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산악연맹 바름산악회 2001 바름 아콩가구아 원정 보고서(2) 2001 ROCK & ICE ACONCAGUA EXPEDITION
● 4. 등반보고
4. 등반 보고
1) 대상지 및 루트소개
아콩가구아(ACONCAGUA 6,959m) 아콩가구아는 남위 30~39도 사이인 칠레 안데스 산군에 속하나 아르헨티나 령에 들어가며, 아르헨티나의 멘도사에서 서쪽으로 약 200Km떨어져 있고, 안데스 산맥 및 남북아메리카 대륙의 최고봉이다.
폴리쉬 빙하 루트(Polish Glacier Route) 폴리쉬 빙하 루트의 첫 번째 등반은 1934년 3월 8일 '콘스탄티 나키에비찌조코(Konstanty NarkievitczJodko)', '스테판 데즌스키(Stefan Daszyinski)', '윅토 오스트로우스키(Wictor Ostrowski)'와 '스테판 오시엑키(Stefan Osiecki)'에 의해 이루어졌다. 북동면 사면에 돌출 된 이 빙하루트는 아콩가구아(Aconcagua)의 두 번째로 유명한 루트이며, 미학적 풍광과 적당한 난이도로 인해 많은 산악인들의 선호의 대상이 되었다. (피켈, 크렘폰과 모든 크레바스(crevasse) 구조장비를 필요로 한다.)
3개의 루트가 프라자 아르헨티나(Plaza Argentina)로부터 빙퇴석의 렐린초스(Relinchos)빙하를 넘어 북서쪽으로 이끈다. 이 루트들은 케른(cairns)에 의해 표시가 되어 있고, 보통 다른 어떤 특정루트를 찾는 것보다 쉽게 따라 갈 수 있다. 돌무더기 위의 메른(cairns)표시를 따라간 후, 가파른 경사면 아래에 캠프지에 다다르는데, 이것은 왼편의 높은 절벽과 오른쪽의 태양에 의해 녹아 형성된 뾰쪽한 얼음기둥들로 이루어진 지역(a field of penitentes)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산허리 급사명으로 둘려 싸여져 있으며, 대부분의 산악인들이 이 지역으로부터 가능한 쉬운 등정루트를 찾으려 애를 쓰며, 하산시에는 이 지역을 둘러싼 급사면의 왼쪽부분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할 수 있다. 이 지역의 맨 윗부분으로부터 왼쪽으로 움직인 뒤 작은 물길(시냇가 같은)을 가로 질러 큰 직벽 바로 아래의 캠프지에 이른다. 이곳이 보통 CAMP1(5,000m, 16,400ft)의 장소이며 프라자 아르헨티나(Plaza Argentina)로부터 4시간 소요된다. 또한 오후 해동시간에 유일하게 물이 흐르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폴리쉬빙하 루트의 캠프지 이기도 하다. CAMP1로부터 어떤 이들은 다음 캠프를 아메기노 콜(Ameghino Col)과 아콩가구아(Aconcagua) 사이의 통로인 아메기노 콜(Ameghino Col) 꼭대기(5,380m, 17,650ft)에 만든다. 하지만, 보통 아메기노 콜(Ameghino Col)은 지나쳐지고, 대부분은 계속 올라 폴리쉬빙하 밑으로 이끄는 왼쪽 경사면으로 오른 뒤, 보통 CAMP2로는 5,700M(18,700ft)에 작은 캠프지와 또 다른 조금 넓은 5,900m(19,350ft: 32도 38' 07"S, 69도 58' 36"W) 캠프지에 캠프2를 세운다.
이 두 번째 캠프지들은 CAMP1으로부터 6시간 소요되며 폴리쉬 빙하 하단부 절벽 바로 밑에 위치해 있다. 이 조금 넓은 캠프지가 넓다고는 하나 주로 8부터 최고 10까지 밖에 머물 수 없으며, 또 다른 제3의 캠프지는 절벽의 오른쪽 멀리 빙하 아래에 평평한 지형에 위치해 있다. 거의 모든 이들이 CAMP2를 마지막 캠프로 사용하여, 여기서부터 긴 하루가 소요되는 정상탈환을 시도한다.
이 벼랑아래의 CAMP2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수평으로 넘어가 폴리쉬 빙하를 타고 오름을(이 장소는 빙하 아래에 평평하고 주로 태양에 의해 형성된 뾰족한 얼음기둥들로 인지 할 수 있음) 시작으로 정상탈환을 시작, 계속해서 피에드라 반데라(Piedra Bandera)로 불리는 중간부위에 하얀 띠가 있는 돌출된 검은 바위(거의 아르헨티나의 국기와 유사함)를 목표(조준)로 해 이 거대한 얼음 장애물을 공략하며 대각선으로 오르면(30도~40도), 피에드라 반데라 아래 부분에 위치한(실제로는 위부분에 있다) 캠프지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피에드라 반데라(Piedra Bandera)의 오른편을 지나, (오른쪽을 지날지라도 병목<The Bottleneck 기울기 40도>으로 알려진 폴리쉬 빙하 중간부의 큼직한 음첨봉을 오른쪽에 유지해야한다). 계속해서 30도에서 35도로 피에드라 반데라(Piddra Bandera)위의 빙하 왼쪽쪽 부분으로 크레바스(Crevasses)들을 피하는 동시에 빙산의 중간부의 큰 얼음 첨봉들(Seracs)을 피해 올라 산 능선(동릉)에 다다른 후, 이 능선(이 능선에는 마치 정상처럼 보이는 유사 정상들이 많이 있음)을 타고 정상에 오른다. 또한 저상을 오르는데는 몇 개의 다른 루트들이 있는데,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것에 하나가 아콩가구아의 동쪽 능선(The East Ridge of Aconcagua)까지 오르기 전 폴리쉬 빙하 중간부분에 45도로 기울어진 얼음 첨봉들 사이를 지그재그 하며 오르는 변형루트(Variation Rute)이다. 여기는 얼음 첨봉(Seracs)들과 크레바스(Crecasses)들로 인해 병목(The Bottle neck)보다 더 힘들고 위험할 지라도 이곳의 눈이 상태가 등반하기에는 어쩌면 더 좋을 것이다.
폴리쉬 빙하 직선 루트(Polish Glacier Direct Route) 이 루트는 폴리쉬 빙하의 왼쪽을 오르는 대신 오르쪽을 오르는 것인데, '아르헨티나의 끝(Argentina Finish )','아르헨티나의 변수(Argentina Variation)'등으로 알려져 잇으며, 1961년 아르헨티나의 안디노 투쿠맨 클럽(The Club Andino Rucuman)의 멤버들인 올렌도 브라보(Orlando Bravo), 타도 멜로미오(Tato Bellomio) 그리고 다도 리에비치(Dado Liebich)의해 원정 되었다. 이 루트는 6,100m(20,100ft)빙하 오른쪽 면 뒷편으로 몇 개의 캠프지가 있다. 이루트는 폴리쉬 빙하 중간부의 얼음 첨봉을 왼편에 두고 아콩가구아의 오른쪽 면()으로 알려진 절벽을 오른쪽에 유지하며 오른다. 기울기의 정도는 6,500m(21,325ft)에서 짧은 구간 40도~50도를 고비로 급격히 줄어들며, 이 구간 후의 위쪽 경사면은 아콩가구아의 동쪽능선(The East Ridge of Aconcagua)마루로 통하며, 이 위쪽 경사면을 타고 아콩가구아의 동쪽능선까지 오른 후 이 능선을 타고 정상까지 오른다.
