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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재의 정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문화라는 용어를 흔히 사용하고 있다. 문화시민, 문화예술 등 일상적인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 문화라는 용어는 인간의 고급한 지적활동 또는 그 소산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인간의 의식주를 비롯한 기술, 학문, 종교, 예술, 법률, 관습 등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해 공유되고, 학습되고, 전달되는 속성을 통해 나온 일체의 물질적 성과물을 의미한다. 문화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문화의 산물이라고 하여 모두 문화재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고 보존, 계승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을 문화재라고 한다.
문화재(文化財)를 뜻하는 용어로는 영어의 “Cultural Properties", 독일어의 “Kulturguter"으로서 인류문화활동의 소산으로서 문화적인 가치를 지닌 것을 총칭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화재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가장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유네스코(UNESCO)에서 정의한 것으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류문화의 유산“을 문화재라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재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부터이고, 1961년 문교부 문화보존과와 구황실 사무총국이 합해져 문화재관리국이 신설되었으며,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문화재란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우수한 문화재는 국가에서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하여 법적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중요한 유적은 사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이처럼 문화재를 국보, 보물 등으로 지정한 것은 국가에서 법률적으로 보호할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중요성을 알게 하여 보호관리하자는 홍보책의 일환이기도 하다. 이울러 문화재의 범주를 유무형의 인위적인 유산에 국한하지도 않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식물 및 명승지등의 자연환경도 포함시키고 있다.
문화재의 가치는 희귀성, 재질의 가치성, 시대성 및 학술성 등의 요소들이 복합되어 결정된다. 비단, 문화재가 아니더라도 모든 물건은 희귀성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동일 유형의 문화재가 없거나 수가 적을 때 그 유물의 가치는 더욱 커지고 그 수가 많으면 상대적으로 가치가 줄어든다.
문화재보호법 제4조 제2항에 문화관광부장관은 제2항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래가 드문 것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보로 지정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어 희귀한 유물의 가치를 인정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는 형성된 재질의 귀천에 따라 그 가치성이 좌우된다. 그러므로 동시대에 만들어진 동일한 형태의 금관과 청동관잉 있을 때 금관의 가치가 훨씬 높다. 또한 같은 유형의 문화재에 있어서는 그 제작연대가 오랠수록 가치가 커진다. 이는 오래된 유물일수록 남아있는 수가 적다는 점에 기인한다. 시대성에 의한 가치는 희귀성에 의한 가치와도 연관된다.
문화재의 가치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으로 예술성 또는 미려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동시대에 만들어진 같은 유형의 문화재라 하더라도 정교하고 예술성이 높은 것일수록 보다 큰 가치를 지닌다. 희귀성, 재질의 가치성, 시대성, 예술성이 같다고 해서 그 문화재의 가치가 모두 동등한 것은 아니고 그것이 나타나기까지의 경위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학술적인 가치가 달리 부여된다. 즉, 같은 유형의 문화재라 하더라도 그것이 제작, 사용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많이 이야기해 줄 수 있는냐에 따라 가치가 달리 평가되는 것이다.
2. 문화재의 종류
1) 지정문화재
문화재는 크게 나누어 지정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가 있는데 이중 지정문화재는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기념물․민속자료의 4개 유형으로 분류하여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비지정문화재는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를 말하는 것인데 토지․해저․건조물에 포장된 문화재인 매장문화재와 50년이상 된 동산문화재, 그리고 기타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가 있다.
지정문화재의 분류
(1) 유형문화재
건조물(建造物), 전적(典籍), 고문서(古文書), 회화(繪畵), 조각(彫刻), 공예품(工藝品), 기타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 우리나라의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높은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考古資料)를 유형문화재라고 한다.
이와 같은 유형문화재는 국가에 의해 보물과 국보로 지정된다. 유형문화재 중에서 중요한 것이 보물이 되며 또 보물 중에서 특히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래가 드문 것이 국보로 지정된다. 우리나라에서 국보 제1호는 숭례문(崇禮門 : 남대문)이고, 보물 제1호는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이다.
지방유형문화재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것 중에서 향토문화상 가치가 있는 것을 대상으로 지정한다.
① 역사적 기념물
패총, 고분, 성지, 궁지,요지, 유물포함층, 기타 사적지 등은 역사적 기념물에 속한다. 이들 역사적 기념물 중에서 중요한 것이 사적으로 지정된다.
② 천연기념물
경승지와 동물․식물․광물 등은 천연기념물에 속한다. 이 천연기념물 중에서 중요한 것이 명승 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는 달성의 측백수림이다.
(2) 무형문화재
연극, 음악, 무용, 공예기술, 기타의 무형 문화적 소산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을 무형문화재라 한다. 이 무형문화재 중에서 중요한 것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는 종묘제례악이다.
무형문화재는 이와 같은 기능이나 예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의 두드러진 솜씨를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형문화재는 국가에서 지정하는 중요무형문화재와 시․도에서 지정한 지방무형문화재로 나누어지며, 예능 또는 기능을 원형대로 체득하고 보존하며 이를 그대로 실현할 수 있는 개인 보유자(인간문화재)와 보유 단체도 인정한다.
무형문화재의 보유자는 보통 50세를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전수생 선발연령은 18세 이상, 음악․무용분야는 30세, 공예분야는 35세, 연극․민속놀이․제례분야는 40세까지로 제한하고 있다. 무형문화재의 작품 및 예능 발표회는 의무적으로 매년 1회 이상 해야 한다.
(3) 기념물
패총(貝塚), 고분(古墳), 성지(城地), 궁지(宮趾), 요지(窯址), 유물포함층, 기타 사적지와 경승지, 동물․식물․광물로서 우리나라 역사상․예술상․학술상 또는 관광상 가치가 큰 것을 기념물이라고 한다.
기념물은 지정권자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국가지정은 사적․명승․사적 및 명승․천연기념물로, 지방문화재는 그냥 기념물로 불린다.
사적은 유사 이전의 유적, 제사와 신앙에 관한 유적, 정치와 국방에 관한 유적, 산업과 교통․토목에 관한 유적, 교육과 사회사업에 관한 유적, 분묘와 비 등이 포함된다. 우리나라에서 사적 제1호는 경주 포석정지이다.
명승은 저명한 건물이 있는 경승지 또는 원지(苑址), 화수(花樹)․화초․단풍 또는 어충류의 서식지, 저명한 협곡․해협․곶․급류․심연․폭포․호소, 저명한 해안․하안․도서, 저명한 풍경의 전망지점, 특색 있는 산악․구릉․고원․평원․하천․화산․온천지 등이다. 우리나라 명승 제1호는 명주 청학동 소금강이며, 전국 명승지는 7개소이다.
천연기념물은 천연물이면서 옛날부터 존재하며 현재도 생존․성장하고 있어 오래도록 국토의 기념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진귀한 동물․식물․광물․관상할 만한 천연풍경을 구성하는 수륙의 여러 사물, 향토의 과거 역사를 회상시키는 천연물 등 학술적․과학적․풍경적․역사적으로 국토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들을 총칭하고 있다.
기념물은 크게 나누어서 역사적 기념물과 천연기념물로 구별된다.
(4) 민속자료
의식주, 생업, 신앙, 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속, 습관과 이에 사용되는 의안(依眼), 기구, 가옥, 기타의 물건으로서 국민생활의 추이를 이해함에 필수적인 것을 민속자료라 한다. 이 민속자료는 다시 유형민속자료와 무형민속자료로 구별된다.
① 유형민속자료
의안, 기구, 가옥, 기타의 물건 등은 유형의 민속자료에 속한다. 유형민속자료 중에서 중요한 것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한다. 우리나라 중요민속자료 제1호는 덕온공주당의(德溫公主唐衣)이다.
② 무형민속자료
의식주, 생업, 신앙, 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습․습관은 무형민속자료에 속한다.
이와 같은 것 중에 한민족의 기본적 생활터전의 특색을 나타내는 것으로 전형적인 것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로, 50년 이전에 축조된 전통 건조물 중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지방문화재인 지방민속자료로 지정할 수 있다.
2) 비지정문화재
(1) 매장문화재
매장문화재는 토지․해저․건조물에 포장된 문화재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유물들은 땅이나 바다에 묻혀 있기 때문에 매장문화재라 하며, 탑이라든지 불상 등에 안치되어 있는 사리장치나 복장(服裝)유물 등도 포함된다.
매장문화재는 발견매장문화재와 발굴된 매장문화재로 구분 할 수가 있는데, 발견의 경우는 공사나 어로작업 등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을 말한다. 발굴의 경우에는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학술기관에서 조사한 경우를 말한다. 매장문화재는 발견한 날로부터 7일 이내에 신고하도록 하고 있으며 신고가 가능한 기관으로는 시.도지사, 시장.군수.구청장, 읍.면.동장, 경찰관서의 장 등이다.
