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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비열전을 먼저 읽어두는 것이 추모경을 읽어나아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 듯하여
제실의 혼맥관계 등의 뒷얘기들인 후비열전을 이쯤에서 게재합니다.
우리들의 고대사에서 지워진 부분들을 되살리는데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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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芻牟鏡><后妃列傳> <추모경><후비열전>
<德皇><禾>太后는<漱帝>之母요<禾相>之姑라.<德皇>이太仁하사仙人「愛鍾之禍」를遭하니,后이<法皇>으로與해<愛鍾>을捕斬하여社稷을扶하고,<法皇>을立한後에二世后가為사<漱帝>를皇太子로하시고,<禾相>에게軍政을委하사國基를安定히하시고,執政한지十八年에崩하시니春秋四十五일러라.<德皇>의子<漱帝>와女<鼋>을生하니,<鼋>은「黃竜侯」<羊山>之妃라.<法皇>의女<龜>・<鼇>・<鼊>・<鼂>・<鼈>主等과子<角>公이有하더라.
<덕황><화>태후는 <수제> 모친이요 <화상>의 고모라. <덕황>이 크게 어지시어 선인 「애종의 화」를 당하셨더니, 후가 <법황>으로 더불어서 <애종>을 잡아 참하여 사직을 지탱하시고, <법황>을 세운{BCE111} 후에 2세후가 되사 <수제>를 황태자로 삼으시고 <화상>에게 군정을 위임하사 국기를 안정하시고, 집정하신지 열여덟 해{彊圉淵黙,丁亥,BCE94}에 죽으시니 춘추 마흔 다섯일러라{BCE138生}. <덕황>의 아들 <수제>와 딸 <원>을 낳으셨으니, <원>은 「황룡후」<양산>의 비라. <법황{재위BCE111-76}>의 딸 <구>・<오>・<벽>・<조>・<별>공주 등과 아들 <각>공이 있으셨더라.
<漱皇><羊>皇后,諱는<聖>이니「黃竜侯」<羊川>之女라.聖德이有하사,<漱皇>이愛敬하고大政을問하여補益이多하더라.長女<觧凰>은「順奴侯」<奧川>之妃오,次女<鸞>은初嫁于<禾相>之子<頼>하여生子<羊吉>하고生女<禾岑>而改嫁于<羊福>하고,三女<禽>은為<胡>王<虛閭>之妻하여生子<狦>하고,長子曰<存>이니序居四하고(BCE94生),四女<駾>・次子<驄>・五女<華>・三子<德>・六女<骨>等이有하며,兄<羊山>의女를納하여副后를作하여後에政을委하고閑居하다가,乙卯春(BCE66)에崩하시니春秋五十三이라.<不而城>後<德皇>陵側에葬하였더니四國乱에賊의發하여所이為니라.
<모수황><양>황후, 휘는 <성聖>이시니, <황룡>후 <양천>의 딸이시라. 성덕이 있으시어, <수황>께서 아끼며 공경하시고 큰 정사를 물으셨음에 돕고 이롭게 하심이 많으셨더라. 장녀 <해황>은 <순노>후 <오천>의 비요, 차녀 <란>은 애초에 <화상>의 아들 <뢰>에게 출가하여 아들 <양길>을 낳고 딸 <화잠>을 낳았으며 <양복>에게 재가하였고, 셋째 딸 <금>은 <호>왕 <허려권거>의 처가 되어 아들 <산(계후산,호한야)>을 낳았고, 장자는 <해존(BCE94生)>이니 넷째이며, 넷째 딸 <태>, 차자 <총>, 다섯째 딸 <화>, 셋째 아들 <덕>, 여섯째 딸 <골> 등이 있었으며, 오빠 <양산>의 딸을 거두어 부후로 삼아놓으신 후에 정사를 위임하고 휴거하시다가 을묘년(BCE66) 봄에 죽으시니, 춘추 쉰셋이라(BCE118生). <불이성> 뒤의 <덕황>릉 곁에 장사하였더니 4국의 난리에 도적들에게 파헤쳐졌더라.
<芳>皇后는<羊山>之女이니,其母는<鼋>이라.十五에<漱皇>의副后가為여姑<羊>皇后로與해逮夕專房하더니,十九에女<晨>을生하고,二十二에女<晃>을生하고,二十五에<溫>公을生하고,二十八에女<星>을生하니,時에<佗利>이作乱하여后妃가被辱者이多호대后獨自貞이라니.<旺弗>의乱을遭하여兄<羊福>의救護로親家에敀하여母主<鼋>妃로與해<檀澤>에逍遙하더니,<羊福>의義子<羊吉>이后의美皃를愛하여累次桃情할새,后이義로써拒絶하였더니,<吉>이深夜에后의寢中에侵入하여后를抱하니,后이倉卒에身을收拾이미不能하여被汚하고號泣하니,<鼋>妃撫慰曰"<吉>이年少好色하여不省人事故로吾亦袴汚요,渠母亦然했다.况汝福盡之,天乎야.外人이聞之면不利于囯하리오隱忍自重이라."后乃聽其母之言하고不敢聲言이라니,<吉>이夜夜来濡하여遂娠其子라.
<방>황후는 <양산>의 딸이시니, 그 어미는 <원(모수제누이)>이라. 열다섯에 <수황>의 부후가 되시어 잠시 <양>황후와 함께 밤을 번갈아서 방사를 도맡더니, 열아홉에 딸 <신>을 낳고, 스물둘에 딸 <황>을 낳고, 스물다섯에 <온>공을 낳고, 스물여덟에 딸 <성星>을 낳았더니. 이 시절, <타리>가 난리를 일으켜 후비들이 욕을 당함이 많았으되 후 혼자만이 스스로 정절을 지켰으며, <왕불>의 난리를 당하여 오빠 <양복>의 도움으로 친정으로 돌아가서, 어미인 공주 <원>비와 더불어 <단택>을 소요하였더니, <양복>의 양아들 <양길>이 후의 미모를 애모하여 누차 겁탈하려 하매, 후가 의로써 거절하였더니, <양길>이 심야에 후의 침소로 침입하여 후를 껴안았고, 후는 창졸간이라 몸을 수습함이 불능이어 욕을 당하여 소리 내어 울었더니, <원>비가 위무하면서 “<양길>이 나이도 어린 것이 호색하여 인사불성인고로 나 또한 욕을 당하였고, 그 어미 또한 그랬다. 하물며 너는 복이 다하였음이니, 하늘인들 어찌하겠느냐? 바깥사람들이 알게 되면 나라에 이롭지 않을 것이다. 은인자중할 것이니라."라 일렀더니, 후는 이에 어미의 말을 좇아 감히 말을 꺼내지 않았더니, <양길>이 밤마다 찾아와서 은혜를 입었고, 마침내 그의 아들을 가지게 되었더라.
未幾에<漱皇>이亦至<黃竜>하여見后之臨朔하고問其誰子라니.以實告之라니,<漱皇>이喜曰"非<佗>非<旺>이오惟<吉>之子야.<吉>是吾孫이니何嫌之有리오."后亦此言을聞하고比前安心하여顔色이稍佳하고<吉>이依旧来濡호대帝亦不問어니,未幾에<羊福>이卒하고,<吉>이代立하매后를請하여正妻로하려할새,<漱皇>이不許曰"吾之正妻가為汝正妻則人必笑之하리라.烝之濡之는在女所好이니吾不問焉하리라."<吉>이不聽하고遂以后로為其正妃하여謁於其母<鸞>.<鸞>이於<漱>에는為母요於<吉>에는為子라,把后之手曰"子可以為母,而母可以子歟라.婦人之命이如是﨑嶇라하고相抱而泣이러라."
얼마 아니 되어서 <수황>께서 또한 <황룡>에 다다라 후가 만삭임을 보시고는 누구의 자식이냐를 묻기에 이실직고하였더니, <수황>이 기뻐하시며 “<타리>도 아니고 <왕불>도 아니면, 오로지 <양길>의 자식이로구나. <양길>은 내 손자이니, 어찌 부끄러울 일이겠느냐."라 이르셨더니, 후 또한 이 말씀을 들고 이전보다는 안심하여 안색이 조금씩 예뻐졌다. <양길>이 이전처럼 찾아와서 은혜를 입어도 제 또한 따지지 않으셨고, 얼마 되지 않아서 <양복>이 죽고, <양길>이 대신하여 보위에 오르매 후를 정처로 하겠다고 청할 새, <수황>께서 불허하시며 “내 정처가 너의 정처가 되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다. 위로 붙어서 은혜를 입는 것은 네가 좋아함이니, 내가 따지지 않겠노라."라고 이르셨다. 이에 <양길>이 듣지 않고, 이윽고 후를 자신의 정처로 삼아서 제 어미 <란>을 배알하였다. <란>공주는, <수제>에게는 어미가 되고 <양길>에겐 자식이 되어버린지라, 후의 손을 잡고서 이르길 “자식이 어미를 그리했다고 하여서 어미도 그리할 수야 있겠느냐! 여인들의 운명이 기구하기가 이러하구나."라 하고는 부둥켜안고 울뿐이었더라.
<漱皇>이自後로后와訣別하여咫尺이千里라.<吉>이后手를携하고池畔에逍遙할새帝가樓上에서望見하고<池畔의歌>를作하니,后가聞하고<籠禽의曲>을和上했더니,<吉>이怒하여<漱皇>을<獸林>溫宮에移하고后의心을悅히하려努力苦心하여起居欲食을窮奢極侈하여日로数千錢을費하고金玉釧佩를各種으로造作하여后의翟服을鮮麗히하나后이喜色을不形이라<吉>이方士等을召하여悅后의計를究하매各色悅房之材와助氣旺陽之飮을日服하여后의一笑를見하면<吉>이喜不自勝하니,后이帝를哀하며<吉>을哀하여両情之間에苦悶하다가井에墮하여崩하니春秋三十二라.<吉>이哀慟하여尸를抱하고三日을臥하다가皮를取하여衣하고頭를乾製하여臥室에置하고骨은玉函에盛하여溺池를作하고肉腸을脯塩하며便尿를乾搗하여和薬하더라.后崩함에<漱皇>은傷心하여<靑河>로播遷하고,后의長女<觧晨>이后를代하여<羊吉>의寵을受하였으나后와如하여腆柔의樂이不足하여未久에寵衰하니라.
<수황>께서 이후로 후와 결별하시어 지척이 천리인지라, <양길>이 후의 손을 잡고 못 가를 소요할 새, 제께서 루상에서 바라보며 <지반가>를 지으시고 후가 듣고서 <롱금곡>으로 화답하여 올렸더니, <양길>이 이에 노하여 <수황>을 <수림(楡林?)>온궁으로 옮겨놓고서 후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고 고심하여, 기거하는 곳과 음식을 사치하게 함이 궁극하여 매일 수천 전을 쓰고 금옥으로 목걸이와 패물 각종을 만들고 후의 적복을 곱고 곱게 하였어도 후가 희색을 짓지 않았더니, 방사 등을 불러 후를 기쁘게 할 계책을 구하였으며, 가지가지의 기쁘게 할 방술 재료로 기력을 돕고 양기를 왕성케 하는 것을 날마다 마셔서, 후가 한 번 웃는 것을 보면 <양길>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후는 제를 애달파 하면서도 <양길>이를 애달파 하며 양 정인들 간에서 고민하다 우물에 몸을 던져서 죽으니 춘추 서른둘이라. <양길>이 애통히 하야 시신을 부둥켜안고 사흘을 누워 있다가, 살가죽(또는, 옷)을 옷(또는, 이불)으로 입고, 머리털은 말려서 침실에 놓아두고, 두골은 옥함에 담아서 요강을 만들고, 살점과 장은 소금에 절여 놓았으며, 똥과 오줌은 말리고 빻아서 약으로 하였더라. 후가 죽었음에 <수황>은 상심하야 <청하(靑龍河? 靑水河?)>로 파천하고, 후의 장녀 <해신>이 후를 대신하여 <양길>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처럼 통통하고 야들야들한 즐거움이 부족하매, 오래지않아 총애가 식었더니라.
<芈花>太后는<羊山>之女요<鼋>主之出이라.腆厚는<芳>后에不及하나娟麗는過하여乙卯三后에<芳>后의慈와<羊>后의美와<賈>后의狀을人이稱하더니妙齡에乱을當하여<佗利>와<旺弗>에게被汚하고<黃龍>에敀하여<芳>后가崩함에后가<羊吉>의正妃가爲야<宝得>을生하고寵이頓加하여后을愛함이<芳>后와如의하니后이死後에尸를保기不能할까하여疎寵의計를施하니,<羊直>을生한後에寵이頓衰하여其臣<于玄>에게與하였더니,髮을斷하고矢를遺하며<鼋>妃懷中에隱하니,<吉>이强與지不하더라.時에<吉>이其母<鸞>과荒淫하여晝夜抱臥하며事事言聽하므로后이<鸞>을母事하고媎附하니<鸞>이力救하여更의<吉>의寵을回復하여女<大禾>와<小禾>를生하고寵이復衰하니,
<미화>태후는 <양산>의 딸이고 <원>후 소생이라(己亥BCE82生). 노련하기는 <방>후에 미치지 못하나 아름답기로는 더하여서, 을묘년(BCE66) 3후들인 <방>후의 자애로움과 <양>후(羊聖)의 미모와 <가>후의 모습임을 다른 이들이 칭송하였더니, 묘령에 난리를 당하여 <타리>와 <왕불>에게 욕을 당하고 <황룡>으로 돌아와서, <방>후가 죽으매 후가 <양길>의 정비가 되어 <보득>을 낳고 총애함이 갑자기 더하여져서 후를 사랑함이 <방>후와 같았더니, 후가 죽은 뒤에 시신을 지키기 불능할까 하여 총애하기를 소홀히 하는 계책을 펼치니, <양직>을 낳은 후에 총애하기가 갑자기 식더니만 그의 신하 <우현>에게 주었다. 이에 머리를 자르고 똥을 싸 놓고 <원>비의 품에 숨었더니, <양길>이 억지로 어쩌지 못하더라. 이때에 <양길>이 제 어미 <란>과 황음하여 밤낮으로 껴안고 누워서 말이란 말을 모두 들어주기에, <란>을 어미로 모시면서 비위를 맞추며 붙었더니, <원>이 힘을 써서 도와주어서 다시금 총애를 회복하였으나 딸 <대화>와 <소화>를 낳고 또다시 총애가 쇠하였더니.
