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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 교 회 사 (요 약)
<서론>
한국 교회의 역사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매우 독특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과정을 보아도 그렇고, 교세의 놀랄 만한 급성장과 극심한 환난 등이 그렇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향하여 분명한 뜻을 가지고서 역사하셨음을 깨닫게 한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과정에는 편의상 그 이전의 경교와의 접촉 및 카톨릭의 전래 과정이 포함된다.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파(Nestorius)는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전파되었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가 지배하고 있었고,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신라에 경교가 전파된 흔적이 발견된다. 카톨릭은 일본과 중국을 통해서 접촉되었는데, 일본을 통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소서행장이 이끄는 일본군인들이 카톨릭교인들이었고 그 군대의 종군신부로 세스페테스가 내한햇던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을 통해서는 아담 샬, 주준모 신부 등이 카톨릭 전래를 위하여 힘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이 능동적으로 천주교 서적들을 연구하여 먼저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 천주교 신부들을 초청하는 형식을 취했다. 개신교 역시 이와 유사하게 로스(J. Ross) 및 이수정에 의하여 번역된 성경들 또는 한문성경을 통하여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한국내에 개신교 신앙인들의 공동체가 형성된 후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개신교와 카톨릭은 자생적(自生的)이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개신교는 카톨릭과 달리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특성이 초기부터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 교회의 성장에는 2가지의 커다란 요소가 작용하였다. 하나는 네비우스(Nevius) 선교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1907년의 대 부흥운동이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자립, 자치, 자전을 기초로 하는 선교방법으로 한국의 개신교가 성경을 중심으로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07년의 대 부흥 운동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로 원산과 평양을 주축으로 하여 일어난 회개운동이며 대 각성운동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한편 당시의 한국인들은 극심한 환난 가운데 있었고, 그 가운데서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능동적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했으며 믿지 않는 자들의 칭송을 들었었다. 그러므로 그만한 성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환난과 기독교의 급성장은 한국 교회의 성향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 교회는 이전의 주도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국가와 사회문제를 외면하고 내세 지향적이며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게 되었다. 또한 심각한 교권다툼으로 인하여 교회분열이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크게는 진보와 보수로, 작게는 그 안의 각 계파간에 주도권 싸움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이제 선교 2세기에 들어선 한국 교회는 이제까지의 구태의연한 논쟁과 주도권 다툼을 멈추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그리하여 민족과 나라를 위한 활동들도 재개하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흠잡을 데 없는 신부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데 힘써야 한다. 교회의 세속화, 물질화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하나되어 조국의 통일과 그리스도 복음의 편만한 전파를 위하여 정진해야 할 것이다.
제1장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대진경교유행비 : 781년(당 건중 2년)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고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탁본이 서울의 한국기독교박물 관(숭전)에 소장되어 있다. (88.8*177.8cm)
돌십자가 : 경주 불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에 전래된 경교의 흔적을 증명한다.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24.5*24*9cm.
웅천포구 : 임진왜란 중(1594) 한국에 온 최초의 서야 신부 세스페데스가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경남 웅천.
오다 쥴리아의 묘 : 임잰왜란 중 일본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 중에는 기리 시단으로 개종하여 순교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왕가의 딸로 고시니에 의 해 끌려갔다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오다 쥴리아'의 묘. 서울 절두산 순교성 지 소재.
1) 당나라를 통한 접촉
AD 431 에 에배소에서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점진적 동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가 에배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Netorius 퍼시아 에뎃사 AD635년- 인도와 중국을 전파. 중국에서는 경교라함.
nestorian 당시 중국 황제는 당태종. 당태종: 아라곤의 설교 감명, 파사사라는 교회 세워줌. 중국말로 아브라함. 왕이 관심을 가지므로 크게 번창
* 그때 우리 나라는 신라시대(삼국통일을 꿈꾸던 때) 우리 나라는 당나라 힘입어 통일 이루려함.(신라의 김춘추 여러 번 방문)
* 불교의 고승들이 당나라 여러 번 방문.
* 1635 - 중국 서안부(북경)에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 같을 수도 이 비문에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36자(중국어, 시리아)로 기록되었음.
* 1917년에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절에서 발견됨.
*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됨
* 1988년 경북 경산 지인면 일원리에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발견됨.
* 마테오리치가 1595년에 어떤 서적을 대하게됨. 거기서 당나라에 경교 가 번창함을 알게됨.
* 이런 여러 가지 종합결과 당대 어떤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음.
2) 몽고를 통해 접촉
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우고 지중해 근처 모슬렘 격퇴 할 때 기독교 국가들은 당시 큰 골치 거리였던 모슬렘을 대신 물리쳐 줘서 고맙게 생각함.
몽고는 세계 제국을 제패하는데 모슬렘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음.
* 당시 징기스칸은 야만인 - 그래서 서부 교회의 Innocent 4세는 1차로 선교사(카로핀)을 1246년에 보냄.
* Rubruc은 1253년 콘스탄티 노플을 떠나 몽고 수도 화림에 와서 사둔탁(징기스칸의 아들)을 만남. 사둔탁이 기독교인인줄 알았으나 아니였다.
* 루부룩은 징기스칸에게 개종을 권유하나 거절 당함.
당시 몽고는 우리나라 통해 일본까지 침략할 야욕.
* 루부룩이 최초로 한국(Caulei)을 서방에 서신으로 알림. Coree - Korea
3) 일본을 통해 접촉
*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루터교가 확장.
* Ignatiu Loyola / Francis Xavier
예수회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Francis Xavier 를 동방의 선교사로 파송함.
그는 인도의 고아 - 필리핀(80%이상이 카톨릭) - 일본으로가 구주에 상륙 1549년에 활공총이 복음과 함께 들어감.(1592년 임진란에 있어 타격적 무기)
* 그러나 일본을 통해 기독교 접촉.
오다노 부나가(일본 지도자) - 종교 관용책.
관용 이유 : 당시 불교가 강했기 때문에 한 종교가 커지면 강대해지므로 한쪽 약화를 위해 신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줌.
(17세기 당시 일본에 30만의 신자가 있었다고 함.)
* 도요또미 히데요시 : 오사까 (한국인이 제일 많은 곳)에서 예수회 신부들 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 1592년 임진년에 전쟁 일으켜 우리 나라 쳐들어옴. (20-25만의 군인을 이끌고 쳐들어옴. 명나라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명목으로.)
* 이때 일본의 1군단장(고니까 유찌나가)- 세례명 어거스틴,이 선두로 쳐들어왔는데 그가 이끄는 많은 군인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이 20일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이들이 평양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서 경남 웅천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해야했다.
* 고니찌 유찌나가는 군인중 기독교인이 많으므로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 달라 부탁하니 세스 페데스 신부를 보내줌.
그는 우리 나라에 오자 고메쯔에게 2편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 : 1. 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2. 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 아주었 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 세스 페데스는 6개월 수 일본으로 돌아옴.
* 도꾸가와 이에야그(새통치자 출현함) - 기도교 엄청 박해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선인으로 끌려가 믿은자도 순교함.
* 이 임진란 때문에 우리 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함.(특히 일본에 대해)
결론 : 당나라, 몽고, 일본을 통해 우리 나라는 일찍 간접적으로 기독교 접촉.
제2장 한국에 있어 카톨릭
북경 북천주당 : 중국 북경에 있는 북천주당은 조선사신들의 북경 방문 시 꼭 들려 보는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바로 이곳을 통해 많은 한역 서학 서들이 조 선에 전달되었고 그 속에는 천주교에 관한 서적. 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곤여전도(坤與全圖)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 (F.Verbiest)가 제작 (1674년) 한 지도로 1722년에 국내에 유입되어 1860년 국내에서 중간되었다. 8퍽 병풍. 한국기독교박물관 4-5*173.3cm.
천진암터 :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초기 서학(천주교)의 신앙회의 주역이었던 이벽, 이승훈, 권철신, 귄일신, 정약종의묘가 조성되어있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촌리 소재.
1) 선교사 들어오기 전에 나가서 만나서 받아들임.
*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1636년에 국호를 청이라 한 만주의 여진족은 자기들의 요구를 안들어 준다고 10 만을 이끌고 임진란 40여년 만에 한국을 침공. 이때(인조14년)에 우리나라 조종 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항했지만 결국 남한산성에 옮겨가서 투항했다가 1637 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삼정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항복. 이때 인조의 소현세자와 대신들이 청나라의 심양으로 끌려감.
* 1644년에 끌려간지 7년만에 청이 명을 정복하고 수도를 심양에서 명나라의 북경으로 천도 (소현세자등도 같이 감)
* 그때에 베이징에 아담 샬(주교)이 묵고 있었는데 소현세자가 만나 친분 나눔.(2달 동안) - 소현세자가 기독교 저술을 읽을 기회가 있었음.