발굴된 매장문화재의 경우 보상금이 지급되지 않지만 발견매장문화재는 보상금을 받게 되는데 자기 땅에서 발견한 경우에는 100%, 남의 땅에서 발견한 경우에는 토지소유자와 발견자에게 50%씩 나누어 지급한다. 그리고 해면이나 공공용지에서 50%만 지급된다.
매장문화재는 원칙적으로 국가소유로 간주되고 있다. 아무리 개인소유의 땅이라 할지라도 토지 자체의 소유권만 있을 뿐 매장된 문화재는 국가소유인 것이다.
한편, 문화재 보호법에서는 법 규정을 위반한 사실이 있을 때의 처벌규정을 강화하였다. 문화재보호법 제82조 제1항에서는 지정문화재를 도굴한 경우에는 5년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으며,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의 경우에는 10년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였다. 도굴품의 취득이나 운반 및 방조한 경우에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7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며(법제82조제3항), 토지․해저나 건조물 등에 포장된 매장문화재를 발견한 후 신고하지 아니하고 은닉 또는 처분하거나 현상을 변경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법 제82조제5항)
(2) 일반동산문화재
동산문화재는 역사상․예술상 가치가 있는 유형의 문화재 가운데 건조물과 같이 장소이동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문화재를 부동산문화재라고 하는 데 비하여 전적․고문서․회화․조각․도자기 등 공예품, 고고자료 등과 같이 이동이 가능한 문화재를 말한다. 이 중에서 지정되지 않는 것을 일반동산문화재라고 부른다.
일반동산문화재는 연한이 지난 유물로서 학술상․예술상 가치가 있는 것에 한하고 있으며 문화재 종류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제작연대로부터 50년까지를 한계로 하고 있다. 하지만 생존자의 작품은 보호대상에서 제외된다. 동산문화재는 지정문화재의 경우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하며, 일반동산문화재는 수출금지 등의 법적 규제를 받는다.
3. 해남군의 지정문화재
우리군의 지정문화재는 2002년 3월 현재 총 59개소가 지정되어 있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국보 1개소, 보물 10개소, 사적 3개소, 사적및명승 1개소, 천연기념물 4개소, 중요무형문화재 1개소, 중요민속자료 2개소로 22점이 지정되어 있다. 전라남도지정문화재로는 유형문화재 12개소, 무형문화재 3개소, 기념물 13개소, 민속자료 1개소, 문화재자료 8개소로 37점이 지정되어 있다.
지정문화재 현황은 다음과 같다.
국가지정문화재 현황
전라남도지정문화재 현황
1) 호국문화
가. 수성송
군청앞에 있는 수성송은 해남읍성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헌안에 심어진 것이다. 읍성안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인 성내리에서는 군청뒤의 읍성터를 일부 확인할 수 있으며, 주변에서 나타나는 지명으로 성의 윤곽을 대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수성송은 조선시대 명종 10년(1555)에 일어난 을묘왜변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당시 전라남도 남해안과 서해안은 그 위치 때문에 여러차례의 왜궐에 시달려왔다. 특히 도서를 포함한 해안선을 끼고 있는 해남, 강진, 완도, 진도 등의 주민들은 왜구의 침입경로에 해당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을묘왜변은 삼포왜란이래 일본에 대한 세견선에 고난을 받아온 왜구들이 배 70여척을 이끌고 영암의 달량진(현 북평면 남창리)을 점령하면서 발생한 왜변으로 정부군이 악전고투 끝에 왜구를 물리쳤다. 조정에서 수성의 공으로 해남현감 변협을 장흥부사로 승진하여 영전시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변협이 동헌 앞 뜰에 심은 해송을 수성송이라고 한다고 전하고 있다.
나. 명량대첩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1545~1598)의 명량대첩(鳴梁大捷)을 기념하여 1685년(숙종11)~1688년(숙종 14)에 걸쳐 세운 비이다. 1597년(선조 30) 9월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무고로 통제사에서 물러났다가 원균의 패전으로 다시 기용되어 우수영 월경인 진도 벽파진에 수영(水營)을 옮기고 우수영~진도간의 급류를 이용하여 몰려오는 133척의 왜적함대를 불과 12척의 전선(戰船)으로 일본군의 선단을 격파하였는데 이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명량대첩은 이순신이 재기한 직후 큰 기적을 올린 대회전(大會戰)으로 충무공이 세운 전공의 중흥이라 일컬으며, 충무공의 용병과 지리(地理)에 뛰어남은 귀신도 가동케 하였으며, 공의 임난토적(臨難討賊)에 있어 결책출기(決策出奇)함은 옛 명장들도 이에 미치지 못할 뿐아니라 충의의 분발은 해와 달을 꿰뚫는다고 하였다.
명량대첩비문이 씌어진 것이 1686년이지만, 석비가 세워진 것은 1688년 3월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朴新冑)에 의해서 세워졌으며, 일제의 박해로 피해를 입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졌던 것을 1945년 해방 이후 우수영 유지들에 의해 원래 세워졌던 장소로 회수되었다.
다. 우수영과 이진
① 전라우수영성
고려말 1377년(우왕 3년) 무안 당관포(唐串浦)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설치된 뒤 세종 22년(1440)에 들어와 현재의 위치인 해남 황원관에 이를 이설하였으며, 1465년(세조 11년)에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으로 승격․개편되었다. 당시 이곳은 해남현으로부터 서쪽으로 70리, 진도군으로부터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현지에 위치하였으며 성종때(1479)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따로 설치된 후부터 본영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영(약칭 전라우수영)이라 칭하게 되었다.
본영의 영역은 남북간의 길이가 10리, 동서간의 넓이가 15리에 이르렀으며, 영성은 석축의 둘레 3,843척, 높이 11척, 여첩 607개, 호지 3개소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후기의 기록(1787년/정조 11년, ‘전라우수영지’)에 의하면 영내의 민호는 620호, 수군장졸의 병력은 1,085명을 보유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본영의 관할구역은 시대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으나, 임진왜란시 한때는 전라우도 연해지역 14관을 관할하였을만큼 전시에 있어서 군사적 규모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1597년 정유재란때 본영의 수사 김억추(金億秋)는 통제사 이순신과 더불어 칠천량패전이후 남은 소수의 병력과 영내의 남녀노소를 총동원하여 명량에서 서쪽으로 상륙을 시도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중 최대의 전과를 거둔 명량대첩이었으니, 명량은 본영의 선창으로부터 불과 5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급조류의 해협으로 천험(天險)의 관방(關防)을 이룬 것이다.
정유년 9월 16일, 조선수군은 불과 12척의 전선으로 200여척의 적선단을 맞이하여 종일 싸운 끝에 100여척의 적선을 격파하였던 것이다. 이때 영성 밑에 사는 전 주민들이 일시에 의병이 되어 군세를 북돋아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당시 체찰사 이원익이 조정에 알려 현지의 주민들에게 면세은전을 내렸으니 그 혜택이 조선후기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성내에는 현재 336가구가 살고 있으며 529필지에 92,047평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추정된 바로는 우수영의 축성 부분의 전체길이가 1㎞이상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에 남아있는 부분은 7개소로 약 200m에 이른다. 현재에는 주택들이 성벽을 가로질러 앉아 있기 때문에 정확히 실측을 할 수는 없다.
우수영의 축성은 설치위치로 보아서는 해안성, 축성재료로 보아서는 토성과 석성의 혼합성, 평면형태로 보아서는 방형과 원형의 중간형태인 부정형성, 축성방법으로 보아서는 편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성돌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아래쪽은 150㎝ 이상이 되는 것들도 있으나 올라가면서 50㎝에서 30㎝정도로 작아진다.
