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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확신과 관련된 여러 가지 중대한 명제들
1.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확신을 주시지 않는 경우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장 사랑스럽고 빼어난 사람들에게 한동안 확신을 주시지 않는다.
1) 받은 바 은혜를 활용하기를 원하시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영혼은 베드로처럼 언제나 변화산 상에 머물기를 원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 지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기쁨과 평안과 확신’만을 원한다. 만일 언제나 확신만이 계속된다면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여러 가지 은혜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주께서는 자녀들이 믿음과 소망과 인내 등을 활용하도록 잠시 동안 확신을 주시지 않으신다.
2) 희생적인 의무들을 지속적으로 이행하기를 원하시기에
예레미야 애가에 기록된 것처럼 애통하는 것과 회개하는 것, 자기를 탐색하는 것 등의 종교적 의무들을 지속적으로 이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라도 확신을 주지 않으신다.(애1:16, 3:2-3, 3:17,40) 왜 하나님은 자기 자녀에게 값비싼 희생을 치르지 않고서는 이행할 수 없는 종교적인 의무를 이행하도록 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그의 자녀들의 연약함 가운데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고후12:7-9)
둘째, 그의 자녀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진실함뿐만 아니라 능력도 드러내기 위함이다.
셋째, 자녀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더 온전하고 더 탁월하게 닮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넷째, 자녀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복음의 영광을 유지해 나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섯째, 자녀들이 의무들을 행하므로 인해 마지막 날에 받게 되는 상급이 커지기 위함이다.(히11:7)
여섯째, 사탄의 계략을 쉽게 물리치고, 세상을 더 공의롭게 심판하기 위함이다.(마25:4-6)
3) 죄가 지닌 죄악성과 쓰디씀을 온전히 알게 하려고
죄 안에 있는 저 심히 죄악됨과 쓰디씀을 더 분명하게, 그리고 더 온전하게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확신을 얻지 못하여 신음하며 탄식하는 영혼은 이같이 말한다. “아! 주님 이제는 죄가 쓰디쓸 뿐만 아니라 쓰디씀의 본질임을 깨닫습니다. 죄는 내 영혼으로 하여금 감미로운 확신에 이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확신은 자비의 절정과 면류관일 뿐만 아니라 모든 긍휼과 비참함과 영광 가운데서 가장 감미로운 것이기도 한데 말입니다. 아, 사탄과 세상, 내 자신의 기만된 마음이 감미로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 안에서 지금은 얼마나 쓰디쓴 맛을 발견하게 되는지요!”
4) 자신의 유익을 위해 확신을 구하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보다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슬픔 없는 기쁨과 고통 없는 위로, 근심 없는 평안과 쓰디씀이 없는 감미로움, 어둠 없는 빛과 밤이 없는 낮을 구하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확신을 추구하지만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확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달콤함을 배불리 채우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보다 월급에 더 크게 마음을 쓰는 종은 설령 그 주인이 월급을 늦춘다고 해도 이상하게 여길 자격이 전혀 없다. 자신의 유익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오래지 않아 풍성한 기쁨을 안겨 주실 것이다.
5) 확신을 얻을 때 보다 소중하게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을 칭송하도록
가장 많은 수고와 인내를 통해 얻은 확신, 가장 많은 눈물과 씨름을 통해 얻은 확신이 가장 소중히 여김을 받고 높임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결핍을 통해 그 백성들에게 그것들을 더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친다. 광야를 지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은 얼마나 감미로운 땅이었는가!
6) 확신을 얻기까지 더욱 겸손해지기를 원하시기에
긍휼을 누리는 것이 마음을 기쁘게 하듯이 긍휼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겸손케 한다. 다윗의 마음이 가장 겸손했던 때는 왕이 된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 않은 때였다. 히스기야는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크게 교만해졌다. 겸손한 마음이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은혜를 전혀 받지 않은 편이 더 낫다. 저는 많은 보물, 화려한 의복과 함께 히스기야의 교만한 마음을 선택하기보다는 오히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도 바울의 초라한 겉옷을 선택하겠다. 영혼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확신을 얻지 못하는지, 그리스도의 병거인 확신이 왜 그렇게 더디 오는지를 너무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7) 만유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고 온전하게 의지하고 살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 가운데 만유이심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영혼은 본능적으로 피조물을 의지하고 자신이 받은 은혜를 의존하며 자신이 이행한 의무를 의존한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런 연약함에서 고치시고 그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만들기 위해 위로와 확신을 주시지 않는 것이다. 만지고 보고 믿는 사람도 복되다. 하지만 보지 않고 믿는, 그리고 그 어떤 위로나 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든 것이며 그만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크게 복된 사람들이다.
