을 갖고 한번 출발해 보십시다.
세상나라든 하나님 나라든 '나라'를 이루려면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주권, 국민, 영토입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사회 시간에 배웠던 내용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도 이 틀로 스케치하면 끝입니다. 하나님이 왕(주권)이신 나라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스라엘 백성(국민)을 만들어 가시고, 출애굽이라는 현실문제로 구원을 경험케 하시고, 가나안 땅(영토)을 주시고, 왕의 대리 통치자 다윗을 세우시더니, 결국은 당신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와 목숨을 바쳐서 백성을 만드는 "이상국가의 모델"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세상나라들은 백성의 목숨을 밟아야, 자신의 통치권이 생기는 모델입니다. 섬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가서 정복합니다. 그 땅의 백성들을 죽여 피를 땅에 쏟아야 그 정복자의 왕권이 인정되는 샘플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나라 왕 예수는 자기 생명을 죽여, 피를 쏟아 바쳐서 그 백성 하나하나를 국민으로 삼는 샘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사실을 알고 그 왕에게 항복하면 그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2. 관점 2: 셋 계열은 가인 계열과 섞이면 안 된다, 정복해야 한다.
1) 아브라함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인가?`… 그는 셋 계열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아브라함에 와서야 시작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11장까지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심어 놓으셨던 사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명령하시고 그에게 나타나십니다만 11장까지의 역사 속에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거룩한 "계열"을 이루어 역사를 타고 흘러 내려 왔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다음 세대가 있었으며, 이런 흐름이 계속되어 거룩한 무리의 계보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일독학교 학생 여러분! 그렇다면 성경이 처음으로 소개하고 있는 족보가 누구한테서 시작해서 누구에게로 가는 것인지 눈여겨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은 셋으로부터 시작되는 셋 계열의 족보입니다(창 5장). 그런데 이 셋은 누구 대신 나타난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벨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한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다시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구원입니다.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제물을 가지고 나가 하나님께 용서를 빌며 다시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의 백성으로 살아갔습니다. 그 부류의 사람들 중 대표가 아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사람들은 가인이 대표로 있는 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종교전쟁이 가장 무섭습니다. 테러와의 전쟁도 그 뿌리가 그곳에 닿아 있습니다. 세상에 처음 일어난 살인도 그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자들은 세상의 핍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결단코 이 무리들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셋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셋이야말로 아담을 이어가는 후손으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족보라는 형식을 빌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창세기 5장 1∼4절을. "아담 자손의 계보(족보)가 이러하니라…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이 이후로 성경은 아담이 가인을 낳았다거나, 아벨을 낳았다거나 하지 않고, 언제나 "아담은 셋을 낳았다"(대상 1:1, 눅 3:38)고 말합니다. 공식적인 성경 역사의 족보는 아담이 셋을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을 잇는 셋의 역사가 족보를 타고 흐르다가 멈추어 서는 곳이 있습니다(창 5장). 노아입니다. 셋의 족보는 노아까지 이르는 족보입니다. 이제부터 전개되는 중대한 사건은 노아를 통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이제 노아가 주인공이라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이 족보가 노아를 찾아내더니 계속해서 노아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노아 얘기를 하고 싶어서 셋으로부터 노아까지 온 것입니다. 거룩한 계열의 사람들입니다. 앞뒤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는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앞으로 성경은 이 흐름을 따라 내려갈 것이라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10장에 다시 족보가 나옵니다. 노아부터 다시 시작되는 족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족보도 방향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12장의 아브라함입니다. 노아의 아들 중 셈에게 초점이 맞춰지더니 결국은 아브라함에게 가서 멈춥니다.
왜냐하면 10장이 셈의 족보로 끝나는데 11장 바벨탑 사건을 얘기한 후 11장 끝에 와서 다시 셈의 족보를 거론하면서 데라가 등장하고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신앙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께 단을 쌓고, 하나님과 동행하며"라는 한두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셋 -> 에녹 -> 노아 -> 셈 -> 아브라함---셋 계열입니다.
2) 네피림, 니므롯 같은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인가?
이 셋 계열이 아닌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경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죄를 지으면서, 이 세상 문화를 발달시키는 사람들'이라고 특징지우고 있습니다. 가인계열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 문화에 아주 뛰어났습니다. 각종 산업, 건축, 목축업, 공업, 일부다처제, 예술(창 4:16∼22) 등의 원조가 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다스리는 원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처음에 말했던 바와 같이 힘 센 사람이 폭군으로 군림하며 지배하는 것(창 4:23∼24)이었습니다. 이들 가인의 후손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패역한 노아시대, 바벨, 소돔, 고모라, 가나안과 같은 당시로서는 매우 뛰어난 세상문화를 창출하는 주역이 됩니다. 즉 가인의 계열을 타고 네피림과 니므롯 같은 당시 폭군지도자가 나타납니다.
3) 셋 계열(하나님 나라)과 가인계열(세상 나라) 간의 긴장
기독교 세계관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두 계열간의 긴장을 "영적 전투"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둘 사이는 다음 유형으로 유지됩니다.
① 세상 나라 문화가 하나님 나라 문화를 침투해서 세속화되는 유형
② 하나님 나라 문화가 세상 나라 문화를 침투해서 하나님 나라로 변화 시키는 유형
이 유형을 정리해 놓고 다시 성경 처음으로 돌아가십시다. 성경의 역사는 한마디로 "왕 싸움"의 역사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왕 되심을 거부한 아담의 후손들은 두 계열로 나뉘어 흘러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들은 전체가 다 하나님을 대적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하나님 쪽에 속해있는 사람들이 있었더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하나님 쪽에 있게 되는 이 현상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정리합니다. 그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은 "피흘림의 제사", "용서", "화해", "순종하는 삶",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 등, 소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터 놓으셨습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구원"이라고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렇게 교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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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읽기(Reading the Old test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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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세기 읽기 (창·출·민·수·삿·삼·왕)
1) 창 1∼11장 (창조, 타락, 노아 홍수, 바벨탑)
제3과에서 배운 내용을 생각하며 읽읍시다. 인류일반 역사입니다.
