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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과학의 대표적 갈등 불러
1992년 10월 31일 교황청 과학원 회의에 참석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고통스러운 오해와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가톨릭 교회와 과학 사이의 비극적인 상호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선언했다.
신앙과 과학 사이에 벌어졌던 역사적 분쟁의 종지부를 찍은 이 선언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로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사건을 두고 한 것이다.
359년 만에 이뤄진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이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편견과 선입견, 편협한 교조주의가 일궈낸 부끄러운 교회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회부돼 지동설 포기를 수락한 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며 100년이 지난 뒤 작가가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비록 자신이 한 말은 아닐지라도 그 말은 그의 심정을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갈릴레이와 관련된 일화는 많다. 유명한 것은 피사의 사탑에서 행한 실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탑은 대리석으로 된 8층의 종탑으로 1173년에 시작해 1350년에 완성됐다. 탑을 세우는 동안에 지반이 내려 앉아 이처럼 기울어졌고 그래서 탑의 무게를 층마다 올라갈수록 달라지도록 궁리를 하면서 공사를 했다고 한다.
갈릴레이는 이 사탑에서 무게가 다른 물체는 서로 다른 속도로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발표했다. 흥미로운 실험을 보리라는 기대로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이 실험은 나무공과 쇠공을 탑 위에서 동시에 떨어뜨려 어느 공이 먼저 떨어지는가를 보려는 것이었다.
2층에서 6층까지 각 층마다 나무공과 쇠공을 동시에 떨어뜨렸다. 두 개의 공은 동시에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렇게 각 층마다 5번의 낙하 실험이 진행됐고 실험은 끝났다. 구경꾼들은 뭔가 재미난 것을 보리라고 기대했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흩어졌다. 역사적인 대실험이 끝났지만 찬사를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로 실험적.경험적 과학 방법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갈릴레이는 이탈리아 피사(Pisa)에서 태어나 피렌체 인근의 수도원에서 시와 음악, 미술과 기술 등의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인 1581년 피사대학 의학부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했으나 수학과 물리학에 더 흥미를 느꼈고 기하학에 심취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의학 공부를 포기한 그는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면서 1586년 발표한 논문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1589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모교인 피사 대학에서 수학 강사가 되는데 여기서 그는 유명한 피사의 사탑 낙하실험을 했다. 하지만 진보적인 사고를 가졌던 그는 취임 2년 만에 보수적인 사람들과 사이가 벌어져 사임하게 된다.
1592년 북이탈리아 파도바(Pado va) 대학교의 수학교수로 취임한 그는 이곳에서 18년 동안 재직하면서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고 수많은 학생들이 문하로 들어왔다. 그는 이곳에서 자유로운 연구활동을 하면서 천문학, 수학, 물리학 등 광범위한 연구를 했고 건축이나 토목, 성의 건축에 도 빼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1609년에는 그는 네덜란드에서 개발된 망원경을 개량해 32배율의 망원경을 제작했으며 이를 사용해 처음으로 천체 관측에 나섰다. 이로써 그는 달 표면이 고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고 목성의 위성들을 관측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일찍부터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믿고 있었는데, 자신의 천체 관측 활동을 통해 이러한 지동설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1610년 자신의 천체 관측 결과를 「별들의 사자(The Starry Messenger)」라는 제목으로 출간하면서 이는 철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1613년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지지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하면서 갈릴레이는 격렬한 반대를 받게 된다. 피사 대학 학장인 델치와 철학자 콜롬베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성서를 근거로 그의 지동설을 반박했다. 갈릴레이는 이에 대해 성서가 절대적 진리임은 분명하지만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논박했다.
교황청은 1616년 교령을 반포해 코페르니쿠스의 「천체 궤도 운행에 관하여」를 금서 처분하고 그의 이론을 주장하거나 전파하는 것을 금지했다.
갈릴레이는 그후 피렌체 인근에서 은거하며 연구에 몰두하다가 1624년 로마에 가서 교황으로부터 교령을 해제하는 대신 편파적 토론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에 대한 연구를 허락받았다.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1632년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비교한 「두 주요 우주관에 대한 대화」를 발표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했다.
결국 그는 이로 인해 종교재판에 회부됐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는 선서를 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그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1633년 금서 처분됐다가 1822년 해제됐다.
