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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 스스로가 일어나 조직하는 자위군(自衛軍). 즉,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원 종군하는 민군(民軍)이다.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으며, 고려·조선 시대를 거쳐 조선 말기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같이 오랜 의병의 역사로 인하여 특유의 의병 정신이 조성되어, 승패를 가리지 않고 죽음을 결심하고 과감히 전투하는 것을 의병의 본분이라 여기게 되었다. 나아가 의병 정신이 곧 한민족의 특성이라고까지 믿게 되었다.
이러한 믿음을 피력한 학자로 박은식(朴殷植)을 들 수 있다. 그는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다.”라고 하면서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즉, 우리 민족은 역대 항중·항몽·항청·항일의 투쟁 속에서 무력이 강한 국민성을 갖게되었고, 이 때문에 어느 침략자로부터도 정복당하거나 굴복하여 동화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의병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임진·병자 양란의 의병과 조선 말기의 의병이었다.
〔임진왜란과 의병〕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관군의 무력으로 인하여 일본군이 수 십일 사이에 우리의 국토와 죄없는 백성들을 짓밟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자기 고장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일본군은 주요 도로를 따라 진격하면서 요충지에만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에, 일부 지역은 일본군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지역은 왜적의 침략에 항거하는 민족적인 저항의 온상지가 되었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 신분 구성 의병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어, 의병 활동을 벌이는 기간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고 무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덕망이 있어 자기 고장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적합한 곳은 일반적으로 대부분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그곳 지방민들이 잘 따를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춘 곳을 근거지로 하여 이를 확대, 더 넓은 지역에 걸쳐서 의병을 소모(召募)했고, 자연히 활동 무대도 넓어지게 되었다.
의병의 바탕을 이룬 것은 민족적 저항 의식이며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의병장이었다. 또한 오랜 유교 교육을 통하여 유교의 도덕적 교훈인 근왕정신(勤王精神)이 깊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의병 봉기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2) 활동 원칙과 규모 의병이 관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무질서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이정암(李廷目)은 황해도 연안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의병 자원자의 성명을 ‘의병약서책(義兵約誓冊)’에 기록하였다. 그리고 군율(軍律)로서 ① 적진에 임하여 패하여 물러가는 자는 참수한다〔臨賊退敗者斬〕. ② 민간에 폐를 끼치는 자는 참수한다〔民間作幣者斬〕. ③ 주장의 명령을 한 때라도 어기는 자는 참수한다〔違主將一時之令者斬〕. ④ 군기를 누설한 자는 참수한다〔漏洩軍機者斬〕. ⑤ 처음에 약속했다가 뒤에 가서 배반하는 자는 참수한다〔始約終背者斬〕. ⑥ 논상할 때 적을 사살한 것을 으뜸으로 하고, 목을 베는 것을 그 다음으로 한다〔論賞時射殺者爲首斬首者次〕. ⑦ 적의 재물을 획득한 자는 그 재물을 전부 상금으로 준다〔得敵人財物者無遺賞給事〕. ⑧ 남의 공을 빼앗은 자는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상을 주지 않는다〔奪人之功者雖有功不賞事〕라는 8개 항목을 정한 것은 의병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1593년(선조 26) 정월에 명나라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2600여명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 수는 의병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전해인 임진년(1592)에 비하여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것은 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에 관군이 차츰 회복되어 의병을 절제하고 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주어, 의병이 해체되거나 관군에 흡수되는 경향을 띠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활약이 컸던 의병장으로는 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김천일(金千鎰)·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정문부(鄭文孚)·이정암·우성전(禹性傳)·권응수(權應銖)·변사정(邊士貞)·양산숙(梁山璹)·최경회(崔慶會)·김덕령(金德齡)·유팽로(柳彭老)·유종개(柳宗介)·이대기(李大期)·제말(諸沫)·홍계남(洪季男)·손인갑(孫仁甲)·조종도(趙宗道)·곽준(郭說)·정세아(鄭世雅)·이봉(李逢)·임계영(任啓英)·고종후(高從厚)·박춘무(朴春茂)·김해(金垓)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다시 벼슬에 들어간 사람도 있으나,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도 있었다. 의병장의 대표적인 활약상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3) 경상도 의병 의병이 처음 일어난 곳은 왜군이 먼저 침입한 경상도 지역이며, 의병을 가장 먼저 일으킨 인물은 곽재우이다. 그는 현풍 유생으로서 경상도 의령에서 1592년 4월 22일 10여명의 가동(家童)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비단옷과 백마를 타고 스스로를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 붉은 옷을 입은 하늘이 내린 장군)’이라 부르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는 사재를 털어 군자금으로 삼았고, 의병의 수가 증가하자 군무 분장의 참모진을 구성한 뒤 바로 임전 태세를 갖추었다. 처음에는 관가에 방치된 무기를 가져다가 의병에게 지급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감당할 수 없게되자 무기를 자체적으로 제조하여 보급하였다. 군량미도 처음에는 자신의 재곡이나 지역 부호들의 후원으로 해결했으나 그것만으로 부족하여 관곡으로 충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전략 기지로서 의령군에 위치한 세간리(世干里)와 정암진(鼎巖津 : 솥바위나루)을 본거지로 삼았다. 세간리는 그가 처음 북을 치고 의병을 모집한 마을이었다. 이곳은 낙동강과 남강이 합치는 기강(較江 : 속칭 거름강)으로부터 멀리 북으로 창녕과 마주하는 낙동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낙동강을 이용하여 병력과 군수 물자를 운반하는 왜선을 차단하여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전라도로 향하는 왜적을 정암진에서 차단하여 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이반한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이끌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과 싸워 적의 낙동강 통행을 막았다. 또 의령·삼가·합천·창녕·현풍·영산 등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우도가 그의 보호 아래 있었다.
곽재우와 더불어 경상우도에서 활약이 컸던 인물로 김면과 정인홍을 들 수 있다. 김면은 처음에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곳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2,000여명을 모았다. 그는 명망있는 사족들로 유사(有司)를 정하고 곽재우와는 달리 관군과도 협조하여 원만하게 의병을 운영하였다.
