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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桓檀古記 ]
한국 상고사에 대한 책.
역사책
계연수 편집
1911년
'한단고기'라고도 한다. 한국 상고사에 대한 책으로서 최근에 출판된 책이다. 이 책의 소개서에 의하면, 환단고기는 1911년에 계연수(桂延壽)가 편찬하였다고 한다. 책의 내용은 네 가지 사서, 즉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記), 북부여기(北夫餘記), 태백일사(太白一史)를 하나로 묶어 편찬한 것이다. 한국사의 상고 및 고대의 역사, 신앙, 풍습, 정치, 경제, 예술, 철학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책의 내용 구성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성기(三聖記)〉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安含老)와 그리고 행적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元董仲)이 쓴 것을 각각 상권과 하권으로 구분하여 합친 것으로,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단군(檀君)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시발인 환국(桓國)시대의 환인으로부터 7세 단인(檀因)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神市)시대의 환웅으로부터 18세 단웅(檀熊)까지 1565년의 역사를 압축한 것이다. 하권에는 신시 역대기가 덧붙여 있다.
〈단군세기(檀君世記)〉는 고려시대인 1363년(공민왕 12)에 행촌(杏村)선생 문정공 이암(文靖公 李嵒)이 저술한 책으로,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여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단군님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1세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부터 47세 ‘단군고열가(檀君古列加)'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요약 정리하였다.
〈북부여기(北夫餘記)〉는 고려말의 학자인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찬술한 책이다. ‘상권’은 1세 해모수(解慕潄)로부터 4세까지 163년을 담았고, ‘하권’은 5세 ~ 6세의 51년간을 담았는데, 5세는 북부여가 쇠하여지자 졸본(卒本)으로 내려와 다시 즉위하고 동명(東明)이라고 하였다 하니, 이가 곧 국사학계에서 말하는 고구려 시조로 여겨진다. 이어서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는 시조 해부루로부터 108년간을 담고 있다. 부여로부터 고구려로 변모하여 이어지는 부분이 담겨있다.
〈태백일사(太白一史)〉는 근세조선 연산군과 중종 때의 학자인 이맥(李陌)이 편찬한 책으로, 《환단고기》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우리나라 역사의 원시국가 시대로부터 고려에 이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엔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환국본기(桓國本紀)·신시본기(神市本紀)·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가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삼한관경본기에는 마한세가(馬韓世家) 상·하와 번한세가(番韓世家) 상·하가 담겨있다. 특히, ‘소도경전본훈’은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실어, 우리 민족의 정통적 종교와 철학 및 문자를 소개하고 있다.
《환단고기》 말미에, 이유립(李裕岦)의 청을 들어 책의 정서를 한 오형기(吳炯基)가 쓴 발(跋)문에는, 우리의 역사가 매우 유구함을 강조하고, 기자(箕子)를 부정하고 있다. 또한 신성시되는 우리의 역사를 조선의 유생(儒生)과 불가(佛家)에서는 이를 등한시하고 있으며, 서양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우리 것을 알지 못함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환인, 환웅, 단군 시대를 세부적으로 다루어 실사화하였고, 그 후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역사는 대외적으로도 크게 팽창한 우수하고 장구한 역사로 인식토록 하고 있다. 이는 외세의 침략기에 나타나는 애국심의 발로로 보아지며, 오늘날 한국사학계에서 정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출현한 것은 최근의 일인데, 편찬자 계연수는 제자 이유립에게 경신년(1980)에 이 책을 공개하도록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은 1979년에 영인된 뒤, 일본인 카시마 노보루[鹿島昇]라는 사람이 일역을 하고 그 원문을 게재하면서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오형기가 발을 쓴 것이 1948년(신시개천 5846년이라고 기원을 밝힘)이다. 그렇다면 <계연수-이유립-오형기> 3인(대)을 거치면서도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애국적 저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책에 대해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왜 70여년이란 긴 세월동안 공개하지 않았을까? 일제시대 일본의 탄압을 피해 숨겨두었다가, 언젠가 독립되는 날 공개하려는 의도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나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4가지의 원사료를 사용하였다고 하지만 삼성기와 같이 원시·상고사를 그토록 자세하게 기술한 근거는 무엇이며, 고대사에 나오는 역사 용어가 상고사에도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셋째, 보다 강한 의문은, 근거가 있는 것처럼 자세하게 서술하여 조작한 위서(僞書)가 아닐까? 등이다.
