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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질그룻에 담긴 보배
성경 : 고후 4:7
찬송 : 456장(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선물을 줄 때는 예쁘게 포장합니다. 포장을 예쁘게 하는 것은 선물을 주는 사람의 성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선물이라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선물의 가치가 달라져 보입니다. 그러나 선물은 포장지가 아니라 포장지 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포장지가 아름답고 멋있어 보여도 그 속에 담겨진 내용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어떤 상자가 있는데, 그 상자에 장난감이 있으면 장난감 상자가 되고, 고물이 있으면 고물 상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 상자에 보석이 있으면 보석상자가 됩니다. 상자의 가치는 담겨진 내용물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육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질그릇같습니다. 그러나 질그릇같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그 속에 무엇이 담겼느냐에 따라 질그릇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존귀한 것은 우리 속에 보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영적 정체성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보배를 담음으로 말미암아 존귀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면 사람이 변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환경이 자신에게 주어져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우리의 영적 정체성을 봅시다.
첫째로, 우리가 보배를 가졌습니다. 보석 상자가 귀하지만 보석이 없는 상자는 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석상자와 같습니다. 상자도 형편없는 상자 곧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 안에 보배가 담겼습니다. 이 보배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존귀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곧 우리 안에 보배가 들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우리가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나 아는 것이나 지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보배로운 존재가 되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존귀하고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둘째로, 보배를 가진 사람에게 능력이 커집니다. 종이 한 장은 힘이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가고, 바늘이나 못으로도 쉽게 구멍이 뚫립니다. 그러나 그 종이 한 장도 단단한 바위에 붙어있으면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못으로 구멍을 뚫어도 관통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비결은 종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위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작은 상처를 입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 주인이 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목숨이 두려워 모두들 도망하는 겁쟁이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용기를 가졌고, 기도하는 가운데 오순절에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아 강력한 힘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목숨이 두려워 도망쳤던 이들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담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겁쟁이 제자들에게서 나온 능력의 출처가 어딥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셋째로, 능력의 원천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있습니다. 껍데기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은 내용물에 있습니다. 신앙인은 능력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능력의 원천이 자기에게 있다고 착각하면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 하려 합니다. 그러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면 하나님께 문제 상황이나 해결 방법을 묻습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또 믿음의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한 연약한 존재입니다. 쉽게 깨어지고 상처 입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능력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배와 같은 존재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족과 교회에 하나님의 능력이 크고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22. 나타나야 할 예수 생명
성경 : 고후 4:8-10
찬송 : 385장(못 박혀 죽으신)
“장애인의 날”에 가끔 성한 분들이 하루 동안장 애를 체험하는 광경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성한 눈을 가리고 마치 앞을 못 보는 사람처럼 하루를 삽니다. 어떤 사람을 휄체어를 타고 하루루 지내기도 합니다. 시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 마음에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체험 하려면 큰 환난과 고난을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난을 안 당해 보면 환난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만한 위로와 평안을 주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당해봐야 아무리 사람들이 핍박해도 주님이 우리를 끌어안고 품에 위로해 주시는 위로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예수 생명의 힘이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을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합니다.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은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와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냥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라 아침, 점심, 저녁 순간마다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에 대해서 죽고,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죽고, 병에 대해서 죽고, 저주에 대해서 죽고, 사망과 음부에 대해서 죽었는데 이 예수를 우리가 항상 몸에 걸머지면 예수 죽음 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죄에 대해서 죽었고, 나도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죽었고, 나도 세상의 질병에 대해서 죽었고, 나도 저주에서 죽었고, 나도 사망과 음부에서 죽어서 관계가 끊어다. 마귀야 나와 상관없다. 죄야 나와 관계가 없다. 병아 나와 관계가 없다. 저주야 나와 관계가 없다. 사망과 음부야 나와 관계가 없다. 그 말인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죄와 부패와 세상과 마귀와 질병과 저주와 고난과 죽음이 있습니다. 아무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에수의 생명을 가진 분은 원망보다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보호하여 달라고to 힘을 달라고, 보혈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진실한 친구인 것을 알 수 있는 길은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입니다. 모든 세상 친구 다 날 버리고 떠나고 나는 외롭게 될 때 오직 안 떠나는 분이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은 환난을 당해보면 알게 됩니다. 좋을 때는 모든 사람이 다 친구하려고 곁에 있고 다 찾아오지만 어려움을 당해봐야 진정한 친구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질 때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가 다가오므로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이런 일을 당해봐야 예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사망은 내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고 내가 사망을 체험한 만큼 예수의 생명을 체험해서 전할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고통 안당해본 사람이 고통에서 건지는 예수님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병 안 나은 사람이 치료한 예수를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프지 않는 사람이 밥을 주는 예수님을 증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내속에서 역사해야 생명이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미숙아로 태어나면 인큐베이터 안에 넣습니다. 병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서 10개월이 차도록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서 자라기를 원치 않습니다. 당당히 나와서 병균과 싸우고 역경과 싸워서 이기는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지 보호의 인큐베이터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 죄와 싸워서 이기고 세상과 마귀를 대항해서 이기고 병을 이기고 저주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승리자를 원하지 약해 빠져서 인큐베이터의 보호를 받고 햇빛도 못비추고 집밖으로 못나가는 이러한 약해빠진 신자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습니까? 몸서리치게 높고 깊은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떤 마귀가 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주어지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셨으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고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23. 새로운 피조물
성경 : 고후 5:17
찬송 : 538장(죄 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놋그릇을 사용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주물 공장을 경영하는 어느 교회 장로님이 교회에 왔다가 목사님의 사택 마루 밑에 있는 못 쓰는 놋요강을 보고 목사님의 양해를 구하고 그것을 가져갔습니다. 며칠 뒤 그 장로님은 좋은 놋그릇 한 벌을 목사님께 선물했습니다. 목사님이 기뻐하며 고마워하자 장로님은 “목사님 이것은 본래 목사님의 것인데 그렇게 고마워하실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하자 장로님이 말하기를 “며칠 전 사택마루 밑에 버려진 못 쓰는 요강을 제게 주셨잖습니까? 그걸 가지고 우리 공장에서 새로 만든 것이 이 그릇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본래 목사님의 것이지요.” 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의 얼굴표정이 일그러지면서 “그 더러운 요강으로 만든 것을 어떻게 밥그릇으로 사용합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장로님이 말하기를 “목사님! 아닙니다. 그 요강을 뜨거운 불에 녹여서 만든 전혀 다른 새로운 제품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놋 요강이 불에 들어갔다 나온 후에 전혀 새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제품, 새로운 사용처, 새로운 모양, 새로운 가격이 되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새로워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말씀하는 데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위치가 옮겨진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님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옛날 가지고 있었던 것을 그대로 가진 채 단순히 위치만 바꾼 것은 아닙니다. 위치가 바뀌면서 본성도 바뀌었습니다. 마귀의 종에게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었습니다. 소속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머물 곳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신앙의 에너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십니다. 왕이 백성을 돌보는 것이 당연하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로부터 돌봄을 받습니다. 오늘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믿으십시오.
둘째로,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전의 것에 의해 지배받을 수 없습니다. 이전 것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죄가 덮어진 것이라면 다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를 소멸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이전 일을 기억하시지 않습니다(사 43:25). 죄의 일을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이전에 잘못한 것을 자구 들추어보십시오. 자존심이 상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옛날의 실수를 자꾸 들추면 갈등만 점점 더 커집니다. 마귀는 자꾸 옛날 일을 들추어내서 죄책감을 가지게 합니다. 혹은 예수 믿기 이전의 타락했던 일을 생각나게 하여 믿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옛적 일과 상관이 없습니다.
셋째로, 새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사 43:18)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새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새롭게 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이십시오. 내 환경이 바뀌지 않아도, 내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새롭게 되었습니다. 우리 영혼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내가 새롭게 되었음을 믿으면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세상은 여전하여도 보는 내가 다릅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환경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를 매일 누립니다. 그리고 축복이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그를 모시고 산다는 것, 그와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이전의 죄인의 삶을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전 것이 아직도 생각이 나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 모든 과거의 찌꺼기를 십자가 아래 묻어버리고 이제는 주님과 함께 새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와 동행함이, 그를 믿음이 영원한 복이 됨을 확신하고 사는 복된 성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족과 교회에 올 한해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아멘!
224. 부요하고 풍성한 자
성경 : 고후 6:10
찬송 : 415장(주 없이 살 수 없네)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믿는 바에 따라 행동의 다른 표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어떤 행위가 용납되거나 용납되지 않는다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이러한 일은 같은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여성들은 미국 여성들의 짙은 얼굴 화장을 눈감아 주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동시에 미국의 신자들은 큰 맥주잔을 들고 있는 독일인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자문하였습니다. 각 나라마다 견해들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자전거를 타는 것에 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흡연과 음주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금기 사항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에 기초합니다. 은혜에 의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또한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할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가질 권리를 인정해 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양심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기꺼이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그 행동이 당신 보기에는 나쁘지 않더라도 어리거나 연약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하지 않거나 포기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자신의 명분을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려는 이러한 일들을 행할 때 여러분은 평화뿐만 아니라 기쁨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인간이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 나가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옳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장 28절에서, “없는 것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것 같으나 부자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부요한 사람은, 부요한 것 같으나 가난한 자로, 마침내 그 영혼이 영원히 하나님께 버림받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택하지도 않으십니다. 가난하면서도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회개하며, 주님 앞에 나오는 자를 택해 돈이 있어도 타락하지 않을 만큼 신앙의 연단을 겪게 한 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축복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대단한 기근과 갈증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잡은 것 같으나 잡지 못했고, 얻은 것 같았으나 얻지 못했으며, 안 것 같았으나 실상은 알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우리 자신이 영육 간에 얼마나 가난한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히 가난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가난한 우리에게 채워 주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에게 부요를 심어 주셔서 물질적으로도 하나님을 섬기고 일하게 하며, 또한 영적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따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은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복음을 통한 은혜입니다. 거듭남의 은혜, 새로운 피조물의 확신을 가지게 하시는 은혜,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속하여 누리게 하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님을 모신다고 하는 것은 은혜 중에도 은혜입니다. 딤후2:1에서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가장 중심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은혜를 받으며, 받은 은혜를 다 사장시키지 않고, 계속하여 유지할 수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 안에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201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25. 넘치는 은혜
성경 : 고후 9:8
찬송 : 488장(이 몸의 소망 무엔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계는 그 광대함과 질서와 조화 그리고 종류의 다양함과 풍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는 별들로 수놓으시고 공중에는 새들로 바다에는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들로, 들과 산에는 다양한 나무와 풀이며 동물과 곤충들이 살게 하셨습니다. 땅속에는 풍부한 자원과 아름다운 보석들을 저장해 두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은혜 역시 지극히 풍성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 풍성한 은혜가 무엇이며 그 은혜가 얼마만큼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넘치도록 주시는 모든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매우 다양하고 또한 풍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은혜입니다. 영생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신령한 지식을 얻게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신령한 은사를 받게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신령한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입니다. 천국을 기업으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부활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면류관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다양한 은혜가 우리에게 넘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은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넉넉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에 넉넉하게 하신다 말합니다. 우리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재능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힘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또 물질도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우리가 마음껏 사용할 만큼 안 되기 때문에 불만족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있는데, 우리에게 그 은혜를 사용할만한 능력이 미치지 못할 뿐입니다. 부족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셋째로,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십니다. 모든 착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대로 일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약한 자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돕는 일도 포함됩니다. 착한 일이란 신령한 지식과 은사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신령한 지식과 신령한 은사를 자신만 소유하고 즐기지 말고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또 착한 일이란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멸망 길로 가는 사람에게 생명 길로 돌아오도록, 지옥에서 천국으로 나아가도록,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보다 더 착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며 수고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나쁜 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넘치도록 받는 사람은 진실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써 착한 일을 넘치게 행하는 생활은 진실로 복된 생활입니다. 은혜는 나눔으로 나타납니다. 나눔은 모든 착한 일에 해당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누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우리들에게 우주 만물을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선지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아낌없이 보내주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성령을 우리 성령님을 이 땅에, 우리 마음에 보내주셨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받으려고 삽니다. 직장 다니는 것도 월급받기 위해서입니다. 일하는 것도, 장사하는 것도 내가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혼도 왜 합니까? 사랑 받으려고 합니다. 이 세상은 다 받으려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 믿습니까? 하나님께는 은혜도, 사랑도, 축복도 많이 받아야 하지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해 받은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복을 내가 받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 가족과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고 또한 모든 착한 일을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26. 먼저 심어야 합니다.
성경 : 고후 9:10
찬송 : 496장(새벽부터 우리)
우주의 법칙은 ‘심는 대로 거두게 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콩 심은 데 콩 나게 하시는 분이시지, 팥 심은 데 콩 나게 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리고 많이 심은 자가 많이 거두게 하시지, 작게 심고는 많이 거두려는 욕심은 용납지 않는 분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도 이러한 법칙은 적용이 됩니다. 선의 열매를 원하는 자는 선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악을 심어 놓고 복의 열매는 많이 거두려는 것은 욕심입니다. 영적인 세계의 파종 법칙은 자연의 세계의 파종법칙보다 차원이 다릅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단순한 법칙으로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의 법칙은 선한 사람이 선한 마음으로 씨를 뿌리든지, 악한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씨를 뿌리든지 관계없이 콩 심으면 콩이 나고 팥 심으면 팥이 나는 데, 영적인 세계에서는 그 심는 목적에 따라 썩은 결과나 영생의 결과를 거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2011년 풍성한 영적인 소출을 얻기 위해서 어떤 씨를 뿌려야 할까요?
1. 주일 성수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에 힘서 일하고 제 칠 일에는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58:13-14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가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우리가 이레 동안 쉬지 아니하고, 개미처럼 일한다고 해서 잘 살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비를 주어야 땅이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셔야 우리의 범사에 열매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엿새동안 부지런히 일하고 제칠일은 ‘주일’로 지켜 하나님을 섬기고 휴식하는 날로 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로 심으면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복을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 십일조의 씨을 뿌심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 성찬을 받았으면 우리의 얻은바 소득 중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는 율법시대의 잔재로서 은혜의 시대에는 필요가 없다” 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세워지기 전 430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심음으로서 생활 속에 물질의 부족함이 없는 길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 나가서 그돌라오멜 왕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돌아 올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제사장 멜기세덱이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전쟁에서 얻은 모든 수확물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쳤습니다. 멜기세덱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사장입니다. 말하기3장10-12절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이뤄집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애개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러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내가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3. 전도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시126:5-6 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 리로다“ 하셨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스라” 하셨고,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 하셨습니다. 전도를 안했기에, 전도 열매가 없습니다. 전도를 시작하십시다. 우리 은평교회가 전도를 시작했으니, 조금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다. 성도 모두 하면 부흥되고 내 영광이, 자랑이 마련됩니다. 전도는 하나님 교회를 부흥시킵니다. 내 가정을 부흥케 합니다.
우리가 2011년 ‘심고 거두는 법칙’을 실천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승리하며 축복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가운데 나타내개 하는 은총의 섭리입니다.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먼저 심는 믿음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27.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성경 : 고후 9:12, 15
찬송 : 419장(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우리의 믿음에는 감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성공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비록 불신자라 할지라도 남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하면 성공하는 인생으로 살아간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감사할 거리를 많이 찾아내면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불신자들이 감사하는 모습대로 감사하는 것을 물론입니다. 게다가 중요한 한 가지를 더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나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일꾼 삼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독교인들이 감사할 것을 기록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이나 다른 종교의 사람들과는 감사의 내용이 다릅니다. 그것은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감사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것을 알아보겠습니다.
첫째는, 봉사의 직무가 주어졌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기도할 대상이 있다는 것에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돌보아야 할 교회와 교인들이 있다는 것에서 감사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양육할 교회와 성도들이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있다는 것은 자신이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일할 내용이 있고, 대상이 있고, 일할 만한 지식과 열정이 있고, 일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직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웃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헌금으로 어려운 교회의 성도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헌금하는 것은 실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을 위한 구제헌금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께 헌금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렸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누군가에게 무엇을 위하여 어떤 일이 성취되도록 사용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사용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헌금을 드릴 때 사도 바울의 마음에 감사가 넘쳤습니다. 헌금의 액수 때문에 감사할까요? 아닙니다. 교인들의 드리는 마음 때문에 감사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마음 때문에 감사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은 물질이지만 그 물질 안에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는 마음을 드릴 수 있다는 것에서 감사합니다.
셋째는,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수많은 은사를 받은 교회입니다. 은사 때문에 문제도 많았고, 말썽도 많았으며, 갈등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감사한다고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여기에 은사란 무엇일까요? 고린도 교인들이 갈등하던 주제는 어떤 현상으로서의 은사입니다. 반면에 여기의 은사는 봉사로서의 은사입니다. 로마서와 에베소서에 봉사로서의 은사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봉사할 일을 주실 때 그 일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재능과 힘도 주십니다. 그 재능과 힘이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입니다.
미국의 기독교 교단 중 '그리스도 연합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단에서는 하루에 열두 번 감사할 것을 강조한다 합니다. 여기 일과 관련되고 봉사와 관련된 감사가 있습니다.
