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성1리 봉성2리 봉양1리 봉양2리 외삼1리 외삼2리 창평리 동양리 금봉1리 금봉2리 우곡1리 우곡2리
봉성은 옛날에 금륜산(金輪山)의 성곽 안에 오동나무가 밀림을 이루어 길조인 봉황새가 서식하여 봉성이라는 지명을 명명(命名)했다는 전설이 있다. 신라 때는 고사마현(古斯馬縣)이라 불러오다가 35대 경덕왕 때부터 옥마현(玉馬縣)이라 불렀고, 고려에 들어와 제8대 현종때부터 봉성현이라 칭하였다.
봉성1리 앳골.애골. 아곡.역전. : 옛날에 이 골에는 집이 없었는데 행인들이 법전면 갈방으로 넘어가는데 재가 험하고 도둑이 많아서 애를 먹었다 하여 애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영암선이 개통된 후 봉성역이 이곳에 설치되어 요즘은 역전이라 부르고 있다. 재장골 재장곡 (在場谷) : 조선시대 봉화현의 관아가 있을 당시 이곳에 저자(시장)가 있었다 하여 저잣골이라 칭하여 오다가 지금은 재장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봉성중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향교골.교촌(校村) : 봉화향교는 조선 세종 때 당시 봉화현 소재지였던 봉성면 봉성리에 설립하였으며 향교가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향교골이라 불러 왔으며 인근의 유림들이 모여 살았다고 전해오며 현재는 봉성면 소재지이다. 작고개 우측에는 역대 현감비가 세워져있다. 중간마을.빙골마을 (氷골마을) : 동네 가운데 있는 마을로서 봉화현이 있을 당시 이곳에 석빙고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빙골마을이라 칭해 오다가 지금은 중간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봉성2리 장터(場一) : 숲과 늪으로 덮여 있던 국유지를 광복후 매립하여 조성된 마을로 南街(남가)와 주위에 민가가 많이 들어서서 봉성시장을 형성하여 장터라고 불렸으며 3일과 8일에 시장이 열려 우시장 및 노점상이 많이 들어서 번창했으나 대중교통이 원활해지던 80년 초부터 이농현상이 두드러지고 농가도 현저히 줄어 시장은 열리지 않고 현재는 오시오 식당으로부터 시작한 돼지숯불구이가 유명하여 외지에서 찾는 손님들이 많다. 배골 배나무골 이동(梨洞): 봉성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이 개척될 때 배나무가 많아서 배골 또는 배나무골이라 불리워 오고 있으며 지금은 배나무 몇 주만 볼 수 있고 봉성초등학교, 봉성파출소가 자리잡고 있으며 21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이색골 : 봉양 진입도로인 삼거리 우측에 있는 마을로 承旨苟全(승지구전) 金中淸(김중청)의 學行遺德(학행유덕)을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이조 현종 10년(1669) 봉화 유림에서 里社(이사)를 창건하여 尊德祠(존덕사)라 칭하고 春秋(춘추)로 祭享(제향)하여 오다가 盤泉書院(반천서원)으로 승격 개칭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고종 5년 1868)으로 철폐하였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있고 처음 里社(이사) 창건시 이사골로 칭해오다가 지금은 이색골이라 부르고 있다.