2) 창 12∼20 장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
12장의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갈대아라는 나라는 성경 역사 속에서 때로는 바벨론, 때로는 앗수르로 불리운 민족입니다. 북방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이 이들에 의해 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때는 약 기원 전 2,000년으로 추정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위대한 떠남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는 첫 출발입니다. 세상나라(갈대아)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국부가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사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열국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도 나라를 세우시는데 특히 창세기는 “국민 만들기”를 하시는 중이라는 큰 그림을 가집시다. 그러므로 “누가 하나님 나라의 후사(기업을 물려받을 후손)인가?”가 관건입니다. 사실 신약에 들어와서도 이 질문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도 그 당시의 한 석학으로서, 정치지도자로서, 또 깨끗한 심령을 가진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평생 숙원의 질문을 갖고 씨름했었습니다.
모든 인류는 결국 이 질문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가?” “누가 구원을 받는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구체적인 인간의 삶을 통해 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 그 나라의 백성들인가를 보임으로써 그 구원의 원리를 한 가지씩 한 가지씩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시작되는 12장도 이런 질문을 갖고 읽읍시다.
20장까지의 아브라함의 생애는 다음 내용들입니다. 세상 나라 가운데 있던 아브라함을 “은혜”로 부르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되고 신약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을 정의할 때 이 아브라함의 케이스를 꼭 갖다 대는 것입니다.
즉 누가 하나님이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후사(아들, 하나님의 자녀)는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출생시키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한 인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인데 그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출산입니다. 하나님이 출산하십니다. 이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거듭남의 예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첫 백성인 아브라함에게 첫 아들(하나님의 아들, 약속의 자녀; 갈 4:28)이 반드시 출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계약을 하자고[언약을 맺자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계약(창 15장)에 목숨을 거십니다. 100세나
되어 아들을 갖게 되는 과정, 소돔과 고모라 사건, 주변 연합 국가들과의 전쟁, 이삭의 출생과 번제 사건 등을 통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를 생각해 보고, 하나님이 앞으로 어떻게 이 약속을 이행해 나가시는지 주시하며 읽읍시다.
3) 창 21장∼26장 (아들을 주심 : 이삭의 생애)
그 첫 후사는 이삭이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이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예표합니다. 이삭은 출생부터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도 인간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제물로 내어 놓으시는 구원사역의 정점을 예표로 보이시는 것입니다. 수풀에 걸린 염소는 다시 살아나는 이삭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자기네 인생을 그저 살았는데 그들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신비입니다.
앞으로 역사 속에 진행될 하나님 나라는 독생자를 내어 놓으시는 구원이 그 핵심이 될 것이라는 신비스러운 계시입니다. 그런데 이 핵심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생애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표현됩니다. 역사적 사건 속에서 정확하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며 읽읍시다. 인간이 자기 삶을 살아도(자유의지) 하나님의 계획(주권)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사실을 깊이 깨닫고 감사하며 이 대목을 읽는다면, 당신은 A.D. 2,000년대에 살고 있으나 성경 속에서 이 주인공들과 함께 사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바로 오늘 당신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록으로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당신 때문에 남기셨다는 말입니다.
4) 창 27장∼37:1(‘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명명 되는 하나님 나라 - 야곱의 생애)
이삭에게서 쌍둥이 두 아들이 태어납니다. 야곱과 에서입니다.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은 참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둘 중에서 누구는 선택되고, 누구는 선택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밖에 없는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칼뱅(Jean Calvin, 1509~1564)이 얘기한 대로 이 선택에는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온 인류는 모두 다 하나님을 떠났는데 그 중에 어떤 이들(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셋이나 에노스나 에녹이나 노아 등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습니까?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들에게 공로가 없습니다. 무슨 조건이 있어서라면 그것은 이미 은혜일 수 없습니다.
쌍둥이라는 이미지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무조건적 선택, 은혜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기준에서 보면 오히려 야곱이 나쁜 사람의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롬 3:23) 하나님은 더 이상 선행으로 무엇을 판가름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첫 관계 회복은 믿음으로, 은혜로 된다는 것입니다. 도덕률을 넘어서는 것이 성경 원리입니다. 그래서 선, 악이라는 기준만으로 성경을 읽으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많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피해 밧단 아람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열두 아들을 갖게 됩니다. 밧단 아람에서 이 아들들을 얻습니다. 후에 모든 재산과 식구들을 이끌고 형을 피해 도망 나왔던 가나안으로 되돌아갑니다. 이들이 후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되며 창세기 12장에서 출발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열두 아들의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그 구성원이 됩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다시 얻은 이름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이름으로 확정됩니다.
5) 창 37:2∼50장 (이집트로 향하는 야곱의 식구들 - 요셉의 생애)
사실 ‘족장’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까지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야곱의 12아들 중 유독 요셉의 생애에 초점을 맞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수준으로 그의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제 앞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이집트(Egypt)라는 곳으로 무대를 옮기게 되는데 그 역할을 하는 장본인이 요셉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와서 살고 있는 분들은 이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먼저 미국에 첫 발을 디뎌서 자리가 잡히면 그 후에 한 식구 한 식구 초청해서 모든 가족이 다 오게 되는 것처럼 이 요셉이 첫 사람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나타나는 “출애굽의 역사”는 “입(入)애굽의 역사”가 있은 다음에 생긴 일입니다. 어떻게 형들에게 팔렸으며, 어떻게 이집트에서 고생했으며, 혼자 몸에 그것도 외국에서 어떻게 “자기 조상의 하나님”을 인식했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지표로 삼고 어떻게 실제 생활에서 그 말씀대로 살았는지를 살피면서 읽읍시다. 야곱도 부모 떠나 혼자 살며 하나님을 경험했는데, 아들 요셉은 그 아버지보다도 훨씬 성숙한 인생을 삽니다. 이집트에서 정치적으로 큰 지도자가 된 요셉은 아버지와 그 열 한 형제들을 이집트로 오게 했고, 새로운 이민생활을 시작하는 내용으로 창세기는 끝을 맺습니다.