② 이진진성
이진리 해안에 위치한 석축성이다. 이진성은 정유재란후인 선조 21년(1598)에 설진하여 인조 5년(1627) 만호진으로 승격하여 이 당시 쌓은 것으로 보여진다. 영암군에 속한 진성으로 고종 32년(1895) 폐진되었는데 「여지도서」에는 “군 남쪽 120리에 있고 성은 석축이다. 둘레는 1470척, 높이 8자, 치첩 334개소, 샘이 2개 있다.”고 기록하고 종4품의 수군만호 밑에 군관 17명, 리 18명, 지인 5명, 사령 37명이 배치되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해남읍지」에 의하면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과 대변군관 12명, 진리 18명, 사령 6명, 군뢰 2명, 방군 271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문화유적총람」에는 “둘레 2.5㎞의 성지로 인조 26년(1648)에 이진수군만호를 두어 성을 축조하였고, 성주위로 바다 호수를 만들어 왜군이 침노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또 이진은 제주도 출입 통제소이기도 하였으며 제주도 군마와 사마를 수송하는 곳이기도 하였다하며, 마을안에 수군만호비 4기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성의 축조방법과 현황을 보면 남․북의 구릉지를 이용하여 축성한 남북장축의 타원형 진성으로 성벽은 내탁법에 의해 쌓았다. 성내에는 이진마을이 소재하는데 동문과 서문이 마을의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너비 3m의 서문터에는 둘레 34m, 높이 5m, 너비 2.2m의 옹성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외에도 지금은 파괴되었으나 남문터에는 이진리 김호준씨댁 대문 앞에 지름 10㎝, 장재윤씨댁에 보관중인 지름 18㎝의 홈이 패인 초석이 남아 있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총 연장 940m이다. 동벽은 길이 350m, 아래쪽 너비 390㎝, 위쪽너비 130㎝, 높이 200~270㎝, 서벽은 길이 280m, 아래쪽 너비 6m, 위쪽 너비 4m, 높이 430㎝로 거의 무너져 있다. 성벽주위에는 백자편과 각종 유물 등이 수습된다. 그리고 만호비 4기는 현재 이진초등학교 입구에 있다.
2) 불교문화
가. 대흥사
대둔산은 천연기념물 왕벚나무자생지를 비롯하여 후박나무, 동백나무, 비자나무등의 온대림을 구성하는 상록활엽수와 물푸레나무, 박달나무 등 온대림을 구성하는 많은 양의 낙엽활엽수로 구성되어 잘 보존된 삼림지역이므로 그 경관이 매우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대흥사는 대둔산 북쪽 기슭에 위치하며, "대둔사" 또는 "한듬절"로 불리우는 사찰로서 백제 무령왕 14년(514)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며,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북원」과 천불전,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한 「남원」으로 구분되는 독특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경내에는 13 대종사와 13 대강사를 비롯한 역대 고승들의 부도와 비석을 봉안한 비전이 있으며, 호국선사인 서산대사의 의발을 보유하고 있는 서산종의 종찰로 선교 양종의 대도량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지정문화재 현황으로는 총 14점(국가지정 5점, 시도지정 9점)인데, 국가지정문화재(5점)로는 보물 제48호 대흥사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 보물 제88호 탑산사동종, 보물 제301호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 보물 제320호 대흥사응진전전삼층석탑, 천연기념물 제173호 대둔산 왕벚나무자생지(64,793㎡)가 있고, 시․도지정문화재(10점)로는 도유형 제48호 대흥사천불전, 도유형 제52호 대흥사천불상, 도유형 제57호 대흥사서산대사부도, 도유형 제93호 대흥사용화당, 도유형 제94호 대흥사대광명전, 도유형 제166호 대흥사서산대사유물(일괄; 6종 3점), 도유형 제167호 대흥사정조친필서산대사화상당명, 도유형 제179호 대흥사관음보살도, 도기념물 제19호 표충사(일원)이 있다.
대흥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며 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한 《대둔사지》에 의하면, 426년에 신라의 정관존자(淨觀尊者)가 창건하여 ‘만일암’이라 하였고, 508년에 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善行比丘)가 중건하였다는 〈만일암고기〉의 기록, 875년에 도선(道詵)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500사찰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상소하였는데, 대흥사도 그 중의 하나라는 설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으나, 대둔사지 자료를 모았던 혜장(惠藏)은 이들 기록이 창건자의 활동시기로 볼 때 모두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총은(怱隱)․성유(性柔)등 세 승려의 부도가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없고, 고려때 승려이므로 대흥사가 고려이전에 창건된 것이 확실하므로 혜장이 주장한 신라말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아직 대규모 사찰의 면모는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흥사가 크게 중창된 것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대흥사를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요, 만세토록 파괴됨이 없는 곳이며, 종통의 소귀처(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歸之處’라 보고 자신의 의발(衣鉢)을 대둔산에 전할 것을 부촉한 임진왜란 뒤의 일이다. 1604년(선조 37)에 해남의 외딴곳에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배려에 의해서 배불(排佛)의 강압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1665년(현종 6)에는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1669년에는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으며, 1811년(순조 11)에 천불전이 불타자 1813년에 완호(琓虎)와 제성(濟醒)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흥사는 배불의 그늘속에서도 수 많은 강사와 종사를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고승은 13 대종사(大宗師)와 13 대강사(對講師)이다. 13 대종사를 출생순으로 열거하면 해동 화엄종의 중흥조로 존경받았던 의심(義諶), 담론(談論)을 잘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던 삼우(三遇), 화엄(華嚴)의 도리와 백가(百家)에 통달하였던 도안(道安),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칭송받았던 추붕(秋鵬), 전국을 순방하며 화엄대회를 열었던 지안, 그 학문이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대우(大愚), 검소와 청빈의 생활로 평생을 살았던 회정(懷淨), 문자를 떠난 곳의 진리를 설파하여 마음이 근원을 찾도록 가르쳤던 새봉(璽篈), 대흥사의 정진당(精進堂)에서 늘 화엄법회를 열었던 체정(體淨), 인욕행이 남달리 뛰어났던 해원(海源), 대승경전에 통달하여 많은 저술을 후세에 남겼던 유일(有一),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이름난 의순(意恂)등이다. 13 대강사들은 모두가 제10대 대종사였던 체정의 문도로 원오(圓悟)․광열(廣悅)․영우(永愚)․승제(勝濟)․성규(聖奎)․정일(鼎馹)․태관(泰瓘)․행인(幸仁)․복혜(福慧)․윤우(尹佑)․시연(示演)․혜장(惠藏)․각안(覺岸) 등이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대흥사의 옛모습은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원은 대웅보전․나한전․시왕전(十王殿)등 24개소의 당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의 사역은 북원보다 남원이 훨씬 넓은데도 좁은 북원쪽에 더 많은 당우가 집중적으로 건립되어 있다. 현재의 대흥사는 사지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金塘川)의 냇물을 중심으로 가람이 남붇으로 나뉘어 있고, 지금도 남원․북원이라고 한다. 또 남원․북원의 법당들은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별원(別院)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북원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군과 남원의 중앙부에 위치한 천불전과 서산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한 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草依)가 중건하였던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심으로 한 일곽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웅보전은 심수가 1665년 봄에 중건을 시작하여 1667년 가을에 완성한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이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후기의 명필인 이광사(李匡師)가 쓴 것이며, 내부에는 조선후기에 만든 목조삼존불과 광무연가에 조성된 후불탱화가 있을 뿐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다. 대웅전 앞에는 침계루(枕溪樓)가 냇가에 연이어 있고 좌우에는 백설당(白雪堂)․세진당(洗塵堂)의 승사(僧舍)가 있다.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無量壽殿)’의 편액이 있으며, 이 건물은 현재 큰 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웅보전 동편에는 응진전(應眞殿)이 있으며,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앞에는 보물 제320호인 대흥사 응진전전 삼층석탑(大興寺應眞殿前三層石塔) 1기가 있다. 전하는 말로는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사리탑이라 한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8호인 천불전은 1811년(순조11)에 불탄 뒤 1813년에 중건한 것으로 내부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천불상은 옥돌로 만든 것으로, 완호 등 10인이 6년에 걸쳐 경주옥돌로 조성하였다. 천불이 완성된 뒤 해로를 통하여 이 절로 옮기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일본에 닿게 되었으나, 일본인들의 꿈에 이 천불이 나타나서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흥사로 가는중”이라 하여 다시 대흥사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천불전이 좌우에는 불경을 배우는 학슬들이 기거하는 용화당(龍華堂 : 전남유형 제93호)과 강사가 기거하는 건물이 있으며, 정면에는 가허루(駕虛樓)가 있다. 표충사는 대흥사의 사격(寺格)을 보여주는 대표적 건물로서 임진왜란때 승병을 조직하여 공훈을 세웠던 서산대사와 그의제자 사명(四溟)과 처영(處英)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전라남도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 일원의 당우배치는 표충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표충비각(表忠碑閣)과 조사당(祖師堂), 정면에 삼문, 삼문 밖에는 2층 누각인 의중당(義重堂)이 있다. 또 이중당의 동쪽에는 서산대상의 유품을 비롯하여 사중유물(寺中遺物)을 보관하는 보장각(寶藏閣)이 있다. 표충사의 건물은 1669년에 건립되었고,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며, 정면 3칸의 맛배집이다. 이중당은 당시 6군의 군수가 봄․가을로 표충사에 제사지낼 때 가지고 온 제물을 차리던 곳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보장각에는 선조의 하사품인 옥발(玉鉢)․비취옥발(翡翠玉鉢)․수저․금란가사(金襴袈裟)․금자병풍(金字屛風)과 표충사총섭사령패, 서산대사의 친필․교지․신발․초의가 그린 관음도․대광명전 상량문․승군단(僧軍團)의 표지물․철제방패, 금과 은으로 쓴 불경, 금동불상 등 총 24종의 유물이 있다. 대광명전(전남 유형문화재 제94호)은 표충사 동쪽 300m 지점에 있으며, 조선후기에 초의가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맛배집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했고 정자(丼字)의 천장에는 연화문과 운학(雲鶴)을 그렸다. 이 연화문과 운학문양은 그 색채뿐 아니라 문양자체가 다른곳에서 보기 힘든 작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초의가 직접 단청을 하였다고 한다. 대광명전 옆에는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정면 9칸의 보련각(寶蓮閣)과 요사채가 있다. 이밖에도 해탈문과 대흥사 역대고승들의 부도를 봉안한 비전이 있다. 이 비전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서산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대흥사 13 대종사와 13 대강사등의 부도 및 비가 있다.