時에,<鼋>妃가已沒하고,<鸞>妃가寵衰하여城外에尼居하여古樂을習하며餘年을送하니,<吉>의寵臣<禾光>이后의美皃를慕하여<吉>의許를得하여后를娶코자하여白牛十匹과明珠十顆를献하고婚을請할새,后이不得已하여<光>의妻가爲니,<光>은<禾相>의庶子오,其母는<天姜>이라.時年이十八이라,后年三十三歲壯陰之節하므로,<光>을爱하여其子<禾德>・<禾善>을生하니.居然의七個星霜을過하여서,<宝得>이已長하여其父<羊吉>을責하여母를還하라하니,<吉>이更히后를納하여正妻로하고<禾光>을后宮大夫로하여依舊相通케하니,<宝得>이怒하여<禾光>을逐하고后를烝하여<宝玩>을生하니后이羞愧하여<羊吉>의子라하더라.<羊吉>이愛妾을殺하여皮를取하고肉을食하는狂疾이有함을知하고,美女는大槪容을不理하고腆女는房을不調하여禍를免하니,<吉>이荒酒乱色하여旧日의修文太子라하며美名은赤洗無량하고政事는后와<宝得>이共執하여國力을挽回케했으나<羊吉>이當國二十余年에浮華와奢侈와淫乱을漸長爲고田野와牧畜은不振하여大患이將至하니라하난者이不少하나,救國之策이別無하고,<末曷>의坐大를瞻望하더니.<芻牟>가東来하여<末曷>을斥하고<順奴>를起하고<卒本>과<桓那>를合하니<黃龍國>臣民이手額하고<芻牟>를苦待하니,后이大勢를順應하여<芻牟>에게使을送하여幣를献하고謁을求하니,<芻牟>이旧緣을重히하사鄭重히答禮하고后로與해<中川>에會하니,時年이四十五라.
때에, <원>비가 이미 죽고, <란>비가 총애를 잃고 도성 밖에서 홀로 살면서 옛 음악을 익히며 여생을 보내고 있었더니, <양길>의 총신 <화광>이 후의 미모를 애모하여 <양길>의 허락을 얻어 후에게 장가를 들고자 흰 소 10필과 맑은 구슬 10과를 바쳐서 혼인을 청할 새, 후는 부득이 <화광>의 처가 되었더니, <화광>은 <화상>의 서자요 그 어미는 <천강>이라. 이때의 나이 열여덟이라, 후는 나이 세른 셋으로 음기가 왕성한 때이어서 <화광>을 사랑하여 그 아들 <화덕>과 <화선>을 낳았더니. 쉽사리 7년을 지났더니, <보득>이 이미 성장하여 그 아비를 책망하며 어미를 돌려달라고 하니, <양길>이 다시금 정처로 삼고 <화광>을 후의 궁대부(使人兼情夫)로 하여서 지난날들처럼 상통하게 하였더니, <보득>이 노하여 <화광>을 내쳤고 후를 치붙어서 <보완>을 낳으니, 후는 부끄럽고 창피하여 <양길>의 아들이라 하였더라. <양길>이 애첩을 죽여서 살가죽을 벗기고 살점을 씹어먹는 미친병이 있음을 알고, 미녀들은 대개가 얼굴을 매만지지 않았고 노련한 여인들은 방사를 부조케 하여서 화를 면하였더니, <양길>이 황주・난색하여 지난날의 수문태자修文太子(몸에 문신을 새기던 태자? 글을 읽던 또는 학문을 닦던 태자?)라 하며 확실히 씻어서(닦아서) 흔적(흠)을 없애겠는 미명으로 정사는 후와 <보득>이 함께 보게 하여 국력을 만회하게 하였으나, <양길>이 나라를 맡은 20여년을 덧없이 호화롭게 사치하면서 음란하기를 점차로 가중하고 농사와 목축을 진작하지 아니하여, 큰 우환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나 나라를 구할 방도가 특별히 없었고 <말갈>이 대거 머물고 있음을 쳐다보기만 하였더니. <추모>가 동쪽에서 와서 <말갈>을 내쫓고 <순노>를 일으키며 <졸본>과 <환나>를 병합하니 <황룡국>의 신하와 백성들이 두 손을 이마에 대고(학수고대하였었음에 하늘에 고마움을 표하면서) <추모>를 고대하고 있었더니, 후가 대세를 순응하여 <추모>께 사자를 보내서 예물을 바치고 찾아뵙길 바랐더니, <추모>가 옛 인연을 중히 여기어 정중히 답례하고 <중천>에서 후와 더불어 만났더니, 이때(癸未BCE38) 후의 나이 마흔 다섯이었더라.
天后旧服을服하고<芻牟>를抱하여曰夫皇을謁함과如하다하니,上이笑曰我皃가父皇과如하냐하더라.后이媎狎曰"妾雖四五나尙有血氣하니願得一子."라할새,上이許하고<禾英>과聯床하여寵을受하니其夜는甲申十一月五日이더라.或作十月五日.上이一房에后를頓愛하사数日昼夜로連寵하시고「瓊宮」에納하사后를封하시니,后이過壯之年에始로天㝎夫皇을逢하여盡心力히忠愛를供献하니心神이自然肥爽하여顔光이倍佳하더라.連日夕과無時寵을得하여<晉>太子를生하시고<肫>公主와<蒙>太子를生하니春秋五十三이라.上이太后의禮로謁하고稱臣拜禮하며進供을極豊해시며<羊直>으로宮大夫를爲여后의意에洽한生涯를하여하시니,后이<蒙>을生後에更娠을不함을悲歎하사容皃이衰하매,上이慰撫하여時로寵愛를不絶하시고,紀甲이過함에尤加眷養이라니,上이臨崩에特히后를新上에게托하심으로,新上이老齡을不顧하고特히加寵하사「瓊宮」의長을하시니라.
옛 천후적복을 입고서 <추모>를 껴안으며 말하길 부황夫皇을 뵙는 것 같다고 하였더니, 상께서 웃으시며 이르시길 내 용모가 부황父皇(모수제)과 비슷하냐고 하였더라. 후가 애교로 편안하게 “첩은 비록 나이가 마흔 다섯이어도 아직 혈기가 있으니 아들 하나 낳기를 원합니다."라 하였더니, 상께서 허락하셨고, <화영>과 침상에 나란히 하여서 성총을 받았더니, 그 밤이 갑신년 11월 5일이었더라. 혹자는 10월 5일이라고도 한다. 상께서 잠자리 한 번에 후를 갑자기 아끼게 되셨더니 여러 날을 주야로 연달아 승은을 내리시고 「경궁」으로 거두시어 후로 봉하시니, 후는 한창때를 넘긴 해에 비로소 하늘이 정한 부황夫皇을 만남이었고 진심으로 힘써서 충성과 애정을 헌상하였더니 마음과 정신이 절로 넉넉하고 상쾌하여 얼굴빛이 갑절로 예뻐졌더라. 밤마다 그리고 무시로 승은을 입어서 <진>태자를 낳고 <순>공주와 <몽>태자를 낳으니 춘추 쉰셋이라. 상께서 태후의 예로 찾아뵙고 신하를 칭하시며 절하고 예를 올리고 진공하시길 지극히 풍성케 하시며 <양직>으로 궁대부(使人兼情夫)를 삼아주셔서 후의 마음에 흡족한 생애가 되게 하여주셨더니, 후가 <몽>을 낳은 후로 다시금 임신하지 못함을 비탄하사 용모가 거칠어지매, 상께서 위무하시며 때때로 총애하길 멈추지 않으셨고, 기갑(환갑)이 지나매 더욱더 보살피시더니, 상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후를 새 임금{유리}에게 특별히 부탁하시매, 새 임금이 나이 든 것을 생각지 않고 특별한 총애를 더하시어서 「경궁」의 장長을 하셨더니라.
<賈達>皇后는<胡>王<且鞮侯>之女也라.其兄<孤鹿>臨死에謂其子<壺衍>曰<漢>人이多詐하니不如東結<夫余>라하여乃以<賈達>로献於<漱帝>하니,時,卽<法皇>,二十八年丁酉也라,命<禾相>하여徃迎할새,<禾相>이與<賈達>로至<磧東>之<三湖>하여遇風而留라니<相>이心動하여與<賈達>相通하고敀告於<法帝>以實하였대,乃賜<禾相>爲妻하니,<孤鹿>이遣使来詰이랄乃命<漱帝>하여取之爲妃호대猶與<禾相>續好라.時에<法帝>이愛<龜>公主,政事이多出於其手라니,<賈達>이媚付<龜>主하여與<禾相>으로用事하니,<法帝>이亦寵之하여生女<禾穗>하고,次生<禾穎>하니<漱帝>之女오,次生<禾萼>하니<禾相>之女라.乙巳에<法帝>이崩하고<漱帝>卽位하사以<羊聖>‧<羊芳>‧<好陵>爲三后,<賈達>‧<好人>‧<桓淑>‧<牛姬>‧<秋英>이爲五妃라니,已而에以<好陵>으로爲帝女라하여以其母<屋因>으로代<好陵>爲苐三天后하고<好陵>은只封公主호대寵愛는過於<聖>‧<芳>이라.帝以<龜>主가恃<法帝>之寵하고多蘁聖旨라하여廢置幽室이라니.
<가달>황후는 <호(흉노)>왕(單于,單干?檀君?) <저제후>의 딸로, 그의 오빠 <호록(호록고선우)>이 죽음에 앞서서 자기 아들 <호연(호연제선우)>에게 이르길 <한漢>인들은 속임수가 많으니 동쪽의 <부여>와 결연하는 것만 같지 않다 하였더니, 이에 <가달>을 <수제>에게 바치니, 때는 즉 <법황(법제)>28년 정유년(BCE84)이었다. <화상>에게 명하여 가서 맞아오라 하셨더니, <화상>이 <가달>과 함께 <적동磧東><3호三湖>에 다다라서 비雨를 만나 체류하더니만, <화상>이 춘심이 발동하여 <가달>과 상통하였고 돌아와서 이실직고하였다. 이에 <화상>에게 처로 삼아 하사하였더니, <호록>이 사자를 보내와서 힐문하면서 <수제>에게 명하여 <가달>을 취하여 비를 삼으라하였어도, 도리어 <화상>과 계속하여서 좋아지내더라. 이 시절, <법제(법황)>는 <구>공주를 아껴서 정사의 많은 것이 그녀의 손에서 나왔더니, <가달>이 <구>공주에게 아부하며 달라붙어서 <화상>을 등용하여 정사를 보았더니, <법제> 또한 <가달>에게 승은을 내려 딸 <화수>를 낳고, 이어서 <화영>을 낳으니 <수제>의 딸이었고, 이어서 <화악>을 낳으니 <화상>의 딸이었다. 을사년(BCE76)에 <법제>가 죽고 <수제>가 즉위하시어 <양성>・<양방>・<호릉>을 3후로 <가달>・<호인>・<환숙>・<우희>・<추영>을 5비로 삼았다가, 이미 <호릉>은 제의 딸이 되었다 하여 <호릉>의 어미 <옥인>으로 <호릉>을 대신하는 셋째 천후로 삼고 <호릉>은 단지 공주로 봉하였어도 총애하기는 <양성>과 <양방>보다 더하였더라. 수제는 <구>공주가 <법제>가 총애하심을 믿고 성지를 거스름이 많았더니, 폐하여서 외딴 방에 가두었더니.
時에<烏桓>王<丁威>丧妻求配故,<賈達>이說帝曰"兄弟는手足이라,雖有微瑕나安可廢置리오.<烏桓>은西方强國이오,<丁威>는妾母之弟라,結爲兄弟에可以制<漢>이니다."上이然之하여遂以<龜>主로妻<丁威>하니,時에<龜>年三十五라,未生一子故로柔如二十하니<丁威>愛之하여生子<丁烏>하고以其女妻<角>公하니라.女<英>‧子<滿>은<禾相>之出이오,子<簠>는<漱帝>之出이라.乙卯春에<羊聖>이崩하고<屋因>이退함으로<羊花>‧<賈達>이入參三后하여勧帝立<佗利>爲「不而天王」하고仍爲<佗利>之妻하여擅行<不而國>事하니盖自<禾相>時로其所擅行者也라.<且鞮>之弟<槐里>가①爲<鮮卑>女<王夫興>之夫(②爲<鮮卑>女王<夫興>之夫)而生<佗利>하니,<佗利>는<賈達>之從弟也,其母<夫興>은<禾相>之從弟,而<夫興>之母는乃<禾>太后之妹故,亦<漱帝>之從妹也라며以故로<佗利>이爲<禾相>之子하여取<穗>爲妻하니,時에<穗>年이尙少하여不堪政事라하고<賈達>이仍行二世妃事하니,以天帝三后로仍行其國之政은自<屋因>始라.
이때, <오환>왕 <정위>가 처를 잃고 배필을 구하기에, <가달>이 제를 설득하여 말하길 “형제는 손과 발이니 비록 작은 결함이 있어도 어찌 폐하여 가두십니까? <오환>은 서방의 강국이고, <정해>는 제 어미의 남동생이오니 결연하여 형제로 되시면 <한漢>을 제압하기에도 좋을 것이옵니다."라 하였더니, 상께서 그렇겠다고 여겨서 마침내 <구>공주를 <정위>에게 처로 주었더니, 때에 <구>의 나이 서른다섯에, 아직 아들을 하나도 낳지 낳았던지라 스무 살 같았더니, <정위>가 그녀를 사랑하여 아들 <정오>를 낳았으며 그의 딸을 <각>공에게 처로 주었더라. 딸 <화영>과 아들 <화만>은 <화상>의 자식이고, 아들 <해보>는 <수제>의 자식이라. 을묘년(BCE66) 봄에 <양성>이 죽고 <옥인>이 물러나니, <미화>와 <가달>이 3후들에 끼어들고 제에게 권하여서 <타리>를 「불이천왕(부여천왕?)」을 삼고 이어서 <타리>의 처가 되어 <불이국(부여국?)>의 정사를 멋대로 주물렀으니, 개략 <화상>시절 이래로 주물렀음이었다. <저제후>의 동생 <괴리槐里>가 ①<선비>의 딸 <왕부흥>의 지아비가 되어서(혹, ②<선비>여왕<부흥>의 지아비가 되어서) <타리>를 낳았더니, <타리>는 <가달>의 4촌이고, 그 어미 <부흥>은 <화상>의 4촌 동생이며, <부흥>의 어미는 이에 <화>태후의 여동생이 되었던 까닭에, 역시 <수제>의 4촌 여동생이라며 이런 까닭에 <타리>가 <화상>의 아들이 되어서 <화수>를 취하여 처를 삼았더니, 이때 <화수>는 나이가 아직 적어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한다 하고 <가달>이 이어서 2세비의 일을 행하였더니, 천제의 3후로 그 나라의 정사를 봄은 <옥인>때로부터 비롯되었음이라.