봉양1리 안분골 내봉곡 (內鳳谷) :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형상이 암봉의 모양과 같다하여 內鳳谷(내봉곡)이라 칭했다고 전해오며 다른 일설에 의하면 寧海朴氏(영해박씨) 石林公(석림공)의 묘터가 암부엉이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하여 안분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밑에는 천연적인 우물이 있었는데 이 물의 빛깔도 희부연색이라 하여 암물이라 불렀다고하며 이 물을 마시면 피부가 고와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요즘은 마을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안분골이라 부르고 있다. 석기골(昔基谷) : 봉양 북쪽에 있는 두리봉 아래 남향으로 자리잡은 마을로 옛날에 昔氏(석씨)들이 살았다하여 昔基谷(석기곡)으로 불렸다고 전해져 오며 두리봉 앞에 두봉사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절에서 보면 영양 일월산이 그릇에 감을 담아 놓은 것처럼 보이며 절 앞에는 우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는데 이 물에 목욕제계를 하고 물을 공손히 길러서 두리봉에 올라가 정성껏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어 극심한 한해시 동네 사람들이 그 곳에서 기우제를 올린다고 하며 예전에는 10여 가구가 거주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밀양박씨(密陽朴氏) 慶州孫氏(경주손씨) 3가구가 살고 있다. 성황당골 : 조선시대 때부터 주민들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성황님의 위폐를 모시는 성황당이 현재 권성운씨가 살고 있는 집 앞에 있었는데 워낙 위엄하신 신령님이어서 사람들이 말을 타고 그 앞을 지나가면 말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말에서 내려 성황님께 공손히 절을 하면 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래서 그 밑에 下馬碑(하마비)라는 비석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고 상황당은 백동골과 성황당골 사이에 있는 산등성이에 옮겨져 이를 상당이라하고 5반에 있는 느티나무 숲을 중당, 봉양2리 3반에 있는 느티나무 숲을 하당이라하여 지금도 매년 정월 보름날 새벽이 되면마을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는 제를 상당부터 차례대로 올리고 있다. 양지마 : 정 남향을 향해 마을이 위치하고 있어 햇볕이 잘드는 마을이라하여 陽地(양지)마라 칭해왔으며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형국이 숫놈 같다하여 숫봉(雄峰<웅봉>)이라 칭하며 안분골의 내봉곡을 암놈 같다하여 암봉(雌峰<자봉>)이라 부르고 있다. 도대문골 (都大門골) : 옛날 골 거리에 큰 대문이 있어서 都大門(도대문)골이라 칭해왔다고 전해져 오며 이 골 앞산을 일산대백(산봉우리의 이름으로 이 마을에서 이곳에서부터 가장먼저 해가 뜬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하여 여기서 흘러내리는 물이 암물이라 하여 이 물이 마을로 흘러들어 오는데 이 물이 이골 사람들에게는 흉상이어서 젊은 남자들만 죽는다는 풍수지리설이 있어 마을사람들이 큰대문을 달아서 이러한 재앙을 막고 도둑도 방지하는 방패로 삼았다고 전해오며 언제 멸실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지금은 큰대문은 없어지고 그 대신에 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잣그락골 백동(栢洞) 짜그락골 : 옛날 이곳에 잣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잣그락골이라 칭했다고 하나 박순호씨의 조부님이 이곳에 서당을 만들어서 제자들을 육성 학문을 가르쳤는데 이분의 호가 백동이라서 서당이름을 백동서당이라 칭했다고 하며 이후부터는 백동골이라 전해오고 있으나 지금은 임야로 그흔적을 찾을 수 없고 이집 뒤 돌틈에서 솟아 오르는 샘물이 있었는데 이골 사람들이 생활식수로 사용하고 있으며 어떠한 가뭄에도 샘이 마르지 않고 항상 물량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바른골(正谷) 바든골 : 옛날에 골이 깊고 바르다하여 바른골이라 불리워 오다가 지금은 부르기 쉽게 바든골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골의 좌로는 유난터, 여우바골, 참사리골, 박산터로 우로는 윗가무내, 아랫가무내, 시집골로 형성된 큰 골이다. 