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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다리의 유래(由來)
인간(人間)이 머물러 사는 곳에는 반드시 흔적(痕迹)을 남기게 마련이다. 오랫동안 살면서 편리한 데로 익혀진 생활관습(生活慣習)이 풍습(風習)이 되고 전통(傳統)이 된다. 이러한 추억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을 역사(歷史)라고 하며 관습(慣習)과 풍습(風習) 또한 스스로 다듬어 지면서 전통문화(傳統文化)가 된다.
대대손손(代代孫孫) 선대(先代)로부터 물려받은 아름다운 삶의 터전인 고분다리는 하늘이 내려주신 천혜(天惠)의 터전이다. 동(東)으로부터 흘러오는 한강수(漢江水)가 마을을 감싸고 돌아 비옥한 토지와 어족자원이 풍부하였다. 이러한 살기 좋은 자연환경으로 인해서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신석기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백제가 도읍을 한강유역으로 정하면서부터 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곳은 한반도 역사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전통문화를 계승하며 대대로 살아온 우리들이야 말로 역사의 축(軸)을 이루는 주인임을 자부(自負)한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주변지역사회를 살펴보면 급변하는 시대상황과 도시화로 생활환경이 변하여, 소중한 우리 동내 고분다리 지역의 전통문화가 무관심으로 사라지고 있어, 후손인 우리들은 선조님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자료를 정리하여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한다.
고분다리 역사
신석기(新石器)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아리수(한강의 옛 이름)을 끼고 기름진 들과 야트막한 동산으로 이루어진 이 지역은 인류가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문헌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 온조왕13년(BC6) 지금의 풍납토성 부근에 하남 위례성을 축조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여 백성들을 정착시켜 350년 동안 이곳에서 국가를 이루어 통치하였으며, 고려 성종2년(983) 이곳을 광주목으로 하여 목사를 파견하였고, 성종14년(995) 광주에 봉국군 절도사를 두어 관내에 소속시켰고, 조선 명종조선 명종14년(1559)광주의 지위를 격상시켜 방어사라 하였고, 선조6년(1573)에는 토포사를 겸하게 하였고 이후 광주부로 승격되어 관할에 구천면을 비롯하여 23개면을 설치하였다. 갑오개혁(1895)으로 광주군으로 개편되었으며,1914년 일제에 의한 전국의 도,부,,군,면의 통페합이 실시되어 곡교리는 광주군 구천면에 소속되었다. 또한 수도권의 인구집중으로 경기도 광주군 곡교리(고분다리)는 1963년 1월 1일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되었고, 1979년 10월 일 강동구로 분구되었다.
강동구 천호동은 면적 3.07km2인구 10만 6,782(2001년)이며 동쪽은 고분다리역 대로를 경계로 명일동과 길동, 남쪽은 천호대로를 경계로 성내동과 풍납동, 북쪽은 암사동과 접하고, 서쪽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성동구 광장동과 마주보고 있다. 1936년에 한강다리 중에서 두 번째로 광진교가 놓이면서 뱃길이 육로로 바뀌고 광진교의 통행량이 증가하면서 천호동은 동부지역의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1980년에 시행한 천호토지구획사업으로 나지막한 산을 파서 전답을 매우고 하천이 복개되어 천호대로와 선사로가 교차되는 지점에 신사거리가 형성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강동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우리 토박이 주민들은 그 옛날 선조들께서 수백 년 동안 이록한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계승하고자 함을 목적으로 잊어져 가는 옛 지명을 정리 보전하여 후세에도 알리고자 한다.
지명(地名)의 변천(變遷)
일반적으로 일정지역을 일반 지역과 구분(區分)하고자 할 때 그 지역의 특징에 맞는 이름이 만들어져 사용된다. 또한 지명은 그 지역의 사는 사람들의 사회 생활상을 일정부분 내포(內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내려온 농경문화가 급격한 시대의 변화를 격은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의 고향인 고분다리(曲橋里)의 지명의 변천을 고찰(考察)해 봄으로서 부지불식 간(不知不識 間)에 잊혀 질 수도 있는 지명(地名)을 정리(正理) 기록(記錄)하는데 의의(意義)를 두고자 한다.