<佗利>가以天后로爲妻하고權傾天下에乃有侮帝之心하여多忤聖旨에,<賈達>이輒以義曉하고雖愛<佗利>나忠於夫帝하여夕必侍枕하고昼則與<佗利>歓好하니,<佗利>以爲不足하여竟奪<賈達>之夕호대,帝不能禁이라.三后之名이無實故로,<賈達>이輒昼供以悅上하니,<佗利>怒打<賈達>曰"福盡之帝를汝何愛之오.勿汚吾身하라."<賈達>이曰"天帝는天神이오非人이니,汝若侮之에必亡이라하더라."<佗利>이殺<旺仁>而奪<秋英>하고子<旺弗>이라니,<賈達>이力諫호대不聽하고遷帝㹠野에號泣爭諫하니,<佗利>大怒하여欲殺호대不能自刃하고<旺弗>을命하여斬케하니,<旺弗>이<賈達>之美皃에惑하여不能殺之하고引而通之하니,<賈達>이始逆終順하여謂<弗>曰"汝,若救帝,而討賊,則吾當爲汝妻而共樂平生하리라."<弗>이大喜하여誓滅<佗利>라니.<佗利>이更思<賈達>하고復奪而寵之하니,<弗>이以此로益怒하여遂陷<不而>하니,<賈達>之臣<皐葉>이身被数創하고力護<賈達>而至于<佗利>이라니,<佗利>이<皐葉>를立斬하고"失城而退하여保眷爲名."이라하더니,<賈達>이叩胷而泣曰"此禍는汝不敬帝之致라.<皐葉>이何罪오.<皐葉>이自幼로爲吾臣하여忠於吾라가爲汝所殺하니豈不寃乎.吾이勧<禾相>하여立汝爲子라니,汝今爲賊而亡國하니,死何見<禾相>乎야."<佗利>大怒하여而斬<皐>之釼으로擊<賈達>하니臂斷而血湧이라罵不絶口而死라니.<旺弗>이来見하고抱而痛哭曰"吾爲汝而至此라니汝何死乎야.."遂取<賈達>之皮하여爲其寢茵하고以皇后之禮로厚葬其骨於<禾相>之側이라니.
<타리>가 천후를 처로 삼고 때를 저울질하며 천하를 뒤엎으려하매, 그리고 제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성지를 거역함이 많았음에, <가달>이 문득 의를 깨닫고서 비록 <타리>를 사랑하나 부제夫帝(漱帝)에게 충성하여 저녁에는 필히 잠자리를 시중하고 낮에는 <타리>와 더불어 놀아주었더니, <타리>는 이에 족하지 아니하여 끝내 <가달>의 잠자리시중을 빼앗았고, 천제께서는 말리지 못하셨더라. 3후들이 유명무실하였던 까닭에 <가달>이 번번이 대낮에 상께 즐거움을 드렸더니, <타리>가 노하여 <가달>을 때리면서 말하길 “복이 다한 천제를 그대는 왜 사랑하는 것이오. 내 몸을 더럽히지 마시오."라 하였더니, <가달>이 “천제는 천신이지 사람이 아니오. 그대가 만약 천제를 업신여기면 반드시 망할 것이오."라 하였더라. <타리>가 <왕인>을 죽이고서 <추영>을 빼앗고 <왕불>을 아들로 삼더니, <가달>이 애써서 말려도 듣지 아니하고 천제를 돼지나 기르는 벌판(더러운 벌판)에다가 옮겨놓으매, 울부짖으며 싸우듯이 말렸더니, <타리>가 대노하여 죽이려 하였으되 스스로는 할 수 없어서 <왕불>에게 명하여 참하게 하였더니, <왕불>이 <가달>의 미모에 혹하여 죽이지 못하고서 끌고 가서 통정하니, <가달>이 처음엔 반항하다가 종당엔 순응하며 <왕불>에게 이르길 “그대가 만약에 천제를 돕고 도적놈을 토벌하면, 나는 응당 그대의 처가 되어서 평생토록 즐거움을 함께 하리라."라 하였다. 이에 <왕불>이 크게 기뻐하며 <타리>를 멸하겠다고 서약하였다. <타리>가 <가달>을 고쳐 생각하고 다시금 <가달>을 빼앗아서 총애하였더니, 이에 <왕불>이 더욱 노하여서 이윽고 <불이(불이성, 부여성)>를 함락하니, <가달>의 신하 <고섭>이 몸에 수많은 부상을 당하면서 <가달>을 보호하여 <타리>에게 다다랐더니, <타리>가 <고섭>을 세워 둔 채로 참하고서 “성을 빼앗기고 물러났으면서, 안전하게 돌보았다고 명분을 삼다니."라고 하였더니, 이에 <가달>이 가슴을 치고 울면서 이르길 “이 화는 그대가 천제를 공경하지 않아서 당한 것이오! <고섭>이 무슨 죄요?! <고섭>은 어릴 적부터 내 신하가 되어서 내게 충성하여 오다가 그대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소?! 내가 <화상>에게 권하여서 그대를 보위에 세우고 아들로 삼게 하였더니, 그대가 지금 도적이 되어서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죽어서 <화상>을 어찌 뵐 수 있겠소?!"라 하였더니, <타리>가 대노하여 <고섭>을 벤 칼로 <가달>을 후려쳤더니, 팔이 떨어지고 피가 솟았으며 입에서 욕하기가 떨어지지 않으면서 죽어 갔더니. <왕불>이 와서 보고 끌어안고 통곡하며 말하길 “내가 그대를 위해서 이리하였는데, 그대는 왜 죽었단 말이오?!"라 하고는 <가달>의 살갗(또는, 옷)으로 잠자리를 삼고 유골은 황후의 예로 <화상>의 곁에 후히 묻어주었다.
<東明>十一年八月에上與<禾英>后로親祭于<賈>后之陵曰"<单于>之女오,天帝之妻라.万古英雄이오絶代佳人이라니而今에安在오,使我傷心."이니다하시고熱漏가滂沱하시더라.<禾穗>이<賈達>의愛用하던玉環金釧을献하니,上이愛玩하시고<穗>를顧하여曰"汝母若生이면我當爲后."하리라하시고,"吾妻中엔汝母와髣髴하는者이無하다고."嗟歎하시더니乙卯三后를評하여"<賈>后는英雄이니苐一이오,<芳>后는烈女이니苐二오,吾妻는無骨娘이니我와如하여庸人之妻에最適하다고."<芈花>를弄하시더라.后之苐五女인<佗仙>은<佗利>之女오,苐三子<旺山>은<旺弗>之子라.辛巳에生하사庚申에崩하시니,春秋는四十이라.<胡>人之徃来過陵者이必拜曰<社稷陵>이라니盖后之来嫁時에姉妹가問其爲何而遠嫁하니后曰社稷計라함에此名을得하여後人이陵村을<社稷村>이라호대其由는不識이러라.
<동명>11년(BCE27) 8월에 상께서 <화영>후와 더불어 <가>후의 릉에 친히 제사하며 이르시길 “<선우>의 딸이오, 천제의 처라. 만고의 영웅이오, 절대가인이셨다."라더니, “지금은 편안하신지 내 마음이 아픕니다."라 하시고는 뜨거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시더라. <화수>가 <가달>이 애용하던 옥 반지와 금팔찌를 바쳤더니, 상께서 사랑스레 만져보시며 <화수>를 돌아다보고 이르시길 “그대 어미가 살아계셨으면 내가 응당 후로 삼았을 것이오."라 하시고는 “내 처들 중엔 그대의 어미와 방불할(비슷한) 이가 없다."라시며 한숨짓고 한탄하시더니 을묘년(BCE66)의 3후들을 평하시면서 “<가>후는 영웅이니 첫째요, <방>후는 열녀이니 둘째요, 내 처들은 흐물흐물한 여인들이니 나와 같아서 평범한 이의 처로는 최적이오."라 하여 <미화>를 놀리시더라. <가달>후의 다섯째 딸인 <타선>은 <타리>의 딸이오. 셋째 아들 <왕산>은 <왕불>의 아들이라. 신사년(BCE100)에 태어나서 경신년(BCE61)에 죽었으니 춘추 사십이라. <호>인들이 오가다가 릉 곁을 지나게 되면 필히 절하고 <사직릉>이라 하였더니. 아마도 후가 혼인하여 올 적에 자매들이 무슨 일로 먼 곳으로 시집가느냐 하니, 후가 사직을 위한 계책이라 하였음에 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나, 후세 사람들은 릉이 있는 촌락을 <사직촌>이라 하면서도 그 연유는 모르더라.
聖母太皇太后之諱는<柳花>이니姓은<屋>氏라.<屋>氏世守<鯤淵>之<長屋>하여以是得姓하니,<長屋>者祭淵之屋也라,皇祖<屋文>大王之母后<屋>氏浣紗于泽畔하였더니,時當盛夏하여裸臥當風이라니,大鵞来交하여生子하니.背有靑瘜하여如大鵞之文이라乃名<屋文>이라니及長에事孝帝하여平「南閭之乱」하고「愛鍾之乱」에與<禾相>으로誅<鍾>而迎立<法帝>하여以功으로封「靑河伯」하시고命世襲<狗加>하니乃<仙相>也라.<文>女<屋玩>이爲<羊川>之妃하여生<羊聖>하시고<屋因>이爲<奧山>之妃하여生<好人>하시니皆<漱帝>之后․妃也라.<漱帝>初年에多疾하사只娶一后一妃할새以<屋因>爲妃하고<羊聖>爲后하니,<屋因>은帝之紀甲也라.帝,自二七로,寵<因>三十余年하사宮中之事를多決於其手하고能善蠶織毛氊하여帝之袞冕이皆出其手故로帝頗重之하여稱姊而不名하시고<因>이常淨御饌而掌薬․茗하여以護聖躬之功이莫大故로其子<奧川>이尙長公主<凰>而封爲「順奴侯」하니<順奴>地廣하여<沃沮>東海가皆屬於是라.<文>以<因>之父로功高勳重하고爲國柱石하여坐鎭天下라가.年至七十而疾篤하여戒子女以忠하고薨하니,<法帝>三十四年癸卯也라.
성모태황후의 휘는 <유화>이니 성은 <옥>씨라. <옥>씨는 세세토록 <곤연>의 <장옥>을 지켜 와서 이로써 성姓을 얻었더니, <장옥>이란 것은 제사하는 못에 있는 집이라, 황조(황상의 외조부)인 <옥문>대왕의 모후 <옥>씨가 못가에서 박사(얇은 비단)를 빨래하였더니, 때는 한여름을 맞은지라 벗고 누워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큰 거위가 다가와서 교접하여 아들을 낳았더니. 잔등이에 푸른 혹이 있고 큰 거위의 문양이어서 이에 <옥문>이라 이름을 지었더니, 성장하여서는 천제(德帝)를 효성으로 섬기어 「남려의 난리」를 평정하였고, 「애종의 난리」를 당하여서는 <화상>과 더불어 <애종>을 주살하고 <법제>를 맞이하여 세워서 그 공으로 「청하백(현금淸水河?靑龍河?天津市周邊?唐山市周邊?)」을 하시고 명에 따라 <구가(泃河流域에 사는 豪族?)>를 세습하니 <선상>이었더라. <옥문>의 딸 <옥완>이 <양천>의 비가 되어 <양성>을 낳으시고 <옥인>이 <오산>의 비가 되어 <호인>을 낳으셨더니, 모두 <수제>의 후와 비가 되었더라. <수제>는 초년에 환후가 많아서 단지 1후 1비로 하셨고, <옥인>을 비로 하고 <양성>을 후로 하니, <옥인>은 제와 기갑을 같이 하였더라. 제는 열 넷부터 <옥인>을 총애하여 30여년이 되사 궁중의 일들이 그 손에서 결정됨이 많았고, 누에 쳐서 천을 짜고 양털로 담요 만들기를 능히 잘 하여서 제의 곤룡포와 면류관이 그 손에서 나왔던 까닭에, 제께서 꽤내 중히 여기시어 누님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으며, <옥인>이 늘 어찬을 정결히 하고 약과 차를 맡아서 옥체를 보호한 공이 막대하였던 까닭에, 그의 아들 <오천>이 맏이 공주 <해황>과 혼인하여 봉함을 받고 「순노후」가 되었더니. <순노>의 땅이 광대하여 <옥저>의 동해(沃沮故地의 동쪽 땅, 또는 옥저와 동해 땅)가 모두 이에 속했었더라. <옥문>은 <옥인>의 아비로 공훈이 높고 중하여서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어 앉아서 천하를 지키다가 나이 70에 환후가 위독하매 자녀들에게 충성하라고 가르치고 죽었으니, <법제(BCE147生)>34년 계묘(BCE78)해이었더라.
<漱帝>卽位하사加封爲「靑河大王」하고以<屋因>之母<牛>氏로太妃를爲하고,<斗辰>之母<乙>氏로<靑河>王妃를爲하고其子<斗辰>으로<狗加>「靑河伯」을封하시며<斗辰>妻<好人>으로<靑河>夫人을封하시고寵幸을累加하시니,<屋因>之女라.火羊之春에聖母를誕生하시니不天大雌오<堯>母<舜>妻라<王母>之美와<女媧>之德을兼하시니豊麗腆膄하고藝德이天成하며陰敎가自進이라.「羊吉之乱」에帝가单舸로<靑河>에至하니,時에聖母二八芳齡에逹했더니,帝이封爲天后하시고愛之重之하사暫不離側하고如鴛如鴦이라니雲重雨深하여花開花落하니五龍이擁衛하고鵠仙이羽翼하여,中에一位仙帝가猉獜背에鳳凰鞍을跨하고下空하시니聖母이適在澤畔이라가倒履出迎하니仙帝이来抱하시고澤畔에野合하니滿身天香에恍惚呻吟하니仙帝가龍化하사一大巨龍이聖母를蟠交하여淫流濺蕩이라.聖母이警覺하니一場柯夢이오.夫皇이在腹이라니不勝喜幸하여告之以夢하시니,帝曰"六十平生이在此一擧結花"라하시고,而起하사天地四方에拜하시고又拜於聖母曰"<夫余>千年之業이吾妻腹中에在하니吾妻는愼之戒之하여聖子를胎養"하소서하시고,聖母이答拜曰"妾亦今房大事가决非凡常함을知하오니胎敎를善守하여陛下之聖子를誕生"하겠다하시고一枕一食을極盡其誠이라니.<漱帝>가偶然得病하사乘彼白雲하고帝鄕에敀하시니聖母이失聲痛哭하사不省人事라가腹中之聖子를爲하여忍痛節哀하고慘愼之日을逍遙하시니.