폴리쉬 빙하 직등 루트의 아라고네사 변형 루트 (Aragonesa Variation of the Polish Glacier Direct Route) 이 폴리쉬 빙하 다이렉트 루트의 변형루트는 1995년 1월 18일, Javie Alvira, Jose Antonio Hidalgo, jose Vilalta, 그리고 Javier Subias에 의해 등반 되었다. 약 6,000m에서 폴리쉬 빙하의 오른쪽을 출발하여 알련의 슈트와(chutes, 물이나 얼음등이 쏟아져 내리는 경사진 도랑) 꿀와르, UIAA IV+급의(요세미티 등급 5.6) 록 스텝(Rock steps), 그리고 최대 각도 75도인 눈과 얼음구간을 등반 한다. 이렇게 따라 가면 6,500m 지점에에서 폴리쉬 빙하 다이렉트 루트를 만나게 하는 긴 램프(Ramp)에 이르게 된다. 이상의 루트들은 여러 가지 등급의 테크니컬한 아이스 클라이밍을 요구한다. 5,960m 지점의 폴리쉬 빙하의 아래에서부터 60도에 이르는 얼음구간과 트래버스 구간이 포함되어 있다. 빙하 하류는 비교적 평탄하나, 보다 단단한 얼음과 눈에 이르기에 앞서 페니텐테스가 문제가 된다. 폴리쉬 루트는 지난 10년간 점점 더 어려워져서, 등반 루트의 급경사 구간에 얼음뿐인 구간이 점점 더 많아졌다. 등반 루트의 하단, 즉 빙하의 베이스 밑에서는, 페니텐테스(상어 아빨 모양으로 얼어붙은 눈지대)의 형성으로 인해 최근 몇 년 동안 점점 더 어프로우치가 어려워졌다. <자료번역 협조: 이선호, 구병서>
1) 운행 일지 [보고자: 최영규]
■ <12월 07일(금): 인천공항 출발(15:00) -> L.A(12/07 08:30 현지시간> 예상치 않게 박상일, 이용진을 비롯한 몇 명의 회원들이 환송을 나와 주었다. 반가웠다. 우선 화물로 처리할 카 고백을 부쳤다. 9.11미국 테러사건 Eonas에 짐 검사가 무척 까다로웠다. 기내로 들고 들러갈 가방(작은배낭)에 대한 검사도 시간을 잡아 먹었다. 이때까지도 핸드폰은 회사일과 관련된 전화로 계속 울어대고 있었다. 출국을 위한 마무리 점검으로 분주했던 지난 일주일로 나는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야! 이래가지고 현지에서 과연 커디션을 되찾아 문제 없이 등반에 임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 될 지경이다.) 보수적인 분위기의 직장에서 이렇게 긴 일정의 해외등반을 떠나는 것. 정말 어려운 일이였고, 한편 일신상의 불이익도 각오해야했다. 아무튼 오후 3시 비행기는 이륙했고 예상보다 빠르게 LA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에서 부친 화물은 자동으로 최종 도착지인 멘도사까지 연결되게 되어있지만 9.11사태로 인하여 LA공항에서 또 한번의 화물검사를 위해 일단은 화물을 찾아 다시 부쳐야했다. 서울과 시차 7시간.
■ <12월 08일(토)~09일(일): LA공항 출발(12/07 12:05 -> 페루 리마 경유 -> 칠레 산티아고(12/08,토 06:30) -> 멘도사(12/08 11:10) -> 푸엔테 델 잉카(16:40)> L.A공항에서 3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L.A에 거주하고 있는 형님들께 연락을 할까 했으나 그냥 대기하며 쉬기로 했다. 현지시간 12월 07일 12:05분 또다시 지루한 비행이 시작되었다. 중간 기착지인 페루의 리마에서 기내 정리를 위해 40분 정도 머물렀다가 칠레의 산티아고로 출발했다. 멘도사행 출구를 찾기 위해 몇 차례 서로 안 통하는 영어로 힘들게 확인한 후 대기하며 쉬었다. 공항청사의 창 넘어로 안데스산맥의 모습이 저만치 보이고 있었다. 비행기 탄 시간만 계산해도 꼬박 24시간. 이제 50분 정도를 더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기만 하면 최종 기착지인 멘도사에 도착하게 된다. L.A와 시차 5시간. 서울과 이곳은 12시간의 시차가 있다. 11시 10분 드디어 멘도사에 도착했다. 공항엔 한국에서 연결한 현지 여행사(INKA Expeditions) 직원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짐을 싣고 곧바로 멘도사 시내의 산 마틴(GENERAL SAN MARTINE)공원 안에 있는 입산신고소로 향했다. 현지 시간으로 토요일이어서 2시 이후에는 신고절차를 밟을 수 없기 때문이다. 1인당 120불씩의 입산료를 내고 신고를 마쳤다. 현지 여행사 사무실에 들러 등반기점인 푸엔테델 잉카(Puente del inca)까지의 차량과 숙소, 짐을 날라줄 뮬라 가격 등 제반 예약 사항을 확인하고 근처에 잇는 식료품점(철창으로 된 이중문을 설치하고 있었다.)과 장비점에서 연료, 식료품, 고기 등을 구입한 후 잉카로 출발했다. 끝도 없는 평원과 빙하 녹은 물이 홍수때의 흙탕물처럼 거칠게 넘실거리는 강줄기를 따라 무서운 속도로 칠레국경을 향해 달렸다. 우리는 "야! 이러다가 이거 등반도 못해보고 교통사고로 죽는 거 아니냐?" 우리끼리 걱정스러운 대화를 주고 받았다. 물론 운전사는 알아들을리 없었겠지만. 중간에 작은 마을 식당에서 뷔페스타일로 점심을 먹었다. 4시간 예상했던 길은 3시간 10분만에 도착했다. (멘도사에서 이곳까지는 160Km가 조금 넘었고 크고 작은 도시들을 6곳 정도 통과했다.) 아옐렌(Ayelen)이라고 하는 작은 호텔의 3인실에 여장을 푼 후 창고로 가 뮬라(Mulas)에 실을 수 있도록 무게를 일정하게 하기위해 카 고백을 정리하고 별도로 지고 갈 배낭은 따로 정리해 준비했다. 호텔에서 저녁식사가 나왔다. 조그마한 식당이었는데 우리는 스프와 빵 그리고 얇게 썰어 나온 고기에다가 기념으로 포도주 한 병을 시켜 그럴듯하게 식사를 마치고 호텔 앞에 나와 쉬고 있었다. 대부분 스테이크 같은 고기였는데, 우리는 변변한 안주없이 다 마셔버린 포도주를 아쉬워 하며 다시 시작 식사를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 다 남기고 말았다. 이곳은 9시는 되어야 날이 저물었다. 두 번에 걸친 식사를 마치고 호텔 근처를 여기저기 구경하며 정신없었던 2박 3일을 차분하게 정리했다.
■ <12월 09일(일) 현지시간: 푸엔테 델 잉카(Inka)(09:10) -> 푼타 데 바카스(Vacas 2,305m)(09:30) -> 팜과 데 레냐스(Lenas)대피소(2,800m)(14:50)> 이스캠프까지 2박 3일의 캐라반이 시작되는 첫날 아침, 지프의 짐칸과 지붕위에 짐을 싣고 멘도사 방향으로 약 8Km 떨어진 바카스계곡(Rio de Las Vacas)의 출발지점인 푼타 데 바카스(Punta de Vacas)(국경 검문소와 화물차 휴게소 그리고 군부대가 함께 모여 있는 곳)로 이동했다. 차에서 내려 뮬라꾼 움막 앞에 짐을 내리고 살펴본 주변은 그야 말로 들었던 대로의 모습이다. 자!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배낭을 지고 09:30분경 뮬라꾼들보다 앞서 출발하였다. 조금이라도 시원할 때 움직이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예상대로 날씨는 건조했고 몹시 뜨거웠다. 걸은 시간과 관계없이 몇 뼘 정도의 그림자라도 생기는 바위를 만나면 배낭을 벗고 그 좁은 그늘에 등을 붙이고 쉬었다. 첫 야영지인 레냐스(Refugio Pampa de Renas 2,800m)대피소 까지는 약 12Km정도로 5시간 정도면 충분 했으므로 여유가 있었다. 황량한 돌산으로 둘러싸인 계곡 초입을 벗어나자, 푸른빛의 초지(草地)로 이루어진 사이로 격류처럼 흐르는 붉은 흙탕물. 북면의 호르코네스(Las Horcones)계곡에 대한 자료만을 보고 온 우리들의 눈에는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하지만 한낮의 날씨는 28도에서 33도를 오르내렸다. 더군다나 출발한지 2시간쯤 지나자 계속된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특히 레냐스 대피소 직전의 한 언덕은 3,000m가 넘는 고도를 가리켰다. 한낮이 되자 고지대의 만년설이 녹으며 물어난 지류들은 등산화를 적시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상태로 불어났다. 오전 중에는 쉽게 건너뛰던 지류들을 건너려고 상당한 거리를 오르내리며 레냐스 대피소로 향했다. 오후 2시가 넘으면서부터는 내리막길을 걸어 2시 50분쯤 레냐스 대피소에 도착했다. (5시간 20분 소요) 레냐스 대피소는 아주 작은 한 칸의 돌집이었고 주변에 몇 개의 고정 텐트를 쳐 놓아 창고나 숙소로 쓰고 있었다. 우리는 대피소만한 크기의 바위뒤에 텐트를 붙여 치고 뮬라꾼들리 날라다 놓은 카 고백에서 필요한 장비를 꺼내어 저녁을 준비했다. 레냐스 대피소의 식수는 지류 한 곳에서 파이프를 연결해 받고 있었는데 오후 4시가 넘어가면서 거대한 암벽이 서편 가까이에 있는 관계로 그늘이 되자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물이 말라버려 송진철대원이 1시간쯤 걸리는, 지나왔던 지류에 가 한 말 정도의 식수를 담아왔다. 6시쯤 되자 레냐스 대피소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거의 해질녘 상태가 되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잠자리로 가는 뮬라꾼들(이들은 반드시 외진 곳에 뮬라를 풀어놓고 바위 옆에 붙어 잤다.)과 다음날 아침 출발시간을 가지고 장난기 섞인 협상을 벌렸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일찍 출발해 더위를 피하려고 하였다. 박종관대원의 목소리가 결국 뮬라꾼들을 꺾었다. 우리는 이곳에 상주 중인 레인저에게 입산신고소에서 받은 허가서 중 한 장을 제출하고 관리대장에 등록한 후, 등반 중에 사용할 우리팀의 등록번호가 적힌 쓰레기봉투를 받았다. 하산시에 이곳에서어 쓰레기를 반납하고 확인을 받아야했다.