농경지는 논과 밭으로 되어있고 대부분이 봉양리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있으며 맛과 품질이 좋은 것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봉양2리 떡버드나무골 : 수구재골 윗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계전에 공동샘이 하나 있었는데 샘 옆에는 큰 떡버드나무가 있어 떡버드나무골이라 불렀다고 전해져 오나 지금은 그 나무는 없고 상수도의 공급으로 인하여 샘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현재 密陽朴氏(밀양박씨)와 順興安氏(순흥안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있으며 농한기에는 부녀자들이 베틀과 개량직조기로 품질 좋은 안동포를 생산하여 농가소득에 한몫을 차지하고 있으나 이농현상으로 인하여 동네의 젊은 부녀자들이 없어 삼베짜기 기술이 몇 년 후에는 끝날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 학방골(學房谷) : 조선 말엽 密陽朴氏(밀양박씨) 문중에서 이곳에 學房(학방)을 설치하고 글을 가르쳤다하여 학방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지금은 부르기 쉽게 학박골이라 칭하기도하며 이곳에는 지정문화재 52호인 五高堂舊宅(오고당구택)이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16가구가 살고있다. 수구재골 : 옛날 여우 한 마리가 이 마을에서 살다 죽었는데 마을사람들이 와서 보니 그 머리가 마을의 재를 향하여 절을 하는 것 같다하여 고사성어에 나오는 수구초심이란 말을 따서 수구재골이라 불렀다고 전해져 내려오며 이곳 또한 집집마다 베틀과 개량직조기를 이용하여 농한기 부녀자, 노약자들이 가내수공업으로 질 좋은 안동포를 생산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봉양포가 먼저 생산되었는데 안동포 명성 때문에 봉양포가 안동포로 팔리고 있으며 안동포를 생산하기 위한 원료로 대마를 많이 재배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도래골 송학동 (松鶴洞) 회곡동: 마을 입구에 큰 소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이 소나무에 학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서 松鶴洞(송학동)으로 불리워 오다가 약 30년전에 본마을에서 돌아앉은 마을이라 하여 도래골이라 개칭하여 부르고 있다. 남면동 : 마을이 동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남면동이라 불렀다고 전해오며 햇볕이 잘들고 마을 뒤로는 야산이 있어 겨울철에도 타부락 보다 따뜻하며 주민들 대부분이 논농사와 고추농사를 주업으로 이른 새벽에 들에나가면 늦은 밤까지 일할 정도로 부지런하고 인심이 좋으며 예전에는 많은 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이농현상으로 많이 떠나가고 지금은 密陽朴氏(밀양박씨)외 8가구가 생활하고 있다. 고지바우 고암(高岩) 고좌암 (高左岩) : 마을 입구에 높고 큰 바위가 있어서 고지바우라 하였으며 약 300여년 전에 바위가 갈라지면서 그 안에 있던 학이 날아간 이후 이곳의 부자들이 쇠퇴하여 떠나가고 지금은 密陽朴氏(밀양박씨)를 비롯하여 각 성씨 31가구가 살고 있으며 마을 입구 좌측에 큰 못이 있었는데 층이 큰 바위에 글을 쓰다가 떨어져 죽어서 못을 메웠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외삼1리 늪실 상눌(上訥) : 늪실(淵谷<연곡>)은 약 500여 년 전에 英陽金氏(영양김씨) 11세손 玉峰公(옥봉공) 金克行(김극행)이 봉화에 내려와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할 당시 큰 연못과 늪이 우거져 淵谷(연곡)이라 칭했으며 넓은 들을 중심으로 마을이 산재하여 있고 땅이 비옥하여 모든 작물이 잘 자라며 4~5m만 땅을 파면 지하수가 나올 정도로 습지대여서웬만한 가뭄에도 농사가 잘된다. 새마을 : 늪실 남동쪽에 새로 개척한 마을로 安東權氏(안동권씨)를 비롯하여 각 성씨 13가구가 살고 있으며 외삼1리에서 가장 늦게 생긴 마을이기도 하다. 양지마 : 얕은 산을 뒤로하고 가장 햇볕이 잘 들고 따뜻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음지마와 함께 마을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옛날 英陽金氏(영양김씨)들이 마을을 이룩한 시발지이며 지금은 19호가 살고 있으며 이농현상으로 빈집이 많다. 1978년 우수새마을로 선정되어 대통령 하사금을 받은 바 있다. 버드실 유곡(柳谷) : 늪실에서 가장 동떨어진 마을로 생활권이 외삼이라기 보다는 봉양쪽에 가까운 마을로 지형이 버드나무 가지에 앵무새가 집을 짓고 사는 형국(鶯巢柳池形局<앵소류지형국>)이라 하여 동구에 버드나무를 심어서 큰 숲을 이루게 하였으며 지금도 그때의 노목 3주가 마을입구 좌측골에 서있으며 일설에 의하면 난리가 발생시 마을 사람들의 피난처로 활용하기 위하여 밖에서 보면 골이 안보이게 하기 위하여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얘기도 있다.
외삼2리 부랭이 윤동(潤洞) : 약 300년 전에 潘南朴氏(반남박씨)가 이 마을을 개척한 이래 차츰 가구와 인구가 불어나고 마을이 번성한다하여 潤洞(윤동)이라 칭했으며 지금은 부랭이라 불러지고 있다. 장그래미.세암(細岩) : 마을 개척 당시 인가가 없어서 행인이 작은 바위 밑에서 숙박을 하고 갔다고하여 그 후손들이 細岩(세암)이라 불러왔는데 지금은 장그래미로 불려지고 있다.