* 아담 샬은 청나라 왕의 신임을 얻어 통감목사(벼슬)라는 위치에까지 감.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정책은 어느 나라에서 선교하든지 왕실과 고위층에 먼저 접촉하는 의도가 있었음.
* 소현세자가 귀국하게 됨. - 이때 서양문물, 기독교 서적을 아담 샬이 줌. 그것을 가지고 온 소현세자는 곧 죽게됨.
* 당시 척불 숭유로 인해 임진, 병자호란으로 당하자 조종에서는 이때부터 조선 경제의 개조책 이라는 책도 만들고 새로운 학문들이 일어남.
2) 학자들의 교리연구
중국을 섬기던 조선에서는 사절단을 보내는 데 정초에 성절사, 원단사, 동지사, 천추사등을 북경에 파송했다.(사절단은 한 행차에 300- 500명 정도가 50일에 걸려 가서 50일 정도 머물고 돌아왔고 진상 갈 때에는 비단, 금, 은, 보석, 호피, 좋 은약 등을 가지고 갔다.)
* 1601년에 마태오리치가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남당이다.
아담 샬이 살던 곳에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동당이다.
* 1603년 마태오리치가 쓴 '천주실의' 란 책을 그때 진상 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져옴.
* 조선조 시대에 주자학이 당쟁에 질리고 허례허식 하던 때에 나라 기강이 안 잡혀서 이때에 학자들이 '천주실의'를 가져오자 연구했다.
* 조선조 이수광이라는 사람이 '지봉유설'을 썼다.
지봉유설 - 천주교에 대해 설명함. 윤회를 부정하고 착한 일에 보상이 있고 악 하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와 교황은 임기가 끝나면 좋은 사람을 투표로 뽑고 이웃을 제2의 '나' 라고 하는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수광은 마태오리치와 동 시대의 사람이다. 임진란 전후로 3차례의 명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과학책, 천 주교책을 가져옴.
*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했다.(사람들이 서학에 관심을 많이 가짐)
* 유인용 - '어우야담' 제 1권에서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언급함.
허균이 천주교를 믿는 것을 말하고 그 교가 동남의 오랑케에게 퍼져 믿는 자가 많은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고 밝힘.
* 허균은 만주국에서 언젠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형당했다 (그는 천주교인)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 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 (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강조)
3) 이승훈의 入信
한국 천주교의 발생지 : 경기도 광주, 양근(양평)
이벽, 이승훈, 권..가 여기서 모여 교리를 연구하였다.
이벽의 누이 : 양근 고을의 정약전과 결혼하였다.
* 이벽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열화 같은 사람이다.
1777년 에 서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한강 터의 외진 곳 주어사라는 곳에서 교리 연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100리를 걸어 왔다고 함.
* 走魚寺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는데 천주교 교리 서적이 너무 빈약해 중국에 가서 도움 요청을 하자고 결정함.
* 이승훈은 아버지가 그 당시 북경에 갈 일이 있어 같이 따라감. (이벽은 이때 이승훈에게 가서 이번에 갈 때 천주교 교리서 많이 가져오라고 부탁함.)
* 이승훈은 북경에 가자마자 북경의 천주 당에 갔다.
그래서 돌아 올 때는 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옴.
* 이승훈은 강원도 평창 사람으로 25세에 진사 급제하고 1789년에 평택 현감이었다.
* 이승훈은 북경의 남당에 찾아갔다.
(여기서 교리를 배우고 1784년에 예수회 신부였던 루이스 글라몽에게 영세를 받는다.) 그래서 이승훈에게 영세명을 주었는데 '베드로'란 이름을 주었다.
* 이승훈이 영세 받고 돌아 올 때 성화, 묵주, 책 가지고 돌아옴.
* 이승훈의 전교 : 이승훈이 돌아온 5년만에 신도 4000명이 불어나고 이들은 1785년 봄 서울 진 고개에 중인(당시 천민, 중인, 양반) 김범우 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교리 연구를 학자들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국 신부에게 안수 받을 신부를 요청함.
* 조선 정부 형조 판서는 진 고개의 예배당을 급습하여 양반은 훈방하고 김범우 는 충청도를 유배하여 그곳에서 타계함. - 최초의 순교자(김범우의 집에 지금 의 명동성당이 서있음)
4)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 1785년 김범우 집 급습으로 많은 사람이 배교하기 시작함. 이때 이승훈, 이벽도 배교 함.
* 시간이 지나 핍박이 줄어들자 다시 돌아옴. 그리고 성직자의 필요성을 느낌. 그래서 북경의 주교에게 요청.
* 주베아 주교는 중국사람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 주 신부는 윤유일, 지향 의 인도로 밀입국함.(엽부로 가장)
* 1795년 1월 한성에 잠입해 들어옴. 한성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부활절 전날 밤에 몇 사람에게 영세 줌.
* 한영익이라는 개심을 가장한 자가 주 신부를 관가에 고발함. 그래서 조선 조정이 주신부의 체포령 내림.
* 믿음 좋은 신자 하나가 주신부를 가장해 자수함.(최이길 이라는 사람인데 턱수염이 없어 들켜서 처형당함.)
* 주 신부는 가장을 하는데 상복도 입기도 하고 남의집 헛간에서 있기도 하는 데 그러는 동안 신도는4천에서 1만으로 늘어남.
* 또 배교가 있자 주 신부는 국외 탈출하려다 그냥 스스로 자수함. 1801년에 마침내 새남터에서 참수형 당함.
제3장 수난 당하는 카톨릭
명동성당 :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 자리에 1887년부터 10여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1) 수난을 불러온 요소
a. 조상제사의 문제
유교 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은 효이다(효는 백행지본이다.)
그러므로 불효는 일천가지 중에 가장 큰 죄이다.
그리고 효 중에 큰 부분이 제사이다.
중국의 마테오리치가 중국에서 선교 할 때 조상제사는 정치적 의식이요 기독교는 유교의 발전이라고 했다.(배타 방지위해) 그러다 보니 종교가 혼합적이다.
후에 선교사 도미니크 일행이 잘못된 이런 것을 보고하자 교황 이노센 트 10세가 제사금지를 내림.
* 조상제사 때문에 첫 희생자는 윤시충 이다.
윤시충은 전라도 사람으로 25세에 진사급제하고 서울에 올라와 김범우 집의 교리 연구에서 감화 받고 3년후 입교함.
그리고 모친이 별세 했을때 상복 입고 호곡하고 위폐를 모시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다.
- 이사실이 관가에 알려지자 윤시충과 외종형 권상연은 같이 처형당함.-
* 그당시 천주교 믿는 자는 패륜 외도라 하여 박해했다.
b. 붕당적 요소(당시의 당파 싸움으로 인한 박해)
영조 때부터 천주교가 들어 왔는데 해서, 관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때 는 사색 당쟁이 극심하던 때이다.
영조왕은 당쟁 화를 절감해서 당쟁을 줄이려고 힘을 썼고 정조 대왕도 성품이 어질어서 당쟁을 줄이려고 힘을 썼다.
* 사도 세자문제 발생시
시파(세자 동정하는 파) - 남인이라는 천주교도가 많이 가입해 있었다.
숙종 때 남인 세력이 약화됨. 남인에 속해 있으면 등용길이 막혔다.
* 이런 남인에게 우호적인 재상인 채재공이 있었는데 1799년 사망했다.
정조대왕이 또 사망하자 천주교 박해가 터졌다.
* 정조 아들 순조(11세)가 왕에 오르자 정순왕후(정조의 첩)가 순조 뒤에서 정치를 함. 이때 천주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됨.
* 채재공이 죽자 죽은 후 관직까지 박탈함.(1801년)
* 1801년 이때는 서학을 박해하는 교서를 발표함.(서학은 인륜에 반역하고, 교황 은 장가도 들지 않고 아들도 안 낳고 밑의 똑똑한 자를 뽑아 자기의 위치를 넘겨 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의 세습 윤리와 안 맞아 박해해야 한다고 함.)
c. 황사영의 백서가 문제됨
한국 카톨릭의 4대 박해가 있었는데
1. 신유박해(1801년) : 황사영(경상도 창원사람)은 정약전의 형 정약용이다.
* 주신부에게 영세 받음. 17세에 진사 급제를 함.
박해가 시작되자 충북 제천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를 찾아온 황심을 만남.
(천주교 구하기 위해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 보내자고 약속. 그 편지는 길이 62 센티 폭 38센티의 비단에다 작은 글씨로 13,000자의 글로 보냈는데 내용은 박 해와 참상을 보고하는 것인데 그만 도중 들켜서 조선 조정에 밝혀짐)
* 이 백서가 들켜 카톨릭은 매국종교로 지탄 받게됨.