나. 미황사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에 있는 절이다. 1692년(숙종 18)에 세운 사적비에 의하면 749년(경덕왕 8)에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설화에 의하면 돌로 된 배가 사자(獅子) 포구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물러나면 가까이 다가오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의조가 제자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맞이하니 비로소 배가 포구에 도착했다. 배에 올라보니 금의인(金衣人)이 노를 잡고 있고 큰 상자 안에 경전․비로자나불상․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40성중․53선지식(五十三善知識)․16나한․불화(佛畵) 등이 꽉 차 있고, 배 안에 있던 바위를 깨니 검은 황소 1마리가 나왔다. 그날 밤 의조의 꿈에 금의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인도 국왕으로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싣고 왔으나 금강산에 절이 가득해 새 절터가 없어 돌아가던 중인데 이곳의 지형이 금강산과 비슷하므로 소 등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가다가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했다. 이에 다음날 소 등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는데 한 곳에 이르러 소가 한 번 크게 울고 드러눕자 그곳에 통교사(通敎寺)라는 절을 짓고, 소가 다시 일어나 가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 지은 절이 바로 이 절인데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금의인이 황금으로 번쩍거리던 것을 기리기 위해 미황사라고 했다고 한다. 그뒤의 사적은 알 수 없으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약탈과 방화로 큰 피해를 입었다. 1601년(선조 34)에 중창하고, 1660년에 3창했다. 1752년 금고(金鼓)를 만들고, 1754년 대웅전과 나한전을 중건하는 등 대대적인 공사를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오백나한전․명부전․응진전․요사채 등이 있으며, 사적비와 여러 점의 부도가 전한다.
다. 은적사
은적사는 해남읍을 바로 뒤에서 감싸고 있는 금강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산면 장촌리 남계마을에서는 약 1km쯤 떨어져 있다. 현재 사찰의 규모는 산중의 작은 암자이다. 사찰에 전하는 구전으로는 철종 7년(1856, 함풍 6년 병진) 5월에 준호대사가 이절을 크게 중수하였다고 한다. 건물로는 법당인 약사전이 있고 그 곁에 요사채가 있는데 주존불은 철불로써 지권인을 결한 비로사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은 석가의 진신(眞身)을 높여 부르는 칭호로 일명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노자나불․자나불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로 '태양'이라는 뜻인데, 불지(佛智)의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華嚴宗)의 본존불(本尊佛)이다. 무량겁해(無量劫海)에 공덕을 쌓아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대광명을 발하여 법계(法界)를 두루 비춘다고 한다.
은적사 철조비로사나불의 총높이는 1.06m이고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부동체와 무릎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머리와 가슴, 수인, 의문 등은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최근년에는 파손된 하부동체부분과 무릎 부분에 나무로 조각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보수하였다.
나발은 그 모양이 크지않고 소형으로 표시되었으며, 육계가 표현되어 있다. 상호는 원만상으로 양쪽 볼의 상이 약간 빠진 듯 하나 양감이 주어졌다. 얼굴 크기에 비해 긴 눈, 작은 코, 입이 단엄(端嚴)하게 묘사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쪽 어깨에서 3~4겹식의 의문이 양쪽 팔에 걸쳐 밑으로 흐르면서 양무릎을 덮고 있는데 가슴에는 군의의 주름이 선각되고 좌상 뒷면에도 법의의 선각이 묘사되었다.
수인은 지권인을 결하고 있으나 전형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상적인 지권인에서는 오른손을 위로하고 왼손을 밑으로 하여 엄지를 올리고 있는 모습이 보통인데, 이 불상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오른손을 아래로 하여 엄지를 올리고 있다.
라. 서동사
서동사는 해남군 화원면 소재지에서 운거산(雲車山, 324m)으로 오르는 약 1.5㎞ 떨어진 사동(寺洞)마을 어귀에 위치하고 있다. 서동사의 역사에 대해서는 각종 지지류 또는 전해진 문헌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1980년대초에 대웅전 보수시 발견된 「서동사중수상량문;1870」과 대웅전 입구에 있는 현판기록에 의거 서동사의 창건년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두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 진성여왕때 고은 최치원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후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대부분 건물이 불탔으나 대웅전만은 칡뿌리 등이 건물을 감싸고 있어 화를 면하였다고 하여 당시에는 갈천사로 불렀다고 한다. 현 대웅전은 1779년(정조 3)에 복원된 건물로 1870년 의윤, 정기, 진일 등 3인의 스님이 발원하여 중수하였으며 최근년에는 정랑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후 요사채, 칠성각, 천불전, 화장실 등을 개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밖에는 '서동사중수서'를 비롯해 '서동사중수시주질', '제서동사' 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서동사중수시주질'의 끝부분에 '갑자'라는 간지로 보아, 1924년 대웅전의 중수를 기념하며 적은 것으로 추정한다. '각사찰질', '각부낙질' 등 1950년 중수를 기념한 현판도 있다.
서동사 목조삼존불상은 대웅전내에 봉안되어 있다. 중앙에 있는 본존불상은 석가모니불이며, 좌측불상은 약사여래불, 우측불상은 아미타불인 삼세불이다. 삼존불은 크기가 120㎝내외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법의를 감싼 옷주름이나 무릎을 덮은 군의 등 각부분의 양식이 명쾌하고 활달한 감이 있다. 중앙의 본존불의 머리는 나발이며 육계는 낮고 작게 표현되었다.
서동사 삼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목조불상으로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개금불사원문에 의해 불상의 조성 절대연대가 확인됐을뿐아니라 조성양식에 있어서도 불상의 군의자락의 ℧자형 문양이 나주 심양사불상, 죽림사 아미타불과 유사하는 등 조선시대 불상연구에 중요하다.
3) 유교건축
가. 향교대성전
향교의 주 기능은 교육과 제향에 있었으므로 어느 향교를 막론하고 경내는 문묘구역과 강학구역으로 크게 분리되어 진다. 이 양 구역내의 중심건물은 대성전과 명륜다으로 이 두 건물이 하나의 직선축을 이루고 있으며 이 축선에 직교되게 부축선을 계획하였다. 향교건축에서는 향교가 입지한 지형에 따라 문묘구역과 강학지역의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즉 평탄한 지형에 향교가 입지할 때는 전면에 문묘구역을 두고 후면에 강학구역을 배치하는 「前廟後學」 배치기법이며, 경사진 지형에 향교를 건립할때에는 그 지형을 2~3단으로 정지한후에 전면에 강학구역을 설정하고 후면에 문묘구역을 배치하는 「前學後廟」 배치법이다. 이상의 배치형태 외에 횡으로 축을 설정한 좌측에 문묘구역을, 우측에 강학구역을 설정하는 「左廟後學」의 배치수법도 간혹 나타난다.
본 해남향교는 경사지형을 터로 하여 건립된 관계로 前廟後學의 배치모습을 하고 있으며 남남서향을 정면으로하여 일축선상에 대성전과 내삼문, 그리고 명륜당을 배치하였다. 외삼문은 중심축선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좌측편에 비스듬히 건립되어 졌고 교직사는 강학지구 우측 담장밖에 별도로 건립되어 졌다.
해남향교 대성전은 공자외에 26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내부는 통간으로 꾸미고 전면 1칸은 퇴간으로 하여 신위 봉안과 의식때 편리하도록 계획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전각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양박공면에는 바람막이판을 달았다.
나. 표충사
표충사는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여 제자들이 1669년에 건립한 사당이다. 청허당 서산대사를 주벽으로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와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운 뇌묵당 처영대사를 배향하고 있다. 사찰경내에 유교형식의 사당을 겸한 예는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독특한 경우에 속한다. 이곳은 부처의 삼보도량 가운데 하나인 승보(僧寶)를 존중하고 받드는 불가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구현된 공간이다.