그는 남명학파라는 학맥과 사상적 기반, 사족 상호간의 중첩적인 통혼에 의한 유대관계, 서당이나 향교를 통한 교우관계 등을 바탕으로하여 백성들을 동원하였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거창·고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관군과 합세하여 적의 선봉을 지례에서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또 무계(茂溪)에서도 승전했으며, 후에는 성주·김산(金山)·개령 부근에서도 왜적과 싸웠다.
정인홍도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성주에 침입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또 임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에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함안 등지를 방어하였다. 경상좌도에서 기병한 권응수는 정세아 등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영천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학연(學淵)·예천·문경 등지의 전투에서 연전 연승하여, 일본군이 몹시 두려워하고 그들과 만나 싸우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김해는 임진년 9월 예안(禮安)에서 일어나 경상도 북부지방을 제압하는 등 일본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하였다.
(4) 호남 의병 호남 의병은 관군이 활약하는 지역에서 일어난 까닭에 다른 지역의 의병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김천일(金千鎰)의 거의문(擧義文 : 의병을 일으키는 뜻을 밝힌 격문)이나 고경명 등의 격문에서 한결같이 공적인 국가 방위의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병들이 공적인 성격을 강조한 것은 기축옥(己丑獄)의 영향이 컸다. 즉, 자칫 잘못했다가는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백성들이 안심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그러나 전라도 의병도 다른 의병과 마찬가지로 향토 방위에 주목적이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호남 의병은 처음에는 여러 곳에서 일어났으나 대체적으로 고경명과 김천일을 중심으로 집결하였다. 그들은 전직 관료였고 막하(幕下)의 대부분은 재지 세력층인 유생들이었다. 의병에 참가한 신분층도 다양하여, 이해는 서로 다를 수 있었으나 왜군을 퇴치시켜야겠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고경명은 유팽로 등과 의병을 일으켜 담양에서 회맹(會盟)하고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각 도는 물론 제주도에까지 격문을 보냈다. 근왕병을 이끌고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향할 무렵에 일본군이 금산(錦山)에 들어오자, 1592년 7월 9일 금산에 주둔한 왜병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그러나 수천명에 이른 의병들 대부분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농민들이어서 대패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고경명은 아들 인후(因厚)와 유팽로·안영(安瑛)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 뒤 맏아들 종후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 해 12월에 의병을 일으켜 ‘복수군(復讐軍)’이라 칭하고, 이듬해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에 참가했다가 전사하였다.
김천일은 나주에 있다가 왜란을 당하여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수백명을 이끌고 왕의 행재소로 향하다가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적의 점령하에 있는 도성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백성들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얻고, 한강변의 여러 적진을 급습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고경명이 금산 싸움에서 패몰한 이후 휘하에 있던 의병 대다수가 흩어졌지만, 재기를 모색한 예도 많았다. 흥덕의 남당 의병(南塘義兵)이나 장서의 남문 의병(南門義兵)은 그들 스스로가 다시 기병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예이다.
(5) 충청도 의병 충청도에서는 조헌이 10여명의 유생과 함께 공주와 청주 사이를 왕래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와 거의 같은 때에 옥천에서 봉기하였다. 이들은 차령(車嶺)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또 온양·정산(定山)·홍주·회덕 등 도내 여러 읍에서 의병 1,600명을 얻은 다음, 승려 의병장 영규(靈圭)가 이끄는 의승군(義僧軍) 500명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다시 금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동시켰다.
그러나 약속한 관군이 오지 않아 의병들 상당수가 흩어지고 700의사만이 남아 생사를 같이할 것을 결심하였다. 의승장 영규도 조헌과 함께 진격하여 금산성에 육박하였다. 일본군은 후속 부대가 없음을 알고 조헌이 미처 진영을 정비하기도 전에 전병력으로 공격해왔다. 조헌이 인솔한 의병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조헌 부자와 영규, 그리고 의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조헌은 고경명에 이어 싸움에서 패하기는 했다. 하지만 수차에 걸친 의병과의 싸움으로 일본군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함에 따라, 호서·호남지방은 온전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6) 경기도 의병 경기도에서는 홍계남과 우성전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홍계남은 아버지 언수(彦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서 양성(陽城)·안성을 주무대로 용맹을 떨쳤다. 적정을 보아 동서로 달리며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이 감히 이 지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인접한 충청도의 여러 고을도 안전할 수 있었다.
우성전은 강화도와 인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강화도를 수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황해도에서는 전 이조참의 이정암이 의병을 일으켜 연안성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황해도에서는 구로다(黑田長政)의 군이 도내 여러 읍을 점령하고 온갖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반민(叛民)들도 많았다. 그런데 오직 연안성만은 아직 침해를 당하지 않고 있었다. 구로다는 이정암이 의병을 이끌고 이 성을 지킨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왔다.
성중에 있는 의병들은 성을 빠져나가 다른 기회를 도모하자고 했으나 이정암은 이를 듣지 않고 굳은 결의로써 수성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에 1592년 8월 27일부터 9월 2일 아침에 이르기까지 4주야를 싸워 끝내 구로다의 5,000병을 물리쳤다. 이로 인하여 연해 10여 고을이 회복되었고, 양호(兩湖)의 해상 교통은 강화도와 연안을 통하여 의주 행재소까지 이를 수 있었다.
(7) 함경도 의병 함경도 여러 지방에서도 의병이 봉기했는데 대부분 북평사 정문부 의병에 귀속되었다. 정문부가 의병을 처음 일으킨 것은 1592년 7월이었다. 함경도 일대에 반민이 가득하여 수령과 진장(鎭將)들이 피신하고 있을 때, 정문부는 그곳으로 피난온 전 감사 이성임을 찾아가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경원부사 오응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정문부 등은 의병을 이끌고 경성부로 들어갔으나, 반적 국세필(鞠世弼)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모두 흩어져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 뒤 정문부는 몸을 피해 있다가 최배천(崔配天)·지달원(池達源) 등의 권유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정문부는 창의대장(倡義大將)에 추대되어 현직 관료로서 의병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1592년 9월에 경성을 수복하고, 길주·쌍포(雙浦) 등지에서도 가토(加藤淸正)의 군사를 격파하여 함경도를 수복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가토가 북쪽 깊숙이 들어와 주둔할 수 없도록 수시로 위협을 가하였다.