백서 내용 : 1). 조선 천주교의 실상을 기록하고, 그래서 많은 순교자가 생겼다는 내용.
2). 당시 정계의 사색 당쟁의 실상을 기술. 박해의 이유는 당쟁 때문이 라고 말하고 이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교인이 열악하다고 기술.
3). 중국의 신도 1명을 택해 북경 지대에 점포를 개설해서 청국과 조선 사이에 통신 연락을 하게하고, 북경의 청국 황제를 움직여서 조선왕으로 하여금 서교를 받아들이게 하도록 압력 부탁, 또 중국의 공주를 조선조 왕자에 게 정략 결혼시켜 조선을 굴복시키고 서학을 받아들이도록 부탁, 또 군함과 군수 물자를 싣고 와서 이 나라를 치라고 부탁. 나라는 망해도 천주교는 전파 되야 한다고 함.
* 황사영은 1801년 27세의 나이로 모반죄에 의해 참수되고 이 사건으로 300명 이 순교하였다. 이것을 신유박해라고 한다.
* 신유박해 이후 서학의 창대를 염려하여 쇄국 정책을 조선에서는 실시. 북경 외의 모든 문을 닫아 버림.
* 헌조의 명을 따라 발표된 책들이 : 척사윤음이 나왔고 대외쇄국강저, 안정복 (천학고),
천학문답, 김치진(척사론)
2. 기해 박해(1839) * 신유박해 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북경 주교에게 성직자 보내 달라고 신자들 이 요청.
* 정약종 아들 정하상이 있는데 1816년 2차례 걸쳐 북경의 신부에게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음.
* 1827년 정하상의 편지가 라틴말로 번역되어 교황에게 알려져 그레고리 16세 (교황)은 조선교구를 북경 교구에서 분립 하기로 함.
* 초대 주교로 브르기에를 임명함.- 1831년
* 그레고리 16세 교서에서
첫째로 교회를 양떼로 보지 않고 목장으로 봤다.
둘째로 성직자는 공고 교리, 성례전을 위해 파송 한다.
(즉 천주교는 교리와 구역을 더 중시함을 알수 있다.)
* 브리기에는 부임하지도 못하고 객사함.
* 1835년에 1대 주교가 객사하자 블란서에서 신부들을 파송 하였는데 그중 모팡이 라는 신부가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 통해 상륙.
* 2대 주교로 앙베르가 우리 나라에 잠입해 옴.
샤스텡이라는 블란서 신부가 그후 또 옴.
* 이 세 사람의 신부를 통해 카톨릭 부흥.
* 헌종 5년 (1839)에 2차 박해 시작.
당시 영의정 이지현이 사학박멸을 주장하자 순원 황후가 허락.
* 정하상을 비롯한 100명의 교도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 당했고 나머지 세 신부는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 당했다.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 말함-강조)
3. 병오 박해(1846)
이 박해전 1845년 앙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페레올 주교가 조선 사람으로 최초의 조선 안수 받은 김대건 신부와 한성에 잠입한다.
6개월후 김대건은 외국인 신부 안내 신부라는 일을 하다 군교에게 잡혀 들어감.
1846년 김대건 신부 처형(살려주려고 했으나 끝내 믿음 지킴) 이 이후로 많은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4. 병인 박해와 블란서(1866) 이때 우리 나라는 동학 난으로 많은 시련을 격을 때 동북쪽(두만강) 강변에 러시아가 자꾸 통상하자고 압력을 가했다.
당시 대원군의 측근이 카톨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성에 베르노 주교가 있었는데 로마 교황청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대 원군이 카톨릭에 관대한 생각이 있음과 대원군의 부인은 천주교에 상당한 지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인은 아들 왕자가 황제에 등극 할 때 미사 드려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또 왕자의 유모는 영세까지 받은 여자였다 한다.
베르노 주교는 한성에서 열심히 전도한 결과 1865년에는 12명의 선교사와 평신도 2만 3천으로 늘었다. 당시 상황이 이래서 김기호, 홍범주 등이 의논해서 조, 영, 블 의 3개국이 동맹하여 방하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민비(대원군의 며느리) 는 비밀리에 베르노 주교에게 블과 교섭해서 외세에서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남종삼(조선의 독실한 카톨릭 지도자)을 대원군이 접촉하는 등 카톨릭과 많은 교제가 있었다.
그런데 희소식은 오지 않고 베르노 주교는 카톨릭은 정치적 개입을 원치 않고 방하 책이라는 자체도 부족하다 하여 묵살하였다.
여기에 존심이 상한 대원군이 옛 감정이 살아나고 척외 사상과 서학금지 상소문이 빗발쳤다.
또 당시 우리가 존중하는 청도 천주교 배척 분위기 여서 더욱 그럼.
그래서 새남터에서 7명의 선교사와 베르노 주교가 죽는다.
서문에서는 조선의 신도들이 많이 죽음.
한국 통사에는 교도 12만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으나
다른 자료 종합결과 8천명 정도라함.(3년 동안)
이것으로 인해 블란서 군대를 우리에게 보내 전쟁하도록 하는 원인이다.
니델이라는 선교사가 포교들을 피해 충청도 해안으로 빠져나가 2명의 신부는 거기 남겨 두고 니델과 조선교도들은 아산에서 어선을 빌려 타고 중국 산동성의 지프라는 곳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 도착한 조선 교도들은 커다란 블란서 군함을 보고 이것으로 조선 을 위협하여 천주교를 널리 펼치자고 말했다.
이 조선인 11명중 4명은 중국 3대 도시중 하나인 천진의 블란서 공관에 찾아가 공사인 블란서 제독(로쓰)를 만나서 한국 박해를 보고했다.
이에 분개한 블의은 청국 총리에게 보고하고 니델을 통역삼아 군함을 몰고 강화도에 침공했다.(병인양요) 이것을 계기로 전국에 조서를 내려 어린아이까지 죽임.
* 병인박해와 미국 1866년 7월 평양 대동강에 국적이 미국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 들어왔다.(군함이 아니라 상선) - 여기에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타고 있었다.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
한강인줄 알고 대동강에서 있다 물이 빠져 남아있다 평양 관군괴 제너럴 셔먼호가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평양 시민이 모두 합류하여 상선을 불태워 모두 죽였다.
이 일이 있은 후 1871년에 북경에 주지하던 미국 공사 F 로 라는 사람이 청 국의 총리 아문을 통해 조선 정부에게 셔먼호 사건을 묻게 했다.
- 조선정부는 조선은 외국 상선이라 해서 다 적대한 것은 아니다. 1855년, 1865년에도 미국 함정이 황해도, 평안 연안에 표류했을 때 도와주고 헤어 질 때 술까지 했을 정도다.
따라서 우린 의심 받을 것이 없다. 단지 우리 허락 없이 통상 하려고 해서 불가피 했다고 밝혔다.-
미국 극동 함대 소장 로져스는 군함 4척을 이끌고(1871) 강화도 해역을 통해 광성진 까지와 싸움 벌어졌다.(한성 수비대와)
이것으로 외교 문제 발생하자 대원군은 일본에게 쇄국을 다시 재천명 했다.
당시 조선은 외교를 몰랐으며 일본 외에는 설명할 곳이 없었고 일본이 다른 나라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헤밀턴 피시(미국 국무 장과)는 일본 정부를 통해 조선의 쇄국 정책을 듣고 이제부터 미국과 조선관계는 일본이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
-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의 배경이 됨.-
여기에 대해 로빈슨이라는 유명한 역사학자는 고대 로마 기독교인들이 당한 고난보다 한국의 4대 박해 때 고난이 더컸다 고 말했다.
스테판 나일 박사는 책에서 조선 카톨릭 역사는 가장 로멘틱 하고 믿지 못 할 정도의 수난시대라고 말함.
* 조선 천주교의 신앙 형태
조선 천주교는 철저히 수난과 박해로 얼룩져 있고 4대 박해를 거쳐오는 동 안 피맺힌 헌신과 형극을 거치면서 신앙형태가 생겼다.
(1) 이들 교회는 수난을 통해 오면서 상류에서 하류층으로 신앙의 계층적 구 조로 변모되었다.
(2) 중류적인 감각에 호소하고 민족 주체의식이나 고유의 민족의식에 접촉함으로서 조선적 기독교에 언문(한글)을 중시하게 ?다.(천주교 서적이 많이 한글로 되어있다.)
(3) 1850년대 와서 천주교가 하류층으로 파고들어 격정적이고 종말적인 위기 의식으로 변모됨. 그래서 마침내 저들은 박해로 인해 종교의 내면화 지향적이다.