표충사는 대흥사 남단에 자리잡고 있으며 건물의 배치는, 돌담의 안쪽 중앙에 북향(北向)으로 사당이 있고 그 좌우측 아래편에는 조사전(祖師殿)과 표충비각(表忠碑閣)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표충사 외곽에 있는 재실 건물이던 의중당과 강례재 주위에 담을 두르고 솟을삼문을 세워 사문(祠門)으로 삼고 있다.
표충사 경내에는 별도의 비각이 있는데, 비각내에는 2기의 비가 있다. 이중 1기는 표충사건사적비로 높이 316㎝로 사각형 비좌에 비신과 이수를 갖추었다. 건립연대는 「성상십육년임자오월일, 서산육세법손연담유일근찬, 응운등오근서(聖上十六年壬子五月日, 西山六世法孫蓮潭有一謹撰, 應雲登旿謹書)」란 내용으로 보아 정조 16년(1792)년이며, 찬자는 연담유일, 글씨는 응운등오가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1기는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로 높이는 364㎝이며 사각형 비좌에 비신과 사각형의 지붕돌을 올렸다. 건립연대는 비신측면에 「숭정기원후삼신해월립」이란 명문으로 보아 정조 15년(1791)임을 알 수 있다. 청하당 유정은 임진왜란때 80노구를 이끌고 구국운동의 선봉에 나서 활약한 승병대장으로 선조가 「국일대선사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란 긴 호를 내렸다. 표충사는 정조 12년(1788) 왕이 표충사라 사액하였으며 대사의 7세법손인 천묵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나라에서는 매년 예관과 헌관을 보내 관급으로 제향케 하였다.
4) 민가건축
① 해남윤씨녹우당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윤선도(尹善道)의 고택(古宅)이다. 본 가옥은 조선중기에 건립된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상류주택으로 그 규모도 크며 구조 및 양식의 구성요소도 풍부하여 한국상류주택연구에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는 가옥이다. 이 가옥은 고산 윤선도의 4대 조부이자 해남윤씨의 시조인 어초은 윤효정(尹孝貞)이 백연동(현 연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지은 것으로 전하여 지고 있으나 당시의 문헌이나 문기가 없어 그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촌은이 해남에 들어온 시기로 보아 대략 15세기경에 시창(始創)된 건축물로 여겨진다.
집터 뒤에는 덕음산을 두고, 앞에 안산(案山)으로 벼루봉과 그 바른편에 필봉이 자리잡고 있는 명당이다. 현재의 건물로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 그리고 안사당, 어초은 사당, 고산사당 등이 있으며, 본 가옥의 좌측면에는 추원당이란 강당도 있다. 안채는 1472년(성종 3)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여 지며 사랑채는 효종이 사전(師傳)였던 고산에게 하사하여 수원에 건립했던 것을 고산이 82세 되던 1669년에 현 위치로 이건한 것이라고 하며 “녹우당(綠雨堂)”이라 현액(縣額)하고 있다. 사랑채는 침방, 사랑방, 대청이 ᅳ 자로 늘어서고 전면에 차양을 달았다. 사랑채의 침방 옆에는 작은 마루를 두고 그 뒤쪽에 곳간을 두어 안채의 부엌칸과 연속시키고 있다. 사랑채 뒤 동쪽으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되고, 안채가 ᄃ자형 평면을 이루면서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의 상량문에 「함풍팔년무오사월병오초팔일계축시무오중수 상량(咸豊八年戊午四月丙午初八日癸丑時戊午重修 上樑)」이란 기록이 있어 철종 9년(1858)에 대대적인 수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② 윤탁가옥
나지막한 야산을 뒤로하고 앞으로 들이 펼쳐진 남향 땅에 자리하고 있는 기와집으로 조선 말기의 호남지방 상류주택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안채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광무10년 병오11월 경신 수주 동 12월 초3일 을축 신사시 상량 축좌(光武十年 丙午十一月 庚申 竪柱 同 十二月 初三日 乙丑 辛巳時 上樑 丑坐)’라는 기록이 있어 광무10년(1906)에 지었음을 알 수 있고, 사랑채와 별당채도 이 시기에 지었다고 한다.
ᄀ자형의 문간채, 안채, 별당채와 一자형의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동네길과 이어진 낮은 터에 一자형 대문간채가 있고, 대문간을 들어서면 문간마당에서 곧바로 사랑마당에 이르게 된다. 문간마당보다 높은 터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랑 뒷쪽으로 중문간채가 있다. 그 안에 안채와 별당채가 마주 보고 있다. 집에는 사랑마당과 안마당에 각각 정원이 꾸며져 있으며, 사랑채 앞의 석축(石築)은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장대한 맛을 풍기어 뛰어난 경치를 엿볼 수 있다.
③ 윤두서고택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인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잠시 머물렀던 집이라고 전한다. 윤두서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3재로 일컬어지며,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가 큰아들인 윤인미(尹仁美)를 분가시키고 자신도 거처하기 위해 지었으나 해변에 위치하여 해풍이 심해 고산은 해남읍 연동에 기거하고 뒤에 증손인 윤두서가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건립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안채의 종도리 장여밑에 중수상량명문 ‘경술후백사십이년신미운운(庚戌後百四十二年辛未云云)’이 있는데 윤두서의 생존연간과 비교해보면 현종 11년(1670)에 지어 후에 윤두서가 살게 되었고, 순조 11년(1811)에 수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안채지붕의 회첨골 암막새에 적힌 명문 ‘동치십년신미구월중수(同治十年辛未九月重修)’를 근거로 할 경우 동치 10년은 1871년(순조 11) 신미(辛未)에 해당되므로 이 ‘신미’년이 안채 장여의 명문중의 ‘신미’년과 같은 해라면 현 건물의 건립연대는 윤두서의 사후(1715)인 173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건물의 위치는 뒤로 북쪽의 망매산을 주봉으로 하였고 앞으로 남쪽의 바다로 훤히 트이며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뚜렷한 풍수지리상의 명당터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건립 당시에는 전체 48칸 규모였다고 전하나 지금은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지고 안채 13칸, 곳간채 3칸 및 사당과 헛간 등이 남아 있다. 바닷바람의 영향을 막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었으며, 벽은 방의 용도에 따라 회벽과 판자벽을 조성하였다.
④ 방춘정
해남 방춘정은 1871년(고종 8)에 김정순(金鼎淳)과 김문익(金文翼)이 주도하여 건립한 순천김씨의 강학소이다. 원래 이곳은 절제 김종서(金宗瑞), 월담 김승주, 북저 김유, 남은 김효우를 비롯한 순천김씨 선대를 배향하였던 삼상사가 있었는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되었다가 1919년 방춘서원의 이름으로 삼성사가 복설된 후에는 방춘서원의 강학소겸 강당으로 활용되었다.
방춘서원은 평탄한 지형에 남북방향으로 축을 설정하여 문간채를 두고 방춘정이 배치되어 있다. 경내에는 내삼문과 사당이 있고 방춘정의 좌우측에 최근에 지은 관리사와 창고가 대칭으로 자리잡고 있다. 건물의 일부가 변형되고 개보수가 있었지만 비교적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5) 무형문화재
① 강강술래
강강술래는 강강수월래라 부르기도 하나 현지의 노인들 사이에는 강강술래라 부르고 있으며 정만조(鄭萬朝)의 문집에는 진도에 유배 되었을 때(1896)의 기록에 〔이날 밤에 집집마다 여인들이 나와 달을 밝으며 발을 굴러 노래를 한다. 한 여인이 노래를 부르면 나머지 많은 여인들이 나와 달을 밝으며 발을 굴러 노래를 한다. 한 여인이 노래를 부르면 나머지 여인들이 느린 소리로 이어 따르니 강강수래(强强須來)라 한다〕고 되어 있어 수월래 보다는 술래에 가깝다. 일설에는 임진왜란때에 왜군에 대한 모의전술로 마을 부녀자들에게 남장을 해서 옥매산을 빙빙 돌게 한 이순신장군의 전술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만월 밤이면 축제를 벌린 고대인의 생활관습이 있었고, 농경민족은 오곡이 풍성한 추석을 맞이해서 축제를 벌이던 오랜 관습에 의하여, 만월과 풍요를 축하하는 민속놀이로 해석해야 한다. 아직도 미개사회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는 만월 밤에 부족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축제로 밤을 세우는 예를 볼 수 있다.
강강술래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여성의 군무이다. 추석을 앞두고 마을 소녀들이 모여 노래하며 원무(圓舞)를 하는데 아기강강이다. 소녀때부터 이러한 훈련을 거쳐 시집갈만한 나이가 들면 아낙네에 끼어 강강술래를 하게 된다.
추석날 저녁밥을 먹고 달이 뜰 무렵이면 여인들이 넓은 마당이나 잔디밭에 모여든다. 달이 솟기 시작하면 여인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로 손을 잡는다.