<수제>께서 즉위하사(BCE78년) 봉작을 더하여 「청하대왕」으로 삼으시고, <옥인>의 어미 <우>씨로 태비를 삼으시고, <두진>의 어미 <을>씨로 <청하>왕비를 삼으시고 아들 <두진>을 <구가>「청하백」을 봉하시며, <두진>의 처 <호인>을 <청하>부인으로 봉하시고 총애와 승은을 누차 더하여 주셨더니, <옥인>의 딸이어라. 화양지춘(정미,BCE74)에 성모를 탄생하시니, 하늘에 오르지 못한 큰 어미요 <요>의 어미에 <순>의 처라. <서왕모>의 미모와 <여왜>의 덕을 겸비하셨더니, 아름답기 넉넉하며 늘씬하고 재주와 덕은 하늘이 이루어놓았음이고 여인의 도리는 저절로 닦였음이라. 「양길의 난리」로 제께서 큰 배 한 척으로 <청하{현금의 灤河?}>에 이르시고, 때에 성모가 이팔방령(꽃다운 16살)에 달하였더니, 제께서 천후를 봉하시고 애지중지하사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원앙새 암・수와 같았더니, 구름이 무겁고 비가 깊어서 꽃이 피고 꽃이 지고, 5룡이 옹위하며(五龍山?) 곡선(학)이 보좌하고(鶴岺?) 그 가운데 한 선제仙帝께서 기린 등에 봉황안장을 얹어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셨더니(또는, 쓸쓸한 곳으로 떨어지셨더니), 성모께서 연못가에(물가에) 이르러 계시다가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가서 맞이하니 선제께서 다가와 껴안으시고 못가의 벌판에서 합환하니. 온몸에 하늘향기 가득함에 황홀하여 신음하였더니, 선제께서 용으로 변하시어서 한 거대한 용이 성모를 휘감아 교접하고 뿌연 물줄기가 헌걸차게 뿌려졌더라. 성모께서 놀라시어 깨어나셨더니, 한 자락 남가일몽이오. 부황夫皇이 뱃속에 계심{임신함}이라니 기쁘고 행복함을 이기지 못하고 꿈 얘기를 하셨더니, 수제께서 이르시길 “60평생이 일거에 여기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구나."라 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사 천지사방에 절하시고 또한 성모에게 절하시며 이르시길 “<부여> 천년대업이 내 처의 뱃속에 있음이니, 내 처는 삼가고 조심하여 뱃속의 성자를 기르시오."라 하셨고, 성모께서는 답하시길 “첩 또한 금번의 방사가 결코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있사오니 태교를 잘 지켜서 폐하의 성자를 탄생하겠나이다."라 하시고 잠ㅅ자리 하나 먹는 것 하나에 지극정성을 다하셨더니. <수제>께서 우연히 득병하사 저 흰 구름을 타시고 제의 본향으로 돌아가셨더니(BCE59年, ☞BCE118年生? 8歲에 皇太子卽位), 성모께서는 실성통곡・인사불성하시다가 복중의 성자를 위해 아픔을 참고 슬픔을 절제하시며 애처로이 조신하시는 나날을 소요하셨더니.
時에<東扶>王<金蛙>이其妻<觧>氏를丧하고天下絶色을求하여妻를作하렸더니<羊加><烏文>이奏曰"「靑河伯」<屋斗辰>之女<柳花>이有沈魚落雁之色하고具<屋因>‧<羊聖>之姿하니千古一色이오萬代聖雌이라.<漱皇>이以福盡之帝로納爲天后라가血盡而逝하니,可知其艾壯之道라.陛下이若得此后爲配에可以興國昌家"리니,<金蛙>聞之하고叩勝大喜曰"天乎天乎라.天以此后로賜我하니,安可不娶哉"야.於是에<斗辰>을<優渤>에訪하니,<金蛙>之母<乙原>은<斗辰>母<乙蘭>之妹라.<蛙>이少時에美容으로<斗辰>과龍陽之誼를結하고刎頸을約하여,<斗辰>이<金蛙>를家에置하고<好人>을許했더니,<夫婁>가<東扶余>王位에登함에<斗辰>[이]<金蛙>를薦하여<夫婁>之侍臣에列하더니,<夫婁>之女<觧>氏와悅하여夫婦가爲고,<夫婁>이死後에<東夫余>王이爲었더라.<觧>氏가擅政하고<金蛙>는尸位에居하여<斗辰>과相見할機가無하더니,至是에来訪하니其喜를不可形言이라.時에聖母는春困이来襲하여依案而眠이라니,夫皇이来邊하여撫慰曰"今에吾妻之好運이来矣라.勿失而護兒"하라하고因忽不見이라니,覺之하니乃夢이라.
이때에, <동부여>왕 <금와>가 자신의 처 <해영>를 잃어서 천하절색을 구하여 처를 삼고자 하였더니, <양가><오문>이 상주하여 아뢰길 “「청하백」<옥두진>의 딸 <유화>가 침어낙안(沈魚落雁;물고기가 놀라서 깊이 가라앉고 오리가 놀라서 떨어질; ≒閉月羞花)할 미색이고, <옥인>과 <양성>의 바탕을 두루 갖추었더니, 천고의 일색이고 만대의 훌륭한 여인입니다. 복이 다하였던 천제 <수황>이 거두어서 천후로 삼았다가 기혈이 다하여서 서거하였으니, 그녀의 미모와 왕성함은 알아줄만 합니다. 폐하께서 이 여인을 얻으시어 짝으로 삼으시면 나라가 흥성하고 가문이 번창하실 것이옵니다."라 하였더니, <금와>가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기쁨에 들떠서 이르길 “하늘의 뜻이로다! 하늘의 뜻이야! 하늘이 이 후를 내게 내리심이니, 어찌 혼인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라 하였다. 이에 <두진>을 <우발수(灤河中流支流柳河?)>로 찾아가니. <금와>의 어미 <을원>은 <두진>의 어미 <을란>의 여동생이라(☞金蛙와 斗辰은 姨從間). <금와>가 어릴 적에 고운 마음으로 <두진>과 임금{과 신하}의 정분을 맺고 문경지우(서로의 목을 베어도 나무라지 않을 생사를 같이하는 벗)를 약속하여, <두진>이 <금와>를 집으로 초치하여서 <호인>을 안겨주었더니. <부루>가 <동부여>의 왕위에 오름에 <두진>[이] <금와>를 천거하여 <부루>를 곁에서 모시는 신하로 늘어서더니, <부루>의 딸 <해>씨{해영}와 좋아하여 부부가 되었고, <부루>가 죽은 후에 <동부여>의 왕이 되었더라(☞아들男子가 아닌 사위婿子가 繼位한 것임). <해>씨가 정사를 주무르고 <금와>는 시위(제사상에 신위 및 영정을 대신으로 앉혔던 동일혈통의 尸童; 여기서는 허수아비)로 있어서 <두진>과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더니, 이제야 찾아와서 방문하니 그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더라. 때에, 성모는 봄기운에 노곤함이 엄습하여 서안에 엎드려서 잠이 들었는데, 부황夫皇이 곁으로 오셔서 어루만지며 위로하여 이르시길 “지금 내 처에게는 좋은 운세가 다가왔소. 아이를 잃지 말고 지켜내시오."라 하고는 홀연히 보이지 않았더니, 깨어나 보니 꿈이었더라.
門外에有人馬聲이라니,<金蛙>之親訪을聞하고慈母<好人宮>을伴하여<蛙>를出見하니.<蛙>이聖母之首蛾眉와雪膚玉顔을見하고怳惚来把曰"天后之美는<西施>에過"하다하고引抱垂吻이라니,聖母이歛客曰"妾이不幸하여天帝之丧에居하고腹中에聖子를孕胎하였으니,伏願叔父는哀此寡孀하사恕此守貞"하소서하시니,<斗辰>이曰"陛下에爲汝親訪하시니敢曰守貞乎야.勿辞侍枕하여以<北夫余>之天后로爾作<東夫余>之天后에不亦好乎야.<禾>太后之二世作后는爲<漱皇>之計오.汝母之作天妃는爲汝之計라.汝娠聖子而美하니未免强者之侵이라.若非吾陛下에孰能保汝而護聖子"리오.<好人>도傍贊하고夢兆亦然故,値此春節하여不無懷春之血이라怳惚難測하여遂倒<蛙>懷하니,<蛙>이抱而登床하여弄盡雲雨하니聖母이不勝春興하여如狂如醉라.乃擧十燭之典하고爰進百両之幣하여其枕三日三夜하니,情則夫皇이오,誼則叔父라.王年三十三壯이오,后年十七妙齡이라,如山之愛와如海之情을何可盡言이리오.<蛙>王이乃築<柵城>新宮하여以爲聖母之殿하고以<斗辰>爲相하며以<好人>爲妃하니<靑河>之人이皆敀<柵城>하여一躍爲<東余>之高官大爵者이不少해라.
문간 밖에서 사람들과 말들의 소리가 났더니, <금와>가 몸소 방문하였음을 듣고는 자애로운 어미 <호인궁>을 동반하여서 <금와>왕을 나가서 알현하였더니, <금와>는 성모의 머리가 초승달 같은 눈썹과 백설 같은 살결에 옥 같은 얼굴임을 보더니만 멍하고도 황홀하여 다가와서 손으로 만져보면서 이르길 “천후의 미모가 <서시>보다 더하구려!"라 하고는 끌어안고 입술을 드리웠더니, 성모가 손님에게 빌면서 “첩이 불행하여 천제의 상중에 있고 뱃속에는 성자를 잉태하였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숙부께서는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어 절개 지킴을 용서하여 주세요."라 하시니, <두진>이 말하길 “폐하께서 너를 위해 몸소 찾으신 것인데, 감히 정절 지킴을 일컫느냐? 말없이 잠자리를 모셔서 <북부여>의 천후인 네가 <동부여>의 천후가 되면 역시 좋지 않겠느냐? <화>태후께서 2대의 후를 하셨음은 <수황>을 위하신 계책이었고, 너의 어미가 천비가 된 것은 너를 위한 계책이었느니. 너는 성자를 임신하고서도 예쁘니 강한 이들의 도발을 면할 수 없음이다. 나의 폐하가 아니시면 그 누가 너를 지켜주고 성자를 보호하여줄 수 있겠느냐?"라 하였고, <호인>도 곁에서 찬동하고, 꿈속 조짐 또한 그러하였던 까닭에, 이 봄을 맞이하여 춘정을 그리워하는 혈기가 없지도 아니한지라, 멍하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여서 헤아리기 힘들어하다가 끝내 <금와>에 품으로 쓰러졌더니, <금와>가 품어 안고 침상으로 올라서 마음껏 운우를 다하였더니, 성모도 춘흥에 못 이겨 미친 듯 취한 듯이 하였더라. 이윽고 열 촛불을 밝히는 예의(혼례)를 거행하고 백 수레의 폐백을 바쳐서 3일 3야를 동침하였더니, 정情을 따지면 부황夫皇이요, 따져보면 숙부(이모부)이었다. 왕은 세른 세 살로 장년이오, 후는 열일곱 묘령이라, 산과 같은 사랑과 바다 같은 정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오. <금와>왕이 마침내 <책성(嫩江省扶裕? 吉林省西北端雙城?)>에다 새 궁을 쌓아서 성모의 궁전을 삼고, <두진>을 상相으로 삼고 <호인>을 비로 삼았더니, <청하>땅 사람들 모두가 <책성>으로 귀의하여, 일약에 <동부여>의 고관대작이 된 이들이 적지 않았더라.
四月,聖母이聽鳳凰鳴之聲而誕<芻牟>하시니日光이来照하여移席則逐之하니人以爲奇해라.<蛙>王이見<芻牟>雄姿하고大喜曰"娶妻而得子하니此所謂雉卵之獲"이로다.乃命以<芻牟>爲太子하여席於<蛙>王之苐八子하니,<觧>氏之七子<帶素>等이亦爱之如弟해라.后旣生<芻牟>에一心爱護할새以<芻牟>之故로納無意之媎於<蛙>王者亦多矣러라.<蛙>王爱后而又爱<好人>하여,<好人>先受胎而生女하니是乃<禮>皇后也라.丙寅에后亦生<蛙>王之子<觧弗>하시고,己巳에生女<觧花>하시니後爲<帶素>之妻하니라.壬申에<觧朱>를又生하시고乙亥에<觧百>과戊寅에<觧素>를又生하니,<百>‧<素>之容皃가多肖於<芻牟>故로<帶素>等이<蛙>王에게讚호대<象觧>가渠母를烝하여<百>‧<素>를生했으니非吾弟라했으나<蛙>王이笑而不問함으로爭敀霊地이러라.辛巳에<蘇>公主를生하니甚美하므로后이恒常公主를戒하여曰"汝는長하면必히<象觧>之妻가爲"라했더니.丙申에来하여「瓊后」를作하고恃寵芳姿호대上이不問하시니라.甲申에<觧雄>과丁亥에<觧苾>과庚寅에<觧重>과癸巳에<觧彬>等을生하니擧皆容皃가美麗하고遊藝를好하나,唯<觧素>一人이頗多<芻牟>之風일러라.聖母이以此로<蛙>王之子를生하길不願하사雖房不花라니.
