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只有)라는 서원이 있는데
보통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더벅머리 한 학동이
서원 옆 개울에서 나물을 씻고 있다.
스승의 찬을 마련하려 함인가 보다.
여기에 든지 몇 해나 되느냐고 물으니
두 손을 들어 열 손가락을 펴 보인다.
많이 배웠느냐고 다시 묻자
이제 겨우 나물 씻는 법을 익혔을 뿐이란다.
학동들이 많은가 보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다섯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강(講)을 듣느냐는 물음엔
아직 스승의 얼굴도 뵈온 적이 없다는 대답이다.

목화밭 / 임보
목화밭이 십여 리 벋어 있다.
김매는 자들이 밭이랑에 떼를 지어 우굴거리기에
가까이 가 보았더니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 무리가 아닌가.
토숙(土叔)이란 자가 원공들을 길들여
목화 농사를 하고 있는데
놈들은 실도 뽑고
베도 짤 줄 안다고 한다.
사람들이 옷을 귀찮게 여겨 밭을 버려 두자
원공들을 달래 그렇게 하고 있는데
베를 가져가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이 가을엔 우선 저놈들에게
잠방이라도 해 입힐까 보다고
토숙(土叔)은 소처럼 웃고 있다.

도화밀천(桃花蜜泉) / 임보
자운동(紫雲洞) 골짝은 온통 복숭아꽃 천지다
가도 가도 꽃과 벌들의 세상이다
흐르는 개울물에 목을 적시며 시장끼를 달래는데
그런 내 꼴을 보고 민망했던지
동행하던 목천(木川)이
자신의 발목을 꽉 움켜잡으라 이른다
휙 바람이 일더니
목천(木川)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의 도포자락은 날개가 되었는데
그는 한 마리 벌이었다
벌의 발에 매달려 떠 있는 나도
날개가 돋아 있다
우리는 한 도화밀천(桃花蜜泉)에 기어들어
꿀을 파먹다 이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던가
햇살이 너무 따가와 눈을 떴더니
집채보다도 더 큰 둥근 분홍 바위 위다
날개를 다시 펴고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는데
돌아와 보니
우리가 누웠던 곳은 한 알의
복숭아 열매였다
어느 새 익은 복숭아들이
가지가 휘도록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우리는 잘 익은 천도(天桃)를 골라 깨물면서
자운동(紫雲洞) 골짝을 흥얼거리며
기어올랐다.

신발 / 임보
노산(露山)과 황주(黃舟)는
다 신발쟁이들이건만
그들의 하는 일은 같지 않다
노산(露山)은
수만 마리의 거미들을
우리 속에 가두어 사육하는데
놈들의 먹이에 금분(金粉)을 넣어
황금의 실을 뽑아낸다
그 거미줄로 엮어 만든 신발을
규(珪)라고 하는데
규를 신은 자는
불 위를 그냥 걸을 수 있다.
황주(黃舟)는
옥단(玉丹)이라는 거름으로 뽕나무를 기르는데
뽕잎이 옥처럼 맑다
그 뽕잎에 매달려 사는 누에들의
몸뚱이 또한 투명하기 수정이다
그놈들이 뽑아낸 명주실로 짠 것이
와(蝸)라는 신발인데
와를 신은 자는
물 위를 그냥 걸을 수 있다.
황(黃)과 노(露) 두 사람이
각기 제 신발들을 놓고 자랑하고 있다
길을 가던 한 나그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 있다가
자신의 맨발을 쳐들어 보이며
"나는 이것으로 다 걸을 수 있다"
고 웃으며 지나간다.

종(鐘) / 임보
산길을 가다 도우(道友)라는 여인을 만났다
방장사(方丈舍)라는 절에서 십여 년 수행을 하다
싱거워 그만 떠나는 길이라고 한다
보아하니 땡추다
심심하던 터라 이야기 이야기하며
함께 길을 간다
새를 만나면 새 얘기
나무를 만나면 나무 얘기
바람과 구름
달과 별들의 얘기도
이제는 다 동이 났다
개울에 이르러 물을 마시려는데
어디선가
작은 은종(銀鐘)의 울림이 코를 간지린다
소리 나는 곳을 두리번거렸더니
도우(道友) 웃으며
그녀의 배꼽 밑을 살며시 열어
물 속에 드리워 보인다
두 다리 사이에 매달린 예쁜 은백의 종이
물 그림자 속에서 울고 있다
두 손으로 와락 물을 움켜쥐었더니
도우(道友) 힘없이 물 위에 주저앉는다
그러자
개울에 잠겼던 산도 구름도 다
산산 조각이 나고
내 피는 종의 소리로
가득 끓었다
옷이 마르기를 기다려 다시 길에 서는데
도우(道友)는 오던 길을 되짚어 방장사로 향하고
나는 해를 따라 서쪽으로 걷는다
이제 보니
도우는 땡추가 아니라 보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