(4) 1919. 3. 1일에 개신교 교도들은 많이 참여했으나(33인중 16명) 천주교 교인은 전혀 잠잠.(박해에 그 동안 질림)
제4장 한국의 protestant church
귀츨라프 : 1831년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충청도 고대도에 상륙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주기도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토마스의 무덤 :1866년 병인교난 중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순교한 토마스의 시체가 묻힌 곳이다.
이수정의 개종 :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은 그곳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성서 번역과 선교사 초빙 및 유학생교회 설립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진은 1883년 5월 개최된 일본 전국 기독교도 대 친목회에 참석한 이수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로스역 성서 : 스코틀랜드연합 장로교회의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만 주 봉천에 머물면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두었고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 기 등의 협력을 얻어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사진은 1882년에 간행된 최초의 한글성서(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 이다.
1. 시대적 상황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가졌으나 근래에 들어 종교적으로 심한 허탈감을 느낌.
(고려조 : 불교, 조선조 :유교)
그러나 기독교가 전래되기 약간 이전은 종교적 공백기였다.
당시 멕킨지는 당시 서울에는 종교적 행사가 없었다고 보고한다.
1866년 전쟁이 일어나고 1871년 로져스 함대와 전투를 벌이고 운양호를 몰고 온 일본군이 무력 시위하여 1876년 한일 강화조약을 맺으며 계속해서 미, 일, 러시아와 수호조약을 맺음으로 당시 조선이 운둔국(세계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나라)으로 알려지기 시작함.
*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해서 망명 생활 후 돌아온 일본 수신사 박영효 가 일본 요꼬하마에서 조선 선교사로온 스크렌톤 목사(감리교)를 만남.
박영효는 당시에 우리 나라에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선교사들이 와서 교육등 문화적인 필요를 채워달라고 부탁함.
우리 재래 종교는 한물 갔다고 말함.
* 1886년 한블 수호 조약에서 조약문 속에는 교회라는 말이 들어갔다. (나중 이 단어 하나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전도할 때 쉬웠다.)
2. 유럽 christian들의 도래
1) 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이 오게됨. 1627년 네델란드 사람 벨트브레 일행 3사람이 동해안에 상륙함으로 시작.
이들은 동양에서 무역하고자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파선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류. 이들은 물을 얻기 위해 표류했다가 억류되게 ?고 살아가던 도 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났을 때 같이 상륙한 2사람은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벨트브레만 남았는데 전공이 인정되어 한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다.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 몇 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 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하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간 억류되어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였음을 알 수 있다. -
2) 바실홀과 멕스웰의 내한.
1816년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송하는 William이라는 군함이 있었는데 Amhert 사절단이 있었다. 함장은 Maxwell, Bashall 사절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암 홀스트 사절을 내려놓고 본국에서는 한국 서해안을 탐사하라 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에 한국 해안에 와서 해도를 작성했다.
이들이 마량진 앞 갈곳에 들렸을 때 문정의 임무를 띤 첨사 (조대복)이 가서 물어 볼때 이 조대복에게 성경을 줌.(King James Version) - 최초로 한국 에 전달된 성경. - 바실홀은 돌아가서 책을 씀.-
3) 선교 개척자들의 한국인 접근
(1) 칼 큐츠라프 -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독일의 할례대학에서 졸업. 화란 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함.
자바 수마트라(인도네시아)중심으로 중국인 상대로 선교 함.
(중국 옻, 음식 잘 적응)
자바 수마트라에서 - 마카오로 선교지 옮김 - 네델란드 선교회를 떠나 프리렌쓰 미션네리로서 활동함.
1832년에 선교의 방향을 한국의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 백령도 - 원산도에 도착( 만나는 사람마다 의약품, 병고쳐 줌, 전도함)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해 왕에게 성경과 서적 보냄.
홍주 목사 서생 양씨의 도움을 얻어 최초로 성경을 번역(주기도문을)
참고: 이것은 비공식. 공식 1884년
(2) 토마스 목사(정식적으로 안수 받아 오신 목사)의 내한
큐츠라프 목사가 아산만에 온지 33년만에 온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스코틀랜드 사람 토마스이다(런던 선교회에서 1863년 중국 상해 선교사로 파송 되어 왔는데 1865년 중국 지프로 옮겼다.
이때 한국 선교를 자청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간다는 소리를 듣고 통역관으로 자청. 관군이 화공을 맞고 대동강에서 죽음)
이때 배가 타던 때 한문 성경을 강 언덕에 던졌는데 관군 중 하나가 한권을 가지 고 있는데 조카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이영태)
나중 이늘서 박사가 성경번역시 도와주었다.
토마스 목사를 배에서 끌어내 한강 근처에서 목을 쳐죽임.
목을 친 사람은 박춘곤 인데 나중에 회개하여 1899년 세례 받아 평양 초대 교인이 됨. 그후 평양은 한국 개신교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짐.
(3) 로쓰와 멕킨타이어의 고려문 전도(런던 선교회 소속)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심양)에는 한국 교회 설립에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
특별히 우장은 최초의 한인 수세자를 배출한 곳이다.
봉천은 최초의 한국 성서가 번역된 곳.
로쓰와 멕킨타이어는 처남 매부지간(중국 우장을 거점으로 한국 선교 연구함)
마침 조선의 의주 청년 4사람이 , 한약 약장사를 위장하여 중국을 방문했다.
의주에서 강건너 50킬로미터 떨어진 고려문(중국과 물품교환 하던장소)에 갔 는데(서양 무물을 배울려는 의도로)
마침 1873년 봄 로쓰 목사가 중국인 서기를 대동하고 고려문 방문.
(이때는 조선사람이 외국사람 만나는 것도 불법일때)
여기서 의주청년들을 만남.
로쓰는 그들에게 후한 급료를 주는 대신 한국언어와 역사를 가르쳐 달라고 함.
제5장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집회
이수정의 성서 : 이수정이 일본에서 한문 성서에 이두토를 달아 펴낸 <신약 성서 마가전>(1884)이다. 이수정은 이외에도 마태. 누가. 요한복음 및 사도행전을 같은 식으로 펴냈으며 한글성서로 <신약 마가 전 복음서언>를 냈다
최초의 견미사절단 :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비로소 기독교선교의 길이 열리게 된 셈이다. 1883년 민영익(앞줄 중앙)을 단장으로 한 견미사절 단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미감리회의 가우쳐와 만나게 되어 한국선교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고종의 선교윤허 : 미국 감리회 선교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주재 감리교 선 교사 매클레이가 1884년 6월에 내한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교육 및 의료 선 교 윤허를 받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1934년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배재학당에서 공연된 연극의 한 장면이다.
광혜원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최초로 내한(1884년 9월) 한 알렌이 고종 의 윤허를 얻어 설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오늘의 세브란스병원 전신이 되었다. (1)백홍준과 서상륜의 수세와 전도활동.
우장으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4명이 따라감.
로쓰목사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목사님은 이들에게 보수와 문물을 줌.
처음에는 4명이 잘 안 받아 들였다.
왜냐면 그때 서학은 국법으로 사학이라 하여 핍박했기 때문이다.
로쓰목사는 1874년에 한영회화라는 책을 만들었고 1875년에는 예수성교문답 을 만들고 1879년에는 한국지 그 역사, 생활, 습관이라는 책을 씀.
만난지 3년째 1876년에 이들 4청년이 세례를 받음(우장에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세례자
이들이 세례 받은후 로쓰와 4청년은 한국 성서 번역에 착수해서 1882년 봄에 요한, 누가복음을 번역 1883년에는 마태,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이때 의주청년 서상륜이 찾아옴. 서상륜은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친척을 따라 홍삼 장사하러 중국을 따라오가다 콜레라에 걸렸는데 맥킨타이어가 그를 살게 해 줌.
그래서 이후에 성경번역을 로쓰와 4명과 함께 귀한 역할을 함.
그때 공관복음서를 번역 출판했는데 국내에 배포하기 힘든 상태였다.
서상륜이 이것을 짊어지고 여기저기 배포함.
이때 3,000권 찍어낸 것을 로쓰역이라 한다.
이것이 관과에 알려져 위험해 지자 서경조(서상륜삼춘)과 둘이서 황해도 송천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옮김. 여기서 송천 솔래 교회를 개척함(1884년- 조선 최초의 개신 교회) 1884년 또 다시 성경을 만들었는데 로쓰 목사가 쪽 복음 6천부를 제물포 (인천)로 보냄
-최초의 밀수품이라 칭하기도...
조선은 당시 독일사람인 멜렌 도르프라는 사람을 현재 관세청장 이라는 자리를 줘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관세 업무를 맡게 함.(조선은 너무 외교를 못했기 때문)
이때 멜렌 도르프가 서상륜을 불렀다.(왜냐하면 제물포에 성경 6천권이 와있어 서) 로쓰는 백홍준과 이성하에게 편지써서 멜렌 도르프에게 잘 봐 달라고 부탁.