2. 확신을 나타내기 위해 성경에 사용된 단어들
‘확신’(assurance, persuasion), ‘안다’(요일3:14,19,24)
‘원만한 이해’(골2:2), ‘소망의 풍성함’(히6:11,18,19), ‘온전한 믿음’(히19:22).
이와 같이 성경이 확신을 이해와 소망 그리고 믿음에 연결시키는 까닭은 이런 것들이 확신을 뿜어내는 최상의 유쾌한 샘근원이기 때문이다. 성도라면 누구나 확신을 얻어 누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온전한 확신에 도달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온전한 확신은 최선의 은혜요, 최고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탁월하고 가장 사랑스런 친구에게만 확신을 주신다.
3. 참된 성도는 확신이 없을지라도 구원을 받음
참된 은혜를 받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확신이나 자신의 죄가 용서되었고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결여할 수 있다. 실제로는 영혼이 안전한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로를 바라는 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을 정도지만 성경의 어디에도 그녀가 확신을 가졌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마15:22,28)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듣고, 믿고, 인치심을 받았다.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에 있어서 필요 조건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결정짓는 필요 조건은 아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확신이 없어도 구원은 받을 수 있다.
4. 확신에 도달하지 못하는 여섯 가지 이유
1) 트집을 잘 잡는 기질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새사람을 거스르고 옛사람의 편을 들어 주기 때문이다. 성령을 거스르고 육신의 편을 들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르고 사탄의 역사의 편을 들어 주기 때문이다. 가련한 많은 영혼들의 연약함, 광기는 얼마나 큰지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에 불리함에도 말이다.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 기질을 가진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웃에 대항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는 것은 당신의 지혜요, 의무이다. 만일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거하지 않기 위해서는 양심적으로 행동하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혼에게 슬픔과 어둠이 될 수밖에 없다. 많은 이교도들을 보라. 서로를 향해 얼마나 충성스럽고 신실했는지, 여러분이 아무리 트집 잡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어떻게 감히 자신의 영혼과 그 위에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할 수가 있는가? 이것은 확신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이요, 영혼을 지옥에 가두어 놓는 일이다.
2) 받은 은혜의 분량이 극히 작고 연약하기에
작은 촛불은 미미한 빛은 발산할 뿐인 것처럼 작은 은혜는 미미한 증거만 나타낼 뿐이다. 작은 은혜로도 이후에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큰 분량의 은혜이다.
연약한 영혼이여, 하나님의 많은 약속을 기억하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5:3,4,6). 요셉이 야곱과 자기 형제들을 애굽으로 인도해 오려고 마차를 보내었던 것처럼(창45:),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연약한 은혜를 마차로 삼아 하나님 자신에게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은혜를 보존해 주시고, 더 강하게 만들어 주시며, 또 은혜를 더 크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3) 지난날의 죄가 새삼 생각이 나기에
다윗과 욥은 오래전에 회개하고 용서받았던 죄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두려워 떨었다.(시25:7, 욥13:26) 옛 죄들이 새롭게 떠오르는 순간 영혼은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내 죄사함은 확실하게 인침을 받지 못했다. 틀림없이 내 회개는 참되지 않았다”.
4) 말씀과 탁월한 성도들의 기준이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에
가련한 많은 영혼들이 의로움의 완벽한 기준에 빗대어 자신들을 비교하고, 다른 성도들의 완전함에 자신들과 비교하면서 낙담하는 경향이 있다.
5) 부패한 본성이 일으키는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성도의 영혼 안에 보배로운 은혜가 여러 가지 많이 있을지라도 부패한 본성이 연기를 내면 은혜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그 영광을 볼 수 없다. 우물이 하갈 옆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열어 주시기 전까지 그 우물을 보지 못했다.(창21:19,20) 성도라고 해서 항상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바닥까지 떨어지는 일도 있다.
6) 자기 성찰과 점검을 소홀히 했기에
마음 안에는 은혜가 있고 여러분은 얼마든지 그 은혜를 볼 수 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행하신 일, 지금 행하고 계신 일의 회계 장부를 비교 검토해 보라. 여러분에게 행하신 일과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이 행하신 일을 비교 검토해 보라. 틀림없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들을 온 세상을 다 주어도 맞바꿀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라. 가장 작은 은혜의 불꽃이라도 마침내 영광의 면류관으로 변화될 것이다.