갈릴레이는 그 후에도 1642년 1월 8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피렌체 교외의 자택에서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연구를 계속했고 근대역학의 출발점이 된 「두 개의 신(新) 과학에 관한 대화」를 완성해 1638년 네덜란드에서 비밀리에 출간했다.
1636년 시력을 잃은 후에도 죽는 날까지 연구를 계속했고 자신의 연구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그였지만 교회는 그의 장례식까지 간섭해 조사 낭독도 금하고 갈릴레이 일가의 가족묘지에 매장하는 것도 허락지 않았으며 비석까지도 세우지 못하도록 했다.
<출처: 행복충전소>
갈릴레오 이야기
-자연은 수학적 언어로 씌어진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하여 시작된 태양중심설은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 초신성의 발견 등 가장 훌륭한 천문 관측 기록을 남긴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 1601, 덴마크)의 열정적인 하늘 사랑으로 인하여 더욱 진보하게 됩니다. 神 중심의 중세의 가치관을 타파하고 인간과 물질 중심의 유물론적인 사상으로 전환하는 토대가 되었던 16, 17세기의 과학혁명은 코페르니쿠스에 의하여 시작하여 티코 브라헤, 갈릴레오를 거쳐 뉴턴에 의하여 완성되었습니다. 갈릴레오의 업적은 천문학과 역학으로 구분되는데, 망원경의 발명으로 태양중심설을 확고하게 하였고, 중력과 운동에 관한 연구에 실험과 수리 해석을 함께 사용하여 근대역학과 실험물리학의 창시자로 명명되는 갈릴레오의 생애와 업적에 대하여 적습니다.
생애
당시 자연 과학 분야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자연 과학의 모든 문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뒤져서 해당되는 대목을 인용해 답을 찾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부친의 영향이었던지 당시의 학풍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습니다. 그의 논거에는 유클리드나 아폴로니오스, 아르키메데스 등의 학문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591년, 부친이 사망하자 수학 교수의 작은 봉급으로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므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좀 더 수입이 나은 곳을 찾다가 1592년, 갈릴레오는 파도바대학의 수학교수를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여성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며, 여기에서 그는 파오로 사르피 같은 당대의 뛰어난 학자, 귀족 등과 친분을 맺었고, 유력한 후원자를 얻게 되면서 그의 뛰어난 학문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아 연봉이 점점 높아졌다고 합니다. 후일 그는 이때가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1604년 ‘가속도운동에 관해서’라는 책을 발표하여 관성법칙 慣性法則의 개념을 확립하였습니다.
그 후 자신의 숙원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체계에 관한 대화’를 집필하여 제1차 재판의 경고에 저촉되지 않는 형식으로 지동설을 확립하려고 하였으며, 이 책은 1632년 2월에 발간되었지만 7월에 교황청에 의해 금서목록에 올랐으며, 1633년 1월에 로마의 이단심문소의 명령으로 로마로 소환되었습니다. 그는 69살의 나이로 두 번째 종교재판을 받게 되는데, 늘 자신을 괴롭히던 브루노의 화형식 장면을 떠올리며 재판에 임하였습니다. 종교재판을 주도하는 이들은 갈릴레오를 사형시키기로 작정한 듯 엄하게 다루었고 결국, 1633년 6월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소로부터 사형을 언도받게 됩니다. 그러나 갈릴레오를 측은히 여긴 교황은 다시 추기경들을 소집해 목숨만은 살려 주도록 부탁했습니다. 갈릴레오는 다시 종교재판관들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무릎을 꿇었고 그는 심판관들이 제시한 선서를 읽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진리로 인정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을 믿으며, 그에 반하는 태양 중심설과는 결별하고, 앞으로 이러한 내용의 것을 말로나 문서로 발표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라는 내용의 선서문이었습니다. 그는 금고형을 언도받은 후 종교재판소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때 갈릴레오는 “그래도 지구는 움직인다!”라는 그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비록 강요에 못 이겨 지동설 주장을 포기했을망정 마음속으로는 굳게 지동설을 믿었던 것입니다.