그러나 일부 민간 사학자들은 이를 깊이 신봉하기도 한다. 이런 논쟁은 역사적 사실(史實 historical fact)의 진위여부와 함께 앞으로 더 고찰하여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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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범례에 의하면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가 1911년에 ≪삼성기 三聖紀≫·≪단군세기 檀君世紀≫·≪북부여기 北夫餘紀≫·≪태백일사 太白逸史≫ 등 각기 다른 4권의 책을 하나로 묶은 다음 이기(李沂)의 감수를 받고 묘향산 단굴암에서 필사한 뒤 인쇄했다고 한다.
그런데 편저자인 계연수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때 계연수는 다음 경신년(1980)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하라는 말을 제자인 이유립(李裕岦)에게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환단고기≫는 1979년 수십 부가 영인된 뒤 1982년 일본인 가시마(鹿島昇)가 일역(日譯)하고 원문을 게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세간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4권의 기존 책을 하나로 묶어 탄생시켰다는 ≪환단고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과 체재를 지니고 있다.
≪삼성기≫는 본디 안함로(安含老)가 지은 것과 원동중(元董仲)이 지은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중 계연수 집안에 소장되어 있던 안함로 저작의 ≪삼성기≫를 상편으로, 태천의 진사 백관묵(白寬默)으로부터 얻은 원동중의 ≪삼성기≫를 하편으로 하여 ≪삼성기전≫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1457년(세조 3) 세조가 팔도관찰사에 수압령을 내렸던 책들 가운데 그 이름이 등장한 바 있는 ≪삼성기≫는 한국민족의 기원부터 시작하여 단군조선의 건국과 그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삼성은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가리킨다.
≪단군세기≫는 고려 말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지낸 이암(李嵒)이 1363년 관직에서 은퇴하여 저술했다고 한다. 이 책도 계연수가 백관묵으로부터 얻었다고 하는데, 47대 1,096년에 걸친 단군조선의 편년사가 펼쳐져 있다. 아울러 여기에는 그 역대 왕명과 재위기간, 치적 등도 서술되어 있다.
≪북부여기≫는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저술한 것으로 본디 ≪단군세기 합편≫으로 전해지고 있었는데 삭주의 이형식의 집에서 얻었다고 한다. ≪단군세기 합편≫ 가운데 ≪단군세기≫는 백관묵의 소장본과 글자 한 자의 차이도 없이 일치했다고 한다.
≪북부여기≫는 ≪단군세기≫를 저술한 이암의 현손인 이맥(李陌)이 편찬하였다고 하는데, 계연수의 스승인 이기가 소장했다고 한다.
이 책은 우주의 생성을 주로 다룬 <삼신오제본기 三神五帝本紀>, 환인이 다스렸다는 환국의 역사를 적은 <환국본기 桓國本紀>, 환웅의 치세를 서술한 <신시본기 神市本紀>, 단군왕검이 나누었다는 진한(진조선)·마한(막조선)·번한(번조선) 중 마한과 번한의 역사가 수록되어 있는 <삼한관경본기 三韓管境本紀>, ≪천부경 天符經≫·≪삼일신고 三一神攷≫ 등 단군신화와 관련된 경전교리에 관한 <소도경전본훈 蘇塗經典本訓>, 고구려·발해·고려의 역사 가운데 민족의 자존을 드날린 대외관계사를 중심으로 서술한 <고구려본기>·<대진국본기>·<고려국본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백일사≫는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4권의 책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것이다. 이처럼 ≪환단고기≫는 한국 상고시대의 정치와 종교를 서술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이 책을 어떠한 관점에서 수용하는가에 따라 한국고대사에 대한 인식은 현저한 차이가 나게 된다.
