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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7. 나를 따르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마태복음 9장 9절입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마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오늘은 제자도 일곱 번째로 제목은 “나를 따르라”입니다.
이 말씀은 영어 성경들에서 모두 “follow me”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 “나를 따르라”는 본회퍼 목사의 아주 유명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지요. 그가 한 학기 동안 강의하고 설교한 제자도에 관련된 부분들을 모아서 나중에 “나를 따르라”, “follow me”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온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가 죽은 후에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진보 기독교를 만들게 되는데 그 사람들이 아주 중요시하는 본회퍼 목사의 책들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요즘 오후 프로그램에서 진보기독교와 휴머니즘에 대해서 계속 살펴보고 있는데 본회퍼 목사의 주장은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복을 받겠다는 cheap grace, 싸구려 은혜를 추구하는 서구 기독교는 잘못된 것이고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어 예수님이 남기신 일을 감당하는 것이 기독교이어야 하고 그 일이란 바로 휴머니즘이라는 것이지요.
본회퍼 목사가 서구 기독교의 문제점을 cheap grace라고 질타한 것은 정확한 지적입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보았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휴머니스트들이 되라고 명령하셨다고 보고 "타자를 위한 삶"을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비종교적 기독교를 주장하기까지 했지요. 진정한 기독교는 종교의 탈을 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반면에 지금 전 세계 인구 중 13억 명이 크리스찬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탐욕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성경 해석 때문이었습니다. 그 성경해석이 기독교를 이렇게 번창시켰지요.
오늘날의 세계 기독교의 상황은 가톨릭과 개신교 공히 기독교를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들어 놓은 탐욕적인 기독교와 이 세상 젊은이들을 열광시킨 본회퍼에서 비롯된 진보 기독교가 서로 충돌하는 상황입니다. 개신교의 경우는 교회연합체까지도 WEA와 WCC로 나뉘어 있지요. 어느 쪽이 옳을까요? 우리의 결론은 다 하나님께서 적재적소에 쓰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쓰시는 모습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쪽 모두 옳다고 보는 것은 오류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민수기 22장에서 발람이 발락을 찾아갈 때 하나님께서 나귀에게 말을 하게 만드시지요. 나귀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귀를 쓰셨다고 해서 나귀가 옳은 것이 아니듯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를 세우시고 부흥시키셨다고 해서 그 교회의 성경 해석이 옳다고 보는 것은 오류입니다. 하나님은 제멋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도 활용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성장론자들이나 메가 처치 쪽에서 항상 내세우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으면 교회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겠느냐”는 주장은 논리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거대한 이단 단체인 통일교 쪽 사람이 그런 주장을 하면 뭐라고 답변할 겁니까?
그러나 메가 처치를 만든 사람들이 나중에 하나님께 정죄를 받을지 칭찬을 받을지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또한 진보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이 길 가의 돌멩이처럼 쓰임을 받고 버림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칭찬을 받을 것인지도 우리의 관심 사항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영역이고 우리는 다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셨듯이 우리들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명확히 점검하는 일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제자도는 제자들이 걷는 길인데 그래야 우리들이 정확한 제자도를 걸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과정에서 우리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교회사에서 내노라 하는 해석들이 많지만 제각각 푯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달라도 너무 달라요.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긴장할 수밖에 없지요. "어느 교회가 이런 길을 걸어갔더라. 그 교회가 지금 세상에서 제일 크게 성장했더라. 그러니 그 교회가 갔던 길을 우리도 따라가자." 이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항상 깨어 있어서 우리에게 가라고 하신 길이 어떤 길인가를 명확하게 찾아내고 꾸준히 그 길을 걷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쓰신 동사가 헬라어 아콜루데오입니다. 이 아콜루데오라는 동사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같이 가다”, “동행하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향해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신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시기에 베드로에게 함께 가자고 하시는 것인가? 이것이 성경의 계시의 핵심입니다.
본회퍼 목사는 유럽 기독교가 전부 엉뚱한 목적을 가지고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cheap grace, 싸구려 은혜를 추구한다고 질타하면서 휴머니즘의 길로 가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본회퍼 목사는 옳았는가? 본회퍼 목사가 맞았느냐 틀렸느냐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는데 있어서 선진들이 걸었던, 교회사에서 나타났던 다양한 제자도들을 우리가 객관적인 눈으로 자세히 살펴보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왜 부르셨을까요? 세관에 앉아서 세리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마태에게 다가가셔서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나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해석은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을 부어주시려고"입니다. 억지를 쓰는 거지요. 그 다음 두 번째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게 하시려고"입니다. 첫 번째 경우야 뭐 우리가 참고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이고 두 번째 경우가 우리의 관심 대상이지요.