(8) 승려 의병의 활약 의병 이외에 승려들로 조직된 의승군(義僧軍)이 또 있었다. 승려로서 최초로 봉기한 이는 영규(靈圭)이다. 그는 공주 청련암(靑蓮庵)에 있으면서 수도하는 한편 선장(禪杖)을 가지고 무술 익히기를 즐겼다. 난이 일어나자 스스로 의승장이 되어 의승군을 모집했으며, 휘하에 800명(≪선조수정실록≫에는 500∼600명)의 의승군을 거느렸다.
의승군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된 것은 1592년 7월 이후였다. 즉 나라에서 승통(僧統)을 설치하고 의승군을 모집하기 위하여 묘향산에 있는 노승 휴정(休靜 : 西山大師)을 불러들인 때부터였다. 선조가 의주 행재소에 있을 때 묘향산에서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온 휴정은 선조를 진알(進謁 : 나아가 찾아 뵘)하는 자리에서 8도 16종 도총섭(都摠攝)의 직책을 제수받다 전 승군을 관장하게 되었다.
휴정은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주둔하면서 8도 사찰에 격문을 보내 의승군을 모집하였다. 대표적인 의승장으로는 황해도의 의엄(義嚴), 강원도의 유정(惟政 : 松雲大師), 호남 지리산의 처영(處英)을 꼽을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휴정의 고제(高弟)들이었다.
의승장으로 먼저 공을 세운 이는 영규이다. 청주성을 수복하는 데 조헌과 함께 공을 세웠으나, 금산 싸움에서 조헌을 구하기 위하여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휴정은 고제들과 5,000명의 승군을 이끌고 1592년 10월 평양성 수복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명나라의 심유경(沈惟敬)이 화의 교섭을 위해 적진에 있다는 이유로 해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 해 명나라 원군과 우리 관군이 평양을 수복할 때 의승군은 모란봉 전투에서 많은 왜군을 사살하여 평양성 수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해 2월 행주 싸움에서 처영은 의승군을 이끌고 눈부신 활약을 하여 대첩을 이루는 데 공이 컸다.
이밖에도 각처에서 의승군의 활약이 컸다. 의승장 신열(信悅)은 진주 부근을 주무대로 의병장들과 합세하여 많은 적을 격파하였다. 의승 법정(法正)은 황해도 중화 지방에서 다수의 왜군을 참수하였다. 의승 인준(引俊)도 의승군 200명을 거느리고 충청도에서 거의하여 왜군과 싸웠다.
(9) 역사적 의의 이상으로 살펴보았듯이,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궐기한 의병의 수가 관군을 능가했고 전과도 관군보다 컸다. 이러한 의병의 눈부신 활동과 수적인 우세는 당시 관리들이 위신이 실추된 채 일반인들에게 불신을 당한 반면, 의병장의 대다수가 전직 관리이거나 유학자들로서 학식과 덕망이 출중하고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큰 명문 거족(名門巨族)들인 까닭에 가능하였다.
그들이 궐기하면 그의 씨족이나 주종 관계에 있던 자들이 그 밑으로 모여들었고, 유랑민이나 관군을 기피하는 자들까지 합세하여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병은 때때로 관군과 대립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전공을 세운 의병장과 관군을 지휘하는 관료사이에는 더욱 심하였다. 그러나 왜란 초기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싸운 의병의 전과가 있었기에 관군이 재기할 수 있는 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다 .
〔정묘·병자호란과 의병〕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때에도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관군의 패배로 수습하기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자는 데 있었다. 의병은 침입을 당한 지역뿐 아니라 후방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침략을 받은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은 직접 적과 싸워 손실을 입히자는 것이었다. 후방 지역에서의 거의는 모집한 의병을 한곳에 집결하여 싸움터로 나가서 관군의 무력함을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호란 중의 의병 활동은 병자호란 때보다 정묘호란 때에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의병의 활동 지역이나 전과에 있어서도 그러하였다. 병자호란 때 의병은 적침 지역(敵侵地域)에서는 별로 뚜렷한 활동을 볼 수 없다. 후방 지역 특히 호남 지방에서 모의 활동(募義活動)이 전개되었으나, 북쪽 싸움터로 향하던 중 인조가 성하지맹(城下之盟)으로 청나라에 굴복하자 그대로 해산해버렸다.
이에 비하여 정묘호란 때의 의병은 상당한 활기를 띠었다. 양호 지방(兩湖地方)을 중심으로 하여 후방 지역에서도 의병장의 주축으로 모병(募兵)·모속(募粟) 등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적의 점령 지역인 평안도에서는 의병 활동이 더욱 두드러졌다. 도내 여러 지역에서 전직 관료가 중심이 되어 모의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유적(遊敵)을 참살하는 등 적의 후방을 교란시켰다.
특히, 의병장 정봉수(鄭鳳壽)는 강화가 성립된 뒤에도 용골산성(龍骨山城)에서 여러 차례 의병을 이끌고 수만의 후금군을 물리쳐 성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또 양민을 구출하는 등 관군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전과를 세워 적에게 큰 위협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호란 중의 의병 활동은 임란 의병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였다. 의병의 지역적인 활동 범위나 의병과 의병장의 수, 그리고 전과에 있어서도 그러하였다. 임란 의병이 많은 영향을 주었음에도 의병 활동이 부진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파탄, 사회적 불안 등의 연속으로 왕조를 중심으로한 위정 당국과 민중간의 일체감이 점차 멀어졌던 상황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李章熙〉
〔한말의 의병〕 한말의 의병은 크게 1895∼1896년의 제1차 의병전쟁(乙未義兵)과 1905∼1910년의 제2차 의병전쟁(乙巳義兵과 丁未義兵)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1) 제1차 의병전쟁 제1차 의병전쟁은 1894년(고종 31)의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으로 일제 침략이 노골화된 시기에 일어났다. 전쟁을 구실로 서울을 강점한 일제는 친일 내각을 구성하는 한편, 근대 개혁을 추진하는 주체적인 갑오경장을 가로채어 이것을 그들이 침략하는 데 편리한 방향으로 개혁해갔다. 그 실질은 일제 침략의 기초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실체가 드러났다.
