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대통령 "감옥서 노트 30여권 분량 직접 썼다”
6공 핵심 손주환 전 장관 인터뷰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5년 11월부터 25개월간 옥살이를 할 때 대학노트 30여 권 분량의 원고를 직접 썼다.”노 전 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던 손주환(사진) 전 공보처 장관이 13일 오후 중앙SUNDAY와의 인터뷰를 통해 최근 발간된 '노태우 회고록'의 출간 경위를 소상히 밝혔다. 그는 88년 13대 총선 때 민정당 선거대책본부 대변인을 거쳐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과 공보처 장관을 지냈다. 노 전 대통령 퇴임 후에도 줄곧 보좌해 왔다.
손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은 투옥 기간 중 본인의 기억과 비서관이 가져온 관련 자료를 참고해 육필 원고를 써나갔다”며 “나도 이런 사실을 노 전 대통령이 출소한 뒤 1년이 넘어서야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측근 참모나 작가들이 구술을 받아 쓴 '대필 회고록'이 아니라는 얘기다.
손 전 장관은 97년 대선 전 노 전 대통령과 김영삼(YS) 민자당 후보가 대선자금 3000억원 지원 문제를 놓고 통화했다는 녹음 테이프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에선 대통령의 통화내용을 녹음했으며, (전화통화를 했다면) 이런 전화 역시 녹음됐을 개연성이 크다”고 밝혔다.
그는 또 회고록의 정치자금 대목에 대해 “당초 노 전 대통령이 쓴 원고에는 정치자금 부분이 별도의 챕터(chapter·장)로 돼 있었는데 그 분량은 회고록에 실린 것(23페이지 분량)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밝혔다. 회고록 발간 시기와 관련해선 “2007년께 최종 완성된 것으로 기억하지만 계속 발간 시기를 미루다 노 전 대통령의 팔순(8월 15일)을 맞아 영부인 김옥숙 여사 등 가족과 참모들이 논의해 출판키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 집필을 어떻게 시작했나.
“자료와 구술을 토대로 엮은 그런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다. 옥중에 계실 때 자료 지시 얘기는 들었지만 회고록을 쓰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출소 직후에도 한참 동안 회고록 얘기를 않다가 1년 뒤에야 우연찮게 대학노트 30여 권의 원고를 썼다고 노 전 대통령이 밝혔다. 내가 보여달라고 해서 읽어 보니 (손으로 크기를 설명하며) 이만한 대학 노트들이었다. 펜 글씨로 유려하게 쓴 원고였다.”
-발간이 늦어진 이유는.
“원고를 보니 기막힌 내용들이었다. 재임 중 기록은 물론 출생 때부터의 가족사까지 모두 담겼다. 홀어머니 밑에서 두 형제가 자라는 눈물 나는 대목도 있고 영부인과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도 담겨 있었다. 내가 ‘어느 시점에선가 발간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2002년 초 회고록 발간팀을 구성했다. 2002년 11월 중국 정부 초청으로 방중해 장쩌민(江澤民·강택민) 국가주석을 만나기 몇 달 전으로 기억된다. 태스크포스(TF)식으로 꾸며 네댓 명이 추가 작업을 했다. 노 전 대통령 주재로 매달 1∼2회 전직 장관과 청와대 수석들을 모아 분야별 회의를 열었다. 당시 참모들이 자료를 준비하고 노 전 대통령이 보완을 지시하는 방식이었다. 경제 분야는 김종인·이진설 전 경제수석 등이, 정치 분야는 나와 최병렬 전 정무수석, 북방정책은 박철언 전 의원 등을 불러 독회(讀會)를 하는 식이었다. 이런 작업을 4년가량 했는데 회의 내용은 모두 녹음돼 있다.”
-YS가 대선 막바지에 1000억원을 추가 지원받은 뒤 노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내용도 녹음돼 있다는데.
“내가 청와대에 근무할 당시 경호실이 청와대에 들어오는 모든 전화를 감청하고 녹음했다. 대통령이 직접 통화하는 내용도 녹음됐다. 보안상 이유 등이었다. 당시 청와대 수석회의 중 누군가 ‘이상하다. 내 전화가 도청되는지 감도가 안 좋다’고 말하기에 내가 ‘여보쇼, 녹음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는가’라고 답해 줬다. 그래서 (YS가 전화통화를 했다면) 그것도 녹음됐을 개연성은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이 테이프를 퇴임 뒤 연희동으로 가져 왔는지 아니면 경호실에서 자동폐기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희귀병이라는데 주변에선 화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쓴 육필 원고 가운데 민감한 부분들도 회고록에 모두 실렸을까. 손주환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도 사람이기 때문에 특정 인사에 대해 서운하게 느꼈던 부분이 있지 않겠느냐”며 “그런 대목들과 함께 조기 공개하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정치 관련 사안들은 보류됐다”고 말했다.