■ <12월 10일(월) 현지시간: 팜파 데 레냐스 대피소(08:00) -> 카사 데 피에드라(Casa de Piedra)대피소 3,200m(15:10)> 아침 기온은 6~9도 정도 였는데 우리들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그보다 더 낮았다.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08:00 배낭을 꾸려 출발했다. 지금까지는 계곡의 왼편을 따라 올라 왔지만, 이 레냐스 대피소 근처에서 계곡을 한번 건너야 하는데 물의 양이 만만치 않았다. 마땅히 건널만한 곳이 없어 한참을 헤메다가 상류쪽으로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마주보며 협곡을 이루고 있는 곳에 아주 작은 철재다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느 안내서나 자료에도 없었던 다리였다. 그 철재 다리는 한쪽에만 난간을 세워 놓은 구조로 한사람이 겨우 건널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기둥을 세워놓은 바닥에 2000.12.25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1년이 채 안된 다리였다. 이 다리를 건너 푸른 초지의 산허리를 돌아 오르자 바카스계곡의 진면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시작일 뿐이었다. 계곡이라기 보다는 넓디넓은 초원과 같은 모습이었다. 4~5천 미터의 능선으로부터 흘러내린 붉은 흙과 잡석의 사면 마치 그랜드캐넌처럼 하상을 수심 미터 깊이로 파먹은 채 거칠게 흐르고 있는 강물. 그곳에 뿌리를 두고 서부영화에 나오는 풍경을 만들고 있는 작은 초목들. 가슴이 확 열리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을 이국적인 것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더워지는 날씨로 힘들어 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뜨거운 햇살을 피할 곳이 전혀 없었다. 바람이 없었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끔식 산정의 만년설들이 녹아 물기를 잔뜩 먹은 잡석과 흙들이 비탈을 따라 쏟아져 내렸다. 마치 레콘에서 쏟아져 나오는 잘 비벼진 콘크리트와 흡사했다. 굵은 잡석으로 가득한 너덜지대와 같은 곳을 걷느다는 것은 쉽지는 않았다. 오후 1시경 뜨겁고 건조한 날씨로 인해, 하늘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바카스 계곡의 아름다운 초원같은 산록들도 지겨워질 즈음 '야~ 거의 다 온 것 같기는 한데 피에드라(Casa de Piedra. 3,200m)대피소는 도대체 어디냐?' 작은 둔덕을 막 넘으며 넓은 강바닥에 정신을 뺐기고 있을 때, '형! 저기 좀 봐요!' 고개를 돌리는 순간 건너편의 좁은 협곡(렐린초스) 너머로 아콩가구아의 정상이 눈에 '확' 들어왔다. '와! 저게 뭐야. 정말 멋있다! 도대체 누가 아콩가구아를 잡석더미, 돌산이라고 했냐?' 얼른 배낭을 벗어놓고 이 순간을 놓칠세라 짙은 남청의 보석 빛 배경으로 짙은 암벽과 흰 눈이 너무나 멋지게 어우러진 아콩가귀를 모습을 서둘러 카메라에 담았다. 더구나 넓디넓은 강바닭의 한편에 있는 샘터. 그 푸른 초지(草地) 한가운데 샘물에 비쳐 있는 아콩가구아의 모습은 한 편의 서정시와 같았다. 모두들 한동안 정신을 빼앗긴채 등반 일정에 관한 걱정이나 피로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금세 정상으로부터 오른쪽으로 가파르게 흘러내린 마치 스키장의 상급 슬로프 같은 곳이 바로 우리가 등반할 폴리쉬 빙하(Polish Glacier)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걱정스럽고 긴장되기보다는 볼수록 여전히 멋지고 아름다워만 보였다. 우리 팀은 샘터 옆에 텐트를 쳤다. 저만치 또 다른 팀이 아주 납작한 2인용 텐트 한 동을 쳐 놓고 있었다.(나중에 알았지만 그팀은 2명으로 이뤄진 캐나다팀이었다.) 피에드라 대피소는 100여 미터 더 올라가 초지로 이루어진 둔덕 아래에 있었다. 강바닥과 인접해 서 있는 커다란 잡석(雜石)덩어리 같은 바위(역암)에 한 쪽 벽을 빌려 지어진 피에드라 대피소는 뮬라꾼 몇 명이 잠을 청하고 있었다. 레인저가 상주하는 대피소는 아니었다. (레냐스 대피소에서 피에드라 대피소 까지는 약 14Km로 7시간 정도 소요..) 레냐스 대피소에서는 서쪽 지류(곡)에서 호스로 물을 내려 받아 사용했는데, 양도 적고 흙이 섞여있어 불편했다. 그러나 피에드라 대피소 샘터의 작은 초지(草地)옆에 야영지가 있어 정말 편하고 푸근했다. 더군다나 텐트에서 고개만 내밀면 멋진 아콩가구아 정상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 왔다. 하지만 오후 5시를 넘어서자 정상은 북면으로부터 넘어 오는 구름 속에 금세 묻히고 말았다. 시즌 초반의 날씨 문제가 뒤늦게 우리들의 행복한 기분에 냉기를 뿌렸다. 우리 팀은 이렇게 아콩가구아와 첫 인사가 이루어졌다.(이런 날씨는 이날 이후로 매일같이 어김없이 반복 되었다.)