-아침, 새로운 시간을 주심에, -아침 식사에는 음식을 보며
-일터에 가면서 움직이는 기쁨에, -일하는 보람에
-일하면서 비판이나 압력을 받을 때는 도전을 주심에, -칭찬을 받을 때는 만족함에
-점심에는 대화할 수 있는 동료에, -일과 후 작은 성취에
-귀가 후 가족을 보며, -신문,TV를 보면서 여가를 주심에
-잠을 주신 은혜에, -꿈 속에서는 생명을 주신 은혜에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올 한 해 감사한 일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봉사와 은사가 너무 커서 그것을 감당하는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28. 약할 때 강한 성도
성경 : 고후 12:10
찬송 : 585장(내 주는 강한 성이요)
하나님의 기도 응답 가운데는 간접적인 응답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예 거절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들은 간구의 내용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만을 기도 응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 3의 사건을 개입시킨다든지 혹은 성도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신다든지 하는 것도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한 방법이며 이러한 기도 응답이 주어지는 경우가 결코 적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탄의 사자를 제거해 달라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시원스럽게 사탄의 사자를 제거해 주시 않으셨는데, 그렇다고 냉담하게 그 청원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청원을 들어주지 않는 이유, 즉 청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그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심으로써 자연스럽게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응답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9절)는 간접적인 응답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이 응답 속에서 자신의 병을 고쳐 주시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만일 바울이 건강하여 자신감이 넘친 나머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가로챈다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이탈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가리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어떤 가능성만을 가지고 이러한 중대한 기도에 직접적인 응답을 거절하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가능성을 근거로 한 응답이 아닙니다. 인간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일이 잘 풀리고 남보다 뛰어나게 되면 가지를 자랑하고 모든 공을 자기에게 돌리려는 교만한 습성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간접적인 응답이 올 때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그것을 믿음으로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서 참지 못할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2. 말씀을 통해서 응답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기도 응답 방법 중에는 말씀을 통한 응답이 있습니다. 왕상19장을 보면 이세벨에게 쫓긴 엘리야가 호렙산에 이르러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한 대가가 고작 이것이냐는 식으로 한탄하며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엘리야를 산 위에 일으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앞을 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앞을 지나시자 처음에는 강한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바람이 멈춘 후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지진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지진이 멈춘 후 불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불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불이 지난 후 세마한 음성이 있었는데, 이 세미한 말씀 가운데서 비로소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초자연적인 기사와 이적 혹은 가시적인 상황의 변화 등으로 기대하고 요구하지만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3. 시험을 통한 응답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또한 시험을 통해 기도 응답을 받은 사례가 많이 나타납니다. 딸의 문제로 주님께 나아왔던 가나안 여인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하는 냉담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시련을 슬기롭게 넘김으로 결국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문둥병자 열 명 가운데 한 명인 사마리아 사람(참조; 눅17:11-19), 실로암 못가에 가서 눈을 뜬 소경(참조; 요9:1-7),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오라비 나사로를 죽음 가운데서 돌려받은 마르다와 마리아(참조; 요11:1-44) 등이 모두 이 사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처음에는 기도 내용과 거리가 먼 응답을 받았습니다.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심한 좌절을 맛보아야 하는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련으로 인해 결코 주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그 시련을 의연히 감수하고 이겨냄으로써 기도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기도내용과 거리가 먼 내용의 응답을 받을 때 당황할 수 있으나,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테스트하는 것으로 알고 믿음으로 감당해 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기도 응답을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을 때 가장 약한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강한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기회는 많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할 기회를 만들어 간다면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시고 승리하는 2011년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229. 내게 있는 십자가
성경 : 갈 2:20
찬송 : 339장(내 주님 지신 십자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배우는 것입니까?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까? 예수를 본 받는 것입니까? 예수처럼 사는 겁니까? 아니면 예수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겁니까? 다 귀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목격하고 오순절날 성령받을 때까지는 그저 예수를 따라 다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라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여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신비로운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바로 믿으려면 곧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를 바르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A. W. 토저 라고 하는 신학자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을 한 방향만 보는 것이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십자가만 봅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뒤로 후퇴할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과거가 없습니다. 과거를 다 십자가에 묻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진 십자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십자가는 나의 과거를 장사지낸 자리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십자가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나는 죄가 죽었습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성이 죽었습니다. 율법성이 죽었습니다. 율법은 살아있는 자를 정죄합니다. 죽은 자를 심판하지는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율법 앞에서 완전히 죽어지게 하고, 영혼을 자유하게 하였습니다. 십자가가 나를 죽였습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볼 때 나는 죽었습니다. 교만과 불신앙과 의심이 죽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삽니다.
둘째로, 십자가는 나의 현재를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자아를 못을 박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내 인생을 사십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그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십니다. 내안에 내가 살면 그리스도가 사실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서 움직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불같이 화를 냅니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갖고 욕심을 부립니다.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하던 말던, 비위를 건드리든지, 감정에 불을 지르든지 상관이 없어요. 나는 벌써 죽고 예수가 사시기 때문이예요.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내안에는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셋째는, 십자가는 나의 미래를 결정짓는 자리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사는 목적은 무엇이며 사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이 표현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이 명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 크고 놀라운 사랑 앞에서 변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몸을 찢으면서까지 희생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렇게 되는대로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막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시시한 것에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나도 사랑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그리스도께 풍성한 사랑을 받았는데 나도 누군가에게 이 사랑을 나누며 살겠다는 생각과 감동이 들어갑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이미 못 밖혀 죽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으로 살고 계십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사람이 진짜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올 한해 우리 가족과 교회의 성도들 모두 주님이 주인의 좌정하셔서 축복으로 인도하는 은혜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30. 투자의 달인이 됩시다
성경 : 갈 6:8
찬송 : 539장(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우리 주변에는 주식에 투자를 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는 사람보다는 손해를 봤다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가면 투자의 달인이 되어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투자를 했는데 대박이 터지는 경우보다는 투자했던 본전까지 날리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투자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전문가라고 늘 투자에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잘 살려면 투자를 잘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영적 생활을 잘 하려해도 역시 투자를 잘해야 합니다.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하나님의 법칙은 우리가 심으면 심은 만큼 거두는 것입니다. 농부의 법칙도 같습니다. 값진 열매를 거두기 원하는 사람은 거기에 대한 대가를 먼저 지불해야 합니다. 심은 후에는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밀이야 합니다. 먼저 노력과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정성의 씨는 반드시 값진 열매를 맺습니다. 2011년 우리도 영적인 삶에서 투자의 달인으로 하나님 나라에 소문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좋은 투자 계획을 세워야 성공합니다.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투자 대상을 선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투자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 투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는 투자의 대상이 두 종류로 구분되어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갈 5:17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는 그 속에 욕망이 이글거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소욕이란 우리 자신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심령 속에 거하시는 성령,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소욕이란 우리 심령 속에서 거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성령 하나님의 바람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기를 바라시는 마음, 죄 중에 있을 때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마음, 그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시는 마음, 주를 위해 헌신 봉사 충성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입니다. 그런 다음 투자의 우선 순위를 정하면 됩니다. 원칙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투자를 육신을 위한 투자보다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2. 좋은 투자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투자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투자의 목적을 바로 정하라는 것입니다. 왜 투자하는가 라는 문제에 정확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우리가 투자하는 목적을 간략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거두기 위해서입니다. 8절을 보면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육적인 투자를 하는 사람은 썩어진 것을 거두게 되고 영적인 투자를 하는 사람은 영생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전 3:10-15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고전 3:12-3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투자한 것이 결과로 나타날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날에 육적인 투자했던 것들은 다 불타 없어질 것이지만 영적인 투자했던 것들은 남아서 큰상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 좋은 투자 시기를 알아야 합니다.
투자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투자의 시기입니다. 막차를 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망합니다. 영적 투자를 할 때도 시기가 있습니다. 건강할 때 건강을 투자해야 합니다. 물질이 있을 때 투자를 해야지 육신을 위해서 다쓴 후 남은 부스러기를 투자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영적인 투자를 해 갈 때 때론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해도 해도 아무런 표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칩니다. 의욕을 상실합니다. 영적 침체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영적 투자를 포기가 쉽습니다. 투자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어떤 응답이 없어도 인내하면서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께 투자할 가장 좋은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내일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일단 투자를 한 다음에는 장차 받을 상을 바라보면서 2011년에는 더 많은 기도의 투자, 시간의 투자, 전도로 투자하여 천국까지 소문나는 투자의 달인으로 소문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231. 선을 포기하지 말라
성경 : 갈 6:9
찬송 : 342장 (너 시험을 당해)
이 땅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꾸준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 열심과 열정이 어느 날 그를, 유명하도록 만든 것이고, 성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쓴 대니얼 디포는 처음부터 훌륭한 작가로 인정받은 게 아닙니다. 그는 출판업자들이 가장 출판하기 싫어하는 기피대상 작가 1순위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디포는 ‘로빈슨 크루소’를 들고 수많은 출판사의 문을 두드려야 했습니다. 20군데의 출판사를 돌아다녔지만 다 거절당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21번째 출판사를 찾아가 마침내 ‘로빈슨 크루소’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리처드 바크의 유명한 소설 ‘갈매기의 꿈’도 사실은 12번이나 출판을 거절당했던 책입니다. 감미로운 사랑 이야기를 담은 ‘러브 스토리’ 역시 12번이나 출판사로부터 거부당했습니다. 존 그레시라는 영국 탐정소설 작가는 무려 743번이나 출판을 거절당한 일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543권에 달하는 탐정소설을 출간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기쁨을 맛보기 원한다면 장애 앞에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은 오늘 갈라디아 교회들의 성도들에게 편지로 권면을 합니다. 그 권면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권면입니다. 바울의 권면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첫째는, 신앙인들은 선을 행하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일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도 이웃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이 이웃을 향하여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또는 이웃이 잘 되기 위해서 무엇인가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한 축복을 받았고 그것 때문에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위촉을 받았습니다.
둘째로, 신앙인은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여기 낙심한다는 말은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선한 일을 하려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아서 포기하고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악한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하는 데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이상하게도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포기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신앙인들이 선을 행하는 데 마귀가 훼방을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는 겁니다. 이럴 때 신앙인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포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때가 되면 거둘 것입니다. 선한 일의 열매가 금방 거두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선한 일의 열매일수록 쉽게 거두어지지 않습니다. 때가 되어야 거두어집니다. 농사짓는 일에서도 열매를 거두려면 때가 되어야 합니다. 선한 일의 열매도 때가 되어야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입니다.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전도하다가 실망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도 기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때가 되면 거두리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한 아가씨가 스코틀랜드 주일학교에서 장난꾸러기 소년만 모인 반의 담임을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그 중에서도 보비라는 소년은 다룰 수 없는 골칫거리 아이였습니다. 주일학교에서는 이 여선생님에게 새 옷 한 벌을 가지고 보비의 집을 방문하여 계속 출석을 잘하도록 했습니다. 여선생님이 보비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보비는 씻지 않아 땟물이 흐르는 얼굴에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아 헝클어져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진흙에 뒹굴어 거의 걸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선생님은 보비에게 새 옷을 갈아입히고 교회에 잘 나오도록 부드럽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보비는 또 더러워졌고 교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선생님은 다시 보비를 방문했습니다. 이미 새 옷은 다 망쳐지고 걸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 한 벌의 새 옷을 선물하고 잘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보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선생님은 힘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일학교 부장을 찾아가 이제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일학교 부장은 "용기를 잃지 말고 계속해 보십시오"하고 격려했습니다. 그 여선생님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고삐 풀어진 망아지 같은 이 소년은 나중에 훌륭하게 성장하여 중국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가 바로 로버트 스미슨 목사입니다. 그는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수백만의 영혼을 주께로 나오게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에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거둘 때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를 거두면 또 다른 일을 찾습니다. 이런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올 한해 우리 하나님이 이 가정의 가족들에게 선을 행하게 하시고 열매를 거두는 때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32. 십자가만을 자랑하리라!
성경 : 갈 6:14
찬송 : 439장(십자가로 가까이)
십자가는 대속의 죽음을 상징하며 십자가는 승리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마귀와 죽음을 이긴 승리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속에는‘승리'‘축복'‘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새 생명과 새 능력이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은 가장 강력한 적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나머지 세력들도 곧 힘을 잃고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희망을 가집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이 아닙니다. 고통의 상징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그래서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중심도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모든 중심에 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모든 것이 그분의 십자가 속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랑해야 하는 십자가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위한 십자가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나의 허물과 죄를 대신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고 나를 사랑하사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 속죄의 제사는 오직 한 번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히9:12) 죄로 인해 단절된 구원의 길이 십자가로 인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순간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게 되었습니다.(마27:51) 하나님과 막혔던 담이 무너진 것입니다.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의 구원의 길이요 영생의 길인 것입니다. 특히 십자가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2.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 영혼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의 환경의 저주와 병을 짊어지시고 영원한 사망을 철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앞에 나와서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셔서 의로움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의 죄는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병적인 죄책감에 눌려 생활의 활기를 잃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자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8:12)고 말씀하셨습니다.
3. 십자가는 하나님의 화목의 증거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18절에“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로 만드는 통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원수된 것을 소멸하십니다. 인간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헐어 주었고, 진정한 평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가 남북 통일을 얘기하지만, 십자가로 남북이 통일되고 동서가 화합하며 원수였던 사람들이 화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때로 험하지만 영광이 있는 길입니다. 너무 쉬운 길, 미래가 보장된 길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결정이 아닙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닫고 깊이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은혜 받게 되면, 그 사람이야말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요,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죽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진수요, 본질이요, 기본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십자가의 도를 끝까지 따르려는 노력을 하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허물과 연약함을 싸매주시고 대속해주십니다.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무겁고 힘들지라도 주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히려 기뻐하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죄로부터 승리할 수 있는 2011년이 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33. 은혜의 선물
성경 : 엡 2:8
찬송 : 410장(내 맘에 한 노래 있어)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문제가 없는 가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걱정거리 한두 가지씩은 누구나 갖고 살아갑니다. 참으로 행복만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문제가 많고 어렵고 힘든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행복의 비결이 있는데, 그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사는 사람들은 어떤 형편에 처해있어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보니, 너무나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복을 받았지만,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깨달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깨달아 언제나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율법대로 행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이 세상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완벽하게 율법을 다 지키면서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모든 율법을 일평생 다 지켜왔다고 해도, 율법 중에 한 가지를 한 번이라도 범했으면 모든 율법을 일평생 지키지 않는 사람과 같은 죄인이 됩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안 하고 사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요? 마음속에서부터 일어나는 더러운 생각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합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점잖고, 깨끗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으로는 많은 죄를 범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이 더럽고 타락되어 있기에,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임을 믿게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선물로 얻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 돈도 많은 사람, 많이 배운 사람, 권력과 지위가 있는 사람, 지구 곳곳에 다닌 사람, 수많은 사람들과 멋진 관계를 맺은 마당발 등 부러워할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의 부러움을 받을만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노력해서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하다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자기가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공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공짜가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이라는 선물 곧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구원을 얻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다. 내가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나를 어여삐 보든 기쁘게 보든 좋게 보든 긍정적이고 바람직하게 보아서 내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사실 죄인인 우리들이 어여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 사실이 우리에게 선물입니다.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는 말은 내가 구원을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을 갖는 것이 내가 한 일입니까?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성령의 감동하심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감동하심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믿음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믿음과 구원이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기뻐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잘 기억하고 있으며, 얼마나 감격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가족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믿음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34. 잘 되고 장수하는 복
성경 : 엡 6:1-3
찬송 : 577장(낳으시고 길러주신)
가정은 이 세상에서 잘되고 장수할 수 있는 보금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명하신 축복이 실현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사랑은 상대적이고 타산적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 적이고 희생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와 가까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사랑은 참으로 위대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사랑입니다. 어머니는 뱃속에서 아기를 잉태할 때부터 갖은 고생, 위험에서 지켜 해산한 후 또한 오랜 세월 키운다고 고생하십니다. 공부시킨다고 고생하시고, 결혼시킨다고 고생하십니다. 결혼시킨 후에도 잘 사는지 못사는지 걱정하십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계속 됩니다. 이 큰사랑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계명 중 제일 첫 번째로 부모공경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이라고 하나님은 말씀입니다. 효도하면 만사가 형통하고 장수의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2011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효를 통해서 원하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한 해를 사시기 바랍니다.
1. 부모님 공경은 우리의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모든 것이 기본이 잘 되어야 합니다. 부모공경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요 윤리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잘하고, 사회 질서도 잘 지키는 사람이 됩니다.
어른을 알고, 대접하는 일이야말로 사회의 질서 중 중요한 일입니다. 이 기본이 잘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사회에서의 관계가 원만할 수 없습니다.
2. 부모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본문 엡6:1-2을 봅시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자녀들이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효도가 자랑할 일도 아니고 이상한 일은 더욱 아니고 옳은 일, 바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서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주안에서'라는 단서가 있습니다. 해석에 있어서 상반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안에서'라는 말을 믿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불신 부모에게는 순종치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불신 부모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더욱 순종하여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가진 자요, 계명을 아는 자이므로 더 부모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자신의 구원과 부모의 구원까지 이루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효도가 될 것입니다.
3.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축복의 조건입니다.
본문 2.3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말씀하였습니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 중 둘째 돌판은 인간에 대한 계명인데 유일하게 첫 번째 계명에만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신21:18-21에는 "그 아비나 어미의 말을 듣지 않고 부모가 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면 부모가 장로들에게 말하고 그 다음은 성밖에 끌어내서 사람들이 돌로 치되 돌무더기가 될 때까지 쳐서 죽이면 다시는 불효하는 악이 일어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4.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축복의 조건입니다.
순종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유대 민족이 수세기 동안 나라를 잃고 방황했지만 우수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엄격한 가정 교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교육에 대한 열심은 있지만 자녀에 대한 가정 교육이 부재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가정이 유대 민족이 되었고, 가정이 유대 국가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권위요 표준입니다. 부모님에게 절대 순종하는 정신이 유대 민족을 그토록 위대한 민족으로 이끌어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시면서 부모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받습니다. 성경은 가장 옳은 일은 어버이께 효도하는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어버이께 감사하는 마음 가집시다. 그 은덕을 기립시다. 순종합시다. 어버이께 효도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축복 받는 길임을 믿으시고 효도하는 개인과 가정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35. 모든 기도와 간구로
성경 : 엡 6:18
찬송 : 526장(목마른 자들아)
바울은 복음의 사역을 방해하는 마귀의 간계를 알고 있습니다. 사탄과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악한 영들과 세상 통치자들과 권세들의 실체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을 소유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전신갑주를 입은 사람에게 승리의 비결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곧 기도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 18절에서 강조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사도 바울은 기도하는 성도들이 승리할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이 승리의 성도들입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습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지속시킵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은 기도에 대한 자세 곧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로, 모든 기도와 간구로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영국 노팅검의 빈민지역인 아놀드에서 경찰과 교인들이 협조하여 기도지킴이(Prayer-watch) 활동을 전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2년 동안 범죄 발생률이 10% 감소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범죄 발생률이 증가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기도지킴이 활동은 경찰관인 알란 스튜어트(Alan Stewart)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클리프톤 교회가 적극 후원하였습니다. 담임목사인 스티픈 해크니(Steven Hackney)는 범죄를 줄이기 위한 기도를 교회에 요청했으며 교인들은 개인기도를 통하여 계속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경찰 고위층까지 참여하게 되었으며 교인이 아닌 경찰관에게도 기도를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기도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됩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되는 것은 곧 기도하는 힘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둘째로,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여기의 “무시로”라는 말은 때를 가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문제가 생겨야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에 부딪혀야만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할 때도 찬양과 감사로 기도가 채워져야 합니다. 어려울 때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쓸 것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래서 역경에나 순경에나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항상 선을 대어놓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선이 닿아 있으면 어떤 일을 만나도 당황하거나 낙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긴밀한 기도가 지속되면 갑작스러운 어려움으로 인해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할 때 문제 해결의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시로 기도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되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권면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기도하는 일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기도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힘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무시로 기도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셋째로, 깨어서 구하기를 권면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시험에 드는 이유는 깨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물고기는 잠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답니다. 심지어 죽을 때도 눈을 뜨고 죽는답니다. 이러한 물고기의 모습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언제나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의 모습을 통하여 영적으로 늘 깨어 있으라는 강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죽은 물고기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죽은 영혼 역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깨어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깨어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기도하고,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되, 깨어 구하기를 권합니다. 이러한 기도가 성도들을 위해서 구해야 하는 기도로 연결됩니다. 즉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기도하는 사람이나 성도들이나 모두 승리합니다. 올 한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심에 따라 기도함으로 승리를 경험하는 우리 가족과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36. 겸손에 관한 교훈
성경 : 빌 2:3-4
찬송 :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된 성도들이 교회 생활에서 실행해야 할 중요한 지침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권면입니다.
