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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으로 일하여 초월세계를 체험하는 일’과 ‘하늘의 계획에 동참하는 신앙으로 열린 하늘을 직접 바라보는 일’
(1) 증산은 어느 날 난데없이 ‘숨바꼭질’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리 날 찾고자 해도 내가 보여주고 가르쳐주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이제 몸을 피하려 하노니 너희들이 능히 찾겠느냐?’ 모두 대하여 가로되 ‘찾겠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들은 나를 찾지 못할 것이오, 내가 너희들을 찾아야 만나보게 되리라.’”(대순전경 p407)
“내가 서촉에 있어도 일심하는 자는 찾으리라”(대순전경 p336)
“하루는 종도들에게 이르시기를 ‘나를 찾으며 일심하지 않으면 오히려 들어가는 문을 닫고자 함이라.’ 하시며 또 가라사대 ‘시어일심(始於一心) 하고 종어일심(終於一心) 하라.’ 하시니라”(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62)
증산은 마치 소크라테스(Socrates: BC470-BC399)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화두와 비슷합니다. 즉, ‘무엇이든 초월적 세계에서 풀어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사람의 마음대로 풀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스스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줌으로써 자칫 오만 방자해 지기 쉬운 인간의 본능적 한계를 스스로 벗어날 수 있게 해 줍니다. 초월세계를 바라보고 있던 증산은 세상살이에 얽매여 헉헉거리는 사람들에게 ‘네가 아니라 내 쪽에서 찾아야 나를 보리라’고 잘못된 방향감각을 백팔십 도로 뒤바꿔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들에 파묻혀 살지 않고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초월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을 홱 틀면 과연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그로 인해 마음과 영혼이 덩달아 새로운 공기로 숨 쉬기 시작하고 새로운 수분으로 목을 축이게 될 겁니다.
증산은 유별날 정도로 ‘일’을 강조합니다. ‘일하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말라’는 옛 말처럼 ‘일과 삶’을 동전의 양면처럼 이야기 합니다.
“글도 않고 일도 않는 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벗어난 자니 쓸 데가 없느니라”(대순전경 p331)
“경석이 물어 가로되 ‘무슨 업을 하시나이까?’ 상제님이 웃으시면 가라사대 ‘의원 노릇을 하노라.’ 또 물어 가로되 ‘어느 곳에 머무르시나이까?’ 가라사대 ‘나는 동역객서역객 천지무가객이로다”(대순전경 p107)
증산은 자신의 부친에 대한 일화에서 아주 독특한 논리를 제시합니다.
“부친으로 하여금 일상생활에 매일 자력을 쓰도록 하시고 평소에 허물 지은 것을 생각하여 허물 닦기를 힘쓰라 하사, 종도들 중에 혹 물품이나 금품을 드리는 것을 엄금하시더니 어떤 종도가 집이 너무 협착함을 민망히 여겨 그보다 큰 집을 사드린 자가 있거늘, 상제님이 꾸짖어 가라사대 ‘속 모르는 사람은 나에게 불효라 할지나 나는 부친의 앞길을 닦아드리려 함이로다. 내가 항상 가늠을 놓고 보는데, 만일 그 가늠에 어그러지면 허사가 되나니 너희들이 부친의 빈궁하심을 민망히 여겨 원조하여 드리고 싶거든 먼저 나에게 말하면 그 가늠을 변경하리라.’ 하시니라”(대순전경 pp123-124)
증산의 ‘일’에 대한 시각은 보통사람들의 진부한 그것과 너무도 큰 차이가 납니다. 먹고 사는 수단으로서의 ‘일’이 아니라 ‘허물을 줄이고 없애는 치료’로서 ‘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아주 특별한 의미로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의 도구로 본 겁니다. 허물을 벗고 다가올 상생의 후천세계에서 낙오하지 않고 선택 받도록 하기 위한 도구로 본 겁니다. 그 도구를 쓰임새에 맞춰 사용하는 이가 바로 초월세계의 ‘힘’인데 그 쓰임새 중의 하나가 바로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일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 없는 빈 껍데기’일 뿐이라는 겁니다. 어쩌다 사람의 모습, 사람의 탈을 쓰게 되었지만 후천세계가 오기 전에 상극의 단계에서 모조리 낙오하고 만다는 겁니다.