교회사에서 나타난 선한 삶을 추구하는 제자도는 크게 볼 때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도덕주의 기독교이고 다른 하나는 휴머니즘 기독교입니다. 선한 삶을 어떤 삶으로 규정하는가가 다른 것이지요.
보수 기독교는 윤리도덕적인 삶을 선한 삶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윤리도덕의 목적은 자기가 속해 있는 세속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을 거기에 억지로 갖다 맞춘 것이 보수 기독교입니다.
이 경우의 가장 대표적인 오류를 꼽는다면 유럽 부르조아 개신교인들의 검소한 생활을 꼽을 수 있습니다. 장로교의 성경 해석이 퍼지면서 이 사람들이 캘빈의 예정론을 받아들였는데 캘빈의 예정론에 따르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들이 선택을 받아서 구원을 얻게 되는데 그게 누군지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면 내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증거를 자기의 삶에서 계속 확인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당시의 유럽 부르조아 기독교인들이 선택한 방법이 검소한 생활과 받은 소명을 잘 감당하는 삶이었는데 그 소명을 자본의 유지와 증식에서 찾았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검소하게 살면서 노동자들을 수탈합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수탈했냐 하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노동자들을 수탈합니다. 이것이 도덕적 기독교가 빠진 함정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도덕주의 기독교는 이런 오류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선과 자기들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윤리도덕이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오류는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오류의 시정에 나름대로 큰 역할을 한 것이 본회퍼 목사입니다. 그 당시 유럽 사회에 이미 편만한 사회 사상으로 자리 잡은 휴머니즘을 선택한 것이지요. 휴머니즘이 윤리도덕보다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쪽으로 한 걸음 더 진전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휴머니즘은 이기적인 공동체 개념을 갖고 있지 않고 사해동포주의,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표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윤리도덕보다는 한 차원 더 진전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휴머니즘이 윤리도덕에 비해 우월한 점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일을 시키시려고 나를 부르셨다는 그 제자도의 개념이 더 강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도덕주의 기독교도 나름대로 선을 행하려고 하지만 최종목적은 결국 자기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도덕주의 기독교의 한계인데 그에 반해 휴머니즘 기독교는 그 한계를 넘어섭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 박애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시청 앞에서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성조기를 흔들며 공산주의를 저주하는 기도를 하는 보수 기독교보다는 인도주의를 내세우며 한반도에서 냉전을 부추기는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진보 기독교가 의식 있는 사람들에게서 더 갈채를 받습니다. 이 모습이 윤리도덕을 내세우는 보수 기독교와 휴머니즘을 내세우는 진보 기독교의 사상적인 근원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보수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이 모든 것에 우선하고 진보 기독교는 좀 더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둘 모두와 다릅니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푯대는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피조물, 집단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보수 기독교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 전체가 유토피아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진보 기독교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푯대는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여서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즉 작은 하나님의 나라들이 이 땅 여기저기에 실제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고 성경에서 확인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진짜 부름을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본론입니다. 진짜 부름을 받았느냐 아니면 지적으로 동의하고 스스로 찾아온 것이냐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크게 둘로 갈리게 되는데 부르심을 받은 경우와 스스로 선택해서 찾아온 경우로 구분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상황을 누가복음에서 좀 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를 빌려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 다음에 시몬에게 5장 4절에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랬더니 고기가 엄청나게 많이 잡혔어요. 그리고 베드로가 이상한 말을 합니다. 8절입니다.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10절 후반과 1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5:10후반-11)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인데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이시니까 베드로가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자발적으로 좇는 것이 아니라 즉시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제발 나를 떠나소서.”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실질적인 관계이고 정상적인 관계입니다. 거기다가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의 의미까지 정확하게 알게 되면 더 못 따라가지요. 안 갑니다. 인간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오면 그건 뭔가 대단히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무서워 말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지금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거든요.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공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간다? 이건 더 공포지요. 우리가 잘 아는 부자 청년의 경우가 오히려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서워 말라”고 하시면서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습니다. 붙잡힌 것이지요. 같은 5장의 15절과 16절을 봉독합니다.