폐지/노끈 성경 (성경을 안 들키기 위해 폐지처럼 하기 위해 제본 안하고 나 두고, 제본안하고 노끈처럼 꽈서 나둔것)
참고 : 김재준 박사 아버지는 유학자였다. 성경을 분배하는 상인이 하루는 그 집 에 머물렀 는데 마땅히 줄 것은 없고 해서 성경을 한 권 놓고 갔다. 김재준 박사가 중 학교때 Y. M. C. A뒤에 승동 교회에 갔다가 설교에서 성경을 읽어야 위대한 사람이 되고 영어 공부 한 사람 치고 킹제임스 버젼을 안 읽으면 안 된다고 해서 그 말에 집에 돌아가 그 책을 꺼내 읽고 훌륭한 목사님 됨.
저고리 성경 : 당시 저고리에 솜을 넣는데 아예 성경을 넣고 꼬매서 가져옴.
1884년 솔레 교회가 세워 졌는데 그 마을이 58호 밖에 안되었는데 서경조, 서 경륜 형제가 열심히 전도해서 몇 달안에 50호가 교회에 나왔다. (서경조는 나중에 새문안 교회의 목사됨)
1년 후에는(1885) 교인들이 자력으로 8칸 짜리(8평) 교회 지음.
(2) 일본을 통한 전도
이수정의 개종과 성서 번역
이수정은 한국에서 임오군란(군인들의 월급안에 모래석은 사건)후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 되는데 박영효, 이수정이 사절단으로 일본으로 가게 됨. 이수정은 현판이라는 자리에 있었는데 가서 안 돌아 오게됨. 일본 동경 대학의 조선과 교수로 눌러 앉음.
쓰다 목사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집에 가서 마태복음 산상설교 벽화보고 감명 받고 영접함. 쓰다는 이수정을 야스까와 목사에게 소개한다. 1883년 4월에 마침내 야스까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음.
일본 성서 공회 루미스 목사가 이 소식에 기뻐함.
이수정을 만나 도움을 받아 성서 번역을 시작해서 1883년 - 4복음서와 행전 번역이 나왔고 1885년 마가복음이 출간되었다.(이수정판)
일본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들이 본국에다가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부탁. 1885년 4월에 그래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오게 되는데 (그들은 제물포 도착당시 이수정판 성경을 갖고 있었다) 오기 전에 일본에서 조선 성경을 보고 기뻐했다.
참조 : 우리 나라가 장로교는 미국, 세계보다 더 크다.
제6장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형성과 부흥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1885년 4월 5일 함께 내한한 두 선교사는 한국 개신교회의 개척자였으며 절친한 동역자였다.
선교사들의 순회전도 : 1891년경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들의 서북지방 순회 전도 (마펫. 게일. 베어드 등)
매서인들의 전도 :성경과 전도지를 파는 매서인(권서인)들의 활약으로 한국 교회는 크게 발전하였다. 1890년경 서울지방에서 활약하는 매서인.
소래교회 : 1884년 황해도 장연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새문안교회 : 조직교회로서는 한국에 처음 세워진 (1887년) 교회로 정동에 서 시작되었다.
정동제일교회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로 1887년 창설되었다.
장대현교회 : 1893년 평양에 설립된 장로교회이다.
성공회 서울대성당 : 1890년 한국선교를 시작한 영국 성공회는 서울 정동에 대성당을 설립(1891)하고 로마네스크식 건물을 마련(1926)하여 성공회 선교 의 중심으로 삼았다.
강화성공회성당 : 1893년부터 시작된 성공회의 강화. 선교 결과로 1900년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채용한 성당을 건축하였다. 기독교 토착화의 단면 을 보여주고 있다.
구세군 선교 : 구세군의 한국 선교는 1908년에 이루어졌다 .개척 선교사 호 가드 전도
무교동 성결교회 :동양선교회 복음 전도관이란 이름으로 1907년 서울 무교동 에 설립된 이 교회가 오늘의 성결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동아기독교 :침례교회의 전신인 동아기독교는 캐나다출신 선교사 펜윅에 의해 1889년에 설립되었다
일본인 교회 :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 교회(특히 조합교회)는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병합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사진은 해방 전까지 일본인교회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덕수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서울 정동에 소재.
배재학당 :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교육 기관으로 1885년 8월에 설립되었다. 1887년에 건축된 교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벽돌 건물이 기도 했다.
이화학당 : 1886년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교육 의 요람이 되었다.
1. 개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
의료와 교육 사업(우리 나라는 의료와 교육이 필요함을 느꼈다)
중국에 의료 선교하던 알렌 박사가 1884년 9월 20일에 의료 선교사로 자청해서 우리나라에 옴.
같은해 1884년 10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갑신정변 :우리 나라 최초의 우체국을 세워놓고 낙성식을 하는데 내노라 하는 우리나라 인물들이 참석했는데 수구파(옛것을 지키려는, 대장은 민비의 오라비 민영익)와 개화당(개혁으로, 대장으로 박영호, 김옥균)이 있었는데 개화당 사람 이 민영익을 칼로 찔렀음. 개화당이 3일 동안 천하를 이루다가 다시 흩어짐. 이때 알렌이 민영익을 고침.(한의사 14명은 실패했는데) 이것 때문에 알렌의 인기는 치솟음.
알렌은 그래서 궁중 시의가 되어 모든 왕족, 고관을 치료함.
민영익은 알렌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10만냥을 사례함.
이 돈으로 알렌은 왕립 광혜원을 설립.
이 병원의 설립 2주후 고종황제가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줌.
제중원 - 나중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
당시 의대가 파리 날렸는데 백정인 白哥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아들이 콜레라 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세브란스 의사들이 살려 주었다. 의사들이 그 아들을 세브란스 의사로 만듬.
1885년 4월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오는데 문을 열어주는 도움을 주게 되는 배경은 알렌이 병원으로 정부에 호의를 준 영향이 크다.
교육
멜렌 도르프 : 영어 강습소 생김.
우리나라 조정에서 외교관, 통역관 양성 목적.
한국정부 : 미국 정부에게 현대 교육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
헐버트 1884년에 육영공원(영재를 교육하는 공적인 학원)- 최초의 미국식 학교인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다님. 후에 나라에서 이런 학원을 닫게 하자 선교사들이 교육에 직접 뛰었다.
2. 선교 활동과 조직 교회의 출현
1885년 4월 5일(부활절)
알렌의 뒤를 이어 호레스 언더우드와 아펜 젤러가 우리나라에 도착함.(그때는 당장 전도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1887년에 언더우드가 솔래 교회에 가서 7명의 신도에게 세례를 줌. 1887년 9 월 27일에 언드우드가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림.(14명과 같이)- 이 교회가 새문안 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10월 9일에 아펜젤러는 또 언더우드 처럼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정 동 제일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아펜젤러는 정동 자택에서 교회만 아니라 학교를 세움(2명으로 시작) - 1주년이 되는 때에 고종황제께서 배재 학당(인재를 배출하는)이라는 이름을 줌.
(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들어온 후 들어온 선교사) 스크렌턴(감리교 의료 선교 사)의 어머니 미세스 스크렌턴이 자기 사랑방에서 정부 고관 부인 2사람을 데리고 학교 시작- 이화여대 전신(1885)
1886년에 고종 황비의 아내 민비가 이름을 줬는데 이화학당이라 했다.
이런 학교들에는 학생이 별로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많 았다. 당시 선교사들은 모유보다 우유를 먹이는 등 자기들도 먹고(악성 우유통 루머번짐) 광이문(서소문)밖에 콜레라 환자들을 버렸는데 스크렌턴의 모친이 그중 1명의 소녀를 데리고 와서 아들이 고쳐서 이 학교 3회 졸업 소녀가 된다.
1886년 정동의 언더우드 사랑방에서 고아원 스타일의 학교를 시작했는데 1891 년에 와서 예수교 학교로 바뀌고 1905년에 경신 중고등 학교로 바뀜.- 나중에 정신 여자 중 고등학교로 바뀜.
북한에는 숭실 전문학교, 숭의 전문학교, 광성 중 고등학교.
1892년에는 미구 남 장로교에서 파송한 레이놀즈와 6명의 선교사가 입국해 전 라도 쪽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예수병원"을 설립했다.
1893년 카나다 연합교회에서 와서 함경도 선교함.
동년 동양 선교회가 들어와 년 성결교회를 시작
동년은 영국 구세군이 들어와 선교 시작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하와이로 이민 가는 사람이 늘었다.(당시 7300명 정 도였는데 이중 윤은현, 손흥조가 일본에 들렸다가 안식교 전도사를 만나서 돌아와 한국에서 안식교가 시작된다.)