즉 이 책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검토하는 일이 필요해지는데, 이에 대한 시각은 그 내용을 수용하는 태도와 비판적 태도, 예컨대 위서(僞書)로 간주하는 견해로 나누어진다. 이 책을 위서로 간주하는 논자들의 입론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 책이 편찬된 후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약 70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것은 일반의 상식을 뛰어넘는 이례적인 일이다. 뿐만 아니라 계연수나 이유립이 이 책의 공개를 늦추었던 동기가 충분히 납득되지 않기 때문에 그 편찬시기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둘째, 이 책은 내용상 관직명·인명·지명·용어 등에 있어 시간적 비약이 지나치게 심하다. 가령, 고구려의 교육기관인 ‘경당(扃堂)’이나 그 관직인 ‘욕살(褥薩)’ 등이 단군조선 때에도 그대로 등장하고 있거니와 ‘문화’·‘원시국가’ 등을 비롯한 근대적 용어도 사용되고 있다.
셋째, 이 책은 일제시기에 소개된 신채호(申采浩)의 상고사 인식체계와 그 용어뿐 아니라 광복 이후에 작성된 위서로 밝혀진 ≪단기고사 檀奇古史≫의 영향까지 받고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이 책을 위서로 간주하는 논자들은 ≪환단고기≫의 초고는 빨라야 1949년 이후에 성립되었을 것이며, 그 뒤 그 소장자인 이유립이 이를 수정, 보충하여 1979년 세상에 내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환단고기 [桓檀古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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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초간본으로 이유립 선생님에게서 배운 양종현씨의 증언입니다.
환단고기는 무엇인가요?
『환단고기』는 안함로의 『 삼성기』(삼성기 상), 원동중의 『 삼성기』(삼성기 하), 행촌 이암의 『 단군세기』, 범장의 『 북부여기』, 일십당 이맥의 『 태백일사』를 모아 한 권으로 묶은 기념비적 사서이다. 신라의 고승 안함로에서 조선조 이맥에 이르기까지, 천 년 세월에 걸쳐 다섯 사람이 저술한 사서가 하나의 책으로 집대성 된 것이다.
한민족 고유 사서의 소실
예로부터 전해 오던 한민족의 고유 사서 대부분은 환국-배달-고조선의 삼성조 시대 이후 수천 년 동안 무수한 전란 속에서 화재로 소실되거나 외적에게 탈취되었다. 그리고 고려 때는 국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유가와 불가 사상에 벗어난 사서들이 대거 소각되었다. 특히 고려 중기 김부식의 대대적인 사료 수거와 소각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민족사의 허리가 잘려나간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다.
조선에서도 사서 소멸은 중앙 조정에 의해 계속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대 전란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우리 사서가 탈취·소실되었고, 그 뒤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행한 조선사 말살 작전으로 총 51종 20여만 권의 서적이 소각 또는 인멸되었다.
환단고기는 한민족 고유 사서의 완결본
이렇게 외세 침략 혹은 우리 스스로 저지른 과오 때문에 한민족사의 참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 버린 지금, 천우신조로『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삼성조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근세조선을 제외한 한민족의 전 역사만 아니라 상고시대 동북아 문화권의 정치, 경제, 종교, 지리,풍속, 언어, 음악, 건축, 국제 관계 등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전하는『 환단고기』는 한민족 고유 사서의 완결본이라 하겠다
환단고기는 누가 썼나요?
[환단고기]의 다섯권의 집필에 관계된 인물들
안함로(安含老, 579~640)
안함은 속성이 김씨(金氏)이고 시부이찬(詩賦伊飡)의 손자이며 신라 진평왕 때의 도승(道僧)이다.