(눅 5:15-16)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사람들이 자기 탐욕을 채우려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외면해 버리시지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강압적으로 부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붙들려 가는 겁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제자의 모습입니다. 강제로 붙들려 가는 것.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은 외면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을 잘 아시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 말씀과 정반대되는 말씀도 많이 있어요. 누가복음 6장 19절을 보시지요.
(눅 6: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같은 누가복음 안에서도 예수님께서 찾아온 사람들의 병을 다 고쳐주시는 이런 장면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하지요. 요한복음 6장 65절에서 71절을 봉독하겠습니다.
(요 6:65-71)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단 한 끼로 끝내버리시자 자원해서 찾아왔던 제자들은 다 떠납니다. 자기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과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다 떠나는 것이지요.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만 남습니다. 선택한 것은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스스로 찾아와 제자가 되었던 자들은 다 떠납니다. 물론 만 오천 명도 다 떠났지요. 남은 것은 누구입니까? 부르심을 받은 자들, 선택 당한 자들만 남은 것이지요. 그리고서 초대 교회가 다음과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5장 12절과 13절의 사도 바울의 말씀을 봉독합니다.
(고전 5:12-13)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로마서 16장 17절과 18절에서는 배만 섬기는 자들에게서는 떠나라고 명령하는데 여기서는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 합니다. 선택을 받은 자와 자기가 원해서 찾아온 자는 결국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도 그렇겠지만 제 경우 역시 처음에는 제가 원해서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재미로 교회에 등록을 했고 그 다음엔 복을 받겠다고 열심히 집사 생활을 하면서 전도왕 상도 타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진짜 부르심을 받은 것이지요. 내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면서 15년 이상 신앙생활 하던 자를 그때 느닷없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느닷없이 부르심을 받고 오게 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분들은 소수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1절입니다.
(행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사울은 이처럼 교회를 파괴하러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택하시지요. 때가 된 것입니다. 3절을 봉독하겠습니다.
(행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느닷없이 선택을 하시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우리 주변에서 보듯이 그런 경우는 드물고 사도 바울에게 유대교가 그러했듯이 기복적인 교회든 휴머니즘적인 교회든 자발적으로 교회를 나가서 자기 뜻을 이루려고 우왕좌왕하다가 어느 날 때가 되면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죽을 때까지 이 부르심을 받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요. 물론 그 분들의 내세 구원에 대해서는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영역이니까요.
이처럼 우리가 어느 날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참 제자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 전에는 제자였을까요? 본인이 제자라고 생각했든 아니면 교회에서 제자라고 임명을 했든 간에 그 사람은 제자가 아닙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필요로 해서 찾아온 것뿐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제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 제자의 삶이 시작됩니다.
제자의 삶이 시작될 때 나타나는 가장 큰 현상은 소원이 바뀌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바뀌는 것, 그것이 가장 처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내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첫 번째 증거는 내 안에서 소원이 바뀌는 것이지요.
그러나 내 안에서 소원이 바뀌긴 바뀌는데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라고 하시면서 나를 부르신 목적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발견하기까지에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내가 성경을 보고 깨닫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성령께서 나에게 깨우쳐주시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듣고 아 이런 거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책을 읽고 아 이런 거였구나 하고 깨닫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가고 그 과정에서 점점 깊이 깨달아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처음에 바로 나타나는 내 안의 변화는 기존의 내 소원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는 왜 사는 것이냐’ 하는 부분은 깨닫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여기서 제 경우를 한 가지 더 예로 들어드리겠습니다. 10년 전 교회를 처음 개척할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실 것을 약속하셨다”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저를 부르신 목적이라고 제가 알고 있었어요. 그때에는 개인이 죄와 사망의 법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살아가는 복음만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때의 설교의 주제는 항상 신령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5년쯤 지나면서부터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인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대두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정확히 깨닫게 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도 그렇지요? 주님의 교회에 합류하시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까.