1)구천면(九川面)
구천면(龜川面)은 광주군(廣州郡)에 속한 면(面)으로 조선 헌종(1836년)때 인구조사(人口調査표)한 기록이 있다. 이곳에 보이는 면(面) 이름으로는 구천면(龜川面)을 포함하여 경안면(慶安面) 오포면(五浦面) 조척면(都尺面) 실촌면(實村面) 초월면(草月面) 퇴촌면(退村면) 초부면(草阜面) 동부면(東部面) 서부면(西部面) 중대면(中岱面) 세촌면(細村面) 돌마면(突馬面) 낙생면(樂生面) 대왕면(大旺面) 언주면(彦州面) 의곡면(義谷面) 왕륜면(旺倫面) 월곡면(月谷面) 북방면(北方面) 일용면(一用面) 송동면(松洞面) 성곶면(聲串面) 성내(城內)로 23개면(面)과 남한산성내(南漢山城內)인 역내(域內)가 있다.
조선 성종때 구천(龜川) 어효첨(魚孝瞻) 선생(先生)이 사셨던 고장이라하여 선생의 아호(牙號)를 따서 구천면(龜川面)이라 했으며 일제가 한일합방 이후 행정구역(行政區域)을 새로 정할 때 구천면(龜川面)의 이름에서 龜(거북구)자가 복잡하다하여 九(아홉구)자로 바꾸어 구천면(龜川面)이 구천면(九川面)으로 바뀐 것이다.
2) 천호동(千戶洞)
천호동의 옛 명칭(名稱)은 곡교리(曲橋里)이고 곡교리(曲橋里)는 고분다리의 한자(漢字) 표기(表記)이다. 광진교가 개통될 때 곡교리에 사는 한학자(漢學者)인 최 노인이 북망대(北望臺)에 올라가 이 일대를 굽어보고 “천호(千戶)가 살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한다. 이러한 연유(緣由)로 이곳의 지명(地名)을 새로 정하여지니 곡교리(曲橋里)가 지세(地勢)에 밀려 천호동(千戶洞)으로 지명이 변경(變更)된 것이다.
3)고분다리
고분다리는 지금의 천호동 지역으로 고분다리-곡교리(曲橋里)-천호동(千戶洞)으로 명칭(名稱)이 바뀌었으며 광진교 개통(開通) 이후 천호동이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지역이 세분화(細分化)되고 행정구역(行政區域)이 새로 정하여져 천호동이 천호1, 2동으로 분동(分洞)되고, 천호1동은 천호1, 3동으로, 천호2동은 천호2, 4동으로 또다시 분리(分離)되었다. 이로 인하여 고분다리는 행정명(行政名)에서 배제(排除)되어 지역의 범위가 축소되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옛 마을(당말 안말 벽동말) 입구에 해당되는 천호1동과 천호3동의 동(洞) 경계선(境界線)을 따라 형성(形成)된 고분시장 주변을 고분다리라 한다.
고분다리는 명일동(明逸洞)에서 흐르는 물과 동화골(현재의 길동(吉洞) 생태공원)에서 흐르는 물이 합쳐져서 한강으로 합류하는데 하천이 마을 앞을 지나고 여기에 놓인 다리(橋)가 고분다리(曲橋)이며 이곳 지명(地名)이 원천(源泉)인 것이다. 다리의 위치는 청룡끝으로 추정(推定)되며 청룡끝은 지금의 삼성아파트 앞이라 한다. 이곳의 지명(地名)이 고분다리(曲橋)인 것을 유추(類推)해 보면 고분다리(曲橋)는 다리(橋)자체(自體)의 형태(形態)가 굽어져서 (曲) 부쳐진 이름 일 수 있고, 도로가 굽어진 곳(曲道)에 다리(橋)가 있어 구부러진 도로에 있는 다리(曲道橋), 또는 구부러진 하천(曲川)이 있는 곳에 놓인 다리(橋)라 하여 고분다리(曲川橋)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구부러진(曲) 대상이 다리(橋)일 수 있고, 도로(道)나 하천(河川)일 수도 있으며 혹은 지형이 굽은 곳(曲地形)에 다리모양도 굽어(曲橋)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좀 더 연구가 진행 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고분다리 마을(曲橋里)의 범위는 “당말” “토말(중간말,안말)” “벽동말” “개깐말”이 속하는 마을과 그 주변농지를 포함하는데 각 마을과 마을의 거리는 가까워 동일문화(同一文化) 공동체(公同體)를 이루었으며 지금의 천호1,2,3,4동에 해당되며 이곳을 총칭(總稱)하여 고분다리라 했다.
2] 고분다리지역의 지명
1)토말(중간말 안말) : 주민들이 토착민 생활을 하는 마을이라 해서 토말 이 라 했다.
2)벽동말 : 마을에서 오동나무를 많이 심었다 하여 벽동말이라 한다.
또한 오리나무도 많았다 한다.
3)개깐말 : 다니는 언덕길이 경사가 심하여 비탈길이라 하고 이름이
까까말 개깐말이라 하였다.
4)당말 : 북망대 기슭에 큰 무속인이 살았다 하여 당말이라 한다.