창평리 창바다 창평리 (昌坪里) 창해(蒼海) 본마 : 못 밑의 들이 바다처럼 넓다고 하여 蒼(창)바다로 불리워졌으며 30여 가구가 논농사 및 과수농사로 생활하고 있으며, 李光淑(이광숙)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할 당시 들판이 넓다고 滄海(창해)라 칭했다고도 하며 창평리의 중심지라고 하여 본마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1959년에 만든 창평 저수지가 소재하고 있는 마을로 본 저수지로 인하여 어떠한 한해에도 아무런 걱정 없이 논농사를 지을수 있다. 은행정 (銀杏井) 행정(杏井) : 花山李氏(화산이씨) 杏井(행정)에 아주 오래된 아름드리 은행나무 밑에 조그마한 샘이 있어 은행정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예전에 행인들이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하나 지금은 논이되어 그 흔적은 없고 논갈이시 가끔 기와장만이 출토되고 그 뒤 산밑으로 金寧金氏(김녕김씨) 십여 세대가 논농사를 주소득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지밀마을 지동(池洞) 진마 : 창평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창바다 마을의 맨끝 바다 밑에 낮게 위치한 마을이라하여 지밀마을이라 불렀다고 하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대로 마을 앞을 흐르는 창평천은 유역면적이 넓고 지질이 점토와 사지양토로 구성되어 토질이 비옥하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미곡은 맛과 품질이 좋아 인기가 좋으며 요즘은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진마라고도 한다.
동양리 용두 용머리 : 용의 머리 같이 생긴 산이 마을 앞에 위치하고 있어 이 마을을 용두 또는 용머리라고 불러오고 있으나 36번 국도가 개설되면서 용머리부분이 많이 훼손되었으며 마을 한가운데 동양초등학교가 있고 1993년에 설립된 동양농산물직판장은 농민 후계자 작목반에서 생산된 우수한 농산물을 시중가격보다 싼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국도가 마을내를 통과하고 있어 교통사고가 빈번한 지역으로 현재 金海金氏(김해김씨) 43가구가 살고 있다. 와란(臥蘭) 와단리 (臥丹里) 본리(本里): 1683년 順興府(순흥부) 臥丹面(와단면)에서 鳳城面(봉성면) 桐陽里(동양리)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眞城李氏(17가구)외 34가구가 살고 있으며 옛날 裵烈公(배열공) 趙仁壁(조인벽), 丹邱(단구) 趙貞(조정)의 유덕을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1796년에 東溟書院(동명서원)을 건립하여 제향해오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없어지고 지금은 동명서원 터만 남아있다. 뒷드물 두동 (杜洞,斗洞) 띠띠미 후곡(後谷) : 介節公(개절공) 杜谷(두곡) 洪宇定(홍우정)이 병자호란때 피난을 내려와 이 곳에 정착하였는데 이 마을의 뒤가 꽉막혔다고 杜谷(두곡)이라 불렀으며 요즘은 부르기 쉽게 두동, 띠띠미라고 칭하기도 하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산수유는 조상 대대로 재배하던 것으로 수령이 1백년 이상된 것도 많으며 오래된 나무는 4백년이 넘은 것도 있다. 특히,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산수유는 주성분인 모로미시드, 오가람 등이 풍부하여 자양강장제의 약효가 뛰어나 매년 주문량이 증가하고 있어 공급량이 모자라는 실정이다.
금봉1리 구렁마을 구름마을 (雲村) : 金峰(금봉)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이 언덕 밑 구렁에 있다고 구렁마을이라 하기도 하고, 옛날 교통의 요지로서 재물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는 곳이란 뜻에서 구름마을(雲村<운촌>)이라고도 한다. 덕창(德昌) : 창평천에서 내려오는 물과 동양쪽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수되는 지점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로 장마 때가 되면, 마을 앞들이 홍수의 피해가 극심하여 마을 사람들이 항상 걱정을 하였다고 하여 앞들을 걱정들이라 불렀고 이 마을을 걱정마을이라 불리어 오다가 1959년 금봉저수지 준설과 제방보수로 농토가 수리안전답이되고 농사가 잘되는 비옥한 토지로 바뀌어서 마을사람들에게 큰 덕을 주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덕창이라 불렀다고 한다. 들목 야목(野木) : 寧海李氏(영해이씨)가 가장 먼저 이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부락으로 영해이씨의 집성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하여 차츰 아래마을까지 번창하였고 이골은 들이 넓고 주위에 나무들이 많아 들목이라 칭했다는 설과 골안쪽에 사람들이 많이 살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커서 들썩들썩한다는 뜻에서 들목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것이 정설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며, 이곳에는 신문보살이라는 유명한 무당이 살고있어 각 지방에서 점을 보러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신문을 찢어서 그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친다고 한다. 