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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나라 인물 유비 (촉황제) 장수: 관우 장비 조운 황충 위연 조통 조광 관흥 관평 관색 주창(가상인물) 요화 초주 부동 풍습 장남 정기 마대 마초 제갈첨 강유 맹달 왕평 장익 장억 마충 고상 유봉(미방,조표,부사인,장달,범강,신의,신탐-위나 오나라나 여포한테 항복한 장수) 맹획,맹우,축융,대래동주,양봉,아회남,동도나,하후패, 장포, 오반, 오란, 뇌동, 엄안 모사 : 제갈량, 마량, 진진, 동윤, 동화, 법정, 장송, 방통, 마속, 황월영, 서서(위에 어쩔수 없이 항복), 제갈상, 등지, 황권, 허정, 유파, 곽준, 미축, 유심... 1. 유비 현덕(劉備 玄德 161~223) ●출신지 : 탁군 탁현 ●직위 : 안희현위 - 좌장군 - 한중왕 - 황제 ●영웅성 : ★★★★★ 촉한의 초대 황제. 자는 현덕(玄德). 전한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의 후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과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15세 때 노식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과 교의를 맺고 호혐들과 교유하는 한편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도당을 모아 그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 후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196년, 원술로부터의 공격을 물리치고 진동장군 의성정후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고 있었으나, 조조 살해 계획에 참가했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하였다. 원소, 조조의 관도대전에서는 원소와 동맹하고, 이에 패하자 형주목 유표에게로 갔다. 이 무렵, 삼고지례로 제갈량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 왔다. 유비는 손권과 동맹하여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대파하고 형주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 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여 명장 관우가 죽고 형주는 손권이 영유하게 되었다. 유비는 이 사이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가 한헌제의 양위로 위의 황제가 되자, 221년 유비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이라 하니, 이른바 삼국의 촉한이다. 다음해 형주의 탈환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릉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에서 후하를 제갈량에게 위탁하고 병사하였다. 2. 관우 운장(關羽 雲長 ?~219년) ●출신지 : 하동군 해현 ●직위 : 별부사마 - 편장군 - 전장군 ●영웅성 : ★★★★★ ★² 삼국시대 촉나라의 무장. 지금의 산서성 하동군 해현 사람. 자는 운장(雲長). 후한말의 동란기에 탁군에서 유비를 만나,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어, 팽생토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200년에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사로잡혀 조조의 귀순 종용을 받았으나 원소의 부하 안량을 베어 조조의 후대에 보답한 다음, 기어이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적벽대전때에는 수군을 인솔하여 큰공을 세우고, 유비의 익주 공략때에는 형주에 머물러, 그 무력과 위풍은 조조와 손권을 두렵게 하였다. 그러나 형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립을 위하여 전력하다가 조조와 손권의 협력을 받아, 마침내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관우는 '소설 삼국지'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송나라 때 이후로 관제묘를 세워 그를 무신 또는 재신으로 모시는 등 중국 민중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3. 장비 익덕(張飛 益德 ?~221) ●출신지 : 탁군 ●직위 : 별부사마 - 정로장군 - 거기장군 ●영웅성 : ★★★★★ 중국 삼국 시대의 촉의 무장. 자는 익덕(翼德). 하북성 탁군 출신. 유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어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후한말 동란기의 수많은 전쟁터에서 절세의 용맹을 떨쳤다. 유비의 익주 공략 때는 주력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워 파서태수가 되었다. 위의 명장 장합이 장노를 무찌르고 파서로 밀고 들어오자 역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 사례교위에 임명되었다. 그 후 관우가 죽은 후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오를 치려는 동정에 종군할 준비를 하던 중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지며, 특히 형주에 있던 유비가 조조의 대군에 쫓겨 형세가 아주 급박하게 되었을 때 장판교 위에서 '내가 장익덕이다'하고 일갈하여 위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4. 제갈량 공명(諸葛亮 孔明 181~234) ●출신지 : 낭사군 양도현 ●직위 : 군사중랑장 - 군사장군 - 승상 ●영웅성 : ★★★★★ ★ 자는 공명(孔明). 양도 사람으로 촉의 승상. 처사인 서서의 추천으로 유비에게 알려졌다. '삼고의 예'로써 유비가 그를 찾았을 때 '천하 3분의 계'를 유비에게 올렸다. 그 후 유비와 수어의 사귐을 맺었다. 208년,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214년, 유비가 촉으로 들어가 교전을 하자 장비, 조운 등과 함께 성도를 공격했다. 220년, 조조가 위나라를 세우자, 다음해에 유비도 한나라 제왕이라 칭함고 동시에 승상이 되었다. 223년, 유비가 병으로 죽자 후주 유선을 받들어 촉나라를 다스리는 데 전념했다. 225년, 남쪽 변방을 치러 갔다가 남방의 수령 맹획을 일곱번 잡아 일곱번 놓아주어 남방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227년,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유선에게 출사표를 바쳤다. 228년, 군대를 이끌고 기산으로 나아가 위나라 군사와 접전을 했으나 참모인 마속의 실수로 첫번째 위나라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 이 해에 손권과 위나라 대사마인 조휴의 군사를 크게 무찌르고, 진창을 공략했으나 적의 단단한 수비로 인해 후퇴했다. 다음해, 위나라의 3군과 싸우는 전과를 낳았으나, 그 후 두 번에 걸친 정벌에서는 사마중달이 편 지구전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234년 오장원에서 대패하여 병으로 죽었다. 5. 조운 자룡(趙雲 子龍 ?~229) ●출신지 : 상산군 진정현 ●직위 : 아문장군 - 정동장군 - 진군장군 ●영웅성 : ★★★★★ 유비의 맹장. 자는 자룡(子龍). 진정 사람. 처음에는 공손찬 휘하에 있다가 나중에 유비의 신하가 되어 용맹을 떨쳤다. 유비가 장판에서 조조에게 쫓겨 유아였던 아들 선과 감부인을 버리고 도망갔을 때 조운이 단신으로 이를 구출했다. 214년에는 성도 공격의 일익을 담당하여 출전했고, 219년에는 한중 공방전에서 정찰 도중 위의 주력 부대를 만났으나 뛰어난 전술로 후퇴에 성공하여 유비의 찬탄을 받았다. 221년, 유비가 손권을 공격할 때 반대를 무릅쓰고 강주 수비에 나서 공을 세웠고, 228년에는 제갈량이 기산에 출전할 때 등지와 함께 양동 작전으로 기곡에 진주했다가 조조의 대군을 만나 소수의 군대로 잘 싸웠다. 6. 황충 한승(黃忠 漢升 ?~220) ●출신지 : 남양군 ●직위 : 중랑장 - 정서장군 - 후장군 ●영웅성 : ★★★★★ 유비의 장군. 자는 한승(漢升). 남양군 사람. 원래 유표 휘하에서 장사를 지키고 있었으나, 적벽대전 이후 유비에게로 가서 무공을 세워 토로장군이 되었다. 218년에 한중을 공격할 때는 정군산에서 조조이 장수 하후연을 죽여 정서장군이 되었다. 같은 해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후장군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노익장'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7. 마초 맹기(馬超 孟起 176~222) ●출신지 : 부풍군 무릉현 ●직위 : 독군종사 - 표기장군 ●영웅성 : ★★★★★ 촉의 장수. 자는 맹기(孟起). 무릉 사람. 아버지 마등 이래 양주에 근거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기동력 있는 기마대를 소요하고 있었다. 211년, 적벽대전에서 패해 서쪽으로 온 조조군과 동관에서 싸워 대패하고는 일시 장노 휘하에 있다가 성도를 포위한 유비군에게 항복하여 촉의 장수가 되었다. 마초가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용맹을 무서워하던 성도 성내가 동요되어 10일도 되기전에 성을 내주었다고 한다. 이때 형주를 수비하고 있던 관우가 그가 어떤 인물인지 가르쳐 달라고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자 제갈량은 마초를 장비와 겨룰 만한 용장이라고 칭찬했다. 8. 방통 사원(龐統 士元 179~214) ●출신지 : 양양군 ●직위 : 공조 - 치중종사 - 군사중랑장 ●영웅성 : ★★★★★ 유비의 모사. 자는 사원(士元). 양양 사람. 사마휘가 와룡과 함께 천거한 봉추(鳳雛)가 바로 방통이다. 유비의 지혜주머니로서 법정 등과 함께 촉 공략을 추진했으나, 성도 진격 도중 낙성 공방전 때 화살에 맞아 젊은 나이로 죽었다. 9. 서서 원직(徐庶 元直 ?~?) ●출신지 : 영천군 ●직위 : 우중랑장 - 어사중승(촉→위) ●영웅성 : ★★★★☆ 유비의 막료. 자는 원직(元直). 영천 사람. 원래의 이름은 복(福)이었다. 가난하게 자랐으나 어려서부터 검술을 익혔다. 의협심이 강해 친구의 원수를 갚아 주고 형리에게 체포되었으나, 친구의 구출로 도망쳤다. 그 후 느끼는 바가 있어 이름을 서(庶)로 바꾸고 무예 대신 학문에 힘썼다. 하남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형주로 난을 피했다가 거기서 제갈량을 알게 되었다. 이어 형주에 있던 유비의 막료가 되어 제갈량을 강력히 추천했다. 유비가 장판에서 대패했을 때, 그는 모친이 인질로 잡혔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조조는 그에게 과분한 벼슬을 주어 우대했다 10. 간옹 헌화(簡雍 憲和 ?~?) ●출신지 : 탁군 ●직위 : 종사중랑 - 소덕장군 ●영웅성 : ★★☆☆☆ 유비와 동향으로 최고참 신하. 유비가 형주로 부임하자 종사중랑에 임명되고 언제나 유비의 대화 상대가 되어 종종 사자 역할을 수행한다. 유비가 익주로 들어가자 유장의 사자로 나서고 유장도 그를 마음에 들어해, 그후 성도 성문이 열리고 항복할 때는 유장과 같은 가마를 타고 성에서 나온다. 소덕장군으로 승진하지만 무심하고 오만한 성격이 달라지지 않아 유비 앞에서도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고 팔걸이 의자에 기대어 응대하기도 한다. 제갈량 이하에 대해서는 자기만 긴 의자를 차치해 옆으로 기댄 채 논의. 그렇지만 반감을 사지 않은 것으로 미뤄볼 때,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유머 감각도 뛰어나 당시 금주령이 내려 주조용 도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같은 죄로 취급되었다. 간옹이 유비와 함께 거리로 나가 남녀가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고 '저 두 사람은 음란하므로 처벌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비가 그 이유를 묻자 '저자들은 음행할 도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해, 유비는 큰 소리로 웃고 법 집행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11. 미축 자중(靡竺 子仲 ?~220?) ●출신지 : 동해군 구현 ●직위 : 별가종사 - 안한장군 ●영웅성 : ★★★☆☆ 촉의 중신. 자는 자중(子仲). 구현 사람. 서주의 명문 출신으로 수많은 자산에 노비가 1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서주목인 도겸의 부관이 되었다가 그의 유언으로 유비를 서주로 맞이하는 사신이 되었다. 그 후 유비를 섬기면서 가장 큰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다. 195년,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기고 유랑하게 되었을 때도 그가 자금을 대고 누이동생을 그에게 출가시켰다. 201년, 유비의 형주 공격 때 사전 준비를 위해 유표에게 사신으로 갔다. 12. 손건 공우(孫乾 公祐 ?~?) ●출신지 : 북해군 ●직위 : 종사 - 종사중랑 - 병충장군 ●영웅성 : ★★★☆☆ 유비의 심복. 199년, 유비가 서주에 근거하여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원소와 손을 잡기 위해 사절로 갔다. 또 201년에는 여남에 있던 유비가 조조의 공격을 받아 유표에게 의지하려 했을 때에도 가서 그 정지 작업을 했다. 13. 진진 효기(陳震 孝起 ?~235) ●출신지 : 남양군 ●직위 : 종사 - 상서령 - 성양정후 ●영웅성 : ★★★☆☆ 촉나라의 중신. 제갈량으로부터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신하의 한 사람으로 추천받았다. 손권이 황제를 칭했을 때 제갈량의 뜻을 받들어, 위나라에 대한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 축하 사절로 오나라에 갔다. 14. 