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라일락을 제재로 시 한 편을 썼습니다. 라일락은 대체로 오월에 꽃을 피웁니다. 그 향기는 먼 데서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고혹적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흰색의 라일락을 많이 볼 수 있지만 자수정 빛깔을 띠는 라일락꽃도 있습니다.
지난 달 췌장암으로 병석에 있는 환자 한 분을 삼성의료원으로 찾아가 문안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병세가 초기였으므로 비교적 건강해 보였습니다. 암의 증상이 악화되면 머리칼이 죄다 빠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정도라고 판명될 때에는 환자를 퇴원시키는 게 상례입니다. 병 문안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박박 깎은 듯한 머리의, 몹시 초췌한 환자가 보따리를 든 아내와 딸의 부축을 받으며 병동의 복도를 힘없이 빠져나가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순간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습니다.
십여 년 전, 대학병원에서 마지막으로 퇴원해 나오는 어머니를 차에 모시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슬픈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심장판막증으로 오래 고생하시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의 치료가 소용없음을 깨달은 의사의 권고에 따라 퇴원 수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쓰시던 이불을 꾸리고 옷가지를 챙겨 차에 탔습니다. 차창 밖에는 꽃보다 곱게 새로 돋아난 가로수의 신록들이 햇빛 아래 눈부셨지만 그게 더욱 서럽게 느껴져 나는 곁에 있는 아내 몰래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 해 추석을 지난 며칠 뒤 어머니는 가셨습니다. 한번은 병실에 누워 의식이 돌아와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도 못난 아들이 미덥고 고맙다는 듯이 말없이 내 등을 토닥거려주시던 어머니였습니다.
삼성의료원은 암으로 진단 받은 환자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랑 같이 동인 활동을 하신 고(故) 박홍원 시인도 거길 들르신 적이 있습니다. 박 시인께서도 어쩌면 그 나무를 눈여겨보았을는지도 모릅니다. 병원 현관 앞의 정원에는 물푸레나무의 일종인 '수수꽃다리'라는 표찰을 달고 있는 나무가 훌쩍 큰 키로 서 있었습니다. 사실 라일락은 그냥 '수수꽃다리'가 아니라 '서양수수꽃다리'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자정향(紫丁香)'이란 이름도 라일락을 가리킨다 합니다. 실제로 내가 본 꽃나무는 비록 라일락나무는 아니었지만 이 시에서 나는 굳이 라일락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라일락나무 연초록 가지와 가지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일 때
안돼, 안돼
연등(燃燈)인 양 꽃 숭어리를 흔들며
라일락나무 말갛게 눈흘긴다.
칼바람, 꽃샘바람, 황사바람까지
멀리 배웅하고 돌아온 뒤
가만가만 우려낸 글썽한 물빛,
라일락 자잘한 꽃잎 속에서
서늘한 오월의 밤이
한 소절씩 한 소절씩 떠내려온다.
외등(外燈)이 차갑게 눈뜨는 삼성의료원 현관 앞
막 퇴원한 환자가, 다 빠져나간
머리카락조차 잊고
곁에서 눈물을 감추는 보호자의 손도 놓고서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저 라일락나무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수정(紫水晶) 푸른 그늘을.
―라일락나무에서 흐르는 밤
암 환자가 퇴원하며 마지막으로 지상에서 맡아보는 라일락 향기... 그런 애잔한 슬픔을 잔잔히 그려보고 싶어서 쓴 시가 이 시였습니다.
오월의 서늘한 밤과 라일락 향기. 언젠가 밤에 짙은 라일락 향기가 은은히 풍겨올 때 문득 나는 그 자잘하고 눈물 같은 꽃이파리에서 서늘한 밤이 실실이 풀어져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오랫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첫댓글 아름다워서 더 슬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