진평왕 22년(600)에 왕명을 받들어 중국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일찍이 뜻을 방외(方外)에 두었던 그는 정신이 통명(通明)하고 미계(迷界)를 초연히 뛰어넘어 머묾을 뜻대로 하였고 무수한 이적이 전해지고 있다. 선덕왕(善德王) 9년(640) 9월 23일에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입적하니 향년 62세였다.
이 달에 나라의 사신이 중국으로부터 돌아오다가 뜻밖에 법사를 만나서 푸른 물결 위에 자리를 펴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연(怡然)히 서쪽을 향하여 떠났다. 그는 물위를 걷고 공중을 날아다님을 뜻대로 하는 신승이었으며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운초 계연수는, "[삼성기] 상본(上本)은 계연수 구전(舊傳)의 가장본(家藏本)이며, 하본(下本)은 원동중 찬(撰)으로 평북(平北) 태천(泰川)의 진사(進士) 백관묵 씨(白寬默氏) 집에서 얻었다"고 하였다. [삼성기]는 세조의 수상서(收上書) 목록 가운데 들어 있으며 [왕조실록]의 세조 유시(諭示)를 보면 이 책의 저자 안함로 - 원동중의 이름까지 명시되어 있다.
원동중
원동중의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세조가 팔도 관찰사에게 수거하도록 유시한 도서 목록에 안함로와 더불어 [삼성기]의 저자로 기록되어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의 인물임이 분명하다.
이암(1297~1364)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공민왕 13년(1364)에 타계했는데 그가 죽자 공민왕은 슬퍼하여 이르기를 "원로(元老)여! 몸은 비록 죽었으나, 그 공은 아직 살아있으니, 내 그대의 의용(儀容)을 그려 모든 경상들에게 그 기풍을 진작케 하리라" 하고 친히 초상화를 그리고 행촌이란 두 글자를 써서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조선일보 1983.3.20).
[단군세기]는 고려 말 공민왕 12년(1363)에 벼슬을 그만두고 강도(江都)의 행촌(杏村)에 들어가 저술 한 것이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에 의하면 이명(李茗),범장(范樟)과 같이 천보산(天寶山) 태소암(太素庵)에서 놀 때 소전(素佺)이라는 한 거사로부터 많은 기고지서(奇古之書) - 이는 환국이후로 전해 내려오는 역사의 진결이라 한다 - 를 얻어 행촌 이암은 [단군세기]를, 범장은 [북부여기](상.하)를 썼고, 청평산인(靑平山人) 이명은 태백일사와 규원사화에 나오는 [진역유기(震域留記)] 3권을 썼다고 한다.
행촌삼서는 [단군세기],[태백진훈],[농상집요]가 있다. 끝 책은 문정공 목은 이색이 서문을 썼으며 현재 우리나라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도 나온다.
복애거사 범장[본명 범세동,고려말 충신 두문동 72현중 1인]
범장의 생에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의 관직 생활이 전부입니다. 범장은 공민왕 18년(1369)에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윤에 이어 낭사의 수장인 간의대부를 지냈습니다. 1335년에 천보산에서 이암,이명과 함께 소전거사로부터 비서를 전수받은지 30년이 더 지나 뒤늦게 관직에 발을 들인 것입니다.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범장은 벼슬에서 물러나 뜻을 같이하는 70여명과 함께 만수산 두문동에 은거하여습니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끝내 출사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저서로는 [화동인물총기][동방연원록] 그리고 원천석과 함께 편찬한 [화해사전] 등이 있습니다. (환단고기,상생출판 63쪽)
<금성 범씨 족보에 나오는 범세동 : 북부여기와 천부경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이맥(李陌)
: [환단휘시]에 의하면 행촌 이암의 현손이라고 한다. 조선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1498) 직간을 하다 미움을 사서 괴산으로 귀양을 갔다.(1504,연산10년). 16년의 귀양살이(1504~1520)끝에 중종 15년 때 찬수관이 되어 내각의 비장서적과 귀양살이 시절에 고로古老들로부터 들은 비장사서들을 열람한 것을 바탕으로 [태백일사]를 지었다. 이것도 처음에는 세상에 놓을 수가 없어 비장서로 깊숙히 감추었다고 한다. 자신의 호를 일십당이라 했던 그는 [태백일사]속에 민족불멸의 혈맥을 펼친 8권의 보서를 썼다
환단고기를 감수,편찬한 인물들
이기(李沂,1848~1908) : 호는 해학(海鶴), 전북 만경(萬頃)출생으로 한 때는 전봉준 장군과 거사를 꾀했으며 을사보호조약 이후로 일본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을사 5적신(五賊臣)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진도로 귀양갔다. 출옥후 민중계몽운동을 하다가 기유년(1909) 5월 25일 63세로 한많은 인생을 절식(絶食)으로 자결하였다.