6) 창세기 결어(結語, 맺는 말)
우리가 창세기 12장에서 처음 이슈로 생각했던 주제는 “누가 하나님 나라 후사인가?”였습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의 국민인가 입니다. 창세기가 끝나면서 그 뚜껑을 열어보니 야곱의 70식구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들로는 아직 나라를 이룰 만큼 많은 숫자가 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 가운데 400년이라는 긴 기간을 침묵하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유목민인 그들은 풀을 찾아 여기 저기 다녀야 했기 때문에 그냥 가나안 땅에 있었으면 70식구가 여기 저기 흩어져 살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집트의 고센이라는 땅을 바로가 주어서 한 곳에 모여 살았고 그래서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생산이 중다하게 되었다고 출애굽기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국민 만들기를 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하나님 나라 백성 만드시기 위해 가장 좋은 장소로 온상처럼 400년 동안 사용하셨습니다. 그동안 장정 남자만 60만명 정도, 전체 인구는 약 250만 명 정도까지 증가하게 됩니다. 즉 다른 나라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공동체로서 단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사이에서 하나님의 후사들은 70명이 250만 명가량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2. 출애굽기 읽기 (창·출·민·수·삿·삼·왕)
앞으로 전개되는 출애굽기의 이슈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한 국가의 국민들이 발 딛고 살아야 하는 “땅”을 찾아 나서는 일이고,
둘째, 한 국가로 건국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법”이 제정되는 일입니다.
“법”은 준행하라고 있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백성들이 그 “법”을 우선 “이해”해야 하고(교육), 그 후에 “준수”할 실력이 있기까지 소정의 훈련과정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시다.
위의 두 가지만 염두에 두고 출애굽기를 읽읍시다. 십계명이 어떻고, 율법이 어떻고 제사법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일단 옆으로 밀어 둡시다. 우선 한 국가가 서기 위해 당연히 있어야 할 틀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법, 땅, 이 두 가지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출애굽기를 읽읍시다. 한 나라를 구성하기 위해 주권과 영토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국민들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그렇게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으셨습니다. 땅을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은 노예 상태로부터의 자유를 주는 것이 대표 이미지인 것이 사실이지만 더 나아가 그들은 영토를 찾아 소유해야 한다는 사실이 절실한 현실이었습니다. 땅이 있어야 살지요.
그런데 이집트의 고센에서 400년을 살아온 히브리 민족이 그곳을 떠나 나오자마자 그 옆 동네쯤에 울타리가 쳐 있고 “이곳은 히브리 민족의 땅!” 하고 영토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 땅을 마련하면 소위 “새끼줄” 쳐 놓고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합니다. 그 땅 임자인 나만 그 땅에 대해 권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가 항복을 하고, 홍해가 갈라지고 하는 대목까지는 승승장구 흥분해서 좇아 나왔지만 막상 홍해를 건너 이집트의 위협에서 자유하게 되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울타리 쳐 놓은 땅”이 아니라 “광야”였습니다. 생존 불가능의 땅이었습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살아가야 할 인생은 여전히 “광야”였습니다. 아직은 그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정착하고 살아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국법”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었으니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그 공동체가 무엇에 의해서 유지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경험이 없던 오합지졸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당당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지를 제시하시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세상 나라들을 향해 “여기 하나님 나라가 있는데, 이런 특징이 있다!” 하고 선전하려면 그 오합지졸 같은, 방금 전에도 노예로 노동만 하던 그들에게 훈련과 교육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야 하는 땅 가나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공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고도의 세속 문화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찬란한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발전하는 도시 국가가 떡- 자리를 잡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거기를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이라는 말은 곧 “가나안 문화 정복”, “가나안 문화 파괴”, “가나안 종교 파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찾아 소풍가는 듯한 낭만적인 말이 아닙니다. (앞에서 관점 공부를 할 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존재 의의’는 세상나라 정복에 있다고 말씀 드렸지요? 구원의 방향성을 잃지 말자고 그랬지요? 그 관점으로 이 상황을 보십시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과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출애굽은 전투태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민수기도 전투태세입니다.
전투를 위해 규칙을 정해야 했고, 병력을 파악하기 위해 계수를 해야 했고, 작전을 짜야 했고,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 소대, 중대, 대대를 편성하듯,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스토리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경우의 가능한 상황, 즉 결혼 전 남녀 관계부터 시작해서 재산 문제, 형사 사건, 민사 사건 등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을 해결해 주면서 또한 전투태세로 무장시켜야 하는 이중부담입니다.
분쟁이 발생했을 때 재판도 해야 했습니다. 병이 생겼을 때 대처해야 하므로 보건사회법도 있어야 했고, 몇 백만 명을 움직일 수 있는 조직과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어떻게 그 땅을 관리할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아주 세심한 모든 법을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 다 세세히 주셔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 사이에 생기는 일들에 대한 모든 법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법 위에 가장 큰 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법입니다. 그래서 십계명도 첫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그 아래는 사람 간의 일입니다. 하나님과는 어떻게 관계하며 살 것인가, 즉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에 대해 주신 구체적인 법을 한마디로 “성막”에 관한 규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출애굽기 이후에 광야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을 위에서 얘기한 관점을 가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봅시다. 성경이라고 해서 그렇게 특별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한 나라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만드시는구나, 성막, 제사법, 절기 등 하나님 섬기는 규례가 있고,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규례들이 있구나! …’하고 생각합시다. 그 당시 오합지졸로 광야까지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필요했겠나 생각하고 읽읍시다. 지겹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당시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같이 출애굽해 봅시다.