4월, 성모가 봉황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추모>를 낳았더니, 햇빛이 다가와 비추어서 자리를 옮기면 따라와서 비추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더라. <금와>왕이 <추모>의 사내다운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이르길 “처를 얻고 아들을 얻었으니 이것이 소위 꿩 먹고 알을 먹은 것이로다."라 하고는 명을 내려 <추모>를 태자로 삼아 <금와>왕의 여덟 째 아들 자리를 주었더니, <해>씨의 일곱 째 아들 <대소> 등이 동생처럼 아끼더라. 후는 <추모>를 낳아놓더니만 일심으로 사랑하고 보호하면서, <추모>때문에라도 <금와>왕에게 아양 떨 의향이 없던 적이 역시 많았더라. <금와>왕은 후를 사랑하였지만 또한 <호인>을 사랑하기도 하여서, <호인>이 먼저 수태하여 딸을 낳으니 이 이가 바로 <예>황후이고, 병인년(BCE55)에 후 또한 <금와>왕의 아들 <해불>을 낳으시고 기사년(BCE52)에 딸 <해화>를 낳으셨더니 후에 <대소>의 처가 되었으며, 임신년(BCE49)에 <해주>를 낳으시고 을해년(BCE46)에 <해백>과 무인년(BCE43)에 <해소>를 또 낳으셨더니, <해백>과 <해소>의 용모가 <추모>를 많이 닮았던 까닭에 <대소> 등이 참언하기를 <상해>가 그 어미를 치붙어서 <해백>과 <해소>를 낳은 것이니 자기들의 동생들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금와>왕이 웃으면서 연유를 묻지 않으매 다툼은 없었던 것이 되었더라. 신사년(BCE40)에 <소蘇>공주를 낳았더니 심히 아름다워서 후가 항상 공주를 훈계하시어 이르시길 “너는 자라서 필히 <상해>의 처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더니, 병신년(BCE25)에 찾아와서 「경후」가 되었으며 총애를 믿고 방자하였어도, 상(추모)께서는 불문에 붙였더라. 갑신년(BCE37)에 <해웅>과 정해년(BCE34)에 <해필>과 경인년(BCE31)에 <해중>과 계사년(BCE28)에 <해빈> 등을 낳으셨더니, 거의 모두가 용모가 미려하고 놀기와 기예를 좋아하였으나, 오로지 <해소> 한 사람만이 <추모>의 기풍이 파다하였더라(☞解素는 柳花소생 芻牟子라는 은유인가?). 성모가 이에 <금와>왕의 아들 낳기를 바라지 않으시어, 설사 합방하여도 꽃을 피우지 않았더라니,
丁酉,五月에<蛙>王之疾을侍하여<帶素>妻<觧花>와守夜不眠할새<蛙>王이中宵에<觧花>를引抱하고登床했더니.后이避而出帳하니,<帶素>이逼烝하여不意之辱을被하매憤怒成疾이라니.月余에有身함을知하고羞憤하사七月七夜에<牛女>를望하고恨歎하시더니,鰒卵을食하시고崩하시니,春秋五十一이라.顔色이如生하시고手에<漱帝>之象을握했더라.<蛙>王이哀慟하여十日不食하고<觧花>를抱臥하여悲泣度日하니,<觧朱>等이<木>公을用하여腹兒를引出하고骨을分할새<觧素>不肯하거늘<蛙>王이曰"渠母之骨을安可不分이리오.<東余>이多水葬,而聖母이獨留皮骨而他皆灰之,而分於諸子女"하니라.聖母陵은一在於<西蘮山>하고一在於<龍山>之<南岺>하고皮爲庙神之主이라니.<芻牟>之夢에聖母가累現하여"吾欲居汝之身"이라하여,上이乃取皮而服之하시고,以<奧芳>夫人으로爲庙主라니,聖母之骨은收于玉函中이라가,<芻牟>崩에,以遺命으로,取聖母骨하여入于<芻牟>之梓宮,以聖母之皮로爲<芻牟>之庙神主하니.今人이以爲母爲皮者이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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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BCE24}, 5월에 <금와>왕의 병 수발을 들으면서 <대소>의 처 <해화{后所生金蛙女}>와 밤을 새우며 잠을 자지 않았을 새, <금와>왕이 한밤중에 <해화>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침상으로 올랐더니. 후께서 피하여 장막 밖으로 나왔더니 <대소>가 핍박하고 치붙어서 불의에 욕을 당하셨으매 분하고 노여워서 병이 되었더니. 한 달 여에 임신하셨음을 알고 부끄러움으로 괴로워 하사 7월 7일{칠석날} 밤에 <견우녀{=직녀성}>를 바라보며 한탄하시더니 복어 알을 드시고 죽으셨으니, 춘추 쉰하나였다. 안색은 살아있는 듯하고 손에는 <수제>의 조각상을 쥐셨더라. <금와>왕이 애통해하며 열흘을 먹지 않고 <해화>를 품에 안고 누워서 슬프게 눈물지으며 날을 지새웠더니. <해주> 등이 <목>공을 부려서 뱃속의 아이를 끄집어내고 유골을 나눌 새 <해소>가 따르지 않았더니, <금와왕>이 “거수 어미의 유골인데, 어찌 나누지 않을 수 있겠느냐?! <동부여>에서는 수장을 많이 하지만, 성모는 오로지 살 거죽과 뼈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태워서 재로 하여서, 모든 자녀들에게 나눠주어라."라 하였다. 성모의 릉침은 하나는 <서계산>에 있고 하나는 <용산>의 <남령>에 있으며, 살갗은 사당의 신주로 되었더라니, <추모>의 꿈에 성모께서 누차 나타나셔서 “나는 네 몸 속에 머물고 싶구나."라 하여, 상께서 살갗{또는, 옷}을 취하여 옷{또는, 상복}을 만들고, <오방>부인을 사당지기로 삼았더니, 성모의 유골을 옥함에 넣어 두었다가 <추모>가 죽으매 유명을 따라서 성모의 유골을 꺼내서 <추모>의 재궁{시신, 관} 속에 넣었으며, 성모의 살갗{또는, 옷}으로 <추모>사당의 신주를 삼았더니, 지금 사람들은 어미를 위하여{또는, 어미가 되어서} 살갗이 된 이가 이 사람이라 하였더라.
<東明><萱>皇后之諱는<萱花>이니聖母之妹라.聖母之娠<芻牟>也에后年十三이로대亦得帝寵이라니,帝臨崩에命爲<芻牟>之妻故로<芻牟>이落地함에<萱花>이受하여起臥寢食을共히하여十年이如一日이라니,乙亥春二月之望에<萱花>이<芻牟>를侍하고伴寢如常이라니,中夜에<芻牟>이睡起하사<萱花>를引抱하고,<萱>宜陽이라하고雲雨를始興하니,<萱花>之喜는不可形言이라.自是로遂作鴛鴦하여未嘗離側이라니南下之時에先徃<曷思國><加菽>公処하여待上之来하니.<菽>公,<萱>之情夫也라.<芻牟>이以水漲難渡로欲棄<萱>而去하니,<萱>이乃投水中而欲爲牲而祭神하니,大龜이浮出하여一行이得渡라.旣至<毛屯>에<芻牟>이愛<仲室>而寵<乙旃>호대,<萱>이未嘗一妬하고勧<芻牟>하여納<召>后而合<卒本>하니其功이大矣라.<芻牟>이好色하사多通近臣之妻故로,他后는不悅而后獨歓待之하여容人以德故로,<芻牟>이最愛之而又最多房호대,未嘗恃寵而恣하고常勤愼自守하며能於女工,有<屋因>‧<羊聖>之德이라.上常謂諸后妃曰"爲人妻者이當如吾<萱>"이라하사,平生에與后로未嘗有一溫하고,常以藹和相對하여笑不絶口하시며順生子女하여<萱>太子‧<元陽>主‧<高洋>主‧<菤>太子‧<薏>太子等이皆仁孝友愛하고不與人爭功이러라.乙亥三月에以疾로崩於上之膝上할새,上이問其所欲言하여대后曰"陛下이勿多房하시고勿納雜女하시매,妾이死亦安心矣"리다.上이泣曰"愛我如此하니,汝乃妻而母也"라하시고.漬而時灌이라니,<芻牟>이崩에以遺命으로亦入尸于<芻牟>梓宮中할새顔色猶如生時러라.春秋는五十이오,事上二十五年에居天后上位十九年하시고生女四人男三人하니라.
<동명><훤>황후의 휘는 <훤화>이니, 성모의 여동생이라. 성모가 <추모>를 임신하매, 후의 나이 열 셋으로 역시 수제의 승은을 입어서, 수제께서 죽음을 앞두고 명하기를 <추모>의 처가 되라 하셨으므로, <추모>가 태어나매 <훤화>가 받아내어 일어나고 눕는 것과 먹고 자는 것을 같이 한 지 10년을 하루같이 하였더니. 을해년{BCE46} 춘2월에 <훤화>가 <추모>를 시중하여 함께 잠자리에 들기를 여느 날 같이 하였는데, <추모>가 한밤에 자다가 일어나사 <훤화>를 끌어안았고, <훤화>는 마땅히 남자가 되었음이라 여기고서 운우 흥하기를 비롯하였더니, <훤화>의 기쁨은 불가형언이라. 이로부터 이윽고 원앙이 되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더니, 남하하던 시절에 먼저 <갈사국><가숙>공의 처소로 왕림하여 상이 오시기를 기다렸더니. <가숙>공은 후의 정부이었더라. <추모>가 물이 불어나서 건너기가 어렵기에 떼어놓고 가려 하였더니, <훤>후가 물속으로 몸을 던져 희생이 되어 신에게 제사하려 하였더니, 큰 거북들이 떠올라서{검은색의 거북배가 건네주어서?} 일행이 건넜더라. <모둔>에 다다르자 <추모>께서 <중실>을 아끼고 <을전>에 승은을 내렸어도 <훤화>는 투기 한번 하지 않았고, <추모>에게 권하여서 <소>후를 거두고 <졸본>을 합쳤으니 그 공이 컸음이고, <추모>께서 호색하사 근신들의 처와 통정함이 많았던 까닭에 다른 후들은 기뻐하지 않았으나, 후 홀로 그들을 환대하며 다른 이들을 용납하여 덕을 베푼 고로 <추모>께서 후를 최고로 사랑하였고, 또한 최다의 방사를 베풀었어도 총애를 믿고 방자히 한 적도 없었으며 항상 근신하고 자신을 지켰으며, 여인의 일{길쌈 등}에 능하였고 <옥인>과 <양성>의 덕이 있음이었더니, 상께서는 항상 여러 후와 비 들에게 이르시길 “임금의 처가 된 이들은 응당 내 처 <훤>과 같아야 한다."고 하셨으며 한 번도 후의 일로 얼굴을 붉힌 일이 없었고, 항상 부지런히 하고 온화함으로 서로를 대하며 입가에 웃음 짓길 잊어버리지 않으셨으며, 자녀들을 부드럽게 낳았더니. <훤>태자・<원양>공주・<고양>공주・<권>태자・<억{의}>태자 등 모두가 어질었고 효도하였으며 우애가 좋아서 다른 이들과 공을 다투지 않았더라. 기해년{BCE22} 3월에 병이 들어 상의 무릎위에서 죽을 때, 상이 하고 싶은 말을 물어도, 후는 이르기를 “폐하, 방사를 많이 하지 마시고, 잡녀들을 거둬들이지 마세요. 그러면 첩은 죽어서도 역시 안심할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상이 눈물지으며 이르시길 “나를 사랑하심이 이러하셨으니, 그대는 처이자 어머니이셨소."라 하셨으며, 죽은 후엔 방부액 등에 침지하여 놓고서 때때로 갈아 넣어주셨더니. <추모>가 죽으매 유명으로 또한 <추모>의 재궁에 시신을 넣었는데, 안색은 생시와 같았더라. 춘추 50{BCE71年生}이었고, 상을 섬기길 25년에 천후자리엔 19년을 있었으며, 딸 넷과 아들 셋을 낳았더라.
<東明><召>皇后는<延陀勃>之女이니其母<乙旒>이夢召西之鳥而生故로名曰<召西奴>라.后自幼로端潔多智하고好爲政事하여,<陀勃>이病臥에與其母로共治<卒本>이라가,<芻牟>이征<曷>興<順>에后이見勢甚明하여逐其情夫하고與上結婚하니,<摩离>는美如秋花하고潔如銀鱗이라하고,<陜父>는巧笑納媚似是好淫하니不宜聖配라하더라.后이以是로惡<陜父>而<芻牟>愛<陜父>故로終<芻牟>之世而不能踈<陜父>하고幷執政事而未嘗開口一笑,<陜父>이察后之意而欲挽后意하여,改儲之時에<陜父>이獨黨於后,而后終不解溫하여,以是로見忤於新上而終廢矣라.然이나<陜>之論이誠不虗矣라.<芻牟>이每與后歓連房数日而必至毁損者多矣하니,盖后有儀力而難免也라.臨事能断하여不失其規故로吏不敢弄文而民不敢犯法하니,<芻牟>이常稱其才曰"雖<呂尙>之才와<蕭何>之能이나何敢當吾妻乎야.內有<召>妻‧<陜父>하고外有<桂婁>‧<烏伊>하니吾何憂哉"야하고,民‧穀之事를一以任之,州‧牧之任을后皆黜陟하여<卒本>人이多登用於朝而他不能及故怨后之聲이始聞이라니,<芻牟>이命均用而解溫이나竟以此로失人和하여改儲時에大敗而敀<牛壤>하니,<芻牟>謂<烏伊>‧<摩离>曰"<召>后이秉政十九年에國事이多决於其手하고人物이多出於其下하니廢之則必生變이오誅之則實不忍이라.吾豈爲<劉徹>之事乎야.吾欲以<召>后로妻<類利>하여吾死之後에使作二世之后而継其治則一以安其心하고一以輔新主하고一以保其子女하여一擧而三得이라.汝等이以爲何如"오.<烏伊>拜伏曰"誠聖德之事라,万世可法"이니다.