계연수(桂延壽,1864~1920) : 호는 운초(雲樵). 해학 이기(李沂)의 문인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밀정에 살해당했다(1920).
계연수에 대한 기록은 [해동인물지(1969)와 [정신철학통편](1920)외에는 찾기 어렵습니다. 계연수의 간략한 생애가 기록된 [해동인물지]에 따르면 계연수의 자는 인경,호는 운초이고 평안도 선천에서 살았으며 이기의 문하생이 되어 백가의 책을 섭렵한후 무술년(1898)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등을 간행하였습니다. 기미년(1919)에 임시정부의 이상룡 막하로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에 만주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철학통편]은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발견한(1916)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기와 계연수의 만남
1897년(34세)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그로부터 두 해 동안에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그리고 [참전계경],[태백일사],[천부경요해] 등을 간행하였습니다.
1909년 대영절(3월 16일)에 이기,나철 등이 단학회를 창립하고 그해 5월 5일에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께 이를 고할때 계연수도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두달 후에 이기가 자진하자, 계연수가 그뒤를 이어 단학회 2대 회장을 맡았습니다.
환단고기라는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과정은 ?
<환단고기>의 편찬, 계연수
<환단고기>는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 계연수(1864~1920)가, 지인들로부터 구한 한민족 정통 사서들을 한 권으로 엮은 책입니다.
안함로의 <삼성기>는 그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것이고,
원동중의 <삼성기>는 인근의 태천에 살던 백관묵에게서 구하였습니다.
<단군세기> 또한 백관묵의 소장본이고,
<북부여기>는 삭주 사람 이형식의 소장본이었습니다
<태백일사>는 그의 스승이자 항일운동 동지인 해학 이기의 집안에서 전해 오던 것이었다.
<환단고기 사서 소장 위치>
계연수는 원래 우리 옛 역사와 민족혼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여러 양반가와 사찰을 돌아다니며 비장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옛 사료를 많이 수집하였습니다. 약초를 캐어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뿐 오로지 역사 밝히기에 골몰하다가 1897년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이후 여러 권의 역사서를 발간하였습니다.
이기는 정약용의 학통을 계승한 실학자로서 당대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또한 <단군세기>를 쓴 이암과 <태백일사>를 쓴 이맥의 직계 후손으로 우리의 고대사에도 해박하였습니다. 이기의 지도 아래 계연수가 발간한 역사서의 결정판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1911년 계연수는, 그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와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에서 <환단고기> 30부를 간행하였습니다. 이로써, 9천 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외세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동방 한민족이 절망과 통탄의 벼랑 끝에 서 있던 그때, 민족의 국통 맥을 천지에 선포하는 위대한 사서가 출간된 것입니다.
<환단고기 발간에 자금을 댄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
운초 계연수는 항일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천마산대, 서로군정서 등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57세 때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환단고기를 대중화시킨 이유립
<이유립 평전>
그런데 당시 압록강에 처참하게 버려진 그의 시신이 수습되는 광경을 지켜본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훗날 <환단고기>를 널리 대중화시킨 이유립(1907~1986)선생입니다
이유립은 이암과 이맥의 후손으로 평안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이던 이관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유립은 계연수와 친했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역사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13세 때(1919) 단학회가 주관하는 교육기관인 배달의숙倍達義塾에 들어가 계연수, 이덕수 두 스승의 강의를 들으며 <환단고기>를 공부하였습다.