(2) 예수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악취가 펄펄 나는 한 젊은이의 주검을 다시 살려냈습니다. 일반 대중은 그 기적을 보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굳게 믿었지만 지도층 인사들은 몹시 두려워하며 잡아 죽일 계획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너무 엄청난 기적이라 나라 전체가 뒤집어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유일 초강대국 로마마저도 두려워하여 무슨 비상대책을 강구하게 되었을 겁니다. 신이 내려와 세상을 쥘락 필락 한다면 어떤 군대, 어느 제왕이 맞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갈릴리 호수 북쪽 베다니(Bethany) 마을에 사는 나사로(Lazarus)가 병이 들어 몸 져 누웠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았던 마리아는 바로 나사로의 누이였습니다.
누이들이 서둘러 나섰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람을 보내 예수에게 알렸습니다. ‘오라비가 몹시 아파 죽게 되었으니 속히 오셔서 낫게 해 달라’는 긴급요청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1.4; “This sickness is not unto death, but for the glory of god, that the Son of God may be glorified through it.”)
아마도 아픈 나사로는 물론이고 두 누이를 비롯한 온 가족들이 예수를 몹시 비난했을 겁니다.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섭섭한 것만 떠올리기 쉬운 보통 마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를 보다 안 보다 하며 늘 사팔뜨기로 눈동자를 엉뚱한 데 고정시켜 두는 보통의 영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그 머무르던 곳에서 자그마치 이틀을 더 머물렀습니다. 이틀 뒤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자 제자들은 반대했습니다.
“좀 전에도 못된 지도층인사들의 사주를 받은 어리석은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했는데 그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유대 땅으로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요한복음 11.8)
예수는 ‘때가 정오니 밝은 빛 때문에라도 사람이 죄악을 범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밤에 다니면 빛이 없어 죄악에 쉬이 물들게 된다’고 말하며 엉거주춤하고 있는 제자들을 재촉했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한복음 11.11; “Our friend Lazarus sleeps, but I go that I may wake him up.”)
예수의 심중을 전혀 알 길 없는 제자들은 얼른 맞장구를 쳤습니다.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요한복음 11.12; “Lord, if he sleeps he will get well.”)
예수는 제자들의 그 맞장구에 좀 더 직설적으로 말했습니다(Then Jesus said to them plainly; John 11.14).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요한복음 11.14-15; “Lazarus is dead. And I am glad for your sakes that I was not there, that you may believe. Nevertheless let us go to him.”)
그 때 평소 뭐든 잘 믿지 않는 ‘디두모라 하는 도마’(Thomas, who is called the Twin)가 예수가 자신을 돌로 치려 하던 유대 땅으로 다시 들어간다고 하자 대뜸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Let us also go, that we may die with Him; John 11.16)!’고 말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는 예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마을 어귀로 달려나갔습니다. 예수를 보자 마자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그라나 저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한복음 11.21-22; “Lord, if You had been here, my brother would not have died. But even now I know that whatever You ask of God, God will give You.”)
마르다의 믿음을 귀하게 여긴 예수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Your brother will rise again; John 11.23).’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엉뚱하게도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제가 아나이다(I know that he will rise again in the resurrection at the last day; John 11.24).’라고 말했습니다. 방향이 완전히 다른 대꾸인 줄 알고 예수는 좀더 색다른 방법으로 마르다의 속 눈을 겨냥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though he may die, he shall live.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sha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마르다는 얼른 알아듣고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제가 믿나이다.’라고 맞장구쳤습니다. 그 길로 마르다는 서둘러 집으로 가 슬픔에 젖어 있는 동생 마리아에게만 살짝 귀띔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을로 들어오시는 중이니 어서 가서 모시고 들어와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언니의 그 말을 듣자 마자 화들짝 놀라며 마을 입구로 달려갔습니다. 조문 왔던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채 덩달아 우루루 달려나갔습니다. 오라비의 무덤에 통곡하러 가는 줄 알고 따라 나섰던 겁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보자마자 그의 발 앞에 엎으러 지고 말았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요한복음 11.32)
예수는 통곡하는 마리아와 따라 우는 사람들을 보자 ‘심령에 통분히 여기고 민망히 여겨(He groaned in the spirit and was troubled; John 11.33)’ 평상심을 제대로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울컥거리는 속을 달래며 예수는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주여, 와서 보옵소서.’라고 말하자 ‘사랑하는 나사로의 처지가 너무도 가엾어’ 그만 참던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35; Jesus wept) 말았습니다. 예수의 우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여러 반응을 보였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요한복음 11.36; “See how He loved him!”)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요한복음 11.37; “Could not this Man, who opened the eyes of the blind, also have kept this man from dying?”)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 예수는 나사로의 주검을 눕혀 놓은 굴로 향했습니다. 우선 입구를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Take away the stone)’고 시켰습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바로 그때 마르다(Martha)가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한복음 11.39; “Lord, by this time there is a stench, for he has been dead four days.”)