5. 오랜 기다림 끝에 확신을 얻는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오랫동안 확신을 주시지 않을 수 있지만 오랜 인내 후에 마침내 확신을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다. 아가서에 나오는 교회는 많은 위험과 곤란, 많은 어려움과 모함을 통과한 다음에 비로소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발견한다.(아3:4)
탁월한 설교자인 후로그모턴은 임종시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순교자 글로버, 허드슨도 화형대에서 확신을 가지고 기쁨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가장 사랑스러운 자녀들에게 확신 주시는 일을 보류하신다.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기다리며 바라야 할 분이라는 사실과 확신은 기다릴 가치가 있는 보석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탄식할지라도 자신이 원하실 때 오시고 원하실 때 가시며, 원하시는 것만큼 머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묵묵히 기다려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6. 확신을 얻은 후에 그 확신을 상실하는 경우
확신을 누리고 있는 가장 탁월한 영혼들도 확신을 상실할 수 있다. 한 쌍의 연인과 같은 은혜와 확신은 하나님의 의해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 죄나 하나님의 고의에 의해서도 그 둘은 결단코 나뉘어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한 쌍의 연인이 되어 있는 은혜와 확신을 함께 누리는 영혼은 두 개의 천국을 향유하게 된다. 이 땅에서는 기쁨과 평안을, 영원한 세계에서는 행복과 천국을 향유하게 된다. 은혜와 확신을 갈라놓는다면 비록 지옥은 모면할지라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계속 소유하고 싶고, 위로를 계속 누리고 싶고, 면류관을 계속 지키고 싶다면 은혜와 확신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입술이나 생명으로나, 말이나 행실로나 이 두 가지를 따로 떼어 놓는 일이 절대 없도록 하라. 범죄를 행함으로써,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거부함으로써, 성령의 역사를 오판함으로써 성령을 심각하게 멸시하고 근심케 할 수 있다. 또한 탁월한 성도들도 자주 믿음에 불신앙이, 신실함에 위선이, 겸손에 허영심이 수반되는 것처럼 확신에는 두려움과 의심이 수반된다.
많은 탁월한 영혼들이 천국에 가장 가까이 왔을 바로 그 때에 천국을 그 시야에서 놓쳐 버린다. 아브라함은 큰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비굴한 두려움 때문에 한 번에 네 가지, 곧 하나님의 영광과 아내의 정숙, 자신의 양심과 영혼의 손상을 가져왔다.(창12:13, 20:2) 다윗은 때로 감미로운 찬양을 불렀지만(시27:1,18:2) 또한 탄식을 토해 놓는다.(시38:2-6, 30:7) 다윗의 수금보다는 다윗의 마음이 더 자주 틀린 음을 내었다.
세상에 잇는 모든 빛을 총동원해도 태양 빛을 대신 할 수 없는 것처럼, 현세적인 모든 위로를 총동원해도 한 가지 영적인 위로를 대신 할 수 없다.
7. 확신은 개개인의 문제
확신이 정말 확실하고 진실한가는 오직 그 사람 자신의 마음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확신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전에는 나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이다. 내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내 영혼이 구원을 받았음을 내게 보증해 준다.”라고 말할 수 있다. 확신에 찬 성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경험하고 느껴온 것, 내가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쁨, 영광스러운 확신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하늘에 떠 있는 모든 별들을 계수할 수 있을 것이며 바다의 모래도 셀 수 있을 것이다.” 확신의 능력에 사로잡힌 성도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여! 기쁨과 위로, 즐거움과 만족으로 너무 충만하여 이 땅에서는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나이다. 천국으로 데리고 가소서. 그리하여 당신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저 영광을 누리게 하옵소서.”
확신이라는 것은 소유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흰 돌과도 같다.(계2:17) 로마인들 사이에서 흰 돌은 긴요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첫째, 로마인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사람들과 정복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흰 돌 위에 새겼다. 둘째, 로마인들은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에게 흰 돌을 줌으로써 그 사람을 석방했다. 셋째, 로마인들은 어떤 명예로운 지위에 선출된 사람에게 흰 돌을 주었다. 확신이라는 흰 돌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과 진동하지 않는 나라와 썩지 않는 부요함과 쇠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도록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히12:28, 마6:20, 벧전1:4)
- 토마스 브룩스, 확신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 pp 5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