그리하여 제1차 의병전쟁은 단발령이 선포되어 강제로 상투를 잘리는 1895년말에 일어났다. 1896년 1월 하순 유생 이소응(李昭應)이 춘천에서 봉기하여 관찰사 조인승(曺寅承)을 처단한 것을 비롯하여, 강릉에서 민용호(閔龍鎬), 제천에서 유인석(柳麟錫)·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홍주에서 김복한(金福漢)·이설(李律), 남한산성·안성에서 김하락(金河洛), 문경에서 이강년(李康咎), 안동에서 권세연(權世淵)·김도화(金道和), 영양에서 김도현(金道鉉), 진주에서 노응규(盧應奎), 금산에서 이은찬(李殷瓚)·허위(許蔿), 장성에서 기우만(奇宇萬) 등이 일어났다.
의병이 주로 중·남부지방에서 일어난 사실은, 이 지방이 유생의 본고장이라는 점도 있지만, 1894년의 동학혁명운동의 경우와 지역적으로 일치하고 있어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준다. 뒤에 황해·평안·함경 등 북부 지역으로 번져간 것도 비슷한 현상이었다.
제1차 의병전쟁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의병의 공격 목표가 서울·부산·원산 등 일본인이 많이 진출한 도시였다는 점이다. 강릉을 중심으로 동해안 일대를 장악한 민용호가 원산항 공격을 시도한 일이나, 진주·김해 등 남해안 일대를 장악한 노응규가 동래 공격을 시도한 것이 그 좋은 사례이다. 경기도 일대의 의병 역시 남한산성을 점령하여 서울 공격을 시도하였다.
초기의 의병전쟁에서 가장 유력했던 의병진은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한 이춘영·안승우·이강년 등의 충북 진영이었다. 이들은 남부와 중부를 잇는 요충지인 충주를 점령하여 8도를 호령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 의병전쟁에서 또하나의 특기할만한 사실은 의병이 일어난 지 한달 만에 김홍집(金弘集) 친일 내각이 붕괴되어 단발령이 철회되고, 국왕이 의병을 선유(宣諭)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일제는 침략을 일시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그러나 의병전쟁이 중앙의 정변과 정책 변경을 유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의병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같은해 10월까지 북부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계속되었다. 더욱이 의병은 그 뒤에도 이름을 바꾸어 항쟁을 계속하였다. 서학당(西學堂)·영학당(英學堂), 그리고 1900년 이후 5년간 전국에 미친 활빈당(活貧黨) 등이 그것이다.
이같은 사실들을 종합해볼 때 제1차 의병전쟁은 단순한 단발령 반대 운동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토적복구(討賊復舊)라는 봉건적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지방 유생들의 단순한 불만 표시만도 아니었다. 의병이 활빈당으로 전성(轉成)한 것만 보더라도, 의병은 봉건적 지배 체제와 결탁한 일제 침략자들에 대한 농민적 항쟁이라는 성격을 농후하게 띠고있었다.
(2) 제2차 의병전쟁 제2차 의병전쟁은 일명 을사의병·정미의병이라고도 한다. 제2차 의병전쟁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 또다시 일제가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장악하려 할 때에 일어났다. 즉, 1905년 9월 러일간의 휴전이 성립될 무렵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까지 역시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1907년 이후에는 전국의 유생과 농민이 봉기하여 가히 독립전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저항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 일어난 의병의 중심 세력은 지방의 가난한 유생(寒士)들과 포군(砲軍), 그리고 빈농(破落戶)들이었으며, 평균 40∼50명 정도로 편성된 소부대들이 많았다.
이 시기에 봉기한 주요 의병장들을 보면, 원주의 원용팔(元容八), 죽산·안성의 박석여(朴昔如), 양근·여주의 이범주(李范疇), 경상도의 이유인(李裕寅)·이하현(李夏玄)·정환직(鄭換直)·정용기(鄭傭其)·최성집(崔聖執)·신돌석(申乭錫)·김현규(金顯奎), 전라도의 기우만·백낙구(白樂九)·양한규(梁漢奎)·고광순(高光洵)·김동신(金東臣), 그리고 충청북도의 노병대(盧炳大)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유생 의병장으로서 가장 이름난 사람은 홍주의 민종식(閔宗植), 영천의 정환직, 태인의 최익현(崔益鉉) 등이다. 1906년 5월 충청남도 홍주를 점령한 민종식부대 1,000여명은 여러 차례 일본 군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6월 1일 서울에서 특파된 일본군과 서로 맞섰다. 기관포대와 폭파대로 보강된 일본군을 맞아 분전한 민종식의 의병군은 을사조약 이후 가장 큰 봉기였다.
이어 최익현이 전라북도 태인에서 봉기, 남북이 상응하여 토적하려 했으나 순창에서 자진 해산한 최익현은 관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서울에 압송된 최익현은 대마도에 유배되고 단식 끝에 순사하여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이 때의 의병으로 크게 주목을 받은 부대는 영해의 신돌석 부대였다. 그는 제1차 의병 때에도 종군했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상민 출신으로서 활빈당이나 농민을 규합하여 을사의병 중에 유일하게 농민의병부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 신화 같은 이야기를 많이 남겨 놓았다.