이적 기백(伊籍 機伯 ?~?) ●출신지 : 산양군 ●직위 : 좌장군 종사중랑 - 소문장군 ●영웅성 : ★★★★☆ 유비의 막빈. 산양 사람으로 자는 기백(機伯). 본래 유표의 식객으로 유비에게 남다른 호의를 베풀어 채모가 여러차례에 걸쳐 그를 해치려 할 때마다 일러주어 위기를 모면하게 해주었다. 적벽대전 후 유비가 형주를 차지하였을때 마량, 마속 형제를 천거하였다. 15. 마량 계상(馬良 季常 187~222) ●출신지 : 양양군 의성현 ●직위 : 종사 - 시중 ●영웅성 : ★★★★☆ 촉의 모사. 자는 계상(季常). 의성 사람. 마속의 형. 마량은 5형제였는데 자는 모두 '상(常)'자가 붙어 있어 '마씨(馬氏)의 오상(五常)'이라고들 했다. 형제 모두 학문을 좋아해 한결같이 뛰어난 인재였지만 특히 맏이 마량이 제일가는 인재라 하여 평판이 나 있었다. 그런데 칭찬하는 방법이 약간 별다른 데가 있어 '마씨의 오상은 모두 인재지만 흰 눈썹이 제일이다(馬氏五常 白眉最良)'라 말하곤 했다. 마량은 날 때부터 눈썹에 흰 털이 많아 '백미(白眉)'라 했었다. 유비 휘하에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애석하게도 이릉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16. 법정 효직(法正 孝直 176~220) ●출신지 : 부풍군 미현 ●직위 : 신도령 - 촉군태수 - 상서령 ●영웅성 : ★★★★★ 유비의 모사. 익주 유장의 수하였으나 주인이 약하여 섬길 만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장송, 맹달과 함께 외부에서 주군을 불러들일 것을 획책하였다. 자는 효직(孝直). 우부풍 미현 사람으로 명사로 알려진 법진(法眞)의 아들. 유비의 서촉 진공을 위하여 크게 애썼다. 성사된 뒤 촉군 태수가 되었고, 성품이 각박하여 논란하는 이도 있었으나 제갈량은 공로를 생각해 크게 탓하지 않았다. 17. 허정 문휴(許靖 文休 ?~222) ●출신지 : 여남군 평여현 ●직위 : 계리 - 파군태수 - 사도 ●영웅성 : ★★★☆☆ 젊은 시절 사촌동생 허소와 함께 인물을 잘 알아봐 유명해진다. <연의>에서는 유비가 성도를 포위했을 때 성을 탈출해 유비에게 귀순하는 장면부터 등장. 유비의 한중왕 즉위식에서 왕관과 옥새를 봉정하고, 그후 제갈량, 초주와 함께 유비의 황제 즉위를 계획한다. 18. 장완 공염(蔣琬 公琰 ?~246) ●출신지 : 영릉군 상향현 ●직위 : 서좌 - 상서랑 - 대사마 ●영웅성 : ★★★★☆ 촉의 중신. 자는 공담(公啖). 상향 사람. 제갈량의 출전중 성도에 머물면서 원정군의 식량 보급에 만전을 기해 제갈량으로부터 나의 오른팔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중태에 빠지자 그 후계자로 지명되어 국정의 전반을 맡았다. 그는 제갈량과 같은 위엄은 갖지 못했으나, 침착한 집무 태도로 제갈량이 없는 촉의 동요를 막고 피폐된 국력 회복에 전력했으나, 병이 들어 전권을 비위에게 넘겨 주고 죽었다. 19. 초주 윤남(초周 允南 201~270) ●출신지 : 파서군 서충국 ●직위 : 권학종사 - 광록대부 - 산기상시 ●영웅성 : ★★★☆☆ <삼국지>의 저자 진수의 스승. 경학과 천문에 뛰어나 제갈량이 권학종사에 임명한다. 위가 성도를 압박하자 유선에게 항복을 권한다. 진에서는 산기상시까지 승진해 <법훈>, <오경론> 등을 저술한다. 20. 등지 백묘(鄧芝 伯苗 ?~251) ●출신지 : 의양군 신야현 ●직위 : 광한태수 - 거기장군 ●영웅성 : ★★★★★ 촉한의 문신. 자는 백묘(伯苗). 신야 사람. 유비를 받들어 정무를 담당하고, 그가 죽었을 때는 오에 수호 사절로 가서 대임을 완수했다. 제갈량의 북정에 참가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중직을 역임하며 국정을 맡아보았다. 21. 동윤 휴소(董允 休昭 ?~246) ●출신지 : 불명 ●직위 : 태사자인 - 황문시랑 - 보국장군 ●영웅성 : ★★★★☆ 자가 휴소(休昭)이고 남군 지강현 사람. 촉의 명신 동화의 아들이다. 부자 2대에 걸쳐 제갈량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고 그 신임이 두터웠으며 사심없이 충성을 다한 명신이자 충신이었다. 출사표에서 '만일 덕을 일으키는 말이 없다면 동윤 등을 처형하여 그들의 직무태만을 밝히십시오.' 하는 문구가 나온다. 이는 제갈량이 얼마나 동윤을 믿고 그에게 기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동윤이 있는 한 충언하는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동윤은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고 있는 동안에 성도에서 황제를 모시고 내치에 크게 이바지하여 장완도 동윤에게 깍듯이 대할 정도로 어긋남이 없었다. 황호를 비롯한 궁중의 간신배들이 가장 두려워한 사람이 바로 동윤으로서 그는 아랫사람에게도 겸허하게 대하여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촉의 선비들은 제갈량과 장완, 비의, 동윤을 일컬어 네 사람의 뛰어난 인재라 하여 사영(四英)이라 했고 또한 뛰어난 재상이라 하여 사상(四相)이라고 높여 부르기도 했다. 그의 부친 동화 역시 관원으로 재직시 청렴결백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잘 보살펴 그의 유임을 원하는 자가 수천명이 될 정도였다. 22. 비위 문위(費褘 問偉 ?~253) ●출신지 : 강하군 맹현 ●직위 : 태사자인 - 대장군 ●영웅성 : ★★★★★ 촉의 중신. 자는 문위(問偉). 강동군 사람. 제갈량은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 그의 출사표에서 내정을 맡길 사람으로 그와 곽유지, 동윤 등을 지적했다. 그는 남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서류를 읽고도 일단 읽은 것은 절대로 잊지 않았다. 제갈량이 본 대로 그의 능력은 내정면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제갈량이 죽은 뒤에는 수성의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강경파인 강유를 억제하며 촉을 잘 유지했다. 그러나 253년, 연회석상에서 자객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23. 강유 백약(姜維 伯約 202~264) ●출신지 : 천수군 기현 ●직위 : 상계연 - 정서장군 - 대장군 ●영웅성 : ★★★★☆ 촉한의 장수. 자는 백약(伯約). 천수(天水) 기현(冀縣) 사람. 원래 위나라 천수태수 마준(馬遵)의 장수였으나 제갈량의 꾀로 촉에 투항하여 크게 신임을 얻었으며, 제갈량이 터득한 병법을 모조리 전수받았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뒤 역시 뜻을 이어 여러차례 중원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또 제갈량 때와 똑같이 성공할 만하면 조정에서 환관의 농간으로 불러들여 일을 이루지 못했다. 유선앞에서 환관 황호(黃皓)를 꾸짖은 것이 화근이 되어 성도를 떠나 답중(沓中)에 둔전(屯田)하고 있다가 항복한 소식을 듣고 종회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뒷일을 도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종회와 의형제를 맺고 등애와의 사이를 반간하여 둘이 다 지친틈에 한실을 부흥시키려 하였던 것인데 실패로 돌아가자 위의 장졸을 무수히 죽이고 스스로 목을 쳐서 죽으니 그때 나이 59세(264년)였다. 24. 관평(關平 ?~219) ●출신지 : 불명 ●직위 : 불명 ●영웅성 : ★★★☆☆ <정사>에서는 전장군 관우의 아들로 되어 있을 뿐, 몇 번째 아들인지는 불분명하다. 관우와 함께 반장의 부장 마충에게 임저에서 체포되어 참살되는 것으로만 나온다. 그러나 <촉기>에서는 관우가 번을 포위했을 때 이리에게 다리를 물리는 꿈을 꾸고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관평에게 술회한다. 따라서 관우를 따라 번을 공격하고 곧이어 손권에게 배후를 찔려 참살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연의>에서는 관우가 하북 관정의 집에 묵었을 때 그의 차남 관평을 양자로 삼았는데, 그 활약이 눈부시다. 특히 관우를 따라다니며 유비의 양자 유봉과 호흡이 잘 맞는 짝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신야, 적벽 전투를 거쳐 나중에 유비가 서천을 공략하자 유봉과 함께 종군해 부수관에서 유장의 부하 양회와 고패를 사로잡아 참수한다. 그러나 군사 방통이 전사해 형주에 있던 제갈량을 부르는 사자로 나서면서 운명이 바뀐다. 관평은 형주를 지키는 관우 밑에 그대로 남고, 위의 방덕과 일 대 일로 대적하지만, 마침내 손권에세 배후를 찔려 관우와 운명을 함께 한다. 양자이면서도 친자 이상의 유대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마 나관중의 훌륭한 연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25. 관흥 안국(關興 安國 ?~?) ●출신지 : 불명 ●직위 : 시중· 중감군 ●영웅성 : ★★★☆☆ 유비의 장수. 관우의 아들로 자는 안국(安國). 유비가 그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러 출별하였을때 장비의 아들 장포와 함께 종군하여 그를 도왔다. 난군중에서 아버지의 원수인 동오의 반장을 찾아내어 죽이고 아버지가 쓰던 청룡도를 도로 찾아 평생 사용했다. 활도 잘 쏘고 무용이 절륜하여 아버지 못지않다는 평을 들었다. 26. 장포(張苞 ?~?) ●출신지 : 불명 ●직위 : 불명 ●영웅성 : ★★★☆☆ 장비의 아들. 아버지가 죽은 뒤 관우의 아들 관흥과 함께 유비의 총애를 받으며 크고 작은 싸움에 공을 세웠다. 후에 사마의의 선봉 곽회를 공격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그 상처가 도져 병으로 죽었다. 27. 주창(周倉 ?~219) ●출신지 : 관서 ●직위 : 산적 두령 - 관직(불명) ●영웅성 : ★★★★☆ 관우 휘하의 장군. 황건 장보의 부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 와우산에 웅거하여 산적질을 하다가 관우를 섬겨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충성을 다하였다. 수영을 잘하여 형주를 지킬때는 조조의 장수 방덕을 물속에 끌어들여 사로잡아 공을 세웠다. 최후까지 행동을 같이하고 죽었다. 28. 요화 원검(寮化 元儉 ?~264) ●출신지 : 양양군 ●직위 : 주부 - 우차기장군· 가절 ●영웅성 : ★★★★☆ 촉한의 장수. 산적으로 있다가 관우가 오관을 독파할때 도중에서 가족을 납치한 두원을 죽이고 귀순하였다. 관우를 따라가려다가 이루지 못하더니 뒤에 형주를 차지하였을때 찾아와 그의 수하에 들어 활약하였다. 나중 제갈량을 도와 많은 싸움에 공을 세웠다. 상박곡에서는 단기로 도망하는 사마의와 마주쳐 그를 쫓았는데 사마의가 나무를 싸고도는 것을 찍었다가 칼날이 나무에 박히는 바람에 아까운 기회를 놓쳤다. 그 뒤 계속 살아남은 유일한 구장으로 강유와 함께 잘 싸웠는데, 결국 촉이 망해 버리자 울분에 심장이 터져 죽었다. 29. 마속 유상(馬謖 幼常 190~228) ●출신지 : 양양군 의성현 ●직위 : 형주종사 - 월수군 태수 ●영웅성 : ★★★☆☆ 유비의 장수. 자는 유상(幼常). 의성 사람. 마량의 동생으로서 유비를 따라 촉에 들어가 각지의 요직을 역임했다. 228년 봄, 가정에서 위의 명장 장합과 대결했다. 이것은 촉의 중원 진출을 좌우하는 중요한 싸움이었으나,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에 반대, 남쪽의 험준한 산중에 진을 쳤기 때문에 물이 끊겨 크게 패전했다. 제갈량은 후퇴를 감행할 수 밖에 없게 되고, 전군에게 사죄하는 뜻에서 아끼던 마속을 처형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성어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30. 이엄 정방(李嚴 正方 ?~234) ●출신지 : 남양군 ●직위 : 군 관리 - 표기장군 ●영웅성 : ★★★★☆ 촉한의 장수. 자는 정방(正方). 남양 사람. 원래 유장 휘하에 있었으나 유비의 촉 입성 때 그에게 전향했다. 그 후 촉에서 요직을 역임했고, 유비가 죽음에 임하여 후사를 제갈량과 함께 당부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제갈량이 4번째 위 정벌에 나섰을 때, 군량 보급의 임무를 소홀히 하여 제갈량에게 책임 추궁을 받고 평민으로 강등되어 유배를 갔다. 3년 후,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에 걸려 자신도 죽었다. 31. 맹달 자도(孟達 子度 ?~228) ●출신지 : 부풍군 ●직위 : 의도태수 - 신성태수 ●영웅성 : ★★★★☆ 유비의 장수. 촉의 의도태수였으나, 형주의 관우군이 궤멸하자 위에 항복하여 신성태수에 임명되었다. 그 후 제1차 위나라 정벌을 계획한 제갈량으로부터 촉군에 내응하라는 권유를 받고 고민하던 끝에 이에 응했으나 사마의의 급습을 받고 죽었다. 32. 오의 자원(吳懿 子遠 ?~237) ●출신지 : 진류군 ●직위 : 중랑장 - 좌장군 - 차기장군· 가절 ●영웅성 : ★★★☆☆ 독후부 후장군 오반과 친척 형제 사이. 유비의 촉 침공 때 낙성 수비를 맡는다. 공방전 도중에 갑자기 모습을 감추는 일도 있지만 결국 출격한 곳에서 조운에게 체포되어 항복.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여동생이 그에게 시집가 유영과 유리라는 두 아들을 얻는다. 이후 제갈량의 제1차 북벌에 종사해 남안과 안정을 탈취한 후 남안 수비를 맡지만 마속이 패배해 가정을 잃었으므로 퇴각한다. 그후로는 제갈량의 북벌에 종사해 각지를 전전. 제갈량이 죽은 후에는 거기장군으로 한중을 지키지만 237년에 죽는다. 33. 위연 문장(魏延 文長 ?~234) ●출신지 : 의양군 ●직위 : 아문장군 - 전군사· 정서대장군· 가절 ●영웅성 : ★★★★★ 유비의 용장. 자는 문장(文長). <삼국지연의>의 작자인 나관중은 위연의 얼굴을 잘 익은 대추와 같고, 눈은 낭성(朗星:밝은별)과 같은 인물이며, 후두부에 반골(反骨)이 돌출되어 있어 반역자의 관상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손권의 입을 빌어 '용기는 충분하지만 심근이 바르지 않다. 공명이 죽은 후에는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다'라고 표현되어지는 인물이다. 위연은 유비를 따라 촉에 들어가 장비를 제치고 한중군태수에 임명되었다. 제갈량의 북정 때는 장안 급습(자오곡 계책)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갈량이 죽은 뒤 부장관인 양의와 다투던 중 마대에게 살해당했다. 