이유립의 부친 이관집이 계연수의 [단군세기],[태백진훈] 출판에 협력하고 함께 역사를 발굴한 인연으로 이유립이 초간본 30권중 한권을 자연스럽게 전수받음 (현 단단학회 회장 양종현(1949~ )씨 증언)
그 후 독립원의 통신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14세), 신간회의 삭주 지부를 결성하는(21세)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1948년 광복 직후에는 단학회 기관지 <태극>을 발행, 그 주간主幹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48년에, 계연수 사후 그에게 전수된 <환단고기>를 가지고 월남하였습니다.
이후 단학회檀學會를 단단학회檀檀學會로 개칭하였고, 1963년 대전에 정착한 이후에는 후학을 기르며 역사 연구와 강연에 전념하였습니다.
이유립이 13년 동안(1963~1976) 거쳐했던 대전 은행동의 골목 : 일제 때 지은 좁고 낡은 적산가옥의 작은 방을 얻어 기거하며 역사 연구를 하고 후학을 길렀다.
오형기 필사 사건 1949년
이유립이 남하한 직후, 한문과 역사에 해박한 그에게 여러 사람이 배움을 청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오형기였습니다. 현 단단학회 회장이자 이유립의 제자인 양종현에 의하면, 오형기는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구도자적인 의지를 가지고 환단고기 공부에 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1949년에 오형기는 이유립이 소장하고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을 빌려 가서 필사하였습니다. 이때 오형기가 책의 말미에 발문을 붙여 썼는데, 책을 지은 사람이 쓰는 것이 상례인 발문을 오형기가 임의로 쓴 것에 대해 이유립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1976년은 이유립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한 해이기도 합니다. 박창암의 배려로 의정부로 올라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백내장 수술 차 5일간 집을 비운 사이에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줄로 알고 밀린 집세 대신으로 이유립의 책을 모두 팔아 버린 것입니다. 이때 자신의 생명만큼 소중히 여기던 [환단고기] 초간본도 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오형기 필사본이 있었기에[환단고기] 전수 맥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환단고기>의 판본 문제
오형기 필사본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이유립의 문하생 조병윤이 1979년에 서울의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에서 이 필사본을 영인하여 100부를 출판한 것입니다 이른바 ‘광오이해본’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허락도 없이 시중에 배포된 것입니다.
이에 사태 수습 차원에서 이유립의 단단학회는 문제의 발문을 삭제하고 오자를 바로잡은 새로운 필사본을 만들었습다. 원고는 1979년 그해에 완료되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1983년에야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하여 100부가 발간하였습니다.
<환단고기> 판본 비교
현재까지 알려진 <환단고기> 판본은 1911년 계연수가 간행한 초간본, 1949년 오형기가 필사한 오형기본, 1979 년 오형기 필사본을 조병윤이 광오이해사에서 영인 발간한 광오이해사본, 1983년 이유립이 오형기 필사본을 교정하여 발간한 배달의숙본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1911년초간본은 1976년 이유립이 분실하였습니다.
***1976년 의정부 거주시 집세가 5개월이나 체불된 상태에서 백내장 수술차 군산에 사는 종친 , 이공빈이 운영하는 병원'공안과'에 간 사이 집주인이 책을 모두 팔아버려 [환단고기]초간본을 분실함 (이유립 증언) ***
지금 세상에 나와 있는 <환단고기>는 광오이해사본과 배달의숙본 두가지입니다. 배달의숙본은 그 목차에 표기된 ‘가섭원부여기’ 로써 광오이해사본과 쉽게 구별됩니다. 오형기가 목차를 필사할 때 가섭원부여기를 누락시켰지만, 이유립이 예전에 초간본을 봤던 기억을 더듬어 그것을 되살린 것으로 파악됩니다.