<동명><소>황후는, <연타발>의 딸이니, 그 어미는 <을류>가 서쪽을 향하여 부르는 봉황새를 꿈꾸고서 낳았기에 <소서노{서쪽을 불러서 포로로 할 놈, 또는 서쪽에 깃들 놈}>이라 이름을 지었다. 후는 어릴 적부터 단정하고 깔끔하였으며 지혜가 많고 정사 보기를 좋아하여, <타발>이 병들어 누워있으매 어미와 더불어 <졸본>을 함께 다스리다가, <추모>가 <말갈>을 정벌하여서 <순노>를 흥하게 하시매, 후가 보건대 대세가 심히 명백한지라 자신의 정부를 쫓아내고 상과 더불어 혼인하였더니. <마리>는 '미모가 활짝 핀 꽃과 같고 깔끔하기가 은빛 비늘을 가진 물고기 같다.'고 하였고, <협보>는 '꾸며진 미소로 아양 부리는 것이 음란함을 좋아할 것 같아서 성인의 배필로는 마땅하지 않다.'고 하였었더니, 후는 이 일로 <협보>를 미워하였었으나, <추모>께서 <협보>를 아끼는 까닭에 <추모>께서 살아계신 동안엔 <협보>를 멀리할 수 없었으며, 함께 정사를 보면서도 한 번도 입을 열어서{소리내어} 웃은 적이 없었고, <협보>는 후의 속내를 살펴서 후의 뜻{협보를 몰아내려는 생각}을 말려보려고 동궁을 바꾸던 때에 홀로 후의 편을 들었어도 후는 끝내 화를 풀지 않았으며, 이에 새 임금에게 거스르는 것을 보더니만 끝내 <협보>를 그만두게 하였다. 허나, <협보>의 주장은 정성이었고 헛된 것이 아니었던지라, <추모>는 매번 후와 합환할 때면 연이어 여러 날을 하더니만, 필경엔 몸이 축이 간 적이 많았었으니, 아마도 후는 짝이 있기만 하면 힘을 다하였기에 {상대의 몸이 축나는 것을} 면하기 어려웠었음이라. 정사를 살핌에서는 능히 단호하여 규정을 어기지 않았던 까닭에, 관리들이 마음대로 문서를 주무르지 못하였으며, 백성들도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였더니, <추모>께서 항상 그 재능을 칭찬하며 이르시길 “<여상{呂땅에 封해진 姜尙=姜太公=太公望}>의 재주와 <소하{유계 즉 유방의 서한 입국시의 전략가}>의 능력으로도 어찌 내 처를 당할 수 있으랴? 안으로는 <소>처와 <협보>가 있고 밖으로는 <계루>와 <오이>가 있으니, 내가 무엇을 걱정하랴!"라 하시고는 백성을 살피고 곡물을 관장하는 일{주민대가와 주곡대가의 일}을 한꺼번에 위임하셨더니, 주와 목의 보임들을 후가 모두 쫓아내거나 보직하게 되어서 <졸본>사람들이 많이 조정에 등용되었고 다른 이들은 미치지 못하였던 까닭에 원성이 들리기 시작하여서, <추모>께서 균등하게 등용하고 화를 풀라고 명하셨으나, 필경 이 일로 동궁을 바꿀 적에 크게 패하고 <우양>으로 돌아갔더니, <추모>께서 <오이>와 <마리>에게 이르시길 “<소>후가 국정을 잡은 지 19년에 국사의 다수가 그 손에서 결정되었고 많은 인물들이 그 휘하에서 나왔으니, 폐위하면 변란이 생길 것이고 주살하는 것은 실상 감내할 수 없는 일이오. 어찌 내가 <유철>이가 한 짓{西漢의 世宗이 親族과 戚族을 誅殺한 일들}을 할 수 있겠소이까?! 나는 <소>후를 <유리>에게 처로 주어서, 내가 죽은 후에 2세후로 만들어서 그녀의 통치를 계속하게 하려는 즉, 한편으로는 그녀의 마음을 안심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새 임금을 돕고 한편으로는 그녀의 자녀들을 지켜주고자 함이니 일거에 세 가지를 얻게 되는 것이오."라 하셨더니, <오이>가 아뢰길 “진정한 성덕을 베푸시는 일이시오며, 만대토록 법으로 삼을 만 하겠사옵니다."라 하였다.
於是乃召<乙音>入內曰"吾欲以汝妹賜東宮而欲作二世之后하니可急召来하라.不來에汝䓁이皆族矣"이라.<乙音>이徃告利害하니,后知帝性이라知其無詐하고內雖踴喜나不形於色하고徐言"吾非<王嬙>이니安用<莫車>乎"야하니,<乙音>이曰"汝若不去에,<大房>이必作二世하리니,吾等은族矣"라.后乃敀謁于帝하니,帝召<類利>賜之曰"開國原勳이오治世之能臣이라.汝非此妻에安能知新而溫古이리오.可作二世之后而體我,至死勿變其愛"하라.后曰"夫婦之道이死則同死,生則同生而已라.汝何妄言如此乎"야.帝曰"汝非匹夫之妻라,安能如汝志이리오.此乃社稷大計也이니,汝當爲社稷之妻오,無爲<象觧>之私妻"하라.因謂<類利>曰"吾於<都>氏에亦通於生前하니,汝亦引去而相通하여使我得聞喜報"하라하니,<類利>이抱去而欲濡하니后猶恐帝疾愈則或以此失寵하여乃說<類利>曰"妾이旣爲東宮之妻則安敢不承寵이리오나,聖候이如此하니似非相濡之時라.伏願夫皇은少竢하소서.天子이當穆穆이오不可苟爲"니다.<類利>然之하여相議國事而度夜할새,后以濃粧送情하여使<類利>로昏倒者累矣,然後에使<溫>主引去하고,自如帝側하니,帝問已婚이라니,后이羞笑曰"新夫이恐上而不敢来報喜"이니다.上大喜하여命召<類利>来하니,后이走抱<類利>之頸而面吻如夫妻하니,上이大喜하여命東宮共枕曰"吾將見汝等之生子然後에死"라하시니,是夜에東宮遂通后於便殿,而后諱之而不言이라니乃帝之崩에遂登床而歓於殯宮할새,后頗羞月하사乃有<月皝之曲>而孕<珍>公主하사琴瑟之和와比翼之情이無以形言이라.
이에, <을음>을 안으로 불러들여서 이르시길 “나는 그대의 여동생을 동궁에게 내려주어서 2세후로 만들려하니, 빨리 불러서 오게 해야 할 것이오. 오지 않으면, 그대 등이 씨족 모두를 죽게 할 것이오."라 하였더니. <을음>이 가서 이해득실을 알렸더니, 후는 제의 성품을 알아서 속임수가 없음을 알고는 속으로는 비록 뛸 듯이 기뻤으나 얼굴에 티를 내지 않으면서 천연덕스럽게 말하길 “내가 <왕장>이 아닌데, 내 어찌 <막거{雕陶莫고皋=復株絫선우}>를 부린단 말이오."라 하였더니, <을음>이 말하길 “자네가 가지 않으면, <대방>이 필시 2세후가 될 것이니, 우리 족당들은 모두 죽은 목숨일 것이오."라 하였더니, 후가 이에 돌아와서 제를 배알하니, 제께서는 <유리>를 불러서 <소>후를 하사하시면서 이르시길 “개국원훈이고 치세에 능한 신하이니, 너는 이 사람을 처로 삼지 않고서야 어찌 지난날을 학습하여서 새 것을 깨우칠 수 있겠느냐? 2세후로 삼아서 내 뜻을 익히고 죽을 때까지 그를 사랑함을 변치 말아야 할 것이다."하셨더니, 후가 아뢰길 “부부의 도리는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사는 것이라 하였거늘, 당신께서는 어찌 이 같이 망령스런 말씀을 하십니까?"라 하였고, 제께서는 “그대는 필부의 처가 아님인데, 어찌 그대가 마음먹은 대로만 할 수 있겠소이까? 이는 사직을 위한 큰 계책이니, 그대는 응당 사직을 위하는 처가 되어야 할 것이지, <상해>의 사사로운 처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라 하시고는, 인하여 <유리>에게 이르기를 “나도 생전에 <도>씨와 상통하였었음이니, 너 또한 데리고 가서 상통하여 나로 하여금 즐거운 소식을 듣게 하여라."라고 하셨더니. <유리>가 데리고 가서 은혜를 베풀고자 하였더니, 후는 도리어 제의 환후가 낫고 혹시나 이 일로 총애를 잃을까 겁을 내면서 <유리>를 설득하길 “첩이 이미 동궁의 처가 되었는데 감히 승은을 입으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나, 성상의 기후가 이러하니 서로 흠뻑 은총을 입을 때가 아닌 듯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부황夫皇께선 조금만 기다리소서. 천자께서는 삼가 화목하셔야 함이고, 구차하셔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라 하였더니, <유리>도 그리 여기고서 국사를 의논하며 밤을 새우매, 후는 짙게 단장하고 음정을 흘려서 <유리>로 하여금 정신이 아득하여 쓰러지게 한 적이 여러 번이었으며, 연후에 <온>공주{召后所生芻牟女}로 하여금 데려가게 하여놓고, 자신은 제의 곁으로 갔었더니. 제께서 이미 혼인하였는지를 물으셨더니, 후는 멋쩍게 웃으면서 아뢰길 “새 지아비는 상이 두려워서 감히 찾아와서 아뢰지 못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께서 매우 즐거워하시며 명을 내리시어 <유리>를 불러왔더니, 후는 달려가서 <유리>의 목을 껴안고 부부처럼 입을 맞추었더니, 상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동궁에게 명하여 동침하게 하시면서 이르시길 “내가 장차 너희들이 아들을 낳은 연후에 죽을 것이다."라 하셨더니, 이날 밤 동궁이 마침내 편전에서 후와 상통하였고, 후는 내키지 않아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더니만, 제께서 죽으셨더니, 곧바로 침상에 올라서 빈궁에서 합환하였다. 후는 꽤나 달빛을 부끄러워하면서 <월황지곡>을 지으시고 <진>공주를 잉태하사, 금슬이 호응함과 비닉의 정은 형언할 수 없었더라.
起則扶起하고臥則扶臥하며暫不相離하니,<禮>太后이恐新上이疾作하여常戒后勿過房하시니,后頗苦之러라.后春秋已三十七이라,壯熾膏膄하고累經寵妬하여深得事上之道라.腆如<萱花>하고雅如<乙旃>하고淳如<大房>하여,取其長而有之하시니,皆是腐心之餘는所以自得也라.大非前日之<召>后故로新上極愛하사每抱臥而賞之曰"人言汝性敏苛하며雖美나無情이라하더니,豈謂如是其溫柔多情哉"야.后笑曰"妾之前日은生木而野雉也라,任情自好하여恃寵發惡하니,至今思之에得罪於先皇이多矣라.艾壯之年을居中宮二十一年하여閱群芳之妙道而自得하니今也에少可矣라.願以不及於先帝者로,事陛下以慰先帝之靈則似可贖罪나,然이나但所恨者,靑春이不多하니,膏血恐不能長継矣"이니다.上曰"汝雖禿老骨立이나吾當愛之如是矣"이라.上之初来也에<貫那[貫貝]>献身而受身故卽位則約爲皇后故,納入宮中而恐后不悅而不能封后.后知上意而勧封而遂和如初曰"母已去矣라.兄弟不相容哉"야.<貝>亦然之하여友愛頗加러라.
일어나면 부축하여 일어나고 누울 땐 부축하여 누워서 잠시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더니, <예>태후는 새 임금이 병이 날까를 걱정하며 항상 훈계하길 지나치게 합방하지 말라 하였으니, 후는 이것이 꽤나 고역이었더라. 춘추가 이미 서른일곱인지라, 기세가 좋아 훨훨 타올랐고 통통하고 늘씬하였으며, 누차 성총과 투기를 겪어서 상을 섬기는 도리를 깊이 체득한지라, <훤화>처럼 넘쳐나고 <을전>처럼 단아하고 <대방>같이 순박하여서 그 들의 장점을 취하여서 갖추었더니, 모두가 마음을 썩인 나머지 스스로 체득한 것이었더라. 전날의 <소>후와 크게 달라졌던 까닭에 새 임금이 지극히 사랑하사 품에 안고 누울 때마다 칭찬하여 이르시길 “다른 이들은 그대의 성품이 영리하고 모질다면서 예쁘긴 하나 무정하다고 하였는데, 어찌 그리들 말하였단 말이오. 이리 온유하고 다정하신 것을?!"이라 하였더니, 후가 웃으며 아뢰길 “첩이 지난날엔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투막에다 길들여지지 않은 꿩이었던지라 제멋대로 잘난 체하면서 총애를 믿고 발악하였었더니,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선황께 죄를 지은 것이 많았음입니다. 거칠고 팔팔하던 시절 스무 한 해를 궁중에서 보내면서 많은 미인들의 오묘한 도리를 둘러보면서 스스로 체득한지라 이제야 좀 알만합니다. 원하건대 선제께 드리지 못하였던 것들로써 폐하를 받들어서 선제의 영령을 위로하면 속죄함이 가할 것으로 보이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청춘이 많이 남지 않아서 고혈을 다하여도 오래도록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되옵니다."라 하매, 상께서 이르시길 “그대가 비록 머리털이 빠지고 늙어서 뼈들이 튀어나와도, 나는 응당 그대를 지금과 같이 할 것이오."라 하였다. 상께서 처음 찾아왔을 적에 <관나{貫貝의 오기?}>가 헌신하며 몸을 허락하였던 까닭으로, 즉위하자마자 황후로 삼기로 한 약속이 있었으나, 궁중으로 거두고서도 후가 기뻐하지 않을 것이 걱정되어 후로 봉할 수 없었더니, 후가 상의 뜻을 헤아리고 봉하길 권하였으며, 이어서 애초와 같이 잘 어울리며 말하길 “어미께서 이미 돌아가셨는데, 형제가 서로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겠소!"라 하였으며, <관패> 또한 그렇다 하여서, 우애가 매우 두터워졌더라.
<東明><禮>太后는<蛙>王之女이라.其母<好>太后는「靑河伯」<屋斗辰>之妻而<漱帝>之天妃也라.聖母之爲<蛙>后也에,<好>以后母로受<蛙>寵而生<禮>太后하니,端麗腆美하여,內有<屋因>之傳하고外有<蛙>王之容이라.<蛙>王이愛<東明>而妻之하시니,情則夫婦이오誼則姨也라.生<樟花>孕<類利>而別하니,后曰丈夫之志를不可以女子로錮之라하고,許帝南下라니,聖母이問其久曠하여使帝弟<觧弗>로娶之하여,甲申에生子<王同>하고戊子에生子<王兢>하고壬辰에生女<王典>하니,是年正月에<弗>이卒하고,更爲帝弟<觧百>之妻하여丙申에生子<曷百>하니,時에<類利>이已長하여與<曷百>으로爭妬不睦이라니,聖母命<百>棄后曰"勿與弟相爭"하라.於是에后與<類利>로同室而生女曰<雲>이라.帝聞之하고累夢而送黃金数千斤하여命敀之라니,辛丑八月에始與帝로再會於「鸞坮」하니,時에后春秋이已三十八이라.旧時之容이頗無함에上惻然曰"使汝至此者는吾之罪也"라.后笑曰"自今吾在汝懷而不離"하리니,猶勝於<都>姊之先去라하더니未幾에娠<再思>公主하여,未見其生而帝崩하시니,新上이尊爲天宮皇太后하여專掌后妃當夕,禱子以爲樂曰"夫死從子하니吾何憂哉"야.然常愛帝而自夕하여寵不下<召>‧<房>‧<溫>‧<旃>일러라.