예수는 그래도 인내심을 더 발휘하여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한복음 11.40)라고 조용히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는 돌이 옮겨진 ‘악취 나는 굴’을 앞에 두고 ‘눈을 들어 우러러 보며’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1.41-42; “Father, I thank You that You have heard Me. And I know that You always hear Me, but because of the people who are standing by I said this, that they may believe that You sent Me.”)
예수는 곧 이어 악취 나는 컴컴한 굴을 향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Lazarus, come forth!)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 때 ‘수족이 베로 동여진 채 죽은 자가 나오는데 얼굴이 수건에 싸여 어떻게 변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Loose him, and let him go).’고 시켰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서 걸어 다니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 속에는 예수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끄나풀들도 많았습니다. 목격자들 중 몇이 즉시 달려가 허겁지겁 보고하자 그 배후조종자들은 ‘비상시국’임을 직감하고 유대교 법정에 해당하는 ‘공회’(council)를 소집했습니다.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요한복음 11.47; “What shall we do? For this Man works many signs.”)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요한복음 11.48; “If we let Him alone like this, everyone will believe in Him, and the Romans will come and take away both our place and nation.”)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Caiaphas)는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 11.49-50; “You know nothing at all, nor do you consider that it is expedient for us that one man should die for the people, and not that the whole nation should perish.”)
유대교 지도자들이 일제히 나서서 ‘예수 잡아 죽일 모의’를 하자(from that day on, they plotted to put Him to death) 예수는 ‘다시는 유대인들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않고(no longer walked openly among the Jews) 빈들 가까운 데에 있는 에브라임(Ephraim)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체류’했습니다. 되살아난 나사로가 이스라엘 전체와 로마제국에까지 그 정도가 제법 심한 ‘지진’을 일으켜 놓았던 겁니다.
(3) 예수는 ‘자신이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절대자임을 사람들이 믿도록 하려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악취가 심하게 나는 나사로의 주검을 다시 살려낸 겁니다. 성경 기록자는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예수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미리 알게 하려’(요한복음 11.51-52) 그런 기적이 일어난 거라고 풀이했습니다.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와 죽음, 그리고 뒤이은 부활과 승천은 모두 ‘인류의 숙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죄의 문제, 생명과 죽음의 문제, 영혼과 사후세계의 문제, 절대자의 섭리와 심판, 그리고 구원의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인류와 동떨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창조주인 절대자를 중심에 놓은 것 같지만 사실은 피조물인 인류를 중심에 놓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구세주)의 사명 자체가 바로 인류구제, 생명선물이었습니다. 메시아에 관한 모든 일들을 절대자 하나님이 주관하고 지휘하고 있던 탓에 항상 절대자 하나님을 모든 일의 중심에 위치시켜 놓았을 뿐입니다. 메시아의 존재이유, 메시아의 역할 등이 모두 절대자의 손에 달려있었던 겁니다. 예수는 절대자의 계획 안에 있던 메시아였습니다. 인류구원의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내려왔던 절대자의 ‘메신저’였습니다.
증산은 한민족을 위해 격변기의 한반도에 나타났던 선각자요 초월자였습니다. 그 스스로 신명(神冥)의 세계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만물마다에 신명이 있다’는 식으로 풀이한 이도 있었습니다.