5)광나루 수영장
광나루에는 백사장이 널게 펼쳐져 있어 서울 소재 한강수영장 중에서
최고 로 쳤다. 한강물 건너에 아차산이 있어 경관이 수려하고 수영장
지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물살의 흐름이 약해 수영하기에 안전할 뿐만
아니라 물 또한 맑고 깨끗하다.
6)구천면길 : 광진교가 개통될 당시에 고분다리 마을의 유일한 국도로서 명일동
상일동을 거쳐 광주 여주 부산까지 연결된 도로이다.
7)군용지길 : 남한산성 서문 밑에 일본군의 군사훈련장을 만들면서 지금의
구사거리에서 약수터을 지나 거여동 군사훈련장으로 가는 길이다.
8)사당모루 : 청송심씨 묘 옆에 사당이 설치되어 있는 곳으로 사당을 돌아 가는
길모퉁이을 사당모루라 했다. 묘 옆에는 수백년된 향나무가 있었다.
9)잔등이 : 지금의 고분다리 전철역으로 벽동말에서 개물가는 옛길 옆의 야산
모퉁이로 성덕여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성의 끝으로 야산의 형상이
사람의 등어리 형상같아 하여 잔등이라 했다.
고분다리에서 계내학교(상일소학교)갈 때 다니던 길이다 .
10) 청룡끝 : 삼성아파트 앞 위치가 용의 꼬리에 해당되는 형이라 청룡끝이라 했다.
11) 구름물 : 구 사거리와 동신중학교 중간지점에 위치한 고개로 주위에 구름이
많아 구름물이라 했다.
12) 북망대 : 지금의 천호성당 위쪽으로 조선 중기때 정엽이 벼슬을 버리고 산아래
집에 살면서 삭망이 되면 산에 올라 북궐예(북쪽 궁궐을 바라보며
임금께 예를 올렸다)를 올렸다 하여 이곳을 북망대 또는 북망산이라
13) 목골개장 ; 개물에서 발원하여 암사동을 지나 한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
있었는데 한강변에서 하천 지형이 넓고 깊은 곳이 있다 이곳에서
목욕을 자주한다 하여 목골개장이라 했다.
14) 잔버들게 : 천호3동 한강주변 밭에 조그만 버들이 많다하여 잔버드리
잔버들께라 했다.
15)아랫길 나들이 : 고분다리 옛 마을에서 광나루터로 가는 길로 족고개에서
지금의 곡교농협 시장길을 따라 한양으로 나들이 갈때 가는길이다.
16)웃길 나들이 : 고분다리 옛 마을에서 암사동 토막나루로 가는 길로 족고개에서
고분다리 버스정류장을 지나 는 길이다.
17)왜고개 : 천호 초등학교 후문길에서 우성아파트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18)족고개 : 방아간이 있던 곳으로 벽동말에서 광나루로 한양 나들이 갈때
넘어야하는 곳으로 지금의 장약국이 있는 일대를 말한다.
19)마루터기: 아래우물에서 심완기씨 집 방향으로 가는길이 완만하게 상승하다가
심완기씨집 근처에 와서 다시 내려가는데 이곳을 마루터기라 했다.
농한기 때는 마루터기 근처에 움집을 만들어 마을사람이 이곳에
모여 담소하며 새끼줄 꼬고 가마니를 짜는 작업장으로 움집은 지금의
마을회관과 같은 역활을 했다.
20) 개죽골 : 마을에서 보기드문 귀한 기와집이 족고개 지나 웃길나들이 골짜기에
있어서 이곳을 기와죽골 또는 개죽골이라 불렀다
21)수렁자리 : 물이 마르지 않아 가뭄에도 논농사가 잘 되는 곳이다. 이러한 논은
상답으로 주위에 발이 푹푹 빠지는 수렁이 있어 수렁자리라 했다.
지금의 천호동 49번지 일대로 산을 깍아 농경지를 매구어 택지를 조성
하였다. 산에서 흙을 파낸 자리는 지금의 천호 중학교가 위치해 있다.
22)바넷들 : 지금의 동신중학교 앞에 있는 넓은농경지로 고분다리
마을을 지나는 곡교천이 이곳을 지나 한강과 합류한다.
23)아래우물 : 지금의 건강약국 앞의 옛길따라 50미터 정도되는 곳으로 마을에서
사용하는 공동우물로 수량이 많아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샘물이
.24) 사금광 : 사금이 나오던 곳이라 사금광이라 한다.
지금의 천호3동 성원 아파트 일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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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렇케 많은 자료를 ..... 자세하고 꼼꼼한 자료 정리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