3. 성서와 성례전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 성서와 관련하여 출발했다고 얘기할수 있다.
1885년 4월에 인천에 처음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손에는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성서가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서 공부에 관한 열정이 대단하였다. 한 선교사 왈 " 이세상의 모든 성서가 불타 없어져도 한국인 5명만 모이면 성서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란?
루터 :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어야 존재 가능하다고.
칼빈 :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제 4부에 보면 루터와 마찬가지로 말씀과 성례전의 중요성을 얘기함.
우리 나라는 말씀에 대한 열정은 컸지만 성례전에 대한 의식은 약하였다. 오늘날도 그런 경향이 있다.
* 교회에서의 말씀과 성례전은 균형 울 이뤄야 한다.
4. 선교지역의 분할과 선교 정책
한국에는 많은 선교회가 조직됨.
장로교 - 북 장로교 감리교 - 북 감리교
남 장로교 남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이러한 많은 교단에서 선교지 분할 정책을 쓰게됨.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선교. 이 외에 이미 선교가 시작된 곳은 북 장로교 가 맡음. 부산(경상도)은 호주 장로교,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가 맡음.
1905년 을사보호 조약 체결. 장로교와 감리교간에도 지역 조정이 있었다.
연변 중심의 지역은 북 감리교, 평북 지역은 북 장로교.
1908년 남감리교는 강원 북부 3분의 2와 경기도 서울 이북을 장로교로부터 모 두 떠맡게 됨. 북장로교는 강원 남부 3분의 1, 서울 동부, 서울의 남감리교 지역을 다 떠맡음.
* 선교 정책을 보면,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 사상은 보수적, 경건 주의자들 이었다.
저들이 한국에 왔을 당시 한국은 - 샤머니즘 : 무지함에서 생김.
유교 : 형식주의, 허례허식
불교 : 미신적임.
- 위의 3가지의 사상에 어느정도 젖어 있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 John Nevius를 초청하여(1890년) 그들 과 함께 지내면서 선교사업을 위한 원칙을 세웠다. -
'삼자(三自)정책'
1)Self-propagation 자력전도 : 스스로 전도하게 한다.
2)Self-goverment 자치제도 : 스스로가 교회를 관리, 운영하게 한다. 자치
제도 마련.
3)Self-suport 자치자립 : 자급목회를 하게 한다.
5. 1907년대 부흥운동
1882년 임오군란(직업군의 군량미 부정 사건)
1884년 갑신정변(개혁파와 수구파간의 구테타)
1895년 청,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이러한 일로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망이 없었고 의지할 것도 없었다. 정치, 경 제, 도덕, 정신적으로 절망 가운데 빠짐. 그래서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95년 서울에 주재하던 선교사가 "한국의 실정을 변해가며 일반 백성들 사이 에 각성의 기미가 보인다"고 보고함.
1895년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530명 1896년에는 3276명, 1900년대 와서 는 7690명으로 늘어났다.
<교회성장 요인들> - 당시 황실 고위층과 선교사들 간에 친밀한 관계였다. 1895년 일본 자객에 의해서 민비가 살해되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피신을 하였는데 그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였지만 선교사들의 말만은 믿었다. 한국에는 미국인들이 250명이 있었는데 그 중 절반 정도가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은 선교 사역 뿐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는 선교사들이 눈에 가시였다.
당시 배제학당의 교사였던 이승만을 비롯, 서재필, 윤치호를 중심으로 해서 배 제학당 안에 소위 '협성회'를 조직해서 애국운동을 벌였다. 이 협성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 운동의 시발이었다. 그러나 좀더 체계적인 것은 1893년 10월 '황성 기독교 청년회'가 조직됨.(오늘날의 Y.M.C.A가 됨) 서울 종로 2가에 '황성 기독교 청년회'는 3층 양옥을 건립하고 황태자(순종)가 여기에 참석해 낙성식을 치뤘다. 황제를 비롯해 이또오 히로부미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 었다. 이 청년회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 체육, 공업 교육에도 영향을 끼쳤다. 1896년에 서재필은 독립 신문을 발간한다. 그는 그 신문을 통해 대중계몽에 성 공을 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중국 사신이 오면 환영하던 모화관을 없애고 그곳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
또한 서재필, 윤치호, 홍정우등은 주일마다 집회를 열어 자유사상과 민주주의를 고취시킴. 우국 열사들이 정부의 부정부패를 공격하자 저들은 심한 불쾌감을 갖고 마침내 1898년 12월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선교사들은 감옥을 방문해 그들에게 전도를 해서 1901년 3월에 17명중에 12사람이 함께 세례를 받는다.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문서 전도와 문예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개화 운동에 힘쓰게 되는데 1899년 언더우드와 뜻 있는 사람들이 '성교서회'를 건립 (후에 기독교서회로 바뀜)하여 正音(한글)으로 문서를 발행한다. 1903년에는 이 기독교서회를 통한 출판부수가 25만부나 되었다. 마침내 1907년 우리나라에서 부흥회가 일어났다. 이 부흥회가 일어나기 전 1903년에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 인 하디가 기도하던 중 영감을 받았다고 그 체험을 동료선교사들에게 간증을 했는데 이것이 평양선교사들에게도 퍼져 그 이후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가 함께 모여 합동 집회를 연다. 그래서 이들은 마침내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집회를 연다. 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은혜를 사모한다. 블레오 선교사가 고전 12:27의 말씀을 읽자 불이 붙어서 - 길선주 장로의 간증을 통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남.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상을 바꿔 놓았다. 인격적, 소박한, 공동체적 신앙으로 바뀌어 졌다.
1900년대 영국 웨일즈 지방의 탄광 - 무기력함과 무 희망적인 삶을 살던 광부들 -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짐. - 180도 달라지는 그들의 삶이 일이 미국을 통해 우리 나라에 들어와 1907년 부흥운동을 갖게함.
(6). 교회 행정 기구의 설정
1907년 9월 평양에서 장로교 독 노회 창설
그리고 이 때 평양 신학교에서 배출된 7 의 목사가 안수를 받는다.(서경조, 이기 풍, 길선주,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한승백)
1907년 - 1910년 사이에 한국 교회는 일본, 중국, 만주, 시베리아, 미국 등에 선 교사를 파송한다. 그후 100명 구령운동이 일어남.
감리교는 1901년 김창식과 김기방이 안수를 받는다. 감리교는 처음부터 남,북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들이 독자적인 노선을 걷다가 1907년에 합동해서 하나의 조선 감리교를 세우고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신학교를 세움. - '협성 신학교' 그 후에 와서 1930년대에 기독교 조선 감리회라 이름 을 바꿈.
제7장 일제 치하에서의 교회
옥중개종 :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민족운동에서 적극 참여하였다. 사진은 독 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된 민족지도자들인데 1907년 경 이들은 대거 기독교로 개종하여 기독교의 기도자들이 되었다.
문용기의사 기념비 : 3.1운동 때 이리 만세시위를 주동하면서 순국한 기독교 인 문용기의 기념비. 이리 소재.
1. 십자가를 걸머진 교회
우리나라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독교의 교리 - 유일신 사상과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귀하게 여겼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탄압했다.
그 당시 교회는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강력한 조직체가 되었고 이를 눈치챈 일 제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밈.
(기독교 말살 정책) - 1910년 12월 27일 일본의 데라우찌 총독이 압록강 철교를 놓고 그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그곳에 가던 기차는 선천역에 한 번 정지하게 된다. 헌데 이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찌를 암살한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많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 당시 인구 2000만명중 크리스챤이 18만명이 넘었다.
700명을 체포하고 그 가운데서 105인을 유죄 판결을 내렸다. 105인은 여러 차례 감형으로 형기를 마치고 나오게 된다.
105인중 9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저들이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 9000명이 나와서 그들을 환영했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 운동.
1918년 파리에서 세계 평화 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 결 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왜 우리가 일제의 압력 하에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를 품게됨.
그후 1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33인중 16명이 크리스챤이었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앞장섰고 이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기독교 정신 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은 기독교인들을 투옥시키고, 체포, 교회를 파괴시킴. 이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4월 15일 12시경 수원 부근 제암리 교회에 일본헌병이 몰려와 교민들을 모이게 하고 창문에 못을 박고 교회 주변에 불을 지르고 나오려는 사람들은 칼로 찌르고 죽였다.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함. 1919년 일본 보고에 의하면 파괴된 교회가 17개, 일부 파괴된 교회는24개, 그 외에 교회에 큰 손해를 본 곳이 41개, 교회 재산 피해가 3만불이었다. 장로교 보고에 의해 체포된 목사, 장로수가 134명 교인수가 3천 8백 4명, 사살된 신도수가 47명, 감리교 기타 다른 교회의 신도들을 합친 수는 타종교의 신도 숫자를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 이일을 통해 교회는 많은 피해를 봤지만 또 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3. 선교사의 관여도.