종교재판을 받은 후, 갈릴레오는 피렌체 교외에 있는 아르체트리의 자기 집에 사망할 때까지 감금을 당한 신분이 되었습니다. 또 그는 심한 안질에도 불구하고 계속 망원경을 이용해 연구를 하는 바람에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곳에서 제자인 비비아니 그리고 토리첼리와 함께 지내며 1636년에 ‘신과학 대화’를 완성해, 2년 뒤인 1638년 로마 교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네덜란드의 라이든 이라는 곳에서 출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르비아티, 사그레도, 심플리치오라는 세 사람을 등장시켜 진자 운동, 낙하체, 발사체의 운동, 진공의 연구 등에 관련된 내용을 다룬 이 책은 곧바로 금서 목록에 올랐습니다. 1634년 그 동안 연구한 역학 원리와 초기 실험결과를 ‘두 새 과학에 관한 논의와 수학적 논증’이라는 책에 담아 출판하였고, 1637년 실명에 이르기까지 천체 관측에 대한 열정을 보였으며, 가택연금기간 중에도 다른 과학자들과의 학문적 서신교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1642년 1월 8일 갈릴레오는 제자, 가족 및 친척들이 보는 앞에서 78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이단 심문소 대표들은 로마 교황청 앞으로 ‘교황 성하, 금세기 최고의 이단자 갈릴레오가 사망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라는 축전을 띄웠고, 그의 무덤에 묘비를 세우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후 그의 무덤에 묘비가 세워졌고, 그의 묘비에는 자연의 이치와 원리를 수학이라는 자연의 언어로 설명한 위대한 현대 과학의 아버지를 칭송하는 내용이 새겨졌습니다.
※ 피사(Pisa)
~ 아르노 강 하구 부근에 있는 오래된 도시로, 11세기말에는 제네바 ∙ 베네치아와 대립하는 강력한 해상 공화국으로 번영했다. 13세기에 이르러 제네바에 패했지만 그 후에도 문예의 중심지로서 번창해, 갈릴레오도 이곳 대학에서 공부했다. 피사 대성당에 부속된 사탑은 갈릴레오의 이름과 더불어 유명하며 세계 유산 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 유클리드(BC330?~275?)
~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사람으로 그리스 어로 에우클레이데스라고 부른다. 그리스의 수학자로 기하학의 창시자인 그의 저서 중에는 ‘기하학 원본’ 13권이 유명하다. 또, 그는 알렉산드리아 수학 학교의 설립자였다. 유클리드는 피타고라스, 플라톤, 히포크라테스 등이 연구한 여러 가지 수학 연구 자료를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보태어 체계적으로 편찬된 수학 교과서를 만들었는데, 지금까지도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보는 수학 교과서의 내용들이 보는 ‘원론(Elements)'이라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학교에서 학생들이 보는 수학 교과서의 내용들이 바로 이 책에서 시작된 셈이다. 이 책은 1482년에 초판이 인쇄된 뒤, 지금까지 1천판이 넘도록 인쇄되었으며 가장 훌륭한 수학 교과서로 인정받고 있다. 바빌로니아 인들은 기하학의 지식을 토지 측량이나 토목 공사 등 국가적인 대공사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사용했지만, 그리스 인들은 현실의 문제를 떠난 관념의 세계에서 ‘이데아’에 접근하기 위한 이성을 다듬는 도구로써 수학을 대했다. 그래서 그들은 계산술과 같은 기술적인 수학은 ‘로기스티케(logistike)'로, 논증적인 수학, 곧 기하학은 ‘마테마티케(mathematike)'로 구별해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수학의 어원이 되었다. 특히 유클리드는 진리에 가까이 가기 위해 수학을 연구했는데, 그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예화가 있다. 기하학을 배우던 한 제자가 유클리드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딱딱한 논리로만 엮어지는 기하학을 배워서 어디에다 써먹겠단 말입니까?” 그러자 유클리드는 “그에게 동전 한 닢을 주어라. 그는 자기가 배운 것에서부터 무엇을 얻어야 하니까.”라고 말했다. 아마 유클리드는 학문을 통해 현실의 이익이 생기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다.