34. 마대(馬垈 ?~?) ●출신지 : 불명 ●직위 : 평북장군 ●영웅성 : ★★★★☆ 촉한의 장수. 서량태수 마등의 형의 아들. 마등이 조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였을때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고 도망가 이 소식을 고향에 전하였다. 뒤에 사촌형 마초를 도와 숙부의 원수를 갚으려 여러차례 싸웠고, 패한 뒤에도 계속 마초와 행동을 같이하여 촉한의 대장으로서 활약하였다. 제갈량의 신임을 받아 크고 작은 싸움에 계속 참여하여 그때마다 실수없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제갈량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그가 죽은 뒤 거짓으로 위연과 행동을 같이하다가 중간에 죽여 후환을 없앴다. 35. 왕평 자균(王平 子均 ?~248) ●출신지 : 파서군 탕거현 ●직위 : 교위 - 비장군 - 진북대장군 ●영웅성 : ★★★★★ 촉한의 장수. 파서 암거 사람으로 자는 자균(子均). 조조밑에서 아문장군으로 있었는데, 한중지방의 지리에 밝아 서황을 도와 부선봉이 되어 유비의 군대와 맞섰다. 서황이 배수진을 쳤다가 패하고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므로 조운에게 투항하였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도 부장으로 출전하였고 성격이 신중하였으므로 제갈량은 제1차로 기산에 출병하였을 때 마속을 도와서 나가게 하였는데, 마속은 그의 충고를 듣지 않다가 가정에서 패하고 말았다. 얼굴도 못생겼고, 또 글을 몰랐다고 하며, 그런때문에 모든 문서를 입으로 불러서 작성했지만 사리가 분명했다 한다. 36. 장익 백공(張翼 伯恭 ?~264) ●출신지 : 건위군 무양현 ●직위 : 서좌 - 상서 - 좌거기장군 ●영웅성 : ★★★★☆ 유비의 장수. 자는 백공(伯恭). 원래 유장의 수하에 있었으나 낙성에서 유비에게 항복해 그의 장수가 되었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 때 부장으로 출전했고, 제갈량이 죽은 후 강유와 함께 대장군이 되어 활약을 했다. 뒤에 종회가 성도 탈환을 위해 공격해 오자 이를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37. 엄안(嚴顔 ?~?) ●출신지 : 불명 ●직위 : 파군태수 ●영웅성 : ★★★★☆ 홀로 만 명을 상대하는 노익장. 항복을 권하러 온 장비의 사자의 귀와 코를 베기도 하고, 장비의 투구에 화살을 맞히기도 하는 등 장비를 노하게 하지만 결코 도발에 편승해 성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장비에게 속아 유인된 후 장비와 단기필마로 싸우다가 생포된다. 포로가 되어서도 당당한 태도를 보여 장비도 사과하고, 그래서 정식으로 장비에게 항복해 촉에 들어가는 길라잡이가 된다. 또 한중 쟁탈전에서는 황충과 노장 팀을 짜서 위의 하후덕을 토벌한다. 38. 장억 백기(張억 伯岐 ?~?) ●출신지 : 파군 남충국 ●직위 : 공조 - 도위 - 탕구장군 ●영웅성 : ★★★★☆ <연의>에서 제갈량이 남방 이민족을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고 심복시켰던 이야기는 장억이 본보기로 된 것이다. 그래서 <연의>에서는 제갈량의 남정 때 갑자기 등장해 제갈량의 수족이 되어 활약. 나중에 북벌에도 참가하고 진창에서 위의 왕쌍에게 부상을 당하지만 종종 승리에 공헌하기도 한다. 그후에는 들쭉날쭉 등장이 뜸한데 최후는 강유가 단곡에서 위나라 등애에게 포위당할 때 수백 기로 구원에 나서서 강유를 구출하지만 장억은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39. 마충 덕신(馬忠 德信 ?~249) ●출신지 : 파서군 낭중현 ●직위 : 군리 - 진남장군 ●영웅성 : ★★★☆☆ 어린 시절 외가에서 양육되어 원래 성명을 호독(弧篤)이라고 부렀는데, 나중에 마씨로 돌려 이름을 충으로 바꾼다. 처음에 군리가 되고 건안 말기에 한창현장에 임명된다. 유비가 오룰 침공해 효정에서 패하자 파서태수 염지는 마충에게 5천 명의 병사를 주어 구원에 나서게 한다. 이미 유비는 영안에 돌아오고 있었는데 마충을 만나 '황권을 잃었지만 대신 마충을 얻었다'고 기뻐한다. 유비가 죽은 후 남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제갈량이 이를 평정하자 장가태수에 임명된다. 마충은 주민들을 불쌍히 여겨 애정을 가지고 통치했기 때문에 만족들은 두려워하면서도 공경했다고 한다. 이후 남방 만족의 반란을 평정해 오랫동안 잃었던 월수군도 되찾는다. 이 공로로 진남장군으로 승진한다. 제갈량과 비위가 원정하면 도성의 업무를 보고, 그들이 귀환하면 남방 통치를 맡는 등 중앙과 지방을 오간다. 40. 오반 원웅(吳班 元雄 ?~?) ●출신지 : 진류군 ●직위 : 영군 - 독후부 후장군 - 표기장군 ●영웅성 : ★★★☆☆ 촉의 가절 오의의 친척 동생. 유비으 오 침공에 종군해 풍습과 함께 무현에서 오의 장군 이이 등을 격파한다. 유선 시대에는 독후부 후장군이 되고 제갈량을 따라 기산에서 위연, 고상 등과 함께 위의 장합을 격파한다. 41. 뇌동(雷銅 ?~218) ●출신지 : 불명 ●직위 : 장군 ●영웅성 : ★★☆☆☆ 서촉 유장의 장수. 장임을 도와 낙성을 지켰으나 포위망에 빠져 유비에게 항복하였다. 한중에서 조조의 침입을 막을때 장비를 도와 싸우다가 장합의 손에 죽었다. 42. 오란(吳蘭 ?~218) ●출신지 : 불명 ●직위 : 장군 ●영웅성 : ★★☆☆☆ 위나라인물
조조 (위왕) 장수 : 조비 (위황제), 조창, 조식, 조웅, 조예, 조방, 조모, 조환, 조홍, 조휴, 조순, 하후돈, 하후연, 하후은, 하후상, 하후위, 하후덕, 장합, 허저, 허의, 등애, 종회, 서황, 전위, 관구검, 문흠, 문앙, 제갈탄, 등수, 한덕, 대릉, 비요, 장호, 악침, 장료, 악진, 이전, 송헌, 위속, 후성, 방덕, 공손연, 왕쌍, 학소, 조앙, 조인, 조진, 조충, 조환, 조상, 종요 모사 : 사마의, 사마소, 사마사, 사마염, 곽가, 순욱, 순유, 정욱, 유복, 순의, 왕랑, 진등, 진규, 곽혁, 가후, 가규, 곽회, 동소, 만총, 양수, 장간, 화흠, 최염, 최림.. 1. 조조 맹덕(曹操 孟德 155~220)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낭 - 대장군 - 승상 - 위왕 ●영웅성 : ★★★★★ 삼국시대 위왕조를 세운 인물. 자는 맹덕(孟德). 묘호는 태조. 시호는 무황제. 패국의 초 사람. 환관의 양자의 아들인데, 황건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두각을 나타내어 마침내 헌제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을 휘두르게 되었다. 화북을 거의 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했는데, 건안 13년 손권, 유비의 연합군과 적벽에서 싸워 대패, 이후로 그 세력이 강남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같은 해 승상, 동 18년 위공, 동 21년 위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정치상의 실권은 잡았으나 스스로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고, 220년 정월 낙양에서 죽었다. 조조는 또한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자신도 그 아들 조비, 조식과 함께 시부의 재능이 뛰어나, 이른바 건안문학의 흥륭을 가져오게 하였다. 후세에 조조는 간신의 전형처럼 여겨져 왔는데, 근년에 이르러 중국 사학계에서는 그의 재평가를 둘러싼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 2. 조인 자효(曹仁 子孝 168~223)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행려봉교위 - 대장군 - 대사마 ●영웅성 : ★★★★☆ 조조의 사촌동생. 젊은 시절부터 궁술과 마술, 수렵을 좋아했다. 조조와 함께 동탁 토벌에 나서고, 후일 장수와의 전투에서나 원소와 관도 전투에서 대치할 때에도 사자처럼 맹활약해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형주를 공략할 때 행정남장군에 임명되어 강릉에서 오의 주유와 싸웠는데, 부하 우금 이하 3백 명의 병사가 수천의 적병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직속 정예 기병 수십 명을 이끌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보기좋게 구출한다. 귀환하자 성에 있었던 진교 등이 '장군은 참으로 하늘이 내려주신 분이시다.'고 탄성했다고 한다. 조인은 어린 시절에는 성격이 거칠었으나 성장 후 무장이 되자 법률을 엄격히 지키고 남의 모범이 되었다. 대장군의 지위에 올라서는 임영 합비에 주둔하여 오나라의 침략에 대비했다. 나중에 대사마로 승진했으나 223년에 사망했다. 3. 하후돈 원양(夏候惇 元讓 ?~220)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비장 - 절충교위 - 대장군 ●영웅성 : ★★★★★ 전한 하후영의 후예. 14세 때 자신의 스승을 모욕한 자를 살해한 이후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조조가 거병할 당초부터 비장으로서 정벌에 나서고, 190년 조조가 행분무장군이 되었을 때 사마에 임명되어 조조와는 별도로 백마에 주둔한다. 그 후 절충교위 동부태수로 승진한다. 조조가 서주로 돌아오자 하후돈도 여포 토벌에 나섰는데, 전투도중 날아온 화살에 맞아 왼쪽 눈을 잃고 만다. 그래서 그때부터 병사들은 하후돈을 '애꾸눈 하후'로 불렀다. 하후돈은 하북 평정에서 전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승전보를 울려오면서 조조의 신임을 얻는다. 219년 조조가 양양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있던 관우 공격군을 보낼 때 특별히 소환되어 같은 마차에 타고 침실까지 출입하는 것이 허가된다. 조비가 황제에 즉위하자 대장군으로 임명되지만 몇 개월 후 사망한다. 하후돈은 진영에 있으면서도 스승을 불러 친히 강의를 들었고, 성격은 청렴하고 신중했다. 남는 재화가 있으면 언제나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부족한 경우에는 상부에서 지급받아 재산 축재를 일절하지 않았다. 4. 순욱 문약(筍彧 文若 163~212) ●출신지 : 영천군 영음현 ●직위 : 수궁령 - 시중, 광록대부 ●영웅성 : ★★★★★ 명문 출신으로 조부 순숙, 부친 순곤, 숙부 순상 등이 모두 이름 높은 인물들이었다. 어릴적부터 '황제를 보좌할 제목'으로 칭송 되었다. 순욱은 처음에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지만 그가 큰 재목이 아님을 알고, 조조 밑으로 몸을 의지한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나의 자방(子房, 전한 고조의 모신인 장량을 가리킴)이다.'고 말하며 사마에 임명한다. 순욱은 서주의 유비와 여포를 서로 싸우게 하려고 유비에게 관직을 주고 그 담보로 여포를 치게 하는, 이른바 두 표범이 서로 싸우게 하는 '이호경식지계(二 虎競食之計)'를 내놓는 일. 그리고 유비와 원술을 다투게 해 서주를 지키고 있는 여포의 변심을 꾀어내는, 이른바 호랑이를 몰아내고 이리를 삼키는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를 거는 등 계략가로서 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후일 여포 토벌과 서주의 유비 공격 , 관도 전투 등에서도 계략으로써 활약한다. 212년 동소 등이 조조를 위공(魏公)의 지위에 오르게 하려고 획책하자 순욱은 이에 반대, 이 사건으로 그는 조조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이때 손권 정벌이 행해지는데, 순욱은 초군의 군위로 파견되어 시중 광록대부로서 군사에 참여. 조조군이 유수에 도착했을 때 병으로 쓰러져 수춘에 잔류하고 근심과 고민 속에서 50세로 사망한다. <위씨춘추>에 의하면 조조는 순욱에게 위문하는 품(品)을 보냈는데, 열어보니 속은 비어 있었다. 품은 형식일 뿐, 내용물이 없다는 것은 '귀공과의 사이는 서로 예만 갖출 뿐 마음은 없다.'는 의미다. 순욱은 사태를 깨닫고,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 곽가 봉효(郭嘉 奉孝 170~207) ●출신지 : 영천군 양작현 ●직위 : 사공군제주 - 유양정후 ●영웅성 : ★★★★☆ 어릴 때부터 장래를 내다보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성과 이름과 행적을 감추고 은밀하게 영웅들과 교제하며 세간 사람들과는 교류하지 않았다. 순욱의 추천으로 조조를 섬기게 되었으며, 조조는 조정에 상표하여 사공군제주로 발탁한다. 이때 그는 원소와 비교해 열가지 면(道, 義, 治, 度, 謀, 德, 仁, 明, 文, 武)에서 조조가 뛰어나다고 대답하고 있다. 여포 토벌 때는 기수와 사수를 끊어 성을 물로 공격하는 작전을 내놓는다. 또한 조조가 '보리밭을 어지럽힌 자는 참수형에 처한다.'고 군율을 정해놓았는데, 조조의 말이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것에 놀라 보리밭을 마구 짓밟고 말았다. 이때 곽가는 <춘추>의 '법은 고귀한 자에게는 가하지 않는다.'는 구절을 들어 조조를 납득시키고, 조조의 머리카락을 잘라 얼버무린다. 최후는 하북 토벌 중에 풍토병에 걸려 역주에서 요양하지만 병사하고 만다. 사후에 남겨진 편지에서는 공손강에 의해 원희, 원상이 토벌되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조조는 곽가가 38세의 나이로 죽자, 장례식 때 순유 등에게, '운명은 참으로 얄궂다. 우리들 가운데 가장 젊고, 후사를 부탁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곽가가 요절하다니...'하고 애석해 마지 않는다. 나중에 적벽 전투에서 대패한 조조는 '봉효만 살아 있었다면 오늘 내가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하고 탄식했다 한다. 6. 가후 문화(賈珝 文和 147~223) ●출신지 : 무위군 고장현 ●직위 : 낭 - 좌풍익 - 상서 - 태위 ●영웅성 : ★★★★★ <정사>에서는 '책략에 실수가 없고, 사태 변화를 꿰뚫고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는 책사. 많은 인물을 섬겼으나 가는 곳마다 재능을 인정받았다. 동탁이 장안에서 권세를 장악하고 있을 무렵, 가후는 동탁의 부하이자 사위인 우보의 참모였다.