일제는 독립운동 배후에 선교사들이 관여하고,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조선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평양 숭실학교에 모우리 모펫이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일제가 그를 잡아갔다. 피신하는 학생들을 은둔 시켜 준 죄였다.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도 독립운동 시위에 동향을 미국 선교회 에 보고하고 총독과 일제의 잔악상을 세계에 알렸다.
제8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
십자가 처형 : 일제는 민족운동지도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였다. 철도를 파괴한 독립투사를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신사참배 :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 (1943 년).
주기철 목사의 묘 :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 순교한(1944년) 주기철 목사의 묘. 서울 국립묘지 소재.
철수하는 선교사들 :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선교사들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출옥성도 : 8.15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 사 사택에 모였다.
출옥성도환영회 : 해방후 1945년 가을 서울남산 신궁터에서 출옥성도 환영회가 열렸다.
통일교 : 문선명의 통일교도 그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 나갔다. 1963년에 서울에서 거행된 124쌍 합동 결혼식.
1. 신사참배의 강요와 박해
* 신사참배는 일본천왕과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경배이다.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국 본토 침략 전쟁 :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내선 일체' 즉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될수 있는 방법은 신사참배라고 생각하였다.
평양부터 점령해서 신사참배 시작 1935년 11월 평안남도 일본 지사 야스다께는 도내에 있는 각종학교장 회의를 소집하고 모든 학교는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명령함. 이 회의에 참석했던 숭실전문 학교 교장 Mccune은 한국인 목사, 장로를 소집하고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단호한 결의를 하게된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야스다께는 Muccne를 면직시키고 미국으로 추방시킴. 그후에도 일제는 대대적인 신사참배를 강요함. 미션 스쿨에 대해 많은 간섭을 하고 교단 총회 소집도 경찰의 허락 없이는 소집 할 수 없었고 예배도 일본 국회에서 일본 종교 단체법이 통과하게 된다.
신사란? 종교의 범위를 초월한 것.
신도란? 절대의 도로써 모든 일본 국민은 반드시 신사 참배를 해야하는 것. 이 에 순종치 않는 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함.
(이 법에 대한 반응) -
1) 로마 카톨릭 : 1918년까지도 '나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입장에서 반대했는데, 1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애국 적 행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참배를 허락함.
2) 감리교 : 지도자의 대부분이 신사 참배가 국가적 의식이라는 것에 동의함. - 감리교 존속 가는케 함.
3) 장로교 :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9월 9일 서문 밖 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합법화하게 함.
주기철, 이기선등은 신사참배 반대. 일본 경찰은 총재를 만나 회유책을 쓰고 예 배당 분위기는 일본 경찰이 안팎으로 감시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193명이 이 총회에 참석했는데 결론은 신사 참배를 하는 것으로 끝남. 그 후에 도 일제는 계속 교활한 방법을 씀. 평양신학교 패쇄, 2천여 신도 투옥, 50여 명의 성직자 순교.
각 교단이 일제에 굴복한 다음 한국 교회 전체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는 양태를 보여줌.
전체 교회의 88%가 교회에다 일장기를 게양하는 탑을 세우고 일본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교회는 96%였고 동방 요배 실시 교회는 96%, 황국 시민 재창을 93%가 했고 예장은 애국 헌납 기성회를 조직해 그 기성회 이름으로 성금을 모아 일본 육군 비행기를 사주고, 총을 사주었으며, 교회의 종 1540개를 바쳤 다.
2. 일제의 단말마적 교회 탄압
1895년 청, 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일본은 여러 차례 승리로 기세 등등해짐.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샌드위치'였 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봄. 이러한 때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 저항하면 투옥. 구 약의 모세 5경과 요한 계시록을 그들의 국시사상에 어긋남을 알고 읽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게 함. 사도신조 중에 '저리로써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라 라'를 뺌. 찬송가도 거슬리는 것 모두 빼버리고 예배 중에도 천황에게 목례하고, 일장기를 달고, 목사에게 일본 군복을 입도록 함.
1943년에는 주일 오후 예배와 삼일 예배를 막음. 침례교는 재림사상이 강한데 1942년 전국 모든 침례교를 폐쇄시킴. 성결교도 마찬가지로 재림 사상 때문에 1943에 문을 닫게 함. 그래서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다른 교단으로 옮김. 많은 성결교 침례교 성직자들이 체포, 구금됨. 일제는 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탄압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3. 교회 분열의 징조
1930년대부터 분열의 징조가 생김.
* 징조는 지방적 요소와 신학적 요소
장로교 : 평양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이 장로교가 많았다. 이곳은 신학적으로 보 수적인 경향이었다.
1911년 연희전문학교 보조문제로 총회를 열었는데 평양 중심의 교회들은 이 학 교가 남쪽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보조를 반대했다.
1934년에 와서는 북쪽에서 남쪽의 총재들에게 진보 또는 근대주의자들이라고 비난 이에 맞서 남쪽은 북쪽교회에게 교회 전제주의자들이라고 혹평하였다.
그 당시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은 신학의 깊이와 넓이가 달랐다.
이들은 너무나도 근본적인 한국신학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 그래서 평양 신 학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싫어함. 평양신학교는 같은 교단의 사람이라도 유학생은 별과에 들어가 공부를 시킨 후 목사로 만들었다.
감리교 : 1930대에 제 1차 총회를 소집하고 여기서 채택한 것이 "기도교의 근본원리가 시대를 따라 다른 형식으로 표명되었고...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교리적 체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 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그를 따르는 다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 회 조건은 신학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이요 신령적인 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감리교는 좀 더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교장이었던 박형용 박사와 그리고 숭인 상업학교의 김재준 박사는 그 당시 신학논쟁의 거두들이었다. 박형용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극 보수적인 신학교수의 영향을 받아 성서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의 교육을 받았다. 김재준은 같은 곳에서 공부하였는데 박씨와는 달리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는 한국교회 신학의 부재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 논쟁이 계속되다가 1934년과 1935년 장로교 총회의 문제로 대두함.
김영주 : 모세 5경 저작설 부인 (박형용은 이에게, 스스로 목사 됨을 거절하는 것이라 함)
김춘배 : 여권운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함.(박씨는 이를 징계에 처함이 옳다고 했다)
1935년 Abingdon 주석이 나왔을 때 감리교의 류형기 감독이 그것을 편집, 번역하였다. 이 일을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이 같이 했는데 이 책이 아주 자유주 의적이어서 번역한 자들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하고 Abingdon주석을 교인들로 하여금 사지도, 보지도 못하게 함. 점점 신학적으로 개방적이 되어갔다.
4. 교회내의 난기류
1920년대 부터 지적인 변화, 경제적 빈곤, 일제의 탄압 심화 등으로 목회자 양성이 쉽지 않았다. 그 당시 소설가 이광수 왈 " 기독교는 이성을 경멸, 종교 외의 과학, 모든 다른 사상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아서 현세를 무시하고 죽어서 천당만 가려고 든다"라 고 혹평. 그 때 사회는 소망이 없었으므로 목사들은 재림, 즉 이세상 보다는 저 세상을 바라는 설교를 했다.
이러한 때 신비주의자들 등장 - 소망을 심어줌.
1.이용도 목사 : 협성신학교 졸업. 감리교 목사. 교파 초월 부흥사역. 각교회를 돌아다니며 민족의 고난에 울었고 교회 형식주의를 비판. 전형적인 경건주의자 의 모델. 진리는 말에 있지않고 삶에 있다고함.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곧 삶이 다. 믿음보다 사랑에 진리가 있다. 요한 복음서를 제일로 생각. 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방했고 심지어는 사탄, 불경, 사회주의 책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 신학과 기독교 교리를 공격함으로서 신비주의 공통의 오류에 빠짐. 그의 절대적인 사랑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관을 잇는다고 믿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여김.
이때 한국교회는 이용도 목사에게 금종령을 내렸고 평양 장로교에서는 그를 부흥사로 초청하지 못하도록 함. 그리고 그가 속해있던 감리교는 1933년 그에게 휴직 처분함. 얼마 후 결핵으로 사망.
2. 길선주 목사 : 계시록 1만 2백번을 독파. 신구약 성서를 30독. 절망과 고통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강림에 대해 말하고 설교의 주제는 항상 '마라나타'였다. 그에 의해 세례 받은 자는 3천명 또한 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로 돌아온 자가 7만을 헤아렸다.