3. 민수기 읽기 (창·출·민·수·삿·삼·왕)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한 이 하나님 나라가 야곱의 열두 아들로 골격을 만들어 250만 명가량의 인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민수기에 와서 이제 한 공동체로서 조직을 갖춥니다. 명실 공히 한 나라가 되어서 이 세상나라를 정복할 바로 “그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법으로 든든히 조직을 강화했고,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 대해 한 번 할 일을 해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온 것입니다. 세상문화 정복입니다.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애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신 목적이 하나님 나라를 그 곳에도 전파하고 그 영역을 넓히는 것이었는데, 막상 다 와서 뚜껑을 열어보니 이스라엘은 자격미달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그 대표들이 정탐하고 나서 보인 반응으로 보아 도저히 가나안 정복은 역부족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아직 싸울 힘이 없는 믿음의 졸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을 가지고는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은 그 다음 세대로 그 사명을 미루셨고, 그 다음 세대 역시 40년은 더 훈련시켜야 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흔히 생각해 왔던 광야생활 40년을 하게 된 이유는 말 그대로 ‘더 훈련시키시려고’ 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훈련인가를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막연히 신앙을 훈련시키셨다 라든지, 믿음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라든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인으로서의 “사명”을 자각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의의를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위치, 가데스 바네아까지 다 와 가지고 광야 제2세대 이스라엘은 이제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유리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1세대는 결국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사명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면 똑같은 얘기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싸우는 일은 무엇입니까? 선교입니다. “선교”는 선교부원만 하는 교회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전도”는 전도폭발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증인”의 삶을 사느냐 못사느냐는 그 교회 공동체가 죽느냐 사느냐, 사활이 달린 이슈입니다. 이 세상을 향해 침투해 들어가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사명은 교회 공동체 전체가 목숨을 걸고 지향해야 하는 이슈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있는 이들을 건져내면 그 다음에 교회 공동체가 하는 일이 교육(하나님의 법도를 계속 가르쳐가며 이스라엘에게 경배받으셨던 것처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그대로 살라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갓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연석이기 때문입니다. 다듬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훈련을 통해 깎여져야 모양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처럼 구약에서도 말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구원 얻은 자로서 그 얻은 구원이 지향해야 할 방향성의 자각이 없으면 그저 늘 이집트에서 먹던 수박, 마늘, 파, 부추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이 세상 문화를 정복(전도, 선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늘 나 복 받는 것, 내 식구 잘 되는 것에만 관심이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나 한 사람 구원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나 위로받고, 나 치유되고, 나 사랑받는 것만 관심을 가진 교회 공동체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소멸된다는 무서운 경험을 이 광야의 구약교회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어디 250만이 모이는 교회가 있습니까? 광야의 이스라엘 교회는 그 성도가 적어도 250만 명가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을 경험한 이래, 그 구원의 하나님을 열심히 배우고, 외적으로는 이 세상을 침노하는 증인의 삶을 살았어야 했는데 그런 태도조차 없이 아낙 자손을 두려워해서 원망하고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250만 명 교회 교인도 쓰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 살긴 살아도 하나님이 쓰실 수 없이 살다가 가는 오늘날의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니기는 다녀도 그저 나 한 사람 겨우 구원받고 살다가 그저 가는 것입니다.
민수기를 떠나가면서 여러분은 어떤 잔상이 남아 있습니까? 어떤 그림이 남습니까? 그렇습니다. 황혼의 들녘, 광야에 즐비하게 엎드러져 죽은 이들의 길게 드리워져 있는 주검입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겠노라고 꿈을 안고 이집트를 떠나 고생고생하며 광야까지 왔는데, 그만 그 광야가 끝이었습니다. 목적지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목적지를 가야하는 그 이유, 이스라엘의 존재 의의를 잊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교회생활하지 맙시다.
4. 여호수아 읽기 (창·출·민·수·삿·삼·왕)
이제 모세의 마지막 설교가 다 끝나면 우리는 모압 들판에서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성막을 가운데 모시고 동서남북으로 각각 흩어져 쳐 놓았던 텐트를 또 걷어야 합니다.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半)지파는 제외하고 말입니다. 왜 그런지 아시죠?
이 세 지파는 요단 동편 길르앗 땅에서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때 함께 요단강을 건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20세 이상 병력들은 요단 서편 가나안 땅 정복을 도우려고 짐을 꾸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요단 동편에 남겨두고 긴 여행을 위해 헤어지는 겁니다.
세 번에 걸친 마지막 고별 설교를 끝으로 하고 위대한 종 모세는 죽습니다. 이제는 모세의 후임, 여호수아를 좇아 요단강부터 건너야 드디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호수아” 하면 얼른 “땅 찾기”가 생각나야 합니다. 사실 400여 년 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살았던 땅, 그 땅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다 나온 세대들의 후손, 광야에서 태어난 젊은 청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땅이 바로 그들 조상들이 발붙이고 살았던 땅입니다. 이미 이 사실은 아브라함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창 15:16).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의 목숨을 걸고 반드시 지키리라 언약하신 그대로 이렇게 신실하게 이루시는 장면입니다. 여호수아는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책입니다(수 21:45).
** 여호수아의 구조 **
이제 여호수아는 다음 세 영역으로 나뉘어 있음을 기억하고 읽읍시다.
(1)들어감 : 약속의 땅에 드디어 들어감(1∼5장)
(2)정복함 : 약속의 땅 정복 전쟁(6∼12장)
(3)분배함 : 정복한 땅을 지파 별로 분배함, 안식이 찾아옴(13∼22장)
(4)여호수아의 마지막 사명 : 고별설교(23∼24장)
5. 사사기 읽기 (창·출·민·수·삿·삼·왕)
1) 사사기 구조
① 여호수아서 연결선 상에서 본 정복 (삿 1:1∼2:9)
여호수아가 앞장서서 땅을 정복한 이야기는 여호수아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지파별로 정복한 전투들은 다 일일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여기 사사기 1:1∼2:5까지는 유다 지파가 앞장서서 자기네가 살 땅을 정복한 기사와, 갈렙의 가문에서 아낙 자손을 정복한 내용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은 이미 여호수아서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저자는 기록으로 남길 때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내용들에 연이어 땅 정복기사를 남긴 것 같습니다.
② 사사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 (삿 2:9∼3:6)
③ 사사들의 활동과 업적들 (삿 3:7∼16:31)
옷니엘 > 에훗 > 삼갈 > 드보라(바락) > 기드온 > 돌라 > 야일 > 입다 > 입산 > 엘
론 > 압돈 > 삼손
사사시대의 사사들은 위와 같은데 대체적으로 열두 지파별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이들 중 크게 활동한 대표적인 사사들은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
등입니다.
④ 사사시대를 대표하는 두 이야기(삿 17장∼끝)
6. 사무엘상·하 읽기 (창·출·민·수·삿·삼·왕)
1) 이 지점에서 사무엘은 누구인가?