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되자 동탁의 부하 이각, 곽사, 장제 등이 동요하여 군사를 버리고 도망가려했으나, 가후는 그들을 설득하고 단결시켜 장안을 습격하고 여포를 추방했다. 이후 장수에게 몸을 의지했으나 장수가 조조에게 패하자, 그는 조조의 부하가 된다. 가후의 귀순 소식을 들은 조조는 가후의 손을 잡으며 '나에게 천하 사람들의 신뢰를 가져다 준 사람이 바로 당신이다.'고 말하며 집금오에 임명했다. 조조를 받들게 된 가후는 수많은 책략을 내놓는다. 관도 전투에서는 결전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조조에게 결단을 촉구하여 승리로 이끌고, 서량에서 마초와 한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그들에게 '이간책(二間之策)'을 써서 사이를 벌려놓고, 통제가 안되는 곳을 습격해 토벌에 성공한다. 또한 후계자 문제에 대해 조조가 상담을 했을 때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원소와 유표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며, 장남을 후계자로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한 사례를 들어 태자의 지위를 확정시킨다. 가후는 자신의 재능에 경계심을 품지 않도록 조용히 생활하고, 사적인 교제를 절대 하지 않고, 자녀들의 결혼 상대도 명문 가족을 고르지 않았다고 한다. 조비가 문제로 즉위하자 그는 태위로 임명된다. 이후 천수를 다하고 77세로 사망했으며, 숙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7. 허저 중강(許楮 仲康 ?~?) ●출신지 : 초국 초현 ●직위 : 도위 - 중견장군 - 모향후 ●영웅성 : ★★★★★ 신장이 8척(약 184cm)이 넘고, 허리 둘레는 10위(圍, 약 115cm)나 되고, 용모는 우람하고 의연하며 무예와 완력이 아주 뛰어났다. 허저가 조조 밑으로 들어가자 조조는 그를 보고, '이자는 나의 번쾌(樊快,한 고조의 부하 맹장)이다.'고 그의 용감함에 감탄하여 곧바로 도위에 임명했다. 연주에서는 여포의 장수 이봉을 토벌하고 양봉, 한섬과의 전투, 장수와 여포의 정벌, 관도 전투 등에 참가한다. 후일 신야의 유비 토벌에도 출진하지만 제갈량의 계략에 빠져 패퇴. 적벽 전투에서 패하자 조조를 호위하며 허도로 철수한다. 이윽고 조조 토벌을 계획한 마등이 사로 잡혀 처형되자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는 마초와 무시무시한 일 대 일 기마 전투를 연출하고, 투구를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싸우지만 승부가 나지 않는다. 한중 공략 때에는 당시 장로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던 방덕과 일 대 일 싸움을 펼치고, 50합이 넘게 싸우지만 쓰러지지 않자,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일부러 져서 함정에 빠뜨린다. 나아가 장로의 동생 장위를 토벌한다. 허저는 호랑이와 같은 힘이 있었으나 평소에는 조금 멍한 상태였기 때문에 군사들에게 '호치(虎癡)'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또한 그는 사람됨이 신중하고 법률을 잘 준수했으며, 소박하고 엄숙해 말수가 적었다. 조조가 죽자 크게 울부짖으며 피를 토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하자 장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8. 장합 준예(張합 儁乂 ?~231) ●출신지 : 하간군 막현 ●직위 : 사마 - 교위 - 정서거기장군 ●영웅성 : ★★★★★ 원래 원소의 부하였으나 관도 전투때 곽도가 모함했기 때문에 조조에게 귀순한다. 조조는 '한신(전한 고조의 장군)이 한(漢)으로 들어온 것 같다.'고 기뻐하며 편장군에 임명하고 도정후에 봉한다. 그후 각지를 전전하며 원담을 비롯해 한수, 장로를 토벌하는데 공적을 세운다. 한중 쟁탈전에서도 장합은 파동, 파서 두 군을 평정하고, 유비의 야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부신 활약을 보인다. 유비는 하후연보다 장합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전사한 하후연 대신 군의 총대장이 되어 각 진영을 거느렸다. 제갈량의 제 1차 북벌 때에는 가정에서 마속을 격파하지만, 제 3차 북벌 때에는 기산에서 적에게 포위 당한다. 그러나 창을 휘둘러 포위망을 뚫어 제갈량을 감탄시킨다. 사마의의 충고도 듣지 않고 퇴각하는 제갈량을 추격하다가 위연과 관흥에게 목문도까지 유인당해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는 속에서 어이없게도 최후를 마친다. 장합은 어떠한 사태에 빠져도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 있고 진영을 잘 정비하며, 전쟁의 상황과 지형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제갈량도 그를 두려워 했다고 한다. 9. 악진 문겸(樂進 文謙 ?~218) ●출신지 : 양평군 위국현 ●직위 : 장하 관리 - 행유격장군 - 우장군 ●영웅성 : ★★★☆☆ 처음에는 조조의 장하의 괸리(기록계)였는데, 체구는 작아도 담력이 있었다고 한다. 복양의 여포, 옹구의 장초, 고(苦)의 교유와의 전투에서는 선두에서 전공을 세워 광창정후로 발탁된다. 그후로도 안중의 강수, 사견의 휴고, 패의 유비를 모두 격파. 관도 전투에서는 원소의 부하 순우경을 쳐부수고, 여양의 원담, 원상과의 전투에서는 대장 엄경을 토벌하는 등 맹활약해 행유격장군으로 승진한다. 이후 고간 정벌, 형주 공략에도 참가해 양양에 주둔한다. 관우, 소비 등을 격파해 패주시켰기 때문에, 남군의 산간에 있었던 만민(蠻民)들도 악진 밑으로 귀순한다. 또한 유비의 부하이자 임저의 우두머리인 두보, 정양의 수령 양대까지 완전히 격멸한다. 이윽고 장료, 이전과 함께 합비에 주둔했을 때, 절(節)을 받고 손권과의 전투에서도 활약한다. 영읍은 1,200호가 되고, 너무 많은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5백 호를 한 단위로 분할해 제후를 세우고, 자신은 우장군으로 승진할 정도였다. 218년에 사망하고 위후라는 시호를 받는다. 10. 우금 문칙(于禁 文則 ?~221) ●출신지 : 태산군 거평현 ●직위 : 군사마 - 안원장군 ●영웅성 : ★★☆☆☆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포신을 따라 전투에 나서고, 조조가 연주를 다스리자 동료와 함께 출두. 군사마에 임명되어 각지를 전전하며 수훈을 세운다. 옛 친구 창희가 반란을 일으켜 잡혀 왔을 때, 여러 장수의 반대를 물리친 후 조조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처형했다. 이처럼 매우 엄격하고 냉철하기 짝이 없어서 인심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219년 번성의 구원에 나서나 장마로 한수가 넘쳐 군대가 수몰했기 때문에 관우에게 항복한다. 이때 같이 있었던 방덕은 끝내 지조를 지키며 죽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내가 우금을 안지 30년이 되었지만, 오히려 생각지도 않던 위험에 처하여 방덕만도 못하단 말인가.'하고 탄식했다 한다. 관우가 패하자 오나라에 있다가 다시 위로 돌아가는데, 조비는 우금이 목숨을 구걸하는 벽화를 그리도록 지시해 이를 본 우금이 수치와 분노가 치밀어 사망하게 만든다. 11. 장료 문원(張遼 文遠 165~221) ●출신지 : 안문군 마읍현 ●직위 : 군리 - 기도위 - 중랑장 - 관내후 - 진양후 ●영웅성 : ★★★★☆ 본래 섭일의 자손인데, 흉노의 복수를 피하려고 성을 바꾼다. 동탁이 죽자 여포를 따라 서주로 도망쳐 각지를 전전한다. 조조가 하비에서 여포를 격파하자 군세를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 중랑장으로 임명되고 관내후라는 작위를 받는다. 관도 전투에서는 장기를 무찌르고, 원소가 죽은 후에는 저곡과 오환족의 답돈을 토벌하여 북방 평정에 힘을 쏟는다. 적벽 전투에서는 조조를 습격하던 황개에게 화살을 쏴서 구원한다. 퇴로에서 복병으로 나타난 관우에게 이전의 은혜를 상기시켜 탈출을 묵인받고 무사히 귀환한다. 후에 합비를 수비하여 오의 손권과 수 차례나 전투를 벌인다. 처음 공방에서는 오나라 장수 송겸과 태사자를 토벌하고, 마침내 오군 10만에게 공격당했을 때는 소수 병력으로 손권을 궁지에 빠뜨린다. 이 전투로 오나라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져 장료라는 이름만 들어도 밤에 우는 아이들이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그러나 224년 8월, 오와 촉의 동맹에 분노한 조비가 오 토벌에 나서고 그는 대장의 한 사람으로 종군한다. 하지만 오나라 서성의 계략으로 위군이 대패, 장료 또한 허리에 정봉의 화살을 맞고 그 상처가 깊어져 사망한다. 일찍이 장료는 손권과의 전투중 병이 들었는데, 그때 손권은 여러 장수에게, '비록 병에 걸렸지만 우리 적은 장료이니 주의하라.'고 명령한다. 손권이 얼마나 장료를 두려워 했는가를 알 수 있다. 12. 서황 공명(徐晃 公明 ?~227) ●출신지 : 하동군 양현 ●직위 : 기도위 - 평남장군 - 양평후 ●영웅성 : ★★★★★ 어릴적부터 용맹이 남달라 주위로부터 '너는 크면 장군이 될 것이다.'라고 칭송 받는다. 처음에 서황은 양봉을 따라나서 적을 토벌하지만, 옛 친구인 만총의 설득으로 조조를 섬기게 된다. 비장군으로 임명된 후 서황은 여포 토벌에 종군하고, 별군으로 여포의 장수 조서와 이추를 항복시킨다. 또한 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유비, 안량, 문추 등을 연이어 격파하고, 사환과 함께 원소의 병량 수송대를 고시에서 습격하는 등 크게 활약. 원소가 죽은 후 계속해서 원담과 원상을 추격해 남피에서 원담을 격파하고 평원에서 반란군을 제압한다. 형주 정벌에서는 별군으로서 번에 주둔하며 중로, 임저, 선성의 황건적을 토벌. 만총과 함께 한진에서 관우를, 조인과 함께 강릉에서 주유를 각각 격파한다. 서황은 관우가 번성의 조인을 공격했을 때 구원에 나서는데, 그는 완성의 적에 대해서 배후를 차단하는 것처럼 꾸며 후퇴시키고, 적진 위두와 사총의 둔영에는 위두를 공격한다고 선전해두고서 비밀리에 사총을 공격한다. 이것을 눈치채고 구원하러 달려온 관우 군사 5천 명도 격파한다. 조조는 '적이 에워싼 참호와 방호벽은 10중이나 되었다. 이 포위망을 뚫고 수많은 적을 물리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라고 감탄하며, 7리 앞까지 서황을 마중하고 큰 연회를 베푼다. 서황은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으로, 군사를 이끌고 있을 때는 반드시 먼 데까지 파수를 보내 경계하고, 사전에 실패할 경우까지 대비하고 싸웠다. 227년 '내가 죽으면 당시 의복 그대로 몸을 덮어주라.'고 유언하고 병사. 장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조조는 서황에게, '서장군은 전한(前漢)의 명장 주아보(周亞父)의 품격이 있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13. 조비 자환(曹丕 子桓 187~226)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오관중랑장 부승상 - 승상 위왕 - 황제 ●영웅성 : ★★★★☆ 조조와 변황후 사이에 출생한 적자. 태어날 때 하늘에 푸른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후광처럼 머리 위를 감쌌다고 한다. 조비는 문무에 뛰어났지만 너무 다재다능했으므로 경시되고 만다. 하지만 마침내는 조조가 총애하던 조식을 제치고 31세때에 태자로 책봉된다. 그후 황제를 선양받아 문제가 된다. 조비는 황제 즉위 후 선정을 베풀고 국력증강에 노력한다. 위 왕조는 조비 시대에 최전성기를 누려 제갈량 조차 문제가 살아있을 때는 침공하지 못했다. 227(황초 7)년 조비는 갑자기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어, 조예를 태자로 지명하고 조진, 조휴, 사마의, 진군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세상을 뜬다. 제위에 오른지 겨우 7년, 나이 40세의 한창 때였다. <정사>의 저자 진수는 '드넓은 도량을 갖추고, 공평한 마음으로 정사에 힘쓰고, 도의 정립에 노력을 기울이고, 충실하게 성덕을 쌓아갈 수 있었다면 고대의 현군과 견줄 만한 존재로 될 수 있었다.'고 마지막에 평가한다. 14. 조앙 자수(曹昻 子脩 ?~197)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불명 ●영웅성 : ★★★☆☆ 조조의 맏아들. 자는 자수(子脩). 생모인 유부인이 일찍 죽어 정부인에게 양육되었다. 197년, 조조를 따라 남양의 장수 정벌에 참가하여 항복받았으나, 이 해 장수의 두번째 반란때 살해되었다. 15. 조창 자문(曹彰 子文 ?~223)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언릉후 - 북중랑장· 효기장군 - 임성왕 ●영웅성 : ★★★☆☆ 조조와 변황후 사이의 2남. 젊은 시절부터 궁술과 마술이 뛰어나고, 완력이 보통사람 이상으로 맹수와 격투할 정도였다고 한다. 조조는 독서를 권했으나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장수가 되어 사졸들의 선두에 서서 싸우고 싶다.'고 말해 후계 쟁탈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218년에 대군의 오환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을 명령받고, 스스로 전투에 참가하여 활을 쏠 때마다 반드시 적병을 쓰러뜨리는 용맹함을 보이고 있다. 도망가는 적을 추적하는 동안 원거리를 행군하여 말과 병사 모두 피로에 지치고 말았으나,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추격해 적을 산산조각으로 격파했다. 장병에게는 평소의 두 배가 되는 포상을 주었기 때문에 모두 기뻐했다고 한다. 이 보고를 들은 조조는 '우리 황수아(黃鬚兒, 황색 수염이 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름), 쓸 만하구나.'하고 칭찬했다. 그후 조비가 제위에 오르면서 임성군에 봉해지지만, 그의 무략을 두려워했는지 하는 일마다 박해를 받아 223년 불우한 나날속에 병사하고 만다. <세설신어>에서는 조비에게 독살된 것으로 묘사되었다. 16. 조식 자건(曹植 子建 192~232)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평원후 - 안향후 - 진사왕 ●영웅성 : ★★★★☆ 위나라의 시인. 