1980~90년대에 나온 한글 번역서 <환단고기>는 대부분 광오이해사본을 저본으로 하였고, 2000년대 이후에는 배달의숙본을 저본으로 한 번역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황당한 일본어판 <환단고기> 출간
그 무렵 <환단고기>가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는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광오이해사본을 입수하여 검토한 일본인 변호사 가지마 노보루鹿島昇가 <환단고기>를 일본 천황가의 뿌리를 밝혀줄 수 있는 책이라 여긴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가지마는 ‘<환단고기>는 아시아의 至寶’라 극찬하고 자국의 정계와 재계의 후원을 끌어내어 1982년 ‘실크로드 흥망사’ 라는 부제를 붙인 일본어판 <환단고기>를 출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일본어판은 환국 - 배달 - 고조선 - 고구려 - 대진국(발해) - 고려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를 배달 - 야마토일본 - 나라일본 - 헤이안시대로 이어지는 일본 역사로 둔갑시켜 놓았습니다. 동방 한민족의 역사가 중동 유대족의 역사에서 발원하였다는 황당한 주장도 했습니다.
<환단고기 일본어판>
김은수의 첫 <환단고기> 번역본과 대중적 유행
당시 국내에서는 이유립과 임승국이 우리 고대사를 월간지 <자유>에 수년 동안 연재해 오던 터라, 한민족의 상고 역사와 신교 문화가 조금씩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인이 쓴 <환단고기>가 한국에 역수입되어 소개되자, 한국 역사학계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대중의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1985년 당시 고등학교 교사이던 김은수가 첫 번역서를 낸 이후 오늘날까지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환단고기> 번역본이 출판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한민족의 시원 역사와 문화를 복구하려다가 일제의 역사 도륙의 칼날에 무참히 죽어간 계연수와 그의 스승 이기,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역사 연구에 헌신하며 <환단고기>를 널리 알린 이유립! 이들은 모두 ‘한민족 사학의 아버지’라 불러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출처 : 환단고기 완역본 (상생출판 2012년 2쇄본을 중심으로 정리)
"(... 생략.....)1985년 6월 <주해 환단고기>(가나출판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서문에서 ‘정해숙 선생님, 자료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환단고기’를 읽으면서 나 역시 가슴이 벅찼다. 5·16 쿠데타와 전두환 정권의 국가폭력으로 국민들 심성은 갈기갈기 찢기고 현실은 참혹했다. 하지만 특히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줄 수 있는 환단고기를 보면서 이렇게 훌륭한 문화를 가진 민족의 후손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책 출판 이후 서울의 <한국방송>(KBS)에서 학교로 취재를 왔고, 얼마 동안 연속적으로 방송했다. 한동안 ‘환단고기’에 대한 정사·야사 논쟁이 일어나 방송에서 토론회도 열렸다. 이병도 계열의 제도권 학자들은 야사라고 일축해 버렸지만 거기에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번역자인 김은수 선생이 대학교수였다면 다른 차원에서 접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사회의 학문 풍토를 확인한 씁쓸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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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 범례
고기인용의 시작은 저 일연의 <삼국유사>로부터라 할 수있다. 그러나 지금 그 고기나마 얻어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등을 한 책으로 묶어 <환단고기>라 이름하였다.
<삼성기>는 두 종류가 있어 비슷하나 완전한 것은 아니다. 안함로씨가 찬한 것으로 우리 집안에 전해 오는 책을 이제 <삼성기 전 상편>이라 하고 원동중씨가 찬하고 태천의 백진사 관묵씨로부터 얻은 것을 이제 <삼성기 전 하편>으로 하여 통틀어 <삼성기 전>이라 한다.
<단군세기>는 흥생촌의 노인이 엮은 것으로 행촌선생 문정공이 전한 책이다. 이 책도 역시 백진사로부터 얻은 것이다. 진사의 집은 글로써 전통이 알려졌던 오래된 가문으로 본래 많은 책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제 두 종류의 사서가 함께 그의 집에서 나왔다 함은 어찌 다만 백 사람의 벗이 주는 선물에 비길 수 있을 건가? 조국에 만장의 광채를 비춤이라 할 것이다.