<동명><예>태후는 <금와>왕의 딸이라. 그녀의 어미 <호인>태후는 「청하백」<옥두진>의 처이며 <수제>의 천비라. 성모께서 <금와>의 후가 되매, <호인>은 <성모유화>후의 어미로 <금와>의 승은을 입어 <예>태후를 낳았더니, 단아하고 고왔으며 통통하며 미모여서, 속으로는 <옥인>씨를 전하여 잇고 겉으로는 <금와>왕의 용모이라. <금와>왕이 <동명{상해, 추모}>을 사랑하여 처를 삼아주었더니, 정은 부부이고 따져 보면 이모였더라. <장화>를 낳고 <유리>를 임신하고서 헤어지게 되었더니, 후는 “대장부의 뜻을 여자가 막는 것은 옳지 않다며 제께서 남하하시는 것을 허락하였더니. 성모께서 홀로 지낸지가 오래였느냐를 물으시고서 제의 동생 <해불>로 하여금 혼인하게 하여서, 갑신년{BCE37}에 아들 <왕동>을 낳고, 무자년{BCE33}에 아들 <왕긍>을 낳고, 임진년{BCE29}에 딸 <왕전>을 낳았더니, 이해{BCE33} 정월에 <해불>이 죽고 다시금 제의 동생 <해백>의 처가 되어서 병신년{BCE25}에 아들 <갈백>을 낳으니, 때에 <유리>가 이미 성장하여 <갈백>과 {예후를 차지하는 일로} 다투고 시기하며 화목하지 않았더니, 성모께서 <해백>에게 명하시어 후를 포기하게 하시고는 “동생과 다투지 말라."고 이르셨더니. 이에 후가 <유리>와 함께 같은 방을 쓰더니 딸 <운雲{禮后所生類利女}>을 낳았다. 제께서 소식을 듣고 누차 꿈을 꾸시더니 황금 수천 근을 보내주고 명하시어 찾아오게 하셨더니. 신축년{BCE20} 8월에 비로소 제와 「란대」에서 재회하게 되었더니, 때에 후는 춘추 이미 서른여덟이라. 옛 모습이 사뭇 없어졌음에 상께서 측은히 여기시고 “그대를 이리되게 한 것은 나의 죄요."라 이르셨더니, 후는 “지금 이후로 저는 당신의 품안에 있으면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옵니다."라 하더니만, 도리어 앞서서 죽은 <도>후를 능가하여 오래지 않아서 <재사>공주를 임신하였으며, <재사>공주가 태어나기 전에 제께서 죽으셨더니, 새 임금이 천궁황태후로 높여서 후비들의 당석을 모조리 관장하며 아들 낳기를 비는 일로 즐거움을 삼으시면서,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르는 것이니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 하시고는 자연스럽게 늘 제{유리}를 사랑하시어서 스스로 밤일을 감당하였으며, 총애를 받음도 <소>・<방>・<온>・<전>에 뒤지지 않았음 일러라.
<東明><旃>皇后는「鯤淵侯」<乙宋>之女也.其母<牛姬>는<漱帝>之天妃也라.與聖母同年하여,聖母爲天后之年에爲<奧犍>之妻하여,得幸於<漱帝>하니,<漱帝>曰"汝必大貴이오,不徒爲<奧犍>之妻"이라하였더니,<東明>之初到<九如>之夜에<犍>薦之于枕하여遂相綿而不捨하시니,<犍>이遂以后로献于<東明帝>하여與<萱>后로競寵上下라니,<召>后入宮에序居三位하고.甲申五月에上이尊<召>后之母<旒>太后爲天后故落爲天妃而序居四位호대,寵未嘗衰하고得房이最多라.上雖以軍事疲勞에每與后歓則神爽故,常從于幄舍而供歓如少婦하여慰上이甚多하니,上每稱之曰"汝乃菽粟이니不可一時缺이오.<召>‧<張>은雖美나如薬石하니不可常用이라.諸后中에連得数房者이唯后而<萱>而已라.<萱>은典淨之友오后補膄之交"라,常居而安하고連歓而不損하여每有困憊小痛이며輒引后而歓하여快洗其證故로上常戱后曰汝乃吾溫泉也라하시니,名不虛矣러라.乙酉以来로後宮이漸多하여每多過勞호대,幸后則平故,唯后이連夕而不缺하니,諸后이皆羡之曰"<旃>,與聖母同年,以爲<乙蘭>之親故로,其得寵如是"라하고不知其儀,"合而溫甘和平하여能医上勞也"러라.
<동명><전>황후는 「곤연후」<을송>의 딸이며, 그 어미 <우희>는 <수제>의 천비였더라. 성모와는 나이가 같았으며, 성모가 천후가 되던 해에 <오건>의 처가 되었었으며, <수제>의 승은을 입었더니 <수제>께서 이르시기를 “그대는 필시 매우 귀하게 될 것이야. <오건>의 처가 되려고 헛되이 하지 말게나."라 하셨더니, <동명>께서 처음으로 <구여>에 당도하시던 밤에 <오건>이 잠자리에 천거하여 이후로 서로 얽히더니 버리지 않으시기에, <오건>이 이윽고 후로 삼아서 <동명제>께 바쳐서 <훤>후와 성총받기 상하를 겨루더니, <소>후가 입궁함에 셋째 지위를 차지하였고, 갑신년{BCE37} 5월에 상께서 <소>후의 어미 <류>태후를 높여서 천후를 삼으시는 바람에 천비天妃로 낮아져서 넷째 지위에 있게 되었으나, 성총을 잃지 않았으며 합방하기는 최고로 많았더라. 상께서는 군병의 일로 피로하셔도 후와 더불어서 합환하시면 신기하게 상쾌하였던 까닭에, 항상 휘장막사를 따라다니면서 젊은 여인 같이 합환하여 드려서 상을 위로함이 심히 많았더니, 상께서 매번 칭찬하여 이르시길 “그대는 {매일 먹어야 하는} 콩과 좁쌀이니, 잠시라도 없어서는 아니 되겠소. <소>와 <장>은 비록 예쁘다하나 약돌藥石과 같으니 상용할 수는 없음이고, 여러 후들 중에서 연거푸 여러 번을 합방할 이는 오로지 그대와 <훤> 뿐이오. <훤>은 단아하며 말끔한 벗이고, 그대는 야윈 몸을 보하여 주는 동무요."라고 하셨다. 항상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연거푸 합환하여도 몸이 축나지 않았더니, 피곤하고 좀 괴로울 때마다 잠시 후를 불러서 합환하면 그 증세가 말끔히 사라졌더니, 상은 항상 후를 놀리기를 “그대는 내 온천이오."라 하신 것이 빈말이 아니었더라. 을유년{BCE36} 이래로 후궁들이 점차 늘어나서 매일 과로하심이 많았으나, 후와 합환하면 즉시 평온하여지는지라 오로지 후와 더불어서 매일 저녁 만나시길 거르지 않으셨더니, 여러 후들 모두는 부러우매 “<을전>은 성모와 동갑이고 <을란>의 친척인 까닭에 이와 같이 총애를 누린다."라고 하면서도 그 방법은 알지를 못하였기에, “합환하되 따듯하고 달콤하게 화합하며 평온하게 하여서 상의 노고를 능히 치유한다."고 하였더라.
以故로上이每以黃金数千兩으로密遺於后而縱其㪽好호대,后唯以事上爲苐一樂事하고不喜仙巫禱祝하며不爲子女求福하여,<奧天>이久屈於下하고<奧媛>이久未受寵而不言이러라.后性이混厚圓滿하고待人에常有和氣藹然하고未嘗疾言遽色하며衣服飮食이淡然若仙人호대,惟服溫中之材而不失悅聖之道하니,亦可謂浴水之鴛啄尾之鵞라.后이健厚善子하여,<健>出이有<媛>‧<天>‧<登>‧<坤>‧<潤>‧<乾>‧<真>하고,帝出도<奧花>公主‧<旃花>公主‧<旃>太子‧<犍花>公主‧<乙花>公主‧<宋>太子‧<宋花>公主七人也라.帝崩而后春秋이已五十三矣에容皃이尙未衰而柔如少兒矣라.<召>后爲二世之后專房하고,秘不發丧故로,后欲殉死於殯宮이라니,新上이抱止之而引至<召>后枕하여受初幸하고,<大房>后是夜에亦受幸하니,盖時之三天也라.新上謂<旃>后曰"汝雖年高나父皇이托汝於我하니,雖死나不可離我"라하니,后이感泣曰"妾이事大行二十二年에恩透爱徹하여一毛一肉이莫非大行之有라.雖欲從其遺命하여更報于陛下나奈老에何"오.上이曰"勿慮하라.汝老我少하니可以相合이라.况汝氣血이尙冨하여能使我悅하니何謂老乎"야.遂留於側而連歓数次에儀合情深하여漸入佳妙하니,后以美絃淡粧으로嫵媎百端하여遂娠上子하고年過紀甲猶生上子하고寵不少衰하니後宮이莫不羡其老壯이러라.
이런 이유로 상께서 황금 수천 냥을 몰래 후에게 보내시어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보라고 하셨어도, 후는 오로지 상을 섬기는 것을 제일의 즐거움으로 하면서 선仙‧무巫로 도禱‧축祝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자녀들을 위한 복을 구하지도 아니하여서, <오천>이 오래도록 낮게 굴종하고 <오원>이 오래도록 승은을 입지 못하여도 아무런 말이 없었더라. 후의 성품이 그럭저럭 후하여서 원만하였고 다른 사람들을 대함에 항상 화기로 가득하여 말이 빨라지고 당황해 하는 적이 없었으며, 의복과 음식들은 담담하여 선인과 같았고, 옷은 그 안의 것을 따듯하게 하는 것들로 생각하여서, 성인을 기쁘게 하는 도리를 잃지 않았었으니, 역시 목욕물 속의 수ㅅ원앙과 꼬리를 쪼는 거위라 할 만하였다. 후는 건강하고 후덕하며 자식들을 잘 낳아서, <오건>의 자식으로 <원>・<천>・<곤>・<윤>・<건>・<진>이 있으며, 제의 자식은 <오화>공주・<전화>공주・<전>태자・<건화>공주・<을화>공주・<송>태자・<송화>공주로 일곱이 있었더라. 제께서 죽으시매, 후의 춘추는 이미 쉰셋이었으나 용모는 아직 쇠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유연하였더라. <소>후가 2세후가 되어서 방사를 독차지하고 상이 났음을 숨기고 알리지 않는 까닭에, 후가 빈궁에서 순사하려 하였더니, 새 임금{類利}이 껴안아 말리면서 <소>후의 침소로 끌어들여서 처음으로 승은을 입었고, <대방>후 역시 이날 밤에 승은을 입었더니. 모두가 이 시절의 세 천후이었더니, 새 임금이 <전>후에게 말하여 이르길 “그대는 비록 나이는 많으나 부황父皇께서 내게 맡기셨으니, 설사 죽어서도 내 곁을 떠날 수 없음이오."라고 하여서, 후가 “첩은 대행을 섬기기를 스물 두 해에 받은 은덕과 성총이 온통 스며 있어서 털끝 하나 살점 하나 대행의 것 아님이 없사온지라, 비록 그 유명을 따라 다시금 폐하께 갚고자 하여도 몸이 늙었으니 어찌 해야 하겠는지요?"라 아뢰었더니, 상이 “걱정하지 마세요. 그대는 나이가 들고 나는 젊었으니 서로 잘 맞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대의 기혈이 아직 흘러넘쳐서 나로 하여금 능히 즐겁게 하셨소이다. 무슨, 늙었다는 말이시오?"라 이르고는, 이어서 곁에 머물러서 수차 합환하였더니, 짝이 잘 맞고 정이 깊어져서 점차 아름답고 묘한 지경에 들었더니, 후는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와 옅은 치장으로 교태를 부리면서 온통 헐떡여서 이윽고 상의 자식을 잉태하였고, 나이가 환갑을 넘어서도 도리어 상의 자식을 낳으면서 총애함이 식지 않았더니, 늙어서도 왕성함을 부러워하지 않는 후궁이 없었더라.
<東明><桂>皇后는「桓那侯」<亮>之女이니,其母<桓淑>은<漱帝>之天妃也라.天姿穠麗豪爽하여有急人好俠之風이라니,十九에爲<桓那>女主하여與<句茶>‧<卒本>‧<涉羅>로爭界하여無年不兵故로欲得智勇이可以保國者而爲夫나無其人하여不肯以凡常親戚으로爲配하니,親戚이多怨之라니,及見<芻牟>에遂發大雌之情하여爰修玄牝之禮하사盡以其國界로割與<卒本>하니,其臣이多不平이라니,后曰"天下皆敀於<芻牟>이可也라.尺寸之地를何可爭"이리오하더니,是年十月에與帝로更會于<箕丘>之東하여,以羚換麝而相歓于野人之家하고誓作夫婦하니,國臣이不從호대,后欲棄國而敀<芻牟>故로國人莫知如何라가.甲申冬에又從<芻牟>於<中川>하여㝎献國之策할새,命<烏干>하여率精騎一千하고入<桓那城>하여與<柘>公等으로討其反側者<■原>等以護<桂原>之黨하고,以<芻牟>爲<桓那國>天帝라가.乙酉春正月에,遂廢<桓那國>,以后爲聖配하시니,<桓那國>人이喜迎聖上하여,二月,遂與后로入其国而謁其宗廟하고撫其宗親曰"<桓淑>은吾母也라.敢忽吾民哉"야.遂行天后之禮於其宮而合巹三日하고大赦其民하여,反側之在獄者를亦皆放之하니,其民이欣服이라.乃命后兄<桂孟子>하여代執國政하고,使其子<桓福>으로爲「沛者」하니,<福>父는卽<柘>公也라.