■ <12월 11일(화) 현지시간: 카사 피에드라 대피소(07:30) -> 플라자 데 아르헨티나(Plaza de Argentina) (4,200m)(14:00)B.C설치> 새벽. 볼일을 보러 텐트 밖으로 나갔다가 붉은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아콩가구아의 황홀한 모습에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3일째 캐라반의 시작은 빙하 녹은 물이 흐르는 이른 아침의 바카스계속을 맨발로 건너는 것으로 시작된다. 박종관 대원은 너무 발이 시려 계곡 중간 모래톱에서 한참 엄살을 부리다 건너왔다. 거친 돌바닥으로 발바닥은 아프고 장딴지는 얼음 칼로 베어내는 것처럼 차가웠다. 등산화를 벗고, 건너고, 시린 발을 추슬러 다시 출발하는데 30분 정도를 허비했다. 이날 캐라반의 절반은 거의 V자에 좌우 경사가 급하고 좁으면서도 거칠고 웅장한 렐린초스(Relinchos)계곡의 비탈길을 오르느라 힘들기는 했지만 계곡의 입구로부터 끝까지 아콩가구아의 동면 정상을 보면서 걷는데다가, 격렬하고 풍부하게 흐르는 수량과 주변의 경관-아콩가구아 전형의 황토 빛의 거친 암봉들과 어마어마한 흙사면, 그리고 나머지 절반인 고도 4,000m 지역부터 펼쳐지는 완경사의 플라토 지역의 초원과 같은 산록, 샘터나 습지의 부드러운 초지, 짧은 목을 땅바닥에 바짝당겨 붙인 채 피어있고 희고 노란색의 이름 모를 꽃들. 이것들은 앞에 두고 멋진 배경으로 저만치 우뚝 서있는 아콩가구아의 동면의 정상과 병풍처럼 늘어선채 멋진 벽으로 솟아있는 아메기노(Ameghino. 5,883m)봉. 온종일 설레이는 마음으로 B.C로 이용되는 프라자 아르헨티나(Plaza Argentina. 4,200m)에 도착했다. 프라자 아르헨티나는 계곡의 왼편 산록을 따라 걷는 플라토 지역이 끝나면서 내려서게 되는 황갈색의 드넓은 모래사장(모레인지대)을 우측으로 건너면서 만나게 되는 거대한 퇴석지대 위에 위치해 있다. 우리 팀은 레이저와 닥터가 상주하는 텐트에서 조금 떨어지기는 했지만 식수원인 계곡(빙하 녹은 물이 흐르는 곳)에 가까운 쪽에 B.C를 설치하고 저녁(일몰 21:00)때까지 장비와 짐정리를 했다. (시즌 초반이라서 그날까지 프라자 아르헨티나에 올라 온 총 인원은 우리 팀까지 총 37명이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스웨덴, 멕시코, 미국 팀들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해 황량했던 프라자 아르헨티나가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피에드라 대피소에서 프라자 아르헨티나(Plaza Argentina)까지는 약 10Km로 6시간 30분정도 소요되었다. 6시경 되자 또 다시 정상 쪽은 짙은 구름에 휩싸이고 말았다.
■ <12월 12일(수) 현지시간: 휴식(장비점검)> B.C를 덮을 듯이 가는 눈발을 동반한 구름이 정상쪽을 휩싸고 있었다. 북면 쪽으론 날씨가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온이 뚝 떨어졌다. 해가 있을땐 거의 반팔 차림이었지만 우목복까지 껴입은 채 장비정리며 부엌 신축공사(?), 식사준비, 식수조달 등으로 고소적응을 겸한 휴식을 취하며, 오후엔 캠프1으로 올릴 1차 장비 및 식량 등을 점검하였다. 틈나는 대로 등반관련 자료들을 보면서 등반계획을 보완했고, 찻물을 끓이느라고 버너는 쉴 틈이 없었다.
■ <12월 13일(목)현지시간: B.C(08:15) -> C1(5,100m)(13:00)으로 1차 짐 수송> 캠프1으로 1차 짐 수송을 해 놓고 돌아왔다. 베이스캠프와 캠프1까지는 커다란 계단모양의 지형으로 B.C와 캠프1 중간에 형성된 모레인 지대로 올라가는 길목은 허벅지나 키 높이로 형성된 페니텐테스(Penitentes. 상아이빨 모양으로 이루어진 눈지대)지역으로 통과 하는데 다소 애를 먹었다. 그 이후 캠프1 바로 아래의 협곡 근처까지 계속되는 이 모레인 지대는 빙하에 깍여 내려온 불규칙하고 아주 험한 채석장의 잡석밭과 같았다. 캠프1으로 오르는 협곡 못 미친 좌측에는 폴리쉬 빙하의 동쪽 절벽아래 계곡으로 진입하는 동빙하(East Glacuer)루트가 보이는데, 초입의 빙하가 굴곡이 심하고 표면에 검은 잡석들이 어지럽게 덮여있어 언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곳 이었다. 그러나 동빙하 계곡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아콩가구아 동면 정상과 계곡 입구 좌우로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암봉은 장관이었다. 캠프1까지 오르는 중에 가장 큰(?)문제는 표고차가 만만치 않은 캠프1 직전의 협곡으로 오르는 잡석 사면 이었다. 왼편은 사태가 진행중인 잡석(흙)사면이고 오른편은 페니텐테스가 형성된 설사면이었는데, 우리는 최대한 설사면을 이용해 오른 후에 잡석사면을 이용해 오르려했다. 하지만 이 잡석 사면은 한 발 옮기면 두발이 흘러 내렸다. 애를 쓰던 우리는 결국 다시 설사면으로 마지막 지점까지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캠프1은 모래바닥으로 된 좁은 골짜기 안이라 바람도 거의 없었고 바로 옆으로 빙하 녹은 물이 개울처럼 흐르고 있어 캠프지로는 최상이었다. 또한 이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거대한 모레인지대와 계속해서 이어지는 렐린초스 계곡, 건너다보이는 고산연봉들의 풍광이 아주 일품인 전망 또한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켐프1 설치한 직후부터 바람이 거칠어지면서 눈을 뿌리기 시작해 서둘러서 B.C로 하산했다.
■ <12월 14일(금) 현지시간: 휴식> 하루 종일 또 날씨가 좋지 않았다. 눈발이 날리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으로 우리는 캠프1으로의 2차 짐 수송을 하루 연기하기로 했다. 예비일을 하나씩 까먹는 것 같아 아쉽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후 늦게 눈이 멎자 우리는 텐트 밖으로 나가 텐트와 짐 위에 수북이 쌓인 눈을 털어냈다. 장비가 눈녹은 물에 젖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이곳의 날씨는 염려했던 대로 초반 날씨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12월초에는 눈이 많고 일수가 경과 할수록 점점 따뜻해지고 건조해짐)레이저의 얘기로는 3일 후부터는 날씨가 좋아질 거라는 기상예보를 라디오에서 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말에 희망적인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었지만, 계속해서 날씨가 좋지 않아 귀국일정에 쫓기며 등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심 무척 심란했다.
■ <12월 15일(토) 현지시간: B.C(08:30) -> C1(12:50)으로 2차 짐 수송> 아침식사를 마치자 INKA Expeditions사의 현지 지원캠프를 설치한다고 우리 팀이 사용하던 자리를 양보해 줄 수 있냐고 한다. 우리는 캠프1으로 떠나면 정상 공격 후에나 B.C로 내려 올 것이므로 다소 불편하기는 햇지만 기꺼이 근처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텐트를 옮긴후, 두고 갈 짐들을 텐트안에 정리 한 후 캠프2(공격캠프)에서의 식량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짐을 꾸려 캠프1으로 2차 빔 수송에 나섰다. 캠프1까지는 한 번 걸어 보았던 지형이라 훨씬 익숙했다. 하지만 5,000m이상지역은 여전히 짙은 구름에 묻혀있었다. 그 짙은 구름만큼이나 우리는 마음도 초조했다. 좌측 직벽의 갈라진 틈새에서 20~30분 간격으로 낙석이 굴러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켐프1에 도착해 짐정리를 마치고 곧바로 텐트 주변으로 돌담을 쌓았다. 캠프2로 오르는 길은 두 개의 거대한 사면이 기역자로 만나는 형태로 위쪽 사면이 끝나는 지점에 크고 작은 암봉 군락들이 폴리쉬 빙하의 하단부와 연결 되어 있었다. 이곳이 캠프2(공격캠프)로 이용되는 곳이다.
■ <12월 16일(일) 현지시간: C1(08:20) ->C2(5,900m)(13:00)로 1차 짐 수송> 날씨가 모처럼 청명했다. 08:20분 캠프1을 출발 약 4시간 반 만에 캠프2(공격캠프)로 이용할 폴리쉬 빙하 하단부에 크고 작은 암봉 너머에 도착했다. 바로 앞에 폴리쉬 빙하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공격캠프지에서 올려다 볼때에는 경사도가 실재보다는 그리 심해 보이지는 않았다. 약간 낮은 곳에 피에드라 대피소에서 보았던 캐나다 팀이 납작한 2인용 텐트를 쳐 놓고 휴식하고 있었다. 우리 밑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커다란 바위벽 밑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몇번째 돌을 드는 순간 돌 아래에서 끝이 헤진 등산화 두짝의 끝 부분이 드러났다. 깜짝 올라 위쪽을 보니 오버트라우저의 모자가 돌 밑에 깔려 있고 얼굴 있는 부분은 두꺼운 비닐로 덮은 후 돌로 눌러 놓는 것이 보였다. 그때 서야 우리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바로 옆에도 스노우바로 만든 십자가가 쓰러져있는 작은 돌무더기가 또 하나 있었다. 우리는 돌들을 다시 제자리로 옮겨놓고 자리를 옮겨 텐트를 쳤다. 조금 전의 흥분은 사라지고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텐트 안에 짐들을 정리해 놓고 캠프1로 하산했다. 하산 때는 1시간 10분정도 걸렸다. 대원들 모두가 상태가 좋아 B.C로 내려가지 않고 내일 2차 짐 수송을 하기로 하고, 정상공격도 날씨가 허락한다면 곧 바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날씨는 6시가 넘어서자 주변에 구름이 덮이면서 정상쪽과 B.C쪽을 전혀 볼 수 없었다.