※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 갈렐레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망령과 싸우며 지지자들을 모으고 근대 자연 과학의 씨앗을 뿌리고 있을 당시, 나폴리의 수도원에서는 브루노라는 젊은 성직자가 죽음을 건 도박을 하고 있었다. 브루노는 르네상스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요 신학자이며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였다.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지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읽고,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받았고, 그 후부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도미니크회에서 절대 금지하는 이단의 논리였다. 브루노는 진실에 대한 탐구심으로 그 이단의 논리를 더욱 공부했다. 결국 수도원 사람들이 그를 철저하게 감시했고, 130여 차례나 교회의 법을 어긴 것으로 고발당한 브루노는 도미니크회로부터 쫓겨났다. 그는 여러 도시와 나라를 방랑하다가 프랑스 등지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했는데 기존 이론과 학설에 상반된 강연은 늘 젊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의심의 대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설은 거짓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은 시, 공간적으로 무한 우주에 속해 있으며, 별들은 우리의 행성계와 비슷한 무수한 행성계의 태양이며 중심입니다.’ 그는 나중에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모아 ‘무한 우주와 모든 세계에 대해’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었다. 브루노는 1572년 8월 23일부터 24일에 걸쳐 하룻밤 동안에 약 3,000명의 위그노 교도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본 뒤 잠을 이루지 못하며 두려워했지만, 거짓으로 오염된 로마 교회에 결코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실을 주장했다. 그러던 중 그는 베니스의 귀족에게 속아 조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베니스의 감옥에 갇혔다. 종교지도자들은 브루노를 이단자로 재판하고, 6년 동안 로마의 감옥에서 지내게 했다. 도미니크 수도원의 원장은 브루노에게 생각을 바꿔야 목숨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브루노는 ‘내가 취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말로 응답했다. 결국, 브루노는 1600년 2월 17일 로마의 캄포 데 피오리에서 교황과 50여 명의 추기경 그리고 수십만 명의 군중이 보는 가운데서 화형식을 당했다. 그는 쇠사슬로 기둥에 꽉 묶인 채 장작불에 타면서도 ‘우주는 무한하며, 무한한 수의 세계가 있다.’라고 외쳤다. 이 화형식에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던 갈릴레오는 브루노의 끔찍한 죽음과 사람들의 무지함에 충격을 받아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 토리첼리(Evangelista Torricelli; 1608~1647)
~ 이탈리아의 물리학자로 갈릴레오 계통을 이어받아 갈릴레오의 역학을 전개했다. 유속과 가압의 높이에 관한 ‘토리첼리의 정리’를 발견했으며, 망원경을 개량하고 초기 현미경을 제작했다. 수학자로서 특히 사이클로이드를 연구했고 압력의 단위 토르(Torr)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피사 사탑의 낙하 실험
피사 대학의 교수가 된 다음 해인 1590년, 갈릴레오는 무게가 다른 여러 개의 쇠공을 들고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8층짜리 건물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그가 이렇듯 여러 개의 쇠공을 들고 올라간 까닭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신봉자들에게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학문은 ‘무게가 다른 물체는 떨어지는 속도도 다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무게가 10kg인 쇠공은 무게가 1kg짜리인 쇠공보다 10배나 더 빨리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을 함께 떨어뜨리면 1kg짜리 쇠공이 땅 위에서부터 1/10 지점을 넘는 순간, 이미 10kg짜리 쇠공은 땅에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건물 꼭대기에 올라선 갈릴레오는 적의에 가득 찬 아리스토텔레스 신봉자들의 눈초리를 따갑게 인식했습니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대로 두 쇠공이 동시에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자기에게 어떤 끔찍한 시련이 닥쳐올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실험을 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사고 思考실험(어떤 이상적인 상황을 상정하고 거기에서 이상적인 실험을 실시했다고 할 때 일어나리라고 생각되는 현상을 이론에 입각하여 사고적으로 추구하는 실험)을 했고, 반론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 따르면, 똑같은 무게를 가진 세 개의 쇠공을 일정한 높이에서 땅으로 떨어뜨리면 세 개의 쇠공은 동시에 땅에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개의 쇠구슬 중 두 개를 끈으로 연결해서 한 개로 만든다면 새로 구성된 물체는 나머지 한 개 쇠공 무게의 두 배가 될 것입니다. 