자는 자건(子建). 안휘성 사람. 조조의 세째 아들이며, 문제 조비의 아우이다. 그들 세 사람을 삼조라 하며, 함께 건안 문학의 중심적 존재로서 중국 문학사상의 주공, 공자라 칭송되었다. 맏형 조비와 태자 계승 문제로 암투를 하다가 29세 때 아버지가 죽고 형이 위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 뒤 시인 정의 등 그의 측근자들은 죽임을 당했고, 그도 평생 정치적 위치가 불우하게 되었다. 그의 재우와 인품을 싫어한 문제에 의하여 그는 거의 해마다 새 봉지로 옮겨 살도록 강요당하였고 엄격한 감시하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며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마지막 봉지인 진에서 죽었다. 그는 공융, 진임 등 건안 칠자들과 사귀어 당시의 문학적 중심을 이루었고 오언시를 서정시로서 완성시켜 문학사상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 위, 진을 거쳐 당나라의 두보가 나오기까지 그는 시인의 이상상이기도 하였다. 17. 조홍 자렴(曹洪 子廉 ?~232)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단춘 현령 - 응양교위 - 표기장군 ●영웅성 : ★★☆☆☆ 조조의 사촌 동생. 원래 단춘의 현령이었는데, 조조의 동탁 토벌을 위한 의용군에 가담한다. 조조는 형양에서 동탁의 대장 서영에게 산산이 격파되어 도망가는 중에 말을 잃고 만다. 이때 조홍이 자기 말에서 내려 '천하에 저는 없을 지라도 장군은 없어서는 안됩니다.'하고 말하면서 조조에게 말을 건내 주었다. 조홍은 도보로 뒤따라가서 변수 근처까지 도달했다. 강물이 깊어 건널 수 없었으나 조홍은 강가를 걸어가 배를 구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조홍은 재산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인색했다. 일찍이 문제가 어렸을 때 조홍에게 재물을 빌려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이 일에 앙심을 품고, 조홍의 식객이 법을 어긴 것을 구실로 투옥해 처형하려고 했다. 여러 신하들이 도우려고 해도 도울 수가 없었는데, 변태후가 곽황후에게 '조홍을 처형한다면 황후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다.' 고 협박했으므로 지위를 낮추고 영지를 삭감하는 것으로 수습했다. 명제(조예)시대에 표기장군이 되고, 특진의 지위를 부여받고 232년에 사망했다. 18. 조진 자단(曹眞 子丹 ?~231) ●출신지 : 불명 ●직위 : 편장군 - 진서장군 - 대사마 ●영웅성 : ★★★☆☆ 조조의 조카. 자는 자단(子丹). 일찌기 고아가 되어 조조에게 양육되었다. 중군 대장군 때 조비의 유언을 받고 조예의 후견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228년, 제갈량의 침공 때 군대를 이끌고 선전했고, 230년에는 촉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제갈량이 다시 침입하자 이를 막다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19. 조휴 문열(曹休 文烈 ?~228) ●출신지 : 불명 ●직위 : 기도위 - 중령군 - 대사마 ●영웅성 : ★★★☆☆ 조조의 조카. 자는 문열(文烈). 조조의 아들. 조비를 섬겨 정동대장군이 되고, 조비가 죽을 때 그 아들 조예의 보필을 부탁받았다. 228년, 대사마로서 오나라 방위를 담당하다가 손권의 유인 작전에 말려 대패하고 도망했으나, 등에 생긴 악성 종양으로 죽었다. 20. 순유 공달(筍攸 公達 157~214) ●출신지 : 불명 ●직위 : 황문시랑 - 상서령 ●영웅성 : ★★★★☆ 순욱의 조카지만 나이는 여섯 살 위다. 처음에는 하진의 부름을 받아 황문시랑으로 임명되었지만, 그후 조조가 헌제를 맞아 도읍을 허창으로 옮겼을 때 부름을 받고 여남태수를 시작으로 순조롭게 출세해 군사로 임명된다. 198년 장수 정벌을 수행할 때, 무리한 공격을 피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것을 진언하는데, 조조는 이를 듣지 않고 패배. 그 이후 조조는 순유를 존중한다. 207년에 중군사로 전임. 위 건국 후에는 상서령이 된다. 순유는 사려 깊고 치밀하며, 일을 처리하는 판단력과 신체의 위험을 피하는 지략을 겸비해 계략을 세운 후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았다. 조조도 '겉으로는 둔하고 겁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지략과 용기를 지니고 있다.'고 칭찬하고, 조비에게 그를 본보기로 삼으라고 이야기한다. 214년 손권 정벌을 진행하는 중에 58세로 사망. 조조는 그를 이야기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고 슬퍼했다고 한다. 순유가 쓴 <기책20종(奇策二十種)>은 종요만이 알고 있었는데, 순유가 한창 저작을 편집하던 중에 죽게 되어 세간에는 순유의 비책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21. 정욱 중덕(程昱 仲德 ?~?) ●출신지 : 동군 동아현 ●직위 : 수장령 - 분무장군 - 위위 ●영웅성 : ★★★★☆ 본명은 '입(立)'이었으나, 어릴 적에 태양을 받드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조조가 듣고 '일(日)' 자를 더해주었다고 한다. 신장은 8척 3치로 턱과 뺨에 근사한 수염이 나 있었다. 순욱의 추천으로 조조에게 초빙되어 관직에 나서고 곽가를 추천한다. 유비를 죽이라고 진언하기도 하고, 조조에게 제위에 오르도록 권유하는 등 비정한 군사(軍師)로 묘사된다. 또한 하비 공격에서 유비의 처를 인질로 잡고서 관우를 항복시키기도 했다. 후일 창정에서 복병을 10대(隊) 배치하는 '십면매복지계(十面埋伏之計)'로 원소군을 격파하고, 기주를 평정한 조조에게 강남 평장을 진언. 유비의 참모 선복의 정체가 서서임을 간파하자 서서의 모친을 속여 성으로 불러들이고, 모친의 필적을 본따 거짓 편지를 써서 서서를 빼내는데 성공한다. 적벽 전투에서는 적의 화공에 주의하도록 진언하고, 황개의 투항이 거짓임을 간파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위군이 대패. 퇴로를 관우에게 차단당한 조조에게, 의리를 존중하는 관우의 성격을 이용해 위기를 모면토록 진언하고 무사히 빠져나가게 한다. 적벽 전투 후 중원을 평정한 조조는 연회석에서 '이전에 연주에서 여포에게 패했을 때 귀공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고 말했는데, 정욱은 이 자리에서 '충족을 아는 자는 치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며 사퇴를 표명. 병사를 물려주고, 문을 굳게 잠그고 외출하지 않았다. 성격이 강직해 남과 충돌하는 일이 많고, 모반을 꾀한다는 밀고를 받은 적도 있었으나 조조의 총애와 대우는 점점 깊어졌다. 문제때 위위로 취임하고, 이어 공(재상)으로 임명되지만 얼마되지 않아 80세를 일기로 사망, 숙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세설신어>에서는, 일찍이 정욱이 식량이 부족한 조조에게 3일분의 식량을 공급했는데 마른 고기 속에 인육을 섞었다고 해 조정에서 신임을 잃어 공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고 한다. 22. 모개 효선(毛介 孝先 ?~?) ●출신지 : 진류군 평구현 ●직위 : 치중종사 - 상서복사 ●영웅성 : ★★★☆☆ 조조의 모사. 자는 효선(孝先). 평구 사람. 조조가 연주목으로 있을 때 순찰관으로 초빙되었다. 이때 천자를 받들어 불신을 다스리고, 농경을 일으켜 군량을 비축하라는 등 진언을 하여 조조의 천하 평정 계획에 중요한 시사를 주었다. 23. 진군 장문(陳군 長文 ?~235) ●출신지 : 영천군 허창현 ●직위 : 어사중승 - 상서령 - 사공 ●영웅성 : ★★★☆☆ 조부 진식, 부친 진기, 숙부 진심과 함께 후한의 명사. 어릴 적부터 재기가 있어 노나라의 공융조차 인정했을 정도였다. 유비가 예주를 지배하자 부름을 받아 별가가 된다. 도겸이 죽은 후 유비가 서주의 후임으로 영입되자, 진군은 '원술과 여포가 있어 위험하다.'고 충고하지만, 유비가 받아들이지 않아 대패. 그후 조조의 부름을 받고 사공서조연속이 되고, 어사중승으로 승진한다. 조조가 위왕이 되었을 때, 코 베기와 다리 자르기 등과 같은 육형을 부활시키려 하자 진군이 이에 반대, 결국 중지시킨다. 진군은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고 공정한 판단력이 있으며 도의를 존중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또한 문제를 태자 시절부터 보좌해 '나의 안회(顔回, 공자의 수제자)'라고 평가받는다. 조비는 제위에 오르자 진군의 건의로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제정한다. 문제가 죽은 후에는 사마의 등과 함께 명제의 보좌를 부탁받고 정치와 촉과의 전쟁에서 활약, 사공의 지위까지 오른다. 24. 종요 원상(種繇 元常 151~230) ●출신지 : 영천군 장사현 ●직위 : 상서랑 - 전군사 - 태위 - 태부 ●영웅성 : ★★★☆☆ 어린 시절 숙부 종유와 낙양으로 향하던 중 관상쟁이에게 '이 아이는 출세할 상이 있지만, 물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과연 10리도 못 가서 강에 빠져 죽을 뻔했기 때문에 종유는 그를 소중하게 길러 학문에 전념하게 만든다. 마침내 효렴으로 추천되고, 삼공(三公) 관청에 소환되어 정위정 황문시랑이 된다. 헌제가 장안에 있을 때에는 헌제를 장안에서 탈출시키는 데 비밀리에 활약하고, 어사중승에 임명되어 시중, 상서복야로 승진한다. 당시 마등과 한수가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산동에서 싸우고 있어 배후의 움직임을 걱정했던 조조는 종요를 서방으로 파견한다. 종요는 마등과 한수에게 편지를 보내 설득하고, 두 사람 모두 각각의 자식을 인질로 삼아 조정으로 보낸다. 관도 전투에서는 말 2천 여 필을 군에 공급하며, 조조는 종요를 '한(漢)의 소하(蕭何, 한 고조의 심복으로 유명한 정치가)에 필적한다'고 편지에 쓰고 있다. 위가 건국되자 상국으로 임명된다. 그뒤 위풍이 모반을 꾀한 일이 있어 그를 추천한 책임을 물어 면직당한다.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대리가 되고, 문제가 즉위하자 태위로 승진한다. 명제 시대에는 태부까지 오른다. 230년에 죽고 성후라는 시호를 받는다. 25. 만총 백녕(滿寵 伯寧 ?~242) ●출신지 : 산양군 창읍현 ●직위 : 독우 - 종사 - 양무장군 - 태위 ●영웅성 : ★★★☆☆ 18세 때 군(郡)의 독우가 되지만 관직을 버리고 귀향, 조조가 연주를 평정하자 부름을 받고 종사가 된다. 원소와의 싸움과 형주 공략에서 공을 세워 여남태수와 분위장군을 겸직, 그후 관우가 조인의 번성을 포위했을 때 장마로 성벽이 물에 잠기자, 조인은 성에서 탈출하는 것을 고려했다. 이에 만총은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진언하면서 농성을 계속해 지원군 서황과 함께 관우를 격파했다. 문제가 왕에 오르자 양무장군이 되고, 오의 손권 침략을 몇 번이나 격퇴. 234년 손권이 합비의 신성을 공격했을 때는 수십 명의 용사를 모집해 손권 진지를 야습하고 성곽 공격 무기를 불태워 적을 퇴각시킨다. 238년에 노령으로 소환되어 태위로 승진하고, 242년에 사망하는데 재산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남은 재산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26. 유엽 자양(劉曄 子楊 ?~?) ●출신지 : 회남군 성덕현 ●직위 : 사공창조연 - 주부 - 태중대부 ●영웅성 : ★★★★☆ 후한 초대 황제인 광무제의 아들 유연의 후예. 말년에는 군사(軍師)로 알려지지만 젊은 시절에는 모친의 유언으로 측근을 살해하고, 양주의 도적 정보를 참살해 병사를 흡수하는 등 무법자였다. 한 왕실이 점차 쇠퇴해지는 것을 보고 왕족의 후예인 자신이 병사를 갖는 것을 바라지 않고, 노강태수 유훈에게 병사를 맡긴다. 그후 유훈이 손책에게 정벌당하고 조조 밑으로 도망치자 이어 유엽도 조조에게 부름을 받고 사공창조연이 된다. 관도 전투에서는 원소군이 망루에서 공격해오자 발석거(發錫車)로 대항하고, 또 적이 지하도를 파서 진지로 쳐들어오자 땅을 파 수로를 만들어 방어한다. 또한 유엽은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 맹달이나 공손연이 모반을 일으킬 인물임을 예견했는데, 그의 예측대로였다. 유엽은 한 왕실의 일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조정 안에서는 거의 친교를 갖지 않고 232년 병 때문에 태중대부로 임명된다. 그뒤 2년 정도 대홍로로 있다가 다시 작위를 물려주고 태중대부로 재임 중 사망. 경후라는 시호를 받는다. 27. 동소 공인(董昭 公仁 156~236) ●출신지 : 제음군 정도현 ●직위 : 영도장 - 거록태수 - 사도 ●영웅성 : ★★★☆☆ 처음에는 원소를 받들고 거록군 평정으로 활약. 동생 동방이, 대립하던 장막의 부하였던 인연으로 원소에게 목숨을 위협받아 하내의 장양 밑에서 몸을 의지한다. 그후 조조가 헌제를 맞이하러 서진했을 무렵 장양과 함께 귀순. 조조의 본거지에서 가까운 허창으로 천도할 것을 진언한다. 조조가 위공, 위왕의 칭호나 구석(九錫, 큰 공이 있는 신하에 대한 아홉 가지 특혜)을 받을 수 있도록 상소하기도 하고, 번성에서 관우를 무찌르는 책략을 내는 등 군사와 정치 양면에서 종종 활약하고 있다. 문제 시대에는 오나라를 토벌할 당시 조언을 아끼지 않아 위위로 승진한다. 명제 때에는 사도 본관이 되어 풍속 폐해에 대해 상소를 올려 법을 철저히 준수하도록 했다. 28. 양수 덕조(楊修 德祖 175~219) ●출신지 : 홍농군 화음현 ●직위 : 낭중 - 창조속주부 ●영웅성 : ★★★☆☆ 후한의 태위였던 양표의 아들. 폭넓은 지식과 재능을 지녔으며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추천되어 낭중에 임명된다. 나중에 조조의 요청으로 창조소속주부에 임명되고, 군사와 국정 안팎의 문제를 모두 취급했는데, 종사한 일마다 독서를 깊이 하여 조조의 의중을 잘 꿰뚫었다고 한다. 반면 조조에게 경계되는 점도 있었던 것 같다. 