성도들은 서로 권면하되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 다른 형태나, 다른데서 얻어진 것으로 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해야 합니다.
둘째는 ‘사랑에...위로’입니다.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연약한 상태에 빠진 형제들을 위로하되 사랑으로써 행해야 합니다(엡5:2).
세째는 ‘성령의...교제’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내제 하시는 성령을 모시고 있습니다(롬8:9고전3: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여 그 안에서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네째는 ‘긍휼이나 자비’ 입니다.
궁휼은 심장, 내장, 마음 등을 말합니다.
이것은 ‘궁휼’ 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사랑임을 나타냅니다.
한편 ‘자비’ 는 특별한 동정심,즉 연약한 자에 대한 동정을 뜻 합니다.
성도들은 약한 자나, 처지가 어려운 가운데 있는 자를 볼 때에는 긍휼과 자비를 베풀 줄 아는 넓은 마음을 소유할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언급된 네 가지 요소들은 인간 상호간에 적용되는 중요한 원리이다. 성도들은 이 원리들을 교회 생활의 지침으로 삼아 교회의 덕을 세우며 이웃과 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엡1:23) 무엇보다도 하나 됨을 유지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지 못하고 불일치와 갈등, 대립 속에 분쟁하게 된다면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과 위치를 상실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 간에 교제 생활에서 가장 중요시되어야 할 덕목은 겸손입니다. 겸손하게 행하는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고 한마음을 품게 되며, 교회가 이렇게 하나 됨을 이루게 되면 그 교회는 자연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초대 교회가 태동한 것도 먼저 다락방에서 모인 성도들이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행1:14). 그리고 오순절 이후에도 구원받은 성도들이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교제하며 기도에 힘썼기 때문에 구원받는 자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행2:42-47). 따라서 오늘날 모든 성도들은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먼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마음의 소원과 뜻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겸손한 마음으로 섬김의 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 소원대로 이루어집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돌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어느 상황에서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 뜻을 알아 행하려고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자기 생각을 점고 남의 생각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삶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어 있는 것을 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은 우선 순위가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주일 성수를 못하는 분들도 우선 순위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딴 짓을 합니다. 찰스 휴멜은 `우리의 딜레마는 시간의 부족이 아니라, 일의 우선순위가 문제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선순위를 잘못 정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습관에 메어 유혹이나 압력으로 인해 억눌려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선순위를 바로 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게 될 때에 틀림없이 성공하게 됩니다. 겸손은 자기는 없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생길 수 있는 덕목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으로 오늘에 충성하며 만족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내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을 충실히 믿음으로 행하는 자에게 내일의 축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내일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에릭프롬은,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지옥문 앞에 서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복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위의 말씀대로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두고 , 자기보가 남을 낫게 여기고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돌봐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겸손한 자로 천국 생명록에 기록되는 2011년이 될 줄 믿습니다.
237.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
성경 : 빌 2:13-14
찬송 : 488장(이 몸의 소망 무엔가)
사람의 행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 한 가지 소원이라는 것이 있답니다. 소원이 작은 사람은 그 작은 만큼의 삶을 살았고 소원이 큰 사람은 큰 만큼 영향을 미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원없이 산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삶에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소원이 큰 사람은 질병이 걸려도 빨리 나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원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소원은 이루어지지만 어떤 사람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소원이란 것은 다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원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에 따라 결과는 분명히 달라집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소원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본문의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하나님이 사람을 향하여, 성도들을 향하여 소원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소원을 두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소원이 우리 마음에 품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 속에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소원을 우리를 통해 이루어 주십니다. 소원을 이루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소원을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훈하는 말씀을 더 자세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소원을 이루어가는 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시고 지혜가 되시고 능력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8편 1절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을 가질 때 그 소원을 이루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고 동행하시고 친구가 되시는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내 힘으로는 내 능력으로는 우리가 세우는 계획과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원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행동하십니다. 우리 속에서 움직여 가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이루려는 열심을 주십시다. 그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소원을 이루려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열심의 모델입니다. 요2:17에서 예수님은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심이 예수님의 생각 속에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소원을 예수님이 아셨을 때,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열심을 사도 바울이 이어받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11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부지런히 열심을 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고자하는 소원을 이루어 가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열심을 가지고 불같은 생을 살아갈 때 세상을 변화시키게 된 것입니다. 소원을 이루어 간 사람들은 모두 다 그들이 어떤 형편과는 상관없이 열심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셋째로, 원망과 시비가 없이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갖고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하려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을 서로 협력하고 도와주며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만약 원망과 시비가 많으면 서로 협력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원망과 시비가 없기를 권합니다. 원망과 시비가 있으면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원망과 시비가 있으면 하나님의 소원을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구제에 관한 문제로 원망과 시비가 생겼습니다. 이 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하나님의 소원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우선하기 위하여,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집사 일곱을 선택하여 구제를 맡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말씀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을 전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소원을 중심하였기 때문에 원망과 시비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하나님의 소원을 품고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 있을 것입니다. 원망과 시비가 있어도 주님의 선한 소원 때문에 해결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38. 부름의 상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
성경 : 빌 3:13-14
찬송 : 359장(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사냥꾼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를 쏘아 총알에 맞은 새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새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상처만 조금 나고 살아 있었습니다. 사냥꾼이 땅에 떨어진 새를 들어 올렸더니 그 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만일 저를 새장에 가두어 두시면 아저씨의 비밀을 다 폭로할 겁니다. 아저씨가 비밀로 하고 싶은 일들을 아저씨 친구들이 다 알게 되면 큰 일 아니에요? 그 대신 저를 놓아주시면 아저씨가 성공할 수 있는 세 가지 지혜를 가르쳐 드릴게요.” 이 말을 들은 사냥꾼은 그 새의 말이 하도 신기해서 성공의 비결을 알려 주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놓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그 새는 사냥꾼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첫째,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믿지 마세요. 무슨 일이나 한번 살펴보시고 우선 시험해 보세요. 둘째, 능력 한계 이상의 일을 하려 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실패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놀림거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셋째, 실수를 했을 때 그것으로 너무 슬퍼하고 괴로워하지 마세요. 내일이 있으니까요. 이 성공의 비결을 새로부터 들은 사냥꾼은 약속한 그대로 새를 공중에 놓아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환경과 여러 가지 경험과 여러 가지 변화무쌍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모든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모든 환경은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을 조성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 목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우리가 비록 죄 가운데 나서 죄 가운데서 살았지만 앞으로 이와 같은 인격을 조성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영원히 사는 생명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보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일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를 알기 위해서 바울은 힘썼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와 같이 고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를 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젊었을 때는 사실 그의 삶의 목표를 잘못 정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부터 그의 삶의 목표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그 푯대를 향해 줄기차게 달리는 신앙을 살았습니다.
1. 바울은 언제나 겸손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그는 자신이 행한 많은 일들을 보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선교 여행을 통해 도시마다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일들로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은 이미 자만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복 주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그러므로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은 언제나 앞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슬픔과 고통, 원한은 다 잊어야 합니다. 불평과 불안의 삶을 깨끗이 씻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일에 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마음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과거의 실패했던 것도 잊어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도 잊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보혈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희망의 세계를 향하여 출발할 수 있습니다.
3. 바울은 언제나 목표 의식이 분명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되는 대로 사는 것은 삶의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삶의 목표를 제시해 줄 동기부여자가 없기 때문입니. 왜 사는가? 왜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잠을 이루는가? 왜 그토록 수고하면서도 보람이 없는가? 삶의 분명한 목표가 있을 때에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에서에게는 삶의 목표가 없었습니다. 짐승을 잡아 하루하루 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야곱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가 비록 약삭빠른 사람이었으나 거룩한 꿈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삶을 의미 있게 하시는 영원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을 섬기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면 그 푯대를 행해 매진해서 성공하는 2011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239.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성경 : 빌 4:4-5
찬송 :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예수님이 마태복음 25장에서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결론을 이렇게 내려 주셨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통해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늘 준비를 하고 있으라 하십니다. 즉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이 깨어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손님이 오셨을 때나 여행을 떠날 때 충분히 준비하지 못해서 당황스러운 일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기름이 준비되지 못했다면, 주님을 맞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시마고 약속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가르친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가까우시므로 성도들이 살아가야 할 모습을 제시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제시하는 말씀을 보아서 우리도 주님의 오실 날을 예배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첫째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태도는 기쁨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왜 기뻐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주안에 있을 때 기쁨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주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됩니다. 말씀 안에 있을 때 주님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관용이 무엇입니까? 관용은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넉넉한 마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본문의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말씀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복수할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주님의 권한입니다. 주님만이 심판장이 되십니다. 여러분 누구를 심판할 권한이 우리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용서 할 수 있는 권한만이 있습니다.
셋째로, “주께서 가까우시다”고 합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깝습니다. 주님을 만날 날이 가까우니 미워하며 살 겨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자가 문 앞에 와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할 때 주님 앞에 바로 설수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 임박했음을 안다면 관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을 앞에 둔 사람이 그동안 서먹했던 사람과 화해하는 이치와 똑같이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알면 그동안 서먹했던 것을 관용하고 풀어버립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시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기뻐하는 사람, 관용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기뻐하게 하시고, 관용하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이 기쁨이라 관용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공격합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을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게 하고, 비관하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듭니다. 실패감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기쁠 일이 있어도 슬프거나 괴롭게 만들고, 관용할 일이 있어도 분노하게 만드는 일들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 생각의 모양과 마음의 감정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들을 행합니다. 주님이 곧 오실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오늘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족과 성도들에게 기쁨과 관용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게시면 가능합니다.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님이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늘 기뻐하는 모습이 주님 안에서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관용하는 모습이 보여짐으로 주님이 기뻐하는 가족과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40. 염려하지 마십시요
성경 : 빌 4:6-7
찬송 : 364장(내 기도하는 그 시간)
염려는 '물어뜯다, 목 졸라 질식시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치 쥐가 고양이에게 목덜미를 잡혀서 질질 끌려가다가 죽습니다. 염려 또한 우리의 삶을 서서히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특히 믿는 자에게 염려는 불 신앙입니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쓸데없는 염려를 한다고 합니다. 40%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 30%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걱정이었고, 12%는 상상으로 염려하는 두려움이었고, 18%는 근거도 없는 여러 가지 걱정거리였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근거 없이 염려하게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쌓이게 만듭니다. 염려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실제로 시편 37편 4절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살전 5장 16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어느 때든지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기쁨이 떠나가면 염려가 찾아옵니다. 중간 상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기쁨이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부풀리게 됩니다. 상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라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 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에게 맡기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주안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염려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1. 염려하지 말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자기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 지나야 합니다. 마음의 고통과 번민 중에서 뼈를 깎는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다 주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평안을 얻습니다. 마음 속에 희열을 얻습니다. 이런 과정들이 신앙의 성장과 영적 체험들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한번 깨닫고 나면 이후에 믿음이 성숙합니다.
바울은 염려하지 말고 간구하라고 권합니다. 성도들에게 염려 거리가 많지만 주님이 도와주신다고 믿으면 염려되지 않습니다.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께 구합니다. 들어주실 것을 믿고 구합니다. 불안하지 않습니다. 평안한 상태의 기도를 주님이 보십니다. 우리에게 평안이 오면 이미 그 기도는 응답된 것입니다.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2. 감사함으로 아뢰시기 바랍니다
고난이 와도 감사할 수 있다면 놀라운 신앙의 모습입니다. 성숙된 신앙의 모양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고난의 결과를 예상하고 있으며, 주님이 약속하신 은혜가 임할 것을 믿고 있으면 감사가 나옵니다. 그러면 감사함으로 주님께 아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불평과 원망보다 감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바울은 이것을 먼저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도 권합니다. 체험하지 않고 권하는 것은 헛된 지식입니다. 불확실한 일을 권면하는 것이므로 감동이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꼴입니다. 그러나 체험한 일을 권하는 일은 분명한 믿음의 권면입니다.
확실한 신앙의 길잡이 노릇을 합니다. 이런 믿음의 체험을 하십시오. 주님이 우리편입니다.
3. 하나님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
고난 중에도 견딜 수 있는 것은 마음과 생각이 올바로 되어 있을 때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비뚤어져 있으면 고난을 이기지 못합니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여 낙심합니다. 더 크게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내 마음과 생각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주님께 내 마음과 생각을 받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내가 지키지 못하는 것을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으로 평강으로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평강을 누리며 주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였음을 체험합니다(롬 14:17). 우리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것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시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2011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241. 마지막 권면
성경 : 빌 4:8
찬송 : 393장(오 신실하신 주)
빌립보서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편지입니다.그래서 옥중서신이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기뻐하라는 권면입니다. 이 권면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들에게도 기뻐하는 생활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당시 상황을 볼 때 상식적으로는 기뻐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죄 없이 감옥에 갇힌 사람이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억울하다고 분노할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이 하나님의 일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힘든 시기가 더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갑니다. 어려운 시기가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때가 됩니다. 어려움가운데서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을 찾고 신앙을 확립합니다. 이것이먀말로 기뻐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마지막 즈음에 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여기 ‘종말로’라는 말은 ‘마지막으로’라는 뜻입니다. 즉 여러 권면을 하고 결론을 내려야 할 시기가 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결론의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무엇에든지’의 권면입니다. 오늘 본문에 ‘무엇에든지’라는 말이 6번이 나옵니다. 어떤 상황이 생기든지, 어떤 생각을 하든지,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등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무조건을 말합니다. 무조건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만하며, 칭찬할만하며”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과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서 하늘 가치관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늘 가치관과 하늘 윤리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늘 가치관과하늘 윤리에서는 무엇에든지가 통용됩니다. 옳은 일, 바른 일, 사랑의 일, 믿음의 일, 참된 일, 경건한 일, 칭찬받을만한 일에는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무조건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믿음의 생활을 기뻐하십니다.
둘째는, ‘무슨’의 권면입니다.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 말은 영어 성경에 보면 탁월한 것이고, 기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도들에게는 훌륭한 것이 있습니다. 기념할만한 가치로운 것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또 나누는 일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탁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탁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직 안 된 것이 아니라 이미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가치로운 일이 기념될만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이미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무슨’이라는 말은 “어떤 일이든지”의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일이든지 탁월하게 행할 수 있고, 기념할만한 가치 있는 일을 행할만한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자격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셋째는, ‘이것들을 생각하라’는 권면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의 삶을 인도하시기를 원합니다. 모든 목회자가 성도들을 향하여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칭찬받는 사람들의 특성은 바른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칭찬받는 사람들의 특성을 생각해야 할 때 생각할 줄 아는 것입니다. 정확한 시기에 정확한 행동을 할 줄 아는 것이 칭찬받는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정확한 시간에 바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이런 지혜를 주십니다. 무엇에라도, 무슨 일이 있든지 정결과 경건과 칭찬을 생각하라는 권면입니다. 삶의 기본을 바로 세우고 바르게 나아가기를 원하는 바울의 사랑이 담긴 권면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권면이 필요합니다. 삶의 기준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바로 세워지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갈등하거나 주저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쓸 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과 행동이 바른 결정이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성도들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물론 자기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족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생각이 심겨지고, 정확한 시간에 바른 생각을 함으로 이 가정과 우리 교회 안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42.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성경 : 빌 4:9
찬송 : 442장(저 장미꽃위에 이슬)
전도자 요한 웨슬레의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즉 '가장 최선의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이 시간이 최선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어떤 상황이든 우리에게는 최선의 시간이고최대의 행복입니다. 현재가 언제나 극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했던 것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이상으로 더 확실하게우리의 식탁에 같이 앉아 주시고 우리의 침상에 같이 누워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보다 더 중대하고 귀한 일은 없습니다. 2차 대전 때에는 많은 전쟁의 신화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항구에 영국군 수 십만 명이 후퇴를 할 때 그 부근의 독일군들이 집결해 있는 항구에는 대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불과 얼마 안 되는 부근이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잔잔해서 수 십만 명의영국군이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답니다. 훗날 기록을 보면 영국군들은 주일에 모여서 '하나님이여, 독일군에게서 우리들을 지켜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누구와 늘 함께 하는 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의 방향과 쓸모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마음의 방에 예수님을 모셔 들일 경우, 우리 마음은 어떻게 되겠습니 까?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즉, 그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가득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날 마다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마음과 생활태도에서 옛날 것을 얼마나 깨끗이 씻어낼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영접하기 위해서는, 예수 믿기 이전의 더러운 습관과 생활태도, 그리고 죄악의 요소들을 깨끗이 씻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에는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예수 믿기 이전의 가치관과 생활태도를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인생을 사는 동안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이 행복을 위하여 모든 인생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합니다. 지식과 기능 등 갖가지 삶에 필요한 요소들을 갖추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나 행복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하려면 물질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명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권력을 소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도 먼저 마음의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행복하기 위해 어떤 마음의 조건이 필요합니까? 행복하기 위한 첫째 조건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부귀와 명예가 주어진다 해도 행복할 수 없지만,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 있어도 행복을 누리며 삽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행복합니다.
또한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할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이 없이 행복할 수 없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함이 없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웃과 화목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이기심으로 나 자신만을 앞세우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생의 문제를 책임지시고 우리를 이끌어줄 수 있습니다. 행복하기 위한 둘째 조건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불안으로 가득합니다.
인간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때로는 물질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우선하는 문제는 인간이 죄의 문제에서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에게 평안이 있습니다. 꿈이 없이 사는 민족은 방자히 행한다고 했습니다. 내일에 대한 꿈이 있는 사람은 그 환경이 어둡고, 춥다 할지라도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깐입니다.
물은 굽이굽이 흘러서 내려가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이런 삶 앞에서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젊을 때는 젊음으로 인한 갈등으로 절망하고, 나이가 들어 육신이 쇠하여지면 내일에 대한 삶의 문제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젖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러한 삶에 누가 우리에게 사랑과 평안을 줄 수 있겠습니까? 죄인인 우리를 누가 의로우신 하나님께 나아가 죄에서 용서받게 하며,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시고, 고단한 인생에 소망을 가득히 부어 주시는 일도 성령님이 하십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삶에 대한 의욕을 북돋워 주십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한 자에게 행복한 삶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43. 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
성경 : 빌 4:13
찬송 : 384장(나의 갈 길 다가도록)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수많은 은혜와 축복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 역시 우리들이 자주 읽고 듣고 외우는 은혜와 축복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저 교회 다니고 믿음생활 한다고, 기도만 한다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 힘대로 다 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해야 가능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자신감을 줍니다.