■ <12월 17일(월) 현지시간: C1(09:00) -> C2(13:15)로 2차 짐 수송> 어제 저녁과는 판이하게 아침날씨는 코발트 빛 하늘과 따가운 햇살로 우리를 눌렀다. 정상공격에 필요한 장비들을 중심으로 점검을 마치고 캠프2로 2차 짐 수송에 나섰다. 컨디션이 좋으면 캠프1으로 내려오기 않고 바로 다음날 새벽 정상공격에 나서기로 했다. 캠프2에는 가이드를 동반해 단독등반 중인 독일 산악인이 새롭게 올라와 북동사면 초입 작은 평지에 캠프를 치고 있었다. 우리 팀은 내일(18일) 새벽 정상공격에 나서기로 하고 오래도록 얘기를 나누었다. 총 소요 시간은 12~14시간 예상, 출발은 새벽 4시, 최소한 12:00~14:00까지 중상단의 세락지대를 통과하지 못하면 공격캠프로 철수하여, 휴식후 동북사면으로 트래버스 북면 노말 루트를 경유하여 정상에 다녀오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취짐 전까지 내내 휴식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
■ <12월 18일(화)~19일(수) 현지시간: 정상공격 18일 -> 19일> 새벽 1시 '종관아! 이젠 일어나 준비하자.' 알파미와 해장국을 함께 넣어 죽을 끓였으나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종의 고소증세일 수도 있으나 긴장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거의 먹지 못한채 정상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새벽 4시 텐트 밖으로 나섰다. 겹겹이 껴입은 옷 때문인지 다소 움직이기에 거북했다. 날씨는 생각보다 춥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정상으로 등반이 시작 되었다. 무거운 발끝에서 부서지는 눈 소리와 가끔씩 깨어져 나가는 얼음 소리 그리고 거친 숨소리만 무거운 정적을 깨며 나가고 있었다. 새벽 6시. 동쪽 지평선이 황갈색으로 물들면서 폴리쉬 빙하(Polish Glacier)의 설벽은 푸르디푸른 바다 빛으로 가파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아름답다는 느낌을 지워 버리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매일같이 오후에 내린 눈으로 인해 신설이 꽤 되었고 결빙된 곳은 바람에 씻겨 반짝거렸다. 더구나 상호 확보가 곤란하다고 판단되어 안자일렌하지 않고 등반하고 있어 긴장이 더 했다. 7시. 출발한지 3시간. 날이 완전히 밝아 정상적인 등반이 가능해졌다. 햇살을 받아 몸도 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사고발생! 조금 전부터 왼발을 디딜 때마다 밀리는 것 같아 바일로 설벽을 찍어 낸 후 배낭을 벗어 놓고 아이젠을 벗어보니 8자형 고정핀이 달아가 버린 것이엇다. 비틀림이 심할 것을 예상하고 나무판 위에서 몇 차례나 확인하고 가져온 것 인데... 달리 방법이 없엇다. 내려가는 길밖에는.. 팔뚝에 차고 있던 고도계는 6,205m를 가리키고 있었다. 3시간 동안 399m를 올라온 것이다. '야! 난 내려가서 재정비한 다음, 북면 노말 루트로 정상에 가도록 할 테니까. 지금이 7시. 오후 3시 전후로 정상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보자.' '형!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빙하 하단부에서 고장 난 것이 정말 천만 다행이었다. 그러나 짝 다리로 하산하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대원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눈을 더 녹여 여벌 보온병에 담고 행동식을 보충해서 노말 루트로 가는 길에 독일팀 가이드인 파브로에게 들렸다. 혹시 같이 갈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나를 만난 파브로는 정상을 가르키면서 너희 팀이 너무 늦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나도 등반중인 우리 팀을 유심히 살폈다. 나와 헤어진 후 9시가 다 되었는데 별 진전이 없었다. 나는 우리 대원들의 등반 상황을 좀 더 살펴본 후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등반 일정에는 3일 정도의 예비일이 있었다. 그런데, 텐트로 돌아오면서 나는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는지 짧은 오르막을 기운이 쫙 빠지면서 두 번이나 쉬어서야 올라왔다. 쌀알만한 까만 점으로 설벽에 붙어있는 대원들. 그러나 상황은 등반중인 대원들과 내가 의사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전기! 무전기!'를 외쳤다. 아이고, 이런 한심한 실수를... 무게도 있고 함께 등반하므로 두고 가기로 결정했었는데, 내가 먼저 내려올 일이 발생할 줄이야! 빙하 중단 세락 가장자리 바로 아래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수직으로 정지해 있는 박종관대원과 송진철대원. 아래에서 올려다 보고 있으므로 현장에서의 거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의 그 자리에 정지한 듯 했다. 후퇴를 약속했던 오후 2시가 넘어서고 있는데도 후퇴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4시. 스키스틱에 오버트라우져를 걸어 흔들어 보였다. 주위를 환기시켜 보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였다. 너무 멀다. 처음에는 폴리쉬 빙하루트가 동릉릿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등반자들을 캠프2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실제로는 세락지대를 넘어서면 공격캠프에서는 볼 수 없다.) 일몰시간은 저녁 9시지만 동면 그것도 정상 가까이 붙어있는 폴리쉬 빙하는 6시가 되자 그늘이 지면서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7시. 눈발이 다시 날리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 텐트를 치고 있던 캐나다 팀이 우리 팀이 비박에 들어간 것 같다며 자신 캠코더를 넘겨 주었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나는 다음날 오후 박종관 대원이 귀환 할 때까지 몸과 마음의 진이 빠지도록 그들의 상황을 살피며 가슴을 조려야했다. 매일 오후 5~6시부터 눈발이 날리고 짙은 구름으로 휩싸이다가 한밤중이 되면 자리가 모자라 비좁을 정도로 별들로 꽉 차곤하던 밤하늘이었는데, 오늘은 눈보라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텐트를 모조리 날려버릴 듯이 불어대었다 멎었다를 반복하였다. '아이고! 이제 저 두 사람 다 죽었구나!' '이제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수습하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동이 트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어떻게 심했는지 돌 틈 말고는 눈가루라고 볼 수가 없었다. 얼마 후 푸른빛의 설벽에 붉은 햇살리 비추기 시작했다. 나는 어제 비박 지점을 뚫어져라 살폈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이고!'...... 숨도 못 쉴 것 같던 가슴이 결국은 무너지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잠시 후 '어?' 쌀알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세락 가장자리에 틈새를 통해 내려오고 있었다. 크기로 보아 송진철대원이 틀림이 없었다. '그래!' 살았구나.' 그런데 송진철 대원 혼자만 내려오고 있었다. (새벽에 두 대원은 함께 정상으로 출발하다가 송진철대원이 내려가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지만 박종관대원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햇다. 그 상태에서 송진철대원은 하산을 시작했고, 박종관 대원은 잠시 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정상 행을 멈출 수 없었다.) 