조조가 한중에서 철군할 때 '계륵(鷄肋)'으로 포령한 일화가 유명한데, 누구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양수만이 '닭의 늑골은 국물을 우려내는 데는 좋으나 먹기는 어렵다.' (버리기에는 아까우나, 쓸 데는 없다는 의미로 한중을 비유함)라고 이해, 퇴각할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세설신어>, <연의>에서는 조조가 공사 중인 문에 '활(活)'자를 써놓고 가자, 양수가 '문(門)에 활(活)자를 쓴 것은 넓다(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문을 작게 하라.'고 작업자에게 명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조조가 하사한 요구르트에 '합(合)'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양수가 '사람(人)에 한 입(一口)을 더하면, 더할 합(合)이 되므로 이것은 한 입씩 시음하라는 의미라고 해석하는 일화가 남아있다. 양수는 조식과 친해 정의, 정이 형제와 함께 조식을 후계자로 만드는데 협력했다. 그러나 조식이 조조에게 소외되자 위험시되고, 또한 양수가 원술의 조카뻘이 된다는 점에서 219년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된다. 29. 화흠 자어(華欽 子魚 157~231) ●출신지 : 평원군 고당현 ●직위 : 상서랑 - 의랑 - 태위 ●영웅성 : ★★★☆☆ 영제 사후 정태, 순유 등과 함께 하진에게 초빙되어 상서랑에 임명된다. 그후 동탁, 원술, 마일제를 거쳐 손책을 섬긴다. 손책이 죽은 후 조조의 추천으로 헌제의 소명을 받는다. 손권은 넘겨주고 싶지 않았으나, 화흠이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고 설득했기 때문에 쾌히 보내주었다. 위 건국 때에는 어사대부에 임명되고, 문제가 즉위하자 사도로 승진한다. 평소 청빈한 생활을 하고, 봉록과 하사품을 친척과 친우들에게 나누어줘 집안에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다. 하사받은 여자 노예조차도 모두 신분을 해방시켜 시집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명제가 즉위하자 태위가 되고, 231년 75세로 사망. 경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연의>에서는 <정사>의 인물상과 정반대로 출세를 위해 서라면 어떤 일이든 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30. 진교 계필(陳矯 季弼 ?~237) ●출신지 : 광릉군 동양현 ●직위 : 위군태수 - 상서 - 사도 ●영웅성 : ★★★☆☆ 광릉태수 진등의 친구. 광릉이 손권에세 포위당하자 구원을 요청하는 사자로 조조에게 달려간다. 그뒤 조조의 부름을 받고 사공연속에서 위군태수가 되고, 한중 정벌에도 종군한다. 문제(조비)와 명제(조예) 2대를 받들어 사도까지 승진한다. 31. 손례 덕달(孫禮 德達 ?~?) ●출신지 : 탁군 용성현 ●직위 : 사공군모연 - 상서 - 사공 ●영웅성 : ★★★★☆ 조조가 유주를 평정했을 때 부름을 받고 사공군모연으로 등용된다. 승진을 거듭해 각지의 태수를 역임하는데, 노산에 있는 수백 명의 도적이 부근 주민을 괴롭히고 있었을 때 부지미(扶持米)를 주어 관민을 동원. 도적의 우두머리에게 현상을 걸고, 항복,귀순하는 자를 불러들인다. 그러자 곧바로 도적들이 서로 배반하여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후 중앙에 들어가 상서가 된다. 또한 용맹 과감한 모습도 보이는데, 명제가 사냥하러 대석산에 갔을 때 황제 앞에 튀어나온 호랑이를 말에서 내려 베어 죽이기도 한다. 또한 오의 전종이 침공했을 때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하루 종일 끝까지 싸워 이를 물리칠 정도였다고 한다. 명제의 유언으로 조방이 즉위하자 조상의 보좌역이 되는데, 성실하고 타협하지 않았으므로 조상과는 사이가 나빴다. 그래서 청하와 평원의 경계 다툼을 해결했을 때 조상에게 내쫓겨 5년의 금고형을 받는다. 조상이 주살된 후 다시 중앙에 들어와 사공까지 승진한다. 32. 전위(典韋 ?~197) ●출신지 : 진류군 기오현 ●직위 : 사마 - 도위 - 교위 ●영웅성 : ★★★★★ 자(字)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용모가 당당하고 완력이 세며, 강한 지조와 의협심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진류태수 장막의 부하였으나, 진지 군사와 충돌해 수십 명을 죽이고 산중으로 도피생활을 하던 중, 마침 호랑이를 쫓고 있는 광경이 하후돈에게 띄어 조조에게 추천된다. 그후 여포에게 두 번이나 포위당한 조조를 구해냈으며 황건적 토벌 때에는 허저와 단기필마로 싸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에 조조는 일부러 져주라고 명령한 뒤, 결국 허저를 유인해 함정에 빠뜨려 아군으로 만든다. 완에서 장수(張繡)가 항복하자 전위는 조조와 함께 그곳에 주둔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참모 가후의 책략으로 조조를 기습한다. 이때 전위의 무용을 두려워해 미리 부관 호거아에게 명령하여 그를 술에 곯아 떨어지게 하고, 무기인 쌍철근도 빼앗아 두었다. 이상한 기미를 눈치챈 전위는 조조를 도망가게 하기 위해 정문에서 사자처럼 분전한다. 수십 군데나 상처를 입으면서도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고, 적병 두 명을 양팔에 끼고 죄어 죽였으나, 상처가 깊어 입을 벌리고 눈을 부라린 채 큰 소리로 적에게 고함지르다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무음으로 도망간 조조는 전위의 소식을 듣고는 대성통곡했다 한다. 전위는 매우 충직하며 신중했고, 항상 낮에는 종일 조조 곁에 서서 대기했다. 조조는 훗일을 돌아볼 때 '내 생애 애석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봉효를 잃은 것이며, 하나는 전위를 잃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33. 하후연 묘재(夏候淵 妙才 ?~219)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별부사마 기도위 - 정서장군 ●영웅성 : ★★★★☆ 하후돈의 사촌동생. 조조가 거병하자 하후연은 별부사마 기도위에 임명되어 각지를 전전. 원소를 관도 전투에서 격파한 후 연주, 예주, 서주의 군량미를 관리하며 식량이 부족했던 조조군에게 차질 없이 양곡을 수송하였기 때문에 조조군은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동작대 낙성식 여흥에서는 이미 과녁에 꽂힌 4개의 화살 한가운데에 화살을 다시 명중시키는 궁술을 보여준다. 마초가 공격해 왔을 때에는 동관 오른쪽 성을 수비하고, 궁지에 몰린 조조를 구원하러 나서 위수 북쪽 해안에서 마초의 장수 성의를 물리친다. 마초가 도망친 후에는 조조의 명령으로 장안에 머물면서 자신이 추천한 장기와 함께 장안을 지킨다. 급습이 장기였던 하후연은 언제나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을 공격했기 때문에 군사들은 '전군교위 하후연은 사흘에 5백리, 엿새에 1천리를 간다'고 말할 정도였다. 218년 오나라의 합비 공략에 대응하기 위해 조조가 귀환하자 하후연은 정군산의 수비를 위해 한중에 남는다. 유비군의 황충을 맞아 공격하지만 대산을 점령 당하고 만다. 결국 법정의 신호에 일제히 촉군이 몰려 오고, 자신은 황충과 싸우다 전사하고 만다. 34. 이전 만성(李典 曼成 ?~?) ●출신지 : 산양군 거야현 ●직위 : 중랑장 - 비장군 - 파로장군 ●영웅성 : ★★★☆☆ 초평 연간에 군세를 이끌고 조조의 부하가 되고, 황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원술과 여포 토벌 등 각지를 전전한다. 관도 전투에서는 곡물과 비단을 수송하는 역할로 활약. 또한 여양의 원담, 원상을 공격했을 때는 정욱 등과 함께 배로 식량을 운송하다가 원상의 부하 고간에게 수로를 차단 당하지만, 이전은 적이 방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격파한다. 후일 유표가 유비에게 명하여 북방을 침공할 때는 하후돈, 이전 등이 반격에 나서는데, 유비가 이유 없이 퇴각하는 것을 보고 '복병이 있다.'고 경고. 그러나 하후돈과 우금이 이를 무시하고 유비를 추격하다 복병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이때 이전이 구원에 나서고 유비는 퇴각한다. 이전은 군사보다 학문을 더 좋아해 다른 장수와 공적을 다투지 않았다. 또한 훌륭한 사대부를 존경하고 겸허한 태도를 취해 병사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36세로 사망하고, 문제(조비) 시대에 민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35. 가규 양도(賈逵 梁道 174~228) ●출신지 : 하동군 양릉현 ●직위 : 군리 - 민지령 - 건위장군 ●영웅성 : ★★★☆☆ 위의 장수. 자는 양도. 홍농군태수로 있다가 조조에게 인정을 받아 간의관으로 작전에 임했다. 문제때는 예주를 다스려 명자사로 이름을 날렸고, 다시 명제를 섬기면서 오나라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중도에 병으로 죽었다. 36. 방덕 영명(龐德 令明 ?~219) ●출신지 : 남안군 훤도현 ●직위 : 종사 - 입의장군 - 관문정후 ●영웅성 : ★★★★☆ 젊어서는 군(郡) 관리, 주(州)의 종사였고 초평 연간 마등 휘하의 장수로 출전해 반란을 일으킨 강족, 저족을 토벌하는 등 연이어 전공으로 승진을 거듭해 교위가 된다. 이후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자 그는 군사를 이끌고 항복. 조조는 이미 그의 용맹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의장군에 임명하고, 관문정후로 등용해 3백 호의 영읍을 준다. 조조를 받들게 된 방덕은 조인과 함께 완의 반란을 진압. 그대로 남하해 번에 주둔하며 관우와 대치한다. 번에 있던 장수들은 형 방유가 한중에 있다는 점을 들어 의심했으나, 방덕은 '나는 국은을 받고 있는 몸이며, 도의로 보아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죽는가, 아니면 관우가 죽는가, 둘 중 하나다.'라고 말하고, 전투에서 관우의 이마에 화살을 쏘아 맞혔다. 조인은 번성에서 북방 10리에 걸쳐 주둔했는데, 10일 넘게 장마가 계속되어 한수가 범람해 방덕은 우금과 함께 관우에게 생포된다. 우금은 항복하지만, 항복을 강요하는 관우를 꾸짖다가 처형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이후 문제 때에 장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37. 곽회 백제(郭淮 伯濟 ?~255) ●출신지 : 태원군 양곡현 ●직위 : 평원부승 - 진서장사 - 양곡후 ●영웅성 : ★★★★☆ 자는 백제(伯濟). 태원군 양곡현 사람.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평원부승으로 임명되었다.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었을때 중앙부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서북 방면의 전투에서 큰 공로를 세웠는데 황초 원년(220) 곽회는 조비가 제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사자로서 허도로 향했다. 도중 병이 나서 제시간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도착하였을때는 신하들이 즐겁게 연회를 열고 있었으므로 조비가 곽회를 꾸짖으며, "옛날 우가 제후들을 모이게 했을때, 방풍이 뒤에 도착하자 사형에 처했고 지금 하늘이 함께 축하하고 있는데 그대는 오히려 가장 늦게 왔소, 무엇 때문이오?" 곽회가 대답했다. "이제 성군을 맞이했는데 방풍인들 죽겠습니까." 조비는 그의 말을 듣고 칭찬하고 옹주자사를 겸임하도록 하였으며 사양정후로 봉하였고 나중에 실제로 옹주자사로 임명됐다. 변방을 다스리는데 강족과 오랑캐가 투항해오면 곽회는 항상 먼저 사람을 보내 그들의 천척관계나 남녀의 수효를 탐문하도록 했다. 회견할때 한두가지 일로부터 그들의 사정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줘서 그들을 감탄시켰다. 하는일이 상세하여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하는 데 큰 몫을 했다. 38. 학소 백도(학昭 伯道 ?~?) ●출신지 : 농서군 태원현 ●직위 : 부곡독 - 잡호장군 ●영웅성 : ★★★★☆ 젊어서 군대에 들어가 부곡독이 되고, 싸울 때마다 전공을 세워 잡호장군으로 승진한다. 228년 12월, 제갈량은 위에 침공해 학소가 지키는 진창성을 포위하고, 그와 동향 사람인 근상을 파견하여 귀순을 권했다. 그러나 학소는 결사항전의 각오를 보이고 마침내 격렬한 공방전이 전개된다. 제갈량의 군세는 수만이었고, 학소의 병력은 수천에 불과 했다. 그러나 학소는 제갈량의 운제와 충차 공격을 막아내고, 제갈량이 정란을 만들었을 때에는 이중 성벽을 쌓아 대항. 결국 20여일 동안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위의 원군이 도착하여 촉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제는 학소의 공적을 치하하며 열후의 직위를 하사, 학소가 귀환하자 그를 불러 노고를 위로했다. 학소가 병이 들어 죽게되자 그의 아들 학개를 불러 '살아 있는 인간에게만 거처가 있고, 죽은 자에게는 어디에도 거처할 곳이 없다. 조상 대대로 묘에서 멀리 떠나 있는데, 동서남북 어디든 네가 좋은 곳에 묻어주면 좋겠다.'고 유언한 뒤 사망한다. 39. 등애 사재(鄧艾 士載 ?~264) ●출신지 : 남양군 조양현 ●직위 : 도위학사 - 상서랑 - 태위 ●영웅성 : ★★★★★ 위나라의 명장. 자는 사재(士載). 극양 사람. 사마의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농정, 통운에 업적을 올리고 오나라에 대한 전략으로 둔전책을 성공시켰다. 255년, 관구검, 문흠 등의 반사마씨 거병때 연주자사였던 그는 기동대를 이끌고 진압 작전에 참가하여 승리의 계기를 만들었다. 263년, 촉을 정벌하는데 있어서는 서쪽 방면의 침공대를 지휘하여 산을 깎고 하천에 다리를 놓는 등 험한 길을 개척하여 대번에 성도에 육박했다. 10월에 들어 사찬과 아들 등충을 격려하며 제갈첨, 장준 등의 목을 베고 유선의 항복을 받아 드디어 성도 입성을 성취했다. 그러나 이듬해 반란의 기색이 보인다는 사찬, 종회 등의 무고로 자식과 함께 처형되었다. 40. 하후패 중권(夏候覇 仲權 ?~?) ●출신지 : 불명 ●직위 : 편장군 - 우장군 - 거기장군 ●영웅성 : ★★★☆☆ 위의 장수. 하후연의 아들 4형제 중의 맏이. 자는 중권(仲權). 사마의의 천거로 그의 수하에 들어 촉한과의 대전에서 잘 싸우고 옹주의 수비를 맡았었다. 조상이 사마의에게 죽은 뒤 신변의 위험을 느껴 촉한에 항복하였다. 그곳에서 강유의 지우를 입어 여러차례 고락을 같이하며 위군을 막았으나 조양성을 치다가 등애의 계교에 빠져 난전에 죽었다. 41. 종회 사계(種會 士季 225~264) ●출신지 : 영천군 장사현 ●직위 : 비서랑 - 사도 ●영웅성 : ★★★★☆ 위 태부 종요의 막내아들. 어릴 적부터 신동 기질을 발휘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논리학에 정통해 이름이 알려진다. 257년 제갈탄이 수춘에서 반역하자 종회는 사마소를 따라나서고 계략을 써 제갈탄 구원을 위해 달려온 오의 전역 등을 귀순시키는 등 반란 진압에 활약. 사마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당시 사람들에게 자방(전한의 책사 장량)으로 알려진다. 263년 가을. 종회는 마침내 촉 토벌군을 일으키고 수십만의 병사와 등애, 제갈서 두 부대의 각각 3만여 병사가 촉으로 향한다. 검각에서 강유의 격렬한 저항을 맞고 있는 사이에 별동대 등애가 성도에 들어가 유선을 항복시킨다. 결국 강유는 종회에게 항복하지만, 종회는 부하들을 엄하게 단속해 촉의 관료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강유와 매우 친밀한 사이가 된다. 그후 종회는 자립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등애를 모함해 도성으로 보낸다. 혼자 대군세를 통솔할 수 있게 되자 강유와 함께 계획을 짜지만, 믿었던 구건의 배반으로 호열 등의 군사가 폭동을 일으켜 강유와 함께 살해된다. 나이는 40세였다. 한편, 사마소는 종회가 반역할 것을 알고 있었고, 더욱이 반역후의 일까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고 힌다. 오나라인물