다시 이 두 종류의 쇠공을 일정한 높이에서 지표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끈으로 연결된, 무게가 두 배인 물체가 다른 하나의 쇠공보다 두 배나 빨리 지상에 떨어질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대로라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래 똑같은 속도로 나란히 떨어지고 있는 두 물체를 끈으로 연결시켰다고 해서 두 배나 더 빨리 떨어진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드디어, 그는 높이 55m의 높은 탑 위에서 무게가 10배 차이가 나는 두 개의 쇠공을 떨어뜨렸습니다. 그 광경을 일반 시민과 학생들, 철학자와 피사 대학의 교수들이 모두 보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쇠공들은 거의 동시에 땅에 떨어졌습니다. ‘모든 물체는 무게에 관계없이 똑같이 떨어진다.’는 갈릴레오의 낙하 운동을 뒷받침한 이 실험은 2,000년이나 지켜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낙하법칙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실험을 보고서도 반대 진영의 학자들이나 학생들은 쉽게 갈릴레오의 이론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실질적인 실험과 증명에 익숙하지 못했던 당시의 학자들은 갈릴레오의 생소한 실험이나 주장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식에 더 큰 믿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 실험으로 갈릴레오는 오히려 피사의 대학에서 자기주장만 고집하는 싸움꾼이며, 반역적인 과학자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하여 낙하할 때의 속도는 시간에 비례하여 증가한다는 ‘등가속도운동’과 낙하한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과 관성의 법칙을 확립하여 이것으로 투사물체의 운동이 포물선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 다른 주장 ~ 이 유명한 실험에 대해 다른 주장이 있는데, 피사의 사탑에서 한 낙하 실험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갈릴레오의 전기를 쓴 작가 비비아니가 존경하는 스승을 미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은 교회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만약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을 했다면, 이 실험은 단순히 ‘과학 실험’으로가 아닌 ‘로마 교회에 대한 거침없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때문에 ‘다른 이들에 비해 처세술에 뛰어났던 갈릴레오는 그런 실험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게 다른 한편의 주장입니다.
※ 비비아니(Vincenzo Viviani; 1622~1703)
~ 이탈리아 물리학자로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1639년 갈릴레오의 제자가 되었고, 갈릴레오가 쓴 여러 원고의 책들을 교회 당국의 추적으로부터 지켰으며 그의 수많은 일화를 전하는 전기를 서술했다. 1643년 토리첼리와 함께 수은주를 사용해 대기 압력을 실험함으로써 진공이 존재를 확인했다.
※ 피사의 사탑 ~ 갈릴레오의 낙하 실험으로 유명한 피사의 사탑은 이탈리아의 피사에 있는 대성당의 종탑이다. 사라센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성당의 사탑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8층 건물로 높이 55.8m, 지름 16m의 흰 대리석으로 마감된 원형의 탑이다. 탑 내부에 있는 294개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맨 위층에 오르면 서로 다른 음을 갖는 7개의 종이 위치해 있다. 처음에는 현재의 2배가량인 110m로 계획됐지만 공사가 시작된 뒤 3층이 완성될 무렵부터 약한 지반 때문에 탑이 기울기 시작해 계획을 수정했다. 그 후 몇 번이나 공사를 중단하며 수학자와 건축가를 동원해 고민했지만, 그대로 쌓기로 결정하고 공사를 감행했다. 1350년 완공된 탑은 매년 1mm씩 남쪽으로 기울어져 오늘날에는 수직에서 10° 가량 내려가 탑의 높이가 1m 정도의 차이를 보이며 수직선상에서는 5.2m나 기울어져 있다. 1990년에 폐쇄되어 내부 관람이 금지되었으며 ‘피사탑 국제위원회’가 구성되어 붕괴와 기울어짐을 막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강철케이블로 묶고 콘크리트로 기초를 보강해 반대편 지반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적재하고 있다. 기우뚱하게 서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 탑은 700여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쓰러지지 않고 있다. 많은 이탈리아 인들은 사탑의 붕괴를 염려하면서도 똑바로 서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한다.