사무엘은 왕정을 수립하는데 하나님께 쓰임 받은 마지막 사사입니다. 사사기 끝 부분에 룻의 스토리가 붙어있어도 괜찮을 뻔했다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사무엘의 이야기도 사사기 뒤에 붙어있는 이야기라 해도 될 것입니다. 12사사의 행적이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사무엘도 사사이기 때문에 내용상으로는 사사기 뒤에 넣어도 무난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그 한 사람이 초대 왕 사울과 2대왕 다윗을 왕 되게 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는 내용이라 그 분량이 많았을 뿐입니다.
또한 지금까지는 사사시대였던데 반해 이제는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므로 다른 사사들과는 달리 그 역할이 독특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이런 훌륭한 지도자들을 통해 다시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즉 미가까지만 보면 실망이지만 룻기를 보면, 또 이 사무엘을 보면 희망입니다. 그들은 평범한 자기네들의 인생을 살았지만 룻은 룻대로, 사무엘은 사무엘대로 하나님 나라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는 결과를 낳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2) 사무엘상·하의 중요한 스토리들
워낙 내용이 많지만 하나하나 읽어보면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의 생애, 사울의 생애, 다윗의 등장, 다윗의 초년기, 다윗의 중년기, 다윗의 말년기 등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놓고 읽어보면 구분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① 사무엘의 생애 (삼상 1:1∼8:22)
사무엘의 출생과 유년기 > 엘리 집안의 몰락 > 사무엘의 사역 시작과 미스바 성회 (미가신상 사건도 있었지만, 사사시대 때에 이런 뜨거운 영적 부흥회도 있었군요.) >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
오늘날도 중국에는 교회 지도자가 부족해서 한 목회자가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목회한다고 합니다. 사무엘도 이 우매한 사사시대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라마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삼상 7:16∼17). 이 지역은 가나안 땅 중부쯤에 분배된 에브라임과 베냐민 지역에 있는 성읍들이었습니다.
② 사울의 생애 (삼상 9:1∼15:35)
초대 왕이 된 사울 > 암몬 자손을 물리친 사울왕 > 사무엘의 마지막 설교 > 블레셋과의 전쟁 > 사울의 죽음
모세시대에는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기 다윗 시대에는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이방나라들이 등장하는데 다 그게 그거 같아서 아무 감각 없이 스쳐 지나가듯 하면 안 됩니다. 적어도 어느 나라가 어느 시대에 등장하는가 쯤은 대충이라도 익히는 것이 앞으로 성경을 일독, 이독 계속해 나갈 때 매우 필요합니다.
12지파의 지도를 외웠듯이 이 나라들도 대충 어느 지점쯤에 있는 나라이며, 이스라엘의 어느 시대와 맞물리는지 공부해 놓아야 합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여러 다른 나라들이 있는데 여기 왕국시대 초기에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최강적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함 자손으로 애굽 혈통의 해양민족입니다. 일찍이 헷 족속(힛타이트)에게서 철기 문화를 배워서 당시로서는 싸움 잘 하는 나라였습니다. 특히 평지 해안 지역은 다윗 왕 때에 와서야 정복되는 강한 사람들이었고, 오늘까지도 “블레셋⇔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 상극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사울 왕이나 다윗 왕이나 다 이 블레셋으로부터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했습니다.
③ 다윗의 등장 (삼상 16:1∼31:13)
④ 다윗, 왕으로서의 초년기 (삼하 1:17∼7:29)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또 모세와 계약하셨듯이 잊지 않고 이 중요한 대목에서 그와 똑같이 언약을 하십니다(삼하 7장).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 이 말씀이 구약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합니다. 이 말씀은 쉽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윗왕조를 무너뜨리는 역성혁명(왕조멸망)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대로 북방 이스라엘은 왕조가 아홉 번 바뀌지만, 남방 유다 다윗의 왕조는 바뀌지 않고 다윗의 자손으로만 왕이 이어집니다. 두 번째는 또한 다윗의 위(왕 혈통)는 영원토록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다윗의 위(位)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어가시는 왕권(王權)을 의미하게 됩니다. 신약에 와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와 같은 내용으로 예수님께 간구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실 이런 구약의 역사를 안 사람들이며 “다윗의 위를 이어 오실 왕이 바로 예수 당신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의미 있는 외침입니다.
⑤ 다윗왕의 중년기 (삼하 8:1∼19:43)
다윗의 전쟁업적 > 므비보셋 이야기 > 암몬과 아람 격퇴 > 밧세바 사건 > 솔로몬 출생 > 압살롬의 반역 > 다윗의 망명 > 암살롬의 패망 > 다윗의 예루살렘 귀환
⑥ 다윗의 말년기 (삼하 20:1∼끝)
세바의 반역 > 3년 기근과 사울 가문 처단 > 다윗의 노래 > 다윗의 유언과 공적 > 인구조사와 재앙
7. 열왕기상·하 읽기 (창·출·민·수·삿·삼·왕)
열왕기상?하는 분열왕국의 역사를 다룹니다. 즉 여로보암으로 시작되는 북 왕조 이스라엘과 르호보암의 남 왕조 유다의 역사를 왕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의 이야기가 여기에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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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대상·하 읽기 (대·라·느)
역대상·하는 창세기부터 다시 시작하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족보부터 새로 시작합니다(대상 1:1). 족보형식을 빌어 창세기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정돈합니다.
그리고 다윗왕국으로 이어지는 다윗의 계보를 기록하므로 앞으로 진행해 나갈 방향이 유다왕국의 후손으로 오실 왕 “예수”로 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포로시대 주인공들의 후손들이 바로 400년의 암흑기를 지나 신약시대 무대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역대상·하 이후 등장하는 포로시대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귀환해서 대를 이어 400년을 살다보니 무대는 어느덧 신약의 배경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역대상·하의 중심인물이 다윗 왕이라는 사실도 바로 이 역대상·하가 예수님을 향하여 방향을 조정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 역대기는 열왕기하와는 달리 특별히 성전에서 수종드는 레위인들의 활동조직, 제사 드리는 성전문화를 중점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문화의 중심은 성전입니다. 이것을 강조한 것이 역대기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위의 성전문화와 제사장문화를 이루어가는 역사는 다윗 왕까지의 얘기입니다. 그 이후 솔로몬의 역사를 거쳐(열왕기에서 다뤘지요?) 남북이 갈라집니다. 열왕기의 머리 부분의 분열역사는 여로보암 얘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중심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남방 유다의 역사만 다루는 역대기에 있기 때문에, 르호보암 이후 남방 유다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열왕기에서는 북이스라엘 역사 사이사이에 살짝 살짝 끼워있던 얘기들인데 여기서는 그 역사만 죽 이어 나오는 거지요. 르호보암으로부터 출발하는 남방 유다왕국을 네 가지의 특징을 붙여 구분하면 쉽습니다.