<동명><계>황후는 「환나후」<계량>의 딸이며, 그 어미 <환숙>이 <수제>의 천비였던지라, 타고난 자태에 꽃같이 곱고 호걸처럼 활달하여 급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호걸 같은 기풍이 나타났더니, 나이 열아홉에 <환나국>의 여왕이 되었으며, <구다>・<졸본>・<섭라>와 경계를 마주하여 전쟁 없는 해가 없었기에, 지혜 있고 용맹한 이를 얻어서 나라를 보존하고 지아비로 삼고자 하다가, 그런 사람이 없어서 범상한 친척으로 짝을 짓지 않았더니, 친척들 많은 이가 원망하게 되었는데, <추모>를 보기에 이르더니만 드디어 큰 어미의 정을 발동하여 그윽한 여인의 도리를 닦으시고 그 나라 땅 경계를 모두 <졸본>에게 떼어주었다. 그 신하들의 불평이 많았더니, 후가 이르길 “천하 모두가 <추모>의 것이 될 것인데, 한 자 한 치의 땅을 다툴 수 있겠소."라 하더니, 이해 10월에 <기구>의 동쪽에서 제와 함께 만났고, 영양을 사향노루와 바꾸고는 들판의 민가에서 서로 합환하고 부부가 되기를 서약하였더니, 나라 안의 신하들이 따르지 않아서 후가 나라를 버리고 <추모>에게 귀의하였던 까닭에 나라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더니, 갑신년{BCE37} 겨울에 <추모>가 있던 <중천>으로 찾아가서 함께 나라를 바칠 계책을 정하고는, <오간>에게 명하여 정예기병 1천기를 끌고 <환나성>으로 들어가서 <자>공 등과 더불어서 반대하는 측인 <■원> 등을 토벌하여서 <계원>의 무리들을 지켜주고 <추모>를 <환나국>의 천제로 삼았다가, 을유년{BCE36} 춘정월에 이어서 <환나국>을 폐하고서 후가 성상의 짝이 되었더니, <환나국> 사람들이 기꺼이 성상을 맞이하였기에, 2월에 이윽고 후와 함께 그 나라로 들어가시어 그들의 종묘에 제사하셨으며, 그곳 종친들을 위무하여 이르시길 “<환숙{慕漱帝寵姬, 桂婁母}>이 나의 어미이신데, 감히 내 백성들을 홀대할 수 있겠소!"라 하시고는, 이어서 천후天后로 삼는 예절을 그 궁에서 거행하여 3일간을 합근하시고, 그곳 백성들을 크게 사면하시고 반대하는 측으로 옥에 갇힌 이들 역시 풀어주셨더니, 그곳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따랐더라. 이에 후의 언니 <계맹자>에게 명하시어 국정을 대신하여 집정하게 하시고, 그{계맹자}의 아들 <환복>을 「패자」로 삼으셨더니, <환복>의 아비는 곧 <자>공이었더라.
<孟子>이亦爲<芻牟>之妃하사累經寵幸하니,<桓那>之民이以<芻母>爲父故로<句茶>‧<涉羅>가不敢更窺하여國遂富强하니,莫不悅이라.七月,<好人>太后,至自<曷思>尊爲皇太后,乃依<扶余>王后之制,以<萱>‧<召>‧<桂>爲三天后而至于崩日無變.后,性雅貞淸秀,雖侍上終日而無媚之態故,得房最少,生子亦只子女而已故,入廟之時에「宗府」推<旃>后於<桂>后之上하여,至今猶言當時之誤禮者이多矣라.<旃>后之聖功이非不大矣나,其於創業에安能當<桂>后之万一哉야.<光明>之時에<桂>后이椎下而<高娄>勤愼閑地者는,盖因<孟>后‧<桓福>之不得于「瓊府」故也라.方「子午谷之大戦」에事出不意하여,賊囲於谷中하고俯瞰而輻矢하니,皇軍之死者이難計라.上亦中二矢하여,后이抱而吮之하고負而行之라가,后亦中一矢而不以爲意하니,見風勢而督火攻하여,遂至大捷然後이始治其創하여,其鎭衆自重之度이如是러라.天子立后之時에必以鼓吹登床하여名曰「吹禮」者는自<桂>后始하니,<桂>后이恐上過勞而煩,此禮矣라니,<召>后之爲二世后也에,欲使國人知之하여,吹禮而登床故로,遂爲後世立后之式矣라.后命諸將之妻從夫於陣中者는必使騎馬而不許轝行之風이亦自后始하여稱爲「騎妻」러라.
<맹자{계맹자}> 역시 <추모>의 비가 되사 여러 번 승은을 입었더니, <환나>백성들이 <추모>를 아비로 여기는 까닭에, <구다>와 <섭라>가 감히 다시는 엿보지 못하였고, 나라{환나}가 이윽고 부강하여졌더니, 즐거워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더라. 7월에 <호인>태후가 <갈사>에서부터 도착하여 황태후로 높여지고, 이에 <부여>의 왕・후의 제도에 의거하여 <훤>・<소>・<계>가 세 천후天后로 되어서 죽는 날이 되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계>후는 성품이 우아하며 정숙하고 욕심이 없기로 빼어나서 비록 상을 종일토록 곁에서 모시면서도 아양 떠는 태도가 없었던지라, 합방하기도 가장 적었더니 자식도 역시 달랑 아들 하나에 딸 하나이었던 까닭에, 종묘에 들일 때에도 「종부」가 <전>후를 <계>후의 위로 하였더니, 금일에 이르러서도 그 당시의 예법이 틀렸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전>후는 훌륭한 공적이 크지 않았음은 아니지만, 창업함에 있어서 어찌 능히 <계>후의 만분의 하나에나 당하겠는가! <광명>의 시절에 <계>후가 낮게 추대되어서 <고루>가 근심하고 조심하면서 변방의 외진 땅에 있었던 것은, <맹>후{계맹자}와 <환복>이 「경부{龍骨族 사림들이 居處하는 官府 또는 그 宮人}」를 등에 업지 못한 때문이었어라. <※자오곡대전{荇人國征伐戰場中一處}>이 있었을 적에 불의의 일이 벌어져서 적들이 계곡 속에서 포위하고 숨어서 내려다보면서 화살을 집중하여 쏘아대서 죽은 황군의 수를 세기 어려웠음을 비방한 것이었음이리라. 상 역시 화살 두 대를 맞으시어, 후가 끌어안고 입으로 독을 빨아내고서 등에 업고 빠져나가다가, 후 역시 화살 한 대를 맞았으나 괘념치 않으면서 바람이 센 것을 보더니 화공을 독려하여 이윽고 크게 이긴 연후에 그 부상을 치료하였으니, 그 진중의 무리들이 자신만을 중히 여기는 태도가 이러하였음이었어라. 천자가 후를 세울 적엔 필히 북을 두드리고 나발을 불고서야 침상에 올랐더니, 이름 하길 「취례吹禮{나발 불어서 알리는 예법}」라 하는 것으로 <계>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더니, <계>후가 상께서 과로하시어 괴로워하실 것을 걱정하였음에 이 예법을 만든 것이었더라. <소>후가 2세후가 될 적에 이를 나라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나발을 불어서 예를 행하고 침상에 올랐던 까닭에, 이에 후세에 후를 세우는 예식{☞月皇之禮}으로 되었더라. 후가 모든 장수의 처들에게 명하여 진중에서 지아비를 따르는 이들은 필히 말을 타게 하여서 수레를 타는 풍조를 허락지 않음 역시 후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기처騎妻{말을 타고 종군하는 처}」라 불렀더라.
※<자오곡子午谷>은 현금 <중공>의 <섬서성>남단 <진령산맥秦嶺山脈> 남변이다. 옛 <관중關中>지역과 <한중漢中>지역을 연계하는 요지로 옛 <종남산終南山> 인근이라 하며, <종남산終南山>의 별칭으로는 <주남산周南山>, <진산秦山> <남산南山> 등이 있다. 또한, 유사한 지명 <자오령子午岺>이 하투동남부 <감천甘泉>인근에 있으나, 북방의 <숙신>과 <북갈>들이 <행인국>을 도우려 찾아온 것으로 보아서 <자오곡대전>은 이들 <자오곡> 또는 <자오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자오子午’는 ‘엄청 큰’ 또는 ‘중심’이라는 보통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아서 역시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곳 기록의 <자오곡子午谷>은 동북방의 ‘대흥안령산맥’으로부터 ‘음산산맥’ 또는 ‘곤륜산맥’ 등과 연이어지는 큰 산맥들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큰 계곡 또는 계곡일 것이다.
后不喜粉黛理鬢而天姿이自麗故로,後宮이多倣后而修天姿하니,時稱<桂后粧>이라.又不喜金玉之飾하여雖以翟服侍上이라가,多闕金玉하고惟以真珠綬爲頂飾하니,其母<桓淑>之所佩故로,思其母而用之者也라.人稱<桂>后以<真珠后>者이以此故也라.后父<桂亮>公이嘗爲<閃尼>母所欺하여獵于界上이라가過伏兵於<丹山>하여受困而還故로,上之七年六月親率<沸流>軍三千하고出<汗>上하여先取<丹山>爲<桓那>屬領하니,<閃尼>이怒辱於后라가敗敀而反이라니進攻<﨎河><黃>東에,皆用后計勝之하고及至其都하여與賊<虎山>大戦於都下,上親鼓督戦,<虎山>之矢飛来,后迎其矢于上前連中二矢而毒劇忍痛而不言,上親射<虎山>殺之,以下九將皆損於陣前,賊自知不敢當而降之.遂斬<閃尼>而滅其國爲郡,然後以此臥十一日崩,春秋三十二,子曰<高娄>太子,女曰<曼>公主.以皇后禮葬于<真珠河山>名曰<真珠陵>.上作<吾妻曲>而悲之.<李文真>譯之以詞載于<皇麗詞><林鳴呼>.<東明>天后,凡八人,惟后與<禾>后定婚.典以后之功業於百世,歷代無亡讀<子午之史>,過其谷者,未嘗不,掩卷而歎.
후는 얼굴단장과 머리정리하길 즐거워하지 않았으나, 타고난 맵시가 저절로 고왔던 까닭에, 후궁들 여럿이 모방하여 그 타고난 맵시로 다듬었으니, 때에 <계후장>이라 불렀더라. 또한 금과 옥 등으로 치장하는 것도 즐기지 않아서, 비록 적복으로 상을 기다릴 적에도 금과 옥으로 된 많은 것을 없이하였고 오로지 진주인끈만으로 머리를 장식하였더니, 그 어미 <환숙>이 패용하였던 까닭으로 자신의 어미를 생각하여 사용하였던 것이었으며, 사람들이 <계>후를 <진주후>라 칭한 것은 이 때문이었더라. 후의 아비 <계량>공이 <섬니>의 어미에게 속아서 경계 상에서 사냥하다가 <단산丹山>에서 복병을 지나쳐서 곤욕을 치르고 돌아왔기에, 상께서 재위 7년 6월에 친히 <비류>땅의 군대 3천을 이끌고 <한수汗水> 상류로 나가서 <단산丹山>을 선취하여 <환나>속령으로 하였더니, <섬니>가 노하여 후에게 욕을 퍼 붇다가 패하여 돌아가더니 되돌려 나오기에, <쌍하雙河{二水?}>의 <황산>동쪽으로{黎城 東・西의 濁漳河支流들? 滹沱河上流地境?} 진격하여 공격하시매 모두 후의 계책을 써서 승리하셨고, <섬니>의 도성{潞城地境?}에까지 다다라서 적장 <호산>과 붙어서 그들의 도성 아래에서 크게 싸우셨다. 상께서 몸소 북을 두드려 독전하시매 <호산>의 화살이 날아왔더니, 후가 상의 앞을 가로막아서 연이어 두 발을 맞았으며 독이 지독하여 고통을 참느라 말을 하지 못하였더니, 상께서 친히 <호산>을 쏘아서 죽이고 그 아래인 아홉 장수들 모두를 군진 앞에서 상하게 하셨더니, 적들은 감히 당할 수 없음을 알아서 항복하였다. 이에 <섬니>를 참하고 그 나라를 멸하여 군郡으로 삼았다. 연후로, 이로 인하여 자리에 누운 지 열하루 만에 죽으시니{BCE31年} 춘추 서른둘{BCE62年生}이었다. 아들은 <고루>태자이고 딸은 <만>공주다. 황후의 예법으로 <진주하산>에 장사하였으니, 이름 하길 <진주릉>이었으며, 상께서는 <오처곡>을 만들어 슬퍼하셨다. <이문진{留記 100권을 新集 5권으로 찬하였다는 태학박사}>이 이를 번역하여 그 가사를 <황려사><림명호>에 실었다. <동명>의 천후들은 모두 합하여 여덟이었으나, 오로지 후와 <화>후만이 정식으로 혼인하였던 것이다. 후의 공적과 업적이 후세에 오래도록 책으로 되어 있어서, 역대에 <자오지사子午之史{荇人征伐子午谷戰}>를 읽지 않음이 없었더니{독화살 두 대를 맞은 상을 옹위하다 독화살을 맞고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얘기?}, 그 계곡을 지나친{子午谷 이야기를 이미 읽은} 이들은 미상불 책을 덮고 탄식하였더라.
<禾>皇后,「黃龍王」<宝得>之女也,初爲小妃,<孟>后‧<萱>后之後入爲天后,雖無顯行大德,不失坤儀敬事夫皇,敎子女以方.辛丑六月崩,春秋三十三,葬于<中川之原>,后性仁孝勤儉不與人爭卑辞,愛人篤信天帝之詞,不以帝冑美容爲自矜,盖后之容光爲當世之一,云.
<화>황후는 「황룡왕」<보득>의 딸이며 애초에 소비로 되었다가 <맹>후와 <훤>후의 뒤로 들어서서 천후로 되었고, 비록 현저한 행적과 큰 덕은 없었어도 곤전의 예의를 잃지 않고 부황夫皇을 섬겼으며, 자녀들을 가르치기도 방정하였다. 신축년{BCE20} 6월에 죽었다. 춘추 서른셋{BCE52年生}으로 <중천원{황룡땅}>에 묻혔다. 후의 성품은 인효근검仁孝勤儉하여 다른 이들과 싸우거나 비속한 말을 하지 않았으며, 다른 이들을 아끼고 천제의 말씀을 독실하게 믿었으며, 제의 혈통임과 예쁜 얼굴로 자긍하지 않았으며, 개략 후의 얼굴 곱기는 당세의 제일이었다고 한다.. //
-- 후비열전 끝 --
첫댓글 훌륭한 후비가 많다함은 그만큼 영토를 많이 확보하고 안정된 사회 기반을 다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청송 선생님 잘 보고 갑니다.
해석본이 글이 커지니 나이든분들도 읽기 쉽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왕족이라도 성개방성이 컸군요. 조선에 들어서 위축된것인가요? 고려시대에도 조선과 같지는 않았던것으로 보이는데...수고하셨습니다.
어런 디테일한 이야기들을 위서라하는 사람들..이상한심리자들...이정도로 소설을 쓰려면 방대한 출연자들과 주인공등 ...톨스토이정도는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소위 주몽의 탄생 및 고구리의 始國에 관련한 각종 추측성 기록과 해설들이
추모경과 고구리사략의 본기들과 후비열전을 통해서 정확히게 분별되어질 수 있고,
한무제 유철이 이전과 그의 치세 말년이후의 서한(전한)의 역사 및 그 강역에 대한
잘못된 해설들을 분별해 낼 수 있음에 힘입어서
남당유고 추모경과 고구리사략의 내용대로 우리의 고대사를 복원하고
북방혈통들의 입장에서 복원한 우리들의 고대사를 널리 알려야 할 것입니다...
복원되어 가는 역사, 새로운 사실들이 경이롭기만 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