손권 (오황제) 장수 : 손랑, 손소, 손침, 손준, 손호, 손상향, 손익, 손환, 주유,육손, 여몽, 감녕, 태사자, 능통, 정보, 한당, 황개, 제갈각, 주태, 장흠, 주환, 능조, 사정, 이이, 담웅, 반장, 마충, 반준, 서성, 정봉, 정봉(정봉동생..), 노숙(노숙아들), 손량 모사 : 노숙, 장굉, 장소, 장덕추, 설종, 우번, 장승, 제갈각, 제갈근 1. 손견 문대(孫堅 文臺 156~192) ●출신지 : 오군 부춘현 ●직위 : 임시 위 - 장사태수 - 파로장군 ●영웅성 : ★★★★★ 후한말의 무장. 삼국시대의 오나라 군주 손권의 아버지이다. 절강성의 오군 사람으로 지방의 호족 출신이며, 시호는 무열황제(武烈皇帝)이다. 17세 때, 해적을 퇴치하여 용맹을 날렸고, 184년, 황건의 난에 사공 장온의 부하로서 토벌에 공을 세워 오정후로 봉해졌다. 이어서 동탁 토벌의 군사를 일으키자 원술의 부하 장수로서 낙양으로 진격하여 동탁이 약탈한 후한 황제의 제릉을 수복하여 우물 속에서 전국새를 얻었다. 192년 형주목 유표와 싸워 크게 이겼으나 자기의 용맹을 믿고 단기로 현산에 출진하였다가 전사했다. 2. 손책 백부(孫策 伯符 175~200) ●출신지 : 오군 부춘현 ●직위 : 회의교위 - 절충교위 - 토역장군 ●영웅성 : ★★★★★ 후한말의 무장. 손권의 형. 아버지인 손견이 죽은 뒤에 원술의 휘하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군대를 이어받아 강남을 평정, 일족과 측근을 태수로 임명하여 진무와 개발에 힘썼다. 마침 원술이 제위에 오르려 하자 손책은 이를 격렬하게 반대 비난하였다. 조조는 이를 알고 손책과 손을 잡는 편이 이롭다 하여 그를 오후에 봉하고 혼인 관계를 맺었다. 200년,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손책은 허도에 있는 한나라 헌제를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죽었다. 3. 손권 중모(孫權 仲謨 182~252) ●출신지 : 오군 부춘현 ●직위 : 양선현장 - 토로장군 - 대장군 - 오 황제 ●영웅성 : ★★★★★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 재위 222-252년. 손견의 둘째 아들로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200년에 형 손책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주유 등의 보좌를 받아 강남의 경영에 힘썼다. 당시 형주에는 유표가 세력을 떨치고 화북에는 조조가 있어 남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손권은 촉나라 유비와 결탁하여 남하한 조조의 대군을 적벽에서 격파함으로써 강남에서의 그의 지위는 확립되었다. 그 후 형주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유비와 대립하였으나, 219년 조조와 결탁하여 유비의 용장 관우를 격파하고 형주를 공략하였다. 그 결과 위, 오, 촉 3국의 영토가 거의 확정되었다. 221년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가 한나라의 제위를 찬탈하여 황제로 즉위하자 이것을 들은 유비도 촉나라에서 한제(漢帝)를 칭하였다. 손권도 이에 맞서서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황무라 정하고 도읍을 건업으로 정하였다. 그 후는 대체로 촉한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4. 주유 공근(周瑜 公瑾 175~210) ●출신지 : 노강군 서현 ●직위 : 건위중랑장 - 편장군 ●영웅성 : ★★★★★ 오의 장수. 자는 공근(公瑾). 서성 사람. 손책과 같은 나이로, 어렸을 때부터 그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또 손책이 부친 손견을 잃은 뒤부터는 장소와 함께 손책을 보좌하여 오나라의 기초를 공고히 했다. 200년에 손책이 죽고, 19세의 손권이 뒤를 이었을 때, 그는 장소, 정보 등 문무관과 함께 손권을 보좌했다.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공략하고 남하했을 때는, 조조와의 강화를 주장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노숙과 함께 단호히 싸울 것을 주장하고 필승의 이유를 들어 손권으로 하여금 싸움에 나서도록 했다. 적벽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후 남군태수가 되었다. 그는 익주의 유장이 한중의 장노 공격에 고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익주를 쳐서 장노를 평정하고 이어서 마초와 동맹하여 조조를 멸할 계획을 세웠으나 원정 도중에 병사했다. 5. 노숙 자경(魯肅 子敬 172~217) ●출신지 : 임회군 동성현 ●직위 : 동성현장 - 친군교위 - 횡강장군 ●영웅성 : ★★★★☆ 손권의 장수. 자는 자경(子敬). 동성 사람. 많은 재산을 가진 호족으로서 주유가 우백의 부하를 이끌고 와서 협력을 부탁하자 저장미의 반이나 되는 3천석을 희사했다. 이윽고 주유의 천거로 손권과 회견하여 천하 통일의 대계를 개진함으로써 그의 신뢰를 얻어 그의 오른팔이 되었다. 조조의 남하 때는 재빨리 유비와 공동 전선을 펴도록 제창하고 스스로 유비를 방문하여 동맹을 맺었다. 그 역시 제갈량, 주유와 함께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을 물리친 주역의 한 사람이다. 주유가 죽자 그의 유연에 따라 군세를 인계받고 적벽대전 후 유비와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던 형주 분할 문제를 해결하여 상수를 경계로 분할하는데 성공했다. 6. 정보 덕모(程普 德謨 ?~?) ●출신지 : 우북평군 토은현 ●직위 : 군 관리 - 도위 - 탕구장군 ●영웅성 : ★★★★☆ 오나라의 장수. 자는 덕모(德謀). 토은 사람. 오나라 장수중에서 가장 연로하고 인물 등용이 뛰어나 존경을 받았다. 손견을 따라 황건적을 무찌른 후 더욱 신임을 받고, 그가 죽자 손책과 함께 거의 모든 전투에 참가했다. 또 손책이 죽자 그의 아들 손견을 잘 보좌했다. 7. 육손 백언(陸遜 伯言 183~245) ●출신지 : 오군 오현 ●직위 : 동조령사 - 대도독 - 승상 ●영웅성 : ★★★★★ 오나라의 공신. 자는 백언(伯言). 오 사람. 그는 일족을 이끌고 손권의 휘하에 들어가 회계산과 파양호에 근거하던 도적을 무찔러 명성을 얻었다. 219년에는 여몽을 대신하여 형주에 주둔, 탁월한 전략으로 관우를 무찔러 형주를 오나라의 영유로 삼았다. 그 공으로 진서장군이 되고 누후에 봉해졌다. 촉나라의 유비는 관우가 죽고 형주를 빼앗긴 일로 손권에게 원한을 품고 221년에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 왔다. 이때 육손은 방위군 총사령관으로서 이릉에서 맞아 싸웠다. 이것이 유명한 '이릉의 싸움'으로서 그 결과 육손이 대승했다. 그 후 육손은 보국장군 형주목으로 승진하고 강릉후가 되었다. 그 뒤에도 계속 형주에 남아 위, 촉의 동향을 살피며 손권에 대해 자주 헌책했다. 손권 역시 내정, 외교면에서 중대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리하여 244년, 형주에 주재한 채로 정승에 임명되는 등 오의 중신으로 군림했다. 이에 앞서 손권은 왕부인 사이에서 난 손화를 태자로 삼았으나, 한편으로는 그 동생 손패를 사랑하여 노왕으로 봉하고 태자와 같이 대우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태자파와 노왕파가 대두되어 서로 다툼을 벌였다. 형주에서 이 소문을 들은 육손은 상서를 올려 태자에게 더 비중을 두도록 요구했다. 이에 겁을 먹은 노왕파는 21개항에 달하는 육손의 죄상을 들어 손권에게 제출했다. 이에 손권이 일부러 형주에가지 문책의 사신을 보내자 육손은 분노 끝에 죽고 말았다. 나중에야 손권도 그 무죄를 알고 후회했다. 8. 장소 자포(張昭 子布 156~236) ●출신지 : 팽성군 ●직위 : 장사· 무군중랑장 - 보오장군 ●영웅성 : ★★★★☆ 오나라의 건국 공신. 자는 자포(子布). 팽성 사람. 어려서부터 박식하기로 이름나 서주자사 도겸의 부름을 받았으나 거절하여 감금된 일이 있다. 그 뒤 황건적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이주했다가, 197년에 손책이 강동에 발판을 마련했을 때 그 참모가 되었다. 200년, 손책의 유촉을 받은 그는 비탄에 잠긴 손권을 꾸짖어 상복을 군복으로 갈아입게 하고 전군을 순찰시켰다. 그 후 주유 등과 협력하여 젊은 손권을 잘 보좌했다. '춘추좌씨전해', '논어주' 등의 명저를 저술하기도 했다. 9. 제갈근 자유(諸葛瑾 子瑜 174~241) ●출신지 : 낭사군 양도현 ●직위 : 장사 - 대장군 ●영웅성 : ★★★★☆ 오나라 손권의 막료. 자는 자유(子瑜). 양도 사람. 제갈량의 형. 동생이 촉을 받들고 있어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손권으로부터는 절대적 신임을 받고 가끔 촉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215년에 오와 촉이 형주를 둘러싸고 공방전을 되풀이하는 동안 조조가 한중에 침입했다. 이에 유비가 손권에게 강화를 제의하여 회담이 열렸을 때 쌍방의 대표로서 만난것이 제갈 형제였다. 두 사람은 공식 석상에서는 만났으나 개인적으로 만난 일은 없었다. 10. 장굉 자망(張紘 子網 ?~?) ●출신지 : 광릉군 ●직위 : 정의교위 - 시어사 - 장사 ●영웅성 : ★★★★☆ 상경해 학문에 힘쓰고, 귀향 후에는 후한의 대장군 하진, 태위 주준, 사공 순상 등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물리치고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비로소 손책 밑에서 관직에 들고 정의교위로 임명된다. 199년 손책의 사자로 헌제가 있는 허도로 부임하자 그대로 조조에게 만류당해 시어사에 임명된다. 손책이 갑자기 죽자 조조는 그 틈을 노려 오를 침공하려 하지만, 장굉은 '타인의 죽음에 편승하는 것은 관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원한을 살 뿐이다. 오히려 은의를 베풀어야 한다'고 반대. 이 말을 듣고 조조는 손권을 토로장군에 임명하고 장굉을 지방관으로 파견한다. 이것은 조조의 명령으로 손권을 귀순시키는 목적이 있었으나 장굉은 뜻에 반하여 젊은 손권을 보좌해 오의 발전에 진력한다. 그후 장사에 임명되고 손권의 합비 원정에 종군하는데, 손권 스스로 선두에 서서 싸우는 것과 거듭되는 전쟁에 대해 간언하자 손권도 장굉의 의견에 따른다. 마침내 장굉의 진언으로, 오에서 말릉으로 천도가 결정되고 장굉은 말릉으로 가족을 맞이하러 가는 도중에 병사. 향년 60세였다. 11. 고옹 원탄(顧雍 元嘆 168~243) ●출신지 : 오군 오현 ●직위 : 군승 - 승상 ●영웅성 : ★★★★☆ 오의 문신. 자를 원탄(元嘆)이라 하였으며, 중랑장 채옹의 제자. 말이 적고 술을 가까이 않으며 매우 엄격하여 손권이 그를 발탁하였다. 유비가 서촉에 진군하였을 때를 노려서 형주를 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승상으로 19년간 재직하였는데, 그의 천거로 벼슬한 사람은 모두 쓸만한 인물이었다. 12. 육적 공기(陸績 公紀 187~219) ●출신지 : 오군 오현 ●직위 : 진조연 - 편장군 ●영웅성 : ★★☆☆☆ 손권의 모사. 자는 공기(公紀). 여섯살때 구강에서 원술을 만났는데, 그때 먹으라고 준 귤 세개를 안 먹고 품에 간직하였다가 물러나려고 인사할때 떨어뜨렸다. 원술이 "육랑은 왜 그것을 먹지 않고 가지고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돌아가 어머님께 드리려 하였습니다"하여 그의 효심을 칭찬받았다. 13. 설종 경문(薛綜 敬文 ?~243) ●출신지 : 패군 죽읍현 ●직위 : 오관중랑장 - 태자소부 ●영웅성 : ★★☆☆☆ 젊은 시절 교주를 정벌하고 있던 손권에게 발탁되어 오관중랑장이 되고, 교주 평정에 공헌한다. 요동의 공손연이 오의 사자를 살해하자 그를 토벌하려는 손권을 만류한다. 시, 부, 논문 등 수만 자에 걸친 작품을 저술하고, 이후 <사재>라는 문집으로 정리된다. 14. 우번 중상(虞번 仲翔 164~233) ●출신지 : 회계군 여조현 ●직위 : 공조 - 기도위 ●영웅성 : ★★★☆☆ 처음에는 왕랑 밑에서 공조를 맡지만, 왕랑이 손책에게 무너지자 손책의 부름을 받고 계속 그 자리를 지킨다. 손책이 죽자 관리들이 임지를 떠나 장례식에 달려가려고 했지만, 이것을 말리고 현지에서 상을 치르게 해 나라의 안정을 꾀한다. 손권 때 기도위에 임명되지만 반대되는 의견을 자주 내놓아 다른 신하들과 협조가 되지 않았으므로 단양군 경현으로 좌천된다. 그뒤 여몽의 형주 공략에 종사해 공을 세우고 중앙으로 복직한다. 그러나 관우에게 잡혀 있었던 위의 우금을 비난해 손권의 비위를 거스르고, 오왕 취임식에서 손권이 몸소 술잔을 따라 돌리는 것을 취한 척해 잔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손권이 자리를 뜨자 곧바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으므로 발각됨) 최후에는 교주로 강제 이주당하고 만다. 