① 남북 갈등시기, ② 남북 동맹시기와 선한 왕들의 시기, ③ 앗수르에게 시달리는 시기, ④ 바벨론에게 망하는 시기, 이렇게 네 시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남북 갈등시기
처음에는, 말 그대로 분열되다 보니, 남북이 원수관계입니다. 왕국으로서는 초대 왕 르호보암(1대), 아비얌(2대), 아사(3대)왕까지가 긴장하면서 지나갑니다. 이 아사(3대)왕은 남방 유다에서 처음으로 선한 왕이라고 칭찬들은 왕입니다.
② 남북동맹시기와 선한 왕들의 시기
그러다가 북이스라엘과 갈등 관계가 사라집니다. 남북이 화해하는 시기입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딸 아달랴를 유다의 여호사밧(4대)의 아들 여호람(5대)에게 시집보내면서 남북이 평화시대를 누립니다. 정략결혼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아달랴와 여호람 사이의 아들 아하시야(6대)가 북이스라엘 예후의 부하들에게 잡혀서 살해되자 이후 아달랴(7대) 여왕이 다윗의 혈통을 끊어버리려는 시도로 요아스(8대)를 제외한 왕족을 몰살하는 비극을 낳았다는 사실입니다.
아합왕은 자기 아내 이세벨을 통해 북이스라엘에 바알을 들여오는 장본인이 되어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빠지게 하는 주범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딸을 남방유다에 시집을 보내고 여기 남방유다에 바알사상을 들여오는 역할까지 한, 대단한 악역의 왕입니다. 그래서 열왕기의 몸통 부분은 아합 왕의 역사로 대표되고, 엘리야는 이에 맞서 싸운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방 유다는 이스라엘과 평화하는 시기 동안 바알세력에 휘말리게 되어 혈통까지 끊어질 위기로 휘몰리다가 겨우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렇게 극적으로 살아남은 요아스가 북이스라엘의 혈통을 타고 유다에 흘러 들어온 바알종교 세력을 척결하는 대단한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겠죠. 그 이후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9대)를 거쳐 웃시야(10대), 요담(11대)으로 이어지는 왕들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순종하는 선한 왕으로 일컬어집니다. 폭풍을 지나고 나서는 오히려 하나님을 순종하는 세력이 형성됩니다. 남은 자들입니다.
③ 앗수르에게 시달리는 시기
요담의 아들 아하스(12대), 즉 히스기야 왕(13대)의 아버지 때로부터, 므낫세(14대), 아몬(15대)에 이르기까지는 앗수르에게 시달리는 시기라고 정리하자고 했습니다. 물론 히스기야도 선한 왕입니다.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가 남방 유다까지 괴롭히는 시기입니다. 그러다가 이 앗수르도 결국 신흥 바벨론에게 망한다고 그랬죠? 바로 이때 이사야, 미가가 활동한다 그랬습니다.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합니다(저절로 외워지는 방법).
④ 바벨론에게 망하는 시기
그래서 요시야(16대), 여호아하스(17대), 여호야김(18대), 여호야긴(19대), 시드기야(20대)는 바벨론에게 시달리게 됩니다. 앗수르가 쓰러져 가니 애굽도 넘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애굽과 바벨론 틈새에서 고통당할 때에도 하나님은 예레미야, 나훔, 스바냐, 하박국 선지자들과 말씀하시면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인도해 가십니다.
2(종합). 에스라, 느헤미야 읽기 (대·라·느)
1) 당시의 정복국가들에 대하여
바벨론, 갈대아, 메대, 파사(페르샤)… 성경에 나오는 나라이름은 이 정도지만 포로시대가 지나고 나서는 더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어쨌든 에스라, 느헤미야 등 포로시대 본문
에 들어가기 앞서 적어도 이 포로시대의 바벨론왕국을 중심으로 그 당시 패권다툼의 상황을 조금은 알아야 에스라를 읽든 학개를 읽든 이해가 되기 때문에 조금은 이 공부에 투자해야 합니다.
본래 이 바벨론(오늘날에는 이라크)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민족 중 한 나라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 민족은 앗수르(북쪽지역), 바벨론, 갈대아(남쪽지역으로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 왕국지역)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앗수르와 바벨론(마치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처럼)으로 분열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구 바벨론 왕국이라는 통일 왕국으로 오다가 B.C. 1200년경부터는 앗수르가 약 600년 동안 권력을 확장해서 북방 이스라엘을 정복한 B.C. 722년경까지는 앗수르 대제국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그 후 갈대아 왕조가 이 앗수르를 장악하여 신 바벨론 왕국(갈대아 왕국)을 세우게 되는데 바로 남방 유다가 이들에게 정복당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때 이 왕국의 왕이 바로 느브갓네살이었습니다. 그런데 혜성처럼 나타난 신 바벨론 왕국은 90년도 못되어 그만 멸망합니다. 이 바벨론을 정복한 나라가 바로 메대 바사(메디아 제국과 파사-페르시아-제국의 합성어이며, 오늘날의 이란)입니다. 티그리스강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민족입니다. 이 바사제국은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수천 년을 그저 자기 조상들의 땅에서 자기네 나라 하나 유지하며 살아왔었는데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폭발적으로 비대해집니다. 이 때의 왕이 바로 우리가 많이 들었던 이름, ‘고레스’왕입니다. 바사는 그 당시의 큰 나라였던 애굽, 그리고 이스라엘과 남방유다를 정복한 상태에 있는 바벨론, 베니게 등을 포함하여 수많은 나라들을 짓밟으며 그 당시 세계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강대국으로 올라섭니다. 바로 이 때 성경에 등장하는 왕들이 “고레스, 다리오 1세,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 다리오 2세”등인 것입니다.