목청이 좋아 소리를 잘하는 여인이 느린 가락으로 소리를 선창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소리에 맞추어 느리게 발을 내딛고 〔강강술래〕하고 후렴을 부른다, 멕임소리를 선창하면 나머지사람들은 소리에 맞추어 느리게 발을 내딛고 〔강강술래〕하고 후렴을 부른다. 멕임소리를 하는 선창자는 사설을 노래하고 사람들은 끝까지 후렴만 부른다. 멕임소리는 점차 빨라지고, 따라서 춤도 빨라져서 수십명의 아낙네들이 추석빔을 곱게 입고 뛰는 모습은 화려하고 활기에 차 있어 장관을 이루게 된다. 노래의 만급(曼急)이 춤의 만급도 정해지고 한참 뛰고 나면 땀이 나고 신이 벗겨져서 버선발로 뛰는 일도 있다. 강강술래를 〔놀자〕 또는 〔뛰자〕고 하는 것은 군무의 상황을 잘 설명한 말이다.
강강술래가 원무만으로는 단조로워서 중간에 선창자의 재치에 따라 여러 가지 놀이가 삽입된다. 원무하는 복판에 한 두사람이 들어가서 춤추는 남생이 놀이를 비롯해서 고사리꺾기, 청어엮기, 기와밝기, 꼬리따기, 덕석말이, 문지기놀이, 실바늘꿰기 등이 있어 그때마다 노래 사설이 달라지고 놀이에 상으해서 원무에서 여러 가지 동작의 변화가 있다. 강강술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쉬는 일없이 노래하고 춤추게 되어 구성지고 활기찬 한마당을 이룬다. 강강술래는 한국 여인놀이를 대표하며 조선시대의 엄격한 여성의 정숙을 요구하던 시대에도 젊은 여인들의 달밤에 야외에서의 놀이로 전승되어 왔으니 그만한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월을 그냥 보낼 수 없고 풍요한 가을 추수로 맞아 생활의 안정을 이룩한 만족감에서 여성들이 모여 노래와 춤으로 한바탕 놀아 흥풀이 신명풀이로 강강술래를 낳고 성장시켜 오늘날에 전승되어 여인놀이로 정착되었다.
② 우수영부녀농요
농요란 농민들이 노동의 피로를 덜고 노동력을 제고시키기 위하여 창출해낸 마음의 노래로 이속에 삶의 희노애락이 스며 깃들어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우수영 부녀농요는 강강술래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민속요이다. 해남 우수영부녀농요는 주로 부녀자들이 협업의 일종인 품앗이일을 하면서 부르는데 일터로 나가면서 부르는 길노래, 김을 매면서 부르는 들노래, 타작소리에 맞춰 부르는 도리깨노래, 방아를 찧으면서 부르는 방아타령, 추석대보름 등의 명절에 달놀이 하면서 부르는 둥덩애타령 등 5개부문으로 구성되는데 1972년 대전에서 개최된 제13회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바 있다.
노래가락은 중모리, 중중모리로 불리어지나 무척 흥겨웁고 노래말 또한 순수한 마음의 노래다.
이 부녀농요의 구성은 주로 4, 50대의 중년부인으로 구성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부녀자들이 두줄로 양쪽으로 서서 호미를 들고 춤을 추며 일터로 나가면서 길노래를 부른다. ② 동서로 나누어 김을 매면서 김매는 노래를 부른다. ③ 동서남북으로 도리깨질을 하면서 도리깨 노래를 흥겹게 부른다. ④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방아를 찧으면서 방아타령을 부른다. ⑤ 작업이 끝나면서 여흥으로 부르는 노래인데 휘영청 밝은 달아래 동그라미를 그리며 원무를 추면서 함박을 물에 덮어놓고 활로 퉁기어 장단을 맞추면서 둥덩애 타령을 부른다.
전남지역 농요의 맥이 끊어질 단계에 있고, 특히 부녀농요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 찾아보기 힘든데 해남 우수영만이 부녀농요가 옛가락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③ 진양주
구전에 의하면 진양주는 원래 궁중의 양조술로서 영암군 덕진면의 광산김씨 집안에 후실로 들어온 최씨 성의 궁인(宮人)이 비법을 전수했다고 전해진다. 광산김씨 족보를 살펴보면 이조좌랑(吏曹佐郞)과 사간(司諫)의 벼슬을 지낸 뒤 낙향한 김권(金權)의 정부인은 천안전씨였으나 궁중의 진양주를 빚던 궁인 최씨를 후실로 거느렸다고 하며, 그 기능이 현 보유자인 최옥림에게 전수되었다고 보아진다.
진양주의 양조법은 다음과 같다. 찹쌀 1되에 물 5되를 부어 죽을 쑨 뒤 찬 기운이 돌도록 식힌다. 누룩 2되를 곱게 찧어서 죽과 함께 섞고, 항아리에 담아 부뚜막에 놓아둔다. 이때 온도는 20℃ 이상을 유지한다. 3~4일이 지나 술이 익으면 다시 찹쌀 9되를 술밥으로 쪄 식힌 뒤 항아리의 술과 섞어 부뚜막에 놓아둔다. 7~8일이 지나면 물 5되를 끓여 식힌 뒤 항아리에 붓는다. 3~4일이 지나면 술이 완전히 익는데 용수를 박아 용수 안에 고이는 맑은 청주를 떠내고 다시 참채로 걸러내 마신다.
진양주는 덕정리 외에도 인근의 북창, 둔주포, 맹진 등에서도 양조되고 있으나 덕정리의 우물로 빚어야 제맛을 낸다고 한다. 진양주는 경주법주보다 강한 향기가 나며 알코올 농도는 13% 내외이다.
④ 탱화장
탱화는 종이나 비단 또는 베에 청, 황, 적, 백, 흑의 5색을 자연스럽게 조화하여 불교 신앙의 대상인 여러 가지 상(像)을 그리는 것으로 존상화(尊像畵)와 변상도(變相圖)의 성격을 지닌다.
승려로서 건축, 조각, 불화를 제작하는데 뛰어난 솜씨를 지닌 사람을 승장(僧匠)이라고 하며, 특히 탱화나 단청 일에 익숙한 승려를 금어(金魚) 또는 화승(畵僧)이라고 하였는데 탱화장은 이를 이르는 말이다. 전라도에는 예로부터 불교가 융성하여 사찰이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불사가 많아서 사찰에서는 자체적으로 탱화 그리는 금어를 뽑아 교육를 시켰다.
고재석은 1924년 해남에서 태어나 대흥사(大興寺:大芚寺)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화승이다. 고재섭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법호(法號) 겸 화호(畵號)는 낭월(浪月)이다. 그는 12세 때인 1936년 출가하여 대흥사에서 사미승 생활을 하던 중 대흥사 불사를 하러 온 화승 김일섭(金日燮:1900~1975)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15세 때인 1939년 대흥사 불교전문강원을 수료한 뒤, 김일섭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김일섭이 주도한 경기도 개성의 안화사(安和寺) 불사부터 참여하였고, 제주도와 전라남북도 지역 사찰의 불사를 보좌하다가 1948년 송광사에 머물 때까지 10년 동안 불화의 기초작업을 충실히 닦으며 금어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이때 스승인 김일섭과 그 스승인 김보응으로부터 초본(草本)을 전수받았고, 현재도 그것을 바탕으로 탱화를 제작해오고 있다. 김일섭이 그려준 《시왕도(十王圖)》와 김보응의 《지장도(地藏圖)》 초본을 비롯해 고재석이 18세 때 연습한 《신중도(神衆圖)》 초본 등 출초본을 고스란히 소장하고 있어, 그 훈련과정과 옛 불화의 전통형식을 잘 보존해 온 편이다.
고재석을 발탁한 김일섭은 송광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으로 순천 송광면 출신이며 본명은 김갑병이고, 아호는 김용(金蓉)으로 197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으로 지정되었다. 김일섭은 계룡산 갑사(甲寺)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으로, 19세기 말 공주 마곡사(麻谷寺) 출신의 금어인 금호(錦湖) 약효(若效)에게서 불화를 공부하였다.
계보로 볼 때, 고재석은 19~20세기를 이어온 화승 금어의 전통을 옛 모습대로 계승하였다. 즉 조선 말기의 금어인 금호에서 보응(普應)을 거쳐 일섭으로 불화의 맥락을 이어온 고재석은 한국 근현대 불화에서 4대 금어이다. 지금까지 그려온 고재석의 불화는 조선 말기의 퇴화된 형식이 4대째 계승되어 그 회화적 조형미는 떨어지지만 조선시대 불화의 전통형식을 수업하고 계승해온 화승으로 옛 금어의 생활과 신앙 및 예술적 면모를 갖추고 있다. 한편 김일섭의 또 다른 제자로 고재석의 후배이고 부산에서 활동중인 해봉(海奉) 석정(石鼎)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으로 지정받았다.