이듬해 여름에 이르자 의병전쟁은 전국에 확산되어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즉, 1907년 8월 1일 일제가 한국군을 강제 해산하자 이에 항거한 군인들과 의병이 서로 연합하여 대대적인 무장항일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한국군의 항전은 먼저 서울 시위대로부터 시작되어 원주·강화 등 지방 진위대로 확대되었다. 홍주 진위대는 집단 탈영을 했고, 진주 진위대도 봉기 계획을 짰다. 이들 한국군 병사는 각기 지방의 의병군에 가담하여 조직적인 항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원주 진위대는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肯鎬)의 지휘 아래 강원도와 충청북도 일대에서 활약했고 서울진격작전의 주축을 이루기도 하였다.
강원도·충청북도·경상북도·경기도에서 일어난 의병도 곧 나머지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일본군이 주둔한 주요 도시를 제외한 농촌이 의병 천하로 되었다. 또 각처에서 일본인이 살해되고 군아(郡衙)·면사무소·경찰분파소·우체국, 그리고 전당포 등이 파괴되었다.
이에 놀란 일본군이 의병 토벌에 나서자 민중은 문자 그대로 선전(宣戰)없는 한일 전쟁이 벌어진 것으로 인식하였다. 일본군은 당시 함흥에 북부수비관구, 대구에 남부수비관구를 두어 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군 해산에 대비하여 남부수비관구를 보강했고, 의병전쟁이 벌어지자 본국의 일본군까지 끌어들여 군사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일본군은 의병 토벌이라는 명분 아래 방화·살인·강간을 자행하였다. 의병을 체포하여 열탕에 삶아 죽이고 의병장의 부인을 잡아 음문에 숯불을 넣어 태워죽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같은 일본군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의병들은 마침내 전국 의병군 13도창의군을 경기도 양주에 집결시켜 서울 공격전을 개시하였다.
1908년 음력 정월 양주에 집결한 의병군은 모두 1만명에 달하였다. 그 중 민긍호 휘하의 강원도 의병이 8,000명에 이르렀다. 창의대장 이인영(李鱗榮), 군사장(軍師將) 허위, 그리고 전라창의대장 문태수(文泰洙), 호서의 이강년, 관동의 민긍호, 교남(嶠南)의 신돌석, 관서의 방인관(方仁寬), 관북의 정봉준(鄭鳳俊), 관동의 허위 등이 중요 진영 및 지휘관이었다.
총대장 이인영은 서울 주재 각국 공사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이 국제법상 교전 단체임을 선언하고 진보와 인간성의 적인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군사장 허위의 작전 계획에 따르면, 일본군의 방위망을 뚫기 위하여 각 군이 분산 진격하여 동대문 밖에서 집결, 성내로 진격하여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일부 의병군은 세검정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었고, 일부는 의병의 선봉 부대를 습격하였다. 동대문 밖의 혈전으로 인하여 서울 점령의 꿈은 무산되었으나 열약한 무기로 수도 탈환까지 계획한 의병의 대작전은 경탄할만한 일이었다.
의병전쟁은 1908년 이후 1910년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표〕의 통계는 일본경찰이 낸 무성의한 숫자이지만 대체의 추세는 알 수 있다. 〔표〕의 통계로 미루어 제2차 의병전쟁은 주로 강원·경기 이남〔전투 횟수가 전체의 75.7%(1908년) 내지 88.6%(1909년)를 차지함.〕에서 전개되었고, 북부 지역에서는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황해도·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의 의병은 1908년에 총전투 횟수의 24.3%, 1909년에는 11.4%를 차지한 데 불과하였다.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전국의 민간인 소유의 총포화기를 압수하였다. 이 때 함흥 관내에서 압수된 신식 소총이3,144정, 화승총이 1,939정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총기를 압수당하고 있다. 이 지방에 전통적으로 포수(砲手)가 가장 많았고, 신식 소총 역시 많았던 것을 보면, 홍범도(洪範圖)·송상봉(宋相鳳) 등의 포수 의병의 활동이 활발했던 배경을 알 수 있다.
이 통계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제2차 의병전쟁의 중심지가 처음에는 전라남도·강원도·전라북도·황해도·충청남도·경상북도·경상남도 등지였다는 점이다. 특히, 강원도 의병은 1908년에 가장 강력하였고 1909년에는 전라남도 의병이 강력하였다. 일본군의 공격 역시 처음에는 강원도 의병에 집중하다가 이어 1909년에는 전라남도 의병에 주력하였다.
이 통계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징은 1908년의 전투 의병수가 1909년의 그것보다 2배 이상이나 많은 반면, 전투 횟수는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1년 사이에 한 전투당 평균 의병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초기에 의병은 대부대가 행동을 같이했지만 뒤에는 소부대로 분산되어 활동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의병이 이처럼 적은 병력으로 분산 활동한 이유는 일본군의 이른바 교반작전(攪拌作戰) 때문이었다고 추측된다. 교반작전이란 토벌군을 세분하여 한정된 국지(局地)에 교반적 수색을 실행하고, 전후좌우로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왕래하거나 기병적(寄兵的)인 수단을 써서 의병을 현혹시키는 작전을 말한다.
이같은 일본군의 작전 변경에 대응한 의병들은 부대를 소부대로 나누어 유격전을 벌여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초기에는 의병의 대부대가 지방 중요시·읍의 공격·점령에 성공한 데 반하여, 후기에는 차츰 산간벽지로 물러서서 일본군을 기습하는 작전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의병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1909년 5월 한국을 병합하기로 결정한 일제는 전쟁을 하루속히 종식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 일환으로 일제는 같은해 9월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개시하고, 이듬해 봄 황해도와 강원도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실시하였다. 특히, 남한대토벌작전은 전라남도 의병에 대한 대규모의 포위 수색 작전으로 잔인무도한 살육작전을 기도하였다.
1909년 5월 목포 일본인상업회의소가 통감부에 호소한 바에 따르면, 전라남도 각지의 의병으로 말미암아 일본인은 10리길도 안전하게 걸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의병의 험악의 정도가 오히려 이전보다 배가되어 생명·재산의 피해가 수백건에 이르고, 교통은 두절되고 농사와 상업이 위축되어 직접·간접의 피해가 막대하다고 할 정도였다. 이같은 전라남도 의병에 대하여 일본군이 대공세를 취한 것이 남한대토벌작전이다.