3. 황국주 : 백일 기도 중에 은혜의 체험을 했다고 함.
그는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차려입고 예수그리스도와 비슷한 풍채라 고 하기도 함.예수 그리스도와 영 육간의 합일이 이루어져 자기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왔고, 자기 목소리는 예수의 목소리로 변했다고 했다. 그 가 가는 곳마다 그를 보고 모여드는 신자가 많았다. 심지어는 가정을 버리고 따 라 다니던 유부녀들도 있었다. 그가 서울역에 왔을 때에는 전국 교회가 떠들석했다. 그는 삼각산에 가서 기도원을 차리고 그곳에서 몸 가름, 피 가름을 하였다. 황국주가 죽은 후 그의 피 가름 교리가 통일교로 이어짐.
제8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
기독교도연맹의 박해 : 이북의 공산정권은 기독교도연맹을 앞세워 공산당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교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기독교도연맹에 반대한 박봉옥 전도사에게 전달된 지시문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재건운동 : 1945년 11월 평북 선천에서 열린 평북 목사수양대회에서 한국교회 재건원칙이 제시되었고 이로써 재건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6.25사변 : 6.25사변 중 한국교회는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었다. 사진은 퇴각하던 공산군에 의해 학살된 우익인사들이 시체들이다.
포로선교 : 아군에 체포된 공산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피어스 박사(1952)
선명회합창단 : 전쟁고아들로 이루어진 선명회합창단은 음악을 통한 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수족절단자복구회 : 토레이 선교사에 의해 대전에 설립된 것으로 전쟁 후 지체부자유자에 대한 사회 선교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부활절연합예배 : 1953년 수복된 서울의 남산 옛 신궁터에서 초교파적 으로 부활절연합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남북통일기원예배 : 1955년 해방 10주년 기념 및 남북통일원 연합예배 에서 한경직 목사 통역으로 피어슨 박사가 설교하고 있다.
장로교 분열 : 1959년 예장 44회 총회는 NAE측과 에큐메니칼 측으로 나 뉘고 말았다.
1. 해방과 교회 재건
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그동안 많은 수난을 겪은 기독교인들은 남다 른 감격을느겼다. 후에 남, 북 분단의 아픔을 가져오기도 함.
(교회 재건 운동)
1)장로교
교회 재건에 있어 선두를 달린 곳이 평양 중심의 관서지방이다.
일제 탄압에 의해서 투옥된 교역자 중 50명이 순교함. 평양 감옥에서 20명이 출옥하고 그동안 지하에 숨어있던 자들이 나와 교회 재건에 힘쓴 곳도 평양이 다.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한 출옥성도들은 나오자마자 가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던 평양의 삼정현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고 교회 재건에 관한 협의를 함. 그리고 9월 20일 '
교회 재건 5대 원칙'을 발 표함.
1)장로교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 신사에 참배 해 죄를 졌으니 통회 자복 후 사역에 임할 것.
권징을 자책하고 2개월 간 휴직할 것 등등...
그후 11월 14일에 선천 월곡교회에서 평북 5개 노회의 교직자 연합수련회가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홍택기 목사 등 일제 때 신사참배를 했던 많은 목사들이 5대 원칙에 대해 반발하고 일어섰다. 그래서 출옥성도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교회 안에 난기류가 생김. 같은 해 12월 초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북한 5개도 연합회를 조직하고 북한 교회와 남한 교회의 교류를 위해 북한 교회에서 이인식 목사와 김양선 목사를 서울에 파송함. 남한 교회에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일어남. 이곳은 주기철 목사님의 출생지이고 최상 림, 손양원, 한상동,등 이들의 영향력 때문에 부산이 중심지가 됨. 부산 진교회에 서 회의를 소집하고 경남 재건 노회를 조직함.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
2) 감리교
재건 감리교회
부흥 감리교회 - 둘로 나뉨.
감리교도 해방과 함께 9월 8일 남부 교단 대회가 소집됨. 이 대회에서 변홍규, 이규갑, 윤성범, 나사행, 이봉구 목사들이 불법성을 지적하며 반기를 들었다. 왜냐하면 이 조직을 한 사람들이 일제 시대 때 굴복하고 그들에게 동조했던 자 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건 감리회와 부흥감리회가 나옴. 이 두파들은 서로가 자기 측 사람이 감독이 되길 원하고 서로 양보하지 못함.
합동안이 나옴 - 일제 때 신사참배한 사람은 간부나 중요한 요직에서 제외시키 고 두 회에서 동수로 선출하여 간부를 뽑는다. 투표가 끝난 후 결과는 부흥 감리회에서 절대적인 숫자가 나와서 이에 불만을 품은 재건 측은 문제를 제기 또다시 갈라짐. 이때 평신도들이 양 파의 합력을 원하여 노력한 결과 분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하나가 되어 감리교의 기틀을 마련함. 그 후로 평신도의 발언권이 높아짐.
3) 성결교
해방 전 성결교는 약 5만 성도가 있었다. 그런데 성결교 교리 중 4중복음이라는 것(성결, 신유, 중생, 재림)이 있는데 이 중 재림에 관한 문제 때문에 성결교가 문을 닫았었다. 해방과 함께 폐쇄되었던 성결교회가 다시 문을 열었다.
2. 북한에서의 교회의 참화
해방되던 해 11월 16일 , 북한의 많은 뜻 있는 기독교도들이 보다 더 좋은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기독교 민주당을 설립했는데 윤영하, 한경직 목사가 중심 인 물이었다. 공산당은 이것을 미리 알고 기독교 민주당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 창 당 대회에서 장로 1명을 살해했고 부근에 있는 교회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에 충격 받은 신의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러시아의 전투기와 탱크를 동원해 학생들을 저지해 많은 학생들이 수난을 당함. (신의주 학생의거 사건) 2년이 지 난 1947년 11월 북한 평양에서 김화시 목사와 고한규 장로가 있었는데, 이들 이 기독교 자유당을 조직하려 했다. 그런데 역시 이들도 창당 대회 하는날 40여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 투옥되거나 러시아로 유배됨. 1948년 북한에서도 공 산 국가를 위해서 주의를 기해 선거일을 정하고 투표를 하는데 모든 기독교인들을 선거에 동원시킴. 여기에 반기를 들고 북한 기독교도의 입장을 발표하였다.
1) 주일에는 어떠한 행사에도 불참한다.
2) 기독교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
3) 교회당은 예배 외의 어떠한 것에도 사용을 불허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구금된다. 마침내 50년 6.25사변 이 일어날 때 북한은 남침 준비를 끝내고 기독교인들을 먼저 검거해 투옥시켰다. 이 때 기독교인들을 찾아볼수 없도록 만들었다.
3. 민족 분열과 교회의 분열
공산당에 대항해 투쟁하던 목사들 순교.
6.25때 여순 반란 사건시 두 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 김익두, 남궁 혁, 송창근 목 사,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납북됨.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고 손실된 교회 수가 장로교 152개, 감리교 84개, 성결교 27개 구세군이 4개 교회였고 순교자도 많았다.
6.25때 서울은 북괴에 동조하는 교인들이 몇 있었다. 경동교회에 출석하는 김욱 이라는 자는 기독교 민주 동맹을 Y.M.C.A 건물에 걸고 김일성이 서울에 왔 을 때 환영식을 함. 6.25가 나기 전 기독교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최근식 목사 는 교도소에서 나와 목사들을 고발 해 북괴군에 의해 끌려가도록 했다.
1950년 4월 경남 부산을 중심으로 해서 장로교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있었다. 6.25가 터져서 모든 지방이 공산화가 되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임. 1951년 5월 당시에 정기 총회를 소집했으나, 이 때 출옥성도들과 일제 때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간에 의견 대립이 생김.
비 고려파와 고려파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비 고려파가 고려파 장로교에서 갈라져 나감. 싸움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같은 해 7월 서로 무서운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고려파는 그 당시 국회의원 22명의 명의로 비 고려파를 용공단체라고 비난함.
1953년 기장과 예장이 갈라짐.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목사의 신학이 신 신학이라고 해서 그 문제를 총회에 제출했고 신학생 51명이 학교를 나가 장신대를 세움. 1953년 정기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목사 안수를 예장에서 받을 수 없다고 해서 갈라짐.
1958년에 같은 예장에서 통합, 합동으로 나뉘게 됨. 학교 부지 관계 때문에, 부정이 있었음을 들고일어나서 박형용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각각 나뉘게 되었다. 1977년 그 후 합동에서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짐 그후 사분 오열의 분열이 이어져 많은 교단이 생김.
첫댓글 할렐루야!아멘 감사드립니다.하나님의역사하심이 오늘날 복음의민족으로,만민족에,복음을전파할수있게하시는시간속에서 멈추지않는 구원의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