우번은 그곳에서 학문에 힘써 <노사>, <국어>, <논어> 등에 주석을 단다. 15. 여범 자형(呂範 子衡 ?~228) ●출신지 : 여남군 세양현 ●직위 : 정로중랑장 - 건위장군 - 대사마 ●영웅성 : ★★★☆☆ 손책의 부름을 받고 여러 지역을 평정해 오의 세력 확대에 공헌한다. 손권 시대에는 적벽 전투, 형주 공략 등에 참가. 유비가 손권과 접견했을 때 그대로 오에 머물게 하도록 진언한다. 228년 대사마로 승진하지만 인수(印綬)가 도착하기 전에 병사한다. 16. 보즐 자산(步櫛 子山 ?~247) ●출신지 : 임회군 회음현 ●직위 : 주기 - 표기장군 - 승상 ●영웅성 : ★★★☆☆ 자가 자산(子山). 임회군 회음사람.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난을 피해 강동으로 갔다. 광릉의 위정과 동갑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주경야독하면서 자기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회계에 초정강이란 호족이 있었는데 무례한 자였다. 그래서 보즐과 위정은 그들이 침범할까 두려워했다. 한번은 오이를 진상하려고 했는데 초정강이 마침 잠을 자고 있었으므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위정은 돌아가려고 했다. 보즐은, "본래 우리들이 여기에 온 이유는 강성함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오. 그런데 지금 떠나가서 고상함을 나타내려고 했다면 단지 원수만을 맺게 될 뿐이오." 하며 그를 제지했다. 그후 손권에게 발탁되어 건안 15년에는 파양태수를 겸임하는 등 크게 활약했다. 손권이 제위에 오른후 보즐은 표기장군에 올랐고 많은 사람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자주 올렸는데 보즐에 대한 세평은 자신을 완고하게 주장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며 명리를 다투지도 않았고 당파를 이루지 않았으며 언제나 덕을 가까이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덕과 더불어 규범적인 생활을 한 모범적인 관리로서 엄준, 제갈근과 더불어 오의 세군자로 꼽혔다. 17. 감택 덕윤(감澤 德潤 ?~243) ●출신지 : 회계군 신음현 ●직위 : 서조연 - 태자대부 ●영웅성 : ★★★★☆ 손권의 모사. 자는 덕윤(德潤). 산음 사람. 효렴으로 추천받아 전당현장으로 있다가 그의 막하에 들어갔다. 대장 황개와는 서로 뜻이 잘 통하여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거짓 항복 문서를 가지고 위나라를 왔다갔다하면서 조조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아 결국 조조로 하여금 황개의 항복을 믿고 적벽의 대패전을 맛보게 만들었다. 18. 정병 덕추(程秉 德樞 ?~?) ●출신지 : 여남군 남돈현 ●직위 : 태자대부 - 태상 ●영웅성 : ★★☆☆☆ 유학자 정현 문하에서 배워 학자로서 널리 이름이 알려지고 손권에게 초빙되어 태자대부로 임명된다. 225년에 손권의 태자 손등이 혼인할 때 태상의 지위를 맡아 태자비를 맞으러 간다. '주역적(周易摘)' '논어필(論語弼)' 등 3만여 자의 저술을 남긴다. 19. 제갈각 원손(諸葛恪 元遜 203~253) ●출신지 : 불명 ●직위 : 기도위 - 대장군 ●영웅성 : ★★★★☆ 제갈량의 형인 근의 장남. 자는 원손(元遜). 양도 사람.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 오의 손권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252년, 손권이 병으로 쓰러지자 국정의 전반을 맡았다. 어린 황제 손양의 즉위와 함께 부채의 면제, 물품세의 철폐 등 내정면에서 인심을 수습하는 한편 위가 손권의 상중을 기회로 대군을 이끌고 오자 이를 대파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253년,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위에 대한 침공군을 일으켰다가 작전의 실패와 병으로 대패하고 손준의 손에 살해되었다. 20. 한당 의공(韓當 義公 ?~223?) ●출신지 : 요서군 영지현 ●직위 : 별부사마 - 선등교위 - 도독 ●영웅성 : ★★★★☆ 손권 휘하의 장수. 요서 영지 사람으로 자는 의공(義公). 유표를 칠때 등성 싸움에서 적장 장호를 한 칼에 베었고, 적벽대전에서는 격전중 화살을 맞고 물에 떨어졌던 황개를 건져내었다. 한당은 변방에서 군대 지휘를 맡으면 언제나 부하를 격려하고, 방심하지 않고 수비를 단단히 했다. 중앙에서 파견된 감찰관의 의견에 따라 법령을 준수했기 때문에 손권은 그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21. 황개 공복(黃蓋 公覆 ?~?) ●출신지 : 영릉군 천릉현 ●직위 : 군 관리 - 무봉중랑장 - 편장군 ●영웅성 : ★★★★★ 오의 장수. 손견때부터 충성스런 대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스스로 주유를 찾아 고육계를 쓸 것을 헌책. 항복하는 문서를 조조에게 보내 적벽전 승리의 계기를 만들었다. 싸움에는 선봉이 되어 싸우다가 장료가 쏜 화살에 맞아 물에 빠졌으나, 본시 헤엄의 명수라 엄동에 갑옷을 입은 채였건만 살아나 다시 활동하였다. 22. 주치 군리(朱治 君理 156~224) ●출신지 : 단양군 고장현 ●직위 : 오군태수 - 안국장군 ●영웅성 : ★★★☆☆ 손견을 따라 각지를 전전. 손견이 전사하자 원술 밑에 몸을 의지하고 손책을 보좌한다. 그뒤 손책에게, 원술에게서 떠나 강동을 지배하도록 권유한다. 손책이 죽자 장소와 함께 손권을 지켜내고, 이민족과 산월 토벌에 나서 안국장군에 임명된다. 23. 여몽 자명(呂蒙 子明 178~219) ●출신지 : 여남군 부파현 ●직위 : 별부사마 - 평북도위 - 남군태수 ●영웅성 : ★★★★☆ 오나라의 명장. 자는 자명(子明). 부피 사람. 15,6세 때부터 종군하여 정보 등과 함께 오나라의 중진이 되었으나, 언젠가 손권에게 학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발분하여, 유학자도 따르지 못할 학식을 지니게 되었다. 강적 관우와 형주에서 대결했을 때는 젊은 육손을 앞세워 상대를 방심하게 하고 그 틈에 후방을 급습하여 관우를 고립 무원의 상태에 빠뜨렸다. 인간의 심리를 역이용한 이 작전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24. 진무 자열(陳武 子烈 ?~215) ●출신지 : 노강군 송자현 ●직위 : 별부사마 - 편장군 ●영웅성 : ★★★☆☆ 손책이 수춘에 있었을 때 18세로 부하가 된다. 손권 시대에 편장군까지 승진. 동정심이 많고 기분파였기 때문에 몸을 의지하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215년 합비 전투에서 전사. 25. 장흠 공변(張欽 公변 ?~219?) ●출신지 : 구강군 수춘현 ●직위 : 별부사마 - 탕구장군 - 우호군 ●영웅성 : ★★★☆☆ 오의 장수. 자는 공변. 수춘 사람. 손책, 손권의 2대를 섬긴 장수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여몽과 함께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으나 후에 관우를 공격하다가 전사했다. 26. 주태 유평(周泰 幼平 ?~?) ●출신지 : 구강군 하채현 ●직위 : 별부사마 - 분위장군 ●영웅성 : ★★★★☆ 손책이 원술 밑에 몸을 의지하고 있을 무렵 장흠과 함께 손책의 부하로 들어가 그 측근이 된다. 손책이 이민족 토벌에 나설 때 방심하고 있던 손권이 몇 배가 넘는 적병에게 포위되어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때 주태가 육탄으로 손권을 수비해 활약한 덕분에 적을 패주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몸에 열두 군데나 부상을 입고 잠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다. 그후 황조 토벌과 적벽 전투, 남군 등 각지를 전전하는데 주태의 지휘 하에 들어온 주연과 서성은 그의 명령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손권은 연회 석상에서 주태에게 윗도리를 벗게 하고, 몸에 난 상처의 유래에 대해 말하게 한 뒤 군주가 쓰는 우산을 하사한다. 그뒤로는 모두 주태를 따르게 된다. 마침내 관우를 격파하고 분위장군에 임명되고 황무 연간(222~229년)에 사망한다. 27. 반장 문규(潘璋 文珪 ?~234) ●출신지 : 동군 발간현 ●직위 : 별부사마 - 우장군 ●영웅성 : ★★★☆☆ 손권 휘하의 장수. 동군 사람으로 자는 문규(文珪). 관우가 형주를 빼앗기고 도망칠때 그를 추격하여 궁지에 몰아넣고 말째 넘어뜨려 사로잡았다. 손권은 그의 공을 찬양하여 관우가 쓰던 청룡도를 상으로 주었다. 뒷날 유비가 복수하기 위해 쳐들어 왔을때 산중에 헤매다가 마침 하룻밤 쉬려던 집에서 관우의 아들을 만나 그의 손에 죽었다 28. 감녕 흥패(甘寧 興覇 ?~?) ●출신지 : 파군 임강현 ●직위 : 서릉태수 - 절충장군 ●영웅성 : ★★★★★ 오나라의 용장. 자는 흥패(興覇). 임강 사람. 양자강을 오르내리며 도적질을 하다 손권에게로 항복했다. 손권이 가장 아끼고 자랑하는 용장으로 조조의 남침을 유수구에서 맞이했을 때는 불과 백명의 기병으로 기습하여 위의 진중을 휩쓸어 강좌호신이라고들 불렀다. 유비가 관우, 장비의 원수를 갚으려 출병하였을 때 병을 무릅쓰고 종군하였다가 남만의 사마가가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 29. 태사자 자의(太史慈 子義 166~206) ●출신지 : 동래군 황현 ●직위 : 주조사 - 건창도위 ●영웅성 : ★★★★★ 손권 휘하의 맹장. 앞서 북해태수 공융을 도와 황건 잔당 관해의 무리를 물리치고 유비에게 연락하여 도겸을 돕게 했다. 그후 손권의 휘하 장수가 되어 뛰어난 용맹으로 여러차례 큰공을 세웠으나 적벽대전 후 손권을 따라 합비성을 치다가 장료에게 반격당하여 난전(亂箭)에 죽었다. 30. 능통 공적(凌統 公績 ?~?) ●출신지 : 오군 여항현 ●직위 : 별부사마 - 편장군 ●영웅성 : ★★★☆☆ 오의 장수. 자는 공정. 15세에 황조를 치는 전투에 종군하였다가 아비 능조가 적장 감녕의 화살에 맞아 죽자 분전하여 아비의 시체를 찾아 돌아왔다. 뒤에 손권이 합비에서 위의 장료와 맞싸울때 그를 위험에서 구해냈고 감녕을 늘 부친을 죽인 원수로 대했으나 죽을 고비에 그의 덕으로 살아난 후에 원한을 풀고 지냈다. 31. 서성 문향(徐盛 文嚮 ?~?) ●출신지 : 낭사군 거현 ●직위 : 별부사마 - 안동장군 ●영웅성 : ★★★☆☆ 손권의 장수. 낭야 사람으로 자는 문향(文嚮). 제갈량이 남병산에서 동남풍을 빌고 난 뒤 정봉과 함께 뒤를 쫓았다 하여 적벽가에 이름이 올라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용맹이 뛰어났고 특히 수전에 능하였다. 손권을 위해 여러차례 큰공을 세웠으며 강 한복판에 거짓 성루를 만들고 배를 정렬하여 하룻밤 사이의 이변에 놀란 조비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나게 한것도 그였다. 32. 주환 휴목(朱桓 休穆 178~239) ●출신지 : 오군 오현 ●직위 : 여요현령 - 전장군 ●영웅성 : ★★★★☆ 오의 장령(將領). 자가 휴목(休穆)이며, 오군 오사람으로 손권이 강동을 다스릴 때 의탁하였다. 담력과 지모가 있어 자못 깊은 신임을 얻어 일찍이 유수독(濡須督)을 지냈다. 오 황무 원년(222), 위 대사마 조인이 대장 상조 등을 보내 유수를 습격하게 했다. 그는 수하의 군사가 적었으나 침착함을 유지하여 조조군을 크게 격파하고 상조를 참수했다. 황무 7년(228), 위 대장 조휴가 오를 공격해 오자, 그는 좌도독에 임명되어 육손을 도와 오를 격파하였다. 교전하기 전에 협석을 봉쇄하고 수레로 길을 막아 조휴로 하여금 달아날 길을 찾지 못하게하고, 만약 사로잡으면 여세를 몰아 회남을 공격하여 취하고 허도와 낙양도 엿볼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계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3. 정봉 승연(丁奉 承淵 ?~271) ●출신지 : 노강군 안풍현 ●직위 : 편장군 - 대장군 ●영웅성 : ★★★★☆ 용맹했으므로 젊은 시절부터 소부대를 맡는다. 감녕, 육손, 반장 등의 지휘 하에 들어가 종종 군공을 세워 편장군으로 된다. 손량이 즉위하자 관군장군에 임명되고, 위의 제갈탄과 호준 등이 오를 침공해오자 눈이 깊게 쌓이고 적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기습하여 대승. 이 공로로 멸구장군으로 승진한다. 257년 반란을 일으킨 제갈탄이 수춘성을 포위하자 돌격대장으로 군공을 세워 좌장군에 임명된다. 손휴가 즉위하자 손휴는 권세를 휘두르는 손침을 주살하려고 계획. 장포 등과 모의해 손침을 참살한다. 263년 촉에 침공한 위를 수춘성에서 견제했으나 촉이 멸망했으므로 퇴각한다. 손휴가 죽은 후에는 복양흥 등과 짜고 손호를 즉위시킨다. 정봉은 지위가 올라감과 동시에 교만하게 되어 이 점을 비난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손호는 그가 죽은 후 옛날 죄를 추궁해 유족을 임천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34. 육항 유절(陸抗 幼節 226~274) ●출신지 : 불명 ●직위 : 건무교위 - 대사마 ●영웅성 : ★★★★☆ 오의 승상 육손의 아들. 육손이 죽자 20세에 건무교위가 되고 부하 병사 5천 명을 맡는다. 257년 위의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켜 오에 항복하자 육항은 수춘으로 가 위군을 격파하고 정북장군으로 승진한다. 손호가 즉위하자 진군대장군이 되어 서방 방위의 총지휘를 맡는다. 그 무렵 진(晉)의 형주도독 양호와 덕과 신의로 대치. 그래서 국경 지대는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272년 서릉독 보즐의 아들 보천이 진으로 등을 돌리자 서릉성을 포위하고 진나라 양호의 원군을 저지. 진나라 양조의 군대를 격파했기 때문에 마침내 진 원군은 퇴각하고 성은 함락된다. 273년 대사마 형주목에 임명되지만 다음해 여름 병으로 사망한다. 육항은 임종 때 '서릉군은 형주의 요새'로서 수비를 증강해야 한다고 상소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280년 진이 침공하자 오는 어이없이 멸망하고 만다
삼국지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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