<북부여기 상하>는 휴애거사 범장이 찬한 것이다. 본래 <단군세기합편>이란 이름으로 전해지는 책이 있었던 바 삭주의 이동 이진사형식의 집에서 나온 것이다. <단군세기>는 백진사가 간직했던 것과는 글자 하나의 차이도 없다. 이제 또 별본이 있어 세간에 돌아다니는 것이 있지만, 이는 그 내용이 앞의 책과는 매우 다른바가 있을 뿐만아니라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태백일사>는 일십당 주인 이맥이 펴낸 것으로 해학 이기 선생이 간직했던 책이다. 대저 한단 이래로 서로 전하여 온 교학 경문을 모두 사용한 전거가 한번 보아도 뚜렷한 것들이다. 또 저 <천부경>과 <삼일신고>두책의 전문이 함께 편중에 있어 실로 낭가의 입장에서 보면 유가의 대학 중용과 비교할 만한 것이다. 오호라! 한단이래로 전하여 온 삼일심법은 참으로 이책에 있는 바, 모름지기 태백진교가 다시 일어날 토대가 되지 않을 것인가? 손도 저절로 춤을 추고 발도 저절로 춤추고 흥겨워 소리지르고 싶으니, 기쁨에 미칠 지경이로다.
<환단고기> 모두 해학선생의 감수를 거치고 또 내가 정성 근면을 다하여 옮겨 쓴 것이다. 또 홍범도 오동진의 두 벗이 돈을 내어 여러분에게 부탁하여 인쇄해 내는 바, 하나는 자아인간의 주성발견으로 크게 기뻐하며, 하나는 민족문화의 표출이념이 됨으로써 크게 기뻐하며, 하나는 세계 인류의 대합 공존으로써 크게 기뻐하는 바이다.
신시개천 5808년,즉 광무15년의 신해 5월 광개절에 태백의 유도 선천의 계연수인경이 묘향산 단굴암에서쓰다.
삼성기 전 상편
한단고기
한단고기
三聖記 全 上篇
안함로 지음
우리 한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지금의 베리아를 말함)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녀동남 800이 흑수백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환인씨은 또한 감군으로서 천계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환국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환인씨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이라고도 했다. 환인씨는 일곱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뒤에 한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3,7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사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팔괘를 그으사 올 것을 알며 상을 잡으사 신을 움직였다.
또 여러 영험스러운 이들과 뭇철인들이 보필하도록 하시더니 웅씨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매,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하니, 온 세상이 조공을 바치며 새와 짐승도 덩달아 춤추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지상 최고의 신이라고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임이 없었다.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갖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루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들을 두루 교화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희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게는 군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장려케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병진(BC,425)년, 주나라 고임금(BC,440-425)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바꾸고 백악으로부터 또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에 팔조를 법으로 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지냄을 종교로 하고 누에기르기에 힘쓰도록 하였다. 어딜 가나 금지하는 바가 없었고 죄를 처자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하며 백성과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나라를 다스렸다. 사내에게는 언제나 직업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좋은 짝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재물이 쌓였다. 산엔 도적이 없고 들엔 굶주린 자가 없으며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단군왕검은 무진(BC,2333)년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를 전하니 그 햇수가 2096년을 헤아렸다.
임술(BC,239)년 진나라 시황(BC,246-206)때 신인이신 대해모수께서 웅심산에서 일어났다.
정미(BC,194)년 한나라 해제때 연나라의 추장이었던 위만이 은근히 서쪽 변두리 땅의 한 구석에 스며들었는데 번한의 준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다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했다. 이로부터 삼한의 무리는 거의 한수의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해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계유(BC,108)년 한나라의 무제때에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우거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이라고 했다.
을미(BC,86)년 한나라의 소제(BC,87-74)때, 부여의 옛도읍을 차지하여 동명이라고 나라 이름을 부르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 땅이다.
계해(BC,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출처: 한의 뿌리와 미래(cafe.daum.net/hanfu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