-3000억원 제공 주장에 대해 YS 측에선 받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직접 답변하기보다는 이 얘기를 하고 싶다. 노 전 대통령은 이른바 ‘비자금’ 때문에 구속되고 수감까지 됐다. 노 전 대통령의 많은 치적을가리는 가장 가슴아픈 사건이 비자금이다.그런데 비자금은 당시 상황으로보면 ‘통치자금’이라는 표현이 더맞다.”
-통치자금 규모는 매년 얼마나 됐나.
“그건 계산이 잘 안 된다.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1980년대 말, 90년대 초엔 정치 행태·문화, 사회적 관행이 지금과 전혀 다르다. 두부를 칼로 자르듯 (지금 기준으로) 볼 수는 없다. 당시 대통령은 집권당 총재였다. 대통령이 매달 사무총장을 불러 당 운영비를 내려주는 형태였다. 여기에 명절 때면 소방서·경찰 같은 공무원 사회와 사회보장시설ㆍ불우이웃 등에 몇십억원씩 보내야 했다. 서양 같으면 정부 재정에서 맡아야 할 것을 청와대가 감당해야 하는 식이었다.”
-대통령이 집권당에 월 50억원만 지원해도 연 600억원 아닌가.
“그걸 지금 내가 확인해 줄 수 있겠나.”
-회고록의 정치자금 관련 부분이 33페이지인데 육필 원고 중 얼마나 많은 분량이 빠졌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나 김종필(JP) 전 총리에 관한 내용이 있는가.
“몇 페이지나 빠졌다고 계량화해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은 대부분 담겼다고 보면 된다. 내 기억으론 DJ와 JP에 관한 내용은 원래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의 육필 원고가 대학노트 30여 권 분량이라면 ‘회고록 2탄’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침묵) 자료는 되는데 추가 회고록을 낼지 말지는 나로선 잘 모르겠다. 이번 출판 관련 일은 아들인 노재헌 변호사가 맡
았다.”
-노 전 대통령의 건강 상태는 어떤가.
“전립선암 수술을 한 지 꽤 됐다. 상대방을 인지하는 능력은 여전하고, 기억력도 정확하다. 하지만 말씀을 전혀 하지 못하고,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한다. 언어·행동 두 기능이 퇴화해 가고 있다. 나는 잘 모르는데 엄청나게 희귀한 병이라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이 왜 이렇게 됐는지를 놓고 주위에선 ‘화병’이라고 얘기한다. 화를 잘 참는 분인데….”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는가.
“보통 사람과는 잘 되지 않는다. 나는 몇 달에 한 번씩 뵈는데 친근한 사람이 보이면 노 전 대통령의 얼굴이 환해진다. 인사하려고 손을 잡으면 손을 꽉 쥔다. 또 뭐라 말씀드리면 얼굴 표정에서 반응이 나타난다. 눈빛도 달라진다. 영부인과 문동인 비서관은 이렇게 몇 년을 겪어 눈빛만으로도 대화가 된다. 영부인이 ‘뭘 좀 갖다 드릴까요’ 한 뒤 노 전 대통령의 표정을 보고선 ‘가져오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신다. 그런 식이다. 그래서 영부인과 문 비서관이 통역이나 다름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가 병문안을 한 적이 있나.
“‘가족 외에는 가능하면 외부 접촉을 않는 게 좋다’는 의료진의 판단을 따르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오랜 투병 생활로 심장혈관계나 폐질환에 대비해야 하는데 의료진에 따르면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그 영향이 2∼3일 간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 내외도 오랜 친구인데 문병하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의사의 권고를 가족들이 따르고 있다. 두 분 모두 팔순인데 이젠 마음속으로 화해하고 친구 사이로 돌아왔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노 정부 당시 고위직들은 자주 모이나.
“당시 총리가 다섯 분이었는데 총리 중심으로 모임이 있다. 이현재 초대 총리는 6공 첫 총리라는 의미로 ‘육초회(六初會)’를, 마지막 총리인 현승종 전 총리 쪽에선 마지막 내각이었으니 ‘육종회(六終會)’라는 이름으로 만난다. 이와 별도로 6공 후반기 청와대 수석을 지낸 분들은 ‘육청회(六靑會)’로 모인다. 조만간 노 전 대통령의 팔순을 기념해 『노태우 대통령을 말한다』는 문집을 내려 한다. 당시 고위직 인사 200여 명에게 원고를 청탁했는데 180여 명이 글을 썼다.”
-노 정부에 대한 세간 평가는 낮은 편인데.
“노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을 세 가지로 압축하면 북방외교 개척과 남북 관계 개선, 그리고 인천공항ㆍ고속철도ㆍ신도시·새만금 등 과감한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다. 지금 인천공항이 없다면 항공 물류를 일본·중국 공항에 다 빼앗겼을 것이다.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철수 결정도 노 전 대통령이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먼저 요구한 것이었다.”
<자료 : 중앙SUNDAY(이양수,채병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