이 작전은 전라남도 전체를 육로와 해상으로 완전 포위하여 동남으로 그물질하여 빗질하듯 좁혀들어가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모두 한복으로 변장했고 모든 도민의 통행을 금지하여 이반자는 가차없이 사살하였다.
약 2개월간에 걸쳐 감행된 도살 작전에서 심남일(沈南一) 등 의병장이 사살당하고 박도경(朴道京) 등 의병장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의병 주력 부대가 섬멸되다시피 하였다. 이어 전개된 강원·황해도 대토벌로 이 지역의 주요 의병 부대를 패배시킨 일제는 1910년 8월 한일합방을 선언하였다. 그것은 완전히 정복에 의한 병합이었다.
1907∼1910년간의 의병전쟁에서 특기하여야 할 사실은 노령(露領) 의병의 국내진격작전이었다. 노령 연해주는 제정러시아의 진출기지로서 약 4만명의 병력이 극동에 배치되어 있었고, 일본군은 1개사단 병력으로 두만강 국경을 수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의병이 국내진격작전을 시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1908년 두 차례나 노령 의병이 두만강을 건너 공격했고 국내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려 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작전에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포함되었고, 경술국치 후 일제하에서 독립전쟁을 주장한 무단파(武斷派) 독립운동자가 많았던 일은 노령 의병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일본군의 발악적인 진압 작전에도 불구하고 국내 의병은 1910년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10년에 1,832명의 의병이 128회나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1911년에는 271명이 41회, 1912년에는 23명이 5회, 1913년에는 40명이 3회 교전한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즉, 실제에 있어서는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일본군은 의병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1914년에는 최익현과 같이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임병찬(林炳瓚)·이인순(李寅淳)·전용규(田鎔圭) 등 54명이 전국적인 의병 봉기를 계획하다가 검거되었다. 이 사건을 독립의군부사건(獨立義軍府事件)이라 한다.
(3) 신분구성 의병전쟁의 주도 세력은 지방 유생과 농민이었다. 물론 후기로 갈수록 의병 지도층에 농민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갔지만, 지방 유생이 의병전쟁에서 완전히 물러섰다고 볼 수만은 없다.
지방 유생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조선시대의 재야 지식인이었다. 재야 지식인은 관료 지식인과 구별되어야 한다. 유생은 과거를 거쳐 관료 유생이 되거나 재야 유생으로 남았다. 무사가 실직했을 때 낭인(浪人)이라 했듯이 재야 유생은 일종의 실직 문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실직 문인이 아니라 서당을 경영하여 교직자가 되어 성직자적 기능을 다하였다. 다시 말하면, 관료 유생과 재야 유생은 봉건적 사회에서의 통치자(기사)와 성직자(수도사와 교구신부) 구실을 했던 것이다. 재야 유생은 교육과 문화의 담당자이면서 비판자의 구실을 수행하고 있었다.
18세기의 실학자, 19세기의 위정척사론자가 모두 재야 유생들이었다. 의병전쟁을 주도한 것도 물론 재야 유생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농민의 광범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측면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생과 농민은 사실상 이해와 의식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면밀히 검토하면, 재야 유생은 의병전쟁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전쟁이나 활빈당에도 일부 가담하여 농민적 요구를 대변하고 있었다. 의병·동학·활빈당 등 한말 농민운동에 참여한 유생들은 먼저 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일제와 야합한 개화관료를 성토하여 구제(舊制)의 복고를 주장하였다.
구제복구라는 유생 의병의 투쟁 구호는 농민의 일반적 지지를 받았으며 이 때문에 농민의 의병 참여가 갈수록 늘어갔다. 처음에는 유생군과 평민군이 분리되어 별개의 행동을 하다가 차츰 통합되어갔다. 의병 지도층에 농민의 수가 늘어갈수록 신분의 장벽이 무너져갔다.
유생 의병장과 평민 의병장의 비율을 가장 정확하게 나타내준 자료로는 ≪폭도편책 暴徒編冊≫ 중의 비도상황월표(匪徒狀況月表)를 들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투항 귀순 의병의 조사를 보면, 모두 29명에 이르는 의병장과 부장 가운데 8명(28%)이 양반이고 21명(72%)이 농민이었다. 일반 의병의 경우는 양반이 불과 2.7%에 지나지 않았다.
이 통계가 제2차 의병전쟁 때의 것이므로, 평민 의병장이 제1차 의병전쟁 때보다 훨씬 많아졌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추론을 근거로 의병전쟁이 유생 주도형에서 평민 주도형으로 변해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제1차 의병전쟁 때의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고 있으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처음부터 평민 주도형의 의병 부대가 많았다고 볼 수도 있다.
(4) 무기와 전술 의병이 사용한 기본 화기는 화승총이었다. 아주 드물게 양총(洋銃)이나 활·창·칼 등을 사용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전라남도 의병의 6%가 양총을, 94%가 화승총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강원도 의병은 27%가 양총을, 73%가 화승총을 사용했고, 함경남도에서는 양총이 35%까지 차지하는 강세를 보였다.
그런데 화승총은 사정거리가 불과 10보(步)인데다 산탄이기 때문에 치명상을 입힐 수 없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화약과 철환(鐵丸)을 비교적 쉽게 입수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기도 하였다. 일본군의 29식장총과 맞서 싸우는 데 가장 불리했던 점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화승총을 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의병들은 유격전과 기습작전, 또는 복병작전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초기의 의병들은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시도하고 수성전(守城戰)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불리한 것을 깨달은 뒤부터는 유격전으로 전환하였다. 예컨대, 의병장으로 이름난 이강년·신돌석 모두 유격전에 능란한 사람들이었다.