고레스는 피정복국가들에 대해 우호 정책을 폅니다. 이전 정복국이었던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잡혀와 바벨론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호의를 베풉니다. 그래서 바사 왕 고레스 원년 (B.C. 538)에 유다인들에게 영을 내려 예루살렘성을 재건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벨론이 빼앗았던 성전의 기명들까지 돌려주는 친절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칙령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포로귀환”이라는 역사적 전환이었습니다. 고레스는 고레스의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애를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예언을 이루는 데 쓰신 것입니다.
2) 에스라(Ezra)는 누구인가?
성전이 완공된 지 약 60년이 지난 때니까 두 세대가 지나가고 있던 때입니다. 다니엘과 에스겔이 포로 1세대라면 에스라나 느헤미야는 그 포로 1세대들이 바벨론에 살면서 자식을 낳고, 낳고, 또 낳은 포로 3대나 4대쯤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타난 이 두 그룹(다니엘, 에스겔과 에스라, 느헤미야)의 연대가 B.C. 605 년과 B.C. 440년, 즉 약 160년 정도의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도 바벨론 포로로 살다가 처음으로 귀향한 무리들, 즉 1차 포로 귀환자들이 귀국(B.C. 538년)하고도 약 80년이 지나서야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입니다. B.C. 458년의 일이지요. (그래서 다니엘과 에스겔 동네는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말라기와는 다른 동네라 그랬지요?)
1차로 포로 귀환해서 돌아온 사람들은 많이 죽었을 것이고, 후손들이 또 그 땅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민족적인 사명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일에 또 흐지부지해져서 심지가 흔들리는 사회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율법에 능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말씀으로 교육되지 못한 것입니다. 성전은 재건되었으나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에스라는 태어나 보니 페르시아 땅입니다. 그는 자기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이때는 이미 고레스 왕이 자유령을 내려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는 귀환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자각을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행을 결심하고 페르시아를 떠난 것입니다. 이 일에 사명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여호와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學士)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열왕의 시대에 허물어졌던 모세율법의 정신을 다시 찾아냅니다. 포로시대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평생 모세율법을 연구했고, 순종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포로시대의 모세이며, 여호수아이며, 사무엘 같은 사람입니다. 그 많은 모세율법의 법 조항을 조목조목 연구했습니다. 마치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처음 받았을 때 모세가 그 법을 해석할 능력을 갖춘 학자로서 그가 먼저 이해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준행하도록 훈련시킨 것과 똑같은 작업이었습니다.
2) 에스라서 읽기(대·라·느)
① 바벨론(바사)에서의 제1차 귀환 (1∼2장) : B.C. 538년
바벨론 제국이 무너집니다. 600년 정도의 역사를 자랑하던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혜성처럼 역사무대에 떠올랐던 ‘신흥 바벨론’도 무너집니다. 앗수르나 바벨론이나 오늘날의 이라크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약 90년 정도를 지나는 동안, 바벨론 동쪽 그러니까 티그리스강 동쪽에서는 ‘메대’라는 이름으로 한 세력이 떠올라 얌전히 실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레스라는 사람이 메대도 점령하고, 신흥 바벨론도 점령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고레스는 유다민족에게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에스라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고레스는 바벨론을 정복하자마자, 즉 자기가 왕이 된 원년에 유다포로들을 자유하게 합니다.(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백성들을 자유하게 하는데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바로가 이들을 안 보내려고 나라를 다 들어먹었는데 이 고레스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그냥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B.C. 538 년의 일입니다. 처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던 B.C. 605년에 대비해 보면 약 70년이지요? 그렇습니다.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바벨론 70년의 포로 이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리라고 한 예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렘 25:11∼12, 29:10). 이렇게 해서 고레스가 칙령을 내리고, 유다인들이 돌아왔는데 그 명단이 조사되어서 기록되었습니다. 에스라가 이 때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제2차 포로귀환 때 돌아왔음), 이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② 성전 재건과 예배 회복 (3∼6장) : B.C. 516
포로시대 <예언서> 부류, (학개), (스가랴)가 끼어 들어가는 자리
포로시대 <역사서> 부류, (에스더)가 끼어 들어가는 자리
70년 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유다인들은 황폐해진 성읍들을 돌아보고 그들이 살아갈 집과 마을을 보수하면서도 전체가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다고 했습니다. 포로생활을 겪으면서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에스겔, 다니엘이 큰 역할 했었지요.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지도자가 되어 귀환한 유대인들은 성전을 재건합니다. 예수아는 성전제도를 재확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오자 일부 족장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전 건축헌금을 합니다. 건축에 필요한 자재들을 레바논에서 수입하는데 뱃길을 택해 지중해로 운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북방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이 건축된다는 사실을 알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을 찾아가서 자기들도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동참케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다 지도자들은 그들이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후 혼혈이 되었기 때문에 거절합니다. 그러자 사마리아인들은 이때부터 성전건축을 방해하는 세력이 됩니다. 그래서 성전건축이 어려워집니다. 방해세력이 나타나자 해이해진 백성들은 자기들의 집과 농경지를 돌보는데 주력하게 되었고 결국 성전 건축은 기초를 놓은 단계에서 그만 중단되어 16년 동안 방치하게 됩니다.
③ 바벨론(바사)에서의 제2차 귀환과 에스라의 사역 (7∼10장) : B.C. 458년
드디어 에스라는 제2차로 예루살렘에 귀환합니다. 1차로 귀환한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고, 중단했지만 다시 완공된 사실을 다 알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성전이 완공되고도 한 60년쯤 지나서네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고 많은 귀환자들을 인솔해서 예루살렘에 돌아옵니다. 처음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 자유를 선포한지 80년이 흘렀고 왕이 바뀌었는데도 이 아닥사스다 왕이 포로들을 보낸다는 조서를 내린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유다백성들은 계속해서 대가 거듭하면서도 예루살렘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원문이 7장 12∼26절까지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이 아람어로 되어있는 부위입니다. 구약성경이 거의 다 히브리어로 되어있지만 일부 아람어로 되어있다고 한 그 중 한 부분입니다. 에스라는 히브리어에도 능통했고 아람어도 잘 쓴 것 같습니다.