박종관대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세락지대를 넘어서면 더 이상 등반자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아침 햇살이 제 모습을 갖출 때쯤 또다시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초반에 비교적 잘 내려오던 송진철대원이 두꺼운 구름이 한차례 지나간 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후 빙하하단에서 발견될 때까지 송대원을 볼 수 없었다. 그 동안 나는 계속 중얼거렸다. '진철아! 힘들다고 절대 앉아서 쉬어선 안된다. 계속 걸어라. 계속 걸어야 한다.' 텔레파시라도 통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빙하 끝머리 쪽에서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송진철대원이 저만치 가스 속에서 겨우 서 있었다. 캐나다 팀의 도움 받아 송대원 부축해 왔다. 바일을 든 양손에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장갑은 홑겹의 실크장갑만이 끼고 있었다. ''아이고!' 고소증세로 의식이 흐려진 것이 틀림이 없었다. 얼어붙은 아이젠의 고정벨트를 칼로 잘라내고 이중화 끈을 살짝 풀고는 텐트에 밀어 넣었다. 뜨거운 물과 행동식으로 요기를 시켰다. 손가락이 걱정이다. 아니 심각했다. 한 손은 자신의 사타구니에 한손은 내 겨드랑이에 넣었다. 물을 끓여 담글만한 상황도 안되었고 갖고 간 동상연고는 이렇게 심한 동상에는 소용이 없었다. 박종관대원이 정상에 오르고 동북사면을 통해 귀환한 오후 4시경까지 송대원의 손가락들을 죽어라하고 맛사지했다. 땀이 줄줄 흐르도록 애를 썼지만 한손을 하고 있으면 다른 한손은 금새 푸른색으로 변했다. 우리팀은 박종관대원이 귀환한지 한 시간도 안돼 송진철대원의 치료를 위해 철수를 감행했다. 송진철대원을 가볍게 배낭을 꾸려 먼저 캠프1으로 출발시키고, 곧바로 장비를 수습해 뒤 따랐다. 하지만 비박 후부터 물 한모금 못 마신 상태에서 36시간 만에 공격캠프로 돌아온 박종관대원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한 시간정도 아주 늦은 속도로 조금씩 함께 내려오다 결국은 내가 먼저 캠프1로 내려왔고 마침 캠프1에 있던 호주팀 2명이 박종관대원을 마중나가 배낭을 가져왔다. 호주팀은 우리 대원들에게 따뜻한 차를 계속해서 건네주며 송진철대원을 걱정했다. 결국 송진철대원은 그날 밤에 호주팀의 도움으로 베이스캠프에 내려가 밤새도록 의사의 응급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나, 증세가 심각해 다음날 아침 뮬랴에 태워져 푼타 데 바카스로 내려가 차편으로 멘도사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 <12월 20일(목) 현지시간: C1 -> B.C로 철수> 10시가 되어서야 죽은 사람처럼 자고 잇던 박종관대원이 일어났다. 정신을 못 차리고 마냥 누우려고만 했다. 라면을 끓여 식사를 시켰다. 잘 먹지 못했다. 얼굴이 엉망이었다. 문제는 일어나자 눈물을 줄줄 흘리면 설맹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수건에 물을 적셔 찜질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신해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잘못하면 큰 고생을 할 것 같았다. 상당부분의 짐을 남겨둔 채 서둘러 B.C로 하산을 시도했다. 막 출발 하려고 할 때 송진철대원을 데리고 간 호주팀 두 명이 올라왔다. 뮬라로 푼타 데 바카스로 아침에 출발했다고 했다. 나는 몇번이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박종관대원을 바싹 붙인채 B.C로 철수를 시작했다. 눈이 아파 오래 걸을 수 없었다. 웬만하면 엄살 피울 줄 모르는 박종관대원이 조금 걷다가는 '형! 좀 쉬어가요.' '아! 못가겠어 형 잠깐만 기다려요.'를 연발했다. 눈물과 콧물이 흘러내려 그 몰골이 보기에 민망할 지경이었다, 눈을 거의 볼 수 없는 사태에서 거친 잡석지대와 페니텐테스 지역을 통과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힘들게 B.C(프라자 어르헨티나)에 도착했다. 곧바로 상주하는 의사에게로 갔다. 의사는 안약을 넣고 붕대로 완전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는 두 시간 간격으로 안약을 넣으러 오라고 했다. 의사에게 송진철대원의 상태에 대해 물었더니 상태가 심해 아마도 몇 개의 손가락은 절단해야 할 것이라고 손짓을 해가며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하려 애를 섰다. 난감했다.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텐트로 돌아왔다. 박종관대원을 심봉사 데리고 다니듯이 의사에게 데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정상공격 후 축배를 들려고 사온 포도주를 의사에게 뇌물(?)로 건네주었다. 너무 좋아했다. 헤라르도(Geraryo)라고 자신을 소개한 의사는 그 후로 두 시간만다 우리 텐트에 직접 찾아와 안약을 넣어주고 갔다.
■ <12월 21일(금) 현지시간: 휴식> 아침부터 날씨가 안 좋았다. 박종관대원은 빠르게 좋아지기는 했으나 붕대를 걷으면 눈의 통증이 심하게 와 활동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더군다나 식욕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남겨 놓았던 쌀로 밥을 하고는 묵은 총각김치와 고추장 그리고 참기름을 넣어 비빔밥을 만들어 왼속에 밥그릇을 오른손에 숟가락을 쥐어주고 '네 몸쪽으로 밥을 모아 놓았으니까 그쪽으로 숟가락질 하면 된다. 잉?' 다행이도 이 식사 후 박종관대원은 입맛을 되 찾았다.이틀동안 볼일 보러 갈 때고 밥 먹을 때고 심청이가 눈 못보는 아버지 데리고 다니듯 함께했다. 설명증세가 가라앉으면 함께 캠프1에 다녀오려고 했으나 불가능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포터를 고용해 캠프1의 장비(짐)를 가져오기로 결정했다. 호세(Jose)라는 포터였는데 아주 성실하고 착했다. 오후 늦게 수염에 하얀 고드름을 달고 내려온 호세는 짐이 너무 많아 약속 했던 것 보다 비용을 조금 더 계산해 줄 수 없냐고 하였다. 무게를 달아보니 33Kg이 넘었다. 140불에 계약을 했지만 60불을 더해 200불을 주었다. 굉장히 좋아했다. 저녁때가 되면서 박종관대원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내일 아침 상태를 보아서 괜찮으면 바로 철수하기로 했다. 송진철대원의 상태나 상황이 몹시 걱정스러웠고 한시라도 빨리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12월 22일(토) 현지시간: 플라자 데 알젠티나 (Plaza Argentina)(4,250m)(11:10) -> 카사 데 피에드라(Casa de Piedra)대피소 경유 -> 팜파 데 레냐스 대피소(19:30)> 하산 시에 이용할 뮬라가 확정되는 데로 철수키로 하고 짐정 리를 시작했다. 우리가 철수 준비를 시작하자 현지 가이드나 포터들이 모여들었다. 장비를 교환하거나 팔라고 야단들이었다. 특히 세계적으로 이름이 있는 메이커 제품에 관심이 많았다. 남은 식량 중 하산 시 우리 팀이 먹을 이틀분을 제외 하고는 라면과 김, 알파미 등을 동경대 산악부 출신이 대장으로 온 일본 팀에게 주었다. 특히 라면은 굉장히 반겼다. 일본팀에는 여자대원이 둘이나 있었는데, 답례로 오렌지 몇 개를 우리에게 주었다. 뮬랴가 올 때가지 우리는 INKA사와 관련된 현지인(아이엘Ariel, 로드리고깽갸해, 지셀라Gisela,마리오Mario)들과 사무용 텐트에서 이것저것 그들의 커피나 음식들을 얻어먹으면서 많은 애기를 나누었다. 특히 그들은 송진철대원(Mr. Song)을 많이 걱정했는데, 작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동상환자들이 많이 발생해 경험있는 의사들리 있어 치료를 잘 한다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11시가 다되서야 뮬라가 왔다. 현지인들과 의사 그리고 일본 팀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하산을 시작했다. 플라토 지역을 넘어 급경사지대로 내려서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아콩가구아 정상을 되돌아 보고 또 보며 내려 왔다. 특히 나의 경우는 정상공격을 시작한 직후부터 박종관대원을 B.C에 데리고 내려올때까지 마음고생을 심하게 해서인지 많은 미련이 남았다. 피에드라 대피소를 지나고 그늘 하나 없는 바카스계곡을 따라 기력이 다 빠져버린 몸으로 지루하게 걷고 또 걸어 19:30분이 되어서야 이미 어두운 그늘속에 묻힌 레냐스 대피소에 도착했다. 뮬랴에 실어온 쓰레기봉투(자루)를 반납하고 입산신고서에서 받은 허가증 중 나머지 한 장을 제출했다.