현재 고재석은 해남의 도장사(道藏寺) 산신탱과 지장탱(1949)을 비롯해 광주․전라남도 지역은 물론 제주도, 충청남북도, 경상남도 지역에 이르기까지 200여 점의 불화를 제작하였다. 화면구성, 도상배치, 선묘, 색채 등 모두 전통 불화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각종 불사 참여 외에도 1981년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주최 제10회 불교미술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적이 있고, 1982년에는 일본 오사카[大阪]의 고려사(高麗寺) 범종불사 기금 마련을 위한 선서화(禪書畵)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6) 고분문화재
① 장고봉 고분
북일면 소재지 남동쪽에 위치한 성마산(城馬山)은 3줄기 구릉으로 갈라져 남동쪽을 향해 길게 이어지는데 비교적 낮고 짧게 뻗은 중앙부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고분이 위치한 곳은 성마산 북동쪽 구릉이 동쪽으로 뻗어 고분의 북쪽 배후를 막아주고, 동쪽과 서쪽은 남동쪽을 향해 길게 뻗은 2줄기의 구릉과 이 구릉에서 뻗어나온 가지구릉이 고분을 에워싸 비교적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다.
장고봉고분은 한쪽은 네모지고 다른쪽은 둥근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고분의 장축방향은 남-북으로 서쪽으로 5°가량 치우쳐 있고 방형부가 북쪽, 원형부가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고분의 규모는 전체길이 약 76m이고 원형부 촉 43m 높이 약 10m, 방형부 폭 37m 높이 9m이고, 연도부는 폭 30m 높이 6m로 원형부보다 약 3m낮다.
장고봉고분은 석실분으로 원형부의 중앙에서 남서쪽으로 치우쳐 축조된 횡혈식이며, 봉토의 기저부에서 5m위에 축조된 지상식이다. 석실의 규모는 현실의 길이가 460㎝이고 동벽은 너비 240㎝ 높이 190㎝, 서벽은 너비 210㎝ 높이 180㎝로 현실의 평면형태는 서쪽이 좁은 장방형이다. 현실 입구는 길이 70㎝, 너비 58㎝ 높이 115㎝이고 연도는 길이 400㎝ 너비 120㎝이다. 구조는 양벽조임식이며 벽석 최하단석은 대형판석이고 나머지는 할석을 사용한점으로 보아 해남 월송리 조산고분, 함평 신덕고분, 광주 쌍암동고분과 비슷한 축조기법을 보이고 있다. 또한 석실의 장축방향도 동서향이고 연도부가 서쪽에 위치한 것은 조산고분, 신덕고분과 동일하며 석실 내부에 주칠(朱漆)된 상황은 신덕고분과 같이 주목된다.
시굴결과 고분의 내부에서는 갑옷편으로 추정되는 철편(鐵片)과 옥(玉), 영락장식(瓔珞裝飾) 등이 수습되어 장고봉고분의 피장자 신분을 엿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장고봉고분은 영산강유역에서 확인되는 전방후원분 가운데 일본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조영되어 있고 규모도 최대급인점에서 고대사 정립에 필요한 많은 정보가 밝혀질 것으로 추정된다. 장고봉고분으로부터 12km떨어진 삼산면 용두리에는 전방후원분 1기가 조영되어 있으며, 현산면 월송리 조산고분에서는 일본 오키나와 근해에서 자생하는 소라껍질이 출토되어 한일간 교역관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② 월송리 조산고분
한반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현산면 월송리 조산고분은 5세기말경에 출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시대의 석실고분이다. 마을사람들은 이 무덤을 조산(造山), 외도리동산 등으로 불러와 처음에는 무덤이란 사실을 몰랐으나 1973년 마을주민들이 정상부에 스피커 설치를 하다가 우연히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고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뒤 1982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이 무덤이 백제시대의 고분임이 밝혀졌다. 특히 석실내부에 부장되어 있던 유물들이 그 진면목을 드러냄으로서 공주 무령왕릉에 버금가는 학술자료를 제공한 유적이다. 분구는 저평한 구릉선상에 반구형으로 축조되었다. 규모는 직경 17m, 높이 4.5m로 분구를 성토하여 만든 다음 석실을 구축한 지상식이다. 석실의 규모는 길이 363㎝, 폭 204㎝, 높이 196㎝로 할석조 맞조림식 석실분이다. 연도는 높이 110㎝, 너비 75㎝이며 길이는 60㎝로 짧다. 석실의 축조상태는 2내지 3매의 판석을 기초로 놓고 그위로 할석을 내경시키면서 쌓아 천장폭을 좁히고 있다. 바닥은 거대한 판석 일매를 깔고 천장은 3매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다.
부장유물은 토기류 25점과 마구류인 행엽 3점, 말재갈 1식, 동제 말방울 10점 및 무구로서 철모 4점, 철촉 100여점, 환두대도 2점, 철부 4점이 출토되었다. 그 이외에도 장신구로서 관옥 11점, 소왕 11점, 다면옥 4점, 곡옥 1점, 동경 1점이 수습되고 기타품으로는 철제가래 1점, 꺽쇠 6점, 라적 1점 등이 수습됨으로서 당시 백제문화의 한 단면을 드러냈다.
③ 용두리 고분
삼산면은 삼산천 유역에서 형성된 비교적 넓은 충적평지를 끼고 있다. 충적평야의 주변으로는 해발 300m내외의 산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금산 마을 북쪽에 있는 해발 216.9m의 산은 서쪽으로 내려오다가 창리 부근에서 구릉성 산지로 바뀌면서 남동쪽으로 내려온다. 구릉성 산지는 요두 마을 서북쪽에서 해발 66.5m로 산정을 형성하고 그대로 삼산천변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한 줄기는 동북쪽으로 완만하게 내려가고 있다. 고분은 구릉이 목을 이루며 좁아들다가 약간 높아지면서 평탄해지는 위치에 위치하는데 구릉 정상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고분이 있는 곳은 삼산천유역에 형성된 넓은 충적평야가 잘 바라다 보이는 지역이다.
고분은 산기슭에서 이어진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하는데 고분 주변이 밭으로 개간되면서 분구가 많이 삭평되었다. 고분의 평면형태는 장고형이며 장축방향은 북동-남서인데 원부를 북동쪽에 두고 방부를 남서쪽에 두었다. 방부는 원부에 비해 낮고 장방형을 띠고 있다. 주민들은 이 고분을 말무덤으로 부르고 있으며 분구 주변이 밭으로 개간되면서 분구자락이 상당히 깍여나갔다. 현재 고분의 규모는 분구길이 40m, 원부 직경 23m, 높이 5m, 방부 전단너비 17m, 허리부너비 16m, 높이 3.5m인데 분구주변이 상당한 깊이로 깍여 있으므로 원래 분구의 규모는 이보다 1~2m 정도 축소될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이 고분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봉분(封墳)의 형태가 원형(圓形), 방형(方形), 방대형(方臺形) 등으로 다양하며 근래에는 전방후원형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용두리고분은 1986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조사팀에 의해 전방후원형으로 추정되었으며, 전라남도기념물 제85호로 지정된 방산리(方山里) 장구봉고분과 동일한 성격으로 여겨진다.
④ 지석묘군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선돌(立石)과 함께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진 유적이다.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지석묘는 신석기시대부터 최근까지도 축조되는 유적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사용하였다. 이 지석묘는 동북아시아에서 중국 요령성과 일본의 구주지방에도 분포하나 우리나라가 중심분포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전남지방에 가장 밀집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지석묘는 무덤방(石室)이 지상에 있는 북방식(卓子式)과 지하에 있는 것으로 크게 나뉘어지며, 지하에 있는 것은 받침돌(支石)이 있는 남방식(碁盤式)과 없는 것(蓋石式)이 있다. 무덤방은 긴네모꼴(長方形)의 평면 형태이고 그 주위에 받침돌이나 깐돌(積石)이 있는 것이 많다. 전남지방의 지석묘는 대부분 지하에 무덤방이 있는 형식이며, 한곳에 수기 내지 수십기씩 무리지어 있다. 지석묘의 껴묻거리(副葬品)는 간돌검(石劍), 간살촉, 비파형동검 등 무기류와 붉은가토기, 장식옥 등이 무덤안에서 출토되며, 무덤 주위에서는 생활용구나 공구류 같은 석기와 토기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연정리 지석묘는 남해에 인접한 좁은 계곡 평지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삼봉산 기슭의 평탄한 대지상으로 국도 13호서에서 동쪽으로 50m 떨어진 곳이다. 지석묘 주위는 숲이 우거져 있으며, 바로 동쪽 산기슭하에 석정마을이 있다. 지석묘의 배치는 남북 35m, 동서 20m의 범위안에서 삼각형에 가까웁게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그 방향은 계곡과 산줄기방향인 거의 남북방향으로 군집되어 있다. 큰 지석묘를 중심으로 작은 지석묘들이 배치된 양상을 띤다. 지석묘의 크기는 3m 이상이 19기이고, 4m 이상 5기나되어 규모가 큰 지석묘들로 군집되어 있어 다른 지석묘군과는 차이를 보인다.