증산이 말한 것, 증산이 보여준 것을 한낱 사람인 주제에 어떻게 다 알아차릴 수 있겠습니까? 현실을 낱낱이 꿰뚫어 보며 ‘보다 나은 먼 미래’를 알게 하고 짐작하게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너무 벅찬 만남일 수 있습니다. ‘일심(一心)하면 내가 어디 있든 찾을 수 있다’며 ‘마음가짐의 상태’를 직시하게 해 주었습니다. ‘들어가는 문을 닫을 수 있다’고 함으로써 무슨 일을 하든 온 마음으로 몰두하고 정진해야 함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글도 안 배우고 일도 안 하면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다’고 단언함으로써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함을 아주 알기 쉽게 일러주었습니다. ‘의원 노릇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천지에 머무를 곳이 없는 나그네’라고 자신을 소개함으로써 방 한 칸과 집 한 채와 땅 몇 마지기에 얽매여 사는 우리의 삶을 즉시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비록 불효자라는 말을 듣더라도 결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매사에 일정한 가늠을 갖고 묵상하고 계획하고 천지의 변화를 내다 봄을 왜 그리 모르느냐? 내 부친이라 할지라도 무엇을 하든 자기 힘으로 하고 자기 판단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만 지난 날의 허물이 생각나서 그 허물을 닦아 없애기에 힘껏 매달리게 될 것 아니냐? 멋대로 하지 말고 미리 내게 상의하여 내가 지닌 가늠이나 내가 하는 일을 결코 훼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특별한 역할을 넌지시 암시했습니다.
초월세계에 속한 일들을 암시한다고 사람의 마음과 머리로 어떻게 그대로 받아먹을 수 있겠습니까? 뛰어난 고등수학자가 더하기 빼기나 곱하기 나누기 정도를 간신히 아는 자에게 고등수학문제를 풀어주는 식일 겁니다.
하지만 예수와 증산을 통해 보다 큰 것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분단된 한민족이 과연 어떻게 달라져야 동북아의 급변하는 질서재편 속에서 제 목소리를 내며 제 역할을 잘 하게 될지, 증산과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열심히 캐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초월자의 인도를 받을 때 가장 빨리 변하고 가장 많이 변합니다. 사람이 지닌 영성(靈性)은 초월세계를 체험하고 목격할 때 가장 빨리 급선회합니다.
증산은 한민족이 얻은 초월자(超越者)입니다. 예수는 팔레스타인 지대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어졌던 굉장한 초월자였습니다. 증산은 한반도의 공기에 초월세계를 올려놓았습니다. 예수는 유일 초강대국 로마의 우산 아래에 초월세계의 비밀을 펼쳐놓았습니다.
그래서 증산은 한민족에게 먼저 소개되었고 먼저 체험되었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예수는 로마제국 산하의 그 넓은 지역에 소나기처럼 흩뿌려졌고 함박눈처럼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각 나라, 각 백성에게 시시때때로 초월자를 내보내 초월세계를 알게 하는 그 ‘수렴(收斂)의 시기’가 늘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의 밴댕이 속으로 초월세계를 넘보려 들어선 안 됩니다. 씩씩거리고 헉헉거리며 달려들면 찢어지는 건 겉옷이고 흩어지는 건 지혜뿐입니다. ‘사람이 달라져야’ 달라진 세상이 됩니다. 사람이 달라지려면 초월자의 초월세계 암시에 찰싹 달라붙어있어야 합니다. 초월자들은 한결같이 ‘사람의 올바른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말했습니다. 초월자들은 예외 없이 ‘죄짓지 말라’고 가르치고 ‘눈을 들어 보다 높이 보고 보다 멀리 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영적인 존재임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피붙이 외에 이웃과 인류가 ‘진짜 가족’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몸소 보인 모범을 따라 제발 길 잃어버리지 말고 똑바로 또박또박 잘 걸으라고 외쳤습니다. ‘너희 하는 짓을 보니 가슴이 아프고 너희 하는 말을 들으니 영(靈)이 다 떠날 듯하다’며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시험보기 위해 한 공부 몇 줄을 붙들고 ‘다시 태어나려 한다’면 정말 큰 오산입니다. 졸업장, 학위 얻으려 얼마간 모은 지식을 들고 하늘을 알고 땅을 알려고 한다면 정말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꼴’입니다.
열린 하늘이고 열린 땅입니다. 그 열린 통로를 통해 오고 간 초월자들을 주목해야만 희미한 불빛이나마 구경할 수 있습니다. 곧 들이닥칠 ‘다른 차원, 다른 빛깔의 세상’을 초월자들의 손가락 끝을 타고 잠시라도 엿보아야만 심성이 밝아지고 나아집니다.
초월자들의 세계, 초월자들의 가르침을 애지중지 하지 않는 나라나 백성은 결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승리자로 등장할 수 없습니다. 창조의 근원, 존재의 근원, 보이지 않는 먼 미래의 근원을 외면하고 무시한 채, 인류의 정신세계를 이끌어간 나라나 백성은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