■ <12월 23일(일) 현지시간: 팜파 데 레냐스 대피소(07:40) -> 푼타 데 바카스(Vacas)(11:40) -> 멘도사(Mendoza)> 다소 무감각해 지기는 했지만 어제 더위에 너무 고생해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처음 출발했던 지점이 다가오자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박종관대원이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정상에 다녀와 원정 자체는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겠지만, 송진철대원에게는 심각한 사고로 연결될 수 있는 상황이 있었고, 몇 가지의 결정적일 수도 있는 실수들이 자꾸 머리에 떠 올랐다. 바카스께곡은 처음 출발했을 땐 한국의 이른 봄과 같은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완연한 초여름의 모습이었다. 4시간 만에 출발지였던 푼다 데 바카스에 도착했다. 계곡입구 뮬랴꾼의 움막 앞에 카 고백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철수 일정이 바뀐 것을 B.C에서 이미 연락해 놓았는데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도 우리를 실어갈 차량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하는 수 없이 국경 검문소 옆에 있는 트럭휴게소로 전화를 걸러 갔다. 검문소를 지나는데 아르헨티나 군인들이 우리의 신분증을 요구했다. 여권과 관련서류 몇 가지를 맡기고서야 휴게소로 갈수 있었다. 멘도사에 있는 여행사 사무실로 전화를 하고는 간이매점에서 과자와 콜라를 한병 사서 요기를 했다. 오랜만에 마시는 콜라 맛이 정말 좋았다. 얼마 안 있어 우리를 멘도사로 데려갈 차량이 왔다. 6시쯤 멘도사에 도착해 예약된 호텔(Hotel Crillon)에 짐을 풀었다. 여행사 직원에게 송진철대원이 입원한 병원을 알고 싶다고 했더니 저녁에 호텔로 연락을 주겠단다. 도대체 상태는 어떤지 병원에 있는 것인지 막상 멘도시에 도착하고 나니 마음이 더 다급해지고 있었다. 7시 30분경 로비에서 콜이 왔다. 나가보니 한국인 교포 한 분이 와 계셨다. 박상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는 진철이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여행사 책임자가 이분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내일 아침 병원에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감사하디고 몇차례 인사를 드렸다.
■ <12월 24일(월) 현지시간: 멘도사(Mendoza) -> 병원방문> 박상문씨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함께 찾아간 곳은 한국의 시립병원 수준에 병원(Luis Carlos Lagomaggiore Hospital)이었다. 박상문씨가 입구에서 한참 설명하고서야 출입을 허락 받았다. 송진철대원은 2층 중환자실이라고 하는 곳에 있엇는데 시설이나 분위상으로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의사소통도 안되고 해서인지 우리를 보자 한쪽 발과 양손에 권투장갑 만하게 붕대를 감은 채 무척이나 반가워 하며 우리에게로 걸어 나왔다. 며칠동안 봄시 답답했었단다. 손가락은 통증이 있기는 하지만 견딜만 하단다. 치료라고는 감염방지를 위한 소독 외에는 별다른 치료를 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송진철대원이 하산할 때 신분증이고 뭐고 전혀 소지하지 못한 채 급히 이돌했기 때문에 우선 여권(비자)을 근거로 간단한 서류닥성을 먼저 했다. (나중에서야 짐작이 갔지만 송진철대원이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이곳으로 보내진 것 같았다. 아마도 좀 더 좋은 병원으로 갈 수도 있었을텐데...) 경과를 더 두고 보아야 한다는 담당의사의 소견을 박상문씨의 통역으로 듣고 나왔는데 일상적인 애기인 것 같았다. 헤어져 나오기 전에 구내 매점에 내려가 칫솔, 생수, 빵, 과자 같은 것을 사다 주었다. 손 외에 다른 곳에 큰 상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막상 만나 보고나니 마음이 좀 진정 되는 것 같았다.(사실 베이스캠프의 의사에게 들었던 애기는 gi줄 수도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박상문씨가 자신의 집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지고 권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시내 중신가에 있는 그의 옷가게로 갔다. 큰 가게 안쪽으로 살림집이 있었는데 12시부터 3시 사이엔 가게문을 닫고 직원들도 점심을 먹으러 집에 다녀 오는 것 같았다. 된장찌개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비행기 날라 온 배추로 담근 김치하며 한국보다 더 맛갈난 반찬들이 식탁에 올라왔다. 밥도 엄청난 주발에 수북이 담아 나왔다. 박상문씨 나이드신 어머니께서 직접 조리해주신 정말 맛있는 식사를 오랜만에 했다. 식사후에 시원한 냉커피를 마시면서 박상문씨는 그동안 아콩가구아에 등반왔던 이런저런 한국팀들의 애기를 들려 주었다. 정말 몰 상식한 사람들도 꽤 있었던 모양이었다. 최근에는 아예 상관하지 않고 지냤었는데 송진철대원 때문에 년락이 와 본의 아니게 또 이짓을 하게 되었단다. 한국에서 잘 알고 있는 이광운씨는 운영하던 옷가게를 넘기고 미국으로 이사를 하셨단다. 오후에 하루 묵을 비용으로 나머지 이틀 묵을 수 있는 호텔(Hotel Eltorreon)로 숙소를 옮기자고 한다. 자신의 차를 가지고 숙소를 시내 한 가운데로 옮겨주고는 박상문씨는 돌아갔다. 이 호텔은 박상문씨의 가게와 가까웠고, 바로 길 건너편에는 아름다운 성당이 있었다.(그날 저녁 성당에서 정말 화려하고 웅장한 미사가 있었다. 현관을 활짝 열어놓고 있어서 나는 기웃거리며 한참을 구경하였다.) 짐을 덩리하고 시내 구경을 나갔다. 크리스마스이브라고는 하지만 아르헨티나 경제가 좋지 않아서인지 흥청거리는 분위기는 못 되었다. 길거리에 있는 전화가게(?) 발견하여 내친김에 산악회장님과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다. 멘도사는 상당히 인상적인 도시였다. 도심엔 뒷골목이 없었다. 철저하고도 꼼꼼하게 계획된 도시엿다. 거리 양편으로는 거목에 가까운 가로수들리 꽉 차 있었고, 그 가로수들은 모두 빙하가 녹은 물이 흐르는 강물을 별도의 수로를 이용해 나무 옆으로 흐르게 하고 있었다. 그것도 구역별로 시간을 나누어 흐르게 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상당히 잘 살던 나라였다는 것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이곳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라고 우리처럼 도심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가족끼리 혹은 이웃과 모여서 즐기는 분위기였다. 저녁이 늦어질수록 도심은 텅 비기시작햐T다. 별 생각 없이 호텔방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저녁 열시가 넘어 박상문씨의 전화가 왔다. 자기는 아이들과 파티를 끝냐Teks다. 병원에 있는 진철씨에게 위로 방문이나 한 번 가잔다.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는 환자의 가족들이 많이 와 있었다. 병실로 올라가 보니 진철이는 옆 병동의 환자 가족들의 파티에 불려가 있었다. '형! 나 좀 여기서 내보내 주면 안돼?'하는 거였다. 답답했던 모야이었다. 그들은 우리 보고도 함께 하지고 야단이었다. 케익과 쥬스가 한잔씩 얻어 마셨다. 어차피 26일 오전까지는 견뎌야 한다고 애기햐 주고, 자정 직전까지 진철이와 함께있다 병원을 나왔다. 병원 주변 주택가에서는 폭죽이 하나 둘씩 밤하늘을 쏘아져 오르고 있었다. 대단했다. 거의 폭탄 수준인 것에서부터 낙하산을 펴고 내려오는 것도 있었다. 박상문씨의 얘기에 의하면 몇 년전과 바교해도 10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친단다. 그때는 어땠는지 짐작이 갔다. 30~40분 걷다가 간신히 택시를 잡았다. 시내는 조용했다. 박상문씨를 가게 앞에 내려주고 우리는 호텔로 갔다.
■ <12월 25일(화) 현지시간: 멘도사(Mendoza)> 크리스마스날의 아침(호텔에서 나오는 아침(?)은 커피와 과자 몇 개)과 점심은 어제 사다놓은 빵과 요구르트로 때웠다. 오후엔 박상문씨 옷가게에 가 손님(아르헨티나 여자들)구경했다. 중저가인 여성옷 가게인데 손님이 많아 여직원이 셋이나 되는게도 바빴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 박상문씨와 선물용 포도주를 사러 갔다. 멘도사 지역은 포도주 생산으로 유명한 곳이란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도주 원액의 70%가 프랑스로 수출된다고 하니 우리가 한국에서 프란스 포도주라고 마셨던 것 둥 상당수가 이곳 포포주였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저녁에 시내로 나와 식당을 찾았다. 하지만 휴일이라 문을연 곳은 없었다. 간이 식당이나 분식센터 같은 곳이 있었는데, 한곳에서 한국의 만두 비슷한 것과 고기 그리고 맥주(안데스 맥주-1리터짜리) 2병을 시켜서 배가 부르고록 먹었다.