가장 큰 지석묘는 길이 5m, 너비 2.5m, 두께 1.2m이다. 주변이 잘 정리되어 상석하가 드러난 것이 많은데 상석하의 받침돌(支石)은 29기에서 보여 남방식 지석묘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중 4m 이상의 지석묘에는 받침돌이 상석하를 돌아가면서 9개 또는 10개가 고이고 있다. 이러한 받침돌이 많은 것은 전북 부안부터 서해안을 따라 나타나는 지역적인 특징이다. 좁은 범위안에 48기의 지석묘가 군집된 이 지석묘군은 인근의 송산리 은산 지석묘군과 함께 서해안에 있는 대표적인 지석묘군이다. 또한 대형의 지석묘군들이 군집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전형적인 남방식 지석묘가 군집을 이루고 있어 지석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한편 지석묘 군집과 노거수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고, 그 주위가 잘 정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국도변에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문화유적 답사지로도 활용할 수 있는 곳이다.
⑤ 군곡리 패총
패총(貝塚)이란 수렵․어로․채집에 의하여 살아온 옛 사람들이 조개를 먹은 뒤 버린 조개껍데기와 생활쓰레기가 함께 쌓여 이루어진 유적으로 조개더미라고도 한다.
남해안의 서쪽 끝에 있는 군곡리패총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차에 걸쳐 목포대학 박물관 발굴단에 의해 발굴이 실시되었다. 조개무지층이 겉으로 드러난 범위는 너비가 약 200m, 길이 약 300m에 이르는 서남해안지역에서 가장 큰 것이며 출토유물의 양도 많았다.
발굴은 구릉경사면에 위치한 패각층을 중심으로 조사되었으며, 패각층의 층위는 표토층과 생토층을 제외하고 모두 14개층으로 분류되는데 이를 5개의 기층으로 나눌 수 있다. 최하층인 1기층은 점토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청동기시대 후기에 해당되는 층이다. 2기층에서는 5기층까지는 모두 혼패층으로 패각과 다양한 유물이 함께 혼재되어 퇴적된 층이다. 2기층의 연대는 기원전 1세기초로 비정되고 5기층은 기원후 3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유구에는 주거지(집자리)와 토기 가마터가 있다. 주거지는 2차발굴시에 1기가 확인되었다. 이 주거지는 패각층 바로 옆인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는데 그 윤곽선이 확인되었다. 그 크기는 350~360㎝로 원형에 가깝고 수혈 깊이는 10㎝ 내외이다. 수혈 깊이가 얕은 것은 벽이 많이 깎여져 나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바닥의 전면에는 불에 탄 듯 매우 딱딱하였다. 기둥 구멍은 어깨선 밖에서 6개나 발견되었으나 다른 시설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출토유물은 삼발형토기, 시루편, 고배편, 점토대토기 구연편 등이 수습되었다.
토기가마터는 3차발굴시에 1기가 확인되었다. 이 가마는 구릉 경사면을 이용하여 적황색의 석비례층을 파고 만든 칸이 없는 지하식 등가마터이다. 가마의 평면은 표주박형태이고 순수한 가마터 자체의 길이는 420㎝이다. 가마는 출입시설, 불대는 곳, 연소실과 소성실, 굴뚝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비교적 완전한 가마터로 평가된다.
이 패총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경질무문토기를 비롯하여 토제품, 철기, 석기, 골각기, 복골, 장신구, 화천(중국화폐) 등과 자연유물인 패각류, 동물뼈 등이 있다.
해남 군곡리패총은 기원전 1세기초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기원후 3세기경까지 지속된 유적으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의 철기시대 초기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전남지방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고인돌)사회와 고분기의 옹관묘(독무덤)사회를 연결시켜 주는 중간단계가 밝혀지게 되었다. 전라남도지방에서 고인돌사회와 대형독무덤사회를 시간적으로 연결해주는 유적으로 당시 사회생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7) 공룡화석지
화원반도의 북쪽 해안선을 따라 분포하는 백악기의 우항리 지층은 1953년 세일층이 협재되어 있음이 밝혀졌고, 1963년 정밀 지질조사가 실시된 바 있으나 고생물 화석이 발견된 곳은 화원반도와 목포를 연결하는 제방이 조성된후 수면이 낮아짐에 따라 노출된 지역이다. 그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과 해남군에서는 자연사유적지로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96년 7월 기초학술조사를 실시하여 다량의 공룡발자국 화석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1996년~1998년까지 문화재위원 원종관(강원대교수), 문화재위원 이인규(서울대교수), 문화재위원 김수진(서울대교수), 한국고생물학회 양승영(경북대교수), 세계자연사환경학회 김항묵(부산대교수), 한국건축문화연구소 김홍식(명지대교수), 허민(전남대교수), 임성규(경북대교수), 이융남(서울대연구원) 등과 외국의 마틴 록클리(미국 콜로라도대학 교수), 제이콥스(미국 SMU대학 교수), 크리스틴 메이어(스위스 고생물학회 부회장), 필립 커리(캐나다 로얄 티렐박물관 척추동물부장), 마츠카와(일본 동경학예대학), 오바타(일본 오사카대학), 언윈(영국 브리스톨대학) 등과 함께 현지조사를 실시한 결과 그 보존가치를 인정,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의 록클리 교수는 이곳을 조사하여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에서는 일곱번째로 익룡발자국 화석을 발견하였으며 화석과 공룡을 위주로한 공룡전시관(박물관) 건립 등 자연사유적지 조성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극찬하였다.
우항리를 중심으로 한 화원반도는 지체구조상 옥천대의 남단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질은 백악기에 속하는 우항리층과 화산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항리층은 화원반도의 북쪽 호안을 따라 분포하고 있으며, 주요 구성 암석은 역암, 사암, 이암 등이고 쳐트와 석회질 셰일, 그리고 함유세일을 협재하기도 한다. 우항리 호안에서의 관찰에 의하면 상부로 갈수록 화산 쇄설물이 많아져 응회질 사암 및 셰일에서 응회암으로 점이하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해남 우항리 고생물화석 산출지에서는 조반목, 용반목 등 다양한 공룡발자국 화석 500여점을 비롯하여 1,000여점의 새발자국 화석, 공룡의 뼈, 익룡의 뼈화석이 발굴되었다.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공룡발자국 화석은 한층준에서 다양한 종류가 함께 나타나는데 산출밀도가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며, 전체적으로 조각류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우세하고 일부 초대형 조각류 발자국 화석이 관찰되기도 한다.
우항리지역의 학술적 가치를 살펴보면 크게 고생물학적 측면과 퇴적구조 측면으로 나눌수 있다. 고생물학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첫째, 국제적 공룡 및 익룡의 서식지로서 446점의 익룡발자국 화석과, 500여점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산출되었다. 둘째, 세계최고(最古)의 물갈퀴새 발자국 화석지이며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물갈퀴 새 발자국으로 알려진 미국의 에오세(약 5천 5백만년전) 퇴적층보다 약 4천만년 정도가 앞선시기의 것이다. 셋째, 이 지역에서는 석유의 근원물질이 되는 약 1mm크기의 무색을 띠는 좁쌀모양의 미생물인 개형충(Ostracda)미화석 수 만종이 관찰되었다. 이곳에서 산출되는 화석은 대부분 비해성(非海性) 호수성으로 과거 이 지역이 커다란 호수의 가장자리 부분에 해당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들 미화석은 중국 및 세계 다른나라 종들과 비교․분석함으로써 고생물학적 진화 연구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퇴적당시 이곳에서 살았던 유기물(조개, 개, 벌레 등)들의 행동양태를 알 수 있는 흔적화석도 다량 존재하고 있어 고생물학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퇴적구조 측면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의 층내 변형구조(Convolute Structure), 각력질 암맥(Clastic Dyke), 성장화산력(Accretionary Lapilli), 대소형 불꽃구조(Flame Structure), 층상처어트(Bedded Chert)등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들은 학술적인 측면에서 매우 소중한 것으로 세계적으로도 산출이 휘귀하여 보존은 물론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출처 :문화관광해설가 원문보기▶ 글쓴이 : 해남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