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자료
- 공식명칭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한자명칭 : 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 지정일 1962.12.20
- 테마 기록유산, 서각류, 금석각류, 비
- 시대 고려시대
- 주소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대홍3길 77-48 (대홍리)
문화재청 설명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奉先)’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安宗)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顯宗)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이 갈비(碣碑)만이 남아 있다. 갈비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거북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비몸돌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을 새겼는데 그 모양이 자못 도식적이다. 이 비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절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던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글씨를 썼다.
弘慶寺(홍경사)
(碑에 적힌바에 따르면) 이곳 성환일대는 삼남으로부터 한양이나 고려때 서울인 개경까지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교통상 매우 중요한 곳이면서도 부근에는 마을도 주막도 없었으며 갈대가 우거지고 강도들이 출몰하여 사람의 통행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고려 顯宗(현종)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여덟째 아들로 왕위에는 오르지 못하였다가 추후 安宗(안종)으로 추대되었는데 왕자의 신분으로 불법을 독실히 받들면서 대중들을 위하 불사를 펼치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아들 顯宗(현종)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곳에 큰 절을 지어 불법을 널리 펼치도록 하였으며, 또한 여관을 함께 세워 여행자들의 편의를 제공토록 하였다.
절이름을 奉先弘慶寺(봉선홍경사)라 함은 奉先(봉선 : 선친의 뜻을 받들어) 지은 弘慶寺(홍경사)라는 뜻이다.
지금 절은 남아있지 않고 절을 지은 내력을 적어놓은 碑(비)만 남아 있다.
碣記碑(갈기비)
碣(갈)이라 하면 비석의 끝이 네모지지 않고 둥근것을 말하며 네모난 것은 그냥 碑(비)라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모양에 따라 구분하여 부르지 않게 되었으며 더구나 이 비는 둥글지도 않은데 碣(갈)이라고 하니 이상하다.
아마도 전액에 '奉先弘慶寺碣記(봉선홍경사갈기)'라고 새겨있어 그냥 [奉先弘慶寺碣記碑(봉선홍경사 갈기비]라고 부르는듯 하다.
그러니까 奉先弘慶寺碣記(봉선홍경사갈기)라고 씌어진 碑(비)라고 해석하면 될듯하다.
<평택을 지나 천안으로 내려가는 1번 국도변에 국보 제7호가 있다. 보호비각을 세워 놓았다.>
<갈기비 모습... 거북이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려 보는 모습이 매우 역동적이다. 실제로 앞에 서면 포스가 느껴진다.>
<물고기 지느러미같은 갈기를 조각하여 漁龍(어룡)을 표현한 듯 하다. 현존하는 사적비중 특이한 모양이다.>
<시선을 마주치면 조금 무섭다.>
<왼쪽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꺾은 목덜미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거북 등위에는 커다란 연꽃이 비신을 받치고 또한 거북 등을 덮어 감싸고 있다.>
<거북 꼬리도 두번을 꺾어 애교스럽게 처리하였다.>
<碑는 높이 2.8m로 매우 크며 당대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썼다.>
<碑의 옆면은 당초무늬를 조각하여 섬세하다. 비 머리인 이수는 네모진 모습이다.>
<비신의 첫머리에는 奉先弘慶寺碣記(봉선홍경사갈기)라고 씌어 있다.>
이런 비석이나 돌에 새겨진 글씨들을 모두 읽거나 이해하기가 어려워 늘 아쉬웠는데
이곳에는 그 해석을 적어놓은 동판이 있어 도움이 된다. 참고로 적어본다.
奉先弘慶寺碣(봉선홍경사갈)
이곳은 稷山顯(직산현) 成歡驛(성환역)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이다.
처음 이 부근에는 마을도 주막도 없었으며 갈대가 우거지고 강도들이 출몰하여 교통상 중요한 지점이면서도 사람의 통행이 매우 어려웠다. 고려 顯宗(현종)이 左右兩街都僧統(좌우양가도승통) '逈兢(형긍)'을 불러서 '나의 아버지인 安宗(안종)께서 왕자의 신분으로 불법을 독실히 받들었으며, 대중을 위한 사업을 성취하려 하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는 그 뜻을 받들어 이곳에 사찰을 지어서 한편으로 여행자의 고통을 제거하고 또 한편으로 불법을 선양하고자 하는 바이니 대사는 내뜻을 이루어 달라'라고 하셨다. 형긍은 명을 받고 곧 大師(대사) 得聰(득총) 大德(대덕) 藏林(장림)과 함께 금품을 모집하여 공사를 시작하였고 임금은 다시 병부상서지중추원사 강민첨과 중추부사 김맹등을 別監使(별감사)에 임명하여 함께 일을 보게 하였다.
관가의 물자를 소비하지도 않았고 농민들의 바쁜 일손을 빼앗은 일도 없이 이 모든 역군들이 힘과 정성을 다하여 현종7년(1016) 가을에 시작하여 현종12년(1021)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법당의 본건물과 행랑대문등 모두 200여간에 달하여 불상과 여러보살의 탱화鍾(종)과 磬(경)을 비롯한 모든 기구가 완비되었다.
나라에서는 절 이름을 奉先弘慶寺(봉선홍경사)라고 내려주셨다. 또 절 서쪽에다가 여관 한채를 세웠는데 크기가 80간이다.
이것은 명칭을 廣緣通化院(광연통화원)이라 하였다. 겨울에 사용 할 온돌방과 여름에 거처할 마루방을 갖추었고 여기에 식량 마초등이 충분히 비축되어 일반여행자들의 편의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의지할 곳이 없는 무리들에게 도중의 휴식처가 되게 하였다.
이는 安宗(안종)대왕께서 생존시의 염원을 실현시킨것이며 금상폐하의 자비로우신 뜻을 이루게 된 것이다.
문신 인나에게 이 사실을 기록하라 하시므로 이상과 같이 그 시말을 적어 역사의 자료에 이바지 하려 한다.
원비 고려 현종 18년 글 翰林學士(한림학사) 內士舍人(내사사인) 崔沖(최충) 글씨 國子丞(국자승) 白玄禮(백현례)
1981년 10월 임창순 역술 남계 조중국 쓰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