망원경의 발명과 달의 관측
1608년 갈릴레오는 네덜란드의 리페르스하임이라는 안경 장수가 볼록 렌즈와 오목 렌즈을 이용해 멀리 있는 물체를 크게 볼 수 있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렌즈를 구해 대롱에 끼운 뒤 직접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두 개의 렌즈를 이용해 인류 최초로 망원경이라는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머리가 좋은 갈릴레오는 이 망원경의 가치를 군사적인 용도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베네치아의 총독과 의회에 이 도구의 성능을 보여 주기 위해서 갔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대단한 격찬을 받았습니다. 망원경 때문에 그는 파도바 대학의 종신교수가 될 수 있었고 또 그의 급료는 무려 5배나 넘게 뛰었습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의 성능을 개선하기 위해 렌즈를 자신이 직접 갈고 닦는 등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습니다. 그는 한동안 이 망원경 때문에 몰려드는 인파로 연구는 물론 식사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 갈릴레오는 자신이 만든 망원경 중 하나로 달을 향해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때까지 이 세상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던 달 표면을 경험하게 됐는데, 달의 표면이 평탄한 것이 아니라 지구처럼 울퉁불퉁하고 도처에 분화구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습니다. 갈릴레오는 밤마다 달을 관찰했습니다. 갈릴레오의 망원경에 잡힌 달의 모습은 아라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매끄럽고 완벽한 구형이 아니었습니다. 망원경으로 본 달의 표면은 거의 지구의 표면과 같은 것으로 관측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때까지 ‘완전한 천상계’와 ‘불완전한 지상계’라고 천상계와 지상계를 구별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천체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다고 생각되어 온 태양마저 완전하지 못하고 흑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불규칙하다는 관측은, ‘천상계는 완전하고 불변’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념을 깨뜨리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후 갈릴레오는 성능이 더 좋은 망원경을 만들기 위해 렌즈 연마술을 향상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609년 11월에 성능을 2배로 향상시킨 렌즈를 만들었고 사물을 20배(브리태니커는 32배)나 확대하는 망원경을 발명해 총독을 놀라게 한 갈릴레오는 별을 관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관측 기록을 ‘천계 통보(The Starry Messenger; 1610)'로 출간하였습니다.
※ 흑점(sunspot) ~ 태양의 표면에 나타나는 검은 반점으로, 크기는 망원경으로 겨우 보이는 지름 1,500km의 작은 것에서부터 10여 km에 이르는 큰 것까지 다양하다. 수명은, 작은 것은 1일 이내, 큰 것은 변화하면서 수개월까지 이른다. 태양 흑점의 밝기는 둘레의 광구에 비해 40% 정도로 다소 어둡고, 온도는 4,000~5,000℃로 광구의 6,000℃보다 낮다. 태양 흑점이 나타나는 구역은 태양의 자전과 관련이 있다.
은하수의 정체와 금성의 위상 변화 관측
갈릴레오 이전의 사람들은 하늘에서 한 종류의 별을 보았습니다. 지구의 자전으로 하루에 한 바퀴씩 회전하는 별(항성)과 그 별 사이를 복잡하게 이동하는 별(금성, 화성, 목성 등의 행성)을 그들은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이 두 종류의 별들을 구분했습니다. 그의 관측에 따르면 행성은 둥근 구 모양을 한, 경계가 뚜렷이 보이는 별들로 작은 달과 같이 사방에 빛을 내고 있으며, 항성은 둥근 표면에 경계는 뚜렷하지 않지만 상당히 밝은 빛을 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갈릴레오는 겨울 내내 감기와 싸우며 떨리는 손으로 밤하늘을 관측했습니다. 그는 습기나 눈에서 증발된 증기 때문에 뿌옇게 흐려진 망원경의 렌즈를 닦으며 우주에서부터 오는 경이로운 빛을 찾아 헤맨 끝에 그는 은하수가 무수히 많은 별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또 황소자리의 플레이아데스가 단지 일곱 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가 아니라 수많은 별들의 집단(성단)인 것을 알아냈습니다. 갈릴레오는 금성을 관측하다가 코페르니쿠스의 예언을 증명하게 됐습니다. 그것은 금성의 위상 변화였는데, 금성이 달과 비슷하게 크기와 모양이 변한다는 사실을 관측한 것입니다. 금성이 달과 다른 점은 보름달 모양일 때는 작고 어둡게 보이고, 초승달 모양일 때는 크고 밝게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금성이 지구 안쪽 궤도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지구중심설)에 따르면 지구에서는 항상 금성의 태양 반대쪽면만 보기 때문에 초승달 모양만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지동설에서는 금성이 초승달 모양, 반달 모양, 보름달 모양이 모두 가능합니다. 특히 보름달 모양의 경우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크기가 작고, 초승달 모양의 경우는 커야 합니다. 망원경의 관측 결과는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서 예측된 결과를 보여 주었고 이것이 지동설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 생각되었습니다.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점점 사람들의 우주관을 바꾸는 중요한 기구가 되어갔습니다. 또 갈릴레오는 토성을 관찰했는데, 토성은 양쪽에 불가사의한 귀를 달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갈릴레오가 토성의 고리를 귀로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 행성(行星; planet) ~ 태양계 내에서 타원 궤도를 가지고 태양 주위를 공전하며 스스로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하고 태양빛을 반사해 빛나는 천체.