오르정 오정(梧亭) : 금봉 중앙에 있는 마을로서 오가는 행인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며 寧海朴氏(영해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居堂亭(거당정)이라는 오동나무 정자를 지어 오가는 행인들이 이곳에서 쉬어 가기도 했는데 행인들이 오동나무로 정자를 지었다고 이 마을을 오정(梧亭)이라 불렀다는 유래가 있고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현 금봉2리 방면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이 오르는 길에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오르정이라 한다는 얘기도 있다. 갱화원 (更化院) : 1959년 전 봉화문화원장 정태중씨가 봉화읍 거촌리 사그막골과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음성나환자들을 일반 주민들에게 미치는 위화감 해소와 음성나환자들의 자활의지 고취와 한 곳에 정착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하여 안동 카톨릭재단의 지원을 받아 금봉리 177번지에 집단촌을 형성하였으며, 신체적인 결함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갱화원이라 불렀으며 현재 13가구가 양계와 양돈으로 일반인 못지 않게 자활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금봉2리 대추정 조정(棗亭) : 약 300여년 전에 민씨가 살다가 떠난 후 南陽洪氏(남양홍씨)가 들어와 온골에 대추나무를 심어 대추 생산량이 수백석이나 되어 대추정이라 불려지고 있으며 지금도 군데군데 대추나무를 볼 수 있다. 덕마을 덕마 덕촌(德村) : 대추정에서 북쪽 2km 떨어져 있는 마을로서 주산물은 사과, 송이버섯등이 있으며 옛날 이 골 안에 덕이 있는 사람들이 살았다하여 덕촌이라 부르며 이 마을 옆에 있는 고을을 덕골이라 하고 현재 21가구가 살고 있다. 동막골 (東幕谷) : 약 200여년 전에 南陽洪氏(남양홍씨)가 들어와 대추정에서 농사를 시작하면서 동쪽 1km 떨어진 곳에 농막을 짓고 이곳 이름을 동막이라고 불렀다하여 동막골이라 한다.
우곡1리 우르실 우리실 우곡,우곡리 (愚谷里) : 본래 順興府(순흥부) 臥丹面(와단면) 지역이었는데 예전에 이곳에 산짐승이 많이 살아 밤이면 산짐승들이 우글거린다 하여 우르실이라 하였다고 하며 마을 가운데 경사가 급한 내(川)가 있으며 요즘은 마을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큰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망이 구만(九萬) : 옛날 아홉 집중 九萬石(구만석) 거부가 난다는 어느 비결가 말에 따라 구망이 또는 구만이라고 불렀다하며, 이곳 사람들은 인심이 좋고 마을 앞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 주위의 경치를 더해주고 있다. 지역 특산물인 송이가 많이 채취되어 농가 소득에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세거리 삼거리 시거리 : 우르실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어구에 세 갈래 길이 있고 또 마을 앞에 급경사로 된 좁은 川(천)이 흐른다하여 삼거리라 하며 月城孫氏(월성손씨)가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현재 12가구가 살고 있으며 지금은 시거리로 부르고 있다. 중대골 중대곡 (中臺谷): 우르실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큰 소나무와 당제를 올리는 서낭당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지금은 2가구가 살고 있고 中臺寺(중대사) 들어가는 길이라 하여 중대골.곡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우곡2리 다대기 다덕(多德) : 우곡 약수탕이 있는 마을로 일제시대에 다덕광업소가 있었는데 이 명칭을 따서 마을 이름을 다덕이라 불렀으며 금,은,동,철,아연등 7가지 광물이 많이 생산되었고 성할 때는 종업원이 3,000여명이 넘어서 시장이 들어설 정도였다고 하며 지금은 폐광되어 매몰되었고 우곡약수탕에서 나오는 약수는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하여 외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오그래미 오암(梧岩) : 다덕 북쪽에 있는 마을로 興海裵氏(흥해배씨)가 개척 당시 오동나무가 많고 남서쪽에 개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하여 오그래미라 불렀다고 하며 현재 27가구가 살고있다. 진의실 진곡(眞谷) 지내실 : 동네 뒷산의 형태가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지네실이라 하다가 진의실이라 부르고 있고 난리때 피난을 안가도 안전한 마을이라고 전해오며 현재 20가구가 논농사 및 과수농사를 주업으로 살고있다. 궁장골 활개미 현곡(弦谷) : 다덕 남쪽에서 약 1km 떨어져있는 오지마을로 일설에 의하면 병자호란때 활을 감추어 두었던 곳이라 하여 弓藏(궁장)골로 불리워 오다가 후에 활개미골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예전에는 많은 농가가 살고 있었으나 이농현상으로 인하여 많이 떠나 버리고 지금은 6가구만이 거주하고 있으며 답작물을 주작목으로 고추, 사과등을 부작물로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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