■ <12월 26일(수)~27일(목) 현지시간: 멘도사(20:10) -> 산티아고 -> 리 마 -> L.A(27일(07:30). 시차 5시간> 아침은 또다시 남아있던 빵으로 해치웠다. 우유인줄 알고 사왔던 요구르트는 이제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목이 메이는 빵에 걸죽한 요구르트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서둘러 짐 정리를 해 놓고 진철이를 퇴원 시키러 가야 했다. 무료병원이라기에 은근히 기대를 했고 또 박성문씨가 원무과(?)를 오고 가면서 애를 썻지만 무료치료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12/21일부터 12/26까지의 진료비 600달러가 청구 되었다. 담당간호사가 한국으로 가면서 먹을 약과 먹는 방법 그리고 소독약과 붕대등를 챙겨주었다. 간호사는 진철에게 잘 가라고 하면서 못내 서운해했다. 담당 과장은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소견서을 말해 주면서 손가락의 절단 가능성에 대해 얘기했다. 박상문씨가 진철이를 위해서 집에다가 점심을 준비 시켜놓았다고 했다. ahenef 정말 푸짐하고 맛있는 점심식사를 했다. 너무나 고마웠다. 박상문씨 의 노모께서는 시종일관 진철이의 동상을 걱정해 주셨다. 식사 후 호텔로 돌아와 짐 정리를 끝내고 여권 및 항공권 등을 확인하고 여행사에서 보내준 두 대의 택시로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까지 오려는 박상문씨와는 호텔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너무나 고마운 분이었다. 박상문씨가 아니었다면 아마 우리는 사고 당시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멘도사 공항의 짐 검사는 정말 심했다. 카 고백의 바닥까지 다 뒤집어 놓았다. 어렵게 집을 부치고 산티아고행 비행기에 올랐다. 20:10분. 산티아고에서 23:00 L.A행 비행기로 바꾸어 탔다. 경유지인 페루의 리마에서는 완전히 승객들을 입국검사 직전까지 내보냈다가 다시 탑승시켰다. 한밤중이 다름없는 새벽에 한 시간 이상 승객들을 훈련이라도 시키는 것 같았다. 짜증스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지만 9.11테러의 영향 때문이라고 이해해 버렸다. 현지시간 27일 아침 07:30분 L.A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전부 찾은 후 다시 부쳤다. 공항면세점에서 아이들에게 줄 작은 선물을 사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속 마음은 조급하기 그지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한국에 도착해 진철이의 치료를 서둘렀으면 하는 조바심.
■ <12월 28일(금) 한국시간: 인천공항 도착. 시차 7시간> 17:40분 드디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송청용씨와 몇몇 산악회워들이 마중을 나왔다. '야! 이제 왔구나.' 우리 식구들도 나와 있었다. 딸아이들은 종관이와 진철이 그리고 나에게 꽃다발을 하나씩 안겨주었다. 하지만 잠시 인사만 나누고 곧바로 헤어졌다. 귀국전 연락 해놨던 진철이를 곧바로 동상 전문의가 있는 경희대병원 응급실로 후송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끝>
<요약정리> 1) 현지 여행사(원정 가이드 전문회사)연결 및 항공편 등 전반적인 현지 문제들은 한왕용씨가 대표로 있는 트레킹캠프여행사의 도움을 받았다.
2) 멘도사까지의 항공편은 인천 -> L.A공항, L.A -> 리마 -> 산티아고 -> 멘도사(칠레 란스항공)을 이용했다.
3) 멘도사에서 푸엔테 델 잉카까지는 167Km가 되는데 6개정도의 크고 작은 도시를 지나게 된다. 4시간 정도 소요된다. 중간에 식사할 수 있는 괜찮은 식당들이 있다.
4) 아콩가구아 동면 쪽 등반은 1999~2000년 시즌(한왕용씨 팀)때 동면 캠프2에서 북동사면을 트레버스하며 북면으로 횡단 등반한 이후 우리팀이 처음이었다. 동면 진입은 푸엔테 델 잉카(Puente del Inca)에서 멘도사(Mendoza)방면으로 8Km 떨어진 푼타 데 바카스(Punta de Vacas)에서 바카스 계곡(Rio de Las Vacas)과 렐린초스(Relinchos)계곡을 경유해 베이스캠프인 프라자 아르헨티나(Plaza Argentina 4,200m)로 들어가게 된다. 베이스캠프까지의 캐라반은 진입에는 2박3일, 하산시에는 1박 2일이 걸린다.
5) 푼타 데 바카스에서 진입 시 첫날 야영지인 레냐스(Refugio Pampa de Renas. 2,800m)까지는 12Km로 4~5시간 정도 소요되며, 이곳에서 주재하고 있는 레인저에게 입산신고소에서 발부 받은 티겥 1장을 제출하고 기록한 후 쓰레기봉투를 받게 된다. 하산 시에는 베이스 캠프에서 티켙에 확인 사인을 받은 후 이곳에서 한 장을 또 제출하여야 한다.
6) 레냐스까지는 계곡의 왼편을 따라 가지만 레냐스에서는 계곡을 한번 건너야 하는데, 2000.12월레 완공했다는 대피소 위쪽에 있는 작은 철재 다리를 이용하면 된다.
7) 레냐스에서 카사 데 피에드라(Cas de Piedra. 3,200m)까지는 14Km로 5~6시간 정도 소요된다. 피에드라 무인대피소 뮬라(Mulas)꾼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었다. 피에드라 대피소에 도착하면 렐린초스 계곡을 아콩가구아의 모습과 정상을 향해 길게 뻗쳐 올라가 있는 폴리쉬 빙하를 선명히 볼 수 있다. 양영지는 대피소 못 미쳐 넓은 강바닥 한편 작은 초지(草地)에 있는 샘터 옆이다. (대피소 바로 밑에도 샘과 야영지가 있다.)
8) 피에드라에서 프라자 아르헨티나(Plaza Argentina. 4,200m)까지는 10Km로 완경사의 계곡을 만날 때까지는 가파른 경사를 오르내려야 한다. 하지만 이곳부터는 줄 곳 아름다운 아콩가구아 정상과 우측의 아메기노(Ameghino 5,883m)봉을 보면서 걷게 된다. 6~7시간 소요된다.
9) 피에드라에서 렐린초스계곡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느 강을 건너야만 한다. 빙하 녹은 물이라 살을 베는 듯 차갑지만 깊이는 무릎 이하로 깊지 않다. 오후에는 물의 양이 많이 늘어난다.
10) 하산 때에는 베이스캠프에서 레냐스까지 8시간 정도, 레냐스에서 푼타 데 바카스까지는 4시간 고요된다.
11) 베이스캠프(4,200m)에서 캠프1(5,100m)까지는 표고차가 900m로 4~5시간이 소요된다.
12) 캠프1에서 캠프2(5,900m)까지는 표고차 800m로 4시간 정도 소요된다.
13) 캠프2에서 정상(6,952m~6,962m현지자료)까지는 표고차 1,062m로 폴리쉬빙하 다이렉트(Polish Glacier Direct)루트를 등반할 경우 체력 조건이 우수한 대원일 경우 알파인 스타일로 10시간 정도면 정상에 오르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14) 정상에서 등정코스로의 하산은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며, 북면 노멀루트로 하산하여 북동사면의 폴라스코(Polacos)빙하를 트래버스 하여 하산할 경우 캠프2까지는 4시간이 소요된다.
15) 폴리쉬빙하에는 3개의 루트가 잇는데, 노말 루트격인 Polish Gracier루트와 우리 팀이 등반한 Polish Glacier Directfnxm 그리고 변형 루트인 Polish Glacier Variation루트이다.
16)베이스캠프와 캠프1 중간 좌측에 쉽지 않아 보이는 동빙하(East Glacier)루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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