※ 항성(恒星; fixed star) ~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고온의 천체로, 천구 天球상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 항성이라 불린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별이 여기에 속한다.
※ 플레이아데스성단 ~ 태양계에서 400광년쯤 떨어진 별들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청년 별들이다. 일곱 자매별이라고도 하고, 좀생이 별이라는 뜻으로 묘성 昴星이라 부르기도 한다. 별 주위가 푸르게 빛나는 것은 별을 형성하고 남은 기체가 젊은 별이 내는 푸른빛을 반사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아데스는 많은 별들이 모여 있는 성단으로 성단의 지름만 해도 13광년 정도 된다.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하는데, 빛은 초속 약30만km이므로 쉽게 우리의 머리속에서 쉽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숫자입니다. 위 성단까지의 거리가 400광년 정도라는 것은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그 성단의 별들이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 떠있던 별을 지금 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우주의 신비이고 과거 학문적 천재들은 하나같이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여기에서 겁 劫이라는 말이 떠오르는데, 일반적으로 천지가 태어난 후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을 이르는 말로, 즉 세계가 성립되어 존속하고 파괴되어 空無가 되는 하나의 시기를 이르는 불교 용어입니다. 반대말은 찰라 이고, 겁을 보통 두 가지로 표현하는데, 芥子劫은 40리 성안에 개자를 가득 채우고 100년에 한 알씩 들어내어 그 개자가 다 없어지는 기간이며, 盤石劫은 사방 40리 바위를 100년마다 한 번씩 엷은 옷을 입고 스쳐 걸어가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기간-그래도 겁은 끝나지 않는다고 합니다.-이라고 합니다.)
※ 황소자리 ~ 겨울철 별자리로, 추운 겨울 밤하늘에 머리 바로 위를 쳐다보면 V자를 그리는 별들과 그 옆에 6, 7개의 별들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곳이다. 이 별들이 제우스가 황소 모습으로 변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V자를 그리는 별 줄기는 하이아데스성단이고, 6, 7개의 별들이 모여 있는 곳은 플레이아데스성단이다. 작은 망원경으로도 볼 수 있는 플레이아데스성단은 항상 푸르게 빛나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성단이다.)
목성의 위성과 태양 흑점의 발견
1610년 1월 7일 밤 갈릴레오는 창세기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대단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목성 주위에서 궤도를 그리며 도는 4개의 행성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별들의 소식’이라는 책에 기록했고, 이 책을 젊은 코시모 2세(피렌체공국의 군주로 갈릴레오의 제자였다고 함)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코시모 2세와 그의 세 동생을 기리는 의미로 목성의 네 위성을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그는 어느 세기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기적을 발견하게 도와준 하나님께 끝없는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는 찬양도 잊지 않았습니다. ‘별들의 소식’은 출간 1주일 만에 매진될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책의 내용은 갈릴레오의 명성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한편 그는 무모하게도 토성에 이어 태양을 향해 망원경을 돌렸는데, 순간 태양 광선이 그의 눈을 삼켰고 그는 실명 위기까지 갔습니다. 때문에 한동안 관측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투영법을 이용해 태양의 흑점을 발견했고, 그 흑점의 움직임으로 태양은 자전을 하고 있으며, 기체 덩어리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목성(Jupiter) ~ 태양으로부터 다섯 번째 행성으로, 태양계에서 가장 큰 행성이다. 금성 다음으로 밝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로마 신화에서 신들의 왕인 주피터(제우스)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태양으로부터 평균거리는 7억 7,833만km이고, 공전주기는 11.9년이다. 크기는 지구의 약 11배, 부피는 1,320배, 질량은 약 317.9배이다. 밀도는 지구의 1/4이다. 목성이 조그만 더 컸다면 태양주위를 공전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참고로 목성의 위성 이름은 네덜란드 천문학자인 마리우스가 명명하였는데, ‘이오, 에우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이다.