사람은 믿음도 약하고 의지도 약하고 주변 환경도 여의치 못하기 때문에 일이 잘 되어 가다가도 쉽게 무너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약해지면 사단이 곁에 다가와서 “너는 할 수 없어 실패하게 될 거야!” 라고 부정적인 말로 속삭입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부정적인 실패의 경험들을 기억시켜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사람의 힘이나 지혜로만 하려고 하면 이처럼 실패의 과거에 발목이 붙잡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실패의 자리를 극복하고 믿음으로 일어서서 전진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현재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힘들면 못하겠다고 합니다. 귀찮으면 안 하겠다고 합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괴로움이 오면 분노가 일어나고 금방 포기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즉 선을 행하다가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도저히 안 돼, 아무리 해 뵈도 안 돼, 다 해 봤는데 방법이 없어 등의 말을 합니다. 전도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에 봉사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가족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믿음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십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곧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선한 일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전도하면서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빌 4;12). 바로 본문 앞에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도 복음을 생각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환경이 어떻든지 바울은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환경에라도 들어갈 수 있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바른 일이라면, 옳은 일이라면,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인류 공동체를 위해 옳은 일이라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이 필요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마음대로 안 됩니다. 사람을 억지로 데려다가 교회에 앉힐 수는 있지만 마음으로 고백하게 하는 데는 쉽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돌보고 사랑하며 감싸주어야 사랑을 경험한 후에 믿음을 고백합니다. 돈은 선을 행하는 일에 쉽기는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선을 행하는 데 완벽하려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주님의 일은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주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지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의 일에는 사단이 훼방합니다. 주님의 일이 안 되도록 훼방하고, 우리에게 부정적인 생각과 실패감이 심어지도록 훼방합니다. 게다가 주님의 뜻대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쉽게 실망하도록 훼방하고, 자기 실망감이 옳은 것인 양 착각하게 하고, 금방 포기하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이런 훼방에 걸려 넘어지면 사단이 박수를 칩니다.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는 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끝까지 견디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옳고 바른 일을 행하는 능력의 자신감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44. 쓸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
성경 : 빌 4:19
찬송 : 304장(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신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더하여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죄에 빠진 인간은 끊임없는 결핍과 빈곤 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모든 것이 풍성해 집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요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택하신 주의 자녀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풍성’은 영적인 풍요로움과 물질적 풍요로움 모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자녀들이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하여 영혼이 잘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영혼이 잘 되려면 예배생활에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중심에 살아 있는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생활에 승리해야 합니다. 내 상식적인 판단이나 기준이 아니라 말씀의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내 심령에 채워지고, 그 말씀이 나를 움직일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기도생활에 승리해야 합니다. 영적인 호흡을 게을리 하면 우리의 생명은 끊어집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주님이 약속하신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1.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 더 채워 주십니다. )
바울은 어려움에 처한 자신을 기억하고 은혜를 베풀어 준 빌립보 교인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며 예수님의 심정으로 그리워하며 축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비결은 먼저 기억하는 것입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지 못한 것은 빨리 지워버리고, 내가 받은 은혜는 항상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은혜 가운데 사는 존재입니다. 먼저는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고, 성장했습니다. 그 은혜를 잊으면 안됩니다. 스승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지적으로 가르쳐 주신 은혜입니다. 친구간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과 요나단 같이 아름다운 우정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친구의 우정을 배신으로 갚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커가는 좋은 우정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본질적인 은혜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려 주신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돌보아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날마다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함으로 더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베풀어 주신 은혜를 나누면 더 채워 주십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그리고 젊은 사역자 에바브로디도를 직접 보내서 그를 돌보도록 하는 지극한 사랑과 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감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잊지 않고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며, 편지를 써서 그들과 함께 주님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과 희생적인 헌신이 바로 개인을 돕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바울을 향한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과 나눔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나눔과 사랑은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축복은 부메랑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자신의 이기심만을 위해 쌓아두면 더 이상 늘어나지 않습니다. 자꾸 지키고, 자신의 힘으로 늘리려고 하다가 잘못하고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신 것을 감사하며 나누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빵을 나누어 주면 내 것이 작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계산법입니다. 이것을 스티븐 코비는 ‘고갈의 관념’이라고 말합니다. 내것을 주면 점점 작아지고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풍요의 관념’을 보여주십니다. 산속의 옹달샘 물은 졸졸 흐릅니다. 그것을 마시면 물이 없어집니까? 계속 더 시원하고 단물이 솟아납니다. 이것이 풍요의 관념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꾸 퍼주면 더 깊고 놀라운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의 부메랑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심는대로 거두시는 것만이 아니라 더하여 넘치게 하십니다. 2011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물질로, 사랑으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45.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성경 : 골 1:11-12
찬송 : 364장(내 기도하는 그 시간)
사람은 누구나 능력을 갖고 싶어 합니다. 원시시대를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냥하는 능력,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능력을 원합니다. 이웃 부족들과 전투에서 이기는 능력, 맹수들과 싸워서 이기는 능력, 자기 부족들의 안전과 평화를 책임지는 능력을 갖고 싶어합니다. 문명사회가 되면 더 많은 능력을 갖고 싶어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아는 능력,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능력, 남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은 능력 등등 갖고 싶은 능력이 많습니다. 성도들도 능력을 원합니다. 기도하면 이루어지는 능력, 전도하면 반드시 성공하는 능력을 원합니다. 목사님들도 능력을 원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능력, 설교하면 회개하는 능력을 원합니다. 그 외 원하는 능력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능력을 갖기 원하십니까?
오늘 바울사도는 성도들의 ‘능력’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사람이 능력을 얻는 것은 제한적입니다. 그 능력은 사람이 노력해서 얻기 힘듭니다. 사람이 노력하면 능력을 얻는 것 같으나 그것은 세상적입니다. 세상에서의 능력은 노력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의 자세입니다. 신앙인들은 자기가 능력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겸손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이 능력주심을 믿고, 그 능력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우리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첫째로, 능력으로 능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떤 일이든 잘 할 수 있는 재능과 능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야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성도들에게 능력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능력으로부터 힘을 공급받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영광의 크심에 따라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참으로 놀랍고 경이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크심과 어울리게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우리들 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둘째로, 능력을 받으면 견디고 참게 됩니다. 참고 견딜 수 있는 것도 능력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참으면 완성될 수 있는 일을 참지 못하여 일을 포기하고 맙니다. 참으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성취할 수 있다면, 참고 견뎌야 합니다. 참고 견디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지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환경에서, 어떤 압박과 고난이라도 기쁨으로 능히 견딥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능력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기쁨으로 모든 환난을 견딥니다. 외부에서 오는 많은 도전과 거센 파도를 견뎌 나갑니다. 그것도 기쁨으로 견딥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는 불가능 합니다. 이 “견딤”은 우리의 “주변 환경으로부터 오는 괴로움”을 견디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외부적 고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괴롭힘을 견딥니다.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주는 어떤 실패와 좌절 그리고 환난도 견딥니다. 우리의 육신을 괴롭게 하고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모든 외부의 괴롭힘을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견딤”이란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모든 고통을 견디며 한 목표를 향해 쉬임 없이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마라톤 한 목표점을 향해 부단히 달립니다. 숨이 턱에 차고 땀이 비 오듯 합니다. 그의 발바닥은 곧 닳아질 것같이 아픕니다. 그의 목은 심한 갈증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온 몸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의 몸마저 그에게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견뎌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외부의 모든 환경을 견뎌냅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견딥니다.
셋째로, 능력을 받으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기업을 주십니다. 우리가 한 일이 별로 없었는데, 하나님이 기업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곧 우리에게 주시는 기업입니다. 우리의 기업은 어떤 장소나 물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 기업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능력이 곧 우리의 기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은 일할 수 있는 능력, 참고 견디는 능력,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족들과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고,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46 십자가의 신앙
성경 : 골 1:20
찬송 : 341장(십자가를 내가 지고)
기독교의 대표적인 표식은 십자가입니다. 정통 기독교회로서 십자가를 달지 않은 교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A.D. 312년 봄, 콘스탄티우스가 로마를 정복하기 위해서 알프스를 넘어 진격했을 때 군사적으로 훨씬 불리한 상황에서 고민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 꿈에 보니 하늘에 큰 십자가 깃발이 있고, “이것으로 승리하여라”"는 문구가 씌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즉시 일어나 정적이었던 막센시우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로마를 장악했는데, 그후부터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 될 뿐 아니라 승리와 힘과 능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이 나무로 만들던 십자가를 콘스탄티우스 이후에는 금이나 보석 등으로 장식하여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의 표시와 사랑을 나타내는 십자가는 본래 사형도구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페르시아에서 저항하는 외국인들을 처형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주로 탈주한 노예, 비밀폭로, 내란선동, 살인, 반역 등의 중죄인에게 적용되었습니다. 특히 팔레스틴에서는 십자가형이 정치적인 폭도들의 소요억제책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이때 죄인의 가슴에는 죄목을 쓴 명패를 붙이는데 나중에 십자가의 머리 부분에 달게 됩니다. 예수님의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이 쓰여 있었습니다. 한편 죄인이 십자가를 지고 가기 힘들 경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지게 할 수 있다. 아프리카 구레네 출신의 시몬은 마침 그 곁에 있다가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며 수태하지 못하는 이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이 없는 것을 최고의 저주로 여기는 유대에서 이런 표현은 장차 다가올 예루살렘 멸망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말해고 있습니다. 한편 골고다에 도착한 예수님께 로마 병사들이 쓸개 탄 포도주를 주었는데 이는 사형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일종의 마취제로 제공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1.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의 표시입니다.
신 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형벌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형벌인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인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죽은 사람의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음으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나타냈습니다(수10:26).
2. 십자가는 속죄의 표시입니다.
롬 3:24-2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은 것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단의 권세를 이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는 계속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일회적인 승리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에서 계속 사단과 대적하겠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승리에 대한 보증이 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사단의 권세를 영원히 이기는 역사를 이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습니다(고전1:23).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했습니다. 주님은 사단의 악랄한 정체를 드러내시고 십자가를 통해 인간을 절망과 죽음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좌절의 상징이 아니라 승리와 영생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에서 영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늘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47. 일군의 자세
성경 : 골 3:23
찬송 : 218장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이 땅에서 우리가 할 들이 참 많습니다. 어린아이 때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들 어른들의 말을 잘 들으면 되었지만, 성인이 되면 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어른들을 섬겨야 하는 일, 자기 역할을 해야 하는 일, 돈을 벌어야 하는 일, 사회적인 의무를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결혼을 하면 가족에 대한 책임이 생깁니다. 가정 주부들은 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남편의 사회생활을 위한 일, 가정 살림, 자녀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한 양육, 게다가 직장까지 함께 갖고 있다면 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혹은 미래를 위해 계획하고 무엇을 공부하기라도 한다면 일이 더 믾아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일이 힘들어서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기어코 이루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일을 이루어 낼까요?
이렇게 할 일이 많은데, 신앙생활을 하면 할 일이 또 생깁니다. 교회봉사를 해야 하는 일, 전도하고 기도해야 하는 일, 개인적인 경건생활을 해야 하는 일, 교회의 성장을 위해 자신의 은사를 사용해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어휴! 너무 일이 많네요! 일에 치여 감당이 안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러한 일을 모두 감당할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내가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됩니다. 생각만 해도 벅찬데 막상 닥치고 보니 해결이 됩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힘을 믿고 주님의 힘을 의미하고 실천하면 됩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이 어떻게 보면 무한해 보입니다. 사실 내 능력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 내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 무한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봉사하는 자세, 신앙 생활하는 자세를 이야기합니다. 이 자세가 바르면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자세가 바르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자세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일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일을 하는 재능과 지식과 사람과 일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하기 싫어서 게으르기도 하는데, 실제로 일할 수 있는데도 일할 곳이나 일거리가 없어서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찾지 못한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일,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일만 찾으니까 일이 잘 안 찾아집니다. 지금 내 작은 힘으로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우리가 할 일을 우리 주변 어딘가에 놓으셨습니다. 그 일을 찾아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로, 일하는 자세는 주님께 하듯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그 앞에서 매우 조심합니다. 그런데 어릴 적 친구를 만나면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느슨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도 그렇습니다. 내게 유익이 없는 일도 있고,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때로는 귀찮은 일도 있습니다. 피곤하게 하는 일도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도 있습니다. 나는 열심히 했는데, 그 결과에 대하여 주변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하며 괜히 나를 힘들게 합니다. 선한 일일수록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 더욱 많습니다. 그러면 화가 나고 그 일에 대하여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이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일이 주님이 내게 맡기신 일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주님이 맡기셨다는 믿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주님께 하듯 일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원하십니다.
셋째로, 사람에게 하듯 일하면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일을 함부로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대충 하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언젠가 코미디 프로그램에 ‘그까이꺼 대~충’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대충 할 수 있는 일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일을 대충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완벽하고 꼼꼼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재능과 능력을 동원하여 가능한 한 완벽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결벽증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꼼꼼하게 일을 합니다. 하지만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을 멸시하면 안 됩니다. 어느 정도 감싸주어서 그들도 일을 잘 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일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족과 교회와 성도들 모두 멋진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잘하는 능력을 주시되, 사람을들 품어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48. 기도에 힘쓰는 성도
성경 : 골 4:2
찬송 : 86장(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어느 책에선가 “습관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기가 막힌 선물이다 ”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물론 그것을 선용할 때만 적용될 말이겠지만 말입니다. 어떠한 행동을 하루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3주 동안 계속하면 그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날마다 기도하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3주 동안만은 그 시간에 꼭 기도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력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그렇게 해보십시오. 분명 당신의 삶이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로 날마다 주님과 교제할 것을 사모하게 하옵시고 그에 합당한 의지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은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자신의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에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기도에 관한 강력한 권고입니다. 형식적이고 일시적인 신자들은 잠시 무릎을 구부렸다가 무릎을 펴고 다시 일어서면 금새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항상 힘을 쓰라는 말은 이렇게 한번 기도하고 마는 순간적인 기도와는 완전히 다른 기도입니다. 이 말씀은 한번만 기도하고 끝내지 말고 지속적으로 힘쓰라는 것입니다.
능력 있는 설교를 듣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가 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 앞에 흠 없고 깨끗한 그릇으로 귀하게 쓰임 받고 싶으십니까? 큰 시험에서 벗어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유죄선고아래 진노를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징계에서 새로워지고 싶으십니까? 장래에 대해서 뭔가 초조하고 안정을 보장받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기도에 항상 힘쓰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일깨워진 마음은 하나님께서 당신과 관련된 일을 완전케 하시고 자비를 내려주실 때까지 부르짖기를 결코 멈추지 않게 됩니다.
이 말은 기도하기 위해 직장이나 가족을 가벼이 여기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라고 성경이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일하는 중에도 항상 기도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몸을 움직여야만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할 때나 길을 갈 때 마음이 주께로 열려있으면 기도의 영 가운데 거할 수는 있습니다. 항상 기도의 수고를 하지 않는다 하여도 기도의 영이 머무는 기도의 사람은 될 수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틀림없이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속성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목소리는 사람의 귀로 들을 때는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이고 작지만 하나님의 기이한 확성기 같은 주파수로 들을 때는 사간을 넘고 공간을 넘어서 하늘 보좌에 울려 펴지게 되어있습니다. 믿음의 기도, 중보자이신 우리 주님의 은혜로 둘러씌운 기도는 하나님의 면전에 향내 나는 기도로 분향함 되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향내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이러한 믿음을 성령님께서 주시사 기도의 은혜를 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일로 치닫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 우리의 소망 이런 것이 땅에 것에만 신경을 쓰고 관심을 육신에 것에만 갖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악한 영이 반격을 하고 할 수 만 있으면 택한 자녀라도 넘어지도록 마음을 혼미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 어째서 우리가 인색하고 혹독스런 주인에게, 마치 한번도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듯 우리 구원자이신 분께 인색하고 의심으로 간청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평소에 내가 기도를 잘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제부터라도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또한 기도는 잘 하는 것 같은데, 응답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주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시면서 기도의 모범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매우 간결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주기도문 만 번 드리기”를 시작하면 됩니다. 기도의 제목을 정하고 계속하시기 바라랍니다. 요즘 한국교회정보센타(1566-3004)로 분의하면 주기도문 일만 번 드리기 계수기도 구할 수 있습니다. 서점에도 있습니다. 일반번 주기도문으로 응답받은 사람들이 엄청나데 많습니다. 시작이 반입니다. 2011년에는 주기도 일 만번 드리기로 응답받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49. 신앙인의 언어 생활
성경 : 골 4:6
찬송 : 292장(주 없이 살 수 없네)
사람에게는 언어가 있습니다. 문자를 갖고 문자로 문화를 전수할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자가 없기도 합니다. 그래도 말이 있습니다. 말로 대화를 하고 의사소통을 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후대에 남기기도 합니다. 말로 감정을 표현하고, 말로 생각을 알리기도 합니다. 말로 합의를 하고, 혹은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동물들도 언어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는 겨우 생존에 필요한 언어일 뿐입니다. 동물들의 언어는 감정과 생각을 일부 표현하기도 하지만 문화를 발전시키는 언어는 아닙니다.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언어생활에서 변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불신자일 때는 하나님 이야기, 성경이야기, 예수님이야기, 기도 이야기 등 이런 말들을 하지 많았습니다. 돈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 사람 이야기, 정치와 경제 이야기 등 이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가 그의 삶의 영역이 무엇인지, 삶의 수준이 어떤지, 생각의 차원이 어떤지를 짐작케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언어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할 말을 알려 주십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하였습니다(벧후 1:21). 우리도 은혜를 받아 은혜스런 말을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말하는 우리들에 대한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원하시는 바입니다. 첫째로, 은혜가운데서 말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말은 은혜여야 합니다. 은혜 중심이어야 합니다. 은혜에 기초한 말이어야 합니다. 은혜의 결과를 예상하는 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은혜와 관련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습니다. 남의 잘못과 허물을 들추어내는 말, 과거에 작은 잘못을 기어코 밝혀서 무안을 주는 말,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말, 남의 인격에 상처를 주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성공하고 행복하려면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칭찬거리를 찾았으면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은혜에 기초한 말을 하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기쁩니다.
