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7
정말 뱀의 예언처럼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뱀은 인간 먼저 그 말썽 많은 선악과를 훔쳐먹었던 것은 아닐까. 동물을 다스리는 인간도 먹지 못하게 금지된 선악과가 뱀만이 먹도록 허락이 내렸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뱀이 어떻게 인간도 모르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지능을 가질수 있겠는가. 만일 훔쳐먹었다면 인간과 달리 뱀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지 않은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반대로 훔쳐먹지 않았다면 감히 하나님과 엇설만큼 높은 지능의 소유는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뱀의 정확한 판단력은 간교함이라기보다는 거의 예지에 가까운 지혜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뱀의 사악함과 지혜로움을 방임했을까. 아니면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너희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3:5)
뱀의 지혜는 하나님과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는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이며 그 능력의 반경이 어느만큼이라는 내막조차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 심지어는 선악과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처럼 될수 있다는 극비정보를(그가 정보를 어떤 경로를 통해 입수했는지도 흥미롭다)슬쩍 공개하면서 하나님을 대수롭지 않게, 내심 깔보는 태도를 구태어 감추려하지도 않는다. 뱀은 분명 하나님을 우습게 보고 있다. 아니, 하나님의 권력독식에 불만마저 품고 있다. 뱀은 불행한 노예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에게 처음으로 막강한 권위에 대한 도전과 저항을 통해 운명의 주인이 될수 있도록 자유와 평등사상을 고취한 선각자인지도 모른다.
이미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줄을 알고 무화과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3:7)
비로소 야만인으로부터 문명인으로 전환하는 역사적 순간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처음으로 느낀 심리반응은 부끄러움이었다.
선은 별 것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건 당연히 악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드디어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생겨 지금껏 행해온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남의 권유와 유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역사상 처음으로 자각적선택과 자율적행위를 하게 된 것이다.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은 인간에게는 무지와 노예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도덕이란 실은 수치심을 느낄줄 아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치심을 알고 그것을 피하는 것이 곧 선이요 그러한 인간이 바로 문명인이다. 수치를 느끼지 못하거나 수치인줄 알면서도 강행하면 그것은 다름아닌 악행이다. 그런데 수치심을 느끼고 그것을 피하는 선한 행위가 왜 하나님에게서는 죄악시되고 있는가. 도덕과 문명과 선이 죄악으로 단죄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2. 최초인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건 추방인가, 해방인가?
인간의 선조인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훔쳐먹은 사실이 발각되어 하나님의 추궁을 받게 된다. 아담은 이브에게, 이브는 뱀에게 그 책임을 밀어버린다.(3:12-13)
여기서 우리는 선악과를 먹었다고 해서 반드시 선한 행위만을 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고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건 선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류의 선조인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도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선악과의 효험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이럴 경우에는 역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결여가 있음을 설명한다.)그보다는 선악과를 훔쳐먹은 죄값으로 치를 죽음의 징벌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고 유추하는 게 도리어 설득력이 있을 법 싶다. 죽음의 공포는 인간을 비굴하게 만들며 비굴함은 다시 선을 포기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원죄에 대한 징벌인 잉태와 출산이 없었더라면 예수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그러나 실은 아담과 이브의 책임전가행위는 어떤 의미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실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건 선이다. 솔직한 고백이 선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악한 행위로 인정되는 데는 그러한 솔직함이 동료를 팔아먹는 의롭지 못한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아담과 이브는 의리를 지켜야 할지 아니면 진실을 지켜야 할지에 대한 이처럼 복잡한 문제를 판단하기에는 지적능력이 아마도 조금은 벅찼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들의 마음 속에 지혜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면 이러한 진실추구는 거짓이 될 것이다.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3:14)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
그러니 뱀은 워낙 땅위로 기어다니는 동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다음부터 기어다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날아다녔는가 아니면 걸어다녔는가? 땅위로 기어다니는 것이 죄악에 대해 내려지는 징벌이라면 땅 속을 뚜지고 다니는 두더지나 지렁이는 도대체 어떤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불행한 운명을 가지게 된 것일까?
또 하나 의심되는 점은 뱀은 죄를 짓기 전이나 지은 다음에나 삶의 환경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원래 어떤 이동방식을 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형벌이란 것이 고작 땅을 기어다니는 것과 흙을 먹고 여자와 원수가 되어 여자의 후손에게(당시에는 여자라고 해보았자 이브 한 사람뿐이었다. 여자의 후손이 따로 있을 수도 없었을테고)머리를 상하게 되는 것뿐이다. 그야말로 당연히 중죄로 다스려야 할 죄를 경죄로 다스린 격이다. 사실 뱀보다 주어진 생활환경이 더 열악한, 타고난 불운의 동물들도 많다. 지렁이, 두더지, 굼벵이...이들에 비하면 벌을 받았다는 뱀은 도리어 행운이 차례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진실을 말한 쪽은 뱀이고 거짓말을 한 쪽은 하나님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 했지만 그건 위협일뿐 진실이 아니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는 죽지 않았으며 죽음의 고비 같은 시련도 겪지 않았다. 진실을 말한 뱀은 죄인이 되고 거짓말을 한 하나님은 도리어 법관이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뱀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어떤 진리도 인정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곧 진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성경 속의 어떠한 사건에 대해서도 추호의 의혹이나 이의를 던질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호기심에는 그 어떤 예외적인 영역도 있을 수 없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3:16)
남녀불평등의 시작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불공평함에서부터 발단되었음은 앞에서 이미 지적했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잉태와 출산 역시 일종의 형벌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창조초기에 인간의 번식을 남녀성결합에 의한 잉태와 출산의 과정을 통해 실현할 계획이 없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1장 28절에서는 인간더러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한다. 그 생육과 번성은 초기에 어떤 방식을 취하려고 했을까? 과연 생육과 번성이 잉태와 출산이라는 구체적인 과정이 배제된 채 실현가능했을까.
잉태와 출산의 고통과 수고스러움은 성모마리아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통과 수고스러움은 결국 성스러움을 낳는다.
잉태와 출산은 설령 고통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번식을 실현할 수 있었기에 형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축복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형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잉태는 고통이 되고 출산은 수고가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잉태와 출산의 원인이 되는 성결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사실이다. 남녀성결합의 전제가 없이는 잉태와 출산은 공담에 불과하다. 물론 이 말은 인간은 워낙 잉태와 출산의 기능을 가졌으나 그 과정이 고통스럽거나 수고스럽지는 않았는데 선악과를 훔쳐먹은 죄 때문에 고통과 수고가 추가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이브를 창조할 때 그녀가 아담의 성적결합의 상대임을 전혀 암시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그녀와 아담이 결합함으로서 생육 즉 잉태하고 출산할 것이라는 암시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그저 아담의 무료를 달래기 위한 말벗이었을 뿐이다.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
기대하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