참 제자로 변화되기 시작하면서 우선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소원에 점차 흥미를 잃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더 명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상당한 정도로 줄어들기까지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긴 하지만 처음에 내 자신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그 충격은 대단합니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하면서 어리둥절할 정도로 아주 선명하게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선명한 특징은 두려움과 근심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어! 이거 예전 같으면 내가 굉장히 걱정하면서 두려워할 일인데 어찌된 일인지 내 마음이 요동치지지를 않는군!” 하는 정말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지요.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새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낙담하거나 절망하게 되지 않습니다. 내가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 의심이 일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열망이 내 안에서 솟아나옵니다. 그러면서 샘솟듯이 새 힘이 솟아나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명확히 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새 힘은 앞에서 말씀드린 보수 기독교인들이나 진보 기독교인들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소원과 하나님의 명령을 결합시키면서 열심을 내게 되지요. 이기적인 소원이냐 이타적인 소원이냐만 다를 뿐입니다. 특히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진보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거룩한 소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기가 더 힘듭니다. 교회 우상주의에 빠진 자들이 교회를 섬기는 열심에서 헤어 나오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지요.
잘 아시는대로 휴머니즘은 기독교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일부 어떤 영감을 받았다고도 보이긴 하지만 세상의 인문주의자들이 프랑스 대혁명 등 심각한 기간을 거치면서 정립한 것이 휴머니즘입니다. 인간들의 생존과 번영을 향한 공포와 탐욕이 만들어 낸 것들 중에 가장 최신의 것이지요. 휴머니스트 매니페스토, 즉 휴머니스트 선언 제1장이 “우주는 자연히 생긴 것이다”이고 제2장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휴머니즘의 실체입니다.
휴머니즘은 순전히 인간적인 공포와 탐욕 위에 세워진 것인데 어떤 종류의 탐욕일까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맹자가 정확하게 간파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맹자의 4단, 인의예지 중에 첫 번째인 인이 측은지심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인간의 본성 네 가지 중 첫 번째로 꼽은 것이지요. 그 측은지심은 - 이건 맹자의 말은 아닙니다 - 그 사람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TV 연속극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자신을 그 주인공에 대입하기 때문입니다. 초상집에 가서 곡을 할 때 자기 설움에 운다는 말이 있지요. 죽은 사람이 불쌍해서 곡을 하는 게 아니라 예의상 곡을 하다 보니까 자기 신세가 서러워서 곡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측은지심의 본질이라고 저는 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거룩하게 살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명예욕이지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휴머니즘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윤리도덕은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이라는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고안해 낸 측면이 크지만 휴머니즘은 이 두 가지를 이유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지요. 이런 휴머니즘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결합한 본회퍼와 진보 기독교는 보수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일차적인 증거로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이어서 두려움과 근심이 사라지고 계속 새 힘을 얻는 것을 말씀드렸는데 점차 참 제자로 변화되어 가면서 정립되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이 부분은 신비한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과 26절을 봉독합니다.
(요 14: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신 스승이셨는데 그 제자들 앞에서 하시는 말씀으로는 너무너무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객관적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직접 가르치시고서 그 제자들을 앞에 놓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을 3년 동안 가르쳐 왔는데 이제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하나님께로 간 다음 보혜사 성령을 보내면 그때 그 보혜사 성령이 와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라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 말씀은 "지금까지 내가 3년 동안 너희를 가르쳤는데 내가 가르친 진리의 내용을 지금도 너희들이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그때 제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몸으로 보이지요.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다 도망가 버립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나중에 성령께서 오셔서 참 제자로 바꿔 놓으시니까 한 사람 한 사람 순교를 당하기까지 충성하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지금 그것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성경 말씀을 보고 인간의 이성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당연히 깨달았어야 합니다. 3년 동안 한 솥 밥을 먹으면서 훈련을 받은 제자들에게 정작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지금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하셨는데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고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그 뜻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교회사에서 여러 가지 성경 해석이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가톨릭과 개신교가 갈라졌고 개신교 안에서도 여러 가지로 갈라져 있습니다. 가톨릭은 하나로 통일된 것 같지만 계속 종교회의를 하면서 다른 말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제거해왔고 최근에도 파문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특히 해방신학을 주장한 가톨릭 신학자들이나 신부들 중에 파면을 당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어요. 그러다 다시 복귀된 사람들도 최근에 있습니다. 가톨릭도 계속 성경 해석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개신교는 아예 교단까지 갈라져버리는 길을 걸어왔던 것이구요. 본회퍼 목사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휴머니즘을 도입해 새로운 성경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흑인 신학, 여성 신학, 환경 신학 등등 끝없이 나옵니다. 인간의 눈으로 성경 말씀을 보게 되면 자기 상황에 따라서, 자기 성향에 따라서 성경이 다 다르게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가짜일까? 이렇게 접근하면 대단히 큰 오류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그 알량한 자기 지식으로 성경을 해석해서 “아! 예수님이 우리를 불러 제자 삼으신 목적이 이것이었구나” 하면서 다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것을 우리가 심판하려고 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그 푯대를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교회로 불러 모으신 이유는 우리가 먼저 각자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예수님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한 몸 공동체를 이루고 이어서 우리의 모습과 삶을 세상에 나가 보여주면서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이라도 더 우리처럼 되는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함께 가자”고 하시는 이유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과 2절을 봉독하겠습니다.