유격전에는 중군장(中軍將)·좌익장·우익장, 그리고 선봉장 따위의 편제가 불필요하였다. 그래서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실질적으로는 독립된 소부대로 활동하는 것이 관례였다. 또, 의병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좌종사(坐從事)가 있어 마을마다 이들이 의병에게 재정적 지원과 정보를 제공하였다.
의병은 본질적으로 민군이자 자연발생적 의용군이었다. 그러므로 상부 조직과 하부 조직이 정규군의 경우와 같지 않았다. 경기도 양구의 김봉명(金鳳鳴) 부대를 보면, 대장 김봉명, 총독 조유보(趙臾甫)로 되어 있다. 함경남도 포수군 임창근(林昌根) 부대의 경우에도 임창근이 정독(正督)인데 부독으로 차도선(車道善)·홍범도 두 사람을 두었다.
이처럼 상부층이 집단적이었고, 하부층은 10명 미만의 인원으로 초십(哨十)을 만들어 이를 주거별로 편성하였다. 앞의 김봉명이나 임창근 부대의 경우는 물론 이밖에도 다수의 지휘부, 소수의 부대 편성이 특히 눈길을 끌고 있다.
또, 전해산(全海山) 부대에서 보듯이, 선봉·도포(都砲)·도십장(都什長)·십장(什長) 등 간부를 선발할 때도 양반·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재주를 시험하여 능력에 따라 임명하였다. 전해산 부대에서는 의병들에게 임금을 지불하여 민폐를 방지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의병은 또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군가(軍歌)를 지어 사기를 올렸다. 전장에서는 북을 치거나 호다를 불어 진격 신호로 삼았다. 또, 백색 의복이 전투에 불리하자 청색으로 물들인 군복을 입고 적군에 심리적인 위협을 가하는 한편 위장술을 쓰기도 하였다.
(5) 정치이념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모든 재야 유생이 의병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지식인으로서 ‘망천하(亡天下)’·‘망국가(亡國家)’의 위기를 당하여 절의(節義)하는 데 세가지 처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첫째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방법(擧兵), 둘째 망명하는 방법(浮海去守), 셋째 순절 또는 자정(自靖)하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의병에 참여한 유생들은 거병을 택한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먼저 상소 형식의 언론으로 저항하다가 전략을 바꾸어 무기로 저항하기로 결심한 지식인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거병의 구호로써 처음 토적 복구를 내걸다, 이후 일제 침략자와 그에 동조하는 개화파 관료를 타도하고 이상적인 구제의 재건을 부르짖었다.
이상적인 구제란 유학 이념에 알맞은 유교적 이상 사회의 구현을 뜻하였다. 그들은 조선의 권력 구조가 유교적 정치 이념에 배치된 사이비체제라 믿었고 구제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을 단순한 구체제의 부활이라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의병 유생들은 확실히 반근대주의자들이었다. 유인석이 주장한 대로 망국의 근원은 개화 때문이지 수구 때문이 아니었다. 유인석은 ≪우주문답 宇宙問答≫에서 “비록 구법(舊法)이 나라를 망쳤다고 주장하지만 망국은 개화가 행해진 뒤의 일이었다. 구법을 행하여 망국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어찌 개화하여 망국한 것만큼 심했겠는가. 만일, 나라 안의 상하대소인(上下大小人)이 모두 수구인(守舊人)의 마음과 같이 했더라면 나라는 혹시 망하지 않았을지 모르고, 또 망했더라도 그렇게 빨리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유인석은 개화를 반대했으나 그의 반근대주의는 유교적 입장이지 현대주의적 입장은 물론 아니었다. 또, 의병 유생들이 개화를 반대한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개화가 일제 침략의 수단, 즉 문화 침략이라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심남일은 개화의 침략적 본질을 “본시 개화는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룬다는 뜻이다. 지금의 개화는 백성을 왜적 앞에 인도하여 무릎을 꿇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문화 침략은 정치적·군사적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최익현은 이 점을 “북방의 오랑캐는 우리의 의관을 찢고 서쪽의 귀신은 우리의 마음을 유혹한다.”고 지적하면서 문화 침략의 중대성을 인식하였다. 유인석은 “개화가 자기를 잃고 저들로 화할 위험(失我化彼)”을 안고 있는 사실을 경고하였다.
이리하여 개화는 곧 일본화이자 소중화(小中華)가 소일본(小日本)으로 떨어지는 것이라 인식되었다. 개화는 민족의 수치(開化之恥)요, 개화당의 주장은 “개같은 놈들의 이리같은 마음(開黨之狼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의병의 반개화사상은 항일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더욱 강화되어갔다. 첫째, 일제가 개화를 앞세워 경제 수탈을 자행하자 의병들은 도탄에 빠진 농민 경제의 재건을 위하여 갱도광복(更道匡復)만이 민생과 국권 회복의 유일한 일이라 확신하였다.
일제와 개화 관료들은 부국강병의 미명 아래 빈국약병(貧國弱兵)의 결과를 초래했으므로 진정한 부국강병책은 신제개혁이 아니라 구제복고라 믿어졌던 것이다.
심남일은 “국가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신하와 백성은 국가를 하늘로 삼는다. 따라서 먼저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고, 나라가 튼튼해야 백성이 편안한 것은 정상적인 이치이다. 만일 민생이 밥을 먹지 못하면 국가가 양곡을 내주고, 국가가 난을 당하면 백성이 몸을 희생하여 국가에 보답하는 것은 만고에 바꾸지 못할 이치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 관한 이같은 인식은 일제의 경제 수탈에 대한 농민의 격분을 대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해산은 “태조 이래로 토지의 비척에 따라 토지의 다과를 조절하고, 나라에는 도안(圖案), 고을에는 양안(量案), 들에는 금기(禁忌)가 있어 관리들은 부당한 징세를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국가가 함부로 징수하지 않으므로 국고에는 항상 남은 곡식이 쌓여 있었고 백성 또한 여력이 있어 오랫동안 요순의 덕화(德化)를 누려왔던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기삼연(奇參衍)은 더 구체적으로, “자강의 길은 오로지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을 회복하는 일이니, 강은 전제(田制)를 확립하는 것이며, 목은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군사를 기르며 풍속을 바로잡는 일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의병들은 일제 침략의 한갓 방편에 지나지 않은 근대 개혁을 불신했을 뿐 아니라 과학 기술에 대하여서도 비판적이었다. 기계는 “순박한 풍속을 깨뜨리는 음란하고 교활한 물건(淫狡之物)”이기 때문이다. 특히, “무기는 흉한 기계요 전쟁은 잔인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 만국인이 그 기교를 흉한 기계에다 부리고, 잔인한 일에 꾀를 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가?”라 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가를 망치는 것도 바로 침략의 첨병인 기계 때문이라고 하였다.