신과학 대화와 종교재판
1632년 2월, 갈릴레오는 플라톤의 ‘대화’라는 책의 구성을 흉내 내어, ‘신과학 대화’라는 대작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지만, 이후 진정한 진리의 증인으로서 살고자 하는 결심을 하고 이 책을 출판한 것입니다. 책의 대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세 사람으로, 이지적인 피렌체 시민 사르비아티에게는 지동설(태양중심설)을 주장하는 배역을, 우직스러운 아리스토텔레스파 철학자 심플리치오에게는 천동설(지구중심설)을 주장하는 배역을, 상식적인 베네치아 귀족인 사그레도에게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중개적인 입장에서 듣는 배역을 맡기면서 4일 동안 대화시키는 형식을 빌렸습니다. 첫째 날은 천동설의 비판, 둘째 날은 지상의 현상에 준해서 지동설의 가능성, 셋째 날은 천체 현상에 근거한 지동설의 우위성, 넷째 날은 조석론에 나타나는 지동설의 확실성을 이야기했습니다. 대화의 주인공인 사르비아티와 사그레도는 갈릴레오의 실제 친구로 그의 생각에 동조했던 사람인데, 이 책을 발간할 때는 모두 고인이었습니다.
처음에 로마 교회는 그 내용을 조금 수정한 뒤 출판해도 된다고 허락했지만, 이 책이 반향을 일으키며 갈릴레오를 반대하는 파와 지지하는 파사이에 큰 논쟁을 유발하게 되자, 로마교회는 다시금 갈릴레오를 1616년 판결을 어겼다는 혐의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로마교회 내에는 갈릴레오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샤이너(1575~1650; 1595년 예수회 사제가 되었고 1622년 나이세 신학대학 학장이 되었으며, 태양 흑점 발견을 두고 논쟁을 했던 천문학자이며 신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예수회의 회원이며 종교재판소의 위원이었습니다. 그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에 넘기려고 애를 썼습니다.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8세(1828년 즉위, 학식이 높고 진보적이며 이해심이 많고 과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갈릴레오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이었다고 함.)는 갈릴레오에 대해 호감을 가졌지만, ‘갈릴레오가 심플리치오를 조롱한 것은 실제로 교황을 대신한 것입니다.’라는 반대파들의 모함을 받아들여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소에 출두하게 했습니다.
갈릴레오의 위대한 발견들은, 교회의 권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는 성직자, 동료 교수들의 무지와 질투에 가득 찬 모함 때문에 오랫동안 빛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케플러가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성 주위의 4개의 위성을, 갈릴레오가 망원경에 묻은 렌즈의 얼룩을 하늘에 떠 있는 위성으로 잘못 본 착시현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피사 대학의 유명한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부동의 우주’를 부정하는 망원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갖은 모함을 했습니다. 1616년, 종교재판소는 지구의 운동을 거론하는 모든 저작 활동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로마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거짓이며 잘못된 이론’으로 공고했고, ‘태양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주장은 명백하게 성서에 위배되는 이단적인 이론이다. 지구가 세계의 중심에 있지 않고 회전 운동을 한다는 주장은 철학적으로 그릇된 견해이다.’라는 훈령을 발표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하는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갈릴레오는 로마교회의 블랙리스트에 주요 인물로 지목받았기 때문에 늘 조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갈릴레오는 태양 흑점의 발견을 둘러싸고 최초 발견자를 가리기 위해, 당시의 천문학자이며 성직자인 크리스토퍼 샤이너와 논쟁을 벌이게 됐는데 경솔하게도 그는 샤이너의 제자 앞으로 보낸 편지 속에 지구 중심설을 비판한 글을 썼습니다. 이 편지는 교회 내 갈릴레오 반대 세력들에 의해 조작되었고, 결국 갈릴레오를 논쟁의 중심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지기 싫어하고 논쟁을 좋아하는 갈릴레오를 자극해 그가 태양 중심설을 지지하는 중심인물임을 스스로 밝히게 했습니다. 갈릴레오는 변명을 하면 할수록 그 논쟁의 수렁에 빠져들게 되었고 결국, 그는 그들의 작전에 휘말려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연 현상의 연구는 성서의 권위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타당성 있는 실험을 통해 실제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 한마디 말로 그는 크게 문책을 당했고, 교회의 철저한 감시와 견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추기경 회의에 소환되어 태양 중심설을 가르치거나 변호하거나 생각조차 갖지 않도록 경고를 받은 뒤 풀려났습니다. 그 후, 그는 태양 중심설에 대한 공식적인 발언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고 합니다.
※ ‘천재 과학자들의 바보이야기’, ‘새로운 두 과학’, ‘그래도 지구는 돈다(상, 하).’, 두산세계대백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등의 책자와 손영운 선생님의 글을 참조, 인용하였습니다.
<출처: 지혜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