(고전 4:1-2)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피스티스, 즉 신실함이고 충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아서 우리도 피스토스한, 신실한 자들로 변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여기서도 하나님의 비밀을 말씀하는데 그 앞에서 고린도 전서 3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 3:19-20)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당대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차세대 랍비가 되기 위해 교육받고 있던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이렇게 증언을 할 때에는 자신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자기가 귀하게 여기던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신다고 하고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시는 분이라고 증언할 때에는 중요한 자기 체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 못지않게 세상 지혜를 많이 습득하고 또 계속해서 세상 지혜를 습득하기 위해서 달려가던 사도 바울이었단 말이지요. 그러니 엄청난 신비한 체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절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로마서 16장 26절에서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비밀의 계시라고 명명했고 고린도후서 12장에서는 셋째 하늘 낙원에 끌려올라가서 사람의 말로 할 수 없는 그런 신비한 말씀을 듣고 내려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추구하던 지혜가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것인가를 이렇게 절절하게 체험했던 것이지요.
기복주의 기독교와 도덕주의 기독교 그리고 휴머니즘 기독교 등은 모두 인간의 탐욕과 인간의 지혜가 결합해 성경을 해석한 결과물들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인 하나님의 나라, 쩨다카와 미쉬파트, 즉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가 행해지는 한 몸 공동체라는 성경의 핵심에 초점이 안 맞추어지고 사람들이 자꾸 엉뚱한 주장들을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본능이 제거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육적인 본능이든 정신적인 본능이든 종교적이고 영적인 본능이든 간에 본능이 금이 가는 일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이 자기 본능이 충족되는 방향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본능에 금이 가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인 한 몸 공동체라는 성경의 핵심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본능에 금이 가지 않으면 절대 안 보입니다.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노예의지의 주인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주인인 내 싸르크스, 즉 죄악된 본능에 유리한 쪽으로 성경이 보일 수밖에 없어요. 단지 무엇이 나에게 유리한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다양하다 보니 아주 저급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도 있고 아주 고상한 꿈을 가진 사람도 있고 또는 신비한 것과 영적인 것에 유난히 탐욕을 내는 사람들도 있어서 서로 다를 뿐이지 본능에 금이 가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나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두려움과 근심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계속해서 새 힘을 얻게 되고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정확히 깨닫게 되는 것인데 이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피스티스, 신실함과 충성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깊은 회개가 우리에게 계속 요구됩니다.
우리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대상인 죄는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우리가 담대해지는 것을 계속 발목 잡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온갖 죄가 뻗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와 함께 성령의 충만을 계속 간구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산을 부수는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로 점점 변해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주신 그 푯대를 향해서 하나가 되어서 꿋꿋하게 걸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제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오늘 제자도 일곱 번째로 제목은 “나를 따르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저는 우리에게 왔다가 떠난 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에서 다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부르심이 없이는 절대 안 됩니다. 지적으로 동의를 해도 안 되고 무릎을 치면서 감격을 해도 안 됩니다. 참 제자로 변화되는 일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서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꿋꿋하게 그 길을 가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오는 기쁨과 감사와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또 앞으로 더욱 우리를 인도하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어지는 성찬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셔서 예수님과 동행하도록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이 아직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며 성령의 충만을 간구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죄성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신 것에서 우리가 위로를 받고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 연약하고 어리석은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사 부르신 목적을, 하나님의 뜻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시간에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어지는 성찬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저희들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함께 먹고 마실 때에 약속하신 그 신비한 일을 한 단계 더 깊이 진행시키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것을 저희들이 믿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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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본능에 금이간자...신실함과 충성,성령의 충만함을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