의병이 기계를 배격하고 증오한 것은 최익현의 〈원사 怨詞〉에 잘 나타나 있다. “평생에 미운 것은 화륜차(火輪車)·하루에 천리길을 달리고 있네·우리 사우(師友)들을 태우고 가니·찢어지는듯 번개같이 달려가네·저 기차, 저 기선이여·어찌 저렇듯 어질지 못한가·묻노니 누가 만든 것인가.”
또한 일본인에 대해서는 근대적 사회·경제제도와 과학·기술의 빈곤과 혼란을 가져온 장본인임은 물론, 실제로 음란하기 짝이 없는 민족으로 보았다. “한국의 풍속은 본디 남녀를 가리는 것이 엄격하다. 그런데 일본인이 촌락에 들어와 살면서 여름철에 살을 드러내고 한국인 집에 들어가니 부녀들은 놀라서 피하고, 마을 사람들은 그 욕됨을 참을 수가 없어서 집을 팔아 이사하였다.”
이것은 태서인(泰西人)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인륜을 모르는 오랑캐이기 때문이었다. “서양인은 부모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공상(空桑)에서 났는지, 낳은 부모를 버리고 섬기지 아니하며, 새나 짐승과 떼를 지어 사는지 임금을 버리고 섬기지 아니한다. 남이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시켜서 임금을 버리고 나를 섬기라 하며, 아버지를 버리고 나를 섬기라 하며, 스승을 버리고 나를 배우라 하니 천하에 어찌 이런 도가 있겠는가?” 나란 곧 예수를 말하는 것으로 기독교가 그 원흉이라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의병의 반근대주의사상은 유인석의 ≪우주문답≫(1914)에 잘 요약되어 있다. 그는 오늘의 세계를 크게 중국과 외국으로 나누었다. 중국은 정신 문명(上達)의 나라요, 외국은 물질 문명(下達)의 나라이다.
중국에서는 윤리·도덕이 발달하고 외국에서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였다. 이는 그 나라의 특징이므로 각기 두 나라의 국민들은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
동양인은 정신 문화의 발전에 전념하여 인류의 문화 발전에 기여해야 하고, 서양인은 물질 문화의 발전에 전념하여 인류의 문화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동양인은 서양의 물질문화를 배울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서양인에 예속되고 서양인으로 되어버리는 것은 부당하다. 서양인도 동양인의 정신문화를 배워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
이같은 동양과 서양의 평화적 공존은 정치 제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양에서 발달한 민주 제도는 동양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니 군주 제도를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긴요하다.
동양이 지금 갑자기 군주 제도를 버리고 민주 제도를 실시하게 되면, 첫째 정치 혼란을 불러일으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자초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군주 제도라 하여 반드시 전제(專制)하고 민주 제도라 하여 반드시 민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민주하고 전제하느니 군주하고 민주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6) 의병전쟁의 역사적 의의 의병전쟁은 종래의 한국 근대사 서술에서 자칫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었다. 일제 식민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근대사를 서술한 역사가들마저 의병전쟁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의병전쟁이 유생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전투구호가 반근대적이고 봉건주의적이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광복 후 신민족주의라는 입장을 표방하여 ≪국사대요 國史大要≫를 쓴 손진태(孫晋泰)마저도 의병을 거의 언급하지 않거나 아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 대신 독립협회나 애국계몽운동을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민족 운동으로 대서특필하였다. 이것만 보더라도 의병이 표방한 구호에 지나치게 구애되어 그 실질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의병전쟁의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의병전쟁의 주도층인 유생과 농민은 일제 침략자와 그에 협력한 소수의 집권자들에 대한 최대의 저항자로서 항일민족세력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였다.
당대에서 일제 침략 최대의 희생자인 농민과 농촌 지식인의 정치적 불만을 집약한 의병전쟁은 일제 36년 동안에 전개된 항일민족운동의 역사적 뿌리로서 그 의미가 자못 컸다.
둘째, 3·1 운동, 그리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줄기차게 전개된 농민운동이 모두 한말 의병전쟁을 비롯한 항일운동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70년 동안에 걸쳐 산발적으로 전개된 농민운동에서 일관된 농민적 요구를 읽을 수 있고 또 읽어야 할 것이다.
셋째, 의병전쟁이 항일민족운동의 두 전략 노선인 독립전쟁노선과 독립평화노선 가운데 전쟁노선에 끼친 영향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교육·언론·외교 등 계몽주의적 평화노선이 자주 독립에의 첩경이라 확신했던 독립협회·애국계몽운동, 그리고 문화운동의 계열에 맞선 독립전쟁노선은 의병전쟁에서 시작되어 독립군운동·광복군운동으로 이어졌다.
안중근을 비롯한 한말 암살·테러운동과 대한광복회·의열단·애국단 등 일제하의 테러 활동 역시 독립전쟁의 한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독립전쟁에 참여한 항일운동자들은 적든 많든 의병 정신과 반계몽주의적 사상 및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또, 그들은 일제 침략 최대의 희생자인 한국 농민의 분노와 한(恨), 그리고 정치 이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일제와의 어떤 타협주의도 배격하고 또 열강에의 어떤 의리주의도 매국 행위로 간주한 한국 독립 운동자들의 확고부동한 신념과 의지는 의병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며, 완전 자주 독립이라는 명제로 요약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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