그는 혼혈 결혼을 하고 있던 1차 귀환백성들의 사회를 개혁합니다. 그래서 그의 지도로 사회가 정화됩니다. 구약의 역사가 계속 그래왔듯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그 사회가 어느 정도 지나면 또 다시 부패하고 타락하는 현상을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비유처럼 늘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있고, 염소와 양이 있으나 그 공동체를 유지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이어가십니다.
3) 느헤미야서 읽기(대·라·느)
히브리어 원전에는 원래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한 권의 책으로 되어 있다고 했지요?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느헤미야도 에스라가 기록한 것이라고 봅니다. 70인역은 에스라를 ‘에스라 제1서’, 느헤미야를 ‘에스라 제2서’라는 표제를 달고 있습니다.
그만큼 에스라는 포로시대 때의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즉 이 두 책은 분리할 수 없이 같이 가는 책입니다. 사실 이 두 권의 책이 포로시대 역사를 다 말하고 있습니다.(에스라가 귀환한 지 13년 후에 느헤미야는 귀환합니다. 일찍이 예루살렘 성전은 재건되었고 그후 약 100년 후에 성벽을 재건할 사명을 자각하고 귀환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얘기니까 다 평면적으로 보여서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 같아 보이고, 다 같은 시대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성전을 재건한 포로귀환 1세대들은 다 가고 그 다음 세대들이 다시 성벽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마치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이 출애굽 2세대들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같은 시대에 같이 활동합니다. 그래서 늘 같이 붙어 다닙니다. 마치 에스겔과 다니엘이 같이 붙어있듯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같이 붙어있습니다.
① 3차로 귀환한 유대인들과 성벽재건 (1∼7장) : B.C. 445
느헤미야는 제3차로 귀환하는 유대인 포로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그는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의 명을 받아 유다의 총독이라는 직임으로 공적인 임무를 띠고 12년 동안 사역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곽을 중건하고, 개혁 운동을 일으킨 후 일단 바벨론으로 돌아갔다가 한 번 더 예루살렘에 와서 사역합니다. 예루살렘성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보다 넓은 지역입니다. 수도 예루살렘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남한산성이라는 성벽이 있듯이 예루살렘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전쟁 중에 다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울타리 없는 집처럼 된 예루살렘 성을 울타리 치는 작업이 느헤미야의 사명이었습니다.
포로이후 사역을 총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차로 귀환한 스룹바벨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데 힘썼고, 2차로 귀환한 에스라와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수하는데 힘썼고, 3차로 귀환한 느헤미야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개축하는 데 힘쓴 것입니다.
②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공동사역 : 종교개혁 (8∼13장)
성벽을 다 완성한 후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공동사역을 합니다. 율법책을 낭독하고, 회개하며, 개혁을 위한 서약을 하게 합니다. 또 귀환한 사람들을 위해 거주지를 배정해 줍니다. 외적인 성곽을 보수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보수에도 힘씁니다. 통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초막절을 지키며, 레위지파를 정비하여 제사제도를 확립합니다.
4) 말라기 읽기 (창·출·민·수·삿·삼·왕/ 대·라·느+말)
이와 같이 3차에 걸쳐서 대거 돌아온 포로들은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을 따라 삶도 개혁하고, 성벽도 재건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구약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활동이 그 마지막 무대입니다. 비록 나라의 주권은 빼앗겼어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다시 옛 땅에 돌아와 성전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 수 있는 사회가 정착된 것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없었다면 신약시대를 이어갈 주인공들은 나타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이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이렇게 돌아온 유대인들이 나름대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말라기가 나타납니다.(내용적으로는 이렇게 느헤미야와 가장 밀접하게 붙어있는데, 느헤미야는 성경 727쪽 정도에 있고 말라기는 1,327쪽 정도에 있습니다. 그러니 구약, 하면 헷갈렸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완성한지 10년 후쯤으로 봅니다. 약 B.C. 430년 경입니다. 고레스 칙령이 발표된 지 약 150년가량 흘러간 때입니다. 그 동안 3차에 걸쳐서 포로들이 귀향했고, 성전과 성벽이 재건되었고, 율법대로 사느라고 무던히도 노력해오는 중입니다. 또한 족보를 보완했고, 유월절을 지키고,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인 명단을 공개해서 그 이방여인들을 추방하는 굉장한 사회개혁을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회개하는 심정으로 온 백성들은 율법대로 준수하려는 의지를 갖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바란 것은 메시아 왕국입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나면 메시아 왕국이 오리라는 소망을 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전을 바라보며, 그래도 학개나 스가랴, 에스겔, 다니엘 등에게 임하셨던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며,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도 임하리라던 그 큰 영광이 임하지 않게 되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고(1:2),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2:17).
새로 형성된 포로시대 문화를 하나님 중심으로 잘 유지해야 하는데 제사장들부터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 말라기는 그들을 질책합니다. 제사를 소홀히 하고, 계약을 파괴하고 율법을 행하지 않는 제사장들을 꾸짖습니다. 잡혼과 이혼이 끊이지 않으며, 십일조와 헌물을 소홀히 하는 백성들을 또한 꾸짖습니다. 말라기는 이런 점들을 지적합니다.
그리고는 가장 마지막으로 말라기에게 하신 아주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말라기는, 즉 구약은, 이 약속으로 끝을 맺습니다. 말라기 4장 5∼ 6절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이 엘리야는 신약의 세례요한을 지칭하는 말이며, 세례요한 이후에는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 포로귀환의 백성들이 형성한 새로운 하나님 문화는 이제 향후 400년 정도 더 흘러가다가 신약시대를 맞이합니다. 뭔가 새로운 시대를 기다려야 된다는 여운을 안고 이렇게 구약은 막을 내립니다. 이 새로운 시대는 ‘엘리야의 출현’이라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 ‘엘리야의 출현’은 망망한 대해의 등대 불빛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며 신약을 향해 역사는 흐릅니다.(*)
첫댓글 역사서 배우는 중인데요.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