둘째는, 소금으로 고루게 하듯 말합니다. 소금은 물에 녹습니다. 그래서 음식에 골고루 간을 배게 합니다. 우리의 말 역시 사람들에게 펴져나가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쁜 말이 더 빨리 펴져나갑니다. 나쁜 말이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데 훨씬 더 강력합니다. 욕설을 많이 하는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이상하게 선한 말보다는 나쁜 말을 먼저 배웁니다. 어린아이들이 나쁜 말을 먼저 배웁니다. 인터넷 상에서도 선한 댓글을 다는 것보다 악한 댓글을 다는 경우가 많습니다. 악한 댓글 때문에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선하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선한 말이 여러 곳에 퍼지도록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일이 더 많이 퍼지는 것이 현상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선한 일이 퍼져나가는 일에 힘을 씁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말이 생각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각 사람에게 적당한 선한 말이 생각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할 말이 생각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악한 말은 더 잘 생각납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선한 말은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배워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이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을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말을 잘 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어떤 상황이나 학문의 체계에 맞는 말을 하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선하게 말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선한 일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말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배워도 그것이 기억되고 아름답게 사용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가능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사회 생활을 하는 우리들, 신앙 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은혜 중심의 말, 선한 영향력이 골고루 퍼지는 말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말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힘써 배워야 합니다. 기억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심으로 선한 말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선한 말의 위력과 영향력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실 겁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선한 말의 영향력을 펼쳐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50. 하나님의 소원
성경 : 살전 5:16-18
찬송 :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부모가 이 세상을 떠나실 때 남기시는 말씀을 우리는 “유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불효를 저지른 자식이라도 유언만큼은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유언은 자녀들에게 남기는 부모의 마지막 서원이 담겼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육신의 부모보다 더욱 원하십니다. 그래서 신명기 10장 13절을 보면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계명을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행복하게 살지를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기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알려 주시는 것은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하고자 하십니다.
1.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염려와 걱정이 많은 날이 더 많습니다. 고통과 번민으로 밤을 지새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 인생의 길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고 치료하십니다. 평안과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 중에도 성령을 통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쁨의 원천입니다. 기쁨이 사라진다는 우리 심령에서 주님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 작아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합니다. 억지로 웃어도 병이 낫는다고 합니다. 기도와 찬송과 말씀으로 줄거움을 삼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을까?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아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집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기 위해 기도하고, 도우심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웃과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복을 넉넉하게 넘치게 주십니다.
3. 하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 말씀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울 때에 감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감사의 마음을 통해 평안을 주시고, 육체도 강건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되, 그 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때로 단련하고자 고난도 주십니다.
혹시 고난 중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원망하지 말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길이 하나님의 복과 영광을 체험하는 길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고난 중에도 감사했습니다. 그리할 때에 적군이었던 모압과 암몬 자손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하나님께서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일으키게 하는 도화선이 됩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나그네 같은 인생 길을 가는 동안 이 세 가지를 실천해 늘 복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습니까? 남이 잘되었을 때 감사하고 기뻐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내가 안될 때에도 잘되는 사람은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넓게 갖고 삽시다. 마음을 좁게 갖고 살면 자신도 불행하고 주위 사람도 불행케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이론으로는 가능하나 사실은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중간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쉬지 않고 기도하면 성령 충만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충만입니다. 내 마음으로는 안되지만 예수님 마음으로는 가능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행복하게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251.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경 : 살후 3:16
찬송 :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사람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대부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 모두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겠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돈이 많으면, 유명해졌으면, 하고 싶은 데로 했으면, 멋진 남성을 만나서 결혼했으면,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서 결혼했으면, 넓고 화려한 집에서 살아봤으면, 사업에 성공했으면 등등 여러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그 행복 모두가 외적인 조건들입니다.
돈도 많고 높은 권력도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도 있지만, 자기 마음속에 평안이 없다면 그는 진정한 행복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행복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죽어서 천국 가는 축복도 있지만, 살아있을 때 주님 안에서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최고 행복은, 심령의 평안입니다. 참다운 행복은, 심령의 평안함에 있기에, 바울 사도는 “평강의 주께서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참다운 평안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의 말을 통해 은혜를 받읍시다.
첫째로, 평강의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평강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평강을 얻어 보려고 애쓰지만 평안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돈이 많으면 내 돈을 누가 가져갈까 봐 염려하고, 지위가 있으면 그 지위를 누가 빼앗을까 봐 노심초사하고, 지식이 높으면 그 지식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해서 기분 상합니다. 사실 평강은 내적인 마음의 상태인데, 사람들이 내적으로 평안하지 못합니다. 문명하회, 다양화 사회가 되면서 스트레스가 엄청 많아집니다.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고 평안해지려고 명상을 하는 사람, 휴식을 취하는 사람, 레저와 스포츠와 취미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도 평안이기는 하지만 제한적입니다. 일터로 돌아가면 또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안해보려고 술과 담배와 마약 등 중독성물질을 흡입하기도 합니다. 그것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내성 현상이 있고 금단증상 때문에 물질을 더 찾습니다. 그것 때문에 인생을 망칩니다. 평안은 주님으로부터만 받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평화를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평강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로, 평강의 주님이 때마다 일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여기 때마다 일마다 주신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평강을 주고 싶으십니다. 위험한 순간에 평안을 주고 싶으십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평강을 주고 싶으십니다. 하나님이 위기를 극복하는 믿음과 용기를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그 순간에 평강의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평강의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십니다. 언제 어떤 때든지 선한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면 염려와 걱정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주님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이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축복의 말씀을 줍니다. 그 축복의 말씀은 옛적 이스라엘 백성 때부터 하신 말씀입니다. 백성들이 힘들고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이 위로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승리를 얻을 수 있었고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얻은 아름다운 결과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게십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걱정하지 않고, 어떤 상해를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데 염려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분임을 마음 깊이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일에 은혜를 주셔서 일마다 때마다 평강으로 함께 하여 주십니다. 평강으로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평강이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늘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52. 경건을 연습하라
성경 : 딤전 4:7-8
찬송 : 309장(목 마른 내 영혼)
연습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귐나조'인데 이 말은 '발가벗은'이란 뜻을 가진 '귐노스'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는 운동선수가 옷을 벗고 맹렬히 연습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사력을 다하여 연습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세상 적인 영광을 위해서도 있는 힘을 다하는데 영적인 삶을 위해서는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경건에 이르기 위한 연습에 열과 성을 다해야 합니다. 신체를 단련시키는 육체의 연습과 비교할 때 경건의 연습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경건한 생활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극히 마땅한 생활입니다. 그럼에도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이 경건 생활이 부족하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고급 옷 로비사건 청문회 이후 새로운 유행어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화려한 거짓말'이라는 유행어입니다. 그동안 교회 안에 누적된 세속적인 생활과 부정과 모순들이 수면에 떠오른 증거라고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 안에 반드시 흘러야 할 경건 생활의 부재를 확인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경건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경건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세보마이'입니다. 이 말은 두 단어의 복합어인데 '유'라는 말과 '보세이'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유'라는 말은 '잘(well), 잘한(well done)'이란 뜻이고, '세보마이' 즉 '세비아'는 '존경이나 경배,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piety toward God, truth that leads to godliness)' 등을 의미합니다. 이를 종합하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생활 혹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바른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경건이라는 말이 믿음이라는 말과 같이 사용되어 뜻도 같습니다. 바른 믿음 생활이 바로 경건 생활입니다. 굳이 구분하다면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요 경건은 그 믿음에서 나오는 생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건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를 말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기독교의 덕목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을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경건 생활과 경건주의는 서로 다른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주의는 성경이 경건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16세기 이후 특히 루터파를 중심으로 처음에는 대단히 좋은 반응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광신주의와 금욕주의로 흐르면서 신앙생활의 빛보다 열을 더 강조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실제 생활은 없으면서 열심만 있는, 위선적 경건 생활을 하는 외식하는 자들이 되어 버린 경향도 생겨났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경건주의라고 합니다. 경건주의는 외식입니다. 형식은 있으나 내용이 없습니다. 믿음의 능력이 없는 껍데기 교인입니다.
2. 경건의 연습은 무엇에 유익합니까?
본문 8절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연습에 대해선 운동경기를 통해 얻은 신체 단련이라는 견해와 그리스도인의 금욕생활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든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의 뜻도 육체의 연습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경건의 연습이 더욱 필요함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의 연습은 금생과 내생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고 했습니다.
3. 경건의 연습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만 경건에 대한 교훈을 열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연습하라고 하신 말씀의 뜻입니다. 훈련이나 연습은 반복하고 쉬지 않고 행하므로 그것이 습관이 되고, 체질화되고 또한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체육이나 기술연마도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거듭하므로 그것이 몸에 배어야 하는 것처럼 경건 생활도 그러합니다. 습관이 계속되면 인격이 되고, 인격이 곧 문화와 전통 그리고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은 선수 생활을 한 만큼 보장을 받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금생은 물론 내생에까지도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경건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풍성한 생명으로 가는 디딤돌입니다. 현세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풍성한 은혜를 받으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됩니다. 그것이 곧 기도이며 말씀인 신앙생활입니다. 날마다 거룩한 삶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생활이야말로 경건의 유익이며 영생의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경건한 생활을 위해 수고하고 진력하여, 구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 현세와 내세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53. 믿음의 선한 싸움
성경 : 딤전 6:11-12
찬송 : 360장(행군 나팔 소리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 같으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믿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직분을 맡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처럼 하나님의 일을 맡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러줍니다. 사람이 부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명칭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 중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소극적으로는 피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피해야 하고, 어떤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할까요? 피해야 할 일은 디모데전서 6장 9절과 10절에 있습니다. 그것은 정욕에 빠지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미혹을 받아 근심하는 것 등입니다. 그 중에 하나 돈의 미혹을 받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사실 돈의 유혹을 피하는 거시 쉽지 않습니다. 돈이 있으면 편한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이것들을 피하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돈을 관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반면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따라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따라 가야 할 일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입니다. 즉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덕목을 따라 행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믿음의 정체성, 영적 정체성만 분명하게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믿음의 덕목들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믿음의 덕목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따라야 할 믿음의 덕목들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능히 믿음의 덕목을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한 일을 위해서도 싸울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을 위해서도 싸울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싸움은 신체적인 접촉이 아닙니다. 무기를 갖고 상대의 신체에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악한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한 일이 발생하면 그것이 멈추어지도록 경계하고 필요한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려면 믿음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한 담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승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셋째는, 영생을 취하라고 합니다. 영생을 취하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영생을 취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생을 받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생을 간직하라는 의미, 영생을 붙잡으라는 의미입니다. 즉 영생을 얻은 사람이므로 영생에 의거하여 필요한 일을 감당하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어야 하는데, 그 일이 영생의 일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영생을 위한 일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우리의 영생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 때문에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생을 위한 일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의 일을 맡기셨고, 우리를 통해 영생의 일이 지속되고 이루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권면의 목적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워놓고 선한 증거를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헌신을 서약하였습니다. 우리도 직분자로서 서약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서약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실 일을 기대합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행할 것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54. 부름받은 기쁨으로
성경 : 딤후 1:9
찬송 : 323장(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 없이도 인간의 힘으로 얼마든지 행복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모르는 무지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도 자기가 믿고 싶을 때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릴 생각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응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 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끌어 주셨기에 믿는 것입니다. 즉 주께서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전도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름을 입은 것이고, 부모가 예수를 믿었기에 자신도 예수 믿게 된 사람들도 부모를 통하여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과정이야 어떠하던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입었다. 이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라도 죽음이라는 마지막 손님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라도 죽음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다 피해도 죽음만은 피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죽음을 맞이할 때에 구원받은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맞게 됩니다. 없는 비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의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게 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시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라도 "나는 예수 믿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 믿지 않는 것처럼 행세하려고 합니까? 언제 어디에서라도 예수를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왜 예수를 인정하지 못하는가 하면 바로 부르심에 대하여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걱정이나 염려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너의 모든 염려를 내게 맡기라 하셨습니다. 무거운 짐도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일을 맡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기 혼자 다 하려고 하면 일 중독에 걸려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쳐준 진리입니다. 그래서 천부장 백부장을 세우고 일을 맡긴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염려 걱정 문제가 있으시면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십시오. 선하게 해결하십니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주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 주님은 임마누엘이 되십니다.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돕는 자라는 말입니다. 도움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 할 때마다 생각밖에 놀라운 은총으로 도와주십니다. 도움 받고 만족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름받은 우리는 소망 중에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행복이란 기쁨과 만족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하였습니다. 행복을 소유에서 얻으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근원에서 얻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기쁨과 만족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늘 나라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가운데서 만족하고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기쁨과 만족의 요소가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웃으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행복 하라고 부르셨으니 그리스도인들은 주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부름을 입은 우리게 누려야 할 당연한 복익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범죄하고 생활에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바로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셨기에 나를 그분이 인도하는 대로 명령하는 대로 살아가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부르심으로 구원받은 일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충성하면서 구별된 삶을 살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삶이 구원의 확신이요, 구원받은 복된 삶의 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받은 감격으로 2011년을 살아서 부름받은 자에게 주시는 충만한 하늘 응답을 받고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55. 진리의 일군
성경 : 딤후 2:15
찬송 : 325장(예수가 함께 계시니)
글렌 힐슨(Glann Hinson)이라는 학자는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귀담아 듣지 못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너무 바쁘다는 것입니다. 바쁜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정당하게 바빠야 합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바빠야 합니다. 일 자체에 몰두하고 성과주의에 빠져서 성공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성공의 의미도 깊이도 없이 그저 뛰고만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뛰는 것이 아니고 뛰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뛰고 바쁜데 왜 바쁜 지도 모르겠고 이 바쁨의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너무 산만하답니다. 지금은 볼거리도 많고 들을 거리도 많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골라 보고, 골라 들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만큼 산만합니다. 무언가 정리되지 못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있어야 할 시간에 어딘가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가하면 심지어는 예배 시간마저도 잊어먹고 삽니다, 이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못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깊은 묵상도 깊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바쁜 세상과 맞물려 시끄럽게 돌아가는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그 권면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들이 있습니다. 이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직장에서의 일처럼 어떤 업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경건에 관한 일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것처럼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어떤 권면을 할까요?
첫째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기를 권면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경말씀을 의미합니다. 신앙인은 과학이나 신비한 체험이나 건전한 상식 등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은 절대 진리가 아니어서 진리와 비진리가 섞여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체험과 이성적 판단이 중요하지만 성경에 위배된다면 그것을 잘못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체험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도 성경이 옳다고 하면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최종 판단의 기준이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놓습니다. 정보가 힘이 되고 정보가 홍수같이 쏟아지는 시대일수록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분별력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일군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는 분별력입니다.
둘째는, 부끄러운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되기를 권면합니다. 만약에 일군에게 부끄러운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일을 잘못했거나, 실수했거나 혹은 실패를 해서 막대한 손해를 입힌 것입니다. 사실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수가 아니라 고의로 잘못했다면 더 크게 부끄럽습니다. 실수는 용서받을 수도 있지만 고의적인 잘못은 용서받기가 어렵습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한다면 최소한 마음에 경건한 자세, 순수한 마음으로 일하려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 자세를 바르게 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대속의 제물로 자신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내어 드림에 대한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 혜택을 받은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고, 또 순종하는 우리들에게 복되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바울 사도의 권면을 통해 우리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고,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56. 성경대로 사십니까?
성경 : 딤후 3:15
찬송 : 199장(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읽을수록 신비한 책입니다. 성경 66권이 완성되는데는 주전 14세기부터 주후 1세기까지 1500년이 걸렸고, 무려 40여명의 저자들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썼지만 하나님의 영감(inspiration)을 받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책들은 인간이 다 머리 속으로 생각해서 적어 놓은 글들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감동이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에는 능력이 있고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님의 감동이 스며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당연히 성경책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면서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붙잡고 하루하루를 주님 앞에 맡길 때에 축복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관심사는 어떤 것이 올바른 삶이며, 올바른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공적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입니다. 그러면 왜 오직 성경일까요? 그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성경에 도전하기 때문입니다(딤후 3:13).
‘악한 자, 속이는 자’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있었다. 거짓 선지자, 이단들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교회 밖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들은 교회의 이름으로, 선교 단체의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자기들의 교리나 사상 또는 주장에 맞도록 끼워 맞추는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성경과 배치됩니다. 오직 성령만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성경만이 우리의 유일한 신앙의 표준이므로 성경의 권위 앞에 순종하며, 복종하며 성경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책들과는 다른 영감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으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딤후 3:11). 많은 사람이 성경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 기쁨의 삶을 삽니다. 도저히 믿지 않을 사람 같은데 성경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 감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사람이며 신앙도 인격도 모두 불완전합니다.
따라서 진리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대로 날마다 성장하고 완전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배워야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교훈하며, 죄를 깨닫게 하며, 책망하며, 바르게 하며,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이며,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승리를 위해 말씀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딤후 3:14). 세상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오직 말씀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오직 성경 66권만이 심판의 표준이 됩니다. 오직 성경대로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따르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세계의 모든 역사는 성경대로 되어가고 있으며 성경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역사를 움직인 나라와 사람들은 오직 성경대로 산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의 지혜와 이스라엘이 배출한 많은 인물들이 세계의 경제와 사회를 주름잡고 있음은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축복된 민족이요, 족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온전히 말씀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의 손에 계속 머물 수 있습니다. 그 손에서 벗어나는 것은 곧 내 자신을 깊은 수렁과 바다위에 던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과 후손이 복 받는 길은 오직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 중심, 말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오직 성경 중심으로 살고 순종함으로써 참 인생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 중심으로 성경 속에 약속하신 복을 우리와 우리 자손 대대로 받는 백성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즘 많은 책들이 시간단위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수많은 책들로 인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모든 책 가운데 인간을 살찌우고 유익하게 하는 지식을 가져다 주는 책이 과연 얼마나 될 것까요? 또한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거스리지 않는 가운데 인간을 복되게 하는 책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생활의 지혜를 얻어서 많은 학자와 정보를 내 곁에 두는 비서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책이 있습니다. 바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항상 곁에 두고, 그 속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바른 길을 걸어가는 길잡이요, 삶의 지혜로 받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대로 사는 지혜롭고 현명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뜻과 섭리를 바로 깨달아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축 원합니다. 아멘.
257. 말씀 전파에 힘쓰는 성도
성경 : 딤후 4:2
찬송 : 285장(주의 말씀 받은 그날)
미국 아이오와주의 작은 마을 웨스트 브로치. 한 교회학교 교사가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네 명의 소년을 만났습니다. “애들아, 오늘 너희들에게 아주 중요한 분을 소개해주겠다.” 소년들은 교사를 따라 교회에 갔고, 교사는 그들을 위해 성경공부반을 만들어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소년들은 철저한 신앙훈련을 받았고, 장성해서 마을을 떠났습니다. 교사의 은퇴식 날. 식장에 네 통의 편지가 배달됐습니다. 한 통은 중국 선교사, 한 통은 미국 연방은행 총재, 한 통은 대통령 비서실장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봉투에는 ‘후버’(Herbert Hoover)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미국 제31대 대통령의 이름입니다. 편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때 저희에게 가르쳐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경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길거리의 네 소년은 미국과 세계를 움직이는 인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교사 한 사람의 열정이 어린이를 변화시킵니다. 변화된 어린이가 자라서 나라를 움직입니다. 세계를 움직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움직입니다. 교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세계적인 인물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역사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이러한 권면을 합니다. 바울의 권면을 보며 우리의 믿음을 다져봅시다.
첫째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권면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전파하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누구의 말씀을 전하고, 무슨 말씀을 전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먼저 임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구원에 감격한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말씀을 전파하라고 사명을 주셨지만 동시에 말씀을 전파할만한 힘과 능력도 주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8:18-19). 그리고 온 찬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막 16:45).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합니다. 바울이 기억하였고 디모데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디모데가 충성된 사람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알려주었습니다. 대대로 계승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들려졌습니다. 이제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질 차례입니다.
둘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무엇을 하려면 때를 잘 판단할 때 성공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한 수, 한 수 순서를 잘 놓아갑니다. 그런데 순서를 뒤집어 놓으면 패착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대는 패착 하나를 이 때다 싶어 놓치지 않고 게임을 승리로 이끕니다. 순서와 때가 잘 못되면 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때를 얻으려고 기다리고 있다가 단 한 번 성공해도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축구경기에서 공격수가 단 한 번의 찬스에서 골을 넣으면 그 경기에서 이길 수도 있습니다. 공격수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제나 골을 넣으려고 노리고 있고, 공이 자기에게 오기를 기다립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마치 축구 선수 중에 공격수 같은 모습입니다. 찬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공격수 같습니다. 복음전파는 마치 이와 같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는지 복음 전파에 항상 힘을 씁니다.
셋째는,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합니다. 믿음의 일꾼들은 다른 일꾼들에게 권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믿음의 지도자는 경책과 경계와 권면의 사람입니다. 경책이란 잘못한 것이 있을 때 넌지시 꾸짖는 일입니다. 경계는 잘못된 일을 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일입니다. 권면은 바른 일을 하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책과 경계와 권면도 자기 감정이나 욕심이 개입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뜻에 맞는 일이 됩니다. 그 때의 경책을 인격을 모독할 가능성이 있고, 경계는 옳은 일을 하려는 사람을 막을 수도 있으며, 권면은 나쁜 일을 지시하는 현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이라는 단서를 답니다. 단서가 있으면 경책과 경계와 권면이 바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파하는 삼이 되기를 원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에 힘쓰고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과 경계와 권면이 있어짐으로 하나님으로 칭찬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58. 예비된 면류관을 향하여
성경 : 딤후 4:8
찬송 : 150장(갈보리산 위에)
운동 경기에서는 1, 2, 3등에게만 상이 주어지고, 1등에게만 조명이 쏟아집니다. 이것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최선을 다한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후한 상과 빛나는 영예를 보장해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인 것입니다. 이걸 알면, "내가 무슨 직책을 맡았냐? 내가 어떤 일을 하느냐?"하는 것이 중요치 않습니다. 그런 것을 다투는 사람은, 교회의 직분과 직무를 여전히 세속적인 질서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맡은 자의 임무는 충성이요, 하나님은 충성한 자에게 최고의 영예의 면류관을 선사하시는 것입니다.
토론토대학에 있었던 일입니다. 생화학을 전공하는 두 학생이 있었습니다. 둘 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석사학위를 마치고 나가게 될 때쯤 되어서, 교수님이 그 두 사람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너희들 그 동안에 실험실에 갇혀서, 몇 년 동안 고생 많이 했다. 밖으로 나가고 싶겠지. 그러나 내가 하는 연구가 지금 중요하니까, 너희들 중에 하나만 남아서 나를 좀 도와주렴." 그래서 한 사람은 남고 한 사람은 의사가 되어서 돈도 벌고 장가도 가고 즐거운 생활하겠다고 나갔습니다. 한 청년은 또 다시 연구실에 남아서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후에 밖에 나간 청년이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자기 대신 실험실에 남아 있던 찰스 허버트 베스트 (Charles Herbert Best)라고 하는 자기 친구가, 주임 교수와 함께 인슐린을 발명해서 노벨상을 타게 된 것입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그는 가슴을 쳤습니다. "내가 남을 걸 내가 남았다면 저건 내 껀데."
주님께서도 가시관 쓰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달려갈 길을 달리시고 우리에게 생명주시며 그 향기 속에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선한 싸움은 삶속에 계속 됩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선한 싸움을 싸우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했던 사람들이 악조건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갖게 되었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인내를 우리가 말씀에 근거해서 갖게 된다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갖게 되어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으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신 것 중에 하나는 복음 전파입니다. 예수 없이는 승리가 없고,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너무 잘하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평소에도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 받고 전도를 잘하는지 항상 "예수 없이 살 수 없어요"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없이 살 수 없어요"라는 별명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여대생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굉장히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그 예수 없이 살 수 없다는 얘기 말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목사님. 그보다 더 위대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나 없이 사실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괴로움은 나 자신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나의 존재가 나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나의 삶의 깊이와 불안한 미래를 단번에 아시는 그분은 우리를 필요로 하시고 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인 예수를 대신 십자가에 달아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주님 앞과 사람들 앞에 고백할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주님 나라 확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복음을 위해 삶을 온전히 드린 믿음의 사람들에게 의의 면류관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의의 면류관을 쓰기에 합당한 2011년을 살아야 합니다.
올 해만큼은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인내하는 마음과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저와 여러분 모두 의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한 해를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259. 새로운 삶
성경 : 몬 1:20-21
찬송 : 445장(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친한 사람에게 어떤 부탁을 하려면 마음이 어떨까요? 예를 든다면 내게 꼭 필요한 일이기는 한데, 그 부탁을 하자니 왠지 미안해지는 일입니다. 우리 집 아이가 직장에 들어가야 하는데 마땅한 직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 친구가 일하는 사업장에 자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이를 위해서는 부탁하고 싶지만, 친구에게 부탁하자니 혹시 친구의 입장이 난처할까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매우 친한 사람에게는 부탁이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도 방법이 있습니다. 친구와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자녀이야기를 합니다. 부모 마음은 자녀 잘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 눈치를 봅니다. 친구가 우리 직장에 한번 알아보겠다고 하면 정말 잘 된 겁니다. 친구 입장에서도 어렵습니다. 친구 아들 소개해 주었는데, 잘 하면 본전이라도 못하면 회사에 미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오늘 바울과 빌레몬이 꼭 그런 입장입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 노예였는데, 도망을 나왔다가 어찌 어찌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에게 배우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이전 주인 빌레몬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에 관하여 편지를 씁니다. 오네시모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입니다. 바울과 빌레몬은 매우 친합니다. 서로 존경하며 믿음 안에서 교제를 나누고 믿음의 사역에 서로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오네시모를 부탁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빌레몬에게 재산상 손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이 부탁을 들어줄 줄로 믿고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빌레몬을 향한 바울의 신뢰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신뢰하고 싶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부탁하고 명령하실 때 우리가 순종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오늘 바울의 기대와 신뢰와 마음을 보고 예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체험하시를 바랍니다.
첫째로, 바울은 순종을 확신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순종을 확신하고 편지를 쓴다고 합니다. 이 정도 되면 편지를 받는 사람은 순종 한 하려도 안 할 수 없습니다. 순종을 확신한다고 하는데, 그건 순종하라는 말보다 더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에게 부탁할 때 반대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거 해 주면 안 돼요?” 그러면 “네”라고 대답했다면 해 주겠다는 건가요? 안 해 주겠다는 건가요? 영어로 “노우”라고 하면 긍정으로 묻던 부정으로 묻던 안 해 주겠다는 대답이지만 우리 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네”라고 대답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긍정으로 묻는 것이 좋습니다. 부탁도 바울처럼 긍정으로 하는 겁니다.
둘째로, 바울은 부탁한 것보다 더 잘해줄 줄로 압니다. 빌레몬의 성품과 믿음으로 볼 때, 그는 바울의 부탁을 분명히 들어줍니다. 그런데 부탁한 만큼만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부탁한 것보다 더 많이 들어줍니다. 이 정도 되어야 진짜 멋진 친구라 할 수 있습니다. 부탁해도 안 들어주는 사람, 부탁하면 겨우 들어주는 시늉만 하는 사람, 부탁한 것에 조금 모자라게 들러주는 사람, 부탁한 것만 딱 들어주는 사람, 부탁한 것보다 더 많이 들어주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멋진 사람이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 많습니다. 전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믿음의 순종을 부탁하셨습니다. 어느 정도로 순종하는 것이 멋진 순종이겠습니까?
셋째로, 빌레몬의 호의로 인하여 바울이 기쁨과 평안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존중합니다. 영혼을 사랑합니다. 비록 노예 상태에 있던 오네시모이고, 탈출한 노예라 할지라도 회개한 것을 보고 기뻐하며 제자로 삼았습니다. 오네시모가 앞으로 예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할 일이 많습니다. 오네시모의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부탁하는 것이 빚진 자의 심정이기도 합니다. 그 빚을 갚을 길고 방법도 없습니다, 언제 갚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탁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부탁입니다. 사람을 살려주는 부탁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허락으로 인해 기쁨을 얻고 싶습니다. 평안해지고 싶습니다. 남의 부탁을 잘 들어주면 기쁨과 평화가 생깁니다. 들어주는 사람도 부탁하는 사람도 기쁨과 평화를 얻습니다. 부탁하고 들어주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의 미래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부탁을 들어주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사람의 미래가 열려지는 일에 서로 부탁하고 들어주는 관계가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계속하여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아멘!
260. 시험받는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
성경 : 히 2:18
찬송 : 384장(나의 갈 길 다가도록)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시험과 고난을 통과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신 후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습니다(창22:1,2).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꿈을 주셨고 놀라운 축복으로 복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요셉은 종으로 팔려야 했고, 보디발 장군 집에서 13년 동안 어려운 시절을 참고 견디어내야 했습니다. 요셉은 10년 이상을 노예로 살아야 했고, 2년 동안 죄없이 감옥에서 무고히 살아야 했습니다(시105:17-19). 연단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귀하게 쓰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요셉에게 고난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모세는 40세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몰아 넣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난의 과정을 겪으면서 인내하는 품격을 갖추게 하셨고,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을 갖게 한 후에 하나님은 모세를 쓰셨습니다.
우리 우리가 시험을 기쁘게 여겨야 하는 까닭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절) 는 말씀대로 '인내'라는 귀중한 인격이 당하는 시험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인내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성숙한 신앙생활을 살게 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어려운 시험과 고난을 주심으로 인내라는 그리스도의 품격을 지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때때로 어려운 고난이 주어질 때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연단 하시고 빚으시어 인내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을 감사 드리면서 고난을 견디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기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좌절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고난 당하는 이유만 안다면 참을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당한 고난 중에서 의미 없는 고난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난은 검은 옷을 입고 찾아온 천사입니다. 그 때문에 나에게 어려운 일이 찾아 올 때 낙심하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면서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면서 감사함으로 기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시험은 결과적으로 내게 유익을 준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험을 통해서 인내가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인내는 아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연단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고난 중에도 소망을 가지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 71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변화되었다" 는 간증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왜 내게만 이런 어려운 일을 주시는가?" 하면서 하나님 향하여 원망한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게 된다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넘어지게 됩니다. 그럴때 주어진 고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도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내 삶에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은 선하시고 좋은 것을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때때로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가 좋은 태도와 믿음을 가지고 고난을 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통하여 더 큰 축복을 베푸시면서 반드시 위대한 일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올바른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섬긴다면 우리 모두가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주님께서는 고난을 잘 참고 믿음으로 견디었기 때문에, 그 고난으로 인해 눈물로 지샌 날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직접 닦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잘하였다 충성된 종아!" 하시면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12절, 계2:10).
261. 소망에 풍성하기를..
성경 : 히 6:11-12
찬송 : 430장(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시험 없는 학교생활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없고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시험 없이 그냥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안 보아도 성적이 잘 나오고, 공부잘한다고 성적장학금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시험이나 유혹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건강도 좋고, 하는 일도 잘되고, 가족 간에, 이웃 간에도 좋고 그저 만사가 좋기만 하고 고민이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학생은 학교 시험이라는 고통을 통해 실력을 쌓습니다. 성도는 인생 시험의 고통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고 인격을 키웁니다. 육체는 고통을 통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의 고통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소망도 함께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에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시험의 고통 중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갖고 시험을 이기게 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시험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고통 없는 인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 여러분들은 소망으로 풍성해야 합니다. 소망의 부자가 되어야 험하고 어려운 시험의 고통을 이깁니다.
오늘 성경의 저자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믿음의 권면이며, 세상을 살아갈 때 승리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하는 권면입니다. 성경의 기자들은 교회의 성도들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람이 있는 데, 이 바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성도들이 권면하는 것이나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 모두 하나님의 마음이 품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에 하나님의 돌보심과 도우심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기자가 권면하는 내용을 세 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는, 각 사람이 동일하게 부지런하기를 원합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결과가 생겨날까요? 점점 나아지는 생활, 진보하는 생활이 이어집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줍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일에 부지런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일에 부지런합니다. 본문에서는 이와 더불어 게으르지 말라고 합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게으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지런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부지런히 일할 수 있는 기회와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부지런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쁘게 일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부지런하되 여러 사람이 동일하게 부지런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일하는 모습입니다. 여러 사람이 동일하게 부지런하면 일이 쉽습니다. 빨리 끔납니다. 그리고 훨씬 더 멋지고 큰 일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끝까지 소망에 풍성함을 이루기 원합니다. 소망은 지금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언젠가 좋을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소망, 교회가 부흥할 것이라는 소망, 우리 가정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아 받고 더 많이 나누어 줄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소망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소망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오래 참습니다. 소망이 풍성하면 믿음, 확신, 오래 참음 등 다양한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셋째는, 본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무엇을 본받고 누구를 본 받습니까?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사람들을 본 받습니다. 약속들을 받을 만큼 믿음을 가진 사람의 믿음을 본받습니다. 본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은 축복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겠다는 방향이 정해지고, 어떻게 하면 된다는 방법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도 생깁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해 신앙의 모델들을 이미 주셨습니다. 성경에 신앙의 모델들이 매우 많습니다. 교회 역사와 신앙 선배들을 모델로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누가 신앙의 모델입니까? 우리 모델 중에 최고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으려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족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부지런함과 풍성한 소망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에수님을 본받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262.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성경 : 히 10:22
찬송 : 453장(예수 더 알기 원하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의 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예수의 피를 통하여 죄의 값을 치루심으로써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닌 은혜인가를 믿음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은 것은 우리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닙니다. 사죄는 예수의 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니 단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은혜의 표식이며 감사의 표식인 예수의 피를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가 예수 없이 다니던 옛날 길은 사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새로운 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요 14:6).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의 길에 들어섭니다. 이 길은 얼마나 생명감이 넘치는지 이 길에 들어서면 생명이 있습니다. 번영이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생깁니다.
세계 역사상 기독교인으로 최고의 부요를 누리면서 선한 사업으로 일생을 마친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록 펠러입니다. 록 펠러는 시카고 100만평의 대지 위에 12개의 종합대학을 세웠고 그 가운데 하나인 시카고 대학은 5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낸 대학이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늘 “나는 우리 어머니로부터 위대한 유산을 받아서 이렇게 부요를 누리고 있다”고 했을 때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 어머니가 무슨 유산을 그렇게 주었습니까?”, “나의 어머니는 신앙의 유산을 주었는데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바치라고 한 유언이 나에게 큰 유산이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동안 4828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 세계에 모든 선한 일을 하면서 하나도 자기 이름으로 거기에 새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으로 한 일이니 내가 한 일이 없다고 명언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격을 온전케 하는 복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영혼이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고 살려면 우리도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온전함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우리 주님은 우리가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온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하나님의 복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태어나면 자라나듯이, 믿음도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저절로 이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순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는 적당히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을 해야합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 입의 말씀이니라” (사1:19) 순종은 모든 축복의 문의 열쇠입니다. 모든 일이 순종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상관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기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여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또하나 이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온전한 온전한 헌금 생활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물질 관계가 올바르지 못한 사람을 보면 가치관이 부정적입니다. 교회제도나 교회생활에 부정적이고, 의심이 많고, 탐욕과 욕심과 교만과 불순종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축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체면 때문에 억지로 드리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드리는 사람이나 기분에 따라 드리는 사람이나, 매년 처음 몇 개월만 드리고 안드리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십일조는 내 마음대로 드리고 싶으면 드리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액수를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돈이 아닙니다. 돈만 드린다고 해서 우리의 헌신을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신앙의 고백이요, 증거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전도 많이 하는 것도 하나님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찬송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바치는 신앙은 최고의 증거입니다.
2011년에는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당당하게 전진하는 신앙을 살아서 하늘 상급을 받는 한 해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63.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성경 : 히 11:6
찬송 : 441장(은혜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성경적인 기준에서는 의인은 착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착한 것도 필요하고 성실한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께 칭찬을 듣고 상을 받을 수 있게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며 믿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우리의 믿음이 어떻길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본문을 중심으로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봅니다.
첫째는,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당신 앞에 나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에게 당신 앞에 나오시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고 하나님께 나올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나올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고,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올 수 있도록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둘째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아무거나 다 믿지 않습니다.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을 믿습니다. 믿음이 바른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만약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 왜곡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바르지 못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많습니다. 교회 역사에서도 많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둥, 혹은 사람이 아니라는 둥, 하나님이 게신 것이 아니라 이름만 있다는 둥,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 아니라든 중 수많은 이단들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환상만을 따르는 이단도 있고, 예수님의 구원을 유일한 가치가 아닌 걸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성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주에 편만하심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바른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상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상을 주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어떤 상을 주실까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는 상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면류관을 얻는 상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보좌에서 주님 곁에 있어서 영원한 왕노릇을 하는 상입니다. 하늘에서 어떤 공간을 얻는다든지 어떤 직위를 얻는다든지 하는 상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상은 가장 큰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용어로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상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상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실 우리가 완벽하게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부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온전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결산이 있을 것을 예상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상을 주시기 위해 여러 모로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상을 주십니다. 상을 주시려고 준비하는 것, 진행하는 것, 상을 주시는 결과까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성도들 그리고 교회에 믿음이 충만하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충만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믿음, 하나님이 상주시기에 기뻐하는 믿음이 있기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64. 우리가 사모하는 본향
성경 : 히 11:16
찬송 : 545장(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사는 실향민이 아니고는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고국ㄱ을 떠나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 말도 본향에 대한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기의 고향을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고, 고향을 잊고 사는 사람도 있고, 고향을 알지만 찿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고, 고향을 찿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고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향이 어딘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향을 찿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찿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천국본향을 향해 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고향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고향에 돌아가야 합니다. 동물들도 죽을 때가 되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태어나서 자라고 온갖 추억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고향회귀본능이 있습니다. 고향을 찿아가는 사람을 귀성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은 천국 본향을 찿아가는 나그네요, 신령한 귀성객들입니다. 그런데 고향 가는 길은 멀고 험하고 힘듭니다. 야곱은 바로왕 앞에서 자신의 지나온 날을 회고하면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 이니이다. 나의 년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을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역경과 고난과 희생의 댓가를 지불해야만 고향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본향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복은 임마누엘의 복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은혜는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천국의 상태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곳이 천국고향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본향은 죄가 없는 곳입니다. 맑고 깨끗한 영이 있는 곳입니다. 부정은 없고 긍정만 있는 곳입니다. 부정적인 사고는 없고 긍정적인 사고만 있는 곳입니다. 비관적인 행동은 없고 낙관적인 행동만 있는 곳입니다. '안된다. 못한다'는 말이 사라지고 '된다. 할 수 있다'는 말만 있는 곳입니다. 영원한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웃음이 있는 곳입니다. 웃음을 잃어버리고 기쁨을 잃어버린 얼굴과 심령과 가정은 천국을 잃어버린 지옥과 같습니다.
천국본향을 찿아 가는 영적 나그네들의 삶의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향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천국 본향을 찿아가는 순례자들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천국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만남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고향 가는 사람들은 혼자 가지 않고 가족들이 다함께 갑니다. 부모님에게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과 건강한 모습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온가족이 다같이 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천국에 가고 아들은 지옥에 가는 이산가족이 되는 이별의 아픔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모든 식구들이 우리의 영혼의 고향에 가야 합니다.
고향에 찿아 가는 사람들은 고향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고향에만 온 신경을 집중합니다. 다른 일에는 전혀 얽매이지 않습니다. 하늘본향을 향해 가는 나그네들은 세상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해 있지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세상을 넘어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사람들의 고향과 우리들의 고향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하여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적인 것에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고향을 가는 사람들은 길이 막히고 교통이 복잡해도 참고 인내하면서 갑니다.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의 고향마을이라고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끝까지 견뎌내면서 달려갑니다. 교통지옥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날씨도 상관이 없습니다. 배고픈 것도 관계없습니다. 피곤한 것도 문제 없습니다. 불평이나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고향 땅을 밟는다는 기쁨과 부모님과 친척과 옛친구들을 만난다는 즐거움이 모든 상황을 견디게 해줍니다. 비록 지금은 땅위의 삶을 살아가지만 함께 동행하는 분들과 천국에 대한 얘기도 자주 나누어야 합니다 천국에 관한 찬송도 자주 불러야 합니다. 천국의 불빛을 바라 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시련에도 결단코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어려움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는 기어코 승리하고야 마는 자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감추어진 재산이 있다. 영원한 나의 본향이 있다는 소망으로 2011년도 고향기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고 정진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65. 예수만 바라보는 성도
성경 : 히 12:2
찬송 : 94장(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 중심입니다. 우리 신앙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마음의 중심이 예수님이시고, 생각의 범위가 예수님이십니다. 행동의 기준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벗어난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믿음은 바르지 못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믿음을 가르치셨고, 믿음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믿음의 주이십니다. 우리는 과연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향해 우리가 할 일을 제시합니다. 그 제시는 신앙의 선배들이 깨달은 것이고 하나님의 원하심이기도 합니다. 우리 함께 더 자세히 살려보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치와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고 닮겠다는 기대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믿을 가졌다는 것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자기 힘과 생각으로 무엇이든지 다 될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입니다. 우리는 약하므로 죄가 많고 유혹과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을 바라봅니다. 오늘 이 시대는 험한 풍랑을 만난 배와도 같습니다. 환경이 우리를 완전하게 만족시켜 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파도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바다에 빠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행 갈 때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불뱀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목숨을 건지는 방법은 높이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놋뱀을 바라보는 자는 살았습니다. 이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살 수 있듯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인생이 되어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님의 바람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사역을 핵심적으로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시면서도 당신이 십자가를 지실 것임을 누차 강조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리 말라고 만류하자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이라고까지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십자가였습니다. 사역의 목표가 십자가였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십자가가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을 향하여 순종하였습니다. 고통이 따를 것임을 알고 있어서 회피하고 싶어도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고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당하는 수치도 견뎌내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표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은혜, 세상에서 가장 크고 고귀한 은혜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결과와 현재를 알려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밖히셨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만에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하늘로 오르신 후에는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서 세상을 다스립니다.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성도들의 믿음을 바라보며 안타까워 하시거나 기뻐하시거나 자나 깨나 성도들의 믿음이 승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꾸준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을 받는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고, 예수님께 간구할 수 있고 아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우리에게 지극한 관심, 꾸준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늘의 관심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관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 곧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가진 사람이 평안을 누릴 수 있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가정에 적용되고, 예수님이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데, 그 간구가 이 가정에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266. 사랑의 ABC
성경 : 히 13:1-2
찬송 : 218장(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릅니다. 좋아하는 것은 자연적으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의지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단발적으로 끝나는 행사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표현해야 될 의지가 필요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희생이나 수고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의지 뿐만 아니라 희생과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는 시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나 처음에는 잘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일이 맡겨지면 감사하며 귀한 것으로 알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힘이 빠지고 처음과 같은 열정도 식어갑니다. 그래서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나중까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경건한 어떤 감정이 아닙니다.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인 됨의 표시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아름다운 송가를 고전 13장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몇 마디로 말해버립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사랑의 별명은 이해"라고 했습니다. 부부간에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한 교회 교인끼리 사랑해야 합니다. 동포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시작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시작은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가 마치 예수님이라는 마음으로 섬길 때 사랑의 ABC를 아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늘의 복된 말씀을 전해 주시고,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풍성하게 먹을 것을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눠주어 누구든지 먹고 마시는 자는 생명을 얻게 하는 베푸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을 즐겼습니다. 무슨 큰 일이 생겼을 때는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 주위의 사람들을 대접하기를 좋아했고, 이웃에 어떤 사람이 이사를 오면 사귐을 갖기 위하여 떡을 해서 한 접시씩 돌려주면서 대접하기를 즐겼습니다. 아이를 낳고 백일이 되면 축하해 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해서 사람들을 초청하여 대접했습니다. 집안에 어른이 계시는 가정에서는 생신이 되면 동네 어른들을 초청하여 모시고 잔치를 벌려서 어른 대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구약 성경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의 교훈은 “남을 대접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은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무시하고, 그들을 빼놓고 잔치를 하며, 축제를 하는 경우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로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대접하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이 되려면 어떠한 동기를 가져야 할까요? 대접하기를 즐겨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내가 대접한 만큼 남이 나에게도 대접하리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대접할 줄 아는 희생적인 마음이며, 주님의 이름으로 대접하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대접은 대접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것입니다.
또한 대접하기를 즐겨하는 동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본향 집은 하늘나라이며,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들이요, 주님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순례자들이기에 서로 대접하기를 즐겨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처럼 대접하는 것을 잘 하다가 뜻밖에 천사들을 대접할 수도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대접하기를 즐겨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손님 대접하기를 힘쓸 때에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복된 소식이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우리들 속에서도 들려질 수 있어야 합니다.
고넬료의 가정이나 어느 간수의 가정처럼 대접하는 일을 하므로 그 집이 구원의 기쁜 소식에 감동되었던 것처럼 가정에 구원의 역사와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의 역사를 체험하시는 우리들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이지만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과 축복을 이웃과 어려운 자들을 위해 나눠주는 사랑을 실천할 때, 거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꽃피고 선한 사마리안의 역사가 다시금 나타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큰 기쁨의 선물을 주십니다. 날마다 날마다 내 삶의 현장이 축복받기에 합당한 현장이 되도록 말씀안에 실천하는 성도, 가정, 기업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67. 최고의 축복
성경 : 히 13:5
찬송 : 257장(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뉴욕에 살고 있는 어떤 갑부가 사업차 유럽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가 타고 가던 롤스로이스를 몰고 맨해턴 중심가의 은행에 들려서 5천불의 융자를 신청했습니다. 그러자 대출담당 은행원은 그에게 담보를 요청했고 그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자신의 롤스로이스 차키를 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차는 은행의 담보물 지하창고에 잘 보관되었습니다. 두 주간 후에 다시 돌아 온 이 갑부는 대출해 간 5천불과 이자 15불 40센트를 내 주었습니다. 이 때 은행 대출담당자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손님 죄송하지만 후에 제가 손님에 대하여 뒷조사를 해 보았는데 당신은 백만장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선생님께서는 갑자기 5천달러가 필요하셨습니까?” 그랬더니 이 갑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돈은 필요 없었지만 제가 여기 맨해턴의 중심가에서 15불40센트를 주고 나의 롤스로이스를 어디에다 안전히 주차할 수 있었겠습니까?”이 사람은 돈은 많았지만 지독한 구두쇠였습니다. 과연 구두쇠답게 싸게 주차하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많이 벌면 복을 받았다고 인정받습니다. 일부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본문은 돈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어떤 축복이 있을까요?
첫째는, 있는 바를 만족하는 축복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있는 바에서 만족할 줄 모릅니다. 욕심이 끝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있는 바를 만족하라고 권면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현실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기 때문입니다. 불평과 원망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축복을 주셨습니다. 오늘까지 우리가 살아있는 축복,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있는 바를 만족하는 사람은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돈을 사랑한다하면 오직 돈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입니다. 인간관계도, 미래도, 배려도 사랑도 아무 것도 아니고 돈이 최고입니다. 돈이 많으면 좋기는 하지만 이렇게 살면 진정한 부자가 되지 못합니다. 진정한 부자는 자신의 재능과 환경에 대하여 만족하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결국에는 돈도 더 많이 법니다. 왜냐하면 주변에서 도와주고, 더 많은 나눔을 위해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는 축복입니다. 남가주 대학에서 사랑학을 가르치던 레오 버스카글리아 교수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할아버지 한분이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계셔서 주변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 자체를 거부하고 계셨답니다. 상담자의 노력도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가족들의 노력도 별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린 소년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와서는 할아버지의 병세는 급격하게 호전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어린 소년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너, 도대체 할아버지 만나서 무슨 일을 했니?” 소년의 대답은 뜻 밖에 “아무 일도 안했어요. 할아버지를 붙들고 울었어요!”하더랍니다. 이웃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너, 어떻게 할아버지 붙들고 울 생각을 했니” 소년은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와 저는 친구이거든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실수를 했든지, 재능과 능력이 부족하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고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받는 축복 중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축복입니다. 임마누엘의 축복이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다 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욕심대로는 다 안 됩니다. 우리가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만족시켜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것이 우리를 만족시키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방법이 예수님을 보내신 방법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가르쳐주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양한 방법이 적용되는 대상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대로 만족할 줄 알고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68. 인애의 공장인 시련
성경 : 약 1:2-4
찬송 : 342장(너 시험을 당해)
사람들은 ‘시험’이란 말의 뜻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험’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헬라어에는 ‘시험’이란 말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도키마죠’ :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상을 받게 하기 위해서, 더욱 좋게 하기 위하여, 좋다는 자격을 증명하고 인정받게 하기 위해 하시는 시험입니다.
2) ‘페이라죠’ : 이는 마귀가 갖다 주는 시험으로 시련과 고난과 환난을 가져오는 시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우리를 ‘도키마죠’의 시험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도적질하고․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하여 시련에 빠지고․고난을 당하고․절망에 처하도록 ‘페이라죠’의 시험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페이라죠’의 시험에 걸려 들어가는 원인은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함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점차 식어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페이라죠’의 시험 속으로 휘몰아 넣습니다. 성경 약 1:14-15을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욕심이 잉태되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기 전에 우리에게 시험을 주셔서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회개하도록 하심으로 사망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이 시험은 결과적으로 내게 유익을 준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시험을 통해서 인내가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인내는 아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연단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고난 중에도 소망을 가지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 71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변화되었다" 는 간증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왜 내게만 이런 어려운 일을 주시는가?" 하면서 하나님 향하여 원망한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게 된다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넘어지게 됩니다. 그럴때 주어진 고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도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내 삶에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은 선하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올바른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섬긴다면 우리 모두가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주님께서는 고난을 잘 참고 믿음으로 견디었기 때문에, 그 고난으로 인해 눈물로 지샌 날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직접 닦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잘하였다 충성된 종아!" 하시면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12절, 계2:10). 우리가 고난 가운데 살아간다 하더라도 원망하고 불평하지 맙시다. 믿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이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과정으로 믿고 나아갑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여러분의 삶 속에 큰 보상과 축복을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고난이 주어질 때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의뢰해야 할 지를 이 말씀을 통하여 마음속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시험을 극복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으로 무장하면 어떠한 시험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안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굳건한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만이 우리의 승리의 히든카드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승리할 수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다가오면 불평과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도 찬양하며 주님 영광 돌릴 때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 기적이 나타났던 것처럼 우리의 삶가 운데 시험을 만나도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주안에서 여러 시험을 만나면 드디어 나에게도 인내의 공장이 새로 생겼다고 믿고 거뜬히 이겨 축복의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69. 지혜를 구하는 성도
성경 : 약 1:5
찬송 : 292장(주 없이 살 수 없네)
예수님은 성도들을 향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10:16). 우리의 생각음 매우 지혜롭지만 그 지혜를 사용하는 우리의 마음을 순수해야 합니다. 생각은 냉철하게 하지만, 마음을 따뜻해야 합니다. 진짜 지혜는 생각과 마음의 균형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런 균형은 세상에서도 성공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입니다. 생각이 바르고, 마음이 순수하면 따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도 힘들과 어렵고 소외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따뜻하게 감싸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되, 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며 사는 성도로, 또한 믿음을 지키며 사는 성도의 지혜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주의 성도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듣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혹은 신앙생활 중에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족함을 채우기 원하지만 채워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많이 가진 것 같은데, 자기는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우울해집니다. 그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열등감은 부족함을 채우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열등감은 도피하려고 하고, 포기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족함을 채우려면 보통 사람은 욕심을 부려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께 구하려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신앙인에게 남이 갖지 못한 것을 주셨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께 구하면 들어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데 사용하지 않고, 묵혀 두기만 하실 것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간구하는 믿음을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사용합니까? 기도로 사용합니다. 믿음으로 사용합니다. 용기 있게 사용하십시오. 주님은 믿고 구하는 자에게 이루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구할 것을 가르칩니다.
첫째는, 우리 지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하면 구해야 합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열등감을 가지라는 표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겸손하라는 표시입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지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라는 표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죄악은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판단이나 결정을 실수를 반복합니다. 실패의 길로 갑니다. 죄인이 인간이 부족한 것이 당연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인가 부족한 상태에 있습니다. 주님 앞에 부족함이라도 솔직하게 드러내십시오. 자신의 부족한 상태를 알면 하나님 앞에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겸손히 구합니다. 하나님께는 풍성하다는 것을 알고 구합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채우시며, 온전함으로 이루실 것을 믿고 구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 가장 좋은 구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받았습니다(왕상 3:12~13). 지혜의 왕이라 일컬음을 받고 유대 역사상 가장 찬란한 왕국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후히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족하다고 꾸짖지 아니하십니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은 성적이 나쁜 학생을 꾸짖습니다. 아마도 노력하지 않았다고 꾸짖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을 꾸짖는다면 아이가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꾸짖지 않으십니다(히 4:15). 오히려 따뜻한 위로를 주십니다. 잘 구했다고 칭찬하십니다. 그러므로 당당히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셋째로, 하나님은 구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채워 주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실 것입니다(마 6:33). 주님께 구하십시오. 주님이 구하는 사람에게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의 약속은 확실합니다. 주님의 약속은 진리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분명합니다. 주님은 구하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신구약 속에 이 약속이 너무 많습니다. 이 약속이 왜 많습니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 계속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할 만큼 주시지 않습니다. 넘치도록 주십니다. 사람들이 가져야 할 것이 넘치면 부족함보다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넘치면 넘칠수록 좋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주의 은혜를 누리십시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성도들에게 이처럼 구하여 맏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70. 시험 후에 얻는 복
성경 : 약 1:12
찬송 : 337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시작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은 인내함으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혼한 부부는 상호간에 사랑을 요구합니다. 사랑이 넘칠 때 충만한 가정은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그래서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부부가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느껴지는 어려움을 서로가 사랑으로 참고 견디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특별히 보호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부러을 것이 없다고합니다. 주님은 시험 당하는 자를 유심히 지켜보시고 그가 그시 험에서 승리했을 때 현재의 축복은 물론 장차받을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약속은 너무나 잘 깨뜨려지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일점일획도 가감없이 반드시 이루어질뿐만 아니라 변치않는 약속이 되어 장차 받을 상급과 생명의 면류관으로 되돌아 옵니다. 면류관은 로마 시대 때 우승한 자에게 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은 영원히 시들지 않고 쇠하지도 않고 썩지 않는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조건은 딱 한 가지입니다. 시험을 참고 견디는 자가 되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위에서 힘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소망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천국 백성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상급을 주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굳게 믿기에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나갈 수 있는 것이고 반드시 그러한 축복을 받아 누리리라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때로는 고난을 보내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을 주지 않아 ‘주께서 나를 버리셨는가’라고 생각될 만큼 고난을 보내실 때가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이 집사님이 나이 먹어 어렵게 3대 독자를 낳았습니다.
금지옥엽으로 그 아들을 키웠지만 아들은 만성 신장염에 걸려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아들의 혈액형과 조직의 조건이 같아서 신장이식 수술을 했지만 수술 결과가 나빴습니다. 병원에서는 회복시킬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집사님은 이 고통을 이기기 위해 더욱더 열심히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감사가 넘치는 믿음의 기도는 아들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러나 병약한 아들은 좌절감과 열등감 속에서 자살하려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습니다. 다행히도 소나무 가지에 걸려서 죽음을 면했지만 아들은 “죽어야 할 사람인데 왜 살렸냐?”고 원망을 했습니다. 집사님은 아들로 인한 깊은 고민 속에서 어느 수요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죽어 가는 아들을 사랑하고 보니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너무도 깊숙이 실감되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는데 세밀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김 집사! 너는 입신출세해서 부모에게 효도했다고 생각하느냐. 진짜 효자는 네 아들이다. 네 아들이 아니었다면 네가 예수를 믿었겠느냐. 이런 큰 신앙까지 올라왔겠느냐. 그 자식은 짐이 아니라 십자가를 진 것이다”김 집사는 아들로 인한 이 무서운 시련이 아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박국 2장 3절 말씀에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체되는 것은 거절이 아닙니다. 이미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하시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곧, 응답을 주시는 때가 있고, 기도의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때가 있으며, 하나님이 결정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늦어질 때에 실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결코 조급해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반드시 무슨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잘못된 동기로 구하거나 내게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더 성숙해지시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인격이 더 자라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굴다가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역사적인 분쟁의 씨앗을 이스라엘과 아랍 민족에게 남겨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참고 견디는 연단을 받은 후에 이 땅과 하늘에서 귀한 것을 모두 얻게 되는 하나님의 축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견디고 참은 만큼 연단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면 하늘의 영원한 것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지켜질 약속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같이 약한 존재, 불안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신실하신 분이고 온전하신 분이고 확실한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믿고 구하십시오. 축복의 대상은 바로 성도님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271. 위로부터 오는 지혜
성경 : 약 1:17
찬송 : 370장(주 안에 있는 나에게)
거의 모든 사람이 선물을 좋아합니다.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선물은 받는 이도 기쁘고 주는 이도 기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선물은 너무 커서 우리가 갚을 수도 없고 감당하기도 벅찬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이 선물을 공짜로 주셨습니다. 무엇을 잘 해서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못나고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그냥 주신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선물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기만 하면, 받기만 하면 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서점에 나가면 처세술에 관련된 책들이 많습니다. 과거에는 직장과 사회생활에 관련된 책들이 많았습니다. 점점 마케팅에 관련된 책, 상대방에 관한 심리적인 상태를 파악하는 책이 나옵니다. 요즘에는 가정과 가족 문제에 관련된 책도 나옵니다. 그만큼 사회가 발전하고 사람들의 요구도 다양합니다. 사람들의 요구를 채우기 위해 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책들이 많이 팔려도 성경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요구에 따른 책이 나오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요구를 담은 책입니다. 사람들의 요구가 바뀌면 그에 따른 책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요구는 영원하므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영원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에 대하여 더 자세히 배워보겠습니다.
첫째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등 우리에게 필요한 일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위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은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재능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것도 하나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주시고, 서로 조합하여 하나의 능력으로 나타나도록 복합은사를 부십니다. 그리고 그 은사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되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은사들을 주시는 데, 그 은사들이 모두 온전한 은사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 모든 것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서로 내려옵니다. 은사와 재능과 선물을 주시는 분은 모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위에 게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빛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빛이 우리를 비춥니다. 하나님이 우주의 빛을 창조하셔서 움직이시고 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빛을 알리셨습니다. 그 빛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보내신 분이 또 다른 은사도 후히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빛의 주님이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은혜와 재능과 은사와 각양 선물을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셋째는,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우리에게 은사와 재능과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한결같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영원토록 사랑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꾸중하신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림자만 나타나셔서 우리를 돌보시는 척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보이시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어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다 말씀하시고, 우리의 아픔을 들으시고 아파하시며, 기쁨을 들으시고 즐거워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깊깊이 사랑하십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사랑하는 성도와 교회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선물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선물, 위로부터 오는 각양 은사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고제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72. 하나님과 가까운 성도
성경 : 약 4:8
찬송 : 338장(내 주를 가까이)
사람은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친구의 성격, 성품, 성향 등을 살펴보면 그와 함께 하는 이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말처럼 가까이 하는 것에 동요되기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세상 쾌락을 가까이 하는 자는 세상 쾌락에 물들여 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도박하는 친구가 있다면 도박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공부하는 친구를 가까이 하다 보면 공부하는 습성이 길러지게 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삶이란 항상 주와 함께 있는 삶입니다(살전 4:17). 세상에서도 좋은 사람 가까이 하면 나도 좋아집니다. 은혜 충만히 받은 사람 가까이 하면 나도 은혜 받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 가까이 하면 나도 타락케 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사는 것이 최대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어떤 복을 받게 될까요?
첫째. 영혼이 잘되는 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라 하셨습니다. 빛 있는데로 가까이 나가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의 빛이 임하게 됩니다. 에녹이 이런 축복을 받았습니다. 바울도 고넬료도 사도 요한도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환상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였음으로 남의 잃은 꿈도 찾아 줄 수 있을 만큼 큰 영적인 능력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병고침의 복을 받습니다(약 5:15). 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을 깨끗이 고침 받았고(왕하 5:14),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옷가를 만진 여인은 열두 해를 혈루중으로 고생하던 병을 깨끗이 고침 받았습니다. 주님 가까이 하면 병 고침의 복을 받습니다.
셋째. 물질 축복을 받게 됩니다(말 3:10 ; 신 28:1-14). 성도님들 노아는 하나님 가까이 하고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되었습니다. 헌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성도는 물질의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만 할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큰 축복과 행운이 다시없을 것입니다. 말세 성도 준비 바로 하고 이생과 내세간에도 완벽한 축복을 받는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을까요?
1. 손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는 말씀은 세속 행위를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괴거를 도려내라는 것입니다. 죄를지었다면 울며 회개하면서 돌아온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와의 옛날 관계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중에 회개와 용서의 복음이 제일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회개용서 화해의 복음입니다. 손을 깨끗이 하는 것 그것이 성도와 교회 그리고 나라와 인류의 소망입니다. 에스겔 8:31-32절에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외출 후에 손을 씻듯이 날마다 회개의 눈물로 참회하여 영혼을 깨끗이 하고 행위를 고치고 큰 은혜를받을 줄 믿습니다.
2)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두 마음은 겉으로는 여전히 여호와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중심에는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없고 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증거가 없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거짓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외에 세상적인 것을 더 의지하며 세상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거짓된 마음이고 두 마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짓된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갈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마음 한쪽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또 다른 마음 한쪽으로는 우상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다고 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자신의 영광의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고 신앙생활해도 무방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의 지금 생각이, 나의 지금 말이, 나의 지금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인가? 나와 세상을 기쁘게하는 것인가의 원칙을 세워 하나님 가까이 살아가는아름다운 영혼으로 2011년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73. 주 앞에서 낮추는 성도
성경 : 약 4:10
찬송 : 378장 (내 선한 목자)
2005년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황정민이라는 배우가 있습니다. 이 배우가 상을 받을 때 “60여명의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저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됐다”고 겸손한 소감을 밝혀 크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겸손함은 인정을 받는 방법입니다. 존경을 받는 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면 존경을 받습니다. 분명히 훌륭한 면이 있고, 탁월한 성과를 이루었는데 그 이유를 자기의 능력이 아닌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면 더 존경과 칭찬을 받습니다. 영화배우들이나 스포츠 선수들이나 모두 겸손하면 칭찬을 받습니다. 승리의 공을 동료선수들에게 돌리는 스포츠 선수들을 팬들로부터도 칭찬을 받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야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둥, 자기를 하나님처럼 떠받들어야 한다는 둥, 자기생각이 항상 옳고, 자기 말이 곧 법이라는 둥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내가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어떤 일을 이루었으면 그 일의 이면에서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성도들에게 겸손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그 말씀을 보면서 더 많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주 앞에서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서 삽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을 모두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의 오류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된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나의 생각과 마음의 미래가 어떻게 진행될 지도 알고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른 말씀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실 뿐입니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둘째는, 낮추라고 권면합니다. 낮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상대에게 우선권을 양보하고, 상대를 나보다 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은혜이고, 은혜를 더 많이 누리를 길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낮추라고 권면합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능력이 생기면 자신을 높이려 듭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하는 것이 많아지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식견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가 하나님도 다 이해하는 듯이 말하는 철학자들도 있습니다. 지성인이라면서 하나님의 존재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인격성을 왜곡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성을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사람의 관점에서 사람이 만든 관념 정도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빨리 말씀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언행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일들입니다. 많이 배울수록, 생각이 깊어질수록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높여주실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주님이 높여주실 것이라 약속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에서도 주님이 높이실 것이라 약속합니다. 세상에서는 자기가 자기를 높여야 높여진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마케팅과 홍보는 자기 상품을 높이는 일입니다. 자기 인격과 인품을 높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높여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겸손함을 보고 높여줄 때 진정한 높임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때 진정한 높임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을 낮추시고, 오히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을 높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역설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에서도 자기를 지나치게 높이면 오히려 낮아집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실 것을 기대하고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추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낮춥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면 높여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심으로 우리에게 형통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높이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앞에서 누리가 낮아질 때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실 겁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74. 금보다 귀한 믿음의 성도
성경 : 벧전 1:7
찬송 :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연단”이라는 말은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두드려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광산에서 캐어낸 광물질이 연단을 받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연단을 받고 나야 쓸모 있는 재료가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단을 받지 않은 자들은 인간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연단을 받은 자들은 어디에 가도 요긴하게 씌워질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단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크게, 아름답게, 그리고 요긴하게 씌워 집니다. 서양 속담 중에 "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냇물의 아름다운 소리는 곳곳에 박혀 물의 흐름을 방해하던 돌들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역경과 고난이라는 돌이 없다면 아름다운 감사의 찬양과 기쁨도 없습니다.
한 병사가 사막에서 생활하는 어느 수도사를 찾아가 하나님이 자신의 회개를 받아 주실지 물었습니다. 수도사는 그에게 많은 것을 설명한 후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친구여, 자네는 옷이찢어졌을 때 그것을 버리는가?”그 병사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을 다시 수선해서 입습니다.” 그러자 늙은 수도사가 그에게 반문했습니다. “자네가 옷에도 그렇게 신경을 쓰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겠는가?” 돈이 찢어지면 그냥 버립니까? 찢어진 부분을 붙여 다시 사용합니다. 이것은 돈의 가치 때문입니다. 가치 없는 것은 버리고도 아쉬움이 없지만 가치 있는 것은 버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서 다시 씁니다. 우리는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실패할 때마다 회복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쓰십니다. 성경은 “감당치 못할 시험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주신다”"(고전10:13)고 하셨습니다. 희망을 놓지만 않으면 또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연단후에 받는 축복은 실로 엄청납니다. 연단이 지난 후 받는 축복이 진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주는 조개 속에서 생성됩니다. 어느 날 조개 속에 바다 모래알이 떨어져 상처를 만듭니다. 그러면 이것을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조개의 속살은 단단한 피막을 형성합니다. 결국 그 모래알을 밖으로 밀어내지 못하고 그 쓰라린 상처를 자신의 진액으로 품어 버립니다. 아프고 고통스런 상처를 수십 년에 걸쳐 품느라 조개는 힘을 다해 자신의 진액을 뿜어 댑니다. 그 조개의 상처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진주가 만들어집니다.오늘날 우리에게도 진주 같은 믿음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주 같은 예수를 모신 비밀이 있는 믿음은 그냥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은 대부분 환난이나 역경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폭풍우가 당신과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계속하여 내리칠 때,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계속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줄까요? 그것은 당신이 가진 적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아주 작고도 작은 조그만 부분입니다. 그것은 당신 안에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적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는 단지 적은 믿음을 가지고서 그처럼 엄청난 일을 했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 믿음조차도 의심과 섞여 있었던 믿음이란 사실을, 이처럼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을 받으셔서 그것으로써 이적을 행하시는 아주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환난이라는 모래알은 때때로 우리의 삶에 튀어 들어와 우리 인생에 큰 상처를 줍니다. 그 큰 상처는 우리 인생을 얼마나 쓰라리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환난의 모래알을 물리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온갖 진액을 쏟으면서 절규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그 상처를 품기 시작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 상처 속에서 진주같이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궁금해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누리는 행복은 진정 극치의 행복입니다. 이 행복에는 적어도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니 그것으로 인하여 행복한 것입니다. 이 큰 행복이 있기 때문에 모든 고난과 역경을 다 이길 수가 있고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주보다 더 귀한 예수님을 알게 된 감사의 마음으로 자기의 상처를 품고 보듬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진주 같은 믿음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 소망과 산 기업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가장 행복하고, 복되며, 가장 영광스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75. 믿음으로 기쁨을 누리는 성도
성경 : 벧전 1:8-9
찬송 : 563장(예수 사랑하심은)
어떤 사람들은 들은 것을 솔깃하게 반응합니다. 이런 사람은 신기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해 주면 잘 따라 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신기한 이야기가 있으면 그런 게 어디 있나며, 직접 봤냐며 캐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눈으로 봤다고 어떻게 다 믿느냐며 손으로 만져봐야 믿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청각에 의해 반응하는 사람, 시각에 의해 반응하는 사람, 촉각에 의해 반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은 어떤 감각에 반응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 손으로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보아야 하고, 못 자국이 난 예수님의 손바닥을 만져보아야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과 도마가 함께 있는 자리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손을 내어 옆구리와 손바닥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오늘 사도 베드로가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칭찬을 합니다. 칭찬의 내용을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었길래 예수님이 칭찬하실까요? 그 믿음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본문을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는데도 믿었으므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들을 쓴 사람 베드로는 예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함께 삼년을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목양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듣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한 분, 우리의 구주가 되신 분이라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을 그대로 알아듣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칭찬받을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칭찬받는 일입니다.
둘째는, 영광의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에 대하여 칭찬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로 올려주심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세상의 영광만을 사모하는 것에서 초월하여 하늘나라 영광을 사모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살아가는 목적과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즐거워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과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표시가 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칭찬하실만한 믿음과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도 칭찬하실 만한 믿음과 영광을 기다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셨을까요? 흔쾌하게 “네” 라고 대답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책감이 생길 수 있으나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시기 보다는 더 잘 할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칭찬하고 싶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셋째는, 우리가 영광의 즐거움을 갖는 이유가 영혼의 구원이기 때문에 칭찬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즐거워하는 이유가 사업에 성공해서,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여서, 결혼을 하기 때문에, 멋진 집을 샀기 때문에 등입니다. 이런 이유도 즐거움의 요건이긴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즐거움의 조건을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셨다고 하지만 그 믿음도 내가 잘 해서 가진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위하여 믿음까지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고 싶으신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는 모두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눈으로 본 바도 없고, 손으로 만진 바도 없는데 믿음을 갖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음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 할지라도 먼저 구원받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약속되었다는 것 때문에 말할 수 없이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것을 칭찬합니다. 물론 예수님도 칭찬합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가정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처럼 칭찬받는 믿음이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76.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
성경 : 벧전 1:22
찬송 : 311장(내 너를 위하여)
유행가 가사 중에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 이라서…”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사랑해선 안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 중심의 사랑이 되다 보니, 자기를 버리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흔히 교훈으로 듣는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은 나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것이 인간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이 사랑이란 미명 아래 무슨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자기를 기준으로 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자기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된 것으로써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 12그루의 나무를 심었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다 예수님의 12제자의 이름을 붙여주었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유다 이렇게 12사람의 이름을 붙여주고 늘 나무를 관리했습니다. 베드로 등 11나무에게는 물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럭 무럭 자라거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렇게 관리하고, 가룟유다나무는 "는 저주 받을 이름이다. 말라 죽어버려라" 했답니다. 얼마나 지났을 때 이상한 것은 이 가룟유다나무는 말라 죽어버렸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와 후서의 경우를 보면 당시 기독교인들이 많은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박해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를 주고, 소망을 주어서 믿음을 복돋아 주기 위해서 기록한 성경이 베드로전서와 후서입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하면서 가장 절정에 달하고 있을 때 쓴 편지가 이것입니다.
1. 왜 사랑하라고 했을까요?
밖에서 밀려오는 거센 박해 그 힘센 세력과 맞서다 보니까 모두가 다 긴장하고, 공포심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긴장과 공포심이 오래 지속된다면, 아무리 믿음 있는 사람도 정신적인 여유가 없어지고, 불안과 초조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편엽해져서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마음이 굳어지는 경직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온갖 고통을 겪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며 살아야지만 난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위로를 받고 어디서 위로를 찾아야 하는가?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곁에는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5절에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허물이 많아서 이 때문에 주님을 죽게 했지만 주님 때문에 다시 산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2. 어떤 종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 우리가 사랑해야 될 사람의 그 모델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사랑도 첫술에 배가 부르길 바랄 수는 없습니다.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다리고 다시 기다리는 것! 그러다 그 기다림마저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의 열매도 기다림 끝에 열립니다. 조급하거나 성급하면 열매가 채 익기 전에 떨어집니다. 사랑은 무한한 기다림입니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사랑을 시작할 때 기다릴 줄 모르면, 나중에 더 많이 기다려야 합니다.
3. 어떻게 사랑을 나누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은 너희는 이렇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1) 거짓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참 사랑은 거짓이 없습니다. 사랑은 정직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2)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입술로만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마음이 닫혀 있으면 참 사랑이 아닙니다. 3)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긴장감을 가지고 열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뜨거워야 하는데 뜨겁다가도 금방 식어버리는 것이 아닌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 뜨거운 사랑입니다. 4) 피차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먼저 택하셨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마땅히 해야 될 필수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내 성격에 결함이 있다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사랑을 힘입어서 잘못된 성격을 성령 충만으로 변형시켜야 합니다. 이런 사랑을 회복해서 2011년에는 우리 가정과 이 사회와 교회에 사랑의 물결이 파도치는 아름다운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77. 주안에서 자라나는
성경 : 벧전 2:2-3
찬송 : 250장(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신앙인들은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깁니다. 상장과 성숙의 한계와 끝이 사람의 차원에는 없습니다. 그 한계와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멈춥니다. 성장과 성숙의 한계와 끝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라되 하나님에게까지 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데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에 따라서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랄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깁니다. 자라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일, 자라는 과정에서 고통을 당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의 신앙 성장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막으려고 하는 것 같으나 막자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성장을 이끌어가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라게 하시는 축복을 믿고 하나님의 자라게 하심을 따라 자라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의 신앙 성장에 대하여 권면합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도 신앙성장에 대해 알게 됩니다. 본문의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으로 자라납니다. 본문의 신령한 젖은 우리에게 영적 영양을 공급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받는 은혜의 힘이야말로 우리들을 자라게 하는 영적 에너지이고 영양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진실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질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사랑의 감화를 불러일으키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한층 성숙해져 감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발견하게 하는 힘도 주셨습니다.
둘째로, 갓난아이들 같이 성장의 속도가 빠릅니다. 베드로는 갓난아이들과 같이 사모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태어난 지 불과 몇 분이 흐르지 않았는데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 아이는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는데 힘차게 어머니의 젖을 빱니다. 이것은 마치 교회의 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풍부하게 섭취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쑥쑥 자라는 것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어머니의 품에서 젖을 물고 있는 아이에게는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갓난아이의 모습을 끊임없이 성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을 다해 절실히 사모하는 성도의 모습에 비유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갓난아이와 같이 말씀을 사모할 때, 형제의 허물을 품을 수 있는 사랑의 힘을 받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형제를 용서할 때, 우리 자신의 위대함이 아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영적 성숙의 길을 제시합니다. 본문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한다고 권합니다. 또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권합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는 말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란다는 말은 믿음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계속 맛보아야 합니다. 젖을 한 번 먹는 것으로 아이가 다 자라지 않습니다. 꾸준히 먹어야 합니다. 젖만 먹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도 함께 먹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일고 듣고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도 함께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늘 기억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점점 자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교회를 섬기는 일,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 불의한 사람의 일을 중단하는 일, 선한 일을 하는 일,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행하는 일 등이 계속하여 생겨납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우리 가정과 성도들과 교회에 하나님께서 믿음을 자라게 하시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해 주시고 또 우리들에게 점점 자라나기를 원합니다. 구원받은 믿음이 다른 사람의 구원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으로 구원받도록 힘쓰는 믿음으로 자라가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받으며 신령한 지식으로 그리고 은혜로 자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첫댓글 